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5 :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서울대 선정 문학고전 15
한종천 그림, 최윤정 글, 손영운 기획, 마르셀 프루스트 원작 / 채우리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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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y Review MDCCLXIII / 채우리 17번째 리뷰]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만큼 읽기 힘든 책도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읽기 힘든 책이라고해서 '완독'했을 때의 기쁨이 생각만큼 크지 않은 책이라는 사실도, 이 책을 '유명'하게 만드는데 한몫 단단히 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이른바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는 [신심리주의 소설]들이 대개 그런 유의 책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았다면, 이런 '재미없는 책들을 피해서 골라 읽는 재능'을 얼마든지 발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유의 책들이 [서울대 선정 필독서]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오는 것일까? 얼마전에는 <민음사>에서 13권의 책으로 '분권'해서 출간되기도 했다. 보통 6~7권의 책으로 출간되곤 하는데, 아예 '한 권의 분량'마저 둘로 쪼개서 '읽는 부담'은 낮추고, '구매 부담'은 대폭 올리는 마케팅 전략을 썼으니 참으로 영특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면 이렇게나 재미없는 책인데도 막상 '완독'하고 나면 뭔가 '긴 여운'이 남는 책이기 때문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주제의식'은 스노비즘이다. '스노비즘'은 고상한 체하는 속물근성, 즉 '속물주의'를 말하는데, 자신이나 다른 사람들을 '출신'이나 '학벌'로 평가하고, 또 그런 평가를 공개적으로 떠벌리는 것을 즐기는 일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허세' 가득한 사람들을 지칭할 때 쓰는 말이다. 이 책의 시대적 배경이 되는 19세기 프랑스 파리의 '살롱 세계'속에서 수많은 등장인물들이 서로 알게 모르게 이러한 '스노비즘'에 물들어 있고, 작가인 프루스트는 이러한 사람들을 은근 슬쩍 비판을 하고 있기에, 소설 속 주인공인 '마르셀'의 고뇌가 이러한 '스노비즘'을 본능적으로 싫어하면서도 정작 마르셀 자신도 '게르망트 집안 사람(프랑스 귀족의 거물, 황족과 혈연관계에 있기 때문에)'과 어울리길 바라는 '속물적인 근성'을 가지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주제는 '동성애'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의 상당수가 바로 '동성애'에 빠져 있다. 그래서 진정한 사랑고백을 하기에도 망설이고, 고백을 받은 뒤에도 갈등하는 까닭이 바로 '밝히기 힘든(커밍아웃) 까닭' 때문에 오랜 번민에 빠져들곤 한다. 사실 '동성애'를 비롯한 소수자에 대한 맹목적이고 일방적인 '비난'을 하고픈 마음은 없다. 누가 누구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감정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동성애는 '비정상'이고, 이성애는 '정상'이라는 편견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일방적인 짝사랑을 하면서 '원치 않는 상대'를 강압적이고 폭력적으로 '소유'하려든다면, 그건 '나쁜짓'을 넘어 '범죄'다. 이 소설에서 마르셀이 침대에 누워 있는 알베르틴에게 사랑한다면서 덮치는(?) 장면이 바로 그렇다. 아무리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으로 저지른 일이라 하더라도 상대가 거부하는데도 그래선 안 된다. 이를 테면, 담배를 피는 것은 '개인적인 취향'인지라 누가 피우든 말든 가타부타 상관할 일이 아니지만, 상대가 '담배 연기'나 '담배 냄새'가 싫다는데도 담배를 강요하거나 담배연기를 내뿜고 담배냄새를 풀풀 풍기고 다닌다면 '기본적인 예의'가 없다는 것과 마찬가지 일 것이다. 그렇기에 '이성애자'인 마르셀이 '동성애자'인 알베르틴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하자고 강압하는 것은 19세기 시대에는 '사랑의 표현'일지 몰라도 오늘날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고, 철컹철컹 해야 한다.

  암튼, 이런 '스노비즘'과 '동성애 코드'를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라는 진정한 주제인 '시간'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의 첫 부분에 마르셀의 꿈은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마르셀은 '의식의 흐름에 따라' 어린 시절을 회상하게 되는데, 장장 7권의 분량이 모두 '마르셀의 회상'이라고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때문에 읽다가 지루해서 책을 집어던지는 독자들도 꽤나 많을 것이다. 그런데도 꾹 참고 읽어나가면 끄트머리에 가서 '마르셀'이 소설을 선뜻 집필하지 못하는 까닭을 발견하게 된다. 그건 바로 '부담감' 때문이었다. 마치 '완벽주의자'처럼 완성된 문장으로 능숙하게 표현하지 못하는 자신의 필력을 안타까워만 한 까닭에 '단 한 문장'도 쓰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우연히 읽게 된 '콩쿠르 형제'의 소설을 접하고서, 필요 이상으로 '부담감'을 느낄 까닭이 전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드디어 자신이 바라던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미 자신은 '나이' 들어버렸고, '천식'이라는 질병을 앓고 있었으며, 마르셀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이 별로 많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서둘러 쓰여지는 '손 안의 펜'을 빠르게 놀리며 불안해 한다. 그동안 헛되이 써서 '잃어버린 시간'들이 다시는 되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말이다.

