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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더 저널리스트 : 조지 오웰 ㅣ 더 저널리스트 2
조지 오웰 지음, 김영진 엮음 / 한빛비즈 / 2018년 2월
평점 :
[한빛비즈 138번째 리뷰] 앞으로 이렇게 정리를 해야 겠다. 그동안 쓴 리뷰는 '로마숫자'로 전체 표기를 하고, '출판사별 통계'는 리뷰의 첫머리에 장식하는 방식으로 말이다. '작가별 통계'도 따로 냈으면 좋겠지만, 워낙 중구난방으로 읽고 있고 지금까지 리뷰한 것을 '따로' 카운팅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으니 포기하련다. 이제 내게 주어진 '리뷰 쓸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으니 남은 시간동안 만이라도 최선을 다해 보련다. 어느 날, 내 리뷰가 멈추면...나도 없을테다.
작금의 현실에서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 있다면 '저널리스트'라고 꼬집고 싶다. 못난 정치꾼들의 '독재'를 멈출 수 있는 것은 언제나 '깨어 있는 언론'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펜은 칼보다 강하다'라는 명언을 남겼지만, 지금의 세계는 '펜이 사라진 시대'를 지나고 있다. 전통적인 매체인 '신문'은 본분을 잊은 지 오래고, 구독자들의 외면마저 받고 있다. '방송매체'는 못된 정권에 장악되어 '나팔수 역할'만이 전부인줄 착각하고 있으니,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새로운 매체로 자리잡은 '너튜브' 같은 곳에 기대를 걸어야 할 판이지만, 이곳마저 '가짜뉴스의 온상'이고 보니, 저널리스트가 살아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가 없는 깜깜한 시절이다. 그렇기에 '저널리스트'라기엔 한참 부족하지만 '깨어 있는 시민'으로 살아있음을 알리고 싶다. 분명 '깨어 있는 분'들이 아직 남아 있을 거라고 믿고 있다.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늘 깨어 있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 책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앞선 '헤밍웨이'와 '마르크스' 편과 짝을 이루는 책이다. 이들은 '소설가'이며 '사상가'이기도 했지만, 부당한 일에 참지 않은 '저널리스트'로 활약했다는 공통점도 갖고 있다. 그래서 이 책은 '그 사람'들이 남긴 저널들을 짜깁기해서 한 권의 책으로 엮어 낸 것이다. 하지만 '시대순'으로 쓰여진 저널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주제별'로 따로 묶어서 엮었기 때문에, 이들이 펼쳐낸 '생각의 변화'나 '저널리즘의 흐름'이 잘 보이지 않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럼에도 각각의 책들에는 '그들'이 냉철한 이성을 바탕으로 한 날카로운 저널리스트였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사회적 문제'가 있는 곳에 '저널리즘'도 함께 있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기도 한다. 그런 까닭으로 오늘날의 세계적인 혼란이 벌어지는 한복판에 '저널리즘'이 보이지 않는 것이 더욱 안타까울 따름이다. 그리고 그런 '저널리스트'들의 생각들을 한데 엮어서 모두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수고가 잘 보이지 않아 아쉽기만 하다. 내 깜냥으로 그것들을 한데 엮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쨌든, 이 책 <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은 전쟁으로 혼란스런 아픈 시대를 살아간 조지 오웰이 참지 않고 쏟아낸 저널들을 한데 엮은 책이다. 오웰이 1903년에 태어나 1950년에 사망을 했으니 1, 2차 세계대전을 온몸으로 겪은 셈이다. 주요 저작물은 미얀마 주제 인도제국경찰에서 근무한 경험을 토대로 쓴 <버마 시절>(1934), 파리와 영국에서 궁핍한 생활로 연명하며 쓴 <파리와 런던 안팎에서>(1933)을 출간하였으며, 가난한 노동자들의 삶을 그린 <위건 부두로 가는 길>(1937),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담은 <카탈로니아 찬가>(1938), 영국과 소련의 정치를 우화 형식으로 쓴 <동물농장>(1945), 그리고 디스토피아적인 암울한 미래사회를 그린 <1984>(1949) 등을 펴냈다. 하지만 그는 소설만 쓴 것이 아니다. <트리뷴>지를 비롯해서 다양한 신문에 정치적 논평을 써내는 등 날카로운 비평가로서의 모습도 훌륭히 보여주었다.
