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가치함의 심리학 - 무가치하다는 감정과 싸우는 이들을 위한 심리 처방전
네모토 기쓰오 지음, 최주연 옮김 / 문예춘추사 / 202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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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치함의 심리학 : 무가치하다는 감정과 싸우는 이들을 위한 심리 처방전> 네모토 기쓰오 / 최주연 / 문예춘추사 (2026)

[My Review MMCCLXIX / 문예춘추사 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아흔여덟 번째 리뷰는 너무 겸손해야 한다는 강박을 떨쳐내고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내용이 담긴 <무가치함의 심리학>이다. 제목만 봤을 땐 AI 인공지능이 너무 발달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조차 AI에게 다 맡겨버린 가까운 미래를 대비해서 '인간소외 현상'이 심화될 수 있으니, 설령 그런 참담한 일을 당한다하더라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고 꿋꿋하게 '자기 가치를 증명하라'는 내용으로 짐작했다. 그런데 막상 읽어보니 '자신감을 잃고 자포자기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쓴 '자기계발서'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이 책은 우리 나라보다 '일본인의', '일본인에 의한', '일본인을 위한' 심리학으로 봐야 할 것이다. 왜냐면 일본인은 다른 나라 사람들보다 상당히 많이 위축되어 있고, 그로 인해서 일본 사회에 경종을 울리는 내용이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 근거로는 일본인은 스스로 판단하기에 자신이 '가치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이들은 전체를 100%로 보았을 때, [남자 50 / 여자 60]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한국을 비롯해서 미국, 중국 등에서는 남녀 모두 10~20% 사이에 불과했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무가치함의 심리학> 관점 포인트 : 이 책에서 말하는 '무가치함'이라는 뜻은 '가치가 없다'는 의미로 읽어도 되지만 '자기존중을 하지 않는다'로 읽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굳이 명사형으로 꼽는다면 '좌절감'으로 해석해도 의미가 상통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느 누가 자신의 가치를 한껏 낮추어 잡고 스스로를 비관하며 살아갈까? 언뜻 생각해보면 그런 사람은 별로 없을 것 같고, 있다하더라도 그냥 찌질한 사람으로 느껴질 수도 있다. 왜냐면 한국인들은 자기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비율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무 기세등등한 편이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절대적으로 기가 죽으면 안 된다는 국룰(?)이 있을 정도다. 이를 테면, "아니, 왜 우리 애를 기죽이려고 하는 거예요? 틀렸어도 혼내지 마세요! 무조건 칭찬만 하란 말예요!! 선생이고, 뭐고, 우리 애 기죽이면 내가 가만 안 둘거야. 당신 각오해요!!!" 이런 억지를 부리는 것이 일상일 정도니, 우리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웃 나라인 일본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에게 '폐(弊)를 끼치면 안 된다'는 것을 너무 강압적으로 가르치려다보니 어릴 적부터 '착한 아이'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이 너무 강해 '경각심'마저 들 정도인 것이 오히려 폐단이 된 듯 싶다. 살다보면 가까운 이웃이나 친구끼리 서로 실수를 할 수도 있고, 신세를 끼칠 수도 있는데, 일본은 이를 극도로 싫어하고, 그럴 바에야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할 정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기 탓이 단단히 한 몫 한 듯 싶기 때문이다. 일본인들은 이렇게 남에게 폐를 끼치는 사람을 '온전치 못한 사람', '자기 몫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 따위로 취급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루스 베네딕트가 쓴 <국화와 칼>에도 그런 일본 문화를 소개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에게 폐나 끼치는 모자란 사람이 되지 말자는 경향이 강한 사회에서 남들과 자신을 끊임없이 '비교하는', 아니 '비교 당하는' 일이 너무 많다보니 스스로 '무가치하다'는 생각까지 하는 이들이 높은 비율로 존재하는 듯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일본인들의 병폐 현상을 해소하고 건강한 심리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 써낸 책이 <무가치함의 심리학>이 아닌가 짐작해봤다. 애초에 AI시대에 도래할 위험요소인 '인간 불필요'가 실현될 때를 대비한 책이 아니었기에 이런 저런 상념에 빠져들어서 요런 죠런 생각들을 떠올려 보기도 했다. 그 결과는 한국 사회에서도 병폐현상으로 등장한 '청소년 자살' 비율이 상당히 높다는 뉴스를 떠올리게 했다. 이들이 왜 젊은 나이에 끔찍한 선택을 하게 되었던 것일까? 그건 한국사회가 대단히 '완벽주의'에 대한 강박이 심하고, 조금이라도 흠이 잡힐까봐 전전긍긍하게 만드는 불안요소가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완벽하지 않을 바에야 '살 가치가 없다'는 섣부른 결론에 다다랐고, 그 결과 꽃다운 나이에 생을 마감하려는 시도가 끊이지 않고 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는 이 책이 조금 쓸모가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책에서도 일본 가정에서 벌어지는 '완벽함을 요구하는 부모'가 자기존중을 하지 못하는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엄격한 양육 환경 속에서 숨쉴 여유도 없이 자녀를 다그치고 닥달하게 되면 자녀의 자존감이 오히려 위축되면서 스스로 자신을 평가절하하게 되고, 그럼으로써 자기 스스로를 고립시키고 은둔하게 만들어 '사회부적응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다고도 했다. 이는 비단 한국과 일본만의 문제는 아니다. 잘못된 양육으로 소중한 자녀가 스스로 비관하게 만드는 경우가 드물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를 서구사회처럼 법적으로 해결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특히나 동양의 사고가치관으로는 '내 자식, 내 마음대로 키우겠다는데 누가 상관할 수 있는가?'라는 생각이 너무 팽배하기 때문이다. 너무 강한 잘못된 신념이 자녀를 망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부모에게 미치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누구도 섣불리 간섭할 수 없는 것도 문제이긴 하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여기거나 '자존감이 낮다'고 생각이 든다면, 이런 '열등감'을 당연하다고 여기지 말고 스스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자기 긍정마인드'를 가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가장 효과적이며 실현가능성도 굉장히 높다고 글쓴이도 여러 임상과 관련 기사를 들어서 주장하고 있다. 그럼 스스로 자존감을 높일 수 있는 방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첫째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을 키워야 한다. 둘째는 스스로 무력해지려는 마음과 작별해야 한다. 셋째는 일상에서 보람을 느끼도록 인생 설계를 해보는 것이다. 넷째는 성실하고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자아실현을 성취해보는 것이다. 다섯째는 나를 사랑하듯 남도 사랑할 줄 알아야 한다. 여섯째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쾌락을 즐길 줄 아는 성숙한 어른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일곱째는 지금까지 앞서 해온 자신을 무한 신뢰하는 것이다. 어떤가? 해볼만 한가? 사실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렇다고 막 어려워서 도망치고 싶을 정도는 아닐 것이다.

