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돈이 사라진 날 저학년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김다정 그림 / 한솔수북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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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솔수북 6번째 리뷰] 고정욱 작가의 '사라진 날' 시리즈 네 번째 책이다. 이번에는 '돈'이 사라졌고, 역시 나쁜 '외계인 침공'이 원인이었고, 마무리는 착한 '외계인의 도움'으로 지구가 구원되는 전개였다. 물론 초등저학년을 대상으로 한 책이니 '상상의 나래'를 펼치기 위해서 외계인이 등장하고, 복잡하고 어려운 사건에 매달리지 않고 단번에 해결하는 구성이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조기 '경제교육'의 필요성에 늘 찬성하는 쪽이었기에 이른 나이의 독자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교훈적인 이야기에 박수를 보내는 바다. 그런데도 완독한 뒤에 영 개운치가 않다. 뭔가 껄끄럽기까지 하다. 앞선 책들에서 '책'이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고, '엄마'가 사라지는 내용과는 달리 '돈'이 사라지는 배경이 어색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먼저 통용되던 '화폐'가 사라져서 원시경제인 '물물교환'이 다시 등장한 것은 자연스런 과정이다. 그리고 '물물교환'이 꽤나 불편해서 새로운 '통화'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래서 등장한 것이 바로 '바코드(인식표)'인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이렇게 '화폐'를 대신한 새로운 통화의 문제점이 지적되기도 전에 '외계인'이 등장해서 지구정복을 위해서 돈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점부터 껄끄럽기 시작했다. 그러다 외계인의 지구정복 야욕을 무너뜨리기 위해서 '가상화폐'로 대응하며 지구인들의 독립의지를 표출하고, 외계인들의 정복욕을 무너뜨린 것까진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외계인들이 물러난 뒤에 '가상화폐' 사용으로 인해서 투명한 쓰임새로 인해서 '부정부패'가 싹 사라져버렸다는 설정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과연 '가상화폐'만이 투명한 돈 씀씀이를 보장하는 것일까? '가상화폐'로 발생할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제점은 없을까? 그리고 '가상화폐'의 사용으로 정말 부정부패를 척결할 수 있을까? 이런 '팩트체크' 없이 <어린이책>에 가상화폐의 순기능만 선보이며 '긍정적인 이미지'를 어린이들에게 심어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걸까? 라는 의문에 빠져들자 고민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이책>이니 해피엔딩으로 마무리 할 수도 있다고 본다. 수많은 '동화책의 결말'이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맺음을 하니 말이다. 그래서 아름다운 왕자와 공주의 결혼을 '행복공식'으로 삼고, 바람직한 가족구성을 '권선징악'의 일부로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런 식의 결말을 마냥 '좋다'라고만 평가하지 않는다. 왕자와 공주의 결혼이 무조건 '행복한 결말'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 현실이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종이봉지 공주>처럼 왕자가 공주를 구하지 않고 '역발상'으로 용감하고 씩씩한 공주가 사악한 용에게 잡혀간 왕자를 구해주지만, 왕자는 용과의 결투 도중에 옷이 불타버리고 초라한 '종이봉지'로 몸을 가린 허름한 공주의 모습에 실망하고 투정하는 왕자와 '결혼'하지 않고 홀로 살아간다는 결말을 시도한 동화책도 등장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 <돈이 사라진 날>의 주제와 목적이 '어린이들에게 돈의 소중함을 일깨워주고, 저축의 필요성과 합리적인 소비를 가르치는 것'이었다면, 새로운 통화인 '인식표'와 '가상화폐'의 등장이 적절한 대안은 아니었을 것이다. 사용하던 통화가 사라져서 '불편한 물물교환'을 보여주고, '아나바다 운동(아껴쓰고, 나눠쓰고, 바꿔쓰고, 다시쓰는 운동)'까지만 보여줬어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소중한 돈을 차곡차곡 모아서 '꼭 필요한 곳'에 요긴하게 쓰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마무리 하는 것이 더 뿌듯한 결말이지 않았을까 싶다. 예를 들어, 민지가 200만 원을 스스로 모아서 '아프리카에 학교를 짓는 꿈'을 실현시키는 결말로 말이다. 굳이 '외계인의 지구정복'으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서 괜한 '충격요법'을 써서 '돈의 소중함'을 강요할 필요까지 있었을까 싶은 것이다. 내가 완독 후에 껄끄럽게 생각한 점은 바로 이것이다.

