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협력의 유전자 - 협력과 배신, 그리고 진화에 관한 모든 이야기
니컬라 라이하니 지음, 김정아 옮김, 장이권 감수 / 한빛비즈 / 2022년 9월
평점 :
바다에 사는 참다랑어는 희귀한 생선이다. 마구잡이 어획으로 개체수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어족자원' 보호 차원에서 참다랑어를 낚는 것을 금지하며 맛있는 참다랑어가 다시 많아지길 기원하고 있다. 하지만 도쿄 어시장에서 270킬로그램짜리 대형 참다랑어가 경매가 310만 달러에 팔렸다고 한단다. 한 마리만 낚아도 대박인 셈이다. 지금 참다랑어 어획량은 늘었을까? 줄었을까?
이를 경제학 용어에서는 '공유지의 비극'이라 부른다. 한정된 자원임을 뻔히 알면서도 주인 없는 공유지에서는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라는 생각이 앞서 '개체수'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마구 잡이로 경쟁에 뛰어드는 현상을 일컫는 말이다. 분명 '개체수'가 늘어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더 많은 수확량을 올리는 것이 모두에게 더 이익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다른 사람이 먼저 차지할 것을 걱정하며 '한정된 자원'이 바닥이 날 때까지 긁어모아 끝내 사달을 내기 일쑤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면서 '협력'이라는 말을 꺼낼 수 있을까?
호모 사피엔스는 당당히 현존하는 '최강의 포식자'로 군림하게 되었다. 초기 인류는 '포식자'는커녕 더 강한 포식자들의 먹잇감에 불과했는데도 뛰어난 지능으로 정보의 축척을 가능하게 했고, 본능적으로 삶을 영위하기보다 이성적으로 판단하며 '더 나은 삶'을 꾀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한 끝에 지금의 자리로 발돋움하게 된 것이다. 이런 '현생 인류'는 과연 어떤 유전자를 가졌기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것일까? 리차드 도킨스의 지적처럼 <이기적 유전자>를 갖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을까? 아니면 니콜라 라이허니의 주장처럼 <협력의 유전자>를 가졌기에 가능했을까?
놀랍게도 거의 모든 생물은 '경쟁'이 아닌 '협력'을 통해 종을 번식시키고 개체수를 증가시켰다고 한다. 글쓴이는 이를 증명하기 위해 너무나도 많은 예를 들고 있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심지어 인간도 마찬가지란다. 서로 '협력'하며 살아간 종만이 번성할 수 있었다면서 말이다. 하지만 앞서도 예를 들었던 것처럼 '협력'보다는 '배신'을 때리는 것이 더 큰 이득을 불어오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이는 인간뿐 아니라 모든 생물에게서도 발견되는 현상이란다. 그런데도 글쓴이는 '협력'만이 유일하게 종을 번성하게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더 큰 이득은 저 멀리에 있는데도 말이다.
그에 대한 설명은 '팬데믹'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대처방안을 예로 들면서 설명하고 있다. 코로나19가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던 초기에 수많은 나라들이 두루말이 화장지와 신선식품을 사재기하며 대혼란을 겪었던 것과 병상확보를 하지 못해 수많은 환자들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하고 죽어가는 상황에서 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자국의 백신'을 먼저 챙기면서 상대적으로 보건의료에 취약한 나라들이 어려움을 겪었던 것을 예로 들면서 말이다. 물론 초창기의 혼란을 겪으며 인간의 이기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었지만, 사스나 메르스에 비해 '치명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면서 차츰 '자국 이기주의'를 내려놓고 인도적 차원에서 저개발국가들에게 백신을 나눠주며 '팬데믹의 위기'를 극복해나가는 모습을 나열했다. 이런 모습이야말로 '협력의 유전자'가 결국 승리했다면서 말이다.
