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 교수의 세상만사 유럽만사 - <먼나라 이웃나라> 유럽 완결 편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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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 교수의 세상만사 유럽만사 : <먼나라 이웃나라> 유럽 완결 편> 이원복 / 김영사 (2010)

[My Review MMCXCIV / 김영사 3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스물세 번째 리뷰는 <먼나라 이웃나라>로 유명한 만화가 이원복 교수의 <세상만사 유럽만사>라는 책이다. 이 책은 2000년에 처음 출간되었다. 짐작하셨듯이 '유럽연합(EU) 출범'에 맞춰서 유럽에 관한 모든 것을 알아보자는 취지에서 출간한 책이다. 부제에도 잘 나타나 있듯이 이 책의 상당 부분은 <먼나라 이웃나라 : 유럽 여러 나라 편>의 내용을 발췌했다. 그런 의미에서 <먼나라 이웃나라>를 여러 번 읽으신 독자분들은 읽을 필요가 없는 책일 수도 있지만, 딴에는 여러 편의 책 내용이 '한 권'에 집약되어 있다는 점에서 <먼나라 이웃나라>를 봤더라도 '또 보면' 좋을 책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런 의미 말고도 이 책이 볼만한 까닭은 또 있다. <먼나라 이웃나라>가 '네덜란드', '프랑스', '도이칠란드', '이탈리아', '영국', '스위스', '스페인', '러시아' 등 비교적 유럽 강대국 위주로 자세히 다루고 있는 반면에 이 책은 비록 다루는 분량은 적지만 '북유럽', '동유럽', '남유럽', 그리고 '미니 국가들'까지도 촘촘히 다루고 있기 때문에 <먼나라 이웃나라>를 즐겨 읽으셨던 분들이라도 새롭게 알게 되는 지식들이 상당할 것이다. 나도 '오스트리아'와 '발트 3국', '폴란드', '헝가리', '유고슬라비아', '알바니아', '그리스' 등등 처음 접하는 유럽의 역사에 신기함을 느낄 정도의 신선한 낯섦을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면서 80년대 어릴 적에 어렴풋이 늬우스에서 들어봤을 법한 토막지식들이 불쑥불쑥 떠올라서 더욱 집중하며 읽게 되었다.

더구나 21세기에 접어들면서 '냉전시대'가 저물자 초강대국 미국을 맞설 상대로 '유럽연합'을 꼽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은 어떤가? 미국의 상대로는 중국이 새로 부상을 했고, 유럽연합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심지어 '이재명 정부'가 들어선 대한민국에도 미치지 못할 정도로 '낙후'된 유럽의 현주소를 재조명할 지경에 이르렀고, 경제, 정치, 외교, 군사, 사회, 문화 모든 면에서 유럽의 각국이 '대한민국'에 의지하는 행동을 취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한마디로 '한국이 없으면 유럽은 안 된다'는 식으로 완전히 역전된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현재에도 유럽 각지에서는 '극우 정권'에 의한 혼란한 정국으로 인해 존립 자체에 위기감이 형성되고 있고, 수많은 청년들은 '일자리'와 '복지혜택'을 달라며 연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그나마 평화로운 시위도 아니어서 폭력과 방화, 강도 따위의 '2차 피해'는 눈덩이처럼 커져 극심한 사회혼란과 갈등이 격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한때 우리가 배우고 따라하고 싶었던 '모범국가'였던 유럽을 다시금 되짚어보고, 그래도 배울 점이 있으면 배우고, 반면교사로 삼을 것이 있다면 낱낱이 밝혀서 뽕을 뽑아내는 것이 이 책의 진정한 출간 목적일 것이다. 비록 출간된 지 20년이 넘은 책이긴 하지만, 대한민국이 유럽의 잘못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서라도 읽어두면 좋을 책이다. 그럼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이원복 교수의 세상만사 유럽만사> 관점 포인트 : 1차와 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장터였던 '유럽'은 1945년을 기점으로 새롭게 발돋움하게 된다. 이전부터 강대국이었던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러시아 같은 나라들은 아픔과 상처를 빠르게 회복하고 정치와 경제적 안정을 통해서 탄탄하게 성장하였다. 그밖에도 베네룩스 3국이라든지, 북유럽의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 핀란드 같은 나라들도 어려운 상황을 잘 극복하고 성장에 성장을 거듭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그밖의 유럽 국가들은 전장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승전국의 전리품'으로 전락하거나, '패전의 아픔'에다가 '극심한 빈곤'까지 겹치면서 오래도록 성장은커녕 '안정'을 되찾지도 못하는 불운을 겪기도 했다. 게다가 서슬퍼런 '냉전'이 휘몰아치자 유럽의 약소국들은 '두 개의 이데올로기'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길 강요당했고, 자발적으로 선택했더라도 '미국이나 소련의 위성국가' 신세를 면치 못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래서 똑같이 유럽 국가라고해서 모든 유럽 국가가 번영을 구가하고 부러움을 사는 '모범국가'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2000년 이후 새로 출범한 '유럽연합(EU)'에 여러 유럽국가들이 가입을 하면서 비록 '가상 국가'이고 경제적 이익을 도모하기 위해서 강압적으로 뭉친 점이 없지 않지만, 연방국가인 '미국'과 더불어서 엄청난 '경제력'을 가진 새 국가가 등장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 되었다. 그리고 2026년이 된 지금 돌이켜보면 '유럽연합(EU)'는 우리가 따르고 싶고 부러워하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이들이 '대한민국'을 따르고 부러워하는 나라로 인식하게 되는 역전 현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과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런 역전 현상이 벌어진 것일까? 우리는 무엇을 잘 했고, 유럽은 뭘 잘못했기에 그런 것인지 파악해볼 필요가 있다.

첫째, 유럽은 다양한 '민족' 국가다. 유럽연합이 아무리 강력하고 엄청난 경제적 파급력을 갖춘 연합체일지라도 그들은 애초에 똘똘 뭉치기에 너무 힘들고 어려운 '고유한 민족'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들 민족끼리 '유럽'이란 대륙 안에서 수천 년 동안 지지고 볶고 싸우며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을 벌여왔기 때문에 이들 나라가 '하나'로 뭉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단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구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민족간의 갈등이 번져 '인종청소'로까지 확대되어 엄청난 인명살상이 일어난 것이다. 세르비아인이 알바니아인의 독립요구를 묵살하고, 이에 저항하는 알바니아인을 상대로 대학살을 자행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수백 년 간 다른 강대국들의 압제속에서 함께 저항하며 어렵사리 쟁취한 독립이었는데, 그렇게 한 나라가 된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들이 서로 융합하지 못하고, 그들끼리 전쟁을 벌일 정도로 '민족 간의 이질감'이 너무 강하게 작용하는 곳이 바로 '유럽'인 것이다.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를 암살해서 제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세르비아 청년도 바로 자신들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굴종을 요구했기에 암살 사건을 벌인 것이다.

둘째, 유럽은 '종교'간의 갈등이 심하다. 우리나라는 종교전쟁으로까지 번진 역사가 없기 때문에 유럽에서 벌어지는 '종교 갈등'이 낯설게 느껴질 수 있지만, 유럽만큼 '종교'로 인해 전쟁까지 불사한 역사를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먼 옛날에는 '다신교'를 믿었지만, 이집트에서 노예로 살며 박해를 받던 '유대민족'의 종교인 '유대교'에서 일신교 사상이 퍼져나가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았고, 로마제국이 동서로 갈라지면서 서로마에는 '가톨릭'이, 동로마에는 '그리스 정교'가 자리잡게 되었다. 한편, 가톨릭이 우세하던 지역에서는 '신교(프로테스탄트)'가 새롭게 등장하면서 '구교 vs 신교'로 나뉘어 본격적인 종교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 전쟁은 '30년 전쟁'의 결말인 '베스트팔렌 조약'에 의해서 각각의 믿음을 서로 존중하기로 합의를 보고 일단락이 되었지만 전쟁이 완전히 종식된 것은 아니었다. 구교를 믿는 나라안에서도, 신교를 믿는 나라안에서도 '저마다의 사연'을 들면서 '종교 갈등'이 벌어졌고, 내전이 벌어지거나 믿음의 자유를 위해서 새로운 곳으로 대규모 이주를 하는 등 종교전쟁의 여파는 끊이지 않고 이어져서 지금까지도 계속 되고 있다.

