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포그래픽, 제인 오스틴 - 그래픽으로 읽는 제인 오스틴 인포그래픽 시리즈
소피 콜린스 지음, 박성진 옮김 / 큐리어스(Qrious)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CLXXIII / 큐리어스 3번째 리뷰] 앞서 영국인들이 사랑한 소설 2위로 <오만과 편견>이 뽑혔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작가인 '제인 오스틴'에 대한 글을 찾아보다가 이 책 <인포그래픽 : 제인 오스틴>을 발견했다. 이 시리즈는 '문화·예술 분야'의 실존 인물에 대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인포그래픽' 방식을 통해서 살펴보고 있다. 물론 실존 인물 뿐만 아니라 '셜록 홈즈'라는 소설 속 허구적 인물까지 집중 조명했더랬다. 왜냐면 셜로키언(또는 홈지언)이라는 두터운 팬층에 대한 분석을 동반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인 오스틴이라는 작가를 좋아하는 팬이 있는가 봤더니 '제이나이트(Janeite : 제인 오스틴의 열렬한 애독자)'가 존재한다고 한다.

좀 의심스럽긴 하다. 분명 제인 오스틴은 '브론테 자매(<제인 에어>, <폭풍의 언덕> 등을 각각 저술한 세 명의 자매 소설가들)'들과 어깨를 견줄 만큼 인기와 명성을 갖췄다고 하지만, 정말 '애독자 층'이 두터울 정도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소설들을 '원작'으로 삼은 영화나 TV시리즈가 꾸준히 제작되는 것을 보면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뒷북을 치고 말았다. 나조차 <비커밍 제인>(2007)을 보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을 좀 더 깊이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런데 꽤나 유명한 인사들이 '제인 오스틴의 소설'에 대해서 극찬과 비난을 동시에 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로웠다. 특히 <허클베리 핀의 모험>으로 널리 알려진 마크 트웨인은 "그녀의 무덤에서 정강이뼈를 파내서 해골을 패주고 싶다"고 말할 정도로 <오만과 편견>에 대해 혹평을 남기기도 했다. 그녀의 소설이 밋밋한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삼았고, 세속적인 결혼에 목을 메는 청춘남녀의 이야기를 주로 썼기 때문에 '사회문제'를 직시하려 했던 마크 트웨인의 작품관과 서로 맞지 않았겠다는 생각도 짐작할 수 있었고, 일부는 공감되는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확실히 '오스틴의 소설'에서 사회비판 같은 것은 다루지 않았으니까 말이다.

그렇지만 <오만과 편견>에서도 '비판적인 대목'은 엿볼 수 있다. 19세기 여성이 '경제적 독립'을 주체적으로 하지 못하는 바람에 '돈 많은 남자'에게 목을 매는 현상이 팽배하다보니 오스틴은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사랑' 없는 결혼에 대해서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녀의 소설속 여주인공들은 하나 같이 '돈 많은 남성'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포기하지도 않았다. 다시 말해, 사랑보다 돈을 앞세운 결혼에 반대한다는 '비판적인 목소리'가 절제되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한계도 엿볼 수 있다. 오스틴의 '필력'이 사회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릴 정도로 '파급력'이 강하지 못했고, 꽤나 완곡하게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하지만 '여성작가'가 드물었던 19세기 사회에서 그만큼이나마 '제 목소리'를 내고자 했던 작가가 몇이나 있었느냔 말이다. 남성작가들 가운데서도 사회 문제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낸 작가는 손을 꼽을 정도인 것은 마찬가지다. 그러니 마크 트웨인의 비난에 가까운 혹평은 너무 심한 것으로 보인다.

그에 반해 긍정적인 목소리도 많았다. 특히 "젊은 여성이 일상 생활에서 겪는 갖가지 곡절과 감정, 그리고 성격에 대한 묘사는 정말 탁월하다"는 월터 스콧 경의 칭찬은 공감되었다. 이는 남성작가들이 할 수 없는 영역이었던 것이다. 그저 순종적이고 가정적인 여성만을 '이상적으로' 그려내는 남성작가들로는 '여성 독자가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를 창조할 수 없었는데, 그걸 제인 오스틴이 자신의 소설에서 해냈다는 칭송이었다. 그런 까닭에 당대 소설가 가운데 태양처럼 밝게 빛나는 소설가는 단연 '셰익스피어'를 꼽겠지만, 제인 오스틴은 '소행성'에 빗댈 수 있겠다는 알프레드 테니슨의 칭찬도 눈에 띄었다.

그렇지만 오스틴의 모든 소설이 이렇게 칭찬 일색인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이야기 전개가 밋밋하다 못해 '멀건 죽'과 같다는 비난도 있었고, 영국 여성들이 겪을 법한 세속적이고 천박한 인습에 사로잡혀 그 어떤 지성이나 위트조차 찾아볼 수 없으니, 차라리 '자살'을 소재로 쓴 것들이 더 품위가 있어 보일 지경이라며, 그녀의 소설들이 지루하기 짝이 없다는 비난도 있었다. 그나마 마크 트웨인보다는 좀 더 품위 있는 비평 같았다.