  우리에게 '잃어버린 시간'은 무얼 뜻할까?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이른 시기'라는 격언도 있지만, 우리는 대부분 시간을 헛되이 '낭비'하며 살아간다. 아무런 목표도 없이 허송세월하기도 하며, 부지런히 재능을 갈고 닦아야 할 '학창시절'에도 열심히 공부하기는커녕 '게임과 릴스'로 시간을 죽이는 일이 비일비재하기 때문이다. 그러고서는 뒤늦게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모자란 시간'을 탓하며 허겁지겁 대충 벼락치기로 인생의 중대사들을 대충 떼우고 말았으면서도 '좋은 결과'만을 바라는 일을 늘 되풀이 하곤 한다. 그럴 때마다 우리는 '시간을 잃어버렸다'고 안타까워 한다. 정말 그럴까? 우리는 하릴없이 '심각'하게 생각하며 늘 긴장된 상태로 '스트레스'를 숙명처럼 받아들이고 살아간다. 그렇게 자신을 혹사시키지 못해 늘 죄인처럼 살아간단 말이다. 그렇게나 큰 죄를 짓고 살아가는 것일까? 우리가 말이다.

  '좋음'과 '나쁨'은 둘 이상을 견주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이다. 빗대어 말하자면, '악당'이 있어야 '정의의 영웅'이 돋보이는 법이다. 만약 '악당'만 있는 세상에선 그들의 행동이 '나쁜짓'이라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모두가 크고 작게 '나쁜짓'을 하며 살아가는 세상인데 그게 왜 '나쁜짓'이며, '나쁜짓'인줄 어떻게 알겠느냔 말이다. 착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악당'이 하는 짓이 나빠보이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에서도 '시간낭비' 좀 해봐야 '시간'이 소중하단 걸 깨닫게 된다. '시간낭비'를 해본 적도 없고, '시간'을 허투루 써본 적도 없으면서 어찌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단 말인가? 그런 의미에서 '워커홀릭(일중독자)'은 시간의 소중함을 알기에 시간을 알뜰하게 쓰는 사람이 아니다. 그저 '무엇'이라도 일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초조해지기 때문에 지쳐 쓰러지기 전까지 아무 생각도 없이 일만 할 따름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도 '건강'을 잃고 나서야 건강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것처럼, 허송세월 좀 해본 사람만이 '시간'의 소중함을 절실히 깨닫게 되는 것이다.

  마르셀이 뒤늦게나마 '집필'에 열정을 쏟으면서 '시간'의 소중함을 깨닫는 장면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작가인 프루스트는 이 책을 써서 '진정한 자아'를 찾길 바랐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이 찾아야 할 것은 꼭 '그것'이 아니어도 좋다. 마르셀은 '마들렌 한 조각'에서 유년의 추억을 끄집어내고 그것을 통해 '집필(마르셀의 꿈)의 원동력'을 찾아냈지만, 모든 독자들이 '집필'이 최종 목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저 자신에게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회상'하는 방법을 터득하면 족할 것이다. 아니면 '영감'을 떠올리던지 말이다. 작가 프루스트는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외부 세계'가 아닌 우리 안에 잠재되어 있는 '내면 세계'에 있다고 귀띔해준다. 우리의 미래가 저 먼 '바깥'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가까운 '속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반드시 무엇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해주고 있단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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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영웅전 6 - 전진칠자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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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I / 김영사 28번째 리뷰] 앞서 <사조영웅전>의 주제는 '영웅이란 무엇인가?'라고 밝혔었다. 그런데 그 영웅은 바로 '곽정'이라는 생각이 부쩍 든다. 왜냐면 이야기가 이어가면 갈수록 '곽정의 무공'은 하루가 다르게 실력을 뛰어넘기 때문이다. 1권에서 갓 등장했을 때만해도 곽정은 머리가 아둔해서 '하나'를 가르쳐도 겨우 '하나'를 알까말까 할 정도로 심각한 둔재였다. 그나마 인성은 바른 편이어서 남을 속일 줄 모르는 순박함에, 해야 할 일을 주면 무슨 일이 있어도 해내는 성실함이 유일한 장점일 정도였다. 그런데 그 '우직함'이 바로 '영웅의 제1조건'이었던 셈이다. 모름지기 영웅이라함은 '남다른 면모'를 갖춰야 하는데, 가장 무서운 영웅이 바로 '한 우물만 파는' 집중력을 발휘해서 끝내 해내고야 마는 성향을 지닌 사람인 것이다. 곽정이 꼭 그런 사람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것은 그렇게 '실력'을 갖추게 되자 가르쳐주지 않아서 스스로 깨우치는 경지에까지 다다르게 된 것이다. 그래서 원래 아둔한 머리였는데도 '안목'을 트는 순간부터 그간 배웠던 것들의 '이치'를 바로바로 깨우쳐서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결국은 '최고의 실력자'로 우뚝 서게 된 셈이다. 이렇게 우직하게 성취를 이룬 사람은 남을 잘 가르치지는 못해도 '자기 자신'을 수양하는데에는 더할나위 없이 최고를 지양하는 까닭에 웬만한 사람은 이런 사람 앞에서 명함도 내밀지 못하는 '진정한 능력자'가 되고 만다. 이를 두고 '영웅'이라 일컫지 않는다면 누굴 영웅이라 할 수 있겠냔 말이다.