더구나 '십자군 전쟁' 이후 그리스도교와 이슬람교 사이에는 씻을 수 없는 갈등의 골이 생겼고, 이 둘 사이에서는 오직 자신이 믿는 종교만이 '정의'이고, 다른 믿음은 '이교도'에 불가하니 살상을 해도 무방하다는 식으로 갈등이 첨예하게 벌어지면서 역시 지금까지도 툭하면 전쟁도 불사하는 일이 자행되고 있다. 여기에 '유대인 배척'은 유럽인들의 고질병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뿌리 깊고, 갈등해소의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심각한 것은 여전하다. 이런 갈등과 전쟁을 막기 위해서는 오직 '힘의 논리'밖에 남지 않았기에 유대교의 본산인 '이스라엘'은 엄청난 경제력을 바탕으로 미국을 꼭두각시처럼 부려먹고 있고, 유럽을 찍소리 못하게 내리누르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 유럽의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힘 쎈 밉상'으로 찍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틈만 보이면 유대인들을 못잡아 먹어서 안달이 날 정도로 갈등은 심각하다.

셋째, 유럽은 여러 가지 잡다한 '이데올로기(사상)'의 대립으로 인해 쌓인 갈등과 반목으로 온전히 치유되기 힘들다. 한때는 '똘레랑스(관용)'를 내세우며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포용하려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이던 유럽이었지만, 각자의 삶이 피폐해지자 다시금 '야만의 본성(?)'을 드러내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졌다는 것만으로도 '배척'하고 '살상'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여기게 되었다. 대표적인 '자본주의 vs 공산주의'의 대립은 이제는 사그라드는 추세이긴 하지만, 여전히 불씨는 곳곳에 남아 있다. '파시즘'과 '나치즘'의 망령은 첨예한 사회갈등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스물스물 되살아나 저들이 강성했던 역사의 한 대목을 목청껏 외치며 자기와 생각이 다른 이들을 향해 '폭력행사'를 하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자유, 평등, 박애 사상을 전파하려던 나폴레옹도 황제의 자리에 오르자 '독재자'로 탈바꿈하며 폭력을 일삼았지 않은가 말이다. 프랑스대혁명 이후 왕의 목을 자른 '급진 공화파'들은 왕정복고를 외치는 '왕당파'와 반목하며 서로의 목숨이 다할 때까지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고 싸움을 일삼았다.

그리고 끝으로 유럽 각국은 '영토확장'을 꾀하는 정복욕을 버리지 못해서 유럽대륙을 난장판으로 만들었고, 약소국들은 자신들의 힘으로 강대국의 야욕을 막아내지 못하고 수백 년 동안 압제와 핍박을 당하다 비교적 최근에야 독립을 하고, 현재 '유럽연합'의 일원이 되는 바람에 갈등의 골이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위기감이 산재해 있다. 유럽 각국은 이런저런 핑계를 내세워서 '자국의 영토'를 조금이라도 넓히려고 해왔기 때문에, 현재에는 '국경분쟁'이 없는 유럽국가가 없을 정도다. 이에 따른 '피지배 민족'이 끝없이 저항하며 독립을 요구하고 있는 상황이 현재까지도 벌어지고 있단다. 믿기 힘들지만 말이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도 '흑해'를 둘러싼 '크림반도 소유권'이 대화로 해결되지 않자 전쟁이 발발하게 된 것이고, 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휴전'이나 '종전'에 대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지난한 세월동안 서로 뺏고 빼앗은 '영토문제'로 인해서 유럽은 지금도 '화약고'로 지탄을 받고 있는 것이다.

나가는 글 : 이 책의 내용은 '각 나라마다' 한 꼭지씩 자세하게 설명하는 방식으로 나열되어 있지만, 위의 네 가지 요소로 '큰 그림'을 그리며 읽다보면 유럽 각국의 역사가 왜 그렇게 진행되어 왔는지 충분히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유럽의 역사를 공부할 때에는 그 나라의 '민족구성원'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파악하면 이해하기 쉽고, 그 나라 구성원들이 믿고 있는 '종교'를 파악하면 갈등의 양상이 어떻게 벌어지고 어떤 식으로 전개될 것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된다. 또한, 그 나라의 '이데올로기' 성향이 어떤지 파악하게 되면 그 나라에서 벌어지는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이 한 방에 정리되고, 끝으로 역사상 높으신 양반들이 벌인 '전쟁의 결과'로, 또는 '혼인'의 결과'로 '영토의 소유권'이 누구에게서 누구에게로, 어느 나라에서 어떤 나라로 넘어갔는지 살펴보면, 유럽 각국이 왜 그리 싸우는 것인지 한 방에 이해가 될 것이다.

이 책에는 위의 네 가지 요소가 아주 이해하기 쉽게 설명되었기 때문에 한 번만 읽어도 '유럽의 모든 것'을 마스터한 느낌을 얻게 될 것이다. <먼나라 이웃나라>를 즐겨 읽으시는 독자라면 '민족', '종교', '사상', '영토' '네 가지 요소'로 정리하면서 읽으면 훨씬 더 잘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유럽'을 통해서 배울 점이 있을까? 요즘처럼 전세계에서 진정한 선진국이자 강대국으로서 '대한민국의 위상'이 높아졌다는 느낌을 받아본 적이 없다. 정말이지 얼떨떨할 지경이다. 그런데 이게 다 우리가 70~80년대부터 유럽을 '모범답안'으로 삼고 부단히 쫓아가려 노력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프랑스처럼 '문화대국'이 되고 싶었고, 독일처럼 '과학기술의 정점'을 찍고 싶었으며, 영국처럼 '전세계를 통솔하는' 위치에 올라서고 싶어했다. 그런 부단한 노력의 결과 현재의 대한민국이 된 듯 싶다. 한류열풍을 넘어 진정한 '문화강국'으로 발돋움을 했고, 독일보다 앞선 '과학기술력'을 발달시켜서 전세계 1위 제품을 당당히 내놓을 수 있게 되었다. 대한민국은 '수출'만이 살 길이다. 한편 대한민국은 명실상부한 '선도국가'로 발돋움 했다. 과거 유럽의 열강들이 '제국주의'를 앞세워서 약소국들을 식민지로 삼고, 그들을 강제로 엎드려 꿇린 다음에 질질 끌고 나갔지만, 대한민국은 약소국 뿐만 아니라 기존의 강대국들조차 '동등한 위치'에서 대등한 무역상대국으로 삼아 전세계를 향해 '수출길'을 여는 기염을 토했다. 불과 몇 년 전만해도 우리는 수출하기 위해 여러 나라들에 굴욕적인 '매달리기'를 해야 했다. 그러나 지금은 반대가 되었다. 다른 나라들이 오히려 대한민국과 원활한 교역을 하기 위해 눈치를 보고 있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이런 위엄(?)이 천년 만년 이어질 것인가? 우리도 유럽이 고질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민족 문제', '종교 문제', '사상 문제', '영토 문제'를 원만하게 갈등의 폭을 줄이고 해결해나가지 못한다면 '현재의 유럽'처럼 폭망할 수도 있다. 우리는 '분단국가'로서 한 민족끼리 어마어마한 살상을 하는 처절한 전쟁 경험을 갖고 있다. 또한 첨예한 '사상' 간의 갈등으로 남북으로 분단 되어 있고, 남남끼리는 '보수 vs 진보'의 논리로 서로 양보 없는 전쟁을 일삼고 있다. 그리고 '독도'를 둘러싼 영토 문제는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명백한 대한민국 영토인제 이웃나라인 일본은 독도를 '영토분쟁화'시켜서 호시탐탐 빼앗으려는 야욕을 버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통일교와 신천지, 그리고 일부 개신교 따위의 세력이 '정교 유착'의 고리를 맺고 불법적이고, 부정한 방법으로 '영구 집권'을 꾀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른바 '윤 어게인'을 주장하는 종교단체들이 일으킨 문제인데, 유럽의 사례를 보아도 '종교 문제'만큼은 절대적으로 피해야 할 문제다. 우리가 이런 문제들을 슬기롭게 헤쳐나갈 방법을 터득하고, 이 모든 문제를 좌지우지할 '원천적인 힘'을 갖추게 되면 아무 탈도 없이 쑥쑥 성장할 일만 남았다. 허나 만에 하나라도 이 문제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대한민국은 미래를 장담하지 못할 혼란의 구렁텅이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모쪼록 유럽의 문제를 '반면교사' 삼아 우리 나라에서는 절대로 읽어나지 않게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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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 개정판
아멜리 노통브 지음, 백선희 옮김 / 문학세계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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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테크리스타> 아멜리 노통브 / 백선희 / 문학세계사 (2022) [원제 : Ante`christa]

