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4 - 완결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조은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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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IX / 문학동네 24번째 리뷰] 그간 마스다 미리의 만화책을 몰입해서 읽어보았다. <내 누나 시리즈>를 시작으로 <수짱 시리즈>, <사와무라 씨 시리즈>, <주말엔 숲으로>, 그리고 <치에코 씨 시리즈>까지 국내에 번역된 만화책의 상당수를 읽은 것 같다. '에세이' 책들도 상당히 많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글쎄..읽기 시작한 김에 독파해보려 한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 있다. 마스다 미리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 도무지 감이 오질 않는다. 그냥 '여자들의 평범한 수다'를 다루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뭔가 '말속에 뼈'를 감추고 있는 것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그도 아니면, 내가 '여자'가 아니라서 '여성작가'의 주제의식에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부쩍 의심이 들기 시작하기도 했다.

그 때문인지 '마스다 미리' 작가에 대한 호불호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 크게 실망한 것은 분명 아닌데, 그렇다고 딱히 내가 좋아라하는 내용의 책도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딱히 일본작가의 책을 선호하는 편이 아닌 것은 사실이다. 그 유명한 무라카미 하루키,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책을 단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주 안 읽은 것도 아니고 시오노 나나미, 다치바나 다카시 작가의 책들은 '전작(全作)'을 거의 다 읽었을 정도이고 웬만한 책들은 '소장'까지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나에게 꽂힌 작가'는 어김없이 송두리째 다 읽어 재끼는 습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 습성 덕분에 이번엔 '마스다 미리'가 걸려들었다. 그런데 어느 작가든 이만큼 읽어재끼면 '이런 류의 작가구나'하는 느낌이 들곤 하는데, 마스다 미리는 좀처럼 갈피를 잡지 못하겠다. 그냥 여성 특유의 잡담인 것 같기도 하고, 대수롭지 않은 수다속에 뭔가 철학적 사유를 담아 놓은 것 같기도 하고, 그도 아니면 사회문제에 대한 나름의 '깊은 고찰'을 담아 놓은 것도 같은데, 그런 꼬투리를 잡고서 뭔가를 써보려고 하면 얼마 못가서 흐지부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묘하게 계속 그녀의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고 있으면, 뭔가 '친숙한 느낌(?)'을 받고 있다는 느낌도 얼핏 들곤 한다. 어쩌면 초식도 아니고, 육식도 아닌 '잡식성'과 일맥상통한 내 리뷰의 성향과 비슷하기 때문일까? 한 우물만 파면 그래도 뭔가 '깊이'라도 자랑할 만할텐데, 수십가지 종류의 책들을 두루두루 읽고 써온 탓에 이도저도 아닌 '잡탕맛 리뷰'에 그치고 마는 품이 딱 그런 느낌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야기가 조금 풀리긴 하다. '도플갱어 전설'처럼 나 자신과 꼭 닮은 것을 마주하면 긍정적인 느낌보다 부정적인 느낌이 앞서는 것과 같은 이치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면 나는 '마스다 미리의 책'을 아주 좋아할 수 없다.

헛소리는 이쯤하고, 어느 덧, <치에코 씨 시리즈>도 완결편을 독파했다. 딱히 소감을 말하자면, 심히 부러웠다는 점이다. 나도 결혼생활을 한다면 '사쿠짱과 치에코 씨'처럼 알콩달콩하면서 살고 싶기 때문이다. 치에코 씨처럼 직장 동료와 식사를 하면서 '배우자 자랑'만 늘어놓고 있는 나를 상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험담으로 시작하지만 다 듣고 나면, 은근 자랑질만 실컷 한 셈이 되는 그런 이야기를 나는 정말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결혼은 미친짓'이라는 굳은 신념을 내세우는 선배들도 많이 보았지만, 그들도 결국엔 마누라 자랑, 자식 자랑을 하는 모습으로 귀결되곤 했기 때문이다. 그런 부러움 덕분이었는지 '사쿠짱의 현명함'과 '치에코 씨의 귀여움'이 정말이지 보기에 좋았다.

물론, 간혹 투닥거리는 모습이나 눈물을 찔끔거리고, '만약에~'라는 이야기로 시도때도 없이 귀찮게 하는 모습을 보일 때면 질색하긴 했지만, 그런 모습을 보이고 난 뒤에는 어김없이 '하트 뿅뿅'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작가의 배려(?) 덕분에 질식할 것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딱 한 가지는 씁쓸했다. 치에코 씨가 '죽음'을 이야기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대화를 이어나가는 모습은 좀 거북했다. 물론 치에코 씨는 그런 죽음의 이야기에서조차 "내가 먼저 죽더라도 사쿠짱은 오래 살어"라는 사랑하는 마음에서 비롯되어 꺼낸 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처럼 불쑥불쑥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는 40대 부부에게는 그닥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고독사 문제'가 심각하다고 할 정도라고 한다. 초고령사회로 진입함과 동시에 '빈집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고, '돌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로봇도우미가 등장할 정도라고 하니, 매우 심각한 수준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닌 듯 싶다. 그런데 치에코 씨가 말하는 '죽음'은 그런 류의 문제의식에서 나온 발언이 아니라는 점이다. 치에코 씨는 단순히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맞이하는 슬픔'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으니, 사쿠짱은 자신보다 더 오래 살았으면 좋겠다. 자신은 그런 슬픔이나 아픔, 고통을 감당하기 힘들 것 같으니 그냥 내가 먼저 죽는 것을 택하련다. 이런 식으로 가볍게(?) 죽음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에코 씨의 말속에는 뼈가 없다. 그저 듣는 사람을 황당케 하거나 당혹스럽게 만들 뿐이다.