나가는 글 : 속된 말로, 사람은 누구나 '자기 멋'에 취해서 살아간다. 저 잘난 맛을 즐길 줄 알아야 진짜 즐거운 인생이란 뜻이다. 그런데 자기 스스로 '가치 없다'고 느끼는 사람은 이런 즐거운 인생을 맛보지도 못하고 저승으로 가는 지름길을 찾으려 애쓰는 셈이다. 인생는 '게임'이 아니다. 맘에 들지 않는다고 '다시 시작'하거나, 함부로 '끌' 수도 없다. 잘나든 못나든 그냥 사는 것이 인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기왕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좀 멋지게 사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럼 어떻게 살아야 멋지게 사는 인생일까?

사람마다 멋지다는 기준은 다르겠지만, '자기 존중'만큼은 꼭 필요할 것이다. 이 세상에 '아무런 가치가 없는 사람'은 없다. 평범한 사람보다 '더 잘난 것'이 많아서 인기인이 되고 탑스타가 되어 호의호식을 누리는 특별한 사람도 있겠지만, 대다수 평범한 사람들은 '자기 나름대로, 저마다의 개성을 살려, 자기만의 멋을 부리며' 살아간다. 이런 멋만큼은 그 누구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다. 아니 감히 건드리게 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게 하는 마음이 바로 '자존감'이다. 반대로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마음에 상처를 내거나 아프게 하면 '좌절감'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허나 그렇다고해서 '가치가 없는 사람'이 되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리고 그 판단은 남이 함부로 내릴 수도 없다. 만약 그 누가 당신을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폄하한다면, 결코 참아선 안 된다. 만약 상대가 너무 강하고 무서워서 당장 치고 받고 싸워서 이길 자신이 없는 상황이라면 조금 시간이 걸리는 방법이지만, 3~40년간 오래 참다보면 결국 그 상대가 늙고 병들거나 이미 죽게 된다. 그때 분연히 일어나서 '자존감'을 드높이면 된다. 그러니 결코 자신이 '가치 없는 사람'이라고 섣부른 결론을 내리지 말고, 자신만의 가치를 내세울 만큼 강심장이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당신을 그럴 가치가 충분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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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매니악 1
이우혁 지음 / 반타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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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로매니악 1> 이우혁 / 반타 (2026)

[My Review MMCCLXVII / 반타 5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아흔여섯 번째 리뷰는 정확하게는 27년 만에 새롭게 돌아온 <파이로매니악 1>이다. '미컴' 출판사에서 98년에 1권이 나오고 99년에 3권까지 출간되었다가 연재 중단이 된 <파이로매니악>이기 때문이다. 정말이지 너무 오랜만이다. 그나마 나는 작년에 '구판'으로 나온 <파이로매니악>을 읽고 리뷰까지 작성했기에 기억이라도 생생하지, 전작을 읽고 감동했다가 27년 만에 다시 만난 오랜 팬들은 정말이지 기억조차 가물가물 할 지경일 것이다. 암튼 '이우혁이 돌아왔다'는 사실에 만족할 따름이고, 본격적인 이야기는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본 뒤에 다루도록 한다.

<파이로매니악 1> 관점 포인트 :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구판'의 내용과 '개정판'의 내용이 완전 딴판이라 놀라는 팬들도 많을 것 같다. 구판 <파이로매니악>에서는 동훈과 영, 희수가 사회의 암적인 존재들을 '폭탄 한 발당 나쁜놈 한 개씩' 처단하는 방식으로 진행시켰는데, 개정판 <파이로매니악>에서는 시작부터 '원샷 원킬'을 하면서 속도감이 엄청 빨라졌다. 그래서 전체적인 줄거리 진행까지 덩달아 빨라져서 짜릿함이 미친듯이 상승했다. 사실 <파이로매니악>의 매력 포인트는 뭐니뭐니해도 엄청난 폭발감이다. 화약이 빵빵 터지는 장면이니 폭발 장면이 당연한 것이지만, 단순히 폭발했다는 느낌이 아니라 딱 원하는 곳에, 딱 알맞게 빵빵 터지기 때문에 더욱 짜릿한 것이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이다. 집 한 채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시원한 폭발감이 아니라 집 안에서도 '안방', 안방 중에서도 '침대밑', 침대밑에서도 '남편이 잠자는 쪽, 남편이 잠자는 쪽에서도 '허리'가 놓인 곳만 딱 골라서, 그곳만 강력한 폭발이 일어나 '한 남자의 허리'가 흔적도 없이 산산조각이 나고 상반신과 하반신은 멀쩡한 상태 그대로 남겨 둘 수 있고, 같이 잠이 든 여자는 아무런 피해도 받지 않고 멀쩡할 수 있도록 아주 정밀하게 폭발을 시키는 방식으로 깔끔한 '복수'를 하는 것이다.

그렇다.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복수'다. <파이로매니악>에서 가장 핵심적인 주제가 다름 아닌 '복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단순히 불특정 다수의 사람을 죽여서 공포심을 자아내는 '테러'와는 다르다. 아주 치밀하고 정밀한 '살인' 수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적절한 복수를 명분으로 삼은 살인자들이 주인공인 탓에 독자들은 살인범인 주인공들에게 동정을 하고, 그들이 복수를 할 수밖에 없는 비극을 겪었기에 공감을 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파이로매니악>의 매력이다. 그런데 말이다. 아무리 끔찍한 일을 당했다고 하더라도 '사사로운 복수'가 허용되는 사회를 사는 것이 너무 불안하지 않겠는가? 그렇기에 우리는 '공권력'을 국가에게 맡기고, 국가는 사법부에 죄를 지은 사람을 벌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하고, 죄인에게 벌을 줄 수 있는 근거인 '법'에 따라 만인에게 공평하고 공정한 판결을 받게 한 것이다. 그렇게 판사, 검사, 경찰에게 죄인을 벌할 수 있는 권한을 주고, 피해자가 억울한 일이 없게끔 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대한민국 법이 '가해자'에게 유리한 것일까? '피해자'에게 유리한 것일까? 범죄자의 인권은 그토록 꼼꼼하게 지켜보려 애쓰면서, 범죄자에게 피해를 본 이들에게는 제대로 된 '배상'은커녕, 피해를 받은 만큼의 '보상'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오히려 죄 지은 '가해자'가 떵떵거리고 죄를 지은 적도 없고 남에게 피해를 줄 생각도 하지 않던 '피해자'는 씻을 수 없는 상처와 복구할 수 없는 피해를 받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심지어 '가해자'가 감옥에 수감되면 '피해자'는 배상을 포기해야 하는 일도 비일비재하고, 가해자가 감옥에 가지 않기 위해서 피해자와 '합의'를 하고 '보상'을 하면 가해자는 감옥에 가지 않고 풀려나버리는 어처구니 없는 일까지 버젓이 벌어지곤 한다. 그래서 부유한 가해자는 죄를 지어도 돈으로 풀려나고 가난한 피해자는 그렇게 풀려난 가해자가 두려워서 일상을 포기하고 숨어 지내야 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는 대한민국에 과연 '사법정의'는 살아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심지어 이 땅에 나라 팔아먹은 '매국노'는 떵떵거리고 플렉스하며 잘 사는데 반해서,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목숨을 내놓고 지키는데 앞장선 '애국자'는 팔다리 잃고 병신으로 살거나, 가진 재산 다 빼앗기고 거지로 살아야 한다. 더 기가 차는 일은 '매국노의 후손'은 나라 팔아먹은 돈으로 풍요롭고 넉넉하게 살다가 명문가도 거듭나서 '사회지도자'를 배출하는 상류사회를 살아가는 반면에, '애국자의 후손'은 부모가 병신이고 거지가 되는 바람에 덩달아서 굶주리며 살며 '기초수급자'가 되어 사회 밑바닥을 기어다니며 살아가게 된다. 대한민국이 먹고 살기 급급하던 시절에는 이런 '애국자의 후손'들에게 아무런 지원도 해주지 못해 더욱더 비참한 생활을 이어가다 울분을 참지 못하고 범죄를 저지르거나 생을 포기하는 이들도 부지기수였다. 과연 대한민국 '사회정의'는 살아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었을까?

