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14 : 중국 2 - 현대 편 - 이원복 교수님과 함께 떠나는 세계 역사 여행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14
이원복 글.그림 / 김영사 / 2018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14 : 중국 2 현대편>  이원복 / 김영사 (2018)

[My Review MMCLXI / 김영사 33번째 리뷰] 중국을 비롯해서 동아시아 대륙의 모든 국가들의 지난 100여 년간의 현대사는 정말 너무 굴곡진 아픔의 연속이었다. 그런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었던 까닭이 동양보다 서양이 '근대화'에 먼저 성공했다는 이유 때문이라는 점도 화가 나는 이유다. 그들은 겉으로는 '문명'을 내세우면서도 뼛속 깊이 '야만'으로 가득차 침략과 약탈만 일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구열강의 야욕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일본'은 동아시아 국가 가운데 가장 먼저 '근대화'에 성공했으면서도 문명국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뼛속 깊이 자리 잡은 '야만'을 드러내 서구열강과 마찬가지로 침략과 약탈을 하는 것에 몰두할 뿐이었다. 그로 인해 중국 같은 대부분의 동아시아 국가들은 서구열강에 모든 것이 털리고, 일본에게 또 한 번 털리는 '이중고'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아픔을 겪은 동아시아 각국의 나라들에게 '중국의 현대사'는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까?

한편, 중국은 역사상 '중화사상'으로 똘똘 뭉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래서 중국의 힘이 강성할 때는 '중국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으로 콧대를 높였고, 반대로 힘이 약할 때는 '외세의 침략을 물리치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원동력'으로 삼았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의 한족은 '외세의 침략'이나 '내부의 불안'이 발생할 때마다 엄청난 수의 희생을 치뤄야 했기 때문이다. 멀리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겠으나 '정확한 통계'를 낼 수 있는 기록이 많지 않기에 13세기 이후부터 손을 꼽아봐도, 몽골의 침입으로 3500만 사망, 17세기 만주족의 침략으로 2500만 사망, 20세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때 2000만 사망을 했다고 한다. 외세의 침략으로 이만큼 피해를 봤다면, 내부의 불안으로 발생한 사망자는 19세기 태평천국의 난 때 2000만 사망, 20세기 국공 내전으로 1000만 사망, 대약진운동으로 4000만 사망, 문화대혁명으로 300만 사망, 그리고 천안문사태로 수백 만 사망(정확한 집계가 공개되지 않아 추정치)으로 중국은 안팎의 혼란을 겪을 때마다 엄청난 인명 사망과 재산 피해를 내곤 했었다.

그 결과 중국은 '강력한 통치자'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강력한 힘을 가진 '권력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모습을 띠어야 평화를 유지하고, 발전을 도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인들은 이런 경험을 너무 오랫동안 겪어왔기에 이런 사회정치 구조에 별다른 불만을 표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간 듯 싶다. 딴에는 어쩔 수 없다고 본다. 중국의 역대 통일왕조(또는 국가)는 엄청 큰 영토와 수많은 인구를 다스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넓은 영토와 많은 인구를 효과적으로 다스릴 방법은 '단 하나의 권력자'를 중심으로 삼고 똘똘 뭉치는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과거 로마제국도 영토가 넓어지고 다스릴 시민의 수가 늘어나자 '공화정'을 버리고 '황제정'을 시작하지 않았던가. 아무리 민주적인 통치 방식이 좋더라도 덩치가 커지면 민주적인 것은 비효율적일 수밖에 없는 셈이다.

이러한 양상은 중국의 현대사에도 큰 영향력을 발휘했다. 청 왕조가 멸망한 뒤에 수많은 군벌이 등장해서 얼마나 혼란스러웠느냔 말이다. 쑨원이 등장해서 '중화민국'을 건설했지만, 그가 강한 권력자로 등극(?)하지 못하자 위안스카이가 황제 자리를 차지하면서 권력을 손에 넣었다. 하지만 위안스카이는 '정통성'을 인정 받기도 전에 천명을 다하고 죽었고, 그 뒤를 '장제스'가 이어 받아 중국을 강한 힘으로 통치하려 들었다. 그러나 장제스는 강력한 라이벌 '마오쩌둥'에게 밀려날 운명이었다. 그렇게 마오쩌둥이 공산당의 힘을 빌어 새로운 '권력자'로 등극할 수 있었고, 중국은 잠시나마 안정을 취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오쩌둥의 뒤를 이어받은 권력자는 '덩사오핑'이었다. 덩사오핑까지 무소불위의 1인 독재권력을 휘두르다 덩사오핑 이후에는 '중국 공산당'이 그 자리를 대신하게 되었다. 장쩌민, 후진타오, 그리고 지금의 시진핑까지 모두 '공산당'에 충성하는 권력자로 등장했고, 앞으로도 중국은 '공산당'이 중국의 인민 모두를 강력하게 휘두르는 형태로 나아갈 것이다. 물론 '공산당'이 언제까지 그럴 수 있는지는 장담할 수 없겠지만, 중국은 앞으로도 '강한 권력자'를 중심으로 똘똘 뭉치는 정치체제와 사회문화를 이어갈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만일 중국에 '강한 권력자'가 등장하지 못한다면 어김 없이 '내부의 불안'으로 엄청난 불상사가 다시 일어날 것이고, 현대에는 '외세의 침략' 같은 일은 대규모로 진행되기 힘든 구조이지만, 만약에 중국이 대혼란에 빠진 상태에서 대규모 침략을 받게 된다면 엄청난 인명 사상과 재산 피해를 피할 수는 없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 까닭에 중국은 늘 '중화사상'을 자국민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게도 강요하고, 강제하는 일을 반복한다. 이런 사상적 강요도 '중국의 힘'이 강성할 때는 비교적 온건하게 표현되지만, 중국 내부에 혼란이 커지면 커질수록 '자국민'에게 공포스러울 정도로 강요하며, '다른 나라'에게까지 무리를 넘어 무례할 지경으로 인정하길 요구한다. 중국의 역사가 늘 그랬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안쓰러울 정도로 발버둥을 치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떡해서든 살아보겠다고 말이다.

이 책 <업그레이드 먼나라 이웃나라 : 중국 현대편>의 내용을 추려보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겠다. 서구열강에 의해서 청 왕조가 멸망한 뒤에 중국의 지식인들은 일본의 근대화를 벤치마킹해서 '자국의 근대화'를 꾀했다. 허나 중국의 지식인들은 '근대화 교육'에 성공적이었지만, 중국의 민중들은 전혀 근대화 교육을 받지 못한 상황에서 '민주적 혁명'은 불가능했던 셈이다. 그래서 쑨원이 늘 실패했던 것이다. 하지만 쑨원의 사상은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결국 중국의 민중을 깨어나게 만들었다. 교육 수준이 높아지자 중국의 자발적 근대화가 꼭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던 것이다. 허나 아직도 대다수의 중국 노동자와 농민들은 이런 '근대화 교육의 혜택'을 받지 못해 깨우치지 못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군벌'들이 우후죽순 격으로 힘을 쥐고 있었다. 위안스카이가 대표적인 군벌이었고, 중국의 지방 곳곳에 이런 군벌들이 중앙의 통치에서 벗어나 각 지방에서의 '왕'처럼 군림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열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 휘쓸리게 되었다. 중국 침탈에 열을 올리던 유럽 각국이 '자기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모국으로 돌아간 사이 '일본'이 승전국의 지위를 차지하며 패전국의 점령지역을 야금야금 빼앗기 시작했다. 동아시아 여러 나라들은 서구열강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신음하고 있었는데, 일본군이 등장해서 서구열강의 군대를 대신 내몰아주니 '해방군'으로 환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일본군은 오래지 않아 본색을 드러냈고, 서구열강을 대신해서 야만적인 침탈을 시작했다. 중국도 같은 처지였고 말이다. 그렇게 중국의 동북부 지역인 '만주'와 '내몽골' 지역에 일본의 괴뢰국이 탄생했고, 일본은 이 지역을 '만몽'이라 부르면서 일본의 이익선이라 불렀다. 이를 좌시할 수 없었던 장제스는 일본의 침탈에 항의했지만, 장제스는 일본의 침략보다 더 위협적인 존재가 있다면서 다른 짓을 하기 시작한다. 바로 마오쩌둥이 이끄는 공산군 토벌이었다. 그렇게 일본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방관하던 장제스는 '국공내전'을 일으키며 공산당 토벌에만 열을 올리게 된다.