확실히 인간은 비겁하다 못해 비열할 정도로 '이기적인 모습'을 보여주곤 한다. 위기의 상황속에서 '나'를 더 먼저 챙기고, '가족'과 '친구'를 그 다음으로 챙기며, '아는 이웃'을 챙긴 다음에야 더 많은 사람들을 챙기는 양상을 보여주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런 인간만 있는 것이 아니란다. 팬데믹의 초기 때부터 자기보다 남을 더 걱정하고 챙기는 '보편적인 인류애'를 보인 사람들이 더 많았고, 비록 자기가 감염되었다하더라도 '감염의 확산'을 막기 위해 '자가격리'를 실천하며 감염의 확산을 막으려 최선을 다했고, 재감염을 막기 위해 손씻기와 마스크를 몸소 실천하며 적지 않은 불편을 감수하면서까지 남을 배려하는 '자기 희생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여타의 생물에게서도 발견되는 모습이다. 남미에 서식하는 개미 가운데 하나는 해가 떨어지면 '생존 가능성'이 매우 낮아지므로 자신들의 둥지로 서둘러 되돌아오곤 하는데, 이때 먹이활동을 벌이다 미처 복귀하지 못한 개미들은 '다른 포식자'들이 자기네 보금자리를 발견하지 못하도록 밖에서 입구를 막고 난 다음에 춥고 메마른 사막 한가운데로 행진을 벌인 뒤 최후의 순간을 기다린다고 한다. 이는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동일한 유전자'를 가진 동료들을 생존확률을 높이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협력의 유전자'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렇다면 '협력'하는 것이 더 이득이란 말인가? 앞서 보았듯이 '배신'을 밥 먹듯이 하면 홀로 로또 맞은 것처럼 대박을 낼 수 있는데도 말이다. 이를 증명하기 위해 글쓴이는 '정규 상선의 선장과 선원'과 '해적선의 선장과 선원'의 생존률을 비교하면서 설명한다. 머나먼 항해를 떠나야 하는 위험을 감수한 대가로 얻는 뱃사람들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단다. 물론, 상선이나 해적선 모두 '무역'과 '약탈'의 대가로 얻는 이득은 로또 만큼이나 막대하기에 위험천만한 항해를 끝마치고 난 뒤의 엄청난 보수를 얻을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그 힘겨운 항해를 해내는 것이다.
하지만 망망대해에서 기약없는 이득을 기다리기보다 '생존(안전)'을 택하는 일이 더 많이 일어난단다. 바로 '선상반란'인데, 선장을 죽이고 배를 빼앗는 일이 '정규 상선'과 '해적선' 가운데 어느 쪽이 더 많았을까? 결과는 놀랍게도 '정규 상선'에서 더 많이 더 끔찍한 선상반란이 일어나곤 했단다. 글쓴이는 그 까닭으로 고립된 선상 위에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는 쪽이 어느 쪽이냐를 주목했고, 놀랍게도 무역을 하는 '정규 상선'에서 선장의 독재와 독단적 폭력이 문제가 된 적이 더 많았으며, '해적선'에서는 배 안의 모두가 평등한 민주적인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했기에 선상반란 같은 일은 덜 일어났다고 한다. 한마디로 '배신'을 때리는 쪽은 덜 협력적인 방식으로 항해를 했던 '정규 상선'이었다는 말이다. 반면에 '해적선'은 모두가 협력을 잘 했기에 갈등이 더 적었고, 규율이 더 잘 지켜졌으며 상대적으로 안전한 항해(?)를 했다는 것이다.
비록 고립된 선상에서의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신빙성은 떨어지지만, 우리가 살고 있는 행성, 지구도 우주에서 고립되기는 마찬가지다. 심지어 같은 태양계 안에서도 인간이 이주해서 살 수 있는 행성은 없다. 이렇게 고립된 지구에서 인간이 더 잘 살기 위해서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지만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더 많은 인간들은 '협력의 유전자'를 발휘해서 더 잘 살아갈 것이 틀림없다.
참,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유전자에 '감정'이 없다는 점이다.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에서도 언급했지만, 유전자는 어떤 방향성조차 없다. 다시 말해, 유전자에는 목적도, 욕구도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유전자가 '이기적'인 것을 아는 것처럼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잘 찾아가는 것처럼 보인다고 설명했을 뿐이다. <협력의 유전자>도 마찬가지다. 유전자가 '협력하라'는 명령을 내릴리 없다고 단정한다. 그럼에도 '협력'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단다. 이는 '배신'하는 종은 도태되고, '협력'하는 종이 생존하기에 그리 보일 뿐, 자연선택에서 '방향성'은 없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킨다. 물론, '목적성'은 더더군다가 없다. 단지, 인간은 '이성의 힘'을 갖고 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유리한 선택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거의 모든 종은 '협력'을 통해 더욱 번성했다. 우리 인간도 이런 생물들의 번성을 살펴보면서 '배신'이냐, '협력'이냐를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가? 그리고 당신의 유전자는 뭐라 말하던가? 아무 소리도 못 듣는 게 '정상'이다. 자연선택은 아무런 강요를 하지 않는다. 단지, 선택의 결과만을 냉혹하게 보여줄 뿐이다. 짧은 순간의 이득을 위해 '배신의 길'을 걷는 인간들이 더 많아진다면, 인류의 미래는 어두워질 것이 분명하고 말이다. 물론, 강요는 아니다.
한빛비즈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