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
고우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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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 고우영 / 문학동네 (2021)

[My Review MMCCVII / 문학동네 27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여섯 번째 리뷰는 대한민국 '만화 삼국지' 가운데 최고봉을 자랑하는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이다. 나는 고우영 화백이 2005년에 별세하셨을 때, 화백의 유작들을 탐독했었는데, 벌써 20년이 훌쩍 흘렀다. 그런 의미로 해마다 연초가 되면 늘상 읽던 <삼국지>였기에 올해는 고우영 화백의 <삼국지>부터 다시 읽어볼 작정이다. 새삼 다시 읽으니 예전에 읽었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새롭게 다가왔다. 1978년에 신문에 연재를 시작했다지만 당시에 유년 시절을 보내던 내가 읽었더라도 뭔 내용인줄 몰랐을 것이다. 그러다 90년대에 들어서 '단행본'이 나왔기에 틈틈이 보다가 새천년이 넘어서 결국 화백께서 고인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읽기 시작했었다. 당시엔 만화책 사볼 돈도 궁하던 시절이었고, 한창 먹고 사는데 바쁘다보니 책을 들여다볼 여유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2005년 독서논술지도사 자격을 취득하고 본격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하던 즈음에 화백의 별세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래서 나에게 고우영 화백의 만화책은 좀 유별나게 다가온다. 그럼 책속으로 들어가 보자.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 관점 포인트 : 80년대, 90년대까지만 해도 '올컬러 만화'는 참 드물었다. 거의 대부분 '흑백 만화'였고, <소년 챔프>나 <아이큐 점프> 같은 '주간 만화잡지'의 표지나 일러스트 정도가 컬러로 나오던 시절이었다. 참 대한민국 최초의 월간 만화잡지 <보물섬>을 잊을 뻔 했다. 한 권에 500원이나 하던 ㅎㅎ. 암튼 <고우영 삼국지>도 처음엔 흑백으로 먼저 접했다. 그런데 역시 만화는 '컬러판'으로 봐야 한다. 그래야 한 눈에 싹 들어오고 '손글씨'가 아닌 '서체'로 프린팅이 되어 '가독성'도 대단히 높아졌다. 특히나 고우영 화백의 손글씨는 깨알같기로 유명해서 읽을 때 애를 먹기 일쑤였다. 암튼 흑백판이 아닌 '문학동네'에서 새로 출간한 올컬러판이 훨씬 좋다는 점을 밝힌다.

암튼 <삼국지>는 '정본'이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오늘날에는 나관중이 직접 쓴 판본이 전해지지도 않으며, 굳이 '원본'이니, '정사'니, '완역본'이니 따지며 읽을 필요도 없다. 왜냐면 아무 것이나 읽고 즐기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막상 읽으려면 '10권의 분량'이라는 압박감에 수많은 <삼국지> 가운데 하나만 골라서 읽어보려는 독자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 팁을 줄 수 있다. 대한민국 정치색이 '보수 성향'이라면 <이문열 평역 삼국지>를 권하고, '진보 성향'이라면 <황석영 정역 삼국지>를 권한다. 또한 순수한 재미를 추구하는 독자라면 <요시카와 에이지 삼국지 원전 완역판>을 권한다. 마지막으로 가장 최신판이자 완성도를 추구한다면 <박상률 완역 삼국지>를 추천한다. 이 넷 중에 하나만 골라 읽어도 충분할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삼국지>의 원전격은 다름 아닌 <고우영 삼국지>가 되겠다. 실제로 읽어보면 느낄 수 있겠지만, <고우영 삼국지>를 읽다보면 '이문열'을 읽는 느낌도 나고, '황석영'을 읽는 느낌도 나며, '요시카와 에이지'를 읽는 듯 하면서도, '박상률'의 신작을 읽는 느낌도 나기 때문이다. 그것이 무슨 까닭이냐면 <삼국지>를 읽는데 가장 중요한 핵심이 '해석'이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는 '요시카와 에이지'가 쓴 <삼국지>가 가장 먼저 출간했지만, 이조차 '중국 판본의 삼국지'를 일본 독자들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한 소설이다. 그걸 참고 삼아 한국의 고우영 화백이 '한국 독자의 입맛'에 맞게 재해석을 가미했고, 그걸 바탕으로 '이문열 평역', '황석영 정역', '박상률 완역'의 순서로 펴냈다. 물론 각각 '저본'으로 삼은 책들은 다르지만 역시나 <삼국지>는 '해석'이 묘미인 셈이다. 전문가가 아닌 이상 일반 독자라면 '재미'를 추구하기 마련이고, <삼국지>의 재미는 색다른 해석이 가미되어야 읽을 맛이 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색다른 해석의 재미를 가장 뚜렷하게 느낄 수 있는 판본은 역시나 <고우영 삼국지>를 꼽을 수밖에 없다.

더구나 고 고우영 화백이 얼마나 촌철살인의 해석을 가미했던지, 연재 당시에 군부독재정부의 '검열'에 원본이 누더기가 될 정도였다. 검열 기준은 첫째, 야하면 안 되고, 둘째, 사회비판은 허용 안 되며, 셋째, 욕설이나 비속어도 불허했다. 이를 달리 말하면 <고우영 삼국지>는 80년대 기준으로 충분히 에로틱 했고, 독재정부 비판의식이 가득했으며, 사회적으로 억압된 불만욕구의 분출을 하기 위해 속시원한 욕설과 비속어 등을 마구 사용했다는 점이다. 물론 오늘날의 시선으로 본다면 전혀 에로틱하지도 않고, 군부독재를 겨냥한 비난이 맞나 싶고, 욕설이라기보다는 어느 지역의 구수한 사투리를 적어놓은 듯 싶을 것이다. 세월이 흘러서 언뜻 눈에 띄지 않지만, 당시를 살아본 독자라면 그 정도만으로도 엄청난 '수위조절 실패'였기 때문에 검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던 엄혹한 시절이었음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현재는 '무삭제판'으로 그 모든 풍자와 해학을 다 엿볼 수 있다. 이런 풍자와 해학에 대한 내용은 후속편에서 좀더 심층적으로 다뤄보겠다.