강력한 통치자가 등장하지 못한 중국의 혼란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가? 외적이 쳐들어오는 상황에서도 내부의 적을 토벌하겠다고 자국민을 학살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런 '자살골'을 넣는 일을 멈춘 것은 중국 전역이 '공산화'가 되고 마오쩌둥이 '공산주의 이념'을 내세워서 강력한 독재자로 등극할 때까지였다. 비록 공산정권이 들어서긴 했지만, 강력한 지도자가 등장하자 중국은 일시에 혼란을 멈추고 '평화와 발전'을 도모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내부의 모순'으로 인해 성장동력을 잃어버릴 운명에 놓였고, '공산당의 부패'로 인해 인민들은 철저한 사상통제와 생활고에 시달리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중국의 대혼란을 성공적으로 극복했던 마오쩌둥은 대약진운동과 문화혁명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런 중국의 혼란을 되살린 '권력자'는 다름 아닌 덩샤오핑이었다. 그는 공산주의 이념보다는 '실용'을 앞세워서 공산주의 사회체제 속에서 '자본주의'를 일부 받아들여 철저히 실리를 챙기는 개혁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리고 이것으로 중국은 강력한 '성장모드'로 전환할 수 있었다. 사실 중국의 현대사는 '공산주의 이념(마오이즘)'을 중심으로 내세운 것을 '홍(紅)'이라 부르고, '실사구시'를 내세워 실리를 챙기는 것을 '전(專)'이라 부르는데, 이 홍과 전 가운데 어떤 것을 더 내세웠는지에 따라 성장모드가 달랐다고 볼 수도 있다. 대체로 홍의 세력이 강할 때에는 폭망하는 시기였고, 전의 세력이 강할 때에는 급성장하는 양상을 띠었다. 덩샤오핑의 개혁정책은 전형적인 '전'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덩샤오핑도 개혁정책에 한계를 보이면서 '천안문 사태'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마오쩌둥이 살아있을 때에는 공산당의 정책에 '비판'조차 할 수 없었지만, 덩샤오핑은 개혁을 부르짓었기 때문에 수많은 지식인과 학생들이 더 강력한 '개혁정책'을 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덩샤오핑은 이를 허락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권력자가 그렇듯이 '권력의 맛'에 길들여지면, 권력을 내려놓기 싫기 마련이다. 그래서 권력에 집착하게 되고 비판을 수긍하지 못하며 차츰차츰 '독재자'가 되어 간다. 덩샤오핑도 말년에는 자신의 능력 밖을 인정하지 못하고 '독재자'로 군림하길 바라며 중국 인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눴던 것이다.

중국의 인민들은 덩샤오핑을 끝으로 '개인적인 권력자'에게 충성하지 않고, '집단적인 권력'인 '공산당'에 충성했다. 물론 이는 덩샤오핑의 개혁정책 가운데 하나였던 '헌법 제정'에 의한 것이었다. 마오쩌둥 시절에만 해도 마오의 말씀이 '헌법'보다 우위에 있었지만, 덩샤오핑은 과감한 개혁을 하며 이를 고쳐나갔다. 비록 덩샤오핑도 말년에 '독재자'로 군림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에는 '공산당'에서 배출한 권력자가 모든 중국 인민들을 이끌어가는 양상으로 바뀐 것이다. 허나 이런 방식에도 맹점은 있었다. 개인에게 충성하는 것이 아니라 '공산당'에 충성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중국 인민의 '개인적 인권'보다 '공산당의 권력'이 더 우위에 서게 되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개인의 이익에 앞서 공산당의 이익을 위해서 개인은 철저한 희생을 당해도 괜찮다는 논리가 팽배해진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중국인들이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하는 까닭이다. 공산당의 명령(?)에 무조건 따르는 10억 인구의 힘을 우리는 목격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바로 이것 때문에 '미중 대결'에서 전세계 사람들이 중국을 편들지 않고 미국을 울며 겨자 먹는 심정으로 응원하고 있는 것이다. 뭐, 그렇게 싸우다 둘 다 망하면 더 좋겠지만 말이다. 이제 우리의 선택은 결정 되었다. 중국을 응원할 수는 없지만 중국과 싸울 필요도 없다. 저 거대한 나라와 싸워서 이득을 얻을 게 없기 때문이다. 설령 이긴다한들 5000만 인구로 10억이 넘는 인구를 어찌 지배할 수 있겠는가? 저 광활한 영토를 집어 삼킬 방법도 없다. 그렇다고 미국에 충성할 필요도 없다. 미국을 혈맹이라 부르면서 영원한 친구로 생각하던 때도 있었지만, 미국은 우리를 노예 취급할 뿐이었다. 자신들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등치고 배신 할 나라가 바로 미국이기 때문이다. 미국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적당히 가지고 놀기에 딱 좋은 나라다. 물론 지금도 '초강대국'인 것은 맞지만, 현재의 미국은 단물 다 빠진 껌과 다를 바가 없다.

자, 이렇게 본다면 답은 하나다. 대한민국의 힘을 더 키워야 하는 방법뿐이다. 100년 전의 처지였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21세기 현재의 대한민국은 다르다. 중국도, 미국도, 만만히 볼 수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은 저들의 위협에 살짝 쫄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허나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은 밝다. 아직까진 초강대국이라 불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그런 꽃길을 갈 수 있는 가능성이 현재로서는 꽤 높기 때문이다. 물론 가시밭길도 놓여 있다. 그 길을 밟지 않고 잘 나아가야 한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싸움에 임해서도 위태롭지 않은 법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한국 근대사 산책 1권 - 개화기편,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07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국 근대사 산책 1 : 천주교 박해에서 갑신정변까지>  강준만 / 인물과사상사 (2007)

[My Review MMCLIII / 인물과사상사 25번째 리뷰] 강준만은 '사회문화 비평가'로 소개되고 있다. 현재에는 '보수적인 경향'을 드러낸 논객이라고 보여지지만, 이 책이 쓰여질 당시만해도 '보수와 진보',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은 균형잡힌 시선으로 글을 썼다고 보고 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인다. 그 근거는 이 책에 언급하고 있는 수많은 사학자들의 연구자료들을 '비교분석'하고 있는 방대한 자료만 봐도 그렇다. 보수쪽의 시선으로 역사적 사건의 지평을 나열하였으면, 반드시 진보쪽의 견해로 이를 비판하며 균형추를 맞춰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으로써 독자들은 역사에 관한 많은 관심만으로도 '독자만의 역사적 평가'를 내릴 수 있도록 돕고 있다. 2025년 현재, 벌어지고 있는 국제사회의 혼돈과 난맥의 틈바구니에서 '한국의 근현대사'를 다시금 재조명 할 필요성을 절실히 느끼고 있는 찰나에 떠오른 책이 바로 강준만의 '근현대사 산책' 시리즈였다. 비록 강산이 두 번 바뀔 정도의 시간이 지난 옛 책이긴 하지만, '노무현 정부에서 이명박 정부로' 넘어가던 시기에 쓰여진 역사책이기에 '역사교과서 논란'을 전후로 한 한국사 재평가를 논하던 시점에 쓰여진 책이기에, 지금과 같은 빠르게 변모하는 '변곡기'에 딱 어울릴 책이라고 여겨 다시금 리뷰를 기획했다. 시간이 허락하는대로 꾸준히 리뷰해보겠다.