솔직히 그녀의 소설 가운데 <오만과 편견>만 읽은 터라 이런 평론들에 대해서 뭐라 덧붙일 말은 없었다. <이성과 감성>, <엠마> 등등을 읽어본 뒤에 이와 같은 평론들에 대한 옳고 그름을 생각해 보아야겠다. 행여 '여성작가'라는 이유만으로 부당한 평가를 받은 것은 아닌지도 함께 알아 보아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만과 편견 세계문학의 숲 16
제인 오스틴 지음, 고정아 옮김 / 시공사 / 2012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LXXI / 시공사 17번째 리뷰] 영국인들이 가장 사랑하는 작가는 단연 '셰익스피어'일테지만, 2위로 꼽은 작가가 '제인 오스틴'이라는 사실은 의외로 여겨질 법도 하다. 오늘날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만과 편견>은 '오만한 남자와 편견 가득한 여자'가 사랑을 하고 결혼에 골인한다는 지극히 단순하고 뻔한 줄거리를 보여줄 뿐이기 때문이다. 너무 뻔해서 진부하기 짝이 없는 이 책의 어디가 영국인들의 많은 사랑을 받게 된 이유인지 파헤쳐보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

18세기 영국사회는 여성의 상속권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들 없이 딸만 넷을 둔 '베넷 가문의 상속권'은 엉뚱하게도 다른 남성인 사촌 콜린스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었다. 그렇기에 베넷 씨의 네 딸 가운데 한 명이 '사촌 콜린스'와 결혼을 한다면 아버지(베넷)의 재산을 지킬 수 있게 되고, 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도 콜린스의 아내로서 정당하게 '재산권'을 보호하고, 다른 세 딸과 어머니의 생활을 궁핍하게 만들지 않을 수 있었다. 이는 영국 이외의 다른 이웃나라에서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기에 이 책 <오만과 편견>에서 등장하는 영국사회의 여성들은 '결혼'이 유일한 생계수단인 셈이다. 그래서 오늘날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어린 나이(십대)에 이미 결혼 적령기를 맞이하고, 이십대 초반이라도 '노처녀' 취급을 당하는 <오만과 편견>의 줄거리가 상당히 불편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날과 달리 '여성의 경제활동'이 변변찮던 18세기 영국에서는 여성이 무도회장에 나가 남성과 함께 춤을 추는 것이 거의 유일한 '경제활동'이었다고 봐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 책 <오만과 편견>의 깊은 주제를 우리는 인지하지 못하고, 그저 결혼에 목메는 여성들의 '로맨스(칙릿)소설'로 오해하게 될 것이다.

그럼 <오만과 편견>의 진짜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여성의 관점'에서 바라본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다. 당시 결혼은 오직 남성에게만 자유로운 '선택권'이 주어졌고, 여성은 남성의 프로포즈를 받고 난 뒤에야 비로소 '수락/거절'이란 단 한 번의 찬스(기회)만 주어졌을 뿐이다. 이때 여성이 꼽은 이상적인 남성은 '부와 지위'를 얼마나 소유했느냐 뿐이었다. 왜냐면 여성의 사회적 활동이 철저히 억제되어 있기 때문에 여성이 잘 먹고 잘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돈 많은 남성'과 결혼하는 것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여성도 가정교사를 하거나, 삯바느질을 하는 등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없지는 않았지만, 그 액수가 여성이 '홀로서기'하기에는 너무도 적었던 탓에 여성이 '사치'라도 부릴라치면 '아버지의 도움', '남편의 도움', 그리고 '아들의 도움'이 없으면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거기다 애초에 '상속'이 불가하니 여성은 부모가 살아있을 때 넘겨준 재산으로만 넉넉한 부를 쌓을 수 있었고, 그나마 여성의 부는 미혼 뿐만 아니라 기혼 남성의 '먹잇감'으로 노려지기 마련이라 아버지나 전 남편이 넘겨준 '돈 많은 과부'는 당시 남성들의 신붓감 1순위였다.

이런 사회분위기에서 여성은 사회활동의 '주체'로 당당해질 수 없었다. 경제적 자립이 힘들었던 여성들은 오직 남성들의 부에 따라 팔자(?)가 바뀌는 '뒤웅박 인생'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교모임에서 여성들은 어떻게 해서든지 남성들의 눈길을 사로잡아야만 했고, 남성들의 취향에 따라 '본성'을 감추고 살아야만 했다. 이런 사회분위기를 타파하고자 제인 오스틴은 <오만과 편견>에서 당당한 여성인 '엘리자베스'를 등장시켰던 것이다. 물론 엘리자베스도 어쩔 수 없이 18세기를 살아가는 여성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만, 단 한가지 '남성의 선택'에 몸둘 바를 두지 못하는 평범한 여성이 아닌 당당히 '스스로의 선택'을 강하게 어필하며 남성들로 하여금 '당당한 여성의 아름다움'에 반하게 만드는 모습을 펼쳐 보였다. 그렇기에 우리는 <오만과 편견>을 통해서 능동적이고 진취적인 여성의 당찬 모습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에는 너무도 당연한 가치라서 그리 놀라울 것도 없지만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자유롭지 못했던 7~80년대 대한민국 여성들이 어릴 적에 가장 많이 읽은 소설이 <오만과 편견>이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가치가 담겨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오만과 편견>을 단순한 '로맨스소설'로 읽으면 아쉽다. 베넷 가문의 딸들, 제인, 엘리자베스, 막내 리디아, 그리고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샬럿까지 이들이 남자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 살펴보면서 가장 이상적인 커플이 누구인지도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먼저 제인과 빙리는 가장 평범한 커플이다. 돈 많고 착한 남편과 가정적이고 순종적인 착한 아내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커플은 굉장히 안정적이다. 하지만 이런 '교과서적인 커플'은 실제로 맺어지기 굉장히 힘든 타입이기도 하다. 선남선녀에 착한 남녀는 서로에게 연애조차 '소극적'인 까닭에 주변의 격렬한(?) 도움이 없으면 만남조차 힘든 커플이기 때문이다. 물론 서로 만나기만 한다면 더할나위 없는 커플이긴 한데 말이다. 그래서 착한 남자는 불같은 여자에게 휘둘리다 홀랑 벗겨 먹히기 딱 좋고, 착한 여자는 바람둥이 남자에게 상처만 받고 청순을 가장한 청승만 떨다가 좋은 시절을 망쳐버리고 마는 안타까운 사연도 꽤나 많다.