[My Review MMCXCIII / 문학세계사 7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스물두 번째 리뷰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앙테크리스타>다. 먼저 '표지그림'을 보고 살짝 실망을 했다. 원래 예전의 표지에는 아멜리 노통브의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박혀 있었는데 말이다. 새로 '개정판'의 표지는 완전 내 취향이 아니어서 많이 실망을 했다. 애초에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의 등장인물은 대개 성격은 둘째치고서라도 '외모'만큼은 절세미인으로 그려놓았으니 책표지도 그에 걸맞게 매혹적으로 그려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무리 등장인물의 나이가 '미성년'에 해당하는 열여섯 소녀들일지라도 '매혹적인 외모'로 그렸어야 했는데 아쉽다는 말을 먼저 꺼낸다. 뭐, 취향에 해당하는 부분이니 '개정판의 표지'가 훨씬 더 마음에 든 독자들도 있을 것이다. 그럼 다짜고짜 책 내용으로 풍덩 빠져들어 보자.

<앙테크리스타> 관점 포인트 : 주인공은 열여섯 살 대학생 소녀로 이름은 '블랑슈'다. 열여섯 살에 벌써 대학생이라니 대단히 공부를 잘한 모양이다. 공간적 배경이 '벨기에'이므로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아마도 '학점이수제' 같은 방식으로 조기 대학입학이 가능한 모양이다. 암튼 열여섯 살에 대학입학이 그리 드문 편은 아닌 모양이다. 주인공인 블랑슈 말고도 '크리스타'라는 열여섯 살 소녀도 같은 학교에서 같은 강의를 듣고 있었으니까 말이다. 소설의 시작은 두 학생의 첫 만남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둘의 만남은 '악연'이었다. 크리스타가 블랑슈에게 들러붙더니 끝내 블랑슈네 집에 얹혀 살게 되면서 '블랑슈의 모든 것'을 잠식해 들어갔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타겟이 된 사람들은 다름 아닌 '블랑슈의 부모님'이었다. 크리스타는 매혹적인 외모와 화려한 언변으로 여느 부모님이라면 듣기에 너무 달콤한 말들을 선사하며 '블랑슈 부모님의 마음'을 매혹시켰고, 더 나아가서 친딸인 블랑슈의 '진실된 말'보다 크리스타의 '거짓된 말'을 더 믿고 신뢰할 지경에 이르렀다. 블랑슈도 그제서야 자신이 지독한 '함정'에 빠졌고, 크나큰 '실수'를 했으며, 자신이 가진 것을 모두 크리스타에게 '헌납'하듯 빼앗겨버린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렇게 그 둘의 기묘하고 거북한 동거가 시작한다. 아참, 크리스타의 집이 학교에서 '왕복 4시간'이 넘게 걸리기 때문에 이를 불쌍히 여긴 블랑슈가 '인생 첫 친구'를 사귀게 된다는 기쁨에 들떠서 부모님을 설득해서 크리스타와 함께 살고 싶다고 부탁을 했고, 크리스타와 첫 만남 이후 그녀의 매력에 흠뻑 빠진 블랑슈의 부모님은 흔쾌히 허락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동거를 하게 되면서 블랑슈는 점점 '불편한 일'만 겪게 된다. 애초에는 '처음 사귀게 된 친구'와 함께 지낼 수 있게 되어서 한껏 들뜬 마음이었지만, 블랑슈는 크리스타의 말과 행동 때문에 자기 부모님에게 '못난 딸'로 전락했고, 자기 방에 있던 '침대'마저 빼앗겨 '간이침대'로 쫓겨났고, 학교에서는 '크리스타의 단짝'이라는 소개만 받았을 뿐, 제대로 사귈 수 있도록 도와주지도 않고 뻘쭘하게 크리스타와 그녀의 친구들의 이야기만 듣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블랑슈는 여전히 '친구 하나' 없는 외톨이 신세였던 셈이다. 애초부터 크리스타는 블랑슈를 '이용'해 먹을 생각뿐이었지. 블랑슈의 찐친이 되어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불편한 일상이 학교에서만 일어났다면 블랑슈도 그저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더욱 불편하게 만든 것은 블랑슈의 집에서조차 '크리스타'가 블랑슈가 당연히 받아 마땅한 사랑과 인정조차 다 앗아가버리고 블랑슈를 내몰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냐면, 크리스타가 블랑슈의 부모님과 마주 할 때마다 '점수'를 따내고, 블랑슈를 그야말로 '찐따'로 만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더 속상한 것은 블랑슈의 부모님조차 그런 크리스타의 '계략(?)'에 넘어가서 크리스타를 친딸처럼 살갑게 대하고, 블랑슈를 어디서 데리고 온 보릿자루 마냥 푸대접을 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푸념까지 늘어놓기 일쑤라는 점이다. 이쯤되면 독자들은 '답답함'을 느끼게 된다. 불쌍해서 도와주려 했는데 그런 '좋은 마음'을 악용(!)해서 저 혼자만 '점수'를 따고도 만족하지 못하고 철저한 외톨이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아멜리 노통브 소설의 '전형적인 패턴 전개 방식'이다. 이런 식의 전개방식을 하도 읽어재끼다보니 이젠 식상할 정도가 되었다. <살인자의 건강법>을 읽을 때만해도 '천재적'이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오후 네 시>를 읽으면서 그 지독한 답답함에 몸서리를 칠 정도였다. 물론 이때까지만해도 아멜리 노통브라는 작가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어서 읽게 된 <로베르 인명사전>, <사랑의 파괴>, <두려움과 떨림>, 그리고 <적의 화장법>까지 읽어내려가니 뭔가 진부함을 느꼈다. 미치도록 답답했고 정의는 언제쯤 실현될 수 있는 것인지 점점 분노게이지를 차오르게 만들었다. 왜 이 작가는 이토록 '적'을 만드는데 고심을 하고 애꿎은 '희생자'를 만들어 괴롭히는 것일까 하고 의문이 들 정도였다.

