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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ㅣ 생각하는 힘 : 진형준 교수의 세계문학컬렉션 1
호메로스 지음, 진형준 옮김 / 살림 / 2017년 9월
평점 :
<일리아스>는 그리스와 트로이 사이에 벌어진 전쟁을 이야기한 '서사시환(敍事詩環: 서사시를 모아 이야기 순서대로 모은 것)' 중 두 번째 작품이다. 순서대로 제목을 나열하면, <퀴프리아>(스타시노스), <일리아스>(호메로스), <아이티오피스>(아르크티노스), <소 일리아스>(레스체스), <일리오스의 함락>(아르크티노스), <귀향>(아기아스 또는 에우멜노스), <오디세이아>(호메로스), <텔레고네이아>(에우감몬) 순이다. 따라서 전체적인 이야기는 '파리스의 심판'으로부터 시작해서 '오디세우스의 이타케 귀환'까지 이어졌기에 전반적인 서사는 대부분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이다. 그렇지만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단편적인 내용만 남아 있기 때문에 나머지 작가의 이야기들마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같이' 수록되어 널리 읽히는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 까닭으로 <일리아스>의 시작과 끝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정확하게 모르는 독자들이 훨씬 많을 것인데, 정확히 짚어보자면, '트로이 전쟁'이 발발한 지 9년이 지나고 '아킬레우스'가 아가멤논에 의해 분노로 시작해서 트로이의 명장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11일동안 장례식이 치뤄지는 것으로 <일리아스>는 막을 내린다. 너무나도 유명하고 '트로이 전쟁의 발발 원인'으로 꼽히는 '파리스의 심판'은 <일리아스>의 앞의 이야기에 해당하고, 더 유명한 '트로이의 목마'가 등장하고 그리스연합군의 승리는 <일리아스>의 이야기가 끝나고, 아킬레우스가 아킬레스건에 화살을 맞아 죽고 난 뒤에 벌어지는 이야기들이다. 따라서 <일리아스>의 핵심적인 내용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시작해서 분을 삭히는 내용까지인 셈이다.
그래서 <일리아스>의 주인공은 단연 '아킬레우스'이고, 그가 '분노'한 까닭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작품을 정확히 해석할 수 있는 단초가 된다. 그럼 아킬레우스는 왜 분노하였는가? 그 까닭은 그리스 총사령관인 아가멤논이 무능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트로이를 공격한 지도 어언 9년에 이를 정도로 전황은 지지부진했다. 그럼에도 아가멤논은 총사령관이라는 이유만으로 '전리품'을 독차지할 생각만 앞세우고, 총사령관인데도 전쟁을 승리할 계책 따위조차 변변히 내놓지 못하는 무능함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전황이 그리스 쪽으로 우세했던 것도 오직 '아킬레우스' 덕분이었을 뿐이다. 그런 상황인데도 아가멤논은 전황이 불리하니 '신의 노여움(아폴론의 분노)'을 풀기 위해 아폴론 신전의 신녀를 풀어주라는 장수들의 건의에 호탕하게 '자기몫'을 내놓기는커녕 내놓은만큼 '자기몫'을 챙기기 위해 아킬레우스의 몫이었던 '브리세이아'를 자기가 차지하겠다고 선언해버린다. 이에 아킬레우스는 자기몫의 전리품도 잃고, 정정당당하게 차지한 전리품을 빼앗기는 명예도 잃고, 사랑하던 여인까지 빼앗기는 상황이 벌어지자 극도로 분노를 하고 '전장'에서 빠져 더는 '전투'에 참전하지 않겠다고 폭탄선언을 해버린다. 그럼에도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달래기는커녕 자기몫을 챙기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어버린다.
이렇게 그리스군의 핵심이었던 '무적의 아킬레우스'가 전장에서 빠져버리자 전황은 역전되어 트로이군이 우세하게 된다. 하지만 그리스를 편드는 신들의 장난에 의해 그리스군도 녹록치 않은 실력을 과시하며 트로이를 밀어붙이게 된다. 이때 파리스가 성난 그리스군을 상대로 '일대일 대결'을 요청하니, 파리스에게 헬레네를 빼앗긴 메넬라오스가 그 대결에 응하면서 잠시 대치상태를 만들게 되었다. 허나 파리스는 애초에 메넬라오스의 상대가 될 재목이 아니었다. 그래서 창 한 자루 던지는 것으로 대결은 메넬라오스의 승리로 끝났고, 파리스는 메넬라오스의 칼에 곧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러자 애초에 트로이의 편을 들었던 여신 아프로디테가 파리스를 바람같이 낚아채서 헬레네가 있는 침실로 날려보낸다. 그리고 파리스는 헬레네와 사랑을 나누고, 메넬라오스는 눈 앞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파리스를 겁쟁이, 비겁자라고 놀리면서 총공격의 선봉에 서니 트로이는 속수무책으로 성벽 앞까지 밀리고 만다.