반면에 리디아와 위컴은 '사랑의 도피'까지 불사하는 불같은 사랑을 한다. 물론 사랑이 뜨겁다고해서 늘 바람직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 함정이지만 말이다. 더구나 리디아는 철부지에 위컴은 방탕한 생활을 일삼는 사기꾼이다. 이런 사기꾼과 철부지 커플은 서로 죽이 잘 맞으면 '부부 사기단'으로 꿍짝을 벌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철저하게 '이기적인 패턴'을 보여주며 주위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이 가장 큰 특징이다. 그런데도 둘의 사랑은 서로 불타올라 서로가 서로를 '이용(?)'해 먹으면서 상처를 받기도 하지만, 당장 발등에 떨어진 불이 해결되면 다시 달라붙어 뜨거운 사랑을 나누는 '분노유발 커플'이다. 될 수 있으면 멀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다음은 엘리자베스의 절친이었던 샬럿과 콜린스 커플이다. 애초에 콜린스는 엘리자베스에게 청혼을 했지만 거절 당했고, 이후로 키티와 리디아까지 찝쩍거리다가 경제적으로 궁핍해서 생활고에 시달리는 엘리자베스의 친구인 샬럿과 결혼을 하고 만다. 이를 두고 엘리자베스는 친구인 샬럿을 안쓰럽게 여기지만, 주위의 평판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엘리자베스가 넝쿨째 굴러들어온 행운을 어리석게도 뻥 차버렸다면서 위로를 해줄 정도였다. 왜 그랬을까? 비록 콜린스가 못 생기고 무례하며, 무엇보다도 여성을 '상식 이하'로 낮게 폄하하면서 오직 '순종적인 아내'로만 있기를 바라는 덜 떨어진 구시대적 남편인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런 못난 남성인데도 콜린스는 '가진 재산'이 많았다. 더구나 직업은 '목사'이고 베넷 씨가 죽고 나면 엘리자베스의 집과 재산마저 모두 콜린스에게 넘어가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여러 모로 콜린스와 엘리자베스가 결혼을 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었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엘리자베스는 무례한 콜린스의 청혼을 거절했고, 그 틈을 타서 친구인 샬럿은 콜린스의 아내 자리(?)를 낚아챘던 것이다. 비록 돈에 팔려가듯 성급하게 결정한 결혼이었지만 주위에서는 오히려 샬럿의 결혼을 부러워한다.

그렇다면 샬럿의 결혼이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었을까? 작가인 제인 오스틴은 결코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그도 그럴 것이 '콜린스의 재산'보다 훨씬 더 많고, 젊은 나이에 잘 생겼으며 사회적 지위에 걸맞는 품위까지 갖춘 다씨라는 남성과 엘리자베스가 결혼에 성공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엘리자베스가 다씨의 마음을 사로잡게 된 까닭이 자신의 의견을 똑부러지게 말하다 못해 '편견' 가득한 고집불통이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영국사회에 어디 엘리자베스 같은 여성이 결혼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더구나 남자의 청혼을 제 맘에 들지 않는다고 '거절'까지 했는데 말이다. 이런 여성은 평생 혼자 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실제로 제인 오스틴도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실제 성격이 엘리자베스와 같았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엘리자베스와 다씨의 커플을 가장 이상적인 결혼으로 본을 삼았다. 무릇 멋진 남성은 멋진 여성을 알아보는 법이라듯이 말이다. 그래서 '다 갖춘' 다씨는 '완벽한' 엘리자베스에게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매력에 푹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는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를 짰다.

자, 이렇게 <오만과 편견>을 마무리하면 좋을까? 아니다. 오늘날에는 '결혼의 의미'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물론 여전히 결혼을 하기까지 '두 사람 사이의 사랑'도 중요하고, '집안끼리의 화목'도 중요하지만, 요즘 '비혼'이 너무 확산된 까닭이 바로 젊은 세대의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사회 문제가 만연했기 때문이다. 18세기 영국사회에는 여성이 스스로 '경제독립'을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남성들에게 매달리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21세기 대한민국 사회는 젊은 세대가 스스로 '경제독립'을 할 수 없기에 결혼 자체를 포기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는 자연스레 '저출생 문제'와 '인구 감소 문제'로 이어져 우리 사회의 미래를 어둡게 만들고 있다. 오히려 <오만과 편견>에서 말하고 있는 '여성 인권'을 올리는 문제는 어느 정도 해소되었는데, '경제 문제'가 도리어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이래서야 '결혼이야기'로 처음부터 끝까지 장식한 이 책을 읽을 '가치'를 좀처럼 찾기 힘들어진다. 다시 말해, 이 책 <오만과 편견>에서는 결혼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인 '경제적인 것들'을 남성들이 알아서 해결하고 있다는 점을 문제 삼지 않으면, 요즘 독자들에게 공감대를 형성하기 힘들 것이다.