더구나 매혹적인 적이 등장해서 선량한 희생자를 괴롭히는 장면을 몰아부치는 대목을 읽을 때면 매우 '불편함'을 느끼곤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적이 없는 삶은 허무와 권태의 구렁텅이, 가혹한 시련이 아니겠는가? 그런 고로 적이야말로 구세주다'라는 변명을 했다. 한마디로 궤변이 아니겠는가. 그러면서 '적이란 분명 지옥 같은 고난을 안겨주는 존재지만, 고난이야말로 희생자에게 새로운 탄생의 기회가 될 수도 있는 생의 패러독스 아니겠는가'라면서 사이코패스적인 헛소리를 지껄이기도 했다. 이런 '도그사운드'를 듣기 위해서 그녀의 소설을 읽어갈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나가는 글 : 그런데 묘하게도 이런 '궤변'이 먹혀들어가는 점이 없지 않다. 그건 바로 '재밌다'는 것이다. 무슨 변태가학적인 헛소리냐고 되물을 수도 있겠지만, 솔직히 그랬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재밌는 편이다. 단지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불쌍한 '희생자'가 겪고 있는 불행을 엿보고 싶지 않다는 일말의 '죄책감(?)' 같은 것이 들 뿐이다. 어차피 허구의 세계를 그린 소설일 뿐이니 얼마든지 즐길 수 있고, 재미를 느낀다면 무슨 짓인들 못할 것이 없고, 꺼릴 것이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내 양심이 이런 '악질적인 의도'를 분명히 드러내는 등장인물(악당, 또는 적)을 가만 두고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궤변도 궤변 나름이고, 악행도 악행 나름이다. 적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거나, 천인공노할 악행을 저지른 당사자가 준엄한 법의 심판을 받아 정의가 구현되거나, 그런 정의의 심판조차 교묘히 빠져나갈 정도로 악질적인 등장인물이라면 절대로 피할 수 없는 '천벌'이라도 당연한 듯 받아야 속이라도 시원할텐데, 아멜리 노통브 소설에서는 그런 '정의감'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 솔직히 큰 실망을 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을 읽으면서 더는 '재미'라는 것을 느끼면 안 되겠다는 반성까지 해야 마땅한 것이라 '정색'할 정도가 되고 말았다.

심지어 이 소설의 제목이 <앙테크리스타>다. 프랑스어라서 '뜻'이 잘 전달이 안 되겠지만 영어로 표현하면 '안티 크리스트'가 될 것이고, 우리 말로 풀어 쓰면 '적 그리스도'다. 사탄보다 더 무섭다는 '거짓 예언자'말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적' 크리스타가 바로 '거짓'에 능통한 인물로 등장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물론 이 소설이 '종교적 박해'를 주장하는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지는 않다. 그저 '거짓'을 일삼는 생을 살아가는 소녀의 이름이 공교롭게도 '그리스도'라는 뜻의 '크리스타'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그러니 굳이 종교적 해석을 가미할 필요는 없겠지만, 제목에서 전체 줄거리가 어떤 전개를 거칠 것인지 '암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수는 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는 크리스타의 거짓이 너무 불편했다. 자신의 거짓으로 너희들에게 '이득'이 되었다면 거짓이 나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아니냐? 설령, 그런 행위로 인해 크리스타가 '개인적인 이득'을 챙겼더라도 그건 오로지 널 위해서였다고 변명을 늘어놓는 장면이 되풀이되는 것을 지켜보고 있으면 화딱지가 날 정도다. 말은 청산유수처럼 잘도 갖다붙이지만 결국 '자기 이익'을 위해서 철저히 이용했다는 사실이 끝내 밝혀지게 된다. 그런데도 반성과 사과는커녕 도리어 순순히 '이용' 당하지 않았다고 되려 발끈하고 성질을 내는 꼬락서니까지 지켜볼즈음에는 열불이 터지고 말았다.

이토록 불편함 심정이라면 더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읽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감정이 '전부'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또 다른 뭔가가 있을 것이란 '직감'이 들었단 말이다. 그래서 기왕 읽기 시작했으니 '전작주의'까지는 아닐지라도 남은 소설들을 다 까발려주겠다는 심정으로 읽어보려 한다. 최근에 <리틀 아멜리>(원작소설 : 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도 개봉했다지 않은가? 분명 내가 보지 못한 '재미'가 남겨져 있을 것으로 보인다. 찾아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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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지음, 이상해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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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산> 아멜리 노통브 / 이상해 / 문학세계사 (2015) [원제: Acide Sulfurique(2005)]

[My Review MMCXC / 문학세계사 6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아홉 번째 리뷰책은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 <황산>이다. 뜬금없는 제목이다. 황산이라니. 내가 알고 있는 '3대 강산(强酸)'인 염산, 질산, 황산 가운데 하나인 그 황산이 맞단 말인가? 그런데 맞았다. 원제를 다시 확인해보니 딱 맞다. 그래서 줄거리에 '화학공정'이 나오거나 공간적 배경으로 '화학공장'이 나오는가 싶어서 읽었더니 작품 배경은 난데 없는 '집단수용소'였다. 그것도 21세기에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운영하던 그 집단수용소와 똑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여기서 작가 '아멜리 노통브'에 대해서 말을 꺼내는 것이 적당할 것 같다. 사실 아멜리 노통브의 데뷔작인 <살인자의 건강법>(1992)을 읽었을 때만해도 여러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재작가의 등장'이라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기발한 발상이 독자들로 하여금 '식상함'을 눈녹듯 사그라들게 만들었고, 책을 읽는 내내 '반전에반전에반전'을 거듭하는 놀라운 필치에 완전히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도덕적으로 매장 당해도 마땅할 '살인자'가 오래오래 장수할 비법이라도 터득한 듯 '건강법'이란 제목을 접했을 때의 충격은 가히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뒤를 잇는 그녀의 소설들은 하나같이 '발칙'했고, 너무도 '발칙'했기 때문에 '괘씸'했다. 게다가 독자들을 우롱하는 것을 넘어 기만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아니 독자들을 한껏 욕보이고 조롱하는 것을 맘껏 즐기면서 자신의 소설을 읽고 기분 나빠할 독자들의 지갑조차 탈탈 털어서 제 것으로 만들려는 '오만'함마저 엿보이는 순간. 결국 그녀의 소설을 '중독'된 듯 읽기를 멈춰버렸기 때문이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은 재밌다. 아주 기발하다 못해 독창적이라고 수긍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재밌는 소설을 읽으면서 기분까지 나빠지는 경험을 선사하는 것은 아무래도 불편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녀의 소설을 꾸준히 읽는 까닭은 무엇일까? 그건 그녀의 소설에서 마주할 수 있는 '불편함'이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민낯'을 들여다보는 장치로 뒤집어 생각해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그녀의 소설이 아주 쓰레기는 아니라는 얘기다. 단지 재미와 함께 불편함을 동시에 주기 때문에 솔직히 칭찬만 해주기 싫은 감정이 들 뿐이다. 그럼 '황산'의 줄거리 속으로 풍덩 들어가보자.

<황산> 관점 포인트 : 이야기는 느닷없이 사람들을 '집단수용소'라는 곳에 강제 이주시켜 자유를 빼앗고 억압하며 노동까지 시켰다. 집단수용소에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함께 수용했으며, 이들 가운데 자신이 '이곳'에 끌려온 이유를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다. 사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끌려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단수용소'는 제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운영했던 방식과 똑같이 운영되고 있었다. 그 유명한 '아우슈비츠'처럼 노동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것처럼 그냥 끌고와서 강제노역을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21세기에 말이다.

그런데 이곳이 나치 수용소와 다른 점은 '리얼리티 쇼' 프로그램의 일부라는 사실이다. 그렇다. 이곳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이 'TV'에 생중계 되고 있으며, 수많은 시청자들이 이곳에서 감금 당하고 노역을 하며 심지어 고문 당하고 죽어가는 장면을 보면서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 같았다. 왜냐면 이 '집단수용소'라는 제목으로 방영하고 있는 프로그램이 '시청률 1위'를 찍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시청률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자극적인 소재(!)를 방송하고 있었을 뿐이고, 시청률 1위를 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들을 '집단수용소'에 감금하고 폭행하며 아무짝에 쓸모가 없다고, 다시 말해, 시청률을 높이는데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면 매일매일 '처형'을 해서 새로운 사람들을 채우고 죽여버리는 짓을 계속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오직 '시청률'로 인한 '방송국의 이득'을 위해서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시스템'에 항거하는 영웅이 등장하게 된다. 집단수용소에는 자유를 박탈 당하고 끌려온 '죄수'도 있었지만, 이들을 감독하고 채찍을 때리며 통제하는 '간수(이들을 '카포'라고 부른다. 독일 나치에서도 똑같은 명칭이었단다)'도 함께 있다. 이곳에 카포로 취직(?)한 사람들은 특별한 사람들은 아니다. 쉽게 말해 '방송국 직원'으로 채용된 사람들일 뿐이며, 아무런 이유가 없어도 사람을 강제하고, 억압하고, 학대(!) 하면서도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만 있다면 누구라도 뽑힐 수 있었다. 그래서 카포들은 죄수로 잡혀온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학대하고, 때리는 일을 서슴지 않는다. 이걸 TV화면으로 지켜보는 시청자들은 카포들이 죄수들을 차지게 잘 때리고 교묘하게 학대하는 장면에 열광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카포들의 횡포에 굴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는 죄수가 등장했다. 이름은 CKZ 114다. 감옥이라는 곳이 늘 그렇듯 이곳에서 '본명'이 아닌 '번호'로 불릴 뿐이다. 그리고 그녀는 매우 아름다웠다. 그게 시청자들에게 소름 돋을 정도로 '관심'을 끈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예쁜데다 당찬 모습에 호감도가 급상승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시청자들이 원하는 것은 그녀가 매질을 당하는 것이다. 예쁜 여자의 맑은 피부에 핏자국이 생기고, 상처가 늘어나고, 그녀의 아름다움이 사그라질 때까지 때리고 또 때리는 '가학적 변태 성욕(일명 '사디즘')'을 채우는 것 뿐이었다. 그 일을 대신 하는 것은 '카포'이고 말이다. 그 가운데 CKZ 114를 맡은 카포는 '즈데나'라는 이름을 가졌다. 그녀는 시청자들이 원하는대로 그녀를 때리고 또 때렸다. 그리고 즐겼다.