여기서 '신들의 참견'을 잠시 언급해보자. 그리스와 트로이가 전쟁을 벌이는 대서사시에 신들도 편을 갈라 양측을 응원할 뿐만 아니라 '참견'까지 하며 전쟁의 향방을 바꾸는데 열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그리스를 편드는 신들은 헤라와 아테나를 필두로 포세이돈(헤라 오빠니까), 헤파이스토스(헤라가 엄마니까), 테티스(주인공 아킬레우스의 엄마니까) 등이고, 트로이를 편드는 신들은 아프로디테(파리스가 황금사과 찜콩했으니까)를 필두로, 아레스(아프로디테의 불륜남이니까), 아폴론(그리스군이 자신의 신전을 탈탈 털어 훔쳐갔으니까), 아르테미스(아폴론 동생이니까) 등등이 아주 시기적절하게 등장해서 전쟁을 북돋우고, 살육을 부추기며, 아주 지랄찬란하게 10년 동안 인간들을 갈갈 해버린다. 하지만 애초에 '트로이 전쟁'을 계획한 것은 신들의 왕인 '제우스'였다. 제우스가 맘 먹은대로, 테티스의 아들인 아킬레우스의 이름이 영원토록 빛날 수 있도록 전쟁을 일으키고 조율했으며, 애초부터 트로이는 이 전쟁으로 멸망할 수밖에 없는 결말을 정해놓았으며, 비록 그리스가 승리를 거뒀을지라도 결코 손쉽게 이기지는 못하도록 10년 동안 수많은 영웅들이 참전하고 비명횡사하도록 안배해놓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제우스 이외의 다른 신들은 '보조출연'일 뿐이고, 그런 신들이 열일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것도 모두 '제우스'가 일찍부터 정해놓은 수순이었을 뿐이었다.
그렇다. '트로이 전쟁'은 또 다른 이름으로 '신들의 전쟁'이었던 것이다. 올림푸스에 오른 신들이 두 차례에 큰 위기인 '티타노마키아'와 '기간토마키아'를 극복한 뒤에 저들끼리 단단히 서열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한 판 승부를 치룰 수밖에 없었는데, 불사의 몸을 지닌 신들이 싸워봤자 승패를 가룰 수 없는 일이기에 신들을 숭배하는 '인간'으로 하여금 신들의 전쟁을 대신 치르도록 안배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왜냐면 인간들은 '필멸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차피 '죽을 목숨'이기에 신들이 안배해놓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시험삼아 '대리전'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신들의 대리전일 뿐이었던 '트로이 전쟁'으로 인해 이름을 길이길이 남긴 것은 '필멸의 존재'였던 인간들의 몫이었다. 무적의 용사 아킬레우스, 지혜보따리 오디세우스, 그리고 조국을 지키다 스러진 영웅 헥토르, 그리고 세계 최고의 미녀 헬레네 등등 이름만 들어도 그들의 업적이 줄줄 흘러 나올 정도로 유명해졌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들을 싸움에 휘말리게 만들었던 '신들의 이름'은 기억조차 나지 않게 되고 말았다. 바야흐로 '신들의 시대'가 저물고 '인간의 시대'가 펼쳐지게 된 셈이다.
