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11
헤르만 헤세 지음, 이노은 옮김 / 민음사 / 200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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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눌프>  헤르만 헤세 / 이노은 / 민음사 (2004) [원제: knulp(1915)]

[My Review MMXL / 민음사 24번째 리뷰] 바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방랑'은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의미로만 다가오지는 않을 것이다. 그보다는 '안락한 삶(?)을 포기한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이미지가 떠오르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서 걱정을 끼치고 남겨진 사람들에 대한 조금의 미안함도 없는 '무책임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기 딱 좋을 것이다. 하지만 <크눌프>를 읽으면 '방랑'에 대한 이미지가 조금은 달라진다. 소설 속의 주인공인 '크눌프'는 비록 방랑하는 떠돌이에 불과한 사람임에 틀림없지만, 적어도 그를 아는 모든 사람들은 단 한 사람도 '크눌프'를 미워하거나 싫어하거나 떠돌이라서 혐오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크눌프를 '예의바른 사람', '재능이 많은 사람', '(일처리에 있어서) 똑부러진 사람'으로 인식하고, 그의 방문을 언제나 환영하며 자신이 가진 것 중에서 가장 좋은 것을 기꺼이 내어주어도 아깝지 않은 귀한 손님으로 대접 받는다. 더구나 그를 처음 보는 아낙네와 아가씨 들도 처음에는 '낯선 이'에 대한 자동스런 거부감을 표출하긴 하지만, 그것도 잠시 잠깐 뿐이고 크눌프가 보여주는 말과 행동거지를 보면서 어느새 마음을 활짝 열고 그를 사랑(?)할 준비를 마쳐버리고 만다. 그만큼 크눌프는 어딜 가도 환영받는 좋은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가득하다.

그런 좋은 사람임에 틀림없는 크눌프가 어찌하여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방랑자'가 되었을까? 적어도 크눌프는 우리 식으로 하자면 '초등학교 5학년'까지 정규교육을 받았으며, 심지어 귀한 자제들만 다닌다는 '라틴어 학교'에 재학을 하고서 학교 선생님들에게도 신임을 받는 우수한 성적과 방정한 학업태도를 갖춘 '모범생'이었다. 그래서 그와 동창이었던 '마홀트'는 의사선생이 되어서 병든 모습이 완연한 크눌프를 단박에 알아보고서 어릴 적에 받은 도움을 갚을 수 있게 해달라며 크눌프를 극진해 병을 치료해주고, 그의 병간호까지 도맡아서 하게 해달라고 조를 정도였다. 만약 크눌프도 '라틴어 학교'에서 계속 학업을 이어가고 상급학교로 진학을 했다면 '마홀트' 못지 않은 명망 받아야 마땅한 위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안락한 길이 아닌 험난한 길을 떠나게 된 사연은 실로 놀라운 진실 때문이었다. 크눌프에게 열병처럼 다가온 '첫사랑'이 결국 배신으로 종말을 맞았고, 철떡같이 믿었던 연인과의 철없는 약속 때문에 '자신의 인생'조차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연인의 배신으로 인해서 '사람과의 약속', 그 자체를 아예 믿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질풍노도의 시기를 달리던 시절에 이런 악연을 맞게 되자 크눌프는 무엇 하나 진지하게 시작할 수 없는 아픔을 달고 살게 된 것이다. 나도 첫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은 충격으로 지금껏 쏠로...쿨럭쿨럭