그런데 한창 그 일을 즐기면서 즈데나 카포는 의문이 생겼다. 보통의 죄수들은 이쯤 맞았으면 항복을 하고 더 때리지 말아달라고 애원하거나 살려달라고 울음을 터뜨리기 일쑤인데, 그녀는 전혀 그런 행동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때리면 때릴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은 더욱 빛을 발하는 듯 싶었다. 처음엔 그 빛을 꺼꾸러뜨리기 위해서 더욱 매질을 가했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저항을 하는 그녀에게 더욱 애가 닳고 궁금증이 이는 것은 오히려 즈데나 카포였다. 그러자 그녀의 이름(본명)이 궁금해졌다. 이곳에 끌여온 이유 따윈 애초에 없지만 그녀의 이름이라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서는 살살 구슬렸다. 이름을 말하면 때리지 않겠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런 '조건'을 단칼에 거절했다. 즈데나 카포는 이름을 말할 때까지 더 때리고 또 때렸지만, 그녀는 요지부동이었다. 그러자 주위의 카포들이 즈데나 카포를 말릴 정도가 되었다. 매일 같이 심한 매질을 가하고 이름을 말하라고, 그러면 때리지 않겠다고, 먹을 것도 주겠다고 '유혹'을 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알아내지는 못했다. 그럼 그럴수록 시청률은 올랐고 방송사는 '그녀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TV화면이 그녀의 모습을 잡을 때면 '시청률'도 함께 올랐기 때문이다.

이렇게 한창 줄다리기를 하며 그녀와 카포 사이에 뭔가 '유대감' 같은 것이 생겼다. 먼저 즈데나에게서 '변화'가 보였다. 어느날 평소처럼 채찍으로 맞았는데 고통이 몰려오지 않았던 것이다. 알고 보니 즈데나 카포가 '맞아도 전혀 아프지 않은' 가짜 채찍을 손에 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메말라가는 그녀가 안쓰러워서 아무도 몰래 그녀의 주머니에 '초콜릿'을 넣어주기 시작했다. 물론 겉으로는 여전히 폭언을 일삼고 매질을 서슴없이 했지만 말이다. 그녀도 처음에는 당혹스러웠지만 차츰 '즈데나 카포'가 주는 호의를 받아들였다. 그렇다고 이름을 말해주지도 않았다. 간간히 즈데나 카포는 그녀에게 이름을 말하라고 구스르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러다 다른 죄수를 죽을 정도로 매질하고 '즉결처형'을 하려던 순간 그녀가 나서서 '즈데나 카포'를 만류하고, 처형을 모면하게 해주었다. "내 이름은 파노니크예요"라는 한마디로 말이다. 영웅 탄생의 순간이다.

나가는 글 : 그 뒤 이야기는 빠르게 전개되며 '시청률의 노예'가 된 방송사와 '자극적인 소재'에만 관심을 보이는 시청자의 '관음증'을 비판하는 뉘앙스를 팍팍 풍기며 아멜리 노통브의 그럴 듯한 '훈계'가 찌끄러진다. 사실 이 책에서 가장 불편한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다. 감히 작가가 '자신의 소설'을 읽는 독자들에게 '비난의 화살'을 마구잡이로 쏘아붙이며 불편함을 선사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결국 너희들도 다 똑같아! 라면서 말이다. 도대체 이런 '발칙한 작가'를 꾸준히 사랑해줘야 한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녀의 '비판의식'은 날카롭다. 품위도 없고 교양도 없는 '시청자'들의 수준을 고려해서 '방송사'들은 사활을 걸며 자극적인 소재들로 영상을 가득 채우는 저질스런 풍토를 지탄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수준 이하'로 떨어질 수 있단 말인가. 재미를 위해서는 '출연자'들을 망가뜨리는 짓도 서슴지 않았고, '비도덕적'인 소재를 방영하면서도 부끄러운 줄 모른다. 이런 저질 방송을 즐기는 시청자들도 마찬가지다. 겉으로는 교양 있는 척 하면서 '저질 방송'만을 찾아 채널을 요리조리 틀어댈 뿐이기 때문이다. 이런 증거들은 '시청률'로 다 드러나고 만다.

이걸 아멜리 노통브는 '관음증'이라면서 시청자들의 몰지각한 면모를 여지없이 비난한다. 그러면서 동시에 '시청률의 노예'가 된 방송사들도 싸잡아서 비난의 대열에 동등하게 올려놓았다. 이런 환자와 노예 들은 비난받아도 마땅하다면서 일장 훈계를 늘어놓고 있는 셈이다. 딴에는 수긍이 가면서도 그녀의 책을 읽는 독자들은 '불편한 속내'를 가질 수밖에 없다. 왜냐면 아멜로 노통브가 쏘아 올린 '비난의 화살'이 향하는 표적이 바로 독자 '자신'이기 때문이다. 너희들도 다 똑같아! 이러면서 말이다.

정녕 이토록 발칙한 소설가를 사랑해줘야 한단 말인가? 감히 이처럼 독자를 우롱하고 조롱거리로 삼는 소설가의 책을 끝가지 읽어줘야 하느냔 말이다. 이게 <황산>을 읽은 독자들이 내놓는 대부분의 목소리다. 여기까지 리뷰를 하면서도 '황산'에 대한 이야기는 없지 않은가? 그렇기에 이 책의 제목이 참으로 뜬금 없다는 것이다. 사실 '황산'은 이 소설의 말미에 등장한다. 모든 것을 다 녹여서 없애버릴 정도의 강한 산성 용액의 등장이 이 소설의 '하일라이트'에 속한다. 그러니 '황산'에 대해 궁금증이 인다면 직접 읽어보셔도 좋다. 한편 염산이나 질산도 아닌 '황산'을 고집한 까닭도 강렬한 악취가 나는 용액이기 때문에 간택(?) 받은 듯 싶다. 색깔은 황홀할 정도로 밝은 노란색을 띄지만, 그 냄새를 맡은 코는 자기 손으로 직접 잘라내고 싶을 정도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황산'을 말이다. 너희들이 딱 그래! 코를 막고 싶은 정도의 악취를 풍기면서도 젠채하는 너희들이 딱 그정도의 수준이야! 라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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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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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6권 : 사진신부에서 민족개조론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8)