  한편, 시리즈의 '일관성'을 갖추려는 작가의 고민은 이해하는 바다. 하지만 조금 더 고민을 한 뒤에 '결과'를 내놓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다른 작품에 비해서 이번 책은 좀 뭔가에 쫓기듯이 급하게 썼다는 느낌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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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더 저널리스트 : 조지 오웰 더 저널리스트 2
조지 오웰 지음, 김영진 엮음 / 한빛비즈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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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빛비즈 138번째 리뷰] 앞으로 이렇게 정리를 해야 겠다. 그동안 쓴 리뷰는 '로마숫자'로 전체 표기를 하고, '출판사별 통계'는 리뷰의 첫머리에 장식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작가별 통계'도 따로 냈으면 좋겠지만, 워낙 중구난방으로 읽고 있고 지금까지 리뷰한 것을 '따로' 카운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포기하련다. 이제 내게 주어진 '리뷰 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은 시간동안 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련다. 어느 날, 내 리뷰가 멈추면...나도 없을테다.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널리스트'라고 꼬집고 싶다. 못난 정치꾼들의 '독재'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깨어 있는 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지금의 세계는 '펜이 사라진 시대'를 지나고 있다. 전통적인 매체인 '신문'은 본분을 잊은 지 오래고, 구독자들의 외면마저 받고 있다. '방송매체'는 못된 정권에 장악되어 '나팔수 역할'만이 전부인줄 착각하고 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새로운 매체로 자리잡은 '너튜브' 같은 곳에 기대를 걸어야 할 판이지만, 이곳마저 '가짜뉴스의 온상'이고 보니, 저널리스트가 살아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깜깜한 시절이다. 그렇기에 '저널리스트'라기엔 한참 부족하지만 '깨어 있는 시민'으로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다. 분명 '깨어 있는 분'들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늘 깨어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책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앞선 '헤밍웨이'와 '마르크스' 편과 짝을 이루는 책이다. 이들은 '소설가'이며 '사상가'이기도 했지만, 부당한 일에 참지 않은 '저널리스트'로 활약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사람'들이 남긴 저널들을 짜깁기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낸 것이다. 하지만 '시대순'으로 쓰여진 저널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따로 묶어서 엮었기 때문에, 이들이 펼쳐낸 '생각의 변화'나 '저널리즘의 흐름'이 잘 보이지 않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각각의 책들에는 '그들'이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저널리스트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회적 문제'가 있는 곳에 '저널리즘'도 함께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날의 세계적인 혼란이 벌어지는 한복판에 '저널리즘'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저널리스트'들의 생각들을 한데 엮어서 모두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수고가 잘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내 깜냥으로 그것들을 한데 엮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쨌든, 이 책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전쟁으로 혼란스런 아픈 시대를 살아간 조지 오웰이 참지 않고 쏟아낸 저널들을 한데 엮은 책이다. 오웰이 1903년에 태어나 1950년에 사망을 했으니 1, 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은 셈이다. 주요 저작물은 미얀마 주제 인도제국경찰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쓴 <버마 시절>(1934), 파리와 영국에서 궁핍한 생활로 연명하며 쓴 <파리와 런던 안팎에서>(1933)을 출간하였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담은 <카탈로니아 찬가>(1938), 영국과 소련의 정치를 우화 형식으로 쓴 <동물농장>(1945), 그리고 디스토피아적인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린 <1984>(1949) 등을 펴냈다. 하지만 그는 소설만 쓴 것이 아니다. <트리뷴>지를 비롯해서 다양한 신문에 정치적 논평을 써내는 등 날카로운 비평가로서의 모습도 훌륭히 보여주었다.

  그리조 오웰은 '사회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네편내편'을 가리지 않고 비판할 것이 있으면 참지 않는다는 속시원한 '사이다' 역할을 자처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이쪽저쪽'에서 다구리를 당하는 처지에 서기도 했다. 특히, 오웰은 '영국인'이면서도 '영국인'을 저격하는 글을 많이 썼다. 이를 테면, '무비판적인 애국심'은 참 애국심이 아니라 '국수주의'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대대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핀란드 군인에게 보낸다며 뜨개질을 시작했는데, 소련이 갑자기 '연합군'편으로 돌아서자 소련을 지지하며 뜨개질로 완성된 물품을 소련에게 보내는 영국인들을 향해 '모순덩어리'라며 비판을 한 것이다. 이처럼 영국인들은 '신념'조차 잃어버렸다며 맹렬히 비판을 했다. 그리고 영국인들이 식민지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에는 둔감하면서 자국민들이 받는 조그만 불편에는 악다구니를 퍼붓는 '우매한 대중'을 향해서도 아낌없이 비판을 날렸다.