아무튼, 어린 시절에 받은 '충격'이 잦아들 때쯤, 크눌프는 자신을 돌아보자 '방랑'에 익숙해지고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이곳저곳을 떠돌면서 '자신만의 인생'을 살아가려 노력한다. 천성이 착했고, 재능이 뛰어났기에, 크눌프는 어딜 가서나 '신사 대접'을 받았고, 실력을 인정 받아 '정착'을 권유받을 정도였지만, 그를 늘 불안하게 만든 것은 끝내 이루지 못한 '사랑'이었다. 크눌프가 '사랑꾼'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도 잘생긴 남자였기에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네들의 살가운 시선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진정한 사랑'을 원했을 뿐, 남사스럽거나 난삽한 애정행각을 원치 않았던 크눌프는 모처럼 방문한 고향에서 '친구의 아내'가 보내는 은근한 추파를 감당하지 못하고 예정된 날짜보다 일찍 고향을 떠나야만 했다. 심지어 우연히 만난 아가씨와 한밤의 데이트를 즐기며 새로이 시작할 수 있는 연인을 발견했으나, '친구의 아내'가 보내는 지극정성(?)으로 인해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할까 두려워(?)서 그 아가씨의 '향수병'만 살짝 치료(!)하고서는 서둘러 떠날 결심을 하게 된다. 방랑만 해온 처지에 번듯한 집도, 변변한 직장도 없는 자신과 섣불리 '인연'이라도 맺게 되면 그 아가씨의 미래도 장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평생을 방랑만 해온 크눌프에게도 '아들'이 있었다. 물론 사랑의 결실임에는 틀림없지만, 크눌프는 '정착'할 수 없는 몸이었기에 결국, 사랑하는 여인과 아들마저 버려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크눌프는 그 아가씨와 똑같은 전철을 밟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크눌프는 왜 '정착'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분명 재능도 있었고, 예절과 인성을 인정 받고 있었으니, '밥벌이' 정도 할 수 있는 직장을 구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분명 오늘날의 관점으로 바라보면 크눌프의 삶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젊어서는 '고생도 사서 한다'고 할 수 있지만, 가정을 이룰 나이에 접어들면 '자기 밥줄'은 자기가 스스로 챙길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냔 말이다. 일평생을 구걸과 동냥만으로 살 수 없는 현대인에게 <크눌프>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서사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이런 소설인데도 작가인 헤세는 가장 좋아했다고 한다. 자신이 평생 하고 싶은 유일한 삶이 있다면 바로 '크눌프'라면서 말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헤세는 크눌프를 통해서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유에 '방점'을 찍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의 삶이 순탄치 못하고 '자살', '퇴학', '전쟁', '검열', '이혼', '정신질환', 등등 숱한 어려움을 겪었으니, 이 모든 것들에서 벗어난 온전한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서였는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자유에는 무거운 책임이 따른다. 사람은 홀로 살아갈 수 없기에 수많은 사람들과 부대끼고 의존하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이 그 무리속에 있다면 그 자신은 자유로울 수 있지만 '주변사람들'은 피곤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그 사람의 자유로움이 현실적으로는 '비생산적'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자유로운 영혼이라고해서 아무 것도 생산하지 못한다고 치부할 수는 없다. 왜냐면 크눌프가 지인들에게 도움을 받고서 아무 것도 하는 것이 없지는 않으니까 말이다. 적어도 크눌프는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주변사람들에게 마음 따뜻하게 만들어주는 '무엇'을 무한히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먼저, 크눌프와 만난 사람들은 자신조차 잊고 지내던 '옛추억'을 떠올리게 만든다. 그렇게 떠올린 옛추억 덕분에 얼마나 많은 웃음을 선사하느냔 말이다. 크눌프가 '뜻밖의 방문'을 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웃을 수 없었고, 웃는 일조차 일어나지 않았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크눌프는 잘생기고 예의바른 말과 행동으로 사람들을 흐뭇하게 만드는 묘한 재주도 있다. 한마디로 그는 '신사(젠틀맨)'였다. 요즘으로 치면 '꽃미남 아이돌'처럼 바라만 보고 있어도 저절로 미소 짓게 만드는 소중한 존재였던 셈이다. 바쁜 현대인에게 '아이돌'이 어떤 존재던가? 자신만의 아이돌이 '무엇'을 해줬기에 당신의 가슴을 그리 따뜻하고 설레게 해주었는가? 고된 군생활을 이겨낼 수 있는 근원적인 힘도 '관물대 여신'이 전해주는 힘..쿨럭쿨럭

오늘날 <크눌프>는 우리에게 자유로운 영혼을 꿈꾸게 하지는 않는다. 요즘 젊은이들은 '방랑'보다는 '주식/코인 대박'을 꿈꾸기 때문이다. 먼저 '안정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추고 난 뒤에 자유를 만끽하는 여행(방랑)을 꿈꾸는 것을 정석으로 여긴다. 물론 팍팍한 현실이 그마저 허락치 않아서 소확행으로 대리만족을 하고, 자유로운 여행을 먼저 떠나고서 '힐링'한 몸으로 경제일선으로 복귀하는 일상을 반복하고 있지만 말이다. 그러나 헤세가 말했듯이 '자유'는 너무나도 소중한 것이라 모두가 꿈꾼다. 다만, 누구나 만족할만큼의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그래서 <크눌프>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가 무엇인지 고민하게 해준다. 특히 '자유'와 '방종'의 차이점도 극명하게 보여준다. 자유로움을 빙자하고서 무책임한 짓을 하는 것은 진정한 자유로움이 아니라 그저 '민폐'일 따름이라는 것도 알려주고 있고 말이다. 그리고 그런 크눌프적인 자유로움조차 40대가 넘어 병색이 완연해지자 '두려움'으로 찾아온다. 평생을 자유를 찾아 떠난 삶을 살았지만, 이룬 것도 없고, 가진 것도 없이, 망가진 몸에 깃든 고통만이 자신이 지은 죄의 형벌처럼 다가오자 너무도 무서운 두려움을 느낀 것이다. 그런 크눌프에게 하느님이 찾아왔다. 그리고서는 '영원한 안식'을 선사한다. 내가 너와 함께 했었고, '나의 의지'를 너의 행동으로 모든 사람들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서 말이다. 그리고 고통으로 신음하는 크눌프의 영혼을 거두어 간다. 고생했다는 말씀과 함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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