그리고 '미니멀 라이프'를 실천하는 것은 좋은데, 남편의 물건까지 싹쓸어서 다 갖다 버리고 싶어하는 것은 좀 그랬다. 내 성격이 물건을 잘 쌓아놓고 잘 버리지 못하기 때문에 집안 곳곳에 오래된 물건들이 먼지를 켜켜이 쌓은채 자리보전하고 있다. 그런데 사쿠짱은 그런 정도까지는 아니다. 그저 물건 하나마다 '추억'을 간직하고, 그 추억을 소중히 여기며, 무엇보다 '메모'를 대신하는 실용적인 면까지 있다. 그런데 치에코 씨는 그런 것을 결코 용납치 않았다. 집안에 물건이 쌓이는 꼴은 절대로 못 봐준다는 식으로 보이는 족족 다 갖다버린다. 이런 사람들이 돈 씀씀이도 헤픈 편이다. 자질구레한 물건조차 남기질 않으니 '적은 쓰임새'가 필요할 때에도 쇼핑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결국 '푼돈'으로 나가는 비용조차 차곡차곡 쌓이면 결국 '목돈'을 쓸 수밖에 없게 된다. 결론적으로 '미니멀 라이프'를 잘 실천하려면 '정리정돈'을 잘하면 된다. 그런데 치에코 씨는 정리정돈을 잘하는 것보다 무조건 '버리는 쪽'을 선호하고 있다. 이건 사쿠짱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그래도 <치에코 씨 시리즈>는 다른 시리즈보다 읽기에 수월했다. <수짱 시리즈>처럼 '40대 독신여성'이 주인공을 내세워서 결혼과 임신, 출산, 육아에 대한 두려움과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보다는 '40대 부부의 알콩달콩한 일상'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더구나 오직 '두 사람'에 대해서만 이야기를 끌어가다보니 '시댁과 처댁으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언급도 없어서 고민이 덜했고 말이다. 다음엔 또 어떤 작품으로 마스다 미리를 만나게 될까? 일단 아무런 기대를 하지 않으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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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3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조은하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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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VI / 문학동네 23번째 리뷰] 문득 원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泣き虫チエ子さん'(울보 치에코 씨)란다. 작품 속에서도 치에코 씨는 많은 장면에서 눈물을 흘리곤 한다. 이를 보는 남편 사쿠짱은 속으로 '또 눈물을 흘리는구나'하며 아내를 달래는 모드로 잽싸게 전환한다. 이런 부부의 일상을 '소소한 행복'이라고 뒤쳐낸 것이라고 하면 한국 독자들은 꽤나 의아해할 것이 틀림없다. 한국인의 정서상 눈물을 짜내는 장면은 그리 긍정적으로 다가오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여자의 눈물'은 말이다.

남자들은 '여자의 눈물'에 많이 약하다. 우는 여자 앞에서 남자는 '강한 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니 심할 때는 옴짝달싹조차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기도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여자가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종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왜 우는 것인가? 그나마 '감정적인 원인' 때문에 우는 경우라면 둔한 남자라도 얼추 짐작할 수는 있다. 남자도 '감정'은 똑같이 느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성적인 판단'을 하면서도 눈물을 줄줄 흘리는 여자는 도무지 감당이 안 된다. 남자는 '이성적인 모드'일 때는 냉철해지고 날카로워지기 때문에 울기보다는 화를 내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간혹 '이성적인 대화'를 하다가 우는 남자가 있다면, 남자들은 호되게 혼쭐이 나거나 놀림감이 되기 십상이다. 그래서 어릴 적부터 남자는 '눈물, 울음'을 부정적으로 여기고, 심지어 '남자답지 못한 짓'으로 인식하여 점점 더 눈물을 매말려 갈 뿐이다. 그래서 남자들은 '우는 여자' 앞에서 어떡할 줄 모르고 당황해 하는 것이다. 남자끼리 있을 때처럼 '놀림'을 해서도 안 되겠고, 더구나 '폭력'은 더더군다나 할 수 없고, 눈물을 멈추게 하려고 '화'를 낼까 잠시 생각하지만, 결국 이도저도 할 수 없는 난감한 상태가 되어서 대개는 '짜증'을 내곤 한다.