  우리는 정의나 평등과 같은 신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만 급급할 뿐, 그런 신념 따위는 자신들보다 '더 훌륭한 분들'의 전유물이고, 더 웃긴 건 '그런 분들'만이 입에 달고 직접 만들어서 우매한 대중들에게 선심을 쓰듯 베풀어주는 것인냥 철저히 '남일'처럼 생각한다. 그러니 자신들에게 닥친 '불공정, 불평등한 일'이 발생을 했을 때만 부랴부랴 신념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든다. 그러나 그런 호소에 '응답해주는 이들'은 극히 소수일 뿐이다. 왜냐면 더 많은 대중들이 '그따위 신념'에 그닥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다른이의 고통'에 둔감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야만 한다. 적극적으로 간섭하거나 참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면 '관심'을 모아주란 말이다. 불평등한 일이 발생해도 '관심'을 쏟아줘야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잡기'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갈수록 살기 힘들어진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정치가'는 실종되고 '정치꾼'만 남아 국민을 우롱하고 '대국민 사기'를 벌이려는 못난이들만 설치는 마당에 '관심'마저 없다면 한국정치는 바로 설 희망조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정치참여'가 절실하다. 정치하는 사람치고 '믿을만한 사람'은 100% 없다. 그러니 정치인을 믿고 정치를 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 철저히 감시하고 언제나 감시해야 마땅하다. 특히,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정치인, 국민을 위해서 자기가 할 일을 말하기보다 국민을 위한다며 상대를 헐뜯는 일에만 열심인 정치인,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한 점의 부끄럼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정치인은 절대로 뽑으면 안 된다. 그런 당을 지지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정치는 '소신'을 갖고 해야 마땅하고, 대중은 '신념'을 갖고 지지해야 나라가 바로 서는 법이다.

  적어도 조지 오웰은 '자기만의 신념'에 투철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은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였으며,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명백해지면 '부족했다'고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웰의 저작물은 오롯하고, 오웰의 저널은 날이 번뜩인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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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조영웅전 1 - 몽고의 영웅들
김용 지음, 김용소설번역연구회 옮김, 이지청 그림 / 김영사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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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독서를 즐겨하기 시작한 때는 아이러니하게도 '고3수험생 시절'이었다. 남들은 공부하느라 학원이다, 과외다, 정신없이 바쁘던 와중에 나는 천하태평하게 학교를 파하면 집에 가서 '만화책'과 '무협지' 삼매경에 빠졌다. 뭐 그래서 성적은 바닥을 쳤지만 어찌어찌 대학은 들어갔고, 졸업하고 취업하려 하니 때는 IMF 시절이라 '정규직'은 뽑아주지도 않았고,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지만, 그마저도 4000: 1 이라는 그지 같은 경쟁률과 합격점수 백점 만점에 127.3점이라는 웃지 못할 촌극이 벌어지는 통에 알바와 비정규직의 삶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마침맞게 어머님이 쓰러지셔서 '간병비'라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나의 20대는 지나갔다. 이 시절의 나를 웃게 만든 건 다름 아닌 '이우혁'과 '김용'의 소설들이었다. 그야말로 읽고 또 읽었다. 그리고 그 책들은 아직도 집에 모셔서 있다.


  그 시절엔 <영웅문>라고 불렸다. 곽정과 황용의 어린 시절 이야기와 '동사서독 남제북개'라는 네 명의 무림고수가 펼쳐내는 무협의 세계는 정말이지 판타스틱 그 자체였다. 고교시절에는 시험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워밍업'으로 이 책을 한권쯤 '독파'하고 난 뒤에야 공부에 탄력을 받을 정도였다. 그렇게 밤을 꼴딱 새면서 공부할 수 있었던 '각성제'가 바로 <영웅문 1, 2, 3부>였던 것이다. 지금에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그리고 <의천도룡기>라는 이름으로 바뀌어 출간되었다. 그 가운데 1부에 해당하는 <사조영웅전>의 이야기를 전해보려 한다.

  <사조영웅전>은 이전에 출간되었던 '해적판'과 달리 '정식라이센스'를 받아 출간한 '정본'이라고 한다. 하지만 초판이 나왔을 때만해도 오탈자를 비롯해서 파본이 엄청났었기에 그닥 '소장하고픈 책'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세월이 흘러 '수정판'이 나왔으니 괜찮을 법도 하다. 그래서 꽤나 오랜 시일이 지났지만 다시금 읽고자 마음 먹은 것이다. 어린 시절에는 '리뷰'를 쓰지 못했으니, 다시 기억을 새롭게 정리한다는 마음으로 써보려 한다. 암튼,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과거의 '해적판'과는 내용이 사뭇 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예전에 읽었을 때 보니 <영웅문>에서는 곽정과 함께 했던 동물이 홍마, 흰수리, 그리고 칼새(?)까지 모두 세 마리였는데, <사조영웅전>에서는 홍마와 흰수리만 등장하고 작고 날쌨던 조그만 새는 등장하지 않았더랬다. 이번 '완역본'에서도 두 마리만 등장할 것 같은데, 더 달라진 것들이 있는지도 살펴보아야겠다.