오늘날의 '결혼'은 돈 문제는 남자가 해결하고 여성은 '예쁜 미모와 착한 마음씨'만 갖추면 모든 것이 충족되고 해결되는 사안이 결코 아니다. 오히려 경제적인 문제에 있어서 남자와 여자, 양쪽 모두가 여유 있게 돈을 버는 상황이 아니면 애초에 결혼을 할 수조차 없다는 것이 비극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 <오만과 편견>을 '오만한 남자'와 '편견(선입견) 가득한 여자' 사이에서 벌어지는 러브 스토리로만 읽을 것이 아니라, 선남선녀가 결혼을 전제로 한 '경제적인 고민'을 이야기하는 계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랑하는 사이에 '경제적 고민'이 생겼을 때, 어느 한 쪽에서 일방적으로 부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 또한 그런 일방적인 부담을 '사랑의 척도'로 가늠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지 않았으면 좋겠다. 값비싼 선물을 주어야만 뜨거워지는 사랑이라면, 그것이 진짜 '사랑'인지 고민해봄직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병든 민주주의, 미국은 왜 위태로운가 - 미국의 기원, 발전, 그리고 위기까지, 지도+인포그래픽과 함께 읽는 미국 민주주의의 모든 것
토마 스네가로프.로맹 위레 지음, 권지현 옮김, 델핀 파팽.플로리안 피카르 지도 / 서해문집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LX / 서해문집 13번째 리뷰] 미국인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건 두 가지를 꼽으라면 '9·11사태(2001)'와 '미 의사당 점령(2021)'을 꼽겠다. 물론 에이브러햄 링컨과 존 F. 케네디 등의 '대통령 암살'을 비롯해서 엄청난 사상자를 낸 내전 '남북전쟁'과 두 차례의 '세계대전', 그리고 '경제대공황', '워터게이트 사건', 마틴 루터 킹을 비롯한 흑인인권운동가와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며 벌였던 수많은 시위와 폭동 등등 수없이 꼽을 만한 것들이 넘쳐나겠지만, 다른 사건들은 미국의 기조가 흔들리지 않았음에도,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사건은 미국을 완전히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바로 '민주주의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실종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미국은 독립을 선포하면서 국왕이 다스리는 왕정을 포기하고 '공화정'을 선택했다. 그리고 유럽의 다른 왕조국가들과는 달리 '민주주의'를 선택해서 국민이 직접 국민을 위한 국가를 만들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미국은 자신들이 구축한 '민주주의'에 대해서 굉장한 자부심을 느끼고, 이를 전세계로 확산시켜 나가는 것을 자랑거리로 삼을 정도였다. 이런 기조는 미국이 '농업국가'에서 탈피해서 '산업국가'로 발돋움하고 나아가 '제국주의'로 세력팽창을 해나갈 때에도 여전했다. 그리고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의 지위를 갖춘 뒤에는 자신들이 만든 '민주주의'를 다른 나라에도 뿌리내릴 수 있도록 전쟁도 불사하는 모습을 보여줄 정도였다.

그런데 미국의 민주주의가 정말 완벽하게 작동하는지에 대한 의구심이 든다. 먼저 미국만의 독특한 '선거제도'를 꼽을 수 있는데, '선거인단'을 구성해서 각 주마다 표를 더 많이 차지한 정당이 그 주의 선거인단을 싹쓸이하는 '승자독식' 방식을 지금까지도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전체 득표수에서 승리한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가 선거인단 수에서 뒤쳐지는 바람에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다시 말해, 미국 국민의 다수가 힐러리를 지지했는데도, '선거인단'을 많이 확보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이다. 이것이 과연 '민주적인 방법'이냐는 비아냥이 나오는 대목이다.

또 하나는 트럼프 대통령이 '연임'에 도전했다가 '조 바이든' 민주당 후보에게 정권을 이양해야 하는 일이 벌어졌을 때 트럼프는 미국의 전통이었던 '패배 선언'을 하지 않았다. 앞서 더 많은 미국 국민의 선택을 받은 힐러리도 군소리 없이 '패배 선언'을 함으로써 평화로운 정권 이양이라는 미국 정치의 안정과 국론 통합을 위한 대의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과는 완전 다른 모습을 보여준 것이다. 더 나아가 트럼프는 자신이 대통령에 당선되지 못한 것은 '정치 공작' 때문이라며 바이든 대통령이 취임을 하려던 미 의사당을 점령하라고 자신의 지지자를 부추기는 발언까지 서슴지 않았다. 과거의 역대 대통령들은 감히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될 일을 트럼프는 저질렀던 것이다. 그런데도 트럼프는 또 다시 대통령에 당선되고 말았다. 그것도 압도적인 표차이로 말이다. 아무리 바이든 대통령과 민주당이 '헛발질'을 하는 듯한 엉망진창의 정책을 했더라도 미국 대통령의 자격(?)이 없는 것으로 평가받는 망나니가 또다시 대통령에 당선되다니, 미국 국민들은 왜 이런 선택을 하게 되었느냔 말이다.

'워터게이트 사건'만 보아도 미국의 정치는 깨끗하다고 보였다. 닉슨 대통령은 정치적 능력이 높다는 평가까지 받았지만, 그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서 벌인 '도청사건'과 '거짓말'을 한 것으로 미 국민들은 닉슨에 대한 신뢰를 거둬들였고, 닉슨 대통령은 자리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트럼프는 거짓말 뿐만 아니라 연이은 스캔들에 법정 소송까지 받을 정도로 심각한 범죄를 저지른 상태였다. 그 범죄가 다름 아닌 '미 의사당 점거 사태'이지 않느냔 말이다. 이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고 있지 않다는 명백한 시그널이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미국은 어떻게 될 것인가? 다른 나라도 아닌 '초강대국' 미국의 민주주의가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는 셈이다. 정말 이대로 괜찮은 걸까? 무엇보다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민주주의의 전통을 전혀 존중하고 있지 않다. 평화적인 정권 이양을 무시하고 '패배 선언'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술 더 떠서 대통령에 당선된 후보자를 축하해주기는커녕 자신들의 열성지지자를 선동해서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했다. 이런 대통령이 '미국의 헌법'은 제대로 지키려고 할까? 혹시 2번의 임기로도 부족해서 '3선, 4선'에 도전하지는 않을까? 하긴 트럼프와 푸틴, 그리고 김정은은 정말 친해보이기까지 하다. 실제로 자신의 입으로 '그들'과 친하다는 말도 했고 말이다.

