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의 철학을 한마디로 말하기에는 너무도 숭고한 면이 없지 않지만, 어줍잖은 내가 느끼기에는 '양심'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흔하디 흔한 '도덕적 미사여구'에 그럭저럭 모양새를 갖춘 '허례허식' 따위는 감히 입에 올릴 수도 없을 '칸트 철학'의 핵심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게 만들 맑고 깨끗한 양심에서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선한 행동을 한다고 하더라도 '칭찬'을 바라거나 '금전적 이득'을 챙기고 싶다는 마음가짐으로 행하였다면, 그것은 진정한 선함이 아니라고 말한 칸트는 '도덕'과 '윤리'라는 모호한 잣대를 자신의 양심을 '바로미터'로 삼는다면 절대적으로 타당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라 주장한 것만 봐도 짐작할 수 있다.
흔히 칸트철학 3부작은 <순수이성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비판>이라고 한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도 쉬이 읽을 수는 없다. 내용이 너무 어려운 탓도 있지만, 읽다보면 '칸트에 대한 존경심'에 우러러 보다가 도저히 쳐다볼 수 없을 지경에 다다른 탓이 더 클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칸트가 자신의 철학을 신념으로 삼고 머릿속으로만 정념을 품은 것이 아니라 행동 하나하나를 몸소 실천해 나갔다는 아는 순간 부끄러움이 샘솟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칸트'가 좀 싫다. 사람이 조금 빠지는 구석도 있고 빈틈도 보여야 '사람처럼' 보이기 마련인데, 거짓부렁도 일절 없이 언제나 올곧고 반듯한 모습만 보여주고 있으니 쫓아가기 너무 힘들기 때문이다. 감히 쫓아갈 생각이나 할 수 있을까? 흉내내는 것만으로도 이미 성인군자일텐데 말이다.
그래서 칸트철학을 어렵게만 생각하기에 앞서 쉽게 풀이하자면, 칸트 철학은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고, 무엇을 해야 하며, 무엇을 바랄 수 있는가?"라고 이야기해도 무방할 것이다. <순수이성비판>이 '순수한 앎'에 대한 철학을 다루었고, <실천이성비판>이 '도덕적 행동'에 대한 철학을, 마지막으로 <판단력비판>이 '생각(바람)하는 힘'에 대한 철학을 다루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칸트철학의 핵심은 "뭘 알게 되었으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고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꿀만한 이상을 펼쳐라"라는 것이라고 보아도 크게 틀린 내용은 없을 것이다. 칸트는 평생을 바쳐 '자신의 철학'을 몸소 실천한 '행동하는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따라서 칸트는 자신의 양심에 거리낄 것이 하나 없는 '순수, 그 자체'로 살아간 철학자이기에 그가 말하는 바를 쫓는 후학으로서 '절대불변의 진리'를 마주하는 듯한 느낌마저 들기에 감동할 수밖에 없기에, 그렇게 간추려 본 것이다.
그 가운데 <실천이성비판>은 그야말로 도덕적, 윤리적으로 '양심의 소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생각해보라.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양심'에 어긋나는 것이 하나도 없고, 그로 인해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으니, 세상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얼마나 당당하고 떳떳하겠느냔 말이다. 그런 '바른 행동'에 귀감을 받고 따라하는 이들이 생길테니, 상상만으로도 세상살이가 살맛 나지 않겠는가. 그런데 우리는 왜 칸트와 같이 당당하고 떳떳한 행동을 하지 않으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바른 행동'이 무엇인지 익히 알면서도 흐트러진 행동을 일삼곤 한다. 그건 다름 아니라 '바르게 행동하는 것'을 굉장히 억울해 하는 탓이다. 다시 말해, '바른 행동'을 하는 것을 어리숙하거나 답답한 사람으로 취급하기 일쑤고, 왠지 모르게 '손해'를 보는 것이라고 여기기 십상인 탓이다. 이를 테면, 길을 가다 10만 원의 현금이 들어 있는 지갑을 주웠다면 주변에서 지갑을 잃어버린 이를 찾고, 찾을 수 없을 경우, 가까운 경찰서에 분실물 신고를 하는 행동이 가장 바람직한 일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누가' 본 사람도 없고, '아무도' 찾아갈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라 여기고서 '제돈 마냥' 슬쩍하고서 써버리는 비양심적이고 몰염치하며 도둑질과 다를 바가 없는 행동을 일삼는 사람을 은근히 부러워하는 일이 많기 때문이다. 심지어 '꽁돈'이 생기길 바라며, '꽁돈'을 챙긴 사람을 부러워하는 세태가 만연하다 못해 도덕이고 양심이고 그저 '눈먼 이득'만 챙길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해버리는...그런 만족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비리마저 기꺼이 눈감아주는...솔직히 까놓고 얘기하면 '누구나' 다 그러할 것이라 '성급한 일반화'시키는 오류까지 감행하기에 이른다. 그래서 칸트가 말하는 '양심'이니, '정언명령'이니, '최고선'이니 하는 것들은 시험문제일 때만 맞추는 '정답'에 불과하고, 일상생활에서는 온갖 비리가 판을 쳐도 '원래 다 그런 것'이라면서 푸념을 늘어놓기 다반사다.