그래서 구판 <파이로매니악>에서는 그런 '매국노 같은 새끼'들만 골라서 처단을 일삼는 동훈, 영, 희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야기를 풀어갔던 것이다. 때는 90년대 후반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동안 억눌려 왔던 매국노에 대한 분노와 더불어 군사독재시절의 참고 견뎌야 했던 울분을 막 토해낼 수 있었던 시기였기에 <파이로매니악>을 읽는 독자들은 간접적이나마 소설을 읽으며 '해방감'을 느꼈던 것이다. 그런데 3권을 끝으로 세 명의 주인공들이 '윤영대 검사'의 수사망이 좁혀오는 와중에 연재가 중단되어서 참으로 안타까워했다. 뒷이야기도 궁금했지만, 사무쳤던 원한을 풀지 못하고 '원귀'가 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개정판'이 나왔으니 그 한을 풀 수 있을 것 같다.

나가는 글 : 개정판 <파이로매니악>은 구판에서 멈춘 이야기가 이어지는 내용이 아니다. 비슷한 설정이라고는 주인공들의 이름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모든 내용을 새로 펴냈다. 이는 대한민국의 90년대와 26년인 오늘날이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현격한 차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우혁 작가도 변을 늘어놓았지만, 그 시절에는 '가로등'도 드문드문 있던 시절이라 단독으로 몰래 움직이는 범행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거리거리마다 CCTV가 설치되어 있고, 한밤중에도 대낮만큼 환하게 밝은 곳 투성이라 과거와 같은 방식의 범행은 실현가능성이 거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화약기술'도 첨단화가 진척되어서 그 당시에는 최고의 전문기술자만이 겨우 만들 수 있던 폭탄도, 오늘날에는 웬만한 기술자도 레시피만 있다면 척척 만들어내는 시대가 되었기에 <파이로매니악>에도 변화를 줄 수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야기 진행 속도가 구판에서는 너무 느렸다. 개인적인 서사는 둘째치고 '매국노 처단'을 하기까지 다짐하고 결심하고 결행하는 일련의 과정이 너무 지루할 정도로 장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매국노를 한놈 한놈 처단할 때마다 너무나도 고통스러워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보면서 '카타르시스'보다는 '연민'이 앞서곤 했다. 물론 사람을 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고도 눈 하나 깜짝 안하는 캐릭터라면 그냥 '살인마'를 내세운 스릴러 소설에 불과했을 테지만, 매국노와 악질중대범죄자를 처단하는 '영웅들'인데 그토록 괴로워하는 장면을 묘사하는 것이 맞나 싶을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정판'에서는 그런 고민을 싹 날려버린 듯 싶다. 죽이는 게 더 낫다 싶을 정도로 악질들은 폭탄 한 방으로 시원하게 날려버려 영원한 '격리조치'를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 빠르게 해치우고 있기 때문이다. 속도감 쩔어서 읽는 맛이 아주 좋을 정도였다.

단, 범죄는 명백하기 때문에 '공권력'이 발동되면 우리의 주인공들의 활동에는 제약이 걸릴 수밖에 없다. 구판에서는 '윤영대 검사'가 등장했는데, 철두철미한 성격에 냉혈한 기질까지 보이며 주인공들을 점차 궁지로 몰아가는 수사를 보여줬지만, 개정판에 등장하는 '구일문 검사'는 꼼꼼하고 냉철한 기질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인간미'가 넘치는 모습으로 묘사되었다. 앞으로 2권, 3권에서 어떤 모습과 활약을 보일지 살펴봐야겠지만, '파이로매니악(일명 '피엠')'을 뒤쫓는 모습은 확연히 달라 보였다.

이는 '사적인 복수'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인식 변화에서 비롯된 것 같다. 과거에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은 준수해야 하고, 악법도 법이기 때문에 무조건 따라야 하며, 법 집행에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은 불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면, 오늘날에는 '사법부의 무능'을 넘어 '공정한 판결'을 내릴 수조차 없는 불공정한 권력의 산실로 인식하고 있음을 감안한 듯 싶다. 이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사회정의가 무너지고 사법부가 제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대한민국에서 바로 설 길은 오직 '사법부 개혁'뿐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개혁의 핵심은 '인사개편'이다. 썩은 부위는 과감히 도려내야 한다. 당장은 고통스럽고 힘겹겠지만 '사법부의 정상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우리 사회는 공정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란범들이 내란을 저지르고도 최대 '사형', 최소 '무기'를 판결받지 아니하고 '20년형 이상'도 아닌 '5년형 이하'를 받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현실이 암담할 따름이다. 누구 말마따나 "내란을 저질러도 꼴랑 5년만 깜방에 들어갔다 나오면 되니, 저지를만 하구나! 내란에 성공하면 영웅으로 둔갑해서 평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데, 꼴랑 5년형이 무서워서 내란을 저지르지 않는다면 겁쟁이가 따로 없는 셈일테니 말이다" 이런 걸 '사법정의'라고 말할 수 있을까?