2025년 현재 '한국사'는 세계적인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동안 '은둔의 나라'였기에 아무나 관심을 가지지 않은 나라의 역사였는데, <케이팝 데몬 헌터스>라는 애니메이션 하나로 일약 '전세계가 주목하는 나라'로 등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단순히 만화영화만 인기를 끌고 만 것이 아니라 '한국문화' 전반적인 것으로 관심이 확장되면서 '한국의 위상'이 재정립되어 국제적으로 선진국을 넘어, '선도국가'로 탄탄한 입지를 다지는 계기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불과 1년 전에 '비상계엄'이 선포되었지만, 국민들이 저지해내고, 심지어 대통령 탄핵까지 이뤄내고, 새로운 민주정부를 세운 것도 놀라운데, G7, APEC, G20까지 일사천리로 성과를 거두면서 '대한민국의 놀라운 민주회복력'을 전세계에 각인 시켜줬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미 트럼프 대통령이 내세우고 있는 'MAGA 정책'에 발맞춰 전세계를 향해 '관세폭탄'을 던지는 와중에 '조지아주 한국인 근로자 구금사태'가 벌어지자 한국은 신속하게 자국의 국민을 보호하고, 끝내 자국의 이익을 관철시켜내는 모습을 전세계에 보여주며 초강대국이라 불리는 미국과 대등한 외교를 달성해내는 위업을 보여주었기 때문에라도 '대한민국'은 위풍당당하게 전세계를 선도하고 있다고 자평할 수 있을 정도까지 일어섰다.

암튼, 이런 위상에 걸맞는 '역사 평가'를 다시 매겨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한국사는 다분히 위축된 역사관을 보여줬고, 세계사적으로도 미미한 영향력을 보여준 '약소국의 이미지'가 강했기에, [국사/세계사]로 따로 구분해서 학생들에게 가르치는 경향까지 생기지 않았던가. 그러다보니 '자국의 역사'를 배우면서도 아이들의 입에서 "한국사는 부끄러워서 배우기 싫어요"라는 말이 나올 지경이었고, 이런 말을 들은 역사교사조차 별다른 반박도 하지 못하면서 '자국의 역사'를 부끄러워하는 아이에게만 면박을 주는 일도 많은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당당히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전세계가 대한민국을 부러워하고 있는 까닭은 '제국주의적 만행'을 저지르지 않고도 세계적으로 강한 이미지를 보여줄 수 있으며, 그로 인해서 절대 미움 받지 않는 나라가 될 수 있는 전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유일한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이런 나라의 역사를 왜 부끄러워 해야 하느냔 말이다. 오히려 자랑스러워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한국사를 다시금 써나가야 할 것이다. 식민주의 사관으로 위축할 것도 없고, 민족주의 사관으로 과장할 것도 없이,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면서도, 자긍심이 넘치도록 말이다. 그간 우리 역사에서는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정복하는 역사가 없이, 외국의 침략에 맞서 지켜내는 역사만을 가르치면서, 세계적으로 훌륭한 위인으로 알렉산더, 칭기스칸, 나폴레옹 등을 거들먹거렸다. 참으로 이율배반적이지 않았던가? 정복의 역사가 없는 '선한 국민성'을 자랑하면서, 내심으로는 '세계정복의 꿈'을 꾸는 욕망을 드러내고 있었으니 말이다. 이런 '상반된 가치관'을 어린 학생들에게 강제로 주입했으니, 앞서 나왔던 대답하기 곤란한 질문에 대답할 것도 마땅히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당당히 가르치고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전세계적으로 다른 나라를 '침략'하고 '정복'하지 않아도 잘 먹고 잘 사는 방법을 터득한 민족이었고, 오늘날에는 그런 비폭력적이고 선한 영향력만으로 전세계를 선도하는 국가로 발돋움하게 되었다고 말이다. 물론 그러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왔지만 우리 민족은 한 점 부끄럼 없이 이 땅을 당당히 지켜왔고, 고난과 역경을 이겨내고 지금의 대한민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고 말이다. 이렇게 당당하게 주장하기 위해서라도 '한국사'는 재조명해야만 한다.

이 책 <한국 근대사 산책 1>은 조선이 서양과 조우한 명백한 증거인 '천주교 박해'부터 급진개화파가 저지른 성급한 실책, '갑신정변의 실패'까지 여러 사학자들의 견해를 아우르고 있다. 그렇기에 앞서 언급 했듯이 역사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수많은 견해들 속에서 '비교분석'하기 딱 좋은 책일 것이다. 그럼 시작해보자.

조선 후기 '개화파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세력은 청 문물을 기꺼이 수용해서 먼저 부국강병한 나라로 만들자고 주장했던 '북학파'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들은 주로 남인 계열의 지식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이 청을 통해서 접한 문물 가운데 '천주교'도 있었다. 허나 조선 민중이 천주교를 '종교'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유교가 정치사회적으로 민중들의 의식속에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가운데 '유일신 사상'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 '종교 개혁'을 하기에는 너무 앞선 일이었으며, 그게 가능하리라 믿는 사람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천주교는 종교가 아닌 학문적 성격이 강한 '서학'으로 먼저 다가왔다. 그리고 조선사람들에게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라는 문구를 전파했고, 소수이지만 '모두가 귀천이 없이 평등한 세상'을 꿈꿀 수 있게 해줬다. 그래서 서학(천주학)은 이런 매력으로 조선사회에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여기서 알 수 있는 대목이 무엇일까? 바로 조선의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 대한 실망감을 갖고 있었던 이들이 귀천을 막론하고 많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들이 공통적으로 꿈꾸었던 것이 바로 '모두가 평등한 세상'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꿈을 갖게 된 이들이 이후에 벌어진 '천주교 박해' 때 수많은 순교자를 낳게 되었다는 사실과 부합하게 된다. 당시 '한자 성경'도 제대로 보급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글 성경'이 많이 보급되었을리 만무하다. 그럼 대부분 '영어'나 '불어', '독어' 같은 '외국어 성경'이 대부분이었고, 이를 직접 읽을 수 없는 조선 사람들은 외국인 신부의 말을 '통역'해주는 역관들의 도움으로 성경구절의 몇 마디만 겨우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성경구절 몇 마디만 알고 있던 대다수의 조선사람들이 '독실한 신앙심'으로 절두산에 올라 기꺼이 순교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을까? 그것보다는 성경 말씀에 기초한 '평등사상'이 너무 옳다고 믿었고, 자신의 세대에선 이루기 힘들지라도 '자식의 세대'에선 가능할 거란 희망을 품고 배교를 거부하고 기꺼이 순교의 길로 들어서길 바랐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지 않을까.

그렇게 본다면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이 삽시간에 전국 곳곳으로 퍼져나간 것을 당연한 이치로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곧 하늘이다[인내천 사상]'이라는 평등사상을 주장한 동학은 만나기 힘들고, 믿음을 유지하기 힘든 '천주교'보다 수월하게 퍼져나갔던 것이다. 하지만 때는 '안동 김씨'를 위시한 세도정치가 횡행하던 엄혹한 시절이었고, 동학세력은 자연스레 '저항의 중심'으로 힘을 모아 마침맞게 일어난 '농민봉기'가 도화선이 되어 '농민항쟁'으로 커지게 되었다. 하지만 '동학농민항쟁'은 훗날 '반외세'를 불러일으키며 일본군과 맞서 싸우는 당당한 모습을 보이기에 앞서, '정부의 탄압'이라는 내부의 억압과 먼저 싸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이는 당시 지배세력인 '양반사회'가 지닌 모순과 세계 정세에 어두운 권력계층의 무능부터 타파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한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가 영민한들 '시대를 앞선 천재'가 맞은 불운의 전철을 밟을 수밖에 없었던 셈이다.