정말 그래도 되는 걸까? '바른 소리'는 낼 필요가 없는 걸까?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닷! 과학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후쿠시마 오염수'가 식수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전하다면서, 일본국민들의 '식수'로도 부적합하고, '농업용수'로도 쓰지 않고, '저장탱크'를 늘려 2045년까지 보관하지도 않고 있다. 심지어 일본국민들의 손에는 '닿지도 않게' 하고 일본땅에는 '한방울의 오염수'도 남기지 않고 모두 바다에 내다버린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바다'는 안전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러면서 '후쿠시마'를 비롯한 '일본산 수산물'을 세계 각국에 내다 팔 궁리부터 하고 있으며, 일본산 수산물을 수입거부하는 국가에는 소송을 제기할 방침이라고 한다. 정말로 과학적으로 '안전'하기 때문에 말이다. 정녕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대목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어떤가? 누구나 다 그러니 '바른 소리'를 꺼낼 생각도 말고, 당분간 일본산 수산물을 사먹지 않겠다는 결심만 하면 그럭저럭 원만하게 해결될 것 같은가?
방사능물질은 '반감기'라는 것이 있는데,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원래의 방사능보다 반으로 줄어들어 결국엔 사라질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반감기'가 제각각이라는 점이다. 수 초만에 반감기를 반복해 하루이틀이면 사라져버리는 것도 있지만, 수만 년이 지나도 반감기에 도달하지 못해 영구적으로 위험한 방사능을 뿜어내는 것도 있다고 한다. 일본정부가 '알프스'라는 시설로 오염수를 처리(?)해서 바다에 방류할 오염수도 방사능물질을 모두 걸러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실제로 십 수년간 오염수를 처리하다가 알게모르게 새어나오는 방사능물질도 있는 것이 당연하단다. 물론 그러지 않게 하기 위해 '만반의 대비(?)'를 한다고 하는데, 인류 역사상 한 번도 시행해보지 못한 일을 어찌 그렇게 호언장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기에 만에 하나라도 걸러지지 못한 방사능물질이 바다를 오염시키지 못하도록 '방류 철회'를 요청한 것인데, 이를 '막대한 비용'를 감당하기 힘들다는 이유로 '하나 뿐인 바다'를 그대로 오염시키겠다는 심보는 무어란 말인가?
칸트는 말한다. 스스로도 도덕적이지 못한 행동이라 여긴다면 결코 해서는 안 된다고 말이다. 하물며 다른이가 온당치 못한 일이라 여겨 하지 말라고 한다면 마땅히 행동으로 옮기기에 앞서 온당치 못한 구석부터 명명백백히 밝혀낸 뒤에 하는 것이 옳다는 것은 유치원에 간 어린이도 다 알고 지키는 '규칙'이다. 비단 '후쿠시마 오염수'에만 해당하는 일일까? 개인의 사리사욕을 지키기 위해 편법을 용납하게 되면 모두를 위한 공정함을 영영 잃어버리게 된다. 특정 소수의 이득을 지키기 위해 대다수의 '공공의 이익'을 침해하게 된다면 특정 소수는 '공공의 분노'를 직면하게 된다. 비록 칸트는 혁명적인 투사가 되라고 가르친 바는 없지만,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최고선'을 망각하는 순간, 공공의 분노를 직면하게 되는 절체절명의 순간도 예상밖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잠시 외면한 '양심'은 결국엔 돌고 돌아 사회적 불안을 야기하게 된다. 지금의 대한민국이 '눈 떠보니 후진국'이 된 것도 결국 '양심문제'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국민 모두에게 '양심적인 삶'을 살라고 호소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개개인에게 맡겨야 할 성질의 것을 '공공선'을 위해 '개인적 희생'을 강요하며 '도덕적인 삶'을 강제할 수도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판단의 몫'도 개별적인 성질의 것이다. '나의 판단'이 옳으니 무조건 따르라고 하는 건 '오만'이고, 권력자가 그런다면 '독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선진국이 되기 위해서 국민 모두가 도덕군자가 될 필요도 없다. 다만 '양심'에 어긋나지 않고, '양심'에 따른 행동을 하기로 결심하는 순간부터 '성숙한 시민의식'은 싹 트게 될 것이다. 나의 양심에 깃든 바른 몸가짐 하나하나가 성숙한 실천가로 거듭나게 된다면 대한민국은 분명히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선진국에도 개또라이는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개또라이짓'을 부끄러워하는 성숙함이 차고 넘쳐야 한다. 우리가 오늘날 '칸트철학의 유효함'을 느끼는 지점도 바로 여기다. 우리의 내면에 '도덕적 양심'의 성숙함이 차고 넘칠 수 있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