나가는 글 :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의 차례는 1장 '황건당 (Yellow Club)', 2장 '도원결의', 3장 '십상시의 난과 네로 동탁'이다. 흔한 <삼국지> 스토리라는 것을 눈치 챘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 책만의 특색은 없는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다른 <삼국지>에서는 이 대목에서 주인공으로 다름 아닌 '유비 현덕'을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이렇게나 어지러운 난세에 영웅이 탄생했는데, 그 이름이 유비이고, 그는 중산정왕의 후예로 무너져가는 한 황실을 다시 일으켜 세울 불세출의 영웅이 납시니 모두가 주목하시라...라면서 일장 연설조로 이야기를 술술 풀어나가는데 반해서,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단연 '연인 장비'가 주인공이다. 황건당이 등장하기 이전에 '장비'가 돼지고기를 팔며 한바탕 소란을 피우고, 도원결의를 맺기 위해 '장비'가 유비를 찾아나서며 질질 끌고가다시피 한다. 십상시의 난으로 어지러운 형국에서 탁현 누상촌에서 모병을 한 뒤에 거병을 주도한 것도 '장비'가 되겠다.

그럼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왜 유비가 아니라 '장비'를 주역으로 내세운 것일까? 그건 다름 아니라 '삼국지'를 서민 중심적인 관점에서 재해석을 했기 때문이다. 도대체 황건당이 왜 일어나게 되었단 말인가? 백성들이 먹고 살 길이 막막하자 도적떼가 되어 난리가 난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대부분의 <삼국지>는 그런 백성들의 고충을 이야기하면서 얼마 지나지 않아 엉뚱하게도 '온갖 영웅들'을 등장시켜 영웅들의 활극으로 이야기를 풀어간다. 그렇지만 <고우영 삼국지>는 그렇지 않다. 시종일관 못 먹고 못 살겠다고 고충을 토로하는 '가난한 백성들의 이야기'를 연이어 풀어낸다. 그리고 이런 빈곤한 백성들의 고충을 제대로 들어주는 이를 '진정한 영웅'으로 추켜세우고, 그렇지 못한 영웅들은 '난세의 간웅'으로 싸잡아 비판한 것이다. 이런 구도로 읽으면 <삼국지>에서 왜 유비가 진정한 영웅이고, 조조가 난세의 간웅인지 여실히 증명이 되지 않느냔 말이다. 이게 정말 '신의 한 수'다. <고우영 삼국지>를 읽는 맛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런 식이기에 '고달픈 백성들'을 위한 행보를 걷지 않은 여러 군웅들은 뛰어난 능력을 갖췄어도 한낱 필부이거나 악당으로 치부할 수 있는 것이다. 황건당의 장각이 그렇고, 치세의 능신으로 평가받는 조조도 그렇고, 4대에 걸쳐 재상을 누렸던 원소도 그렇고, 혼세에 대담한 능력을 발휘한 손견도, 이리 같은 야욕만 가득한 동탁도, 의리도 없이 배신만 일삼는 여포도, 백성들이 도탄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는데도 권력과 금은보화에만 관심이 쏟던 십상시와 하진 남매, 수많은 고관대작들, 심지어 영제, 소제, 헌제까지 죄다 무능한 필부이거나 악질적인 악당에 불과한 것이다. 오직 딱 하나 '유비, 관우, 장비 삼형제'만이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하고저 몸을 일으켰으니 대단한 영웅일 수밖에 없다는 아주 명약관화하고 이해하기 쉬운 플롯 전개가 아니겠는가.

이는 다른 <삼국지>에서는 제대로 맛볼 수 없는 참맛이다. 그 덕분에 여타의 <삼국지>에서는 이놈도 영웅 같고, 저놈도 영웅 같고,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으로 읽히고 만다. 앞서 말한 악당과 영웅의 경계가 분명해야 <삼국지>를 읽는 진정한 맛이 날텐데 여타의 <삼국지> 등은 이런 맛을 제대로 살리지 못하고 '난세의 영웅들의 모험담'에만 치중한 셈이라 읽다보면 어느새 '도탄에 빠진 백성들'이 독자의 시선에서 사라지고 만다. 그런 까닭으로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가난한 서민들의 말과 행동을 '대변'하는 인물로 장비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다. 이 책에서 '장비의 말과 행동'은 다름 아닌 도탄에 빠진 백성들의 목소리이고 사회비판을 하는 핵심 포인트다. 이걸 놓치지 않는다면 <고우영 삼국지>를 제대로 읽은 것이 될 것이다. 2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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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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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근대사 산책 7권 : 간토대학살에서 광주학생운동까지> 강준만 / 인문과사상사 (2008)

[My Review MMCCVI / 인물과사상사 34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전문리뷰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네 번째 리뷰는 <한국 근대사 산책 7권>이다. 시대흐름상 1920년대 일제식민 치하의 상황이 펼쳐져 있다. 흔히 알고 있는 시대 구분법에 따라 일제의 '문화통치기'에 해당하는 시점인데, 1919년 3·1운동이 폭발한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 등 강렬한 무장독립투쟁이 활발하던 시기이기도 하다.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이 그것인데, 그것 말고도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맹활약을 하던 시기였기도 하다. 그 가운데 7권에서 주목한 것은 '사회주의의 열풍'이었다. 우리 독립운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인데, 그간 '분단된 현실'을 감안해서 사회주의 운동은 '공산주의'와 함께 싸잡아서 무시한 덕분에 한동안은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이야기조차 꺼내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오죽하면 의열단 단장 김원봉의 이름 석자를 감추려 했고, 윤석열 독재정권 때는 '홍범도 장군의 동상'마저 철거하려 들었겠는가. 우리 사회에 뿌리 깊은 사회주의 배척현상이 아주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그럼 책속으로 들어가보자.