개정판 <파이로매니악>에서는 거대한 범죄브로커가 '내부자'와 손을 잡고 '대한민국 방산업체'에서 기밀을 빼돌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군용 시제품'이나 '현물'까지 빼돌려서 엄청난 이익을 차지하려고 한다. 동훈과 영, 토끼928(희수)은 이 사실을 모른 채 이 사건에 '이용' 당했다가 구사일생으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세 주인공 뿐만 아니라 그들의 가족들까지 모두 말이다. 그러다 모종의 '루트'를 통해서 되살아나 '파이로매니악'으로 변신한 이들이 앞선 범죄브로커와 연관된 일당들을 하나하나 처단해 나가는 것이 주요 줄거리다. 그러면서 항변한다. "착한 네가 참아"라고 말하는 이들을 용서할 수 없다고 말이다. 착하면 '희생'을 당연하게 여겨야 하고, 착하면 '피해'를 당해도 꾹 참아야 하는 법이라도 있는가? 다행히 대한민국 법에는 그런 조항이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착한 '파이로매니악'이 결의를 하고 '사적 복수'를 감행하게 되었다. 나쁜 놈들을 벌주러 말이다. 다행히 대한민국 법에는 나쁜 놈들 벌주라고 적혀 있다. 물론 '공적인 판결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단서조항을 달아놓긴 했지만, 마침맞게 사법정의가 무너졌으니 '사적 정의'를 빵빵 불태워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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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미국사 - 트럼프를 탄생시킨 미국 역사 이야기
김봉중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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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한 미국사 : 트럼프를 탄생시킨 미국 역사 이야기> 김봉중 / 알에이치코리아(RHK) (2025)

[My Review MMCCLXII / 알에이치코리아(RHK) 3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아흔한 번째 리뷰는 트럼프 2기 행정부의 탄생으로 인해서 찾아올 수 있는 위험요소를 미리 예측해볼 수 있는 <위험한 미국사>다. 이 책을 지금 미국과 이란 전쟁이 휴전협상 난항을 거듭하고 있는 시점에 읽기에는 조금 뒷북 치는 느낌이 들 수도 있다. 왜냐면 이 책의 출간시점이 2025년 '트럼프 2기 행정부'가 막 탄생하던 시기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당시의 예측이 1년이 지난 지금과 얼마나 맞아들어가는지, 그 예측의 '원인분석'이 얼마나 적중했는지 분석하면서 읽을 수 있기에 더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분석한 결과는 7~80%는 예측이 맞았다고 본다. 그럼 책 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위험한 미국사> 관점 포인트 : 세계는 지금 트럼프의 미친 짓으로 인해서 한 치 앞도 예측할 수 없는 혼란의 시대를 맞이했다. 그 가운데에서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트럼프는 점점 더 부를 쌓아가고 있다는 사실뿐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망해가고 있는데, 트럼프 일가만 등 따시고 배부른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하기 짝이 없다. 미국이 망해가고 있다는 증거로는 트럼프 행정부의 등장과 함께 '민주주의가 급속도로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증거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미국 정치는 '견제와 균형'이 그 핵심이었다. 미국은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가 독립적 존재로 건실하고, 각 부처가 실리를 따지며 견제를 함으로써 미국 정치 전체가 균형을 잡아가는 시스템이 초기부터 자리를 잡아왔고, 그동안에는 이런 시스템이 전통으로 내려오며 잘 지켜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전통이 트럼프 1기때 와르르 무너졌다. 이른바 '의회 난동 사건'으로 트럼프는 '가짜 뉴스'를 만드는 장본인이었고, '극우 선동정치'로 권력을 잡으려 한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트럼프는 정통 언론은 '진짜 뉴스'를 말하지 않는다면서 '개인 방송 채널'로 자신에게 유리한 뉴스만 퍼날랐으며 상대방을 비난하고 헐뜯는 내용은 '아무런 근거'도 제시하지 못하고 '선동'만 일삼았다. 그렇게 해서 트럼프 1기 때에도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지만 당당히(?) 미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고, 무능력만 보여줬다가 재선에 실패했지만, 또다시 당선에 성공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게 어떻게 가능했을까?

미국 정세가 정상적이었다면 트럼프는 절대로 대통령이 되지 못했을 것이다.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미국이 뭔가 제대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 된 셈이다. 왜냐면 트럼프는 선거 때에는 '돌풍'을 일으켰다가 '당선'만 되면 아무 것도 제대로 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미국 유권자들은 트럼프 1기 행정부 시절에 이미 경험했을텐데도 망각하고 또 다시 당선하게 만들었다. 물론 그 가운데 상당부분 민주당 출신 '조 바이든 행정부'가 너무 무력했다는 것이 단단히 한몫 했을 것이다. 바이든은 트럼프가 망친 미국을 최대한 되살리려 무던히도 애를 쓴 대통령이었지만, 이미 망쳐버린 미국 경제와 외교가 정치까지 불안정하게 만들어버린 불운의 대통령이 되었다. 설상가상으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도 초강대국 미국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고 '러우 전쟁'을 그저 방관만 하고 있다는 정치적 공세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군사적으로 미국이 초강대국인 것은 여전하지만, 만성적인 적자로 인해 미경제력이 퇴색하고 있는 마당에 천문학적인 비용청구서가 날라올 것이 뻔한 '전쟁개입'에 나설 수 없었고, 그렇게 갈팡질팡하는 사이에 전쟁은 지지부진하게 이어지면서 미국의 초강대국 이미지가 눈 녹듯이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이건 실책이라기보다는 미국의 국력이 예전만 못하고, 국제정세가 냉전시대와 달리 '다극화시대'를 맞이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였다.

그런데 트럼프는 이를 비아냥거리면서 '자신이 대통령이라면' 바이든처럼 빌빌거리는 모습은 절대 보여주지 않았을 거라고 재차 강조하면서 선거전략을 꾸렸고, 그 결과 '강한 미국'을 원했던 미국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끝내 '트럼프 2기 행정부'가 탄생하게 된 셈이다. 그러나 트럼프 행정부가 '강한 미국'을 만들었나? 전혀 그렇지 못하다. 전세계를 향해 '미국 우선주의(아메리카 퍼스트)'를 표방하고, 이를 관철시키기 위해 '관세 전쟁'을 벌여 경쟁국들을 견제하고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겠다(MAGA)'고 호언장담했지만, 현재까지 제대로 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뜻밖에도 관세로 찍어 누르려는 것은 중국과 러시아 등과 같은 경쟁국가가 아니라 캐나다, 유럽, 멕시코, 일본, 한국 등 오랜 동맹국들이었다. 그나마 맘대로 관세로 협박하고 얻을 것을 얻은 나라는 힘 없는 약소국들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베네수엘라와 이란을 느닷없이 침공하고 '에너지 자원'을 빼앗으려 드는 모습이었다. 베네수엘라는 어찌어찌 반쯤 성공한 것 같지만, 현재 벌어지고 있는 미국 이란 전쟁에서는 더 나아지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연일 터져나오는 '거짓말 대잔치'는 전세계에 에너지 공급망 불안정으로 인한 위기감만 고조시킬 뿐, '좋은 소식'이라고는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을 지경에 이르렀다.