[My Review MMCLXXXIX / 인물과사상사 33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여덟 번째 리뷰는 균형 잡힌 역사서술가 강준만 교수의 <한국 근대사 산책 6권>이다. 그를 균형 잡힌 역사서술가로 소개한 까닭은 그가 쓴 책들에서 '좌표'를 찍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보수와 진보, 좌파와 우파의 시선을 '날것 그대로' 담담하게 전달하는데 중점을 두었을 뿐, 어느 한 쪽에 치우친 성향을 드러내지 않고 나름 '객관적인 서술자'로 남으려 무던하게 애쓴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난 좋았다. 아무래도 '한 쪽의 관점'에 서게 되면 '다른 쪽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풍경이 어떤지 전혀 알 수 없는데, 강준만 교수의 책을 읽다보면 그 양쪽의 관점을 모두 관찰할 수 있어서 참 좋았단 말이다. 거기에 너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적당한 해석'을 가미하고 있기에 조금 더 '객관적인 해석'으로 이해하기에도 무척 좋았다. 물론 이런 두루뭉술한 문장을 싫어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이제 막 역사에 입문하려는 독자들에게 좋은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 경우에도 그랬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사 산책 6권> 관점 포인트 : <한국 근대사 산책> 시리즈는 모두 1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1권부터 5권까지는 '개화기 시대'를 다루었고, 6권부터 10권까지는 '일제시대'를 다루고 있다. 그 가운데 6권은 흔히 '일제강점기'라 불리는 우리 역사가 암울했던 시기를 다루고 있다. 일제시대는 크게 셋으로 나누곤 한다. '무단통치기', '문화통치기', 그리고 '민족말살기'로 말이다. 그 가운데 6권은 '한일 강제 병합'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약 10년 간을 다루고 있다. 바로 위에서 열거한 '무단통치기'에 해당한다.

'무단통치기'는 우리 민족이 일제의 강제적이고, 억압적인 통치속에 숨조차 제대로 살기 힘든 시기였다. 일제의 헌병과 순사 들은 조선인이라면 아무나 붙잡아 공개적으로 '태형'을 하던 시기였다. 한마디로 조선인과 명태는 두들겨 패야 제맛(!)이라면서 문명인이 된 일본제국인이 미개한 조선인을 깨우쳐주기 위해서 무진장 애를 쓰는데, 더럽고 어리석은 조선인은 일본인의 선심을 제대로 해야리지도 못하니 때려서라도 '문명개화'를 시켜주겠으니 감사히 쳐맞으라는 식이었다. 이런 무자비한 통치를 하는 목적이 무엇이었을까? 만에 하나라도 조선인이 똘똘 뭉쳐서 저항이라도 할까봐 두려워했던 것은 아닐까?

전체 인구수로 보나, 경제력으로 보나 1910년대 당시 한국은 여러 모로 일본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강제 병합을 당한 직후였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나라 잃은 처지'로 전락하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러니 기가 죽어 있을 수밖에 없고 일본의 무단통치에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할 겨를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 민중들은 제대로 된 '교육'을 받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일제의 통치가 좋은 방식인지, 나쁜 방식인지조차 정확하게 인지할 수 없는 처지였다. 대다수의 민중들은 조선 때에도 '수탈' 당했고, 대한제국 때도 '수탈' 당했으며, 이제 나라를 잃어버렸지만 여전히 '수탈' 당하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나마 공교육이라도 제대로 받고 있었다면 '누구'에게 수탈을 당했고, 그렇게 수탈 당한만큼 '정책적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본적인 권리를 배워서 알아서 분노라도 했겠지만, 그런 기본적인 권리조차 가르침을 받은 적이 없는 민중들에게 무엇에 대한 분노를 할 수 있었겠느냔 말이다. 이놈에게 빼앗기나 저놈에게 빼앗기나 '빼앗긴 놈'은 그저 불쌍한 처지일 뿐, 변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 1910년부터 1919년까지 일제가 악착같이 수탈해가는 꼬락서니를 보니 우리 민중들도 뭔가 다른 것을 느끼게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1919년 3월에 벌어진 '3·1 만세 혁명'이 그랬다. 인간 대접 받지 못하고, 아무런 이유도 없이 얻어 터지고, 기름 짜듯 쥐어짜이면서 가진 것을 모두 빼앗아가긴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는데, 우리 편이 뺏어갈 때와 남의 편이 뺏어갈 때의 차이를 느끼게 된 것이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온몸으로 겪으며 배우는 통에 뼈에 사무칠 정도로 깨닫게 된 것이다. 그건 바로 '자존심'을 짓밟힌 것이다. 우리 편이 빼앗아갈 때는 나중에 또 빼앗아가기 위해서라도 자존심을 짓밟지 않았고 주위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이 똘똘 뭉쳐서 이겨낼 '여력'이라도 남겨두고 빼앗아갔다. 그런데 일제가 '수탈'을 할 때에는 인정사정 봐주질 않았다. 그들은 늘 '합법'이라는 허울 좋은 말과 함께 토지와 쌀 등 하나도 남겨두지 않고 탈탈 털어 갔고, 수탈 당한 민중이 죽든지 살아남든지 아무런 상관도 하지 않고 저들의 목적 달성만을 위해 악착같이 빼앗아갔다.

이런 경험을 강제로 당하면서 우리 민족은 무엇을 깨달았을까? 그건 바로 '안간힘'이었다. 고통이나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루고자 하는 바를 위해 무던히도 애쓰는 힘이었다. 일본놈들이 빼앗아가면서 무식해서 빼앗긴다고 하니 악착같이 학교에 가서 배우려 들었다. 미개해서 수탈을 당한다고 하면 그 잘난 문명이란 것을 배우려 들었다. 더러운 조센징이란 소리를 들으면 깨끗하고 청결하려 애썼다. 그렇다. 이게 바로 우리가 지닌 힘이었다. 오늘날 전세계가 주목하는 '한국문화에 관한 열풍'은 괜히 생긴 것이 아니다. 우리는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더 나은 것을 가지려는 악착같은 성정을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은 '우리 것'이 없더라도 언젠간 그것이 '우리 것'이 될 수 있도록 묵묵히 참고 이겨내며 결국 가질 수 있도록 안간힘을 발휘했다. 그렇기에 불과 100여 년 뒤에 우리는 선진국이 되었고, 다른 이들을 이끌어갈 선도국가가 되었다. 이게 우리가 가지고 있던 저력이다.

나가는 글 : 사실 100년 전에도 일본은 한국의 이런 저력을 감지하고 있었다. 저들이 앞선 문명과 기술, 경제력을 내세워서 세계 침략을 하면서도 유독 '한국'을 악착같이 짓밟으려 했던 까닭이 있었던 것이다. 분명히 저들이 잘나서 '못한 한국인'을 함부로 죽이고 때리고 빼앗고 있는데도 한국인은 순순히 순응하기보다는 '저항'하려 들었기 때문이다. 저들이 지금 당장 '소의 힘줄(일명 '소좃매')' 끝에 납과 같은 무거운 추를 매달아 공공연한 장소에서 엉덩이를 발랑 까놓고 살점이 터져나가도록 매질을 하면서도 한국인들은 비명을 지르고 숨이 넘어가면서도 주눅 들지 않았다. 당장은 무서움에 벌벌 떨고 두려움에 꽁꽁 숨었지만 '우리가 잘못한 것이 없어 떳떳하고 당당하니 저들이 나쁜 놈이다. 그러니 저들을 압도할 실력을 기르자. 그래서 본때를 보여주자'하는 오기와 독기로 똘똘 뭉치게 만든 것이다. 비도덕적이고 비이성적인 상대와 대적하면서도 '도덕적'이고, '이성적' 판단을 하면서 말이다. 비겁한 반칙으로는 진정한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철저히 실력을 쌓으려 '안간힘'을 쓴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안간힘은 신통하게도 먹혀 들었다.