물론 동학교도들이 '시민교육'을 받지 못한 미성숙한 면이 아쉬운 대목이기도 하다. 허나 당시의 사회상이 99%가 농민이던 시절에 하루종일 농사일에 매진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서 '교육수준' 운운하는 것은 어불성설일 것이다. 그러니 너무 시대를 앞선 비판에 앞서서 당시 조선사람들이 사상적, 문화적으로 변모해나가는 장면을 중점적으로 지켜봐야 할 것이다.

암튼, 세도정치의 명맥을 끊은 영웅은 '흥선대원군의 등장'이다. 열두 살 난 아들 '고종'을 왕위에 올리고 자신은 상왕의 입지에 올라 향후 10년 간 조선의 정치권력을 손에 쥐고 흔든 인물이 등장한 것이다. 먼저 조선 민중과 개혁세력은 대원군의 등장을 환영했다. 그가 시작한 일이 '세도정치의 종지부'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세도 가문의 본거지였던 '서원'을 철폐했고, 양반들에게도 세금을 걷는 '호포제'를 실시하였다. 이를 통해서 권력의 향배가 '세도가문'에서 '대원군'으로 옮겨가게 되었고, 이는 이후에 '왕권 강화'를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기에 그간 억압 받고 착취 당하던 조선 민중들은 대원군의 집권을 환영하는 분위기였다. 허나 이런 분위기가 오래 가지 못했다. 제너럴셔먼호 사건과 오페르트 도굴 사건으로 인해 두 차례의 양요가 벌어졌고, 전국에 척화비가 세워지는 등 '개항'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에서 대원군이 실책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원군이 실책을 하는 과정중에 '고종의 친정'을 둘러싼 '민비와 대원군의 대립'은 날로 격화되었다.

이런 일련의 사건 사이에 '경복궁 중건'은 대원군의 뼈아픈 실책이 되었고, 기대했던 '왕권강화'를 달성하기도 전에 '원납전 실시'로 양반들의 불신을 불러왔고, '당백전 발행'으로 인한 물가상승으로 백성들의 원망까지 덤으로 받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병인양요', '신미양요', '운요호(운양호) 사건'까지 연이어 벌어지며 개항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이들과도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런 개화를 주장하는 세력과 손을 잡고 '고종의 친정'을 도모하는 '민비 세력'은 새로운 정치권력을 불러들여 치열한 권력다툼을 불러 일으켰다.

이런 전차로 조선은 '급진개화파'와 '온건개화파', 그리고 '위정척사파'로 갈라져 서로 대립하는 양상을 보여준다. 개화파는 '진보', 위정척사파'는 '보수'의 성격을 띤 정치집단이라는 것은 명백한데, 진보세력이 '급진'과 '온건'으로 나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을까? 급진개화파는 외세를 불러들여 빠르게 개혁을 완수하자는 쪽이었고, 온건개화파는 개항을 통해서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되 우리의 실력이 성장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점진적으로 개혁을 하자는 원론적인 분파였으면 이해하기도 쉬웠겠지만, 개화파들의 주장은 하루가 멀다하고 바뀌었고, 권력의 향방이 대원군과 민비 사이에서 치열한 대립양상을 띨 때, 이런 혼란을 틈타서 저들만의 계략(?)을 꾸며 구국을 위한 결단과는 상관없는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만을 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시기에는 개화파의 활약보다 '위정척사파'의 활약에 더욱 명분이 서는 모습이었다. 허나 위정척사파는 너무 고루했다. 세상은 급변하는데 조선은 '변함없이' 가려고만 했으니 실익이 전무했던 것이다. 다만 '의기'만 충만했다. 강력한 외세의 등장에도 조선이 보여줄 '당당한 성리학적 명분'만 내세우면 도덕적으로 열세(?)인 야만스런 서양오랑캐들이 저절로 물러설 것이라 철떡같이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조류를 몰라도 너무 몰랐다.

이런 와중에 조선은 '운양호 사건' 이후 '강화도조약(병자수호조약)'으로 최초의 근대식 조약이자 '불평등조약'을 시작으로 서구열강들과 차례대로 '불평등조약(최혜국대우)'을 맺게 된다. 자연스럽게 조선의 이권이 서구열강과 일제에게 넘어가기 시작한 셈이다. 이때 일본의 근대사상가 후쿠자와 유키치는 조선을 근대화시키고자 획책하게 된다. 조선의 개화파를 가르쳐(!)서 일본의 꼬붕 역할을 하도록 만들겠다는 야심을 꿈꾼 것이다. 그래서 움직이게 된 인물들이 바로 '갑신정변의 주역들'이다. 김옥균, 박영효, 홍영식,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당의 핵심 인사들이 후쿠자와 유키치의 계획에 따라 움직인 '장기말'이었던 셈이다. 물론 김옥균 등은 조선을 근대화시키려는 충성심에서 나온 애국적 행위라 철떡같이 믿었을 것이다. 그런데 '정변'을 일으킬 정도로 혁명적인 사상에 충실했던 인물이 자국내에서 아무런 준비도 없이 오직 '일본'이라는 외세의 힘만 믿고서 순진하게 일을 벌였다는 것이 참으로 미스터리한 일이다. 그래서 갑신정변은 오늘날까지도 그 평가가 '현재진행형'인 셈이다. 잘했다 못했다를 떠나서 '반드시 필요한 개혁'이긴 했으나, '정변을 일으킬 정도'로 급박할 사정이 무엇이었느냐를 두고서 논란이 크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계획 하에 김옥균 등은 '갑신정변'을 일으켜 개혁을 발빠르게 추진하려 했으나, 조선 민중의 지지를 전혀 받지 못하는 변수를 미리 짐작하지 못한 후쿠자와의 오판으로 인해 갑신정변을 무리하게 추진했고, 청병 1500여 명을 미리 주둔시켰던 원세개(위안스카이)의 발빠른 진압에 '일본공사관'의 소수의 병력은 정변을 돕기는커녕 도망가기 급급했고, 일본의 군대와 지원금만 믿고 정변을 일으킨 김옥균 등은 유일한 희망이었던 '고종'마저 자신의 편으로 만들지 못하고, 개화파에 대한 불신만 키우게 만들어서 김옥균 등을 '역적'으로 결단케 만들었기에 결국 '3일 천하'로 끝맺게 된 것이다.

허나 이런 실패조차 일제의 의도였는지 모르지만, 일본 군부는 위기를 기회로 삼아,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겠다는 노선을 더욱 확고히 했고, 후쿠자와조차 '탈아론'을 주장하며 "동양의 후진국과 교제하지 말고 그들을 유럽인들이 대하듯 대하라"는 메시지를 내세웠고, 이는 '흥아론'으로 확장되어 "같은 문자를 쓰는 같은 아시아 민족이 일본을 맹주로 대동단결하여 서구열강을 아시아에서 물리치고 부흥시키자"는 주장을 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후쿠자와는 '제국주의적 식민주의'와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워 대륙침략에 앞장서게 된다.