<한국 근대사 산책 7권> 관점 포인트 : 1920년대 일제는 소위 '문화통치'를 실시했다. 그동안 조선인들을 향해 '무단통치'를 일삼고 길거리 한복판에서 발가벗겨 쇠좃매로 피떡이 되도록 치욕을 주던 일본인들은 이제 조선인들을 살살 구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에게 '교육의 기회'로 열어주었고, '취업의 길'도 열어주었으며, '농지개혁' 따위를 통해 조선에서의 곡물생산량 증대를 위해 무던히도 애를 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다 '빛 좋은 개살구'였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냐면 조선민중들은 여전히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육의 기회를 열어주었다지만 '돈 많은 일본인 학생'들에게만 편중된 교육을 실시하였고, 가난한 조선인 학생들은 매달 '월사금'을 내지 못해 담임선생에게 매를 맞고 학급생들에게 망신을 당하기 일쑤였다. 그것이 싫으면 자퇴를 해야 했고 말이다. 그래서 조선인들은 '서당'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교육을 하려 했지만, 일제는 이마저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조선인의 문맹률은 무려 80%에 육박했다. 그럼에도 전국의 학교에서 1등을 차지하는 것은 언제나 조선인 학생이었다. 최악의 교육환경이었지만 그 속에서 꽃 피운 아름다운 결실이긴 했지만, 이들 우수생들이 모두 독립운동에 매진한 것도 아니었다. 일제의 감시와 유혹에 넘어가 '친일의 길'을 걸은 지식인들이 숱하게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였기 때문에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 들은 점점 더 삶이 어려워지게 되었다.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도 살아날 길이 열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럴 때 전세계는 '소련의 탄생'과 '사회주의 열풍'이 불기 시작했고, 조선민중들도 이런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기 시작했다. '조선공산당'이 창당된 것이다. 그렇다고 일시에 조선민중들이 '공산주의자'가 된 것은 아니었다. 일제는 자신들의 제국주의(군국주의) 사상에 걸림돌이 되는 '공산주의'를 결코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격한 공산주의보다는 온건한(?) 사회주의 열풍이 빠른 속도로 퍼져 나갔다. 사회주의란 기본적으로 '공동체주의'를 말한다. 저 혼자 잘나고 잘먹고 잘사는 것을 배격하고, 모두가 고르게 배불리 먹고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믿고 따르고 싶었기에 사회주의는 하나의 '사상(이데올로기)'로 받아들이기보다 '처세의 상식'이 되어 버린 것이다. 몇몇 소수만 잘먹고 잘사는 세상보다 모두가 굶주리지 않고 평등하게 살 수 있는 세상이 있다는데 그걸 마다할 '가난한 민중들'이 있었겠느냔 말이다. 이 좋은 '사회주의'를 마다하는 이가 있다면 정말 욕심꾸러기일 수밖에 없으니, 그런 욕심꾸러기를 혼쭐 내주는 것은 '상식'이라면서 널리 퍼져나갔던 것이다.

이에 따라 조선민중들은 '계급 투쟁'에 대해 깨우치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말한 '자본가(부르주아)'와 '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영원한 투쟁의 역사의 현장을 몸소 겪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부당함을 느낀 조선민중들은 일제를 향해 '노농 투쟁'을 하기 시작했다. 조선노농총동맹을 결성하고 사회주의 사상에 입각해서 '원산총파업' 등을 일으켰던 것이다. 물론 일제의 탄압으로 파업은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지만, 사회주의 독립운동가들은 이때를 시작으로 더욱 가열차게 활약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광주학생운동은 '민족의 단결'을 부르짓는 계기가 되었다. 단순한 학생들간의 싸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를 두고 '아이 싸움이 어른 싸움으로 번졌다'고 평가절하하는 이들은 매국노로 찍힐 정도로 민족감정은 들끓었기 때문이다. 일제 당국은 가해자인 일본학생들은 처벌하지 않고 조선학생만 강력한 처벌을 하자 이에 불만을 표출한 조선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하고 부당함을 소리 높였다. 그럼에도 일제는 별다른 철회조치를 하지 않자 전국 194개 학교에서 학생 54,000여 명이 시위를 이어 나갔다. 학생운동이 '항일운동'으로 번져나간 것이다. 일제시대 3대 운동으로 3·1운동, 6·10만세운동, 그리고 '광주학생운동'을 꼽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광주학생운동은 1929년 10월 30일 열차내에서 일어난 사건이 발단이 되어 우발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26년 11월 3일에 결성한 '성진회'라는 학생 비밀결사가 이미 조성되었고, 이들 학생들은 자발적으로 '항일운동'을 해오고 있었는데, 일제가 조선인 학생들에 대한 처우를 부당하게 일삼자 전국적으로 학생운동으로 봉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나가는 글 : 이렇게 가난하고 못사는 것도 억울한데 사사건건 공평치 못하고 부당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자 조선민중들은 가만 있지 않았다. 3·1운동으로 시작된 대대적인 '독립투쟁의 역사'가 끊이지 않았지만, '무장독립 투쟁'이 쉽지 않게 되자 조선민중들은 '계급 투쟁'과 '노농 투쟁'으로 독립운동을 이어나갔던 것이다. 더구나 사회 곳곳에서 '조선인 차별 정책'이 개선되기는커녕 점차 심화되는 현실을 깨닫고 '민족적 투쟁의식'이 불타올랐다.

하지만 일제는 아직 사그라들지 않았다. 1차 세계대전 승전국의 지위를 얻고 '세계정복의 야욕'은 더욱 키워나갔고, 그 결과로 중국내 영토를 침략하며 급기야 만주와 몽골를 넘어 중국 대륙 전체를 집어 삼키겠다는 야심을 감추지 않았다. 이런 와중에 벌어지던 조선민중들의 투쟁은 일제의 강렬한 탄압과 수탈로 짓밟히고 있었다. 일제의 '야만성'은 간토대학살로도 잘 드러난다. 일본 관동지방을 휩쓴 대지진으로 대혼란이 일고 수습이 쉽지 않을 것 같자 '일본정부'는 유언비어를 날조해서 위기를 극복하고자 했다. 바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방화와 강도, 심지어 부녀자 강간을 일삼는다는 헛소문을 퍼뜨렸던 것이다. 이에 성난 일본인들은 자경단을 조직해 '조선인'을 색출해서 학살했다. 무려 10만 명이 넘었다고 한다. 조선인을 판별할 수 있는 방법은 "쥬엔고쥬세엔(10엔 50전)"을 발음해보라는 것이었다. 일본인만 발음할 수 있다는 'ㅈ'과 'ㅊ'의 중간 발음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바로 죽여버렸다고 한다. 그로 인해 조선인만 죽은 것이 아니라 외모가 비슷한 중국인과 몽골인 등도 죽었고, 일부 장애가 있는 일본인도 '제대로 발음하지 못한 죄'를 물어서 죽여버렸다고 물타기(?)를 하며 조선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려 했지만, 희생자의 대부분이 '조선인'이었던만큼 일본 정부의 책임을 강력하게 묻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간토대학살'로 인한 중국과 몽골의 진상조사와 사죄, 그리고 배상까지 일본정부는 일사천리로 해결했는데 반해, 대한민국은 이에 대한 '진상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라고 한다. 물론 의식 있는 '일본지식인들'이 일본정부에 진정서를 내고 문제의 해결을 신속히 할 것을 촉구하고 있지만, 정작 최대 희생자를 낸 대한민국 당국이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고 있어 미적지근하다고 한다. 심지어 대한민국 국민 가운데 상당수가 '간토대지진'으로 인하 발생한 '대학살'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게 그냥 덮힐 사안인가? 한일간의 대결이 벌어지면 '가위바위보'도 지면 안 된다는 반일정서가 팽배한 대한민국에서 왜 이러는 것일까?