당시 한국에 들어와 있던 서양인들도 의아했던 점이 있었단다. 덩치만 보면 일본인은 왜소하고, 한국인은 키도 크고 덩치도 큰데, 쬐끄만 일본인이 덩치 큰 한국인을 매질하고 수탈하는 장면을 보면서 말이다. 더구나 외모적으로도 일본인은 꾀죄죄했고, 한국인은 새하얗고 준수했단다. 그런데도 일본인에게 억압 당하고 수탈 당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게 맞나?' 싶을 정도였다는 소회를 밝히는 이들도 많았단다. 하지만 아시아 최초의 근대화에 성공하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인들의 자부심은 대단했었다. 그런데 그들의 성정이 원래부터 '야만'스러운 탓에 잘난 자부심과 만나 '폭력적인 방식'의 통치 수단을 삼고 식민경영을 한 것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무단통치'가 한국인을 각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물론 저들이 '인류애'를 발휘하여 저들이 자랑스러워하는 '문명개화'를 우리에게 좋은 의도를 품고 친절하게 이끌어주었다면 우리는 더욱 잘 되어서 이웃나라 간에 더욱 시니지 효과를 발휘하며 전세계에 동아시아 문화를 널리 퍼뜨리는데 엄청난 성과를 보였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은 '잘못된 선택'을 했다. 우리를 너무 만만히 봤고, 너무 함부로 대했으며, 우리가 가진 진면목을 파악하지 못하고, 우리로 하여금 복수심에 불타는 '경쟁심'만 자극하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곁눈질로만 배워서 저들이 자랑하는 문명을 따라잡을 위력을 갖고 있었는데 말이다. 그리고 불과 100년 만에 우리는 따라잡고 말았다. 이제부터는 우리가 앞서 나갈 것이며, 저들은 왜 뒤쳐지는지 이해하지도 못하고 호되게 당할 일만 남았다.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깨달은 바는 '일제시대'를 암울하게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분명 그들은 우리를 억눌렀고 털었으며 짓밟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에게 눌리고 털리고 밟히면서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우리의 필요에 의해서 들여온 '신문물'은 아무 것도 없었지만, 일본제국을 위해서 들여온 모든 것들을 '눈여겨' 보면서 무섭도록 배워갔던 것이다. 그래서 일본인을 위한 학교를 만들었으면 일본 학생 100명 당 한국 학생 10명 뿐이었다고 해도, '전교 1등'은 한국 학생이었고, 일본인을 위한 기업을 만들었어도 일본 근로자 월급은 100원이었다면 한국 근로자는 60원만 받았어도, 그 돈을 알뜰살뜰하게 쓰며 '공부'하는데 썼고, '독립'하는데 썼다. 그렇게 못먹고 못살면서도 '미래'에 더 나은 삶을 위해 투자하고 노력했던 것이다. 그래서 '기차'가 들어오고, '영화관'이 들어오면 직접 타보고 관람하면서 흥을 내며 살아갔다. 단지 타고 보면서 즐기는 것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비록 지금은 '남의 것'이지만 결국 '우리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이다. 나는 이렇게 읽혔다.

그래서 앞으로 '일제시대'를 암울한 기분으로만 공부하지 않으려 한다. 그렇다고 친일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무식한 한국을 깨우쳐주려 식민통치를 무릅쓴(?) 일본제국의 호의에 무한한 감사를 표한다'는 엉터리 해석을, 난 할 생각이 없다. 일본의 식민통치는 한마디로 '빵점'이다. 서구열강의 '제국주의적 야욕'만 가득 담은 못난 방식이었고, 자격지심에 더 삐뚫어진 탐욕으로 점철 되었을 뿐이다. 그러니 일제시대에 일본인에 의해 벌어진 일들을 호평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오히려 일제의 억압과 수탈과 고문 속에서도 온갖 고통과 수모를 겪고 숱한 위기에 처하면서도 좌절하지 않고 극복한 것만으로도 대단한데, 이토록 빠른 시일에 '선진국'이 되고, '선도국가'가 되어 전세계인이 '한국문화'를 아낌없이 칭송하게 만든 위대한 발자취를 다시금 되돌아보기 위한 역사공부를 하려 한다. 이런 다짐을 하게 된 것도 역시 '균형 잡힌 역사서술자'의 도움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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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국민이 합니다 : 이재명의 인생과 정치철학
이재명 지음 / 오마이북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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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국민이 합니다 : 이재명의 인생과 정치철학> 이재명 / 오마이북 (2025)

[My Review MMCLXXXVI / 오마이북 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열다섯 번째 리뷰는 '대한민국 대통령 이재명의 정치철학'이 담겨 있는 책, <결국 국민이 합니다>다. 이 책은 2025년 '올해의 책'으로 선정될만큼 큰 인기를 끌었는데, 보통 현직 대통령에 오르고 나면 대통령 관련 책은 대부분 '베스트셀러'가 되는 수순을 밟는다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러나 현재 대한민국을 둘러싼 주변 강국들의 움직임이 수상하고, 세계 정세가 하루가 다르게 요동을 치는 불안한 현실속에 이 책만큼 크게 주목 받아 마땅한 것은 없다는 점을 상기시켜야 할 것이다. 각설하고, 이런 중차대한 시기에 '현직 대통령'에 오른 인물이 어떤 인물인지 가늠하기 위해서라도 꼭 읽어봐야 할 책이란 말이다. 그리고 '꼭' 따져봐야 한다. 우리 대한민국의 미래를 위해서 헌신할 준비가 되어 있는 인물인지 말이다. 우리 나라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워낙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있기 때문에 '또 다시 윤석열' 같은 종자가 그 자리에 있으면 나라꼴이 거덜나기 십상이라는 것은 우리가 몸소 체험한 '사실'이지 않는가 말이다. 꼴랑 임기 3년만에 나라꼴을 얼마나 나락으로 떨어지게 만들었는가 보란 말이다. 또 다시 이런 바르지 못한 대통령을 자리에 올린다면 우리 국민은 그야말로 '생지옥'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말이다. 우리 국민이 '주인'으로서 큰 깨우침을 얻어야 한다.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럼 대한민국 대통령 이재명이 '쓸만한 도구'인지, '잘 뽑은 머슴'인지 파헤쳐 보자.

<결국 국민이 합니다> 관점 포인트 : 제목부터 눈 여겨 보자. '결국 국민이 한다'고 한다. 무엇을 국민이 한다는 건지 빠져 있는 제목이다. 그걸 책속에서 찾으면 된다. 사실 몇 장 넘기지 않아도 '정답'은 나와 있다. '정치'가 정답이다. 흔히 우리 나라는 '대의제'를 실시하고 있기 때문에 대통령이나 국회의원 등을 주권자인 국민이 선출하고, 그 선출된 '정치인'이 주권자인 국민을 대신해서 '정치전문가'로써 정치를 잘 이끌어가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기 십상이다. 허나 이재명은 그건 엉터리라고 말한다. 정치가가 '정치'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국민'이 정치를 이끌어가는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다시 말해, 대한민국 헌법상, 정치인이 정치를 이끄는 것은 '비정상'이고, 국민이 정치를 이끌어 나가는 것이 '정상'이란 말이다. 왜냐면 주권자는 국민이지 정치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그동안 몰랐던 것은 아닌데, 왜 국민이 정치를 직접하지 못하게 '정치인'들이 앞장 서서 막아서는 일이 잦았던 것일까? 무언가 잘못 되었고, 이걸 바로 잡겠다고 대통령이 된 사람이 바로 이재명이란 얘기가 이 책의 골자다.