이런 일본의 야만성은 아주 오래전부터 뿌리 깊게 자리잡고 있으며, 한국과 이웃한 나라임에도 우리가 '경계대상 1호'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명백한 근거다. 이런 야만적인 이웃 나라를 두고도 '침략과 정복'을 기치로 삼지 않은 대한민국이 더욱 돋보이지 않는가? 2권에서는 우리가 받게 된 '시련'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내용이 펼쳐질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이퍼케이션 3 - 하이드라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바이퍼케이션 3 : 하이드라>  이우혁 / 해냄 (2010)

[My Review MMCL / 해냄 8번째 리뷰] 니체는 <차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괴물을 상대하는 자 괴물이 되지 않게 주의하라. 그대가 심연을 들여다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보리니."라는 언급을 했다. 그리고 이우혁 작가가 15년 간 골머리를 썩힌 끝에 내놓은 역작 <바이퍼케이션>(전 3권)을 드디어 다 읽었다. 참 힘들었다. 이우혁 작가의 소설을 이토록 길게 끌며 읽은 책이 없었는데, 정말이지 이 소설은 내게 역대급이었다. 정말 괴물같은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의미는 아니다. '범죄심리'를 다룬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 않는데, 그 까닭은 왠지 모르겠지만 너무 끔찍한 '범죄'를 '미화'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소설의 작품성과 완성도, 그리고 재미로만 보자면 '범죄'를 소재로 다룬 심리소설, 스릴러소설, 공포소설, 추리소설 등등 모두 흥미롭고 재밌는 것은 사실이다. 허나 그 재미라는 것의 실체를 들여다보면 '살인'이라고 하는 자극적인 소재이기 때문인 것이 전부이다. 나는 끔찍한 살인사건을 보면서 흥분하며 즐거워하는 대중을 보는 게 마뜩찮은 사람이기에, 살인사건을 소재로 다룬 작품이라고 하더라도 '명탐정' 같은 이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범죄자나 악당을 처단하고 죄값을 받게 만드는 결론만을 좋아라하지, 뤼팽처럼 자신이 저지른 범죄를 정당화하고, 미화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경찰을 농락하고 악행을 저지르면서 '사회정의' 운운하는 이야기는 쓰레기 취급하는 쪽이다. 뭐, 여담이지만, 조만간 '뤼팽 전집 리뷰'도 올릴 예정이다. 그렇지만 듣기 좋은 리뷰는 결코 아닐 것이라고 예고한다. 암튼 <바이퍼케이션>은 내가 읽은 '범죄심리소설' 가운데 가장 잔인하고 피가 철철 흘러넘치고 살점이 사방을 튀는 잔혹한 소설이었다. 이런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적어도 나는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는 바다.

앞서 '괴물'을 언급한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세 인물 가르시아 반장, 에이들 요원, 그리고 헤라 헤이워드 부인(헤라클레스)은 '하이드라'라고 하는 괴물이 온 도시를 피로 범벅을 만들자, 그 괴물을 잡기 위해 수사에 나서게 된다. 허나 '하이드라'에 접근하면 접근할수록 범죄는 점점 더 끔찍해지고 살인은 더욱 빈번해진다. 그리고 이유도 알 수 없는 살해 범죄가 일어나는 원인이 다름 아닌 '헤라 헤이워드 부인'이라는 금발의 미녀를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으며, 그리고 끔찍한 살육이 벌어지는 까닭도 다름 아닌 '헤라 헤이워드 부인', 아니 그녀의 '또 다른 인격체(?)'인 자칭 '헤라클레스'라고 하는 인물에 의해서 살인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되었다. 지난 1, 2권의 내용이 그랬다. 하지만 그녀(헤라클레스)도 '하이드라'라고 하는 더 끔찍한 괴물에 의해서 '조종 당한 희생양'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밝혀냈고, 그 진짜 괴물을 잡기 위해 수사력을 총동원하는데, 과연 '하이드라의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줄거리는 여기까지 이야기하기로 하고, 본격적으로 '괴물'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 한다. 사실 범죄소설에 나오는 살인사건들은 창작자의 상상 100%라기보다는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해서 새롭게 꾸며진 이야기로 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속에 등장하는 '괴물'같은 살인자가 실제 현실에서도 존재했다는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연쇄살인범'은 전세계 어디에서나 있었으며 그들의 희생양은 언제나 '힘 없는 여자와 아이, 노인'을 대상으로 했으며, 사회 소수자들을 향한 무자비한 폭력과 살해를 저지르면서도 눈곱만큼의 '반성'이나 '죄책감' 같은 것을 느끼지 못하고, 너무도 당연한 일을 했다는 듯한 뻔뻔스러운 모습을 볼 때면 '분노'가 일기에 앞서 '구역질'이 날 정도다. 왜냐면 그들은 '인간'이길 포기한 듯 말과 행동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아니라면 무엇일까? 그렇다. 그들은 하나같이 '괴물'이었을 뿐이다. 흔히 '짐승'이라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만, 짐승들도 배가 고파 허기를 채우기 위해서 '최소한의 희생(살육)'을 할 뿐이지, 이런 괴물들은 피에 굶주린 모습을 하고서 결코 채울 수 없는 '욕망의 부재'라도 느끼는 듯, 죽이고 또 죽이는 일만 반복할 뿐이다. 그리고 자신이 살해한 희생자를 모욕하고 '죽어 마땅한 존재'로 치부하는 씻지 못할 만행을 저지르면서도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한마디로 '양심의 가책' 같은 것은 엿 바꿔 먹은 셈이다.

이 소설에서는 '헤라 헤이워드(자칭 '헤라클레스')'가 바로 그런 괴물이었다. 어느 날, 우연히 얻게 된 '초능력'으로 사람을 말 한마디로 '정신지배(마인드컨트롤)' 같은 것을 시행해서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여버리는 일을 한다. 물론 처음부터 대놓고 사람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그저 가만히 있는데 '범죄자'들이 찾아와 헤라를 납치하려 들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간단한 말 몇 마디로 제 발로 찾아온 범죄자들끼리 서로 죽고 죽이게 만들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는데, 그 까닭은 바로 자신이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스'라고 하는 영웅이자 '신적인 존재'인 까닭에 하찮은 인간의 목숨 따위는 알 바가 아니라고 둘러댈 뿐이다. 도시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을 추적하다 '헤라 헤이워드(헤라클레스)'의 초능력(?)을 목격하게 된 가르시아 형사와 에이들 요원은 결국 '헤라클레스'와 엮여, '하이드라'라고 하는 또 다른 괴물의 정체를 밝히고 쫓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가르시아와 에이들도 손에 피를 묻히는 일이 발생하고 만다. 물론 겉으로는 '헤라클레스'의 거부할 수 없는 명령(!)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긴 하지만, 그들도 애초에 형사와 요원이 되기 전에 끔찍한 살인사건을 경험했고, 그 사건의 범인을 '사적인 복수'를 하기 위해서 형사와 요원이 되었다는 비밀을 간직하고 있었기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한마디로 그들이 손에 피를 묻히게 된 '원인제공'을 스스로 한 셈이다. 결국 이 소설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인물이 '범죄사건', 그것도 끔찍하고 잔혹한 '살인사건'에 연루되어 있으며 원하든, 원치 않든 서로를 죽이고 자신도 죽는 '대환장의 살육파티'에 초대된 셈이다.

난 이걸 끝까지 읽는 것이 힘들었던 것이다. <퇴마록>에서도 끔찍한 장면이 곧잘 등장하긴 하지만, 이 장면들은 대부분 '악령'들이 저지른 일들이었고, 이런 악행을 막고자 '퇴마사'들이 등장해서 자신의 목숨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악과 맞서 싸우는 모습을 그렸던지라 아주 감명 깊게 읽고 또 읽었던 것이다. 이우혁의 또 다른 소설 <파이로매니악>에서도 폭발물로 살인을 저지르는 장면이 등장하지만, 폭발물에 희생당하는 이들은 전부 '대한민국'을 해치는 악질적인 악인들이었으며, 그들이 저지른 악행에 대해 '정상적인 방법'으로 법정에 세울 수 없는 불가피한 상황이라는 설정이었기에 큰 불편함(?)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바이퍼케이션>은 그런 '최소한의 양심' 같은 설정이 전혀 없다. 그저 '괴물'에게 이용 당했기 때문에 죽어도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그냥 죽어나갈 뿐이었다. 특히나 마지막 '하이드라'와의 대결을 앞두고 수많은 이들이 '괴물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총과 칼에 맞아 '대신' 죽어나간다. 그들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그렇게 죽어야만 했던가? 그런데도 '괴물'들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수많은 희생자를 낳았는데도 거기에 대한 '죄책감'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심지어 자신의 겪는 괴로움을 해소(?)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희생 당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변명' 같지도 않은 핑계를 늘어놓고 있다.