그리조 오웰은 '사회주의자'였지만 사회주의를 비판하기도 했다. 이는 '네편내편'을 가리지 않고 비판할 것이 있으면 참지 않는다는 속시원한 '사이다' 역할을 자처한 것이지만, 그 때문에 '이쪽저쪽'에서 다구리를 당하는 처지에 서기도 했다. 특히, 오웰은 '영국인'이면서도 '영국인'을 저격하는 글을 많이 썼다. 이를 테면, '무비판적인 애국심'은 참 애국심이 아니라 '국수주의'에 불과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영국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이 핀란드를 침공하자 대대적인 비난을 쏟아내며 핀란드 군인에게 보낸다며 뜨개질을 시작했는데, 소련이 갑자기 '연합군'편으로 돌아서자 소련을 지지하며 뜨개질로 완성된 물품을 소련에게 보내는 영국인들을 향해 '모순덩어리'라며 비판을 한 것이다. 이처럼 영국인들은 '신념'조차 잃어버렸다며 맹렬히 비판을 했다. 그리고 영국인들이 식민지인들에게 저지른 만행에는 둔감하면서 자국민들이 받는 조그만 불편에는 악다구니를 퍼붓는 '우매한 대중'을 향해서도 아낌없이 비판을 날렸다.
우리는 정의나 평등과 같은 신념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만 급급할 뿐, 그런 신념 따위는 자신들보다 '더 훌륭한 분들'의 전유물이고, 더 웃긴 건 '그런 분들'만이 입에 달고 직접 만들어서 우매한 대중들에게 선심을 쓰듯 베풀어주는 것인냥 철저히 '남일'처럼 생각한다. 그러니 자신들에게 닥친 '불공정, 불평등한 일'이 발생을 했을 때만 부랴부랴 신념을 끌어들여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하려 든다. 그러나 그런 호소에 '응답해주는 이들'은 극히 소수일 뿐이다. 왜냐면 더 많은 대중들이 '그따위 신념'에 그닥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언제부터 이렇게 '다른이의 고통'에 둔감하게 되었을까?
우리는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관심'을 보여야만 한다. 적극적으로 간섭하거나 참견하라는 얘기가 아니다. 정의롭지 못한 일이 벌어지면 '관심'을 모아주란 말이다. 불평등한 일이 발생해도 '관심'을 쏟아줘야 한다.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잡기'에 동참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사회는 갈수록 살기 힘들어진다. 정치는 말할 것도 없다. '정치가'는 실종되고 '정치꾼'만 남아 국민을 우롱하고 '대국민 사기'를 벌이려는 못난이들만 설치는 마당에 '관심'마저 없다면 한국정치는 바로 설 희망조차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렇기에 '최소한의 정치참여'가 절실하다. 정치하는 사람치고 '믿을만한 사람'은 100% 없다. 그러니 정치인을 믿고 정치를 맡겨서는 절대로 안 된다. 철저히 감시하고 언제나 감시해야 마땅하다. 특히, 한 입으로 두 말하는 정치인, 국민을 위해서 자기가 할 일을 말하기보다 국민을 위한다며 상대를 헐뜯는 일에만 열심인 정치인, 그리고 자기가 저지른 일에 대해 한 점의 부끄럼도 느끼지 못하는 뻔뻔한 정치인은 절대로 뽑으면 안 된다. 그런 당을 지지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정치는 '소신'을 갖고 해야 마땅하고, 대중은 '신념'을 갖고 지지해야 나라가 바로 서는 법이다.
적어도 조지 오웰은 '자기만의 신념'에 투철했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은 흔들리지 않고 밀어붙였으며, 자신이 저지른 실수가 명백해지면 '부족했다'고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웰의 저작물은 오롯하고, 오웰의 저널은 날이 번뜩인다. 지금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