  물론, '영웅'이 제 실력만 갖춘다고 해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갖춘 뛰어난 능력을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쓴다면 어찌 영웅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그런데 곽정은 그 능력을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서 아낌없이 쓴다. 가깝게는 자신을 길러준 부모와 사부님들을 위해서 '보은'을 하고, 진정한 사랑인 '황용'을 위해서 타는 불속, 끓는 물속이라도 뛰어들기를 망설이지 않고, 나아가 조국의 안위와 백성들의 안녕을 위해서 제 한 목숨을 아낌없이 내놓으니, 곽정을 '영웅'이라 부르지 않는 것이 어색할 지경이다. 그렇기에 <사조영웅전>의 '영웅 후보'로 곽정을 꼽는 것은 당연지사일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곽정은 10대 소년에 불과하니 좀더 지켜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영웅 후보들도 비교하면서 생각해봐야 하겠다.

  6권의 주된 줄거리는 '황용'이 개방파의 방주가 된 사연이다. 앞선 이야기는 홍칠공이 구양봉에게 독수를 당해 무공을 모두 잃게 되었는데, 그 때문에 황용에게 방주의 상징인 '녹죽봉'을 건내주며 대대로 오직 방주에게만 전하는 '타구봉법'이란 무공을 전수해주며 개방파를 부탁한다. 그뒤에 곽정과 황용은 주백통을 만나 홍칠공과 함께 섬(명하도)에서 탈출하여 황궁으로 향하는데, 목숨이 경각에 다달은 홍칠공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서다. 그 소원이란 황궁에서만 맛볼 수 있는 음식을 먹어보는 것이었는데, 마침맞게 <무목유서>의 행방을 쫓던 완안홍열 일행과 마주치게 되면서 곽정이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래서 <구음진경> 속에 적혀 있던 치료법을 이용해 다친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둘만의 공간'에서 7일낮 7일밤 동안 치료에 전념하게 되는데, 그 사이에 온갖 등장인물들이 나타나 '곽정'을 찾아헤매는 장면이 연출되며 이야기를 급반전 시켜버리게 된다.

  어찌어찌 곽정이 무사히 부상치료를 마치고서 '거지들의 집회'에 참여하기 위해 곽정과 황용은 악양으로 향했다. 그런데 이제 막 '새로운 방주'를 뽑는 행사가 치뤄질 상황에서 곽정과 황용은 정신을 잃고 쓰려져 버리게 된다. 그 사이에 황용이 잃어버린 '녹죽봉'을 차지한 양강이 새로운 방주로 오르게 되고, 마침맞게 개방의 모임에 참석한 '철장방의 방주' 구천인이 등장해서 금나라를 위해 개방의 힘이 필요하다는 요구를 하자 양강은 덜컥 수락하고 만 것이다. 송나라의 북쪽 지역을 금나라에 쉬이 빼앗기고도, 금나라가 남송까지 병력을 밀고 내려가지 못하는 까닭이 금나라에 남아 있던 '(한족)거지들'이 수시로 방해를 한 덕분이었는데, 그런 개방이 졸지에 '금나라의 앞잡이'가 되어 방주가 앞장 서서 송나라의 멸망을 위해 힘을 쓰겠다고 하니 수많은 거지들이 어리둥절해하기도 하고, 분노에 치를 떨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런 어지러움을 틈타 황용은 실력을 발휘하여 양강에게 빼앗겼던 '녹죽봉'도 되찾고 개방의 4대장로와 무공실력을 겨루면서 진정한 '개방의 방주'로 인정받게 된다. 거지들도 처음에서 예쁘장하게 생긴 10대 소녀가 방주라고 주장하는 말을 믿지 못했지만, 방주에게만 전해진다는 '타구봉법'을 시전하는 황용을 보면서 새로운 방주로 인정하게 된다.