그리고 이런 모든 '불편함'을 정신지배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노라고 너무 쉽게 퉁쳐버리고 말았다. 퇴마사들이 단 한 명의 무고한 희생자가 나오지 않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을 대신 담보(?)로 내놓는 명장면을 선보인 이우혁 작가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그런 작가가 15년 동안이나 마음속에 품고 있었던 역작이 이따위 '피에 굶주린 괴물'을 등장시킨 범죄소설이었다니 대단히 실망스러울 따름이다. 미완에 그친 다른 소설과 다르게 <바이퍼케이션 : 하이드라>는 비록 종결을 하며 이야기를 마무리시켰지만, 주요 등장괴물(!)이라고 할 수 있는 가르시아 형사와 헤라클레스가 온전히 살아 있었다. 그리고 손버그 에이들 요원은 비록 헤라클레스의 사주에 의해 온몸이 칼과 둔기로 난자 당하고 시신을 불태워 죽인 것으로 설정(?)했지만, 끝내 그의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여운을 남겨 놓았다. 유능한 FBI 요원이면서 '천재 프로파일러'로 등장하지만, 그에겐 모든 것을 잊지 않는 뛰어난 '기억력'을 가지고 있고, 초급자 수준이라고 하지만 '최면술'도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그가 비록 최후를 맞이하긴 했지만, 끝내 죽음에 이르지 않게 된 '극적인 사연'이 나오지 말라는 법도 없는 듯 싶다. 그런 연유로 이 소설에는 '후속작'이 나올 듯 싶다. 아마도 제목은 <바이퍼케이션 : 헤라클레스>가 되지 않을까 싶다. 기왕 헤라클레스가 살아남았고, 그녀가 영웅으로서 해야 할 과업은 아직도 10가지나 남았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네메아의 사자'였고, 두 번째는 '레르나의 히드라'였으니, 이제 겨우 2개를 해결했을 뿐이다. 나머지 10개를 한 큐(?)에 해결할지, 아님 가르시아와 에이들이 헤라클레스의 또 다른 범죄를 저지하고 처단할 수 있을지...그런 이야기가 펼쳐질 것으로 짐작한다.

그러나 무려 15년이나 침묵하고 있는 작품을 다시 꺼내 들지 회의가 들기도 한다. 비록 <퇴마록>의 부활을 선언한 이우혁 작가지만, 과연 <바이퍼케이션>의 뒷이야기를 다시 꺼낼 수 있을까? 재미를 느낄 수는 있었지만, 너무 끔찍한 범죄만을 나열한 듯한 느낌은 다시 살려내지 않았으면 싶다. 차라리 마동석의 <범죄도시>처럼 악당을 때려잡는 결말이라도 참고 했으면 싶다. 그래도 너무 폭력성이 짙다는 소문에 나는 <범죄도시>를 아직도 보지 않고 있다. 살인, 폭력, 범죄 따위를 아무리 아름답게 포장해봐야 '나쁜 것'이지 않느냔 말이다. 나쁜 것은 절대 멋지게 포장하면 안 된다. 그저 떼찌떼찌 해줘야 마땅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바이퍼케이션 2 - 하이드라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0년 8월
평점 :
절판


<바이퍼케이션 2 : 하이드라>  이우혁 / 해냄 (2010)

[My Review MMCXL / 해냄 7번째 리뷰] '분기점(바이퍼케이션)'이라는 뜻을 1권에서 겨우 이해를 했는데, 2권으로 들어가면서부터 '진도'가 엄청 빠르다. 심지어 '헤라클레스의 정체'까지 가르시아와 에이들 수사팀에 의해 다 밝혀지고 말았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악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하이드라'라는 존재까지 거의 근접했을 뿐만 아니라 완전범죄를 저지르던 살인광 '뱀파이어의 진면목'을 다 까발려버리는 굉장한 속도감으로 이야기를 전개시키고 있다. 이런 식이면 3권에서 이야기할 것이 남아 있는지 의심이 될 정도다. 그렇다면 이우혁 작가는 '할 이야기'가 더 남았다는 것인데, 여기에 '반전'까지 의도했다면, 아마도 '헤라클레스의 정체'를 다시 정립해야 할 여지가 남았거나, '하이드라'라는 존재에 대해서 다시 파헤쳐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수사 전체를 허탕치게 만들고 '재수사'를 해야만 하는 플롯을 이우혁 작가는 <퇴마록>에서도 종종 써먹었으니까 말이다. 아무튼 <바이퍼케이션>의 재미는 점점 더 깊이 빠져들게 만들고 있다. 이제 결말까지 딱 한 권이 남았다는 사실이 아쉽지만 말이다.

2권의 줄거리는 FBI 천재 프로파일러 에이들이 '범죄 프로파일링'을 하면서 이끌어가는 것이 주요하다. 강력계 형사반장으로 등장하는 1권에서 크게 활약했던 가르시아는 거의 조연급으로 움직이고 있을 정도로 내쳐지고 말았다. 그리고 본격적인 수사는 '뱀파이어 소탕 작전'을 위해서 전심전력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뱀파이어가 저지른 범죄는 '완전범죄'에 가깝기 때문에 도무지 '단서'를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그의 범죄를 따라한 '군터'라는 모방범을 뒤쫓으면서 뱀파이어를 잡기 위한 함정수사를 시작했는데, 오히려 뱀파이어가 아닌 뱀파이어의 '다음 희생자'를 수사하는 격이 되었다. 바로 '헤라 헤이워드'라는 아름다운 금발머리를 한 백인여성을 취조(?)하듯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가르시아와 에이들은 뜻밖의 인물과 조우를 하게 된다. 바로 자칭 '헤라클레스'라고 자신을 밝힌 아리따운 여성을 말이다. 이미 1권에서 독자에게는 정체가 밝혀진 존재이기 때문에 다들 아실 것이다. 바로 '헤라 헤이워드'가 '헤라클레스'였던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가르시아는 깜짝 놀란다. 그리고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지만, 웬일인지 에이들은 차분했다. 아니 처음엔 의아했지만 점점 '사실'이 밝혀지고 있다는 듯 침착한 표정을 짓게 된 것이다.