과연 이런 미국을 믿고 앞으로도 의지할 수 있을까? 냉전시대 이후 오랜 미국의 동맹국들은 이런 미국의 미친 행보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 '각자도생'을 꾀하고 있는 실정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1945년 이후 대한민국은 미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가 되었지만, 이제는 오히려 '거리감'을 두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결론을 내릴 정도로 미국은 '위험한 국가'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에게 안보를 맡겼던 '유럽국가'들은 이번에 된서리를 맞고 있는 실정이다. 트럼프가 끝내 독일내 미군을 철수하기로 결정했다는 속보가 나오고, 연일 '나토 탈퇴' 카드를 만지막거리고 있는 상황에서 유럽은 '미국 없이' 러시아의 침공에 대비해야 하는 처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에 의지하고 '국방력'을 소홀히 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중이다. 이제 천문학적인 국방비를 마련하는 것을 넘어, 국방비가 있어도 제때에 '무기'를 충당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없고, 무엇보다 러시아의 핵공격에 방어할 핵무기가 미국 외에 마땅히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가 되고 말았다. 그나마 프랑스와 영국이 자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긴 하지만 턱없이 부족하고, 나머지 유럽연합국가들은 제대로 된 방공망마저 없고, 러시아의 전차부대와 보병전력, 그리고 새롭게 등장한 드론무기까지 어느 것 하나 효율적으로 막아낼 시스템이 없어져 버린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믿었던 동맹국인 미국이 철수 운운하고 있으니 답답할 노릇인 셈이다.

이것을 미국의 '고립주의의 복원'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 옛날 '먼로주의'를 표방하던 시절에 미국이 유럽대륙에 간섭하지 않을테니, 유럽도 미국이 있는 아메리카대륙에 신경을 끄라는 그 선언으로 되돌아간 것 아니냐는 견해다. 하지만 이는 미국이 대외적으로 그리 강하지 않던 시절의 이야기다. 미국이 1,2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초강대국으로 거듭나면서 '고립주의'를 외쳤던 적은 없다. 오히려 미국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적극적으로 '개입주의'를 표방하며 시시콜콜 간섭을 하면 했지 '고립주의'가 웬말이냔 말이다. 이제 다시 트럼프가 '고립주의 노선'으로 미국의 기조를 바꾸고자 한다면, 그건 미국이 스스로 초강대국 지위를 내려놓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건 트럼프가 공약했던 '미국을 위대하게'라는 슬로건에도 스스로 위배되는 메시지가 아니겠는가.

나가는 글 : 더 큰 문제는 트럼프는 이 모든 문제를 '불법이민자들'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고 선전하고 있다는 데 있다. 미국인의 일자리를 '이민자'가 차지했기 때문에 미국의 건강한 젊은이들이 길거리로 내몰리고 가난해졌으며, 미국 내 범죄율이 늘어나는 것도 '불법이민자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라면서 '국경봉쇄'를 하면서 울타리를 높이고, 이민자들을 '강제추방'하는 일까지 서슴지 않고 있다. 그런데 정말 '불법이민자들' 때문에 일자리를 뺐기고 범죄율이 높아지는 걸까? 천만의 말씀이다. 미국은 이미 '생산공장'을 돌리지 못하고 대부분의 물자를 '수입'해서 쓰고 있는 나라다. 그러니 저임금 노동은 애초에 미국시민들이 거들떠도 보지 않고 있다. 더구나 미국시민들의 '인건비'는 천정부지로 높아서 쓰고 싶어도 웬만한 중소기업공장들은 쓰지 못한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자동화 시스템'으로 인해서 생산공정라인에 '노동자' 대신 '(자동화) 로봇'으로 대체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불법이민자 때문에 미국시민의 일자리를 뺏긴다는 말은 어불성설이다. 저임금 노동을 할 수 있는 이들은 오직 '불법이민자들' 뿐인데, 그들을 쫓아냈으니 미국 내 '단순노동직의 공백현상'을 메꾸지 못해 물가만 상승하는 악순환이 시작됐다. 또한, 불법이민자들은 '강제추방' 당하는 것을 가장 무서워한다. 그래서 애초부터 범죄를 저지를 생각도 하지 않는다. 눈에 띄지 않기 위해서 몸부림치는 이들이 어떻게 범죄를 저지른단 말인가? 그저 조용히 '저임금 고위험 노동'도 마다하지 않고 묵묵히 일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그리고 '불법이민자들'을 강제추방한 이후에 범죄율이 낮아졌을까? 천만에 말씀! 애초에 범죄는 미국 내 백인들이 더 많이 저지른다. 통계상으로는 '미국 흑인/유색인종'이 더 많긴 하지만, 이는 애초에 검거를 할 때 '흑인/유색인종'을 우선 대상으로 선정한 결과에 불과하다. 이런 컬러피플들은 가만히 있어도 범죄자 취급을 하는 통에 오히려 의심을 받지 않으려 더욱 조심하며 사는 소시민들이 훨씬 더 많다고 한다. 이런 상황인데 '불법이민자들'이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겠는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런데도 미국유권자들 사이에서는 이게 잘 먹힌다고 한다. '불법이민자들'에게 온갖 멍에를 뒤집어 씌우고 나면 마음이라도 편한 모양이다. 그 결과 트럼프는 두 번이나 대통령에 올랐다. 그리고 죄 없는 평범한 이들이 '불법 딱지'를 맞고 범죄자로 낙인 찍히고, ICE에 체포되고, 강제추방 당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대한민국 엔지니어도 '같은 일'을 당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오히려 미국 내 공장을 세우고 '미국인 일자리'를 만들어주려고 한국의 투자자금을 받아놓고도 '불법 딱지'를 앞세워서 체포하고, 강제구금한 뒤에, 비인권적인 처우로 대한민국 사회에 경종을 울리고 말았다. 이제 미국은 믿고 의지할 나라가 아니라는 사실을 각성하게 된 셈이다. 미국의 이기적인 행보에 애꿎은 대한민국 선량한 국민들이 희생을 치루는 일은 더는 두고 볼 일이 아니게 된 것이다.