물론 21세기를 살아가는 대한민국이 '과거'에 발목이 잡혀서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하는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거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덮고 넘어가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미래로 나아가는 일은 착착 나아가면 된다. 그리고 과거의 문제도 척척 해결해나가면서 해야 한다. 이게 대한민국이 강대국이 되어야 할 분명한 이유다. 이전까지는 우리가 '약소국'을 면치 못했기에 온갖 설움을 당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참고 화가 나도 웃으며 넘겨야만 했다. 허나 이제 강대국이 된 대한민국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고 감히 대한민국을 함부로 대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 이제야 비로소 그날이 온 것 같지 않은가. 나는 그리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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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
아멜리 노통브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세계사 / 201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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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 인명사전 :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 아멜리 노통브 / 김남주 / 문학세계사 (2010) [원제 : Robert des noms propres (2002)]

[My Review MMCCII / 문학세계사 1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한 번째 리뷰는 끔찍하고 비정상적인 소설만 쓰는 이상한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로베르 인명사전>이다. 이 책의 부제를 눈여겨 보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나를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이라고 쓰여 있기 때문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소설속 주인공이 자신을 살해한 '인물'에 대해 이런저런 변명과 핑계를 늘어놓았을 거라고 짐작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장르의 소설은 식상할 정도로 너무 많다. '반전'을 전혀 줄 수 없는 진부한 방식이란 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의 작가가 누군가? 절대로 '정상'이라거나 '제 정신'이 아닐 수밖에 없는 소설가. 맞다! 아멜리 노통브다.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다름 아닌 '아멜리 노통브'였던 것이다. 그리고 책의 말미에서 아멜리 노통브는 총에 맞아 뒈져버린다. 이렇게 결말을 다 밝혀놓고 '스포'를 한다고? 전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아멜리 노통브가 죽건 말건 이 소설의 줄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렇기에 작가 스스로도 책 겉표지에 당당히 밝혀놓은 것이다. '자신'을 죽인 자의 일생에 관한 책이라고 말이다. 참으로 엉뚱한 소설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로베르 인명사전> 관점 포인트 : 이 소설을 읽은 독자들의 한결같은 마음은 이럴 것이다. '이 책을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정말이지 줄거리가 이산 저산 정신이 없을 정도로 난삽하다. 열아홉살 어린 소녀가 임신을 했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자마다 그 소녀는 무능한 남편을 권총으로 살해하고, 소녀는 아기를 낳자마자 감옥에서 목을 매달아 자살하고 만다. 하나 뿐인 딸에게 끔찍한(?) 이름을 지어주고 말이다. 플렉트뤼드. 이게 갓 태어난 여자아기의 이름이다. 다행히 아기는 클레망스라는 친이모에게 인계되어 자라나고, 클레망스는 플렉트뤼드를 자신의 셋째 딸로 여기며 소중히 기른다. 여기까진 어찌어찌 스토리가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다음은 더욱 기괴하다. 클레망스의 '집착'이 보이기 때문이다. 분명 플렉트뤼드를 사랑해서 행동하는 것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플렉트뤼드를 '자신의 꿈'과 동일시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자신이 못다한 꿈을 플렉트뤼드를 통해서 '대리 실현'을 하려는 열망으로 가득해 보인다. 그러면 안 된다는 것을 반면교사처럼 보여주려는양 정말이지 너무 심할 정도로 '집착'하고 있다.

클레망스의 못다한 꿈은 '발레리나'였다. 하지만 일찌감치 꿈을 접어야만 했다. '이상'에 비해 '실력'이 뒤따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평범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클레망스의 눈에 플렉트뤼드는 너무 예뻐보였다. 그래서 평범한 아기를 대하는듯 하지 않고 '공주님'처럼 키우려 했다. 플렉트뤼드도 그런 '엄마의 사랑(?)'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엄마(사실은 이모지만, 플렉트뤼드는 그 사실을 모른채 성장한다)의 기대에 한껏 부흥하기 위해서라도 플렉트뤼드는 '공주'처럼 행동했고, 클레망스는 그것을 행복으로 여겼다. 뭐, 여기까지는 예쁜 여자아이를 키우는 여느 엄마와 다를 바가 없었지만, 클레망스는 더 나아갔다.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쫓겨날 때에도 평범한 아이가 아니니까 상관없다거나, 학교에 입학해서 초보적인 '글자'도 떼지 못해 낙제를 할 것 같다는 담임선생과의 상담에서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같지 못하고 플렉트뤼드는 '특별한 아이'니까 아무 상관 없어..라는 식으로 일관한다. 물론 클레망스에게도 다 생각이 있다. 왜냐면 플렉트뤼드가 '발레'에 완전한 소질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집 선생이나 학교 담임선생이 '주위'를 요할 정도로 산만한 학습태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는데도, 발레 선생이 플렉트뤼드는 "발레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아이예요"라는 말에 꽂혀서 다른 건 아무 상관도 없다는 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플렉트뤼드는 발레만 잘 하는 천재로 성장하게 된다.

그러다 공립학교를 자퇴하고, '오페라 무용 학교'로 진학을 해서 발레만을 전문으로 배우는 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일종의 '아이돌 연습생'처럼 오직 발레만 배울 수 있는 학교이기 때문에 실력 매우 뛰어난 학생들만 모아놓은 학교라고 보면 좋을 것이다. 그래서 플렉트뤼드가 어린 나이에 이곳에 입학하게 된 것 때문에 주위에서 축하와 부러움을 한 몸에 받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생활은 지옥과 다를 바 없었다. 완벽한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서 '체중'과 '몸매' 관리부터 시작해서 혹독한 연습을 반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입학한 저학년 학생들은 좋아하는 춤도 출 기회를 주지 않는다. 철저한 '관리'와 반복 '연습'을 해내고 선생으로부터 통과했다는 의미의 인정을 받아야만 10초짜리 짧은 단역의 기회라도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그런 기회를 얻기 위해서는 몸무게가 40킬로그램 이하가 되어야만 했다. 그 이상이면 '돼지'라는 꼬리표가 붙었고, 45킬로그램이 넘어가면 '자퇴'를 강요받아야 했다. 그래서 이곳에서 최고라고 칭찬받는 무용수들은 대부분 '해골 형상'을 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플렉트뤼드는 일반적인 학교생활에서 만족을 느낄 수 없었기에 이곳에 왔고, 발레를 하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학생으로서 너무나도 모범적이고 바람직한 태도 아닌가? 그런데 여기에 아주 큰 문제가 있다. '성장기 소녀'에게 무리한 다이어트와 혹독한 훈련을 강행하다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몸무게'가 늘지 않으려도 음식을 거의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성장을 위해서 배고픔이 몰려오면 선생들 몰래 '한 입'을 더 먹었다가 몸무게가 늘어서 혼쭐이 나는 일이 반복되었지만, 플렉트뤼드는 이런 꾸중조차 받기 싫었기 때문에 성장에 필요한 딱 한 입조차 먹기를 거부했다. 특히 뼈성장에 필수적인 '칼슘'이 들어있는 유일한 음식인 '저지방 요쿠르트'까지 말이다. 그러자 플렉트뤼드는 뼈마디가 쑤시고 아파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런 아픔을 애써 참아냈다. 선생에게서 칭찬을 듣기 위해서 말이다.