  <사조삼부곡>이라 불리는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는 각각의 주제를 담고 있다. 먼저 <사조영웅전>에서는 '영웅'이란 무엇인가? <신조협려>에서는 '정'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의천도룡기>에는 '정사(正邪)란 무엇인가?'다. 먼저 <사조영웅전>의 주제인 '영웅'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야할 것이다. <사조영웅전>에는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한다. 시대배경이 금에게 쫓겨 남송으로 내몰린 형국이고, 이야기의 주인공인 곽정은 초원에서 새롭게 등장한 '테무친(훗날 칭기스칸)'의 보살핌을 받으며 성장한다. 남송과 금, 몽골(훗날 원)의 세 나라가 각축을 벌이던 어지러운 시절이니 '난세의 영웅'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혼란한 시기에 굶주리고 핍박받던 백성들은 난세를 평정할 '영웅'을 고대하던 시절이었으니, <사조영웅전>의 주제가 '과연 '영웅'은 누구란 말이냐?'라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세 나라 가운데 최종 승자는 몽골이니 '영웅'은 몽골인 중에서 골라야 할 것인가? 아니면 세 나라 가운데 금과 몽골은 '오랑캐'니 진정한 영웅은 '한족출신'에서 골라야 한단 말인가?

  여기서 작가인 '김용'의 고심이 엿보인다. 오늘날의 중국은 수많은 '소수민족'을 포용(?)한 채 '한족' 중심으로 체제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한족'이 아니면 영웅대접 받기조차 버거운 실정인 것이 사실이다. 허나 '중국의 역사'는 한족만의 '단일'역사가 아니다. 역대왕조 가운데 수없이 한족이 아닌 '이민족'이 세운 왕조로 이어져 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중국인들은 그들 이민족 왕조가 끝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었기 때문에 사실상 모든 왕조가 '중국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런 역사관이 '중화사상'을 넘어 이웃나라까지 '한족문화의 틀'안에 들어와 있었다며 자국의 역사를 한껏 부풀려 보려는 오만함마저 보일지경이라 '국제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판국에 한낱 <무협지>에 불과하지만, 자국의 역사를 시대배경으로 삼고 있기에 '객관적 서술'이 곤란했다고 작가 스스로 고충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그럼 독자의 판단에 맡기자니, '김용의 소설'이 동아시아를 넘어 전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다는 점에서 '한족출신 영웅'만을 고집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더구나 이민족의 나라였던 '금의 역사'도 중국사, '원의 역사'도 중국사인데, 어찌 '한족왕조의 영웅'만 돋보이게 할 수 있느냔 말이다. 그럼에도 '영웅'이 누구냐는 질문에 답을 해야겠기에 작가 나름대로 '주관'을 펼쳐냈으니, 한국의 독자 스스로 읽어가면서 그 답을 찾는 것도 현명한 방법일 것이다. 결론만 이야기하면 작가도 '영웅'이 누구냐는 답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니 정답은 없는 셈이다.

  그렇다면 '영웅'이란 힘이 가장 쎈 사람일까? 역사적으로는 '칭기스칸'이 대륙을 통일하니 영웅이라 할만하다. 허나 무공으로 보면 '동사서독 남제북개'를 따라온 자가 없다. 이 네명은 그 유명한 '화산논검'에서도 실력을 겨루었으나 결판을 내진 못했더랬다. 허나 하늘 아래 태양이 둘일 수는 없기에 강호의 무림고수들은 싸우고 또 싸울 뿐이다. 그러나 무림고수들도 다양한 재주를 가지고 있기에 '내공'과 '외공', 그리고 권모술수에 능한 '지략'과 음험하기 짝이 없는 '독극물'까지 그 어떤 방법으로도 사람의 목숨을 단번에 앗아갈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는자가 승리하는 강호의 세계에서 누가 가장 힘이 쎄다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때로는 '가위바위보' 대결처럼 승패가 엇갈리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럴 경우엔 누구를 승자로 삼을 것인지도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진정한 영웅을 찾는 것도 찾는 것이지만 '기준'을 세우는 것이 가장 곤란하다.

  그렇다고 '영웅'으로 뽑는 기준을 도덕성으로 가를 수도 없다. 평범한 진리로만 따지면야 진정한 영웅은 가장 선한 영웅을 뽑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러나 통일왕조를 세운 이를 영웅으로 삼기도 하는데, 이런 영웅은 대부분 '전쟁영웅'이 대부분이고, 전쟁영웅은 거의 모두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하찮게(!) 여기는 '학살자'인 경우가 허다하다. <사조영웅전> 말미에서도 전진교의 도사를 초빙해서 가르침을 얻으려는 칭기스칸이 전쟁중에 학살을 많이 하면 진정한 영웅이 될 수 있겠느냐는 물음에 도사들은 하나같이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을 못하고 말았다. 물론 무능하고 포악한 군주에게 핍박을 당하는 불쌍한 백성들을 해방(?)시켜주기 위해서 군대를 일으키고 정벌한 지도자는 영웅이라 불릴만 할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 그렇게 '정의로운 전쟁(침략)'이 어디 있느냔 말이다. 그러니 도덕성으로 기준을 삼는 것도 어려운 일이다.