트럼프는 그저 단순한 '이단아'로 취급할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는 세상을 뒤흔드는 폭풍이 되었고, 그 폭풍을 직간접적으로 맞은 나라들은 그야말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오직 슬기롭게 피하고 재앙을 막을 국력만이 '정답'이 된 세상이 열렸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대한민국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방법은 딱 하나다. 미국 의존도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것이다. 그간의 역사로 인해 미국의 영향력에서 완전히 벗어나기는 곤란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독자노선'을 실행해야 하는 단계로 위기가 급히 찾아왔다. 그런데 마침맞게 대한민국은 이에 대한 대비도 어느 정도 해놓은 상태였다. 정말 다행이다. 과거 보수정권에서 울부짓던 '나약한 대한민국'에서 완전탈피해서 '강한 대한민국'으로 우뚝 섰기 때문이다. 전 세계가 대한민국 없이 한시도 돌아가지 않는 상황을 역이용해서 초강대국 미국조차 압박할 수 있는 강력한 카드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정말 그동안에는 조용히 물밑에서 작업한 것 마냥 '마침맞게' 딱 내밀 수 있는 절호의 승부였다. 물론 그 카드가 '만능카드'는 아니다. 이 카드를 잘 이용해서 대한민국을 더욱 유리하게 만들어야 할 숙제는 남겨져 있다. 허나 옛날과 같이 속수무책으로 휘둘리기만 하던 나약한 모습에서 탈피한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할 지경이다. 그동안 정통 강호로 손꼽히던 미국, 러시아, 중국, 유럽, 그리고 일본까지 큰 코를 납작하게 만들었으며, 인도, 브라질을 비롯해서 아프리카, 아시아, 남아메리카 중견 국가들까지 대한민국에게 손을 내밀면서 우호적은 제스처를 취하는 것을 보면 놀랄 지경이다. 거기다가 '중동 산유국들'이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시선 자체가 완전 달리지게 되었다. 심지어 미국의 침공을 받고 호르무즈를 봉쇄하며 맞짱을 놓고 있는 이란까지 대한민국을 자신들의 파트너로 놓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면 뿌듯하다. 정말로.

이제 미국은 믿지 못할 나라가 되었다. 이는 대한민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가 모두 그러할 것이다. 냉전 이후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은 그 '패권국가의 위엄'을 스스로 내려놓게 되었다. 이제 최강자가 물러났으니 새로운 강자가 그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치열한 각축전을 벌일 것이다. 이런 시대에 대한민국이 손가락만 빨면서 관망할 것인가? 이제 그런 나약한 소리는 집어 치울 때가 되었다. 그렇다고 미국의 대신할 새로운 나라에 충성을 다할 준비태세를 완벽하게 할 때인가? 천만의 말씀 만만의 콩떡이다. 그 자리는 바로 '대한민국'이 차지할 자리다. 위험한 미국을 대신해서 덜 위험한 나라를 선택하려는가? 멍청한 짓이다. 그 자리에 대한민국이 당당히 오르게 해야 한다. 우리는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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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 서양 철학 클래식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누리번역 옮김 / 루미너리북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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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미너리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누리번역 / 루미너리북스 (2026) [원제 : U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My Review MMCCLV / 루미너리북스 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네 번째 리뷰는 염세주의 철학으로 유명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박사논문작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 수없이 많은 '쇼펜하우어 자기계발서'도 거의 대부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중점적으로 여러 저작들에서 발췌를 할 정도로 그렇다. 그런데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는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기 전에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먼저 읽어야 한단다. 왜냐면 쇼펜하우어가 이 책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문'에 해당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먼저 읽고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쇼펜하우어 저작들' 가운데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제대로 뒤친(번역한) 책은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루미너리북스, 2026)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관점 포인트 : 솔직히 나는 '철학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사료에 해당하는 '철학 원전'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다시 말해 철학자 본인이 직접 쓴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철학자와의 대담'을 나누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부담스럽다. 철학자가 직접 쓴 글을 읽는 것은 철학책을 읽고 드는 '내 생각'을 철학자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 그에 대한 '답변'을 독자인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얼추 이해까지는 되지만, 이제는 '그 이해'가 제대로 된 것인지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서 자꾸 '다른 책'을 뒤적거리게 된다. 철학자의 '원전'을 2차적으로 '해석'을 가미해서 나름대로 저술을 한 책들을 즐겨 읽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해설서'를 읽을 때면 '삼자대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독자, 그리고 철학자의 논거를 풀어낸 해설가, 이렇게 3명이 나누는 대화이기에, 조금은 쉬이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철학자의 원전이었다. 약간의 '주석'이 달려 있긴 하지만, 오로지 원전의 내용을 충실히 뒤쳐낸 내용만을 읽고 쇼펜하우어의 깊이를 가늠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 책을 간략히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책을 그대로 읽고 감명을 받기에는 너무 어려운 글로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읽고 또 읽어야 겨우 실오라기 하나를 끄집어 낼 정도의 조잡한 실력을 소유한 '문외한'인 탓이다. 먼저 마주하는 핵심은 다름 아닌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다. 뭐, 사실 이것만 이해를 해도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어려운 말도 아니니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간다. 충족이유율이란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식의 체계' 차원에서 학문을 이해했기 때문에, 충족이유율은 '그 자체로 확실한 진리'라고 말을 바꾸어도 같은 말일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이미 많은 철학자들이 위의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선 철학자들은 '단편적으로'만 언급했을 뿐이고, 쇼펜하우어가 본격적으로 주장한 것이 사실이란다. 암튼 그 결과, 충족이유율의 본질은 바로 '왜?'라고 물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 여기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충족이유율이 중요한 까닭은 알았는데, 그 중요성에 대한 근거가 되는 내용들이 하나하나 열거될 때마다 '철학 비전공자'로서 무지함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까닭조차 간단히 설명하자면,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 '철학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먼저 '플라톤'의 이데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리스'의 형이상학을, '데카르트'의 자기원인을,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라이프니츠'의 근거율을, '볼프'를 스쳐지나가며 궁극적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뤘던 선험적 관념론까지 아울러 '상식'으로 갖추고 있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주워 들은 기억은 나지만 나에게 '철학'은 상식이 아니었던 탓에 쇼펜하우어의 '직접적인 설명'이 그리 와닿지 않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이후부터는 내 느낌대로 '이해'한 내용으로 최선을 다해 정리해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모두 같은 필요는 없다는 말로 귀결이 된다. 서양 철학에서 '사유'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데 반해서, '왜 사유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 적이 없었고,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사유는 엄밀하게 말해서 '진정한 사유'라고 볼 수 없다고 쇼펜하우어는 강조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헤겔 철학'을 크게 비판했는데, 그의 '유물론'이 바로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사유의 결과였기 때문에 헤겔의 주장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가짜'라는 극단적인 비판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유물론'이 그토록 엉망이었던가? 엉망인 것치고는 '유물론'이 등장하던 그 시대에 너무나도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헤겔이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쇼펜하우어는 시샘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왜냐면 헤겔과 '동시간'에 강의실을 열었는데, 헤겔 덕분에 쇼펜하우어는 강의를 들으러 들어오는 수강생이 거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인기가 없었기에 결국 쇼펜하우어는 대학에서도 쫓겨나고 말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헤겔 철학을 비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헤겔 철학은 근대철학을 완성하고 현대철학을 연 공로를 인정받으면서도, 오늘날 헤겔이 칸트 철학을 잘못 해석한 탓에 철학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비록 쇼펜하우어가 사망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로 인해 쇼펜하우어는 사후에 크게 인정 받으며 오늘날까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널리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나가는 글 : 사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 그 '의지'를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꼭 이해해야 한다고 앞서 말했다. 그럼 거꾸로 '표상'을 이야기하면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정리해보자. 사실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은 '칸트', '플라톤', 그리고 '불교(인도 베단타)'의 융합이라고 보아도 좋다. 쇼펜하우어의 '표상'을 이해하려면 칸트의 '현상(물자체)', 플라톤의 '가상(이데아)', 베단타의 '마야(삼신)'에 해당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표상'이 실재하기 위해서는 '의지'라는 관념적 결정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 상충하는 개념인 '실재론(표상)과 관념론(의지)'이 불교적 해석이 가미된 '물아일체(?)'의 경지를 선보여야 했던 것이다. 사실 '물아일체'는 장자가 말한 개념이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런 물아일체의 개념을 인도 불교 베단타를 통해서 개념이해를 한 모양이다. 암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에 다다를 때 비로소 '의지는 표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바로 '사유'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고, 그 사유는 바로 '확신할 수 있는 이유', '그 자체로 확실한 진리'의 결과인 것이다. 이제 다시 '충족이유율'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주요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먼저 읽으라고 확신한 것이다. 내가 이해한 것은 여기까지다. 나중에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비롯해서 다른 철학자들의 저작을 탐독하면서 이해한 내용이 있다면 다시 첨부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서양 철학의 오류를 '이유'에서 찾았던 것일까?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고, 원인이 발생하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게 되는 것처럼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서양 철학에서는 '그 이유'를 너무 가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관념적으로 따지고 들다보니 '실재하지 않은 근거'를 앞세워서 억지로 '이유'를 껴맞추려 했고, 그런 까닭에 '그 결과'조차 엉뚱하게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유독 비판했던 헤겔 철학도 '변증법'이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을 내세워서 '모든 것'에 억지로 껴맞추려 했고, 그 결과로 내놓은 것들에 오류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증명한 셈이다.