그러다 더는 참을 수 없는 통증이 밀려오자 플렉트뤼드는 엄마인 클레망스에게 '아픔'을 호소한다. 그러나 클레망스는 플렉트뤼드의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성장통'쯤으로 여기고 대수롭지 않게 대한다. 왜냐면 클레망스의 눈에 플렉트뤼드는 너무도 완벽한 발레리나,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빠를 비롯한 다른 언니들은 의견이 달랐다. 플렉트뤼드의 키가 155센티미터에 몸무게는 32킬로그램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뼈만 앙상한 '해골 형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클레망스는 그런 딸의 형상을 보면서도 기쁨과 환희의 미소만 띌 뿐이다. 그렇게 플렉트뤼드는 다시 학교로 돌아가 최고의 무대를 선보였지만 아름다운 점프를 위해 힘차게 도약했다가 발끝으로 착지하는 동작을 하다가 다리 전체가 부숴지고 만다. 그녀의 뼈는 이미 폐경을 한 70대 할머니처럼 변했기 때문이다. 의사는 두 번 다시 발레를 할 수 없다는 진단을 내린다.

플렉트뤼드는 발레가 전부였던 삶을 살다가 한순간에 무너져내렸다. 하지만 끝내 자살은 하지 않았다. 퍽이나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지만, 아직 열일곱 살밖에 안 된 소녀다. 고작 발레를 할 수 없다고 인생을 끝마치기엔 너무 이른 시기이지 않은가. 그래서 플렉트뤼드는 재활치료에 전념하고 하루하루 일상을 되찾기 위해 음식을 섭취했다. 그리고 몸무게가 40킬로그램이 되자 얼추 사람의 형상으로 되돌아왔다. 아빠는 이 모습을 사랑스럽게 보았다. 하지만 엄마는 병문안조차 오지 않았다. 플렉트뤼드에게 엄마는 '인생의 전부'라고 할 정도였기 때문에 빠르게 회복을 하고 두 다리로 직접 걸어서 엄마의 집으로 향했다. 엄마에게 다시 두 다리로 걷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보면 엄마는 또 환희에 찬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기뻐할 거라 믿어 의심조차 하지 않았고 말이다. 하지만 정반대였다. 엄마는 두 다리로 걸어오는 플렉트뤼드를 보고 내뱉은 첫 마디는 "넌 돼지처럼 살쪘구나"였다. 플렉트뤼드는 인생은 무너져 내렸다.

나가는 글 : 전체 이야기는 정말 산만하기 때문에 핵심 포인트만 잡아서 정리해본 내용이다. 짤막하게 간추리면, 플렉트뤼드의 인생은 클레망스의 꿈으로 점철되었고, '엄마의 꿈'을 대신 실현시키기 위해서 '엄마의 삶'을 자신의 인생으로 여기며 살아온 딸의 인생을 보여주고 있다. 그저 '치맛바람이 쎈 엄마'가 주제인가 싶지만, 그보다는 '자식의 삶'을 송두리채 빼앗아 '자신의 삶'으로 바꾸려 드는 스릴러와 공포, 그리고 서스펜스가 좔좔 흐르고 있다. 그런데 겉으로는 그저 그런 '어린 소녀의 성장소설'처럼 꾸며 놓은 것이다. 이래서 아멜리 노통브를 '천재 작가'로 부르는 것 같다. 치밀한 짜임새만 보았을 땐 딱 그렇게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천재 작가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 '초현실적인 소설'을 썼다. 기발한 '발상'만 했더라면 천재 소리를 듣고도 남을 텐데, 기발하다 못해 기괴한 '이야기 전개'를 하면서 그냥 '미xx 널뛰기'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엄마의 대리만족이 실패로 돌아가자 클레망스는 플렉트뤼드에게 '진실'을 밝히고, 자신의 딸이 아닌 자신의 동생이 낳은 '조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리고 친엄마가 친아빠를 죽이고 자신도 자살을 했다는 사실로 털어놓는다. 고작 열일곱 살 어린 소녀에게, 더구나 전부라고 생각했던 '발레'조차 더는 할 수 없게 된 처지에, 클레망스는 플렉트뤼드에게 딱 하나 남은 '끈'인 엄마마저 단칼에 삭제해버린 것이다. 이런 비극을 던져주고 이야기는 어디로 향했을까? 어이 없게도 플렉트뤼드는 '발레'가 아닌 '연기'로 진로를 바꾸고 보란듯이 성공에 이른다. 원래 어릴적부터 '미인' 소리를 들었을 정도로 예뻤기 때문이다. 그리고 복수를 꿈꾸는데 그것이 또 상상을 초월하게도 '엄마'가 아니라 '자신'을 파멸시키는 쪽이다. 그런데 파멸의 순간 '기적'이 찾아오고, 그 기적과 함께 천재 작가 '아멜리 노통브'가 등장해서 플렉트뤼드와 운명적인 만남을 가지고, 다들 아시다시피 아주 진부한 결말인 천재 작가의 사망으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역시 노통브식 결말은 늘 허무하다. 딱 하나 <적의 화장법>만 빼고 말이다. 그건 아주 탁월했다.

그러면 궁금증 하나는 해결이 되었다. 천재 작가로 소문이 난 까닭은 아멜리 노통브의 '독특한 이야기 전개방식' 때문이었다. 그런데 여기에 독자들의 반응은 극명하게 호불호가 갈리는 양상이다. 어떤이들은 극찬을 아끼지 않지만, 나와 같은 독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않고 높은 점수를 주지 않는다. 단순한 취향의 문제가 아닌 '명확하게' 싫은 이유가 있다. 바로 '정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딴에는 '정상'은 진부함과 지루함을 동반한다. 너무나 예측 가능한 범위 안에서만 다루기 때문에 금새 식상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전'을 주기 위해 '비정상'을 추구하는 경향을 강렬하게 선보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허나 '비정상'과 '반전'은 같은 의미가 아니다. 반전은 '낯섦'을 바탕으로 하지만, 비정상은 '부도덕'하고 '불건전함'을 넘어 '혐오'스러움까지 내비칠 위험을 내포하기 때문이다. 아멜리 노통브는 감히 부도덕적이고 불건전함을 넘어 혐오스러움까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왔다갔다 '경계'를 허물어버리곤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나는 아멜리 노통브를 '천재 작가'로 인정할 수가 없다. 적어도 개인적으로 말이다.