  이로써 곽정과 황용은 각각 <구음진경>을 익힌 절정의 고수로 거듭나고, 천하의 거지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진충보국'의 기치를 들어 구국의 영웅으로 한발짝 다가 서게 된다. 그런데 그만 황용이 철장방의 방주 구천인의 철장에 맞아 '3일 안에 목숨'을 잃게 되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겪게 되고, 곽정은 황용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남제'를 찾아나서게 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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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원전 완역판 8 : 도남
요시카와 에이지 엮음, 바른번역 옮김, 나관중 원작 / 코너스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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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I / 코너스톤 9번째 리뷰] 유비는 형주를 얻고 촉나라를 취하기 위해 '입촉'을 서둘렀다. 마침맞게 장송이 찾아와 손수 만든 '촉 지역의 지도'를 유비에게 건내주었고, 방통까지 합류하게 된 유비일행은 드디어 '천하삼분지계'를 완성하러 유장이 다스리는 촉으로 진군하였다. 이때 유비의 나이가 쉰이 넘었다. 조조는 그보다 나이가 더 많았으나 일찌감치 천자를 끼고 승상의 지위를 누리며 성공을 누렸고, 손권은 풍요로운 강동의 이로움을 바탕으로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이 일군 나라를 비교적 어린 나이에 다스리며 군주로서 모자람이 없었다. 허나 유비는 나이 오십을 넘기고서 겨우 자신의 영지를 갖게 된 것이다. 물론 로마의 종신독재관(사실상 황제) 자리에 오른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도 마흔이 되어서야 관직에 오를 수 있었고, 쉰이 넘어서야 '일인자'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으니, 유비가 못난 사람이라고 평가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유비가 좀더 야심차게 욕심을 부렸다면 유표가 죽고 난 뒤에 '형주 일대'를 물려받아 조조의 남하를 양양성이라는 굳건한 성벽에 기대어 '적벽대전'을 치루고 난 뒤에 보다 안정적으로 촉 지역을 취하면서 '천하삼분지계'를 구축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엎어치나 메치나 유비가 '형주'를 취하고, '촉'을 꿀꺽한 것은 매한가지였을 테지만, 적벽대전 당시 아무런 '연고'도 없이 오나라에 '형주'를 빌리는 형식을 취한 것이 끝내 유관장 삼형제가 줄줄이 죽임을 당하는 불우한 일을 치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역사의 결과'를 이미 알고 있는 독자들로서는 유비가 좀더 야욕을 부리며 '명분'보다 '실리'를 챙기는 현명함을 발휘했으면 어땠을까 싶은 심정인 것이다. 허나 만약 그랬다면 <삼국지연의>의 독자들은 유비에게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촉한정통론'이라는 것도 애초에 발생하지 않았을 테고 말이다. 그저 혼란스런 시대를 살아가며 '평범한 야심가들'에 의해 천하가 어지러웠을 뿐이라고 이 시대를 평가하고 말았을 것이다. 독자들이 유비에게 이토록 애착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유비에게 '덕치'라는 명분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조나 손권은 엄연히 '한나라의 신하'였기 때문에 이들이 스스로 '왕'이나 '황제'를 칭하는 것은 찬탈이자 역모다. 그러나 '한 황실의 종친'이었던 유비(물론 신빙성이 낮긴 하지만)는 '한나라를 정상을 되돌릴' 의무이자 권리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유비는 자신의 영지를 차지하기 위해서 '야심'을 드러내지 않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는 '느림보 작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다. 또 그것이 '유비'에게 딱 어울리는 방식이었고 말이다.

  이런 유비의 '느린 행보'가 오히려 백성들에겐 환영받을 일이었다. 나라가 아무리 부강하더라도 하루가 멀다하고 '전장터'로 끌려갈까 두려움에 떨고, '전쟁물자'를 대기위해 그간 모아놓은 재산을 빼앗길까 불안해하는 조조와 손권쪽 백성들은 삶이 고달펐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마땅한 영지도 없는 '유비의 편'을 드는 백성들이라고 두려움과 불안함이 없을 순 없었다. 하지만 똑같이 빼앗긴다 하더라도 신분이 천한 자신들을 위해 '선정'을 베풀려는 따뜻한 마음씨를 지녔다는 유비에게 빼앗기는 편이 덜 억울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자신들을 지켜주기 위해 조조와 손권과 맞서 싸워준다고 하니 고마운 마음까지 들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도 '승리하고 성공한 사람'에게나 내어줄 수 있는 호평이다. 덕치를 하며 선정을 베풀다가 '야만인'들에게 짓밟히고 패망한 다음에 '착한 사람이었어'라는 평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유비는 당시에는 별볼 일 없는 사람으로 평가 받다가 '명나라, 나관중'이라는 '시대와 사람'을 만난 뒤에야 겨우 호평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한편, 이야기로 되돌아와서, 유비에게 제갈량과 방통이라는 두 날개가 생겼다. 적벽대전에서 제갈량은 유비를 위해 손권에게 달려가 '주유'를 도발시켜 조조와 싸우도록 부추겼고, 방통은 유비를 위해 조조에게 달려가 '연환계'를 써서 효과적으로 패배할 수 있도록 부추겼다. 그리고 와룡과 봉추는 유비의 품에 들어왔다. 만약 유비가 좀더 현명한 군주였고, 사람을 다루는 능력이 조금만 더 뛰어났더라면 촉을 취하고 난 뒤에도 제갈량과 방통을 적절히 써먹으며 '형주와 한중'이라는 두 요충지를 효율적으로 다스리며 조조를 톡톡히 괴롭힐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유비는 '입촉 과정'에서 방통을 잃고 만다. 유비는 이미 실력이 '증명'된 제갈량을 우대하고, 아직 실력을 '검증'하지 못한 방통에게는 소홀히 했던 것이다. 굉장히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아직 '입지'를 굳히지 못한 군주라면 사람을 그렇게 다루면 안 되었다. 유비는 방통을 군사로 쓰면서도 끝없이 '제갈량의 지혜'를 끌어다 쓰길 좋아했고, 이것이 뛰어난 실력을 갖춘 방통으로 하여금 '초조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말았다. 달리 말해, '고용불안'에 시달렸던 셈이다. 이렇게 '고용불안'에 시달리게 되면 뛰어난 능력자라 하더라도 '성과'를 내기 위해 조급해지고, '대박'을 치기 위해 섣부른 모험을 하게 만들기 때문에 절대 금물이다. 유비는 뛰어난 능력자에게 '고용불안감'을 심어주어 큰 거 한 방을 노리게 만들었고, 그로 인해 '한 쪽 날개'를 영원히 잃어버리게 된다. 가뜩이나 인재가 부족한 유비에게 아주 큰 실책을 안겨준 셈이다.