무엇보다 미국 국민들의 '선택'이 결국 트럼프였다는 말이다. 민주주의의 근간을 흔들고, 헌법조차 무색하게 만들지 모를 위태로운 사람을 대통령으로 선택한 국민이었다. 정말로 '민주주의 시민'이 고른 자신들의 대통령이 맞느냔 말이다. 지금 미국은 혼돈의 도가니 속에 빠진듯이 보인다. 아무리 선거전이 치열하게 공방을 거듭했더라도 '대선의 결과'가 나오면 오직 미국을 위해 '한 목소리'로 대통령을 지지하고 국론을 통일시켜 왔던 미국의 민주주의 였는데, 트럼프가 재선에 성공한 지금의 미국은 한 목소리가 아닌 '두 목소리'를 내며 정적을 죽이기 위한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트럼프가 늘상 외치던 '미국 우선주의(아메리카 퍼스트)'가 이번에도 잘 통할지 의문이다. 그러기 위해선 미국의 그동안 추구해왔던 '세계화 물결'부터 거둬들이고 '자국 이기주의 우선'을 내세워 '강 대 강'의 대결만 부추길텐데 말이다. 더구나 지금의 미국은 '초강대국의 지위'에서 물러나야 할 정도로 빈약한 모습을 보이고 있을 정도다. 과연 어느 나라가 미국의 말에 귀를 기울이더냐는 말인가? 그런데도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운다면, 미국의 말을 안 듣는 나라들에겐 어떠한 행보를 보여줄텐가? 협박? 전쟁?

그런 전쟁에 나서는 미국민들이 자랑스럽고 떳떳한 전쟁이라고 하겠는가? 부당하게 치룬 '베트남 전쟁'이후 미국은 '모병제'로 기존 체제를 완전히 바꿀 수밖에 없었다. 미국민들의 자발적인 참전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트럼프가 벌인 정책들에는 미국민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또한 그 반응은 정책에 적절하고 공정한 방식으로 반영이 되기는 할까? 만약 트럼프의 독단적인 결정으로 정책이 진행된다면 미국에도 '또 다른 형태의 독재자'가 탄생하게 되는 셈이 될 것이다. 우려스럽지 않은가? 그래서 수많은 미국민들이 혼돈에 빠진 것이다. 전혀 예측이 불가능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것이 말이다. 그리고 그의 예측불가함은 미국의 민주주의를 뿌리부터 병들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5 AI 대전환: 주도권을 선점하라 - 국가대표 AI 전문가 2인이 제안하는 AI 주도권 확보 전략
오순영.하정우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L / 한빛비즈 157번째 리뷰] 인공지능 AI를 둘러싼 IT강국들의 '선점 경쟁'이 점점 거세지고 있단다. 향후 AI 기술을 기반으로 한 '기술강국'이 세계경제를 비롯해서 모든 기반시설들을 싹쓸이하고, 이런 기술을 갖추지 못한 AI 후진국들은 강국들에게 비싼 로열티를 지불하고도 후발주자로 내몰려 강국들에게 휘둘리고 말 것이라면서 무슨 일이 있더라도 'AI 선진국 대열'에 나란히 서야만 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고 있다. 이제 본격적인 AI 기술이 펼쳐지는 시대가 되면 새로운 '지정학적 패권' 열리게 될 것이라면서, 지금이야말로 대한민국이 미국과 중국에 이어 대한민국이 세계적인 강국이 되어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최적기라면서 '주도권 경쟁'에서 결코 물러서서는 안 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챗GPT 출시 이후 '생성형 AI'와 관련된 콘텐츠가 홍수처럼 쏟아져 나왔는데도, 이를 뒷받침할 만한 '산업계의 호응'이 적극적이지 않은 것이 의문일 정도란다. 그러나 '산업계(기업들)'도 나름의 고충은 있다. 바로 AI 기술을 바탕으로 내놓을 신제품이 마땅하지 않다는 것이다. 분명 AI 기술은 한두 달이 지나면 새로운 것이 나올 정도로 발빠르게 변화하고 놀라운 기술들이 매번 쏟아져나오고 있지만, 이런 기술들이 '스마트폰'처럼 대중들이 '꼭 갖고 싶은(must have)' 제품을 내놓기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란다. 바로 성능 대비 가격이 너무 비싼 기술이라는 점 때문에 '제품화'하기도 쉽지 않고, 막상 제품으로 내놓아도 '너무 비싸서' 살 수 있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물론 값비싸다고해도 꼭 필요하다면 누구나 사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점을 감안해도 'AI 기술'을 적용시켜서 내놓은 제품들이 그닥 쓸모가 없다는 것이 현재의 문제점이다. 이를 테면, 'AI 개인비서' 같은 것인데 아직까지는 '있으면 편리'하겠지만, 신기한 점이 없지는 않지만 성능이 그닥 뛰어나지도 않은데 값비싼 비용을 주고서 'AI 개인비서'를 두려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것이 현실인 셈이다.

그렇다면 AI 기술은 과거 '닷컴 버블'처럼 거품이 많이 낀 시장인 것일까? 과거에도 '인터넷 열풍'이 불면서 무슨 회사일지라도 '닷컴'이라는 이름만 붙이면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닷컴'을 이용해서 내놓을 만한 제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자 거품이 일제히 꺼지면서 '주가대폭락 사태'를 일으키며 경제적 문제만 일으켰던 선례가 있었다. 허나 AI 기술은 다르다고 말한다. 실제로 가까운 미래에는 'AI 기술'이 탑재되지 않은 제품이 없을 거라는 전망까지 제시하며 실제로 제품을 생산하고 시연까지 하고 있기 때문에 AI 기술에는 거품이 없을 거라고도 한다. 그런데도 막상 이를 지켜본 대중들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다. 분명 놀랍고 신기한 것에는 틀림없지만 '굳이, 저걸 비싼 값을 치루고 사야 돼?'라는 분위기만 연출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의 AI 기술은 '제자리걸음'을 걷고 있을 정도로 발전이 정체되고, 투자도 소극적이라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보다 '후발주자'였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본격적인 개발과 투자를 하며 우리보다 앞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이대로 계속 답보상태에 빠져 뒤쳐지게 된다면 한국은 'AI 주도권'을 잃어버리고 멀지 않은 미래의 '강국의 지위'를 내주고 값비싼 대가를 치뤄야 하는 처지로 전락할 수도 있다고 한다. 이건 굉장한 위기를 우리 스스로 초래하는 셈이다.