  이처럼 진정한 영웅 찾기 어려운 와중에 <사조영웅전>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남송 강남 우가촌에 곽소천과 양철심이란 의형제가 살고 있다. 한적한 시골마을이라 오가는 사람도 거의 없을 정도인데, 이 마을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그 첫번째 사람은 전진칠자 중 한 사람인 '장진자 구처기'다. 구처기는 무림고수일 뿐만 아니라 대단한 애국심을 가졌기에 '금나라 사람'과 그들을 돕는 '역적' 무리를 대단히 싫어한다. 그가 이 한적한 마을로 방문한 이유도 '역적'을 처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금군이 구처기를 뒤쫓아 왔다가 그만 곽소천과 양철심이란 애국자가 애꿎은 희생을 당하고 만다. 구처기는 일면식도 없었던 자신을 돕다가 도리어 해를 당한 두 애국자의 억울한 죽음을 애도하고, 이 둘의 후손을 살려내기 위해 무진 애를 쓴다.

  이런 복잡한 사연으로 구처기는 '단천덕'이란 두 영웅을 죽인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사방팔방으로 뒤를 쫓았고, 이 과정중에 '강남칠괴'와 단단히 큰 오해를 사서 강남 취선루라는 곳에서 엄청난 무공대결을 펼쳤다가 엉뚱한 희생자를 낳게 되고, 서로 오해를 수습하는 과정에서 '또 하나의 대결'을 약속하게 된다. 그 대결이란 다름 아닌 억울하게 숨진 '두 애국자의 후손'을 각각 찾아서 18년 뒤에 다시 이곳 '강남 취선루'에서 두 제자의 대결로 승부를 가리자는 것이었다. 큰 대결을 치룬 직후라 서로 피투성이가 되었고, 큰 오해를 사서 양쪽 모두 망신살이 뻗쳤으니, 18년 뒤에 승부를 다시 가리자는 말에 솔깃했던 것이다. 더구나 '애국자'에게 도움을 주는 일이니 무림고수의 명예에도 도움이 되는 아주 좋은 승부라 여기자 '구처기'와 '강남칠괴'는 18년 뒤에 다시 만나자는 약속을 하고, 두 애국자의 후손을 찾아 떠나게 된다. 여기서 영웅의 첫 번째 조건인 '나라사랑'이다. 흔히 말하는 '우국충정'이 영웅의 조건인 셈이다. 여기까지는 '한족의 관점'에서 영웅의 조건을 이야기하였다.

  한편, 두 애국자(영웅)의 후손은 곽정과 양강이다. 곽소천과 양철심 두 의형제가 한시에 두 아내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정강의 치욕'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아들이든 딸이든 상관없이 '곽정, 양강'이라고 이름 짓자고 약속한 것이다. 그런데 일대 혼란이 벌어지면서 두 명의 아내는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고, 곽소천의 아내 이평은 저 먼 북쪽의 초원에서 '곽정'을 낳았고, 양철심의 아내 포석약은 동북의 금나라 황실 안에서 '양강'을 낳게 되었다. 1권에서는 곽정의 어린시절만 나오고, 2권에서야 양강이 등장하게 될 것이다. 암튼, 곽정은 몽골의 초원에서 무럭무럭 자라났다. 그리고 여섯살 무렵에 강남칠괴와 만나게 된다. 그렇게 곽정은 일곱명의 사부와 만나게 되어 무공을 익히게 된다. 12년 뒤에 있을 대결을 위해서 말이다.

  또다시 한편, 양철심의 아내 포석약을 탐한 금나라 여섯번째 황자 완안홍열은 곽소천과 양철심을 죽인 원흉이었다. 비록 그의 두손으로 직접 죽이지는 않았으나 자신의 생명을 살려준 미녀 포석약을 얻기 위해서 몰래 사주했으니 불구대천 원수임에 틀림없다. 허나 그런 사실을 알지 못한 포석약은 뱃속의 아기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금나라 황궁에 머물게 된다. 그런 개인적인 일을 마무리한 완안홍열은 주변국을 정탐할 목적으로 몽골의 초원으로 행차한다. 그곳에서 완안홍열은 몽골 부족의 추장 '테무친(훗날 칭기스칸)'과 조우한다. 그리고 금나라의 가장 큰 적은 남송이 아니라 몽골부족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된다.