  그로 인해 형주를 지키던 제갈량이 부랴부랴 '성도(촉지역 수도) 공략'을 위해 유비에게 달려갔고, 패배한 유비를 지키기 위해 장비와 조운까지 대동해서 입촉을 떠나게 되었다. 이것만 보아도 '방통'이 얼마나 실력이 뛰어난 인재인지 알 수 있다. 방통은 장비와 조운이 없이도 '입촉'할 수 있던 군사였고, 제갈량은 장비와 조운까지 대동해야 '입촉'할 수 있는 군사였던 셈이기 때문이다. 물론 결과적으론 방통은 '실패한 책략가'였지만 말이다. 암튼 이제 형주를 지키는 것은 '관우'뿐이었다. 힘과 지혜를 갖춘 용장임에 틀림없지만, 애초에 갖고 있는 지혜가 턱없이 부족한 탓에 '공격'에는 능한 장수지만 '수비'에는 그닥 효용을 발휘하지 못하는 장수가 유비의 목숨줄과도 같은 '형주땅'을 맡게 되었다. 그래서 제갈량은 관우에게 '지혜'를 빌려주며, 조조와는 맞서 싸우고, 손권과는 화친하라 일러주었건만 끝내 일을 그르치고 만다.

  유비와 합류한 제갈량은 기이한 '용병술'을 쓴다. 이전에도 곧잘 쓰던 방식이었지만, '황충'이라는 장수를 얻고 난 뒤에 아주 노골적으로 써먹기 시작한다. 바로 '충분히 승산있는 싸움'인데도 '승률 100%'로 끌어올리기 위해서 '배수진'을 쳐버리는 용병술이었다. '배수진'이란 뒤로 물러설 수 없게 만들어 죽을 힘을 다하게 만드는 진법인데, 늙은 황충에게 "당신은 늙었으니 전투에서 빠지라"고 말한 뒤에, 황충으로 하여금 "늙었음에도 젊은 장수들보다 더 실력이 뛰어남을 증명해보이겠소"라면서 "만약 지고 돌아온다면 목을 치시오"라는 필승의 각오를 확답으로 받고 난 뒤에 전장으로 내보내는 방식이다. 어찌 보면 제갈량은 장수를 아끼는 마음을 내보이면서 장수로 하여금 '죽을 각오'로 충성을 다하겠다는 열의를 보이게 만든 뒤에 승리를 거두는 지혜를 써먹은 셈이지만, 매번 이런 식이라서 문제였던 것이다. 이는 그만큼 '유비쪽에 인재'가 부족했던 탓이다. 형주 일대와 촉 지역을 차지하면서 '사람'을 많이 얻기도 했지만, 정작 '쓸만한 인재'가 턱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물론 평화로운 시대였다면 인재가 부족해도 걱정할 일이 없었겠지만, 상대적으로 일찌감치 터를 잡고 자신의 영지를 안정시키려 여러 방면에서 인재를 등용해 부렸던 조조와 손권에 비해서 '뒤늦게 터를 잡은' 유비에겐 그렇게 안정을 시킬 수 있는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람을 부리고, 사람을 써야 할 때마다 '적절한 인재'를 찾지 못해 애를 먹던 제갈량은 궁여지책으로 '부족한 인재들'로 애써 돌려막기를 했던 셈이다. 그래서 촉나라는 유관장 삼형제가 죽고 난 뒤에 그렇게 허망하게 패망하고 만 것이다. 물론 '유비의 아들(유선)'이 무능한 탓이 더욱 큰 원인이었겠지만...

  그럼에도 유비는 '입촉'에 성공하고, 새로 얻은 황충, 위연, 마초, 법정 등을 활용해서 '한중 공략'에 성공하고, 관우가 '형주 방어'에 성공하면서 탄탄하게 나라를 다지는 듯 싶었다. 한편, 위왕에 오른 조조는 '한중 방어'에 실패하면서 손권과 손을 잡고 '형주'를 취하고자 하는데, 그 과정에서 '장료의 활약'이 돋보이게 된다. 일찍이 조조는 적벽대전에서 패배한 뒤에 '강동 방어선'을 지키기 위해 장료를 남겨 두었다. 그리고 장료는 손권의 공격에도 끄떡하지 않고 버텼을 뿐만 아니라 '강동 공략'에 선봉을 서며 손권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준다. 이 때문에 오나라에서는 "장료가 온다(료~ 라이!)"라는 말이 두려움의 대명사였다고 한다. 우는 아이도 "료~라이"라는 말을 들으면 울음을 뚝 그칠 정도로 말이다. 그렇게 손권이 다스리는 오나라는 '장강'을 넘지 못하고 조조와도, 관우와도 '화친'과 '적대'를 선뜻 결정하지 못하고 뜸만 들이다 '노숙'이 죽고 만다. 유비와 손권이 서로 '화친'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죽었으니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 것인가?