지난해 6월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된 이재명 대통령은 거침없는 행보를 보여주고 있다. 아직 임기 만 1년차도 되지 않았는데 수차례 '정상회담'에 참석하여 내노라하는 강대국들을 상대로 외교성과를 거둬 들이며 대한민국이 마주한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해내는 모습을 보이며 수많은 국민들을 안도하게 만들었다. 거기다 막혔던 수출길을 뚫고, 코스피 4800선(26년 1월 18일 현재)을 훌쩍 넘기면서 대한민국 경제에 숨통을 틔우고 희망을 심어주었다. 물론, 대북 노선이 '불통'이 되고 있고, 국제정세도 전쟁과 시위로 인해 몸살을 앓으면서 위기감은 언제든 재점화할 수 있는 상황이고, 치솟은 집값과 물가와 환율은 좀처럼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경제적 불안감도 상당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위기가 대한민국을 안팎으로 휘감고 있었는데도 아무 것도 하지 않던 '윤석열 씨'와 대조해보면 천당과 지옥의 차이를 어렵지 않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정말 하늘이 도왔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의 연속이었다. 트럼프의 '관세 압박'이 물 밀듯이 밀려올 때 '윤석열 씨'가 비상계엄을 하지 않고, '탄핵'도 당하지 않고, 윤석열 정권이 그대로 트럼프 행정부와 협상을 진행했다면 어땠을까? 트럼프가 '미중 갈등'의 해결책으로 동맹국 때리기에 나서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처럼 '백기 항복'을 하고 고율의 관세 협상에 그대로 싸인을 했더라면 어땠을 것 같은가? 더구나 미일이 암묵적인 합의를 하고서 '대한민국'을 호구로 보고 천문학적인 액수의 투자금을 내노라고 강요했을 때, 협상은커녕 저항도 하지 못하고 고스란히 빼앗기고 말았다면 대한민국의 경제가 어떻게 되었을 것 같으냔 말이다. 거기다 '혐중'을 내세워서 중국 시진핑과의 관계도 엉망진창이었는데 트럼프 행정부를 믿고서 '반중 정책'을 그대로 밀어붙였더라면, 대한민국은 미국 안보를 위한 '항공모함 신세'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총알받이'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또한, 일본 다카이치 총리 이후 '중일 갈등'이 심각한 수준으로 격상 되었을 때, '한미일 공조'라는 허울 좋은 명분을 내세울 국민의힘 정당의 정치공세에 대한민국이 '중일 전쟁' 한복판에서 끼어들어 대신 두들겨맞는 꼴로 전락할 뻔도 했다. 그런데 이 모든 문제를 '이재명 대통령'이라는 카드 한 장으로 모두 돌려막기 했을 뿐만 아니라, 미국 트럼프도, 중국 시진핑도, 일본 다카이치도, 이제는 '대한민국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격으로 서로들 친하게 지내려하고 굽신거리는 모습도 모두 '이재명 대통령의 업적'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대단한 외교적 성과를 거뒀으니 대한민국 국민들은 이재명 대통령에게 '절대 복종'하며 시키면 시키는대로 다 하고, 달라면 달라는대로 다 주는 '독재자'가 되겠다고 표방했는가? 아니면, 그에 준하는 '야심'이라도 포착했는가? 물론 이제 임기 1년차를 지냈을 뿐이니 더 지켜봐야겠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기미가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더 투명한 '국정'을 운영하며, 국민과 소통하는 진솔한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되려 문제는 '지난 윤석열 정권의 내란잔당세력들'이 저지르고 있다. 윤석열이 '임명'한 잔당들이 아직도 '버티기'를 하면서 온갖 딴죽과 훼방을 놓으며 윤석열 감싸기 모드에 들어가서 도통 꼼짝을 하지 않고 있다. '침대 축구'를 한다는 비아냥을 들으면서도 조희대 사법부는 '내란 감싸기'에 여념이 없고, 나머지 잔당들은 먼 비전을 내세우며 '윤석열 사면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을 정도다. 도무지 반성이라는 것을 모르는 족속들이다. 이재명 정부가 국정을 성공적으로 이끌기 위해서는 바로 '내란 잔당'을 발본색원하는 일이 최우선 과제일 것이다.

그럼, 이제 정치를 '이재명 정부'에게 모두 맡기고 국민들은 안심하고 딴짓을 해도 괜찮은 걸까? 그래선 안 된다고 말한다. 끝까지 '이재명 정부'가 딴짓을 하지 않고 임기를 다할 때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는지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그걸 함축해서 적은 놓은 말이 바로 '결국 국민이 합니다'라는 말의 참뜻이다. 지금 이재명이 해놓은 국내외적 성과는 '대한민국 정치인'이라면 누구라도 마땅히 해야 할 성과인 것이다. 이재명이 특별해서가 절대 아니란 말이다. 이재명이 이렇게 빛나는 위업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주권자 국민들'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고 있기 때문이란 얘기다. 그리고 국민들이 '정치인'을 더 잘 감시할 수 있도록 모든 국정은 '공개'하는 것을 대원칙으로 삼았다. 이재명은 이걸 실천으로 옮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다른 정치인들'도 모두 그렇게 하고, 스스로 '국민들의 감시'를 받을 수 있도록 투명한 정치를 하면 된다.

그럼 그동안에는 왜 이걸 안 했던 것일까? 주권자 국민들이 '감시'할 수 없도록 '비밀회동'을 하고, 중간에서 국정정보를 가로채 '언론브리핑'을 독점적으로 했기 때문에 '국민들'을 기만하고 속일 수 있었던 것이다. 권력자가 '권위 의식'만 높아서 자신이 한 일에 대해 의뭉스럽게 감추기 바빴었기 때문에 주권자인 국민이 '대의정치' 속에서 주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재명 대통령이 이걸 속시원히 다 까발렸다. 국정의 모든 것을 '주권자'에게 속시원히 다 보여주고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다른 것은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이재명'을 칭찬해도 괜찮다. 아낌없이 박수를 쳐줘야 한다.

나가는 글 : 그럼 다 된 것일까? 이처럼 '쓸만한 도구'로, '잘 뽑은 머슴'으로 자처하는 사람을 대통령 자리에 올렸으니 이제 만사형통하길 기원하기만 하면 될까? 대한민국 주권자라면 절대로 그래선 안 된다. 지금까지 봐온 '이재명'이란 사람의 '정치철학'이 참 올곧고 훌륭하며, 이제 대통령 자리에 올라 대한민국 국정을 제대로 운영하고 있으니 충분한 것으로 여기고 '주권자의 권리'인 정치인 감시를 철저히 하지 않고 한시라도 눈을 돌리면 또 다시 부정하고 부패한 정치인이 등장해서 대한민국을 좀 먹어치울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는 대통령 한 사람이 다 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부처의 장·차관들이 전문가도 아니면서 '대통령의 임명'으로 그 자리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고 있다. 물론 잘 뽑은 대통령이 어련히 알아서 좋은 사람을 임명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문재인 대통령 시절에 법무부 장관으로 윤석열을 임명한 것을 우리는 절대 잊어선 안 된다. 그 시기에는 적절한 인물을 임명했다 여겼지만, 그놈이 저지른 분탕질로 인해서 대한민국이 어떤 위기를 초래했는지 절대 잊으면 안 된다는 소리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참으로 훌륭한 정치철학을 마주 할 수 있다. 개인의 사리사욕이 아니라 오직 '주권자'인 국민을 위해서 헌신하겠다는 다짐을 수없이 반복하고 있는 구절을 읽고 있노라면 행복에 겹다 못해 감격스러울 정도다. 그런데 사람을 어디까지 믿을 수 있겠냔 말이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일지라도 '한 가지 단점'쯤은 다 가지고 있다. 지금 그 단점이 보이질 않는다고 해서 그냥 믿고 맡기고, 이전 정부 때보다 잘했으면 됐지 정치(인)에 대해 너무 큰 기대를 품으면 탈나기 십상이라는 마음으로 대충 정치를 맡겨서도 안 된다. 오늘날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정세를 보란 말이다. 그 잘나가던 미국조차 트럼프라는 '망나니'가 칼춤을 추고 있으니 나라가 망해버릴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이대로 트펌프가 '연임'이라도 하는 날이면 미국은 100년은커녕 10년도 못가서 망해버릴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하루 아침에 초강대국 미국이 사라지게 되면 전세계에 어떤 충격을 몰고 오겠느냔 말이다. 우리는 이런 충격까지도 철저히 '대비'하고 있어야 한다. 또 다시 '윤석열' 같은 모지리와 '내란잔당'과 같은 불온한 세력이 활개라도 치는 날이면 대한민국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에 휩싸여 망조가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책에 나열된 수많은 '연설문'과 '정치발언', 그리고 '정치철학'은 이재명 개인의 목소리가 아니다. 대한민국 주권자의 목소리여야 한다. 이 땅에 다시는 불온한 세력이 국가권력을 틀어쥐고 대한민국을 나락(지옥)으로 떨어지게 만들도록 바라만 볼 수는 없는 일이다. 이재명이 손수 보여주지 않았는가 말이다. 우리는 정치적 각성이 절실하다. 대한민국 주권자가 꼭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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