그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완벽한 이유'를 제대로 분석하며 '확실한 결과'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거짓'을 앞세워서 '혐오와 차별'을 일삼는 행태는 근절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심지어 잔혹한 전쟁조차 '정확한 이유'를 들어서 벌이는 것이 아닌 현실은 정말 참혹할 수밖에 없다. 이따위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해서 벌어지는 것인지 명명백백히 밝혀내야 할 것이다. 여러 모로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눈이 떠진 것 같다. 읽기 힘든 책이었지만 나름 보람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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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 국내 최초 출간! 페르시아와 로마보다 먼저 세계 제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최초의 제국 더숲히스토리
야마다 시게오 지음, 박재영 옮김, 이희철 감수 / 더숲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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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숲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 국내 최초 출간! 페르시아와 로마보다 먼저 세계 제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최초의 제국> 야마다 시게오 / 박재영 / 이희철 / 더숲 (2026) [원제 : アッシリア_人類最古の帝国_トンボなし]

[My Review MMCCLIV / 더숲 1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세 번째 리뷰는 더숲히스토리 다섯 번째이자 국내 최초로 출간되는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다. '더숲히스토리' 시리즈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던 세계사가 아닌 잘 알지 못했던 세계사를 조명한 시리즈로, 지금까지 나온 책은 <바빌론의 역사>(2021), <비잔티움의 역사>(2023), <히타이트 제국의 역사>(2024), <무굴 제국의 역사>(2025), 그리고 이 책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가 올해 출간되었다. 그동안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 역사를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갈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나라에는 이 들의 역사를 집중조명할 전문가가 거의 없는 형편이고, 있다손 치더라도 책을 내어줄 출판사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어렵사리 출간할 역사책을 읽어줄 독자가 그닥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적은 '역사에 관심이 생긴 독자들'조차 유명하고 낯익은 역사책을 찾아 읽지, 이름도 낯선 역사책을 굳이 찾아서 읽을 까닭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출간하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름도 생소한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를 읽어야 할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관점 포인트 : 여러분은 <길가메시 이야기>를 알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전설로 전해지는 영웅이야기인데 어떤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지 아는가? 바로 '아카드 어'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길가메시'를 수메르인이 지어낸 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그 이야기가 어떤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바로 '아카드 어'라고 한다. 그리고 '아카드 어'를 쓰는 민족이 바로 '아시리아 인'이다. 그들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길가메시 이야기>를 '쐐기문자'로 점토판에 '기록'을 남겼고, 이 '점토판 기록'이 오늘날 가장 최초로 <길가메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고 전해진 것이다. 만약 아시리아 인이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구전은 언젠가 끊겼을 것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길가메시 이야기>를 몰랐을 것이다.