  한편, 위왕에 오른 조조는 슬슬 후계자를 골라야 할 처지가 되었다. 첫째 '조비'와 셋째 '조식'이었다. 조조 마음에 쏙 드는 자식은 셋째였지만, 가후에게 후계구도를 묻자, 가후는 "원소와 유표를 떠올리십시오"라는 말로 조언을 대신했고, 조조도 그 말을 듣고 첫째 조비에게 왕세자의 자리를 물려준다. 그리고 드디어 '사마의'가 등장한다. 이제 한중을 놓고 제갈량과 한판 대결을 벌일 바로 그 사마의가 말이다. 이제 천하는 새롭게 짜여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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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고양이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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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X / 열린책들 10번째 리뷰] 아직 베르나르의 책을 모두 섭렵하지는 못했지만 다시 읽어보려 한다. 그의 대표작인 <개미>도 아직 읽어보지 않았기에 이번 기회에 접해보려고 한다. 그에 앞서 <고양이>, <문명>, <행성>을 연이어 도전하련다. 예전에 <고양이>를 접해보긴 했지만, '후속작'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고양이>도 다 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읽지 않은 이유는 별로 재미가 없었기 때문인데...초반에는 '암고양이의 잘난 척'만 한가득이었고, 나는 그런 고양이가 그닥 매력적(난 강아지를 더 좋아한다)으로 다가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양이>의 '뒷이야기'가 내 예상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다시 처음부터 읽게 된 것이다. 참, 미리 말하지만, 난 '베르나르 골수팬'도 아니다. 아직 <개미>도 읽지 않은 것도 그 때문이다.

  암튼, <고양이>에는 호기심 많은 암고양이가 등장한다. 특히 '종간 대화'를 꿈꾸는 발칙한 고양이다. 그리고 '인간 집사'를 자기가 기르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기도 하다. 고작 '반려동물' 주제에 인간을 하찮게 여기고, 서로 다른 종끼리도 '(고양이 중심의)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믿는 고양이라니...이런 내용이 뒤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라 여겨서 2권을 읽지도 않고 '재미 없는 책' 목록에 올려놔버렸던 것이다. 그런데 '뒷이야기'를 대략 살펴보니, 인간이 하찮게 보일 수밖에 없는 까닭이 있었다. 고양이의 눈에 비친 인간들의 행태(?)라는 것이 '시위'에서 '내전'으로 번지더니, 급기야 '전쟁'을 벌이며 스스로 절멸해버리는 선택을 하는 어리석은 종족으로 그려졌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벌이는 갈등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전쟁'의 원인이 무엇인지 알려지지 않은 상태로 인류는 스스로 무덤을 파는 끔찍한 전쟁을 일삼더니, 끝내 스스로 건설한 '문명'조차 말살해버리고 절멸해버린 것이다. 물론 '뒷이야기'다.

  <고양이 1권>에서는 고양이와 인류가 함께 한 역사에 대해서 주로 서술하였다. 애초에 인간은 고양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뭐 그런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이 농경생활을 하면서 애써 가꾼 곡식을 축내는 '쥐떼의 공격'에 항시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쥐벼룩'으로 인해서 인류를 초토화시켜버린 질병 '페스트'를 종식시키는데에도 '고양이'란 존재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소중한 고양이를 인간들은 '악마화'시키며 함부로 죽이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는데, 이 책의 주인공인 '바스테트(이집트 신화에 등장하는 고양이 모습을 한 여신의 이름)'가 경악을 하는 장면이 계속 나온다.

  작가인 베르나르는 왜 이런 식으로 서술을 했던 것일까? 아무래도 '고양이'를 무척 좋았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지구 종말'을 앞당기지 못해 안달복달하는 인류의 어리석음에 크게 실망했던 모양이다. 이 둘이 결합을 하니 '고양이'가 인간을 하찮게 보는 뉘앙스로 서사를 진행시켰을 것이다. 일면 공감되는 바다. 지구상에 살고 있는 생명체 가운데 '동족살해'를 서슴지 않고 하는 유일한 종이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하나 뿐인 지구'를 소중히 여기기는커녕 어떤 생명체도 살지 못하도록 황폐하게 파괴하는데 앞장 서고 있으니, 정말 어리석기 그지 없다. 여기까지 '공감'을 하게 되면 '피타고라스(샴고양이)'와 '바스테트'가 나누는 대화도 십분 공감할 수 있게 되었다.

  고양이끼리 나눈 대화가 무에 그리 대단할까 싶지만, '피타고라스'라는 숫고양이는 '제3의눈'이라는 장치를 통해 컴퓨터 인터넷망과 접속을 할 수 있고, 그렇게 접속을 하면서 '인류의 지혜'를 터득한 고양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낱 고양이 주제에 인간보다 더욱 인간다운 '고양이'가 되었다. 이렇게 똑똑한 고양이를 사랑하게 된 '바스테트'는 그를 통해서 온갖 지식을 배우게 되고, 그렇게 배운 지식을 활용해서 인간이 망가뜨린 지구를 구해낸다는 서사를 그려냈다. 물론 <고양이>에서 이어지는 '후속작'의 줄거리다. 그렇기에 본격적인 이야기는 <고양이 2권>에서 다루려 한다.