허나 AI 기술개발이 호락호락한 상황도 아니다. 기술개발은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신기술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데도 이를 실제 적용시키는 단계에서 크고 작은 문제들이 터져나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바로 '할루시네이션(AI의 거짓말)'이다. 우리가 '인공지능의 도입'을 할 때 가장 기대하는 것이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정확할 것'인데, 정작 그런 기대를 무색하게 만들 수도 있는 'AI의 거짓말'이란 오류가 등장했으니 여간 곤란해진게 아니다. 그런데 AI전문가들은 할루시네이션이 '오류'가 아닌 AI의 현명함이 증명된 것이라는 대답을 늘어놓고 있으니 현장의 혼란만 가중된 격이다. 과연 할루시네이션은 '오류'일까? '정상'일까?

사실 인공지능 AI가 대단해진 것은 '챗GPT의 등장' 이후였다. 그 이전에도 인간을 상대로 체스게임에서 승리를 거두고, 바둑게임에서 인공지능이 승리를 거두면서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춘 '인공지능의 시대'가 금방이라도 펼쳐질 것으로 짐작했으나, 결과는 잠잠했다. 왜냐면 그당시 인공지능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저 '체스'와 '바둑'뿐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인공지능이 탑재된 '가정부 로봇'을 집집마다 배치하고 써먹으려면 엄청난 '빅데이터'를 갖추고 '딥러닝'을 할 수 있는 빌딩만한 컴퓨터 공간이 필요했으며, 그런 대량의 컴퓨터를 감당할 수 있는 '전력'을 댈 수 있는 경제력을 갖춰야 하며, 이 모든 것을 해결가능하다고 해도 간단한 요리를 위해서 달걀을 깰 수 있는 로봇손을 개발하는데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럴 바에야 '인간 가정부'를 고용하는 것이 더 가성비가 높지 않겠느냔 말이다. 그냥 직접 요리 해먹거나 말이다.

그런데 '챗GPT'가 등장하면서 인공지능은 매우 똑똑해진 것처럼 보였다. 간단한 명령어만 입력했는데, 수십 년을 연구한 박사만큼 '장편의 논문'을 써내고, 수 년간 디자인을 공부한 사람만큼 '예쁜 그림'을 뚝딱 그려내며, 인간과 대화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구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더 'AI 기술'에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로 인한 기술개발은 발빠르게 성장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제 '챗GPT'를 비롯해서 다채로운 AI가 등장하며 본격적인 AI 기술이 선보이는 줄 알았는데, 우리가 기대했던 '공정하고 객관적이며 정확한 AI'는 거짓말(할루시네이션)을 늘어놓았다. 영화 <아이언맨>에 등장하는 '자비스'가 토니 스타크에게 거짓된 정보를 늘어놓는 상상을 하게 만든 것이다. 이런 상황이라면 누가 'AI 기술'에 투자를 할 것이고 산업계가 제품생산을 대량으로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아무도 사지 않을텐데. 하지만 전문가들은 할루시네이션이 '오류'가 아닌 "딥러닝 모델의 데이터 생성이 확률적이기 때문이고, 방대한 데이터를 응축해서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AI의 언어 모델 학습이 '사실'을 보장할 필요가 없는 방식을 택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타나는 증상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그리고 할루시네이션을 줄일 수 있는 기술인 'RAG'로 할루시네이션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고 말한다.

사실 소설처럼 '있을 법한 허구'를 다루는 일을 할 때 할루시네이션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정확성'을 요구하는 의료장비나 판결문구 등을 다루는 일에서 '거짓정보'를 자연스럽게 늘어놓는 AI를 장착할 수 있을까? 스포츠 경기 심판을 맡은 AI가 '억울한 판정'을 받았다며 항의하는 선수에게 '거짓정보'를 늘어놓으며 자신의 심판을 받아들이라고 한다면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그렇다고 AI를 소설창작과 같은 '예술적인 용도'로만 한정해서 사용할 것이라면 애초에 이런 열풍이 일어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AI 기술을 선점하려는 각국의 경쟁은 멈출 줄 모르고 있다. 모든 기술개발 과정에는 문제가 있었고, 그 문제를 극복해나가는 몫도 반드시 치뤄야 할 대가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전문가들의 조언처럼 '할루시네이션'도 향후에는 그리 큰 문제가 없을 정도로 개선될 가능성이 더 큰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시간'과 '비용' 문제다. 이런 크고 작은 문제점을 해결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얼마인지 누구도 알 수 없고, 문제해결 비용이 얼마나 드는지도 누구도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든 기술개발은 늘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렇다면 '주도권'을 빼앗길 수는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은 AI 선진국이었다. 현재도 그렇다. 그런데 앞으로가 걱정이다. 프랑스, 일본 같은 나라들이 우리보다 앞서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으며, 심지어 베트남, 인도네시아 등도 우리 뒤를 바짝 뒤쫓고 있단다. 그렇다면 우리의 'AI 기술개발의 현주소'는 어떨까? AI 관련 인재들의 국외 유출이 심각하고, 국내 산업계의 외면으로 인해 기술경쟁에서 뒤처지고 있는 상황이란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불온한 것들의 미학 - 포르노그래피에서 공포 영화까지, 예술 바깥에서의 도발적 사유 서가명강 시리즈 13
이해완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My Review MDCCCXLIX / 21세기북스 29번째 리뷰] 미학(美學)은 미와 예술을 철학적으로 탐구하는 학문이라지만, 우리가 일상적으로 머리속에 떠올리는 '아름다움(beauty)'과는 달리 '미적인 것(the Aesthetics)'에 대한 차원이 다른 영역을 주로 탐구한다고 한다. 허나 비전공자인 나로서는 이게 뭔소린가 싶다. 아름다운 게 '미적'인 것이고, 미적인 것이 '아름다움' 아닌 가 말이다. 그래서 조금 비틀어서 접근해보기로 했다. 이 책의 제목에서 '미학'의 앞에 놓인 낱말부터 접근해보았다. '불온하다'의 반대말로 '건전하다'라는 낱말을 슬며시 놓아본 것이다. 애초에 '불온하다'의 반대말은 '온당하다'이겠지만, '온당하다'의 반대말은 '부당하다'는 낱말이 있으니 적절치 못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온한 사상'이라는 말이 쓰이니, 이에 반대되는 '건전한 사상'이 적당할 것 같아 두 낱말을 나란히 놓아본 것이다. 그랬더니 뭔가 보이기 시작한다.