몇몇 작품은 정말 소름 끼칠 정도로 멋졌다. 이를 테면 <적의 화장법>이 대표적이다. 이 소설에서는 '내면의 적'이 등장하는데, 그 적의 정체는 다름 아닌 나와 다른 '또 다른 나'였기 때문이다. 공항 대합실에서 느닷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불청객'과의 오랜 대화 끝에 밝혀진 진실이 너무도 강렬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서도 아멜리 노통브의 '비정상'과 '부도덕'의 미묘함을 만날 수 있다. 그럼에도 결말에서 마주할 수 있는 '낯설음'이 주는 강렬한 인상은 이 소설을 여러 번 읽고 또 읽게 만드는 매력을 던져준다. 그런데 <로베르 인명사전>은 어떤가? 아름다운 동화속 공주님 이야기로 포장된 상자를 개봉하자 마주한 것은 '낯설음'이 주는 강렬한 인상이 아니라 '추악한 속내'를 드러내는 불쾌한 적(敵)을 마주할 뿐이다. 그것도 언제나 기쁨과 행복을 줘야 할 '엄마'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세상에 엄마가 딸에게 퍼붓는 저주라니...천재 작가로 불리는 아멜리 노통브도 이런 '무리수'를 캐치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부랴부랴 결말을 바꾸었다. 천재 작가를 죽일 수 있는 영광을 말이다.

이제 남은 궁금증은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이 왜 재밌냐는 의문이다. 이 소설조차 재밌다. 초반의 황당한 설정만 넘기면 끝까지 일사천리로 술술 읽어나갈 수 있다. 도대체 이유가 뭘까? 그 이유를 밝혀낼 여정은 아직도 먼 것 같다. 앞으로 읽어야 할 작품이 꽤 남았다. 부지런히 달려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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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아멜리 노통브 지음, 허지은 옮김 / 문학세계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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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여행> 아멜리 노통브 / 허지은 / 문학세계사 (2015) [원제 : Le Voyage d'hiver (2009)]

[My Review MMCCI / 문학세계사 10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서른 번째 리뷰는 누가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천재 작가로 불리는 아멜리 노통브의 <겨울 여행>이다. 세월이 흐르면 달라지는 것들이 있다. 그래서 10년이면 강산도 바뀐다고 하는가 보다. 내가 노통브의 소설을 처음 접했던 것이 2003년이다.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흥분이 잦아들지 않던 시절에 그녀의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을 처음 읽었는데 너무 강렬했다. 그런 장르의 소설을 읽은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감상이 자리 잡기도 전에 주위에서 극찬과 호평이 난무했다. 그래서 나도 덩달아 그런가보다 싶었다. 첫 느낌은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아주 좋지도 않았지만, 그러다 조금 텀을 두고서 <오후 네 시>란 소설을 읽었는데, 정말 센세이션 했다. 좋은 쪽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말이다. 정말 강렬한 느낌과 인상을 받았는데, 전반적으로 '묘한 불쾌감'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잊혀지지 않고 있다. 그 뒤로도 틈틈이 <로베르 인명사전>, <공격>, <적의 화장법>, <사랑의 파괴> 등등을 읽었는데 점점 의문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아멜리 노통브의 '무엇' 때문에 천재로 불리는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묘하게 '재미'는 있었다. 그래서 '그 맛'에 그녀의 소설을 읽는가보다 싶었다. 그런데 좀 찜찜하다. <겨울 여행>에서 그 찜찜함을 풀어보자.

<겨울 여행> 관점 포인트 : 좋다. 먼저 '인정'하는 것부터 풀어본다면, 그녀의 소설은 재미가 있다. 그래서 계속 읽게 만든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가 정말이지 기발하다 못해 기똥찼고 더불어서 기가 찼다. 이를 전문용어로 '어이 없다'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언어학의 전문가인 아멜리 노통브 앞에서 '전문가' 운운하면 실례가 될테니, 그냥 기발하다로 퉁치고 싶다. 그리고 또 뭐가 있을까? 아, 사회문제가 될만한 주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의식이 간간히 담겨 있어서 '생각할 꺼리'를 만들어줘서 심심하지 않았다. 이런 문제를 저렇게 바라보니 '문제의식'을 새롭게 생각할 수 있구나 싶을 정도로 신선한 느낌을 종종 받는다. 여기까지가 아멜리 노통브 소설의 장점이랄 수 있겠다. 이건 인정하는 바다.

그런데 '문제의식'과 '비판'은 있는데 그걸 살살 비꼬는 식으로 풀어내는 모양새가 좀..'진지함'이 없어서 '가볍다'는 느낌을 받는다. 강한 펀치력으로 상대를 인사불성으로 만들고 코를 납작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옆구리를 살살 간지르는 정도의 느낌이라 기분만 상하고 만다는 점이 아쉬웠다. 물론 여성작가라는 점을 감안해서 '직접적인 비평'보다 '간접적인 방식'으로 접근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이라고 지레짐작을 하더라도 '정곡'을 콕 찌르는 느낌이 아니라 '비아냥거린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전반적으로 가벼워지고 말았다. 사회비평이란 날카롭고 묵직한 맛이 있어야 제맛인데 말이다.

그리고 이야기 전개에서 '기발한 점'은 높은 점수를 주고 싶지만, '예상밖의 전개'라는 것을 빼고는 딱히 줄게 없는 것이 아쉬웠다. 그리고 '반전'이란 것도 충분한 개연성이 바탕이 되어야 '그래 그럴 수 있어'라며 이야기에 '몰입'하고, 등장인물에 '감정이입'할 수 있을텐데, 몰입과 이입이 전혀 동반되지 않은 '기발함'만으로 얼마나 만족감을 느낄 수 있겠느냔 말이다.

마지막으로 가장 안타까운 점은 이야기의 소재가 너무 '부정적인 것'들이라 다 읽고 난 뒤에 뒷맛이 찜찜할 수밖에 없었다.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에서 주로 만나는 것들을 보라. 살인, 자살, 테러, 마약, 정신병 등등 죄다 '불법'이고, '변태적'이며, '비이성적'인 소재들밖에 없다. 심지어 '사랑'이란 주제를 내세우면서도 '정상'적인 것들이 거의 없을 정도다. 그나마 볼만한 주제가 '아름다움'인데, 그녀는 이 아름다움마저 '추악한 속내'를 포장하는 껍데기 취급을 하는 일이 잦아서 제정신인가 싶을 때가 많다. 이런 것들을 다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이 딱 하나 '섹스(성욕)'밖에 없는데, 이마저도 상식적인 선에서 아름다움을 느낄만한 '정사 씬' 하나 찾아보고 힘들다.