  그건 그렇고, 왜 주인공이 '암컷'일까? 베르나르는 인간이 지니고 있는 '성욕구'에 있어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우월하다는 견해를 가진 듯 싶다. 그의 작품 <타나토노트>에서도 영계에서 환생 보너스를 받는 마지막 장면에서 '성별'을 선택할 수 있었는데, 주인공은 남성의 삶을 선택하지 않고 여성의 삶을 택했다. 까닭은 '성적 쾌감'이 남성에 비해 여성이 훨씬 더 높다면서 말이다. 차라리 남성의 삶은 살아봤으니 여성의 삶을 살아보겠다고 했으면 깊이 공감했으련만, 왜 '쾌감'을 언급했던 것일까? 혹시 베르나르는 '성적 불만족'을 겪고 있는 건 아닐런지 합리적인 의심을 해본다. 어쨌든 남성보다 여성의 삶이 훨씬 더 낫다는 근거를 '제대로' 설득하지 못한 베르나르의 작품은 앞으로도 깊이 공감대를 끌어내지 못할 듯 싶어 아쉽다. 혹시나 <개미>에서도 별볼일 없는 수캐미를 통해 '짜친 남성의 삶'을 비유적으로 그려낸 것은 아닌지...만약 그렇다면, 도대체 왜 베르나르의 소설이 유독 한국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지 이해하지 못할 것 같다. 암튼 '전작'을 좀 읽어본 뒤에 결론을 내려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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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이 멈춘 순간 진짜 음악이 시작된다 - 플라톤부터 BTS까지, 음악 이면에 담긴 철학 세계 서가명강 시리즈 19
오희숙 지음 / 21세기북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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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y Review MDCCLIX / 21세기북스 23번째 리뷰] 나는 예술을 쥐뿔도 모른다. 마치 입에 달아야 삼키고 쓰면 뱉는 것처럼 '내 눈'에 아름다워야 아름답게 보이고, '내 귀'가 즐거워야 좋은 음악이라고 평하는 아마추어 중에 쌩~아마추어다. 그런 내가 '음악철학'에 관한 책을 손에 들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미학]이란 이런 것'이라고 아무리 설명해도 반에 반쯤 이해할까 말까 그랬다. 그런데 음악이 멈춰야 '진짜 음악'이 시작된다는 제목을 완독한 뒤에 다시 읽어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학창시절에는 따분하기만 한 '교과서'가 왜 좋은 줄 몰랐다가, 제자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보니 '교과서'만큼 좋은 책이 없다는 느낌이 새롭게 다가오는 것처럼 '좋은 음악'일수록 피날레를 장식한 뒤에 청중들의 환호와 박수 갈채가 쏟아지고, 그 환호와 갈채도 잦아들고 텅빈 객석에 앉아 홀로 남겨지고 나서야 '긴 여운'으로 감동이 밀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음악철학'은 들리지 않는 음악을 들으며 머리로 생각하는 '음악적 아름다움'에 대해서 논하는 학문이란 생각에 미치게 되었다. 그럼 '음악철학'이란 무엇일까?