'건전한 것들'은 우리의 마음을 평안하게 만든다. 해악을 끼칠 것이 없고 온통 '선한 영향력'만 전파할테니 누가 마다하겠는가 말이다. 근데 한편으로 곱씹어보면 '건전한 세상살이'만큼 지루하고 재미없는 것도 없을 것이다. 한마디로 심심할 것이란 말이다. 날이면 날마다 그저그런 하루를 보낼 것을 생각하면, 날마다 '똑같은 일상'만 반복되는, 그런 삶을 떠올리면 말이다. 그런데 '불온한 것들'은 우리의 일상을 짜릿하게 해준다. 분명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자꾸 해보고 싶고, 하면 '즐거울 것' 같아서, 또는 '은밀하게'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누구에게 알려져서도 안 될 일을 몰래 해보는 그런 재미가 있을 것 같지 않은가 말이다. 물론 그런 '불온한 나날들'을 보내면 필히 후회하게 될 것이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불온한 것들의 미학>이라는 것도 그런 짜릿하고 전율이 느껴지는 철학이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일상적인 것'이 되어선 곤란하겠지만, '철학의 범주' 안에서 우리가 한 번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라는 빈틈을 한 번 파고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주제는 모두 4가지다. '위작', '포르노그라피', '나쁜 농담', 그리고 '공포물'이다. 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상당히 '불온한 것들'임에 틀림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에서 철학적으로 논해볼 '미적인 것'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먼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문제'였다. 학문적 연구에서는 종종 '객관성'을 따지며 일상에서 나타날 도덕적 문제(모럴해저드)조차 너그럽게 대하는 경우가 있는데, 일반 독자에 불과한 나에겐 '부도덕적인 것들'에 관용과 허용을 논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기에 아무리 '미적 탐구'를 위한다고 하더라도 부도덕적인 내용에 대해선 용서하지 않는다는 '기준'을 명시하고 싶다. 책의 내용에서도 '도덕적 잣대'를 허술하게 들이대는 경향이 보였는데, 그런 경향에 대해 일체 '무관심'으로 대했다는 점도 상기해주길 바란다.

암튼, '위작'부터 살펴보자. 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우리는 '진품'과 '복제품'의 차이를 명확히 구분하기 힘든 시대를 살고 있다. 그렇다면 '위작 논쟁'은 의미가 무색해지는 것 아니겠냐는 질문을 던지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진품'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이 재현하는 화가의 재능'을 높이 사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느냐는 반문을 던지고 있다. 그렇지만 여기에 대한 일반대중들의 대답은 '아니오'일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한 이유를 되물으면 어떨까? 아마도 마땅한 대답을 말하기 힘들 것이다. '진품'과 그것과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완벽히 재현한 '복제품'을 그려낸 재주 또한 '뛰어난 재주'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제품'을 인간이 아닌 '인공지능 로봇'이 그려낸 것이라면 하등 가치가 없다고 폄훼할 것이 분명하다. 아직까지 '예술의 가치'는 오직 인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 빈치의 '모나리자'를 오늘날의 화가가 진품과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똑같이 재현해내는 재주를 가졌다는 것을 우리는 '뛰어난 재주'로 인정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왜 '위작 논쟁'은 끊임없이 나타나는 걸까? 이중섭, 박수근, 천경자 등 뛰어난 화가들의 작품을 모방해서 '진품과 위작을 가리는 시비'가 매번 곤혹스럽게 문제시되고 있는 것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 것일까? 물론 이런 논쟁의 귀결은 언제나 '작품의 가격'이 되곤 한다. 만약 '진품'이라면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위작'으로 판명이 되면 가짜를 만들어낸 화가가 오명을 뒤집어 쓰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소장하고 있는 사람은 시쳇말로 '똥값'으로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 '위작 논쟁'을 벌이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그런 한편으로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다 빈치의 '모나리자'는 정당한 이유(?)로 진품이 아닌 복제품이 전시되고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도, 여전히 방문객의 발길을 끌어모으고 있는 것은 왜일까? 만약 자신이 '직접' 본 '모나리자'가 진품이 아닐 수도 있는데 말이다. 이 소문의 진위를 알 수는 없지만, 그 까닭만큼은 쉬이 이해가 될 법하다. 바로 '진품'이 훼손될 수도 있다는 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나리자' 복제품이 전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진품과 큰 차이가 없는 '모나리자'를 관람하면서도 아무도 '위작'을 거론하지 않고 있다. 도대체 무슨 차이인걸까? 왜 '위작'은 진품에 비해서 가치가 떨어진다고 이야기하는 걸까?

다음은 '포르노그라피'다. 바로 '예술 vs 외설'이라는 논쟁을 떠올릴 수 있다. 왜 명화속의 벌거벗은 나체는 '예술'이고, 영화속의 벌거벗은 몸은 '외설'이라 평하는가 말이다. 어떤 이는 '성적행위의 유무'를 따지기도 하고, 또 다른 이는 '성적흥분의 유무'를 차이로 내세우기도 한단다. 그렇다면 '성행위'를 묘사한 예술은 없단 말인가? 글쎄, 예술 '전체'를 다 알지 못하는 문외한인 내가 언뜻 떠올려보아도 남녀의 중요부위(!)가 낯뜨겁게 노출된 예술품들이 적잖히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왜 그런 예술품에는 '포르노그라피'라는 불명예를 들추지 않으면서, <플레이보이>, <허슬러> 등과 같은 '도색잡지'나 하드코어로 분류되는 '야한 동영상'에는 어김없이 '외설'이라는 낙인을 찍느냔 말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성적흥분'을 차이점으로 내세우는 이들이 있는데, '성적흥분'이 왜 나쁜 것인지 합당한 근거를 내세우는 이는 없는 것 같다. 아니 '성적흥분'은 예술의 범주에 들어선 안 된다는 기준은 누가 세웠느냔 말이다.