자, 이제 <겨울 여행>을 한마디로 표현해보련다. 사랑에 실패한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미련만 뚝뚝 남아서 자신이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비행기 테러'를 꿈꾼다. 그것도 파리의 상징인 '에펠탑'을 향해서 말이다. 정말 이게 다다. 사랑이란 '공식'이 정말 어렵고 복잡하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바다. 그러니 두 남녀가 만나서 진정으로 사랑을 나누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며, 수없이 지지고 볶는 과정을 '극복'한 뒤에야 겨우 사랑에 성공하고 마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준다면, 얼마나 진부하겠냐는 심보가 아멜리 노통브 소설들에 가득하다. 그래서 정말 신선하게도 '사랑의 실패', 그래봤자 고작 '섹스'를 못한 것 뿐이다. 그런데 속좁은 남자는 그 길로 비행기 운전을 익혀서 비행기 납치를 기획하고 그걸 실행에 옮기려 한다. 그리고 목표 대상은 그녀의 이름 '아스트로라브'의 앞글자인 'A'를 형상화한 '에펠탑'을 향해 비행기를 납치해서 돌진하려 한다. 이게 제정신으로 할 법한 일인가?

나가는 글 : 소설은 '허구'의 세계인지라 '실제로 일어나는 일'은 아니다. 하지만 수많은 독자를 가지고 있는 유명 작가의 소설은 그렇지 않다. 소설속의 내용을 '현실'에서도 반영할 수 있을 가능성이 매우 높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프랑스아즈 사강이 법적으로 금지된 마약복용으로 기소되자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는 식의 발언으로 파문을 일으키지 않았느냔 말이다. 작가의 말은 결코 가볍지 않다. 하물며 작가는 '소설'을 통해서 '할 말'을 대신하고 있지 않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작가는 자기 소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그런데도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너무 '방종한 면'이 없지 않다. 사회적으로 '금기'되고 '터부'시 되고 있는 소재로 강렬하게 쓰면서도 매우 '무책임'한 행동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래서 나는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이 재밌긴 하지만 누군가에게 권할 정도는 아니라고 본다. 특히나 학생들을 가르치는 내 관점에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은 저질로 평점을 매길 수밖에 없다.

이건 어디까지나 '선생'이란 관점에서 내린 결론이다. 그런데 선생이 아닌 '독자'로서 평점을 매기라면 뭐랄까? 뭔가 있긴 있는 것 같다. 그걸 찾기 위해서 좀 더 읽어보려 한다. 단순한 '재미' 말고 더 의미심장한 것, 그 잡히지 않는 무엇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해 찜찜함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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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한 형태
아멜리 노통브 지음, 허지은 옮김 / 문학세계사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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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한 형태> 아멜리 노통브 / 허지은 / 문학세계사 (2011) [원제 : Une Forme de Vie]

[My Review MMCC / 문학세계사 9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스물아홉 번째 리뷰는 논란의 주인공 아멜리 노통브의 <생명의 한 형태>다. 과연 아멜리 노통브는 천재 작가가 맞는가? 아니, 이것보다는 그녀의 소설에 열광하는 독자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질문을 이렇게 바꾸는 것이 더 적확한 질문이 될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그녀의 소설을 '극찬'하는 쪽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에 흥미를 끌만한 '뭔가'가 분명히 있다는 확신은 가지고 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문단에서 호평을 받고, 수많은 상을 휩쓸었으며, 출간하는 책마다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를 설명할 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녀의 소설에서 굉장한 '반감'을 느끼곤 한다. 도대체 왜 이런 소설을 쓰는 것인가? 어떻게 제대로 된 등장인물이 없을까? 정말이지 이런 괴팍한 소설을 좋아라하며 읽는 독자들은 왜 이리 많은 것인가?...이런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듯 계속 이어진다. 이 참에 국내에 출간된 아멜리 노통브의 소설을 몽땅 리뷰해볼 마음을 먹었다. 가능하면 2월 안에 다 읽고 써보려 한다. 얼추 헤아려보니 가능할 듯도 싶다. 자, <생명의 한 형태>다.

<생명의 한 형태> 관점 포인트 : 그나마 노통브의 소설에서 '인정'하는 바는 괴팍한 이야기 형태속에 나름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생명의 한 형태>에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문제의식'은 이라크 전쟁에 파병된 미군 병사의 고뇌를 엿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세상의 모든 전쟁에 반대하는 '반전 메시지'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반전 메시지'를 읽기 위해서 몸무게가 무려 180킬로그램이나 나가는 이등병을 등장시켰다는 점이다. 사람이 이 정도로 살이 찌게 되면 '일상생활'이 거의 불가능하게 된다. 그런데 전투원으로 파병을 나간 미군 병사가 180킬로그램의 몸을 하고서 '현역생활'을 할 수 있다고 보는가? 완전군장의 무게가 보통 40킬로그램이다. 거기에 소총과 실탄을 휴대하고, 수류탄이나 방독면과 같은 개인휴대물품까지 모두 착용하면 이 병사는 전체 무게가 230킬로그램이 넘게 된다.

보통 일본 스모선수의 평균 몸무게가 120킬로그램 정도 한다고 한다. 그런데 신장 184센티미터에 몸무게 180킬로그램이 넘는 선수가 등장해서 스모 경기를 휩쓸었다고 한다. 스모는 체중이 많이 나갈수록 유리한 경기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스모선수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없다. 옷도 남이 입혀줘야 하고 씻는 것도 혼자서 할 수 없다. 심지어 용변을 본 뒤에 밑을 닦는 것도 남이 대신해준다. 그나마 스모선수는 '선수단' 안에 규칙과 서열이 엄격하게 적용되어 '후배'가 선배의 모든 것을 뒤처리 해준다고 한다. 그런데 현역군인은 누가 해준단 말인가? 120킬로그램만 되어도 혼자서 처리하기 힘든 부분이 발생하는데, 180킬로그램이 넘게 되면 불가능하다. 물론 미국인이니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아멜리 노통브는 이메일도 전화기(요즘에는 스마트폰이겠지만)도 쓰지 않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유일하게 팬들과 소통하기 위해서 '편지'를 이용한다고 하는데, '답장'하지 않기로 유명한 작가라고도 한다. 그런데 이 소설은 주인공으로 아멜리 노통브가 등장하고, 그녀가 심지어 '미지의 미군 병사'와 자필 편지를 주고 받는 내용이 담긴 일종의 '서간문' 형태로 소설을 구성했다. 그럼에도 아멜리 노통브가 아주 '답장'을 하지 않는 것도 아니니 그렇다 셈치고 읽어나가면, 아주 가관이다. 실제라면 절대 '펜팔(?)'을 주고 받을 상황이 아닐텐데, 소설속 아멜리는 일면도 없는 '미군병사'와 친밀한 편지를 주고 받게 된다. 편지 말미에는 늘 '우정을 담아~', '진심을 담아~'라는 문구를 써가면서 말이다.