사실 여성이 자신을 '남성성의 상징'으로 보여지는 '영웅 헤라클레스'라고 밝히는 것이 이상한 일이 당연하지만, 에이들은 그것이 맞을 수도 있음을 확신한다. 왜냐면 자신의 기억에 심한 '왜곡'이 일어났음을 알아챘고, 그 왜곡을 일으킨 기이한 존재가 바로 눈앞에 있는 '헤라클레스' 때문이라서 설명하는 것이 훨씬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물론 가르시아는 엄청 혼란스러워한다. 여성이 스스로 자신을 '남성'이라고 말하고 있으니 어찌 그러지 않겠는가? 그런데 에이들은 다르게 생각했다. 이런 이상한 일이 자연스럽지 않다면 자신이 겪고 있는 '기억의 왜곡 현상'을 설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상하지만 맞다고 여길 수밖에 없는 '사실'을 믿게 되고, 헤라클레스의 이야기에 빠져들게 된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또 믿을 수 없는 '하이드라의 존재'가 드러나게 된다. 자칭 헤라클레스라고 주장하는 여성은 바로 그 '하이드라'를 없애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열두 가지의 과업'을 해내야만 하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음을 이야기한 것이다. 에이들은 이것을 곧바로 믿을 수가 없었다. 그냥 겉으로만 봤을 때에는 '그저 정신이상자의 궤변'이라고 단정 내리고 가까운 정신병원을 소개해주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에이들은 그럴 수 없었다. 왜냐면 자칭 '헤라클레스'라고 주장하는 아리따운 여성을 노리는 범죄자 '뱀파이어'를 잡을 수 있는 유일한 단서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뱀파이어는 여성만을 상대로 범죄를 저지르고, 오직 여성의 피만 깔끔하게 빼내는 것으로 범죄를 종결 짓는 특이한 연쇄살인범이었다. 그리고 '단서'를 전혀 남기지 않아 '완전범죄'를 해왔던 것이다. 여성을 살해하면서, 고문을 한다거나, 강간을 한다거나, 변태적인 행위를 하는 등의 행위를 일체하지 않고, 그저 여성의 피만 빼내고 '다른 흔적'은 전혀 남기지 않기 때문에 좀처럼 잡을 수 없는 연쇄살인범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에이들은 이렇게 완전범죄를 저지를 수 있는 연쇄살인범은 '경찰관계자'이거나 'FBI 내부소행자'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비밀리에 수사를 진척시켜 왔지만, 유력한 용의자로 확신한 사람을 최종적으로 확정지으려 '알리바이'를 증거로 삼으로 했으나, 유일한 단서가 될 수 있는 '알리바이'마저 다른 사람의 증언으로 인해 번번이 깨어지고 마는 철두철미한 범죄자였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범죄자를 잡을 희망이 생겼다. 그 뱀파이어가 노리는 새 희생자가 바로 눈앞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이들은 망설였다. 헤라클레스를 뱀파이어를 잡는데 이용하기에는 너무도 무서운 존재였기 때문이다. 최면술은 아니었지만 단순한 말 한마디로 자신의 기억마저 '왜곡'시켜버리고 '그녀의 꼭두각시'가 되어 이용 당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엄청난 존재를 연쇄살인범을 잡는데 '미끼'로 던질 수 있을까? 감히 말이다. 그런데 의외로 헤라클레스가 먼저 에이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헤라클레스가 잡고 싶은 것은 '하이드라'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헤라클레스가 하이드라를 잡는데 '에이들의 도움'이 필요한 것처럼, 에이들이 뱀파이어를 잡는데 '헤라클레스'가 필요했던 것이다. 물론 이를 대놓고 '거래'로 삼지는 않았다. 아니 삼을 수 없었다. 헤라클레스가 먼저 에이들과 가르시아의 감정 밑바닥에 있는 '심연의 악마'를 끌어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나쁜 마음'을 억누르고 있던 '이성의 끈'을 살짝 놔주는 꼴이 되었다. 그래서 가르시아는 의외의 폭력성을 드러내며 '단순범죄 가담자'를 죽을 때까지 때려서 죽여버리는 일을 자행하게 만든다. 형사라는 막중한 의무감에 절대로 한 적이 없는 '분노'를 그냥 아무런 필터도 없이 그냥 떠내서 폭발시킨 것이다. 에이들도 자신의 누이를 죽게 만든 범죄자를 끝내 찾아내서 복수를 자행한 사실을 여과없이 폭로하게 만들었다. 이게 헤라클레스가 가지고 있는 힘이었다. '정신지배 능력'이라고나 할까? 헤라클레스가 원하는 것이라면 무슨 일이라도 '하게끔' 만드는 무서운 힘이었다.

그렇다면 이 세 사람의 운명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 걸까? 아직 이야기는 본격적으로 시작하지도 않은 셈이다. 언제나 서론이 장황한 이우혁 소설답다. 모든 범죄의 근원일지도 모를 '하이드라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아직까지 '형체'나 '실체'를 드러내지 않은 하이드라는 어떤 모습으로 정체가 밝혀지게 되는 걸까? 과연 3권에서 속시원히 밝혀지긴 하는 것인지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그가 '완결되지 않은 소설'을 많이 쓰고 있었기 때문에 생긴 '불신'이다. 일단 <바이퍼케이션>은 '완결'된다는 소식까지만 확인한 상태인데, 3권에서 완결되긴 하지만, 그 '뒷이야기'가 남아서 아주 긴 여운을 남기고 있는지, 그것이 궁금해진다. 왜냐면 <퇴마록 외전 3권>에서 '못다한 이야기'를 다시 연재할 수도 있다는 짤막한 귀띔을 해놨기 때문이다. 그 귀띔이 그저 '뉴 퇴마록'을 쓰겠다는 다짐으로 그칠지 모를 일이지만, 암튼 그 덕분에 나도 못다 읽은 이우혁의 소설을 뒤늦게나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벌써 연말이다. 연말이 다 지나기 전에 서둘러 읽어보려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 - 개정판 한빛비즈 교양툰 36
김도윤(갈로아) 지음 / 한빛비즈 / 202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만화로 배우는 곤충의 진화>(개정판)  갈로아(김도윤) / 한빛비즈 (2025) [초판 (2018)]

[My Review MMCXXXVIII / 한빛비즈 175번째 리뷰] '갈로아'의 교양웹툰에 담긴 핵심 포인트는 바로 '진화'다. 그가 <만화로 배우는> 시리즈로 '곤충의 진화(2018)'와 '멸종과 진화(2024)', 그리고 이 책 '개정판'까지 총 3권의 책에 담긴 공통의 메시지도 다름 아닌 '진화'였다. 이토록 진화에 진심인 과학자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강조하고 또 강조하는데, 여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건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화'를 잘 모르거나,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엉뚱한 방식으로 진화를 마구 갖다 붙여서 찰스 다윈이 말한 '진화'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주장을 하면서 찰스 다윈을 폄훼하는 일까지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진화론'과 곤충은 무슨 관계라도 있는 것일까? 당연한 소리! 진화를 모르면 곤충의 생태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아니 지구상에 살고 있는 모든 생물(인간 포함)의 기본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한다. 그렇다고 해서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을 꺼내 읽으라는 얘기는 아니다. 진화론에 관한 몇 가지 상식만 알고 있어도 충분하니, 갈로아의 교양웹툰을 다시 한 번 정독..쿨럭쿨럭