어쩌면 '포르노그라피'에도 예술적인 아름다움과 감동의 서사시를 담아내서 관객들을 매혹시키는 무엇을 담을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냔 말이다. 물론 낯뜨거운 성행위를 공공연한 자리에서 선보이는 것이 점잖치 못한 주장이고, 동물의 짝짓기를 연상시키는 것처럼 '포르노그라피'를 대중화시켜야 마땅하다는 주장은 아니라는 점을 밝힌다. 앞서도 '부도덕적인 것'에 대해선 용서치 않겠다고 밝혔다. 그렇지만 과거에는 '미니스커트'가 허용될 수 없었을 정도로 낯뜨거운 패션이었으나, 지금은 '하의실종'이 버젓이 패션으로 자리잡은 것으로 모자라 '언더붑'과 '시스루'조차 미적인 것으로 분류되고 있는만큼 언젠가는 '포르노그라피'도 예술의 범주에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라는 것으로 마침표를 찍겠다.

세 번째는 '질 나쁜 농담'이다. 미국의 한 코미디언이 귀여운 강아지 사진을 관객들에게 보여주면서 "나, 이 사진 본적 있어. '한식당 메뉴판'에서"라는 유머를 선보였단다. 분명 '웃기는 상황'을 연출한 농담이다. 하지만 이는 '(모든) 한국인은 개를 식용한다'는 것을 전제로 깔았기 때문에 명백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며, 이 농담을 듣고 웃는 사람의 품격조차 의심스럽게 바라보게 만드는 '불편한 농담'이다. 우리는 과연 '어느 선'까지 농담을 허용할 수 있고, 허용해야 한단 말인가? 요즘 공중파 방송을 비롯해서 그밖의 방송에서조차 '코미디 프로그램'이 사라지고 있다. 심지어 '개인방송'에서도 무분별적인 '개그소재'를 일삼는 방송인들을 향한 지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을 정도다. 한때는 주말 연휴에 '개그 프로그램'을 시청하지 않으면 평일날 일상적인 대화에 끼지도 못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는데, 왜 이제와서는 '개그(유머)'에 대해 이토록 진지해졌는가 말이다.

바로 '질 나쁜 농담'에 웃을 수 없는 상황이 연출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도덕적인 농담'에 웃으면 안 되는 일상이 보편화된 것이다. 과거에는 '바보개그', '허무개그', '자학개그'까지 개그의 소재는 끝이 없었다. 영구와 맹구가 하는 바보짓은 일상의 피로를 풀어주는 활력소가 될 정도였고, 저런 게 왜 웃기는 걸까? 싶을 정도로 '허무한 개그'에도 우리는 박장대소를 멈추지 않았다. 여기에 '뚱뚱하고', '못생긴' 개그맨(우먼)들은 오디션장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공채'로 채용이 되는 일도 벌어졌다고 한다. 왜냐면 이들은 '존재, 그 잡채'로 웃음을 몰고다니는 귀인들이었기 때문이다. "얼굴도 못생긴 것들이 잘난 척 하기는~"이라고 말하는 옥동자 캐릭터의 대사는 그 자체로 모순이었고, '자학개그'였다. 하지만 그 뒤에 이어지는 '촌철살인의 풍자'를 우리는 놓치지 않았었다. 이런 개그 뒤에는 '정치풍자', '세태풍자', 더 나아가 인류 공영을 위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품격 높은 농담들이기도 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런 '농담'들에 날선 반응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소수자들의 인권을 짓밟는 '개그'에 차별금지라는 딱지를 붙였고, 정치적 소신을 말하는 '개그'에 국가권력이 개입하기 시작했으며, 씁쓸한 세태에 웃고 넘어가지는 '유머'에 웃음기 사라지는 정색이 줄을 이었다. 한마디로 점잖치 못하다는 이유로 '유머'에 족쇄를 매단 것이다. 물론 '비도덕적인 농담'을 허용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다. 저급한 개그소재로 품격을 잃은 개그프로그램을 되살리자는 운동을 벌이자는 것도 아니다. 왜 우리는 '웃음'을 상실한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지 되묻는 것뿐이다. 왜 '유머'를 양지로 드러내서 긍정적 효과를 내지 않고 '음지'로 내몰아서 더욱더 저속하게 만들고 마는지 안타까워서 그런다. 이 책에서는 '철학으로 농담을 분석하기'라는 장을 펼쳤지만, 그 글을 읽으면서 내 머릿속에는 이런 '웃지 못할 세태'가 떠올라 안타까웠다. 부디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유머'가 되살아나길 바란다.

마지막으론 '공포물'에 대한 미적 감상을 나열했는데, 솔직히 '느낌'에도 해석이 필요하다는 '감정 이론'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실 '공포물'을 좋아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 아니냔 말이다. 그런 것을 좋아하고 말고를 철학적으로 분석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싶다. 하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느낌을 가지고 감정을 쏟는 것에 대해 '합리성'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말에는 공감이 가긴 했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합리성'을 따지는(?) 것이 온당한 일인지까지는 의아할 뿐이란 말이다. 하긴 난 '공포물'을 보아도 무서움을 느끼지 못하는 편이라서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토시오는 귀엽고 처녀귀신은 섹시하지 않은가? 나만 그런가.

미학이라는 '분석철학'을 맛보았다. 물론 철학의 난해함이 엿보이기도 했지만 나름 재밌는 '접근'이었고, 사유하는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책이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미학(the Aesthetics)'이 이처럼 재밌지는 않겠지만, 흥미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경험이었다는 것만큼은 부정하지 않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