오늘날의 우리가 <일리아스>를 읽어야 할 필독서로 꼽는 이유는 고대인들이 감동했던 대목과는 사뭇 달라야 할 것이다. 고대인들은 '그들만의 영웅'이 전장의 꽃으로 산화하며 아름답고 처절하게 죽어가는 영웅적인 서사에 매료되어, 자신들도 전장에 나서면 그들처럼 용감히 싸우겠다고 다짐했을지 모르겠다. 허나 현대인들에게 <일리아스>는 그리 감동적이거나 격동적인 장면은 없을 것이다. 고작 전리품 하나 때문에 삐쳐서 전장에 나가지도 않고 동료 전우들을 죽음으로 내모는 아킬레우스가 어떻게 해서 '영웅'이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더구나 아무리 전쟁터에서 벌어진 일이라곤 하지만 적장 헥토르의 시신을 훼손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의 분풀이로 삼아 능욕을 저지르는 아킬레우스는 그저 미치광이에 불과할 따름이다. 어찌 이런 이야기에 감동 운운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니 오늘날의 독자가 이 책을 읽고서 느껴야 할 바는 '다른 곳'에서 찾아봐야 할 것이다.
그건 다름 아닌 '신 중심'에서 '인간 중심'으로 생각의 틀이 바뀌는 전환적인 시각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물론 기원전 12세기 즈음에 벌어진 전쟁을 기원전 8세기 즈음에 살던 작가가 써낸 고대의 서사라는 점에서 완전히 '신 중심'적인 사고방식을 벗어날 수는 없었으나, 현재의 독자들이 <일리아스>를 읽을 때에는 자연스레 '신 중심'적인 사고방식이 아닌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 읽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일리아스>를 신들이 정한 '운명'을 거슬러 저마다의 운명을 개척하려는 '인간의 의지'를 엿볼 수 있게 된다. 비록 고대 독자들의 눈에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적인 인간의 삶 때문에 더욱더 신을 경배하게 되었을지 몰라도, 현대의 독자들은 '정해진 운명' 따위는 없다는 관점으로 <일리아스>를 바라볼 수밖에 없게 만든다. 다시 말해, 아킬레우스는 비록 죽었을지언정 그의 영웅다운 용맹스러움을 배울 수 있으며, 헥토르도 비운의 죽음을 당하지만, 침공하는 적들과 맞서 조국을 수호하고, 백성을 지키며, 사랑하는 자신의 가족뿐만 아니라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전장에서 죽어가는 병사들의 가족들까지 염려하며 지키려는 진정한 수호자의 모습을 엿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10년 동안 벌어진 전쟁으로 모두가 죽고, 남겨진 것도, 얻은 것도 거의 없이, 오직 '허무'만 남게 되는 전쟁의 쓸모없음을 깨닫았으면 좋겠다. '트로이 전쟁'은 그리스 연합군의 승리로 끝을 맺고, 트로이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패망해버리고 만다. 그리고 남은 전리품과 인질들은 남김없이 그리스 참전장수들의 몫으로 분배된다. 전쟁의 원인으로 꼽혔던 '그리스 최고의 미녀 헬레네'도 원래의 남편이었던 메넬라오스에게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리고 극적으로 탈출한 아이네이아스 만이 후손을 남겨 '로마'를 건설하게 되었다고 베르길리우스가 노래했지만, 진위 여부는 여전히 논란중이다. 하지만 10년 전쟁으로 탕진한 것에 비한다면 초라한 승리였을 것이다. 이렇게 전쟁의 끝자락은 언제나 허무하다. 승자도 물론이거니와 패자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런데도 이렇게 무익한 전쟁을 끊임없이 벌이려고 하는 것일까? 고작 몇몇 사람들의 명예와 이득을 위해서 그토록 많은 인간들의 목숨이 제물로 바쳐져야 한단 말인가? 도대체 국가나 민족의 자존심이 무어 그리 대단하길래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을 제물로 바쳐야 한단 말이냐? 결국엔 '이름'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질 뿐인데 말이다.
이런대도 전쟁 운운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놈이 바로 '독재자'가 틀림없다. 그런 독재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전쟁을 지지하는 세력이 있다면 나라를 망칠 원흉이 틀림없으므로 반드시 솎아내길 바란다.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강력한 무기와 막강한 화력으로 속전속결로 밀어붙이면 이득만 남는 전쟁을 할 수 있다며 달콤한 유혹을 하는 놈들이 있다면, 그건 '무기매매상인'이 틀림없다. 한마디로 전쟁을 '돈벌이 수단'으로 여기는 골빈놈이니 주디를 꼬매뿌려도 무방하다. 절대로 '전쟁'은 아니 될 말이다. <일리아스>를 제대로 읽은 독자들이라면 '반전'은 상식일 것이다. '필멸의 존재'인 인간의 관점으로 읽으면 그렇게 읽을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