암튼, 진화론의 상식 첫 번째는 바로 '진화에는 의지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진화'한다는 의미는 이전보다 훨씬 더 좋아진다는 것으로 이해하기 십상이다. 특히, '사회진화론자'들이 그따위 망발을 일삼았는데, 적어도 찰스 다윈은 그딴 소리 한 적도 없으니 오해하지 말길 바란다. 과학계에서 '진화'를 언급할 때에는 '나아가는 방향성'이 보일지언정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한 개체의 의지'따위는 전혀 없다는 것을 명심하면 된다. 그렇기에 '좋은 방향'으로 진화를 하면 번성하고, '나쁜 방향'으로 진화를 하면 절멸하는 식으로 진화를 설명한다면 한마디로 엉터리라고 얘기해도 된다. 정리하면 '진화의 방향성'은 무작위다. 왜냐면 생물의 진화는 대개 '변이'로 이루어지는데, 그 변이가 대개는 '돌연'적으로 발현하기 때문에 '돌연변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런 '돌연변이'에 그 어떤 생물이 '의지'를 품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그래서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양한 모습으로 태어난 종(種)이 주어진 자연환경에서 살아남고, 살아남은 종이 또 후손을 남기며 세대를 거듭하다 보면, 종마다 '특정한 형질'이 누적되는데, 이 형질은 주어진 환경이 다르면 '같은 종'일지라도 '다른 형질'을 보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갈라파고스 군도 여기저기에 살던 '핀치 새'가 섬마다 '다른 모습의 부리'를 갖게 된 것에서 진화론의 증거를 찾아낸 것이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주어진 환경'이다. 각각의 종마다 천차만별의 진화를 거치는 근본적인 원인이 바로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환경에 잘 적응한 종은 살아남고, 그렇지 못한 종은 얄짤없이 죽고 만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연히 '살아남은 종'만이 후손을 남길 수 있고, 살아남은 종의 '형질'만이 후손에게 물려지게 된다. 바로 이 형질이 '유전'이 되고 그 '방향'으로 진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찰스 다윈은 이것을 '자연선택'이라 말했다. 훗날 진화론을 지지하는 이들이 더 명확하게 '적자생존'이라는 명칭을 덧붙였고 말이다. 여기에 '생물의 의지' 따위는 없다. 따라서 곤충이 생존에 유리한 쪽을 '선택'하기 위해서 '날개'를 만들어 붙이거나, '집단사회'를 이루거나, '꿀' 같은 영양가 높은 먹이만을 독점하겠다는 의지가 발현하여 '그런 특정 방향'으로 진화를 하려고 노력하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그저 '우연히' 날개가 있는 방향으로 진화를 한 생물이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해서 더 많이 살아남아 후손을 남겼을 뿐이고, 개별적으로 살기보다 '집단사회'를 이루며 군집생활을 한 종이 '주어진 환경'에 잘 적응해서 '유전자'를 남길 확률이 더 높았을 뿐이란 말이다.

따라서 진화를 '진보'로 잘못 이해를 하면 안 된다. 진화는 절대로 '좋은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진보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를 잘못 이해하는 순간 '우월주의'에 빠져들어 잘못된 사고관을 가질 위험성을 낳게 된다. 과거 제국주의 시절이 딱 그랬다. 인류를 '만물의 영장'으로 인식하면, 자칫 '인간 이외의 다른 생물'을 낮잡아 보게 되고, 고등동물과 하등동물로 생물을 구분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 있다. 우리가 '곤충'을 하찮게 인식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서 기원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구의 주인을 '인간'으로 인식하지만, 단순히 '숫자'로만 비교해도 인간은 고작 80억인데 비해서 곤충은 100경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짐작한다. 그나마 우리가 눈여겨 보고 '이름'을 붙인 곤충은 고작해야 수천 종에 불과하며 여전히 '발견'조차 하지 못한 종이 수백 만 종이 넘을 것으로 예상한다. 심지어 곤충은 '전지구 곳곳'에 서식한다. 인간이 살기 힘든 '극지방'이나 '사막지대', '고산지대', 심지어 '바다속'에도 살고 있는 곤충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지구상에 살고 있는 종의 70%가 곤충이다. 그러므로 외계인이 지구를 찾아왔을 때 '지구의 대표'를 인간으로 보지 않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말도 나올 정도다. 곤충은 그만큼 많다.

이런데도 '곤충'을 낮잡아 볼 것인가. 곤충에 대해서 더 많은 지식을 갖는 것에 자긍심(?)을 가져도 좋을 것이다. 왜냐면 인류에게 도움이 되는 '핵심 기술' 가운데 곤충에게서 배운 것들이 참 많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하나만 이야기하더라도 깜짝 놀랄 것이다. 인간은 하늘을 나는 법을 바로 '곤충'에게서 배웠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비행기, 헬리콥터 등은 '곤충의 날개'에서 힌트를 얻어서 더 멀리, 더 높이, 더 빠르게 날 수 있는 비행기와 헬리콥터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지구상에서 '최초'로 하늘을 지배한 생물이 바로 곤충이다. 그러니 곤충의 날개를 연구하는 것으로 인류는 하늘을 날고 싶은 염원을 이룰 수 있게 된 셈이다.

그리고 인류는 수많은 동식물을 먹거리로 삼고 있고, 가축을 기르고, 곡물을 재배하고 있지만, 기후위기로 인해 앞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먹거리를 원하는 만큼 생산해낼 수 없을 지도 모를 위기감이 급상승하고 있다. 이런 위기를 헤쳐나가기 위한 '미래식량'으로 각광을 받고 있는 것이 다름 아닌 '곤충'이다. 지구에 다섯 번의 '대멸종'이 왔을 때에도 꿋꿋하게 살아남은 생물이 바로 '곤충'이며, 곤충은 그 자체로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 될 수 있다. 그러니 이를 '안전하고 맛있는 식량'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을 연구중이며, 실제로 지금 현재로 많이 섭취하고 있다. 운동선수들의 '근육보충제'로 자주 먹는 '단백질 파우더'의 재료에 식용곤충을 활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까지는 '곤충'에 대한 비호감(주로 혐오감)이 많은 까닭에 주원료를 직접적으로 홍보를 하지 않고 있지만, 앞으로 가까운 미래에 먹거리 위기가 치솟게 된다면 각종 곤충으로 요리 경연을 여는 예능프로그램이 나와서 큰 인기를 끌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의 저자 갈로아도 다양한 곤충을 시식해보고 그 맛을 평가하여 점수를 매기는..쿨럭쿨럭

끝으로 갈로아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드립력'일 것이다. 이 책에서도 진화를 '진보'로 오해하는 무리를 6500만 년 전에 멸종한 공룡에 빗대어 표현하고, 곤충의 성생활(?)을 이야기하면서도 여러 'CF광고'나 '일본 애니메이션'의 캐릭터를 등장시켜서 개그적 요소로 웃음을 유발하는 방식을 선호(?)하고 있는데, 그 가운데 백미는 절제된 미학으로 연출된 '19금 색드립'이다. 결코 야한 이미지를 연출하거나 노골적인 성묘사를 하지는 않는데, 그런 걸 연상하지 않고서는 절대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을 연출하며 참을 수 없는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러스함이 갈로아만의 매력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뭐, 가끔은 '관종이냣?' 싶을 정도로 선을 넘는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 이 책은 갈로아가 쓴 책이야. 갈로아는 나쁜 X는 아니니까. 응, 오해는 하지 않을게" 이 정도로 넘어갈 수 있었다. 갈로아는 그 정도로 실력 있고 잘난 곤충학자(?)니까 ㅋㅋ(에필로그 맨 마지막 문구(349쪽)를 읽으면 이해가 될 것이다.

어릴 적에 곤충은 '친구'였다. 방과후에는 '채집'을 빙자하고 숲으로, 들로 뛰어놀기 바빴고, 심지어 개울가 돌멩이를 뒤집고, 운동장 모래밭을 파면서 수많은 곤충을 머리가슴배로 나눴다(!) 붙였다(?) 하면서 놀았다. 그러다 중학생 때 '파브르' 책을 읽으며 곤충에 대한 상식을 넓혀 갔다. 그리고 으른이 된 지금은 갈로아의 교양웹툰을 읽으며 '곤충에 대한 지식'을 쌓아가고 있다. 그리고 가까운 미래에 '곤충'은 인류에게 무한한 혜택을 줄 것이다. 단순히 '식량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곤충의 생태를 연구하면 할수록 우리는 '유익한 지혜'를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시례로 '건축설계 분야'에서 무리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벌과 개미(흰개미)의 서식지는 좋은 연구 대상이라고 한다. 또한 곤충이 갖고 있는 '외골격'은 크기가 작은 분야에서만큼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밖에도 곤충의 행동패턴을 연구하고, 곤충이 뿜어내는 화학물질 따위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지금도 굉장히 많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가 곤충에 대해 조금 더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필요한 때가 아닐까 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