  당시 몽골은 하나로 뭉치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져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웃한 금나라가 송나라를 격파하고 크게 위세 떨치자 금나라에 사대를 하며 속국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테무친'을 비롯해서 몇몇 부족들은 주변 부족들보다 훨씬 탄탄한 세를 과시할 수 있었다. 아직 금나라에 비할 바는 못되지만 '정예병'이라고 할만한 강한 기병을 부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몽골인들은 서로 '신의'를 목숨보다 귀하게 여길만큼 순박하고 착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거짓을 품거나 약속을 어기면 부족끼리 똘똘 뭉쳐서 '부정한 짓'을 한 무리를 무너뜨리는 소수민족의 결기를 보여주었다. 과거의 여진족 시절엔 금나라도 그러한 '탄탄함'을 보였지만, 대륙을 정복한 뒤에 나태하고 나약해진 '금나라 군대'는 겉모습만 웅대하고 거창할 뿐, 내실은 조금도 몽골의 전사보다 허약할 뿐이었다. 이런 사실을 완안홍열은 간파했더랬다. 이런 강건한 몽골의 기운을 고스란히 머금은 순박한 '한족 소년'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곽정'이다.

  여기서 영웅의 두 번째 조건이 나타난다. 영웅은 '민족'을 가리지 않는다고 말이다. 어차피 주인공은 '한족'이다. 허나 금나라에도, 몽골에도 '영웅의 기질'을 타고난 인물은 얼마든지 많다는 것을 오롯이 밝히고 있다. 심지어 '역사속 인물'뿐 아니라 소설속' 가공의 인물'일지라도 가리지 않았다. 아직 초반이라 무림고수는 '전진교'와 '강남칠괴'만이 등장했을 뿐이다. 그런데 그 무림인들 중에서도 '영웅의 기질'을 가진 이들이 속속 보인다. 그리고 영웅의 반대쪽 편에 서있는 '악당'도 등장했다. 바로 진현풍과 매초풍이라는 '흑풍쌍살'이라는 악당이다. 이들은 사실 동해 도화도주 황약사(동사)의 제자들이었으나 괴팍한 스승 덕분에 문파에서 파문을 당하고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그들이 스승님 몰래 사랑을 나누고, 그 죄를 물을까 무서워 황약사가 보관중이던 <구음진경> '하권'을 몰래 빼돌려 섬에서 도망쳐 나왔기 때문이다. 그 후 그 둘은 스승님이 자신들을 찾을까 무서워 몰래 숨어져 훔쳐온 비급을 연마하며 지냈으나, 워낙 고도의 절기가 담긴 '무공비급'인지라 함부로 연마하지 못하고 '구음백골조'와 '최심장'이라는 두 가지 무공만 간신히 따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무공은 너무나도 무시무시할 정도로 쎘다. 암튼, <무협지>라서 무공 얘기로 새고 말았지만, 영웅은 특정 민족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는 공평한(?) 조건을 작가는 내세웠다. 심지어 '정파와 사파'를 가리지도 않는다.

  어쨌든, 1권의 내용은 18년 뒤의 대결을 위해서 강남칠괴에게서 무공을 배운 곽정의 어린 시절을 보여주는 내용으로 마무리 하였다. 곽정과 평생을 함께 할 '홍마'와 '흰독수리'도 순탄하게 등장했고 말이다. 아직 1권에서는 그밖의 달라진 내용이 크게 없었다. 다음 2권에서는 곽정과 황용의 만남과 함께 '동사서독', 그리고 '북개'가 등장할 것이다. 2권부터 본격적으로 펼쳐질 파란만장한 무협의 세계로 빠져들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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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사라진 날 저학년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이예숙 그림 / 한솔수북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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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마가 없으면 아이가 살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다 큰 어른일지라도 살기 힘들어진다. 어디 그뿐일까. 핵가족화된 현대인들은 '엄마'가 사라지는 순간부터 사회가 존속할 수 없게 되고 국가조차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지금 전세계를 다스리는 건 '남성 지도자들'이 대다수이지만, 그들도 '엄마'가 사라진다면 국가를 운영할 수 없게 될 것이 틀림없다. 왜냐면 '엄마'가 사라지면 한 가정이 황폐해지고, 가정이 황폐해지면, 사회가 위태롭게 되고, 사회가 위태로우면 국가는 결코 운영될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엄마의 헌신과 희생'을 바탕으로 국가가 존속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도 '엄마의 잔소리'는 듣기 싫다. 어제도 했고, 오늘도 하고, 내일도 할 '엄마의 잔소리'는 끝이 없기 때문이다. 날마다 새로운 잔소리를 한다면 들어줄 법도 한데, 그러면 애초부터 '잔소리'라고 부르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전세계의 모든 어린이들은 날이면 날마다 '엄마의 잔소리'를 듣고 또 들어야만 한다. 그래서 하루라도 '엄마의 잔소리'를 듣지 않을 수 있다면 소원이 없겠다는 푸념이 들릴 만도 하다. 실제로 '엄마가 외출'이라도 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물론 외출에서 돌아와서는 '폭풍 잔소리'가 시작될 게 뻔하지만, 아이도, 아빠도, 잠시잠깐이나마 엄마가 사라지는 것을 그렇게 반길 수가 없다.