  무술에 '음공(音功)이란 것이 있다. 영화 <쿵푸허슬>에서 장님악사가 반가부좌를 하고서 내공을 모아 거문고를 튕기니 소리가 창칼이 되어 상대의 목숨을 앗아가는 등 치명상을 입히는 무서운 무공이었다. 이때 '무형'의 음공에 맞서 '유형'의 무기를 든 무술고수는 하나같이 목숨을 잃고 말았는데, '무형'의 음공에 맞서 '무형'의 사자후를 토해내니 '내공의 차이'만큼 혼쭐이 나고선 부리나케 도망가는 장면을 볼 수 있다. 이처럼 '무형'의 것을 '유형'의 무엇으로 표현해서 '무형의 가치'를 새롭게 창출해내는 것이 '음악철학'이라는 생각을 했더랬다. 아닌 게 아니라, 좋은 음악은 들은 뒤에 '무언가'를 분명히 느낀다. 그것을 무어라 콕 집어서 표현할 깜냥이 부족하기에 이렇게 표현해보았다. 사실 음악의 신동 모차르트가 '대위법'으로 음악을 한 단계 끌어올렸고, 음악의 천재 베토벤이 '불멸의 교향곡'을 만들어내며 음악의 정점을 찍었다는 식의 설명은 들어도 무슨 소린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음악을 들으면 '감정'이 느껴진다는 이 책의 첫 소절은 단박에 이해할 수 있었다. 음악의 이 소절에서는 '기쁨'이 느껴지고, 저 소절에서는 '설렘'이 느껴지며, 마지막 클라이맥스에서는 '환희'가 느껴지면서, 음악의 전체적인 주제는 '첫사랑'이었다는 식으로 이해를 하려니 음악이 쉽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그렇게 음악을 통해 인간의 '감정'을 사로잡기 시작한 음악이 점점 복잡해지면서 '음의 대화'를 시도하게 되었다는 점도 신기했다. 마침맞게 하지은의 소설 <얼음나무 숲>에서 음악 신동 아나토제 바엘이 자신이 켜는 바이올린으로 청중들과 '음의 대화'를 시도했다는 소재를 접했기에 어렵지 않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음의 대화'를 시도한들 '인간의 언어'처럼 명확하고 객관적인 전달은 할 수가 없었단다. 왜냐면 '소리'는 듣는 사람의 '경험'과 '사상(생각)'에 따라 주관적인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쁨'과 '슬픔'처럼 단편적인 의미(감정)은 전달할 수 있을지언정 '분에 넘치는 기쁨'이나 '달콤한 슬픔' 같은 복잡한 언어의 기능을 단지 '음악'으로만 표현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 사실이기 때문이란다. 그래서 '표제음악'으로 점참 발달했단다. 다름 아니라 '제목'이 없던 악보에 '제목'을 붙여서 음악의 전체적인 주제가 잘 드러나게 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비발디의 <사계>를 들으면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계절적 변화'를 보다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청중들이 '제목'을 먼저 들었기에 더욱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었을 것이고, 미처 '제목'을 알지 못했더라도 봄에 꽃이 피고, 가을에 낙엽이 지며, 여름에 활기찬 기운과 겨울에 쓸씀한 감정을 어렴풋이 느꼈다가 '제목'을 듣는 순간, 무릎을 탁 치며 옳다고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슈베르트의 <송어>도 물고기가 헤엄치는 역동적인 움직임을 '소리'로 표현해내고 있음을 확연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음악에서 '감정'을 느끼게 되면서 음악은 우리의 삶을 표현하기 시작했고, 진리를 탐구하듯 세상의 본질을 '음악적으로 구현'하려드는 경향을 선보이게 되었고, 더 나아가 '진보적인 음악'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를 그려나가는 등 음악이 표현하지 못할 것은 아무 것도 없는 것처럼 다양하게 연주되기 시작했단다. 책의 내용이 '걸음마'를 시작한 뒤에 곧바로 '하늘을 나는 듯'한 심한 비약을 담고 있다고 오해할 정도로 '축약'해버리고 말았지만, 내 음악적 소양이 이 정도밖에 되지 못해 더는 표현할 길이 없다는 점을 감안해주었으면 좋겠다. 쉽게 말해보자면, 음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이 무궁무진하며, 그렇기에 '사회비판적인 메시지'조차 음악으로 전달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다시 말해, 니체나 쇼펜하우어처럼 음악을 철학적으로 승화시켰고, BTS는 <봄날>을 발표하며 '세월호'에 대한 마음을 리얼리즘 예술로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80년대 '노래를 찾는 사람들'이 발표한 <사계>처럼 당시의 사회상을 음악이 얼마든지 반영할 수 있고, '미싱은 잘도 도네 돌아가네'라는 가사처럼 엄혹한 사회속에서 민중들의 삶이 얼마나 피폐했는지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 책의 마무리는 'AI 작곡'과 '크로스오버(이질적인 장르가 서로 합해져서 만들어진 음악)'으로 주제를 열어내며 '음악적 표현에 한계는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간이 만든 음악보다 더 훌륭한 음악을 만든 '인공지능(AI)'의 등장은 향후 음악계에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가? 아니 그 음악을 '창작'이라고 인정할 수 있을까? 라는 원론적인 비판부터, AI가 만든 음악이 너무 듣기 좋은데도 절대로 들으면 안 되는 것인가? 만약 들어도 된다면, '음원 수익'은 누가 가져야 하는가? 그렇게 '3분 창작'으로 수익을 내는 시장이 형성된다면, 과연 누가 힘들게 '고된 창작 예술'에 뛰어들겠는가? 그렇다면 '모방'밖에 할 줄 모르는 AI 작곡 때문에 음악은 쇠퇴하게 될 것이라는 끔찍한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한편, 대표적 '크로스오버'의 예로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를 선보였다. 동양과 서양을 한데 어우어지게 만든 <범 내려온다>는 요즘 말로 너무나도 '힙하다'. 이른바 전통 판소리에 팝음악을 접목시켜, 앰비규어스댄스 팀의 파격적인 춤까지 합치게 되니, 그 '시너지 효과'는 엄청났다는 것이다. 전통과 현대가 한데 어울어지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면서, 이른바 'K-흥'이 전세계적으로 통한다는 것도 실감하였다. 이는 전통이라는 '익숙함'에 현대가 주목하는 '신선함'을 접목한 순간이기도 하다. 이처럼 '익숙한데 새로운 것'은 앞으로 음악이 나아갈 길이라는 말로 끝맺음을 하였다.

  예술은 늘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조금이라도 낡은 것은 쉬이 도태되고, 대중을 사로잡지 못한 진부함은 외면받기 일쑤다. 그만큼 어렵고 힘든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 예술에 '철학'까지 담으려한 이 책이 주는 신선함은 대단히 매력적이었다. 물론 '음악철학(미학)'이 새로운 장르는 아니란다. 서양음악 쪽에선 아주 오래전서부터 시도되었고, 한국 음악계에서는 19세기 말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면서 '사실상' 시작된 셈이다. 한국 음악이 '동양적 철학사상'에 '서양적 철학사상'까지 합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지금, 전세계는 'BTS'와 '이날치' 등 한국음악에 심취하고 있다. 그렇게 다시 '한국음악'이 서양음악계에 '크로스오버' 되면서 더욱 다양한 시도를 선보일 것이 틀림없다. 학문이 이렇듯 '쉼'없이 새로움을 추구한다니, 익히 알고 있었으나 새삼 '음악, 또한 그렇다'는 사실을 깨닫고서 살짝 심취할 수 있었다. 물론 내 귀는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내는 수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겠지만, 음악이 멈춘 다음 '글'로써나마 음악철학의 지평을 넓혀 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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