좋다.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은 <길가메시 이야기>를 몰라도 된다. 모를 수도 있다.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에 무관심하게 살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길가메시 이야기>를 전했던 '아시리아 인'에 대한 오늘날의 이미지는 매우 포악하고 잔혹한 짓을 많이 한 민족으로 정해져 버렸다. 왜냐하면 <성경>속에 아시리아에 대한 표현이 남아 있는데, 딱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속에 아시리아 인은 북이스라엘 국가를 침략해서 멸망시켰고, 남유대 국가를 침공했다가 오랜 시일이 지나 전염병이 퍼져서 결국 패배해서 돌아갔다고 적혀 있다. 그럼 <구양성경>은 누가 썼는가? 바로 유대인이 쓴 '기록'이다. '구약'은 유대인의 역사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후 아시리아는 멸망하고 사라진 뒤, 후세 사람들은 무엇으로 아시리아 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기억할까? 다름 아닌 <성경>속 '구약 이야기'를 통해서 아시리아 인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을 침략해서 멸망시키고 해코지한 민족을 '위대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남겼다'고 기록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잔인하고 난폭했으며 야만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적어 놓았을 것이다. 왜냐면 역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 갈라진 그리스도교를 믿는 서구인들은 <성경>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아시리아 인'에 대한 이미지가 굳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단다.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고대 유적을 발굴하는 유적탐사팀이 '아시리아 인'들이 남긴 '점토판'을 분석한 결과, 아시리아 제국이 로마제국처럼 초기에는 '공화정 체제'를 만들어 민주적인 제도로 집정관을 뽑아 지도자로 삼아 정치를 이어나갔고, 훗날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자 자연스레 왕이 등장해서 한껏 넓어진 국토를 다스리는 제국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이를 지탱하는 경제체제도 갖추고, 시민들은 다양한 문화예술을 즐기면서 '문명인'과 다를 바 없는 풍요로운 문화를 누리며 살았다는 기록이 생생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유대인이 살던 지역은 초라한 변방에 불과했고, 강대국이 주변국을 정복하며 제국의 역량을 어김없이 발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자연스러웠기에 '아시리아 제국'을 한낱 야만인처럼 취급하기에는 너무나 적절치 못했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역사를 '기록'을 통해서 들여다 본다. 물론 그 '기록'이 완벽할 수는 없고, 때로는 너무 빈약해서 진면목을 살펴보기에 너무 부족할 수도 있고, 때로는 '승자의 일방적인 기록'이나 '패자의 악의적인 왜곡'으로 잘못된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역사는 팩트체크를 위해서 '교차검증'을 하고 있으며 '하나의 사료'나 '한쪽의 사료'만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라고 섣불리 평가내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여러 기록이 '한 목소리'로 공명을 이룰 때, 비로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역사책을 읽으며 다양한 해석을 하며 '역사의 필요성'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객관적 사실'만을 역사라고 부르지 않는 까닭이다. 그 사실을 토대로 '역사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 진정 역사책을 읽는 까닭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성경>만이 유일하게 남은 기록이었다면 현재까지도 '아시리아'는 어두운 이미지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 남긴 기록이 온전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왜곡'이 심한 기록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질문한 것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말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은 <성경>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종교적 권위를 가진 '기록'이고, 그 기록에 의해서 '왜곡된 거짓'을 진실인냥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름 아닌 '힘이 센 강자의 의도'대로 그냥 믿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물론 내가 '강자에 속한 집단'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약자 집단'이고, 멸망한 줄 알았던 '아시리아인의 후손'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짜뉴스에 의한 혐오와 차별을 쏟아지듯 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더구나 '역사'에 관심도 없으니 제대로 된 항변도 할 수 없고, 그저 당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반대로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자도 '역사적 진실'을 바로 알고 '가짜뉴스'를 판별하고, '혐오와 차별'을 일삼는 부끄러운 짓을 멈출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정의로운 일'에 앞장 서게 될 것이다. 또한, 약자도 '역사적 진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는 옳지 못하고 부당한 억압과 차별, 그리고 폭력 앞에서도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이런 부끄러운 행동을 저지르지 않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옳지 못한 일을 바로 잡을 수도 있다.

나가는 글 : 대한민국은 지난 100여 년간 엄청난 격동의 역사를 보냈다. 망국의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식민지 백성의 고난이 시작되었고,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독립을 이뤘지만, 곧이어 터진 전쟁의 아픔을 겪으며 완벽한 굶주림을 겪어야 했고,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겨우 굶주림을 면했구나 싶더니, 민주주의가 탄압당한 군사독재가 펼쳐졌고, 그 어둡고 처절했던 시절을 민주화항쟁으로 극복하고 이뤄낸 대한민국이 드디어 선진국이 되고, 진정한 강대국으로 성장해서 전세계 인류의 공영과 평화를 이룩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부강한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얼마나 '약소국의 설움'을 당했던가 말이다. 그때마다 고개 숙인 대한민국 국민들을 일어서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랑스런 우리 역사'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정복활동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외적의 침략에는 분연히 맞서서 이겨내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우리 역사의 끝에 전세계를 호령하는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히 힘을 과시하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란 말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자랑스러워 해야 하고 세계 만방에 널리 알려야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역사를 잘못 배운 이들이 부끄러운 짓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자국의 역사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다른 강대국들의 비위를 맞추어 '자국의 역사'마저 먹칠을 하고야 마는 멍충이들이 너무 많다. 우리끼리는 얼마든지 싸워도 좋다. 그것이 실리를 두고 싸우는 것이든, 명분을 두고 의견을 다투는 것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어이 없게도 우리땅에서 '다른 나라 국기'를 들고서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자국 정부'를 흔들고, '자국민을 헐뜯는' 멍충이를 어떻게 봐줘야 한단 말인가? 이들은 역사를 잘못 배운 이들이다.

한국사든, 세계사든, '역사'라는 한 울타리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래야 세계속에서 한국이 맥을 같이 할 수 있고, 한국사를 배우는 것으로 세계사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사는 '위대한 역사'로 가치를 높여 다루고, 그런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간 몇몇 강대국들 위주의 '편협한 세계사'를 배운다면 잘못된 역사관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관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면 심각한 왜곡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세계사'를 서양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절대 아니다. 비록 세계사가 유럽과 미국 등 서구 중심적인 서술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예시'일 뿐이지, 서양의 역사만이 바르고 옳은 것이고, 서양 이외의 역사는 비주류이고,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기에 세계사와 한국사는 '더불어'서 같은 맥락으로 역사적 흐름을 비교분석하고, 어디에서든 딱 들어맞는 '보편타당한 역사관'을 갖춰야 한다.

이는 아무 역사책 어느 곳을 펼쳐도 다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이 책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를 보아도 '아시리아의 흥망성쇠'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사의 흐름을 따르고 있고, 흥한 이유와 망한 이유가 한 눈에 보인다. 그 까닭은 다름 아닌 '똑같은 인간'이 벌여놓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넘나들어도 '인간이 사는 모습'은 매한가지다. 아시리아 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대한민국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유별나게 달라보일 것이 없다. 물론 기원전 23세기와 서기 21세기라는 반만년이라는 '세월의 차이'는 보일 수 있어도,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작게는 '오늘날 중동 국가의 현안'을 파악하기 위한 교양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미-이란 전쟁이 휴전을 꾀하는 와중에도 '이스라엘'이 전쟁을 확전시키려는 까닭을 '아시리아 제국 내의 민족적 갈등과 해결 방법'을 엿보면서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크게 보길 바란다. 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흥하는 원인과 망하는 원인이 오늘날의 한 국가에서도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할 때의 모습에서 현 미국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도 머지 않아 멸망할 징조를 보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원인을 해결하고 막으면 '망국의 길'을 걷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처참한 말로가 오늘날 미국이 처한 상황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아시리아 제국이 위축되는 시점에서 부상한 '메디아 부족'과 미국의 위세가 꺾이고 있는 시점에서 부상하고 있는 '대한민국'도 묘하게 겹쳐 보인다. 물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한낱 '메디아 부족'과 견주기엔 적당하지 않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분명 위협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이런 흐름을 잘 파악하고 미국이 나름 대처를 잘 한다면 미래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세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역사는 늘 그런 '페이지'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모로 아주 흥미로운 역사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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