  그런데 간절한 소원대로 엄마가 사라지게 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여기 재미난 상상을 한 책이 있다. <엄마가 사라진 날>이라는 이야기책이다. 이 책에선 전세계의 엄마가 모두 사라지게 된다. 아니 , 정확히 말하자면 '웃음 바이러스'라는 병에 걸려 코로나 팬데믹이 발생했던 것처럼 '바이러스에 감염된 엄마들'을 격리병동이나 요양원에 가둬버리고 국가의 철저한 감독 아래 갇혀 지내게 된다. 당연히 '가족면회'도 금지 당했다. 일단은 '아이를 낳은 여성(엄마)'만이 세계적인 감염이 된다고 알려졌지만, 언제 어느 순간에 모든 사람에게 폭발적인 감염을 일으킬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들도 '웃음 바이러스'의 감염원인을 찾으러 백방으로 연구하고 있지만, 증세가 더욱 심해지기만 할 뿐 뾰족한 수를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엄마가 없는 집은 그야말로 엉망진창이 된다. 청소며, 빨래며, 식사까지 엄마의 손길이 사라진 집구석은 점점 엉망이 되어 간다. 아빠는 '회삿일'도 바쁜데 '집안일'에 '아이돌봄'까지 하느라 그야말로 정신이 하나도 없다. 아닌 게 아니라 아직 아이가 어린 남편들은 아이를 맡길 곳을 찾지 못해 아이를 안고 업고 '출근'을 하기에 이른다. 전국 곳곳의 '어린이집'과 '유치원'의 원장과 보모들의 태반이 '병원'에 격리되어 있기 때문에 문을 닫았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다. '여성인력'을 많이 쓰는 직장이나 가게는 속속 문을 닫기 시작했다. 일손이 부족해진 공장도 가동을 멈추고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이젠 '국가시스템'까지 망가지기 일보직전이었다.

  물론 이야기는 기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엄마'가 되돌아왔다. 그런데 엄마가 없는 '빈자리'가 이렇게나 크다는 것을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걸까? 그간 엄마들은 스스로를 '헌신'하고 '희생'했으면서 왜 아무런 생색도 내지 않았던 걸까? 아니다. 엄마들이 말을 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알고도 '모른체' 했고, 듣고도 '못들은체' 했을 것이다. 그래서 엄마는 '잔소리'를 더 크게, 더 자주 했었는지도 모른다. 해도해도 고쳐지질 않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이제라도 '엄마의 잔소리'를 달콤한 초콜릿처럼 들어야겠다. 엄마가 '잔소리'를 하기에 앞서 '알아서' 척척 해야 겠다. 그래도 엄마는 잔소리를 멈추지 않을 거다. 엄마가 '하는 일'은 너무 많고 너무 힘들기 때문일 것이다. 해도해도 끝이 나지 않는 것이 전세계 엄마들이 해온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엄마가 아프면 온세계가 아프게 된다. 제발 엄마가 아프지 않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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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사라진 날 저학년 읽기대장
고정욱 지음, 허구 그림 / 한솔수북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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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 역시, 이세돌과 알파고의 바둑대결의 승패를 보면서 '학교'가 사라질 거라는 상상을 했더랬다. 왜냐면 단편적인 지식은 더는 '암기'할 필요가 없어지고 '검색'만 하면 누구나 지식을 '소유'할 수 있는 '인공지능 시대'가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인간은 '인공지능' 덕분에 힘든 노동을 할 필요도 없게 될 것이다. '단순 노동'의 경우에는 인공지능이 탑재된 로봇이 24시간 쉼없이 일을 '대신' 할 수 있기 때문에 인간은 '인공지능 로봇'이 제대로 작동하는지만 감독하면 그만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인간이 단순 암기의 고통과 고된 노동에서 해방되면 마냥 놀고 쉬기만 하면 될 것 같은데,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직업'을 갖는 까닭이 바로 '임금'을 얻기 위해서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는 인간이 필요치 않게 되면 '노는 인간'은 임금을 한 푼도 벌 수 없게 되고, 그러면 '경제'의 주체가 사라져버리기 때문에 공장에서 물건이 만들어져도 그 물건을 살 수 있는 '소비자'도 사라져 버리게 되는 것이다. 이런 사회에서 인간은 몇몇 소수만 풍족하게 살아가고 나머지는 살아갈 쓸모도 없고, 의욕도 잃게 되어 끝내 버림받고 말 것이다. 더구나 멀쩡한 사람도 버림받을 지경에 이르면, 장애를 갖고 있거나, 병들거나 늙은 '사회적 약자'들은 아예 폐기처분해버릴 수도 있다. 이런 우려가 있기 때문에 '인공지능의 발달'을 멈추거나 늦추자는 주장도 하는 사람들도 많다.