편지의 내용도 별개 없다. 미군 병사의 편지를 우연히 읽게 된 아멜리가 답장을 하면서 '인연'을 쌓기 시작했고, 처음엔 '오해'도 했다가 나중에는 서로의 안부를 묻고, 개인적인 비밀까지 나누며 서로의 '속마음'도 내비치는 사이로 발전하게 된다. 순전히 '작가와 독자'로서 말이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인가 싶다가 '특이점'을 발견하게 된다. 멜빈 매플이라는 병사가 가난 때문에 '입대'를 하게 되었는데, 사람이 죽고, 사람을 죽이는 '전장의 스트레스'를 견디다 못해 폭식을 일삼았고, 먹다보니 '중독'이 되어 점점 더 먹게 되었는데, 점점 불어나는 체중으로 스스로를 감당하지 못하다가 '저항의 의미'를 담아 점점 더 폭식을 하게 되면서 '반전의 마스코트(?)'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는 처지로 전락하게 된다. 그래서 입대 전 50킬로그램이었던 몸무게는 이라크 파병 이후 130킬로그램이 불어나 현재는 180킬로그램이 되었고, 앞으로 더 살이 찔 예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멜빈 매플의 현재 외모는 추악하다 못해 인간의 형상이라 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비만'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한다. 이런 말도 안 되고 역겹기까지 한 묘사속에서도 이 소설을 참고 읽을 수 있던 까닭은 다름 아니라 '반전의 메시지'로 읽을 만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몸으로 '합법'적인 저항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혼자가 아니란다. 부대원 가운데 일부가 동참을 했고, 똑같이 폭식과 비만으로 전쟁에 반대하는 메시지를 보이고 있다면서 말이다. 근데 말이다. 폭식이나 비만 같은 것으로 어떻게 '저항'을 하고, '반전'이라는 구호를 외칠 수 있다는 것일까? 이게 또 아멜리 노통브를 '천재'라고 부르는 근거로 사용되기도 한다. 아무튼 '기발'하기 때문이다. 폭식을 함으로써 '미군 내 식비'를 대폭 늘려서 미행정부를 향해 '반전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뭐 대충 그런 메시지다. 몸무게를 130킬로그램을 찌우기 위해 얼마나 먹어댔겠냔 말이다. 남들 햄버거 1개, 비스킷 몇 조각, 초콜릿 1개를 먹을 때 멜빈 매플은 그냥 쓸어담듯 먹었단다. 식판 가득 햄버거를 쌓아놓고 흡입하듯 먹어치우고, 좁은 식판에 최대한 많이 담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음식은 한데 섞여 뒤범벅이 된 상태로 먹어치웠다고 한다. 게걸스럽다는 표현을 하던데, 우리식 표현으로는 '꿀꿀이죽'이라는 훌륭한(?) 표현이 있을 것이다. 또한, 이렇게 먹는 모습이 혐오스럽다보니 동료장병들의 '사기저하'를 가속시켜서 미군사령부가 이 무의미한 전쟁에서 하루빨리 '철군'할 수 있도록...암튼, 상식적으로 말도 안 되는...'좋은 의미'란 의미는 다 빼려박아 전달하고 있다.

처음에는 아멜리도 긍정적으로 수긍했지만, 점점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지껄이고 있는 것 아닌가 싶어서 그저 마지 못해 고개를 끄덕이듯 '답장'을 보냈을 뿐이다. 그러다 멜빈 매플이 자신의 폭식과 비만의 몸이 '예술행위'가 될 수 있지 않겠냐는 아멜리의 조언(?)을 덥석 받아서 자신의 몸, 그러니까 '예술행위'를 전시할 수 있는 전문가를 소개해줄 수 있느냐는 부탁을 하기에 이른다. 아멜리는 똥 밟았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자신이 한 조언이었기 때문에 울며 겨자먹는 심정으로 멜빈 매플의 소원(?)을 들어주려 최선을 다한다. 그렇게 한 주점을 '갤러리' 삼아 예술행위를 전시할 계획을 짜고 멜빈 매플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는데, 그 뒤로 연락이 끊겼다. 아멜리가 보낸 편지에 '답장'이 오지 않았던 것이다. 과연 멜빈 매플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일까?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지는 않고 있었지만, 여전히 뉴스에서는 미군병사의 사망소식을 전달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멜리는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그 뒤의 이야기는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나가는 글 : 아쉽게도 이 소설의 결말은 기발하면서, 동시에 그녀의 다른 소설에서 이미 보여준 '패턴'이었기에 예상한 범위였었다. 뭐, 이런 '반전'을 두고서 기발하다, 천재적이다..라며 호평을 하는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내 딴에는 '작가의 무책임'을 따져 묻고 싶은 심정이다. 도대체 이따위 '열린 결말(?)'로 무슨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던 것이냐고 말이다. 애써 구색 맞춘 '반전 메시지'도 이런 식의 결말이라면 '진정성'이 사그라들지 않느냐면서 말이다. 또한 제목에서 전하는 <생명의 한 형태>라는 의미심장한 메시지도 그저 그런 평범함 속에 묻혀버리고 말지 않았느냐고 말이다.

사실 '생명의 한 형태'라는 표현은 미생물인 아메바 같은 '단세포 생물'을 일컬을 때 쓰는 용어다. 그런데 이런 표현을 '사람'한테 쓰질 않나. 심지어 초강대국인 '미국인'을 상대로 자극적인 메시지를 담은 것과 동시에 미군을 상대로 '반전'이라는 저항의 메시지를 전하는 숭고한 의미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런 '비판'을 무색하리만치 '무성의'한 결말로 끝내버리면 어쩌란 말인가? 마치 성난 군중을 몰고 중무장을 한 경찰 앞까지 행진한 '지도부'가 시위가 격해지고 일촉즉발의 심각한 사태가 닥칠 것으로 예상되자 기꺼이 동참한 시위대를 등지고 '발걸음'도 가볍게 냅다 도망친 것과 마찬가지라고 느꼈다. 다시 말해, 심한 배신감마저 들었다는 얘기다. 도대체 이런 작가의 소설을, 아니 이 소설 <생명의 한 형태>를 읽고서 극찬을 아끼지 않는 독자들의 뇌구조가 궁금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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