  이 책에서는 '인공지능의 발달'로 인해 '학교'가 사라지고, 배움을 잊은 사람들이 오직 '인공지능의 명령'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살아가는 어두운 미래를 보여주고 있다. 초등 저학년을 위한 어린이책이므로 그보다는 조금 덜 심오하게 '학교가 사라져서' 학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의 행복한 미소를 보여주고 있지만, '학교'가 사라지고 난 뒤의 슬픈 현실을 조금이나마 미리 엿볼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왜냐면 학교를 대신해서 집에서 '인공지능이 짜준 스케쥴' 대로만 따라야 하는 일상이 펼쳐졌기 때문이다. 더구나 '인공지능의 첫번째 의무'는 인간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인 까닭에 집밖으로 외출하는 것도 막으며 '현관문'을 잠궈버렸기 때문이다. 이렇게 '인공지능'은 인간을 위한 편리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활동'조차 감시하고 짜여진 계획표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끔찍한 감옥으로 바뀌고 말았다.

  이런 갑갑하고 끔찍한 곳에서 아이들은 하나둘 탈출해서 옛날 학교가 있던 자리의 '지하창고'로 모이게 된다. 인공지능의 발달로 학교가 필요없는 곳이란 '판단'을 내리게 되자 인공지능은 '학교'를 철거하고 그 위에 '공장'을 만들어서 어른들의 직장으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른들도 즐겁진 않다. 그 공장에서도 '인공지능의 감시(?)'는 물 샐 틈도 없이 철저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하창고에 '또 다른 교실'을 만들어서 아이들 스스로 공부하고 토론하는 학교를 만들자 아이들은 좋아했다. 그렇지만 인공지능은 하나둘 사라지는 아이들이 늘어나자 '아이들이 모여있을 만한 곳'을 찾아냈고, 그곳에 경찰을 투입해서 어린이들을 체포하기에 이른다. 또다시 '감옥'으로 되돌아오게 된 아이들은 최후의 수단으로 '깐따야'에게 도움을 요청하는데...'깐따야'는 누규?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책이 사라지고, 학교가 사라지면 아이들은 왜 즐거워하는 걸까? 작가 고정욱은 책도 좋아하고, 학교도 좋아하는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사라져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는 이야기를 전개했다. 그렇지만 현실의 어린이들도 그럴까? 십중팔구 아닐 것이다. 어른들이 책과 학교가 소중하다는 '사실'은 알면서도, 그것들의 진정한 즐거움을 어린이들에게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른들도 책을 안 읽고, 학교 가기 싫어한다. 그런데도 어린이들에겐 그렇게나 싫을 것을 '강요'하다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 그러니 어린이들에게 '왜' 책읽기가 즐거운 일이고, 학교에 가서 '어떻게' 해야 재미난 곳인지 제대로 알려줄 필요가 있다.

  기본적으로 '책과 학교'는 모르는 것을 알고 이해하게 해준다. 그러니 몰랐던 것을 '알아내는' 즐거움을 맛보게 해주면 된다. 그런데 그런 '즐거움'을 느끼기도 전에 가르쳐준 것을 무조건 '암기'시키고, 그것을 확인하기 위해 '시험'을 치루고 평가를 내린다. 여기서 멈추지 않고 학생들을 '성적순'으로 줄을 세우고, 상을 주고 벌을 내린다. 옛날처럼 모른다고 때리진 않지만 안다고 상을 줘도 그 '즐거움'이 오래가지 않는 것이 문제다. 또한 '배운 것'은 적절하게 써먹어야 배움의 즐거움이 새록새록 솟아날텐데, 써먹기는커녕 외우고, 또 외우고, 또또 외우고, 장장 12년 동안 외우기만 시켜놓고 '수능(사고력)시험'을 치르고, '취직시험'을 또 치른다. 그렇게 어렵사리 회사에 취직을 하면, 그동안 배운 것은 써먹을 것이 하나도 없다. 그래서 '사회생활'에 첫발을 내딛고서는 또다시 새롭게 배워야 한다. 당췌 왜 외웠는지도 모를 지식만 잔뜩 머리에 남을 뿐이다. 이러니 '책과 학교'가 재미나 즐거움이 가득할리 없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발달하면 좀 나아질까? 우선, 단순암기 평가는 무의미하므로 '기존의 지식'으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창의성', 이것과 저것을 어떻게 해서 뭐라도 만들어내는 '융합성'을 평가의 새로운 잣대로 삼아야 하겠지만, 어린 학생들에게 '무에서 유를 창조해내는 능력'을 바랄 수는 없을 것이다. '모방은 창조의 어머니'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그래서 '기초지식'을 배우는 학교는 여전히 존재할 것이며, 적어도 '초등학교'까지는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교육현장의 모습은 많이 바뀔지라도 인간이 갖춰야 할 '기본적인 지식'을 배우기 위해서라도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생활하는 '학교'는 분명히 유지될 것이다. 그리고 그 학교에는 기본적으로 '책'을 교과서로 삼을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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