그런데 이 책에서 남편인 사쿠짱은 눈물 많은 아내 치에코 씨를 그냥 '방치'한다. 신경 쓰지 않고 '외면'한다는 게 아니라 그냥 울고 있는 아내가 충분히 울 수 있도록 편하게 해준다는 말이다. 남편들이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자면 '다 울 때까지 기다려 준다'는 말이다. 물론 매번 그런 것은 아니다. 여자가 눈물을 보일 때, 재빨리 사과하거나 달래주어야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를 기막히게 알아차린 사쿠짱은 '파블로프의 개'가 무조건 반사를 보이는 속도보다 빠르게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라고 '인정'해버린다. 그러면 가정의 평화가 찾아오며, 울던 아내가 맥심기관총(분당 100발의 속도)보다 빠른 속도로 자신이 눈물을 흘리고, 울고 있는 까닭을 다다다 쏟아내기 시작한다. 이때 사쿠짱은 영리하게(?) 자신의 행동에 대한 '변명'을 늘어놓지 않는다. 물론 속으로는 '불공평해'라고 생각하지만, 우는 아내 앞에서는 절대 그런 말을 꺼내지 않는다. 그런 행동은 아내의 눈물을 멈추게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 남자들은 '눈물'을 부정적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에 우는 여자 앞에서 당황해 하기도 한다. 그런데 절대 당황할 필요가 없다. 여자의 눈물은 오히려 '긍정적'인 경우가 꽤나 많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감동의 눈물'인 경우인데, 기쁠 때도 눈물을 흘리는 것이 여자다. 그럴 때 눈치 없이 "왜 울어?"라고 묻지 말길 바란다. 그냥 눈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려주면 된다. 다시 말해, 감동의 여운이 다 지나갈 때까지 그저 든든하게 곁에 있어주기만 하면 된다. 때로는 '모른척'하고 가만 있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정작 '부정적'인 의미로 눈물을 흘릴 때에는 여자들도 가만 있지 않기 때문이다. 속에 있던 말을 다 꺼내놓으며 화풀이 하듯 쏟아낼테니, 그때에도 그저 기다리면 여자가 화가 난 이유를 말해줄 것이다. 오히려 부정적인 화풀이인 경우에 여자는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 그럴 땐 잽싸게 도망가는 것이 훨씬 낫다.

한편, 남자들이 굉장히 약오르는 경우도 있는데, 여자들은 자신들이 불리할 때 '눈물'을 흘린다. 남자들이 우는 여자 앞에서 굉장히 약해진다는 것을 간파한 약싹빠른 여자들의 '회피수단'인데, 이럴 때에도 기다려야 한다. 화를 내고 따지더라도 일단 '눈물'이 마르고 난 다음에 해야 남자들에게 억울한 일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장면'이 단 한 번도 나오지 않는데, 작가가 '여성'이기 때문인 것으로 짐작한다. 이런 여우짓을 하는 여자들은 대개 '미녀'들만 하는 것으로 인식되지만, 이는 '드라마'가 만든 환상일 뿐이다. 세상 모든 여자들은 본능적으로 '눈물'을 이용한다. 외모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주먹이 마동석만한 여자도 이런 여우짓을 하니 절대로 넘어가지 말고, 피하지도 말고, 그저 눈물이 마를 때까지 기다리면 된다.

그리고 이런 여우짓은 단 둘이 있을 땐 잘 쓰지 않는다.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유용하기 때문이다. 주위에서 '여자를 울리는 나쁜 남자'라고 오해하기 딱 좋기 때문에, 주위에 보는 사람이 많을 경우엔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안으며 토닥토닥 달래주는 척하면 좋고, 안아주는 걸 거부한다면 최대한 자연스럽고 천천히 그 자리를 이동하며 걸으면 된다. 단, 여우짓이 아니라 진짜 화를 내면서 우는 경우엔 잽싸게 도망가라. 그건 남자인 네가 여자를 울린 장본인일 경우가 10000%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살고 싶으면 '달려라 하니'보다 빠른 속도로 도망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이상, 모태쏠로인 남자가 쓴 '우는 여자 대처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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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통 만화 삼국지 10 - 천하통일
나관중 원작, 천웨이동.량샤오롱 글.그림 / WISDOM(위즈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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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V / 위즈덤(WISDOM) 10번째 리뷰] 또 하나의 <삼국지>를 마무리 한다. 이번엔 '천하통일'이란 제목으로 마무리하련다. 중국사에서 '위진남북조 시대'다. 후한의 헌제는 조조의 아들 조비 때에 이르러 황제의 자리를 선위하는 형식으로 평민으로 강등되고 죽임을 당한다. 이로써 명실공히 '한나라'는 멸망하고 새롭게 '위나라'가 세워진 것이다. 허나 위나라도 오래가지 못했다. 사마중달(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에 의해서 위나라를 멸하고 진(晉)나라를 세웠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진나라'가 촉과 오를 무너뜨리고 천하를 제패하며 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것이다. 우리가 즐겨 읽는 <삼국지연의>의 마무리는 '제갈공명'이 오장원에서 생을 마감하면서 끝을 맺는 것이 대부분인데, 실제 역사는 공명의 사후에도 지난하게 이어졌으며, '위촉오' 세 나라가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이루며 각 나라마다 '내부문제'를 수습하기 위해 부던히도 애를 쓰지만, 결국엔 가장 막강했던 '위나라'가 가장 먼저 내부 문제(사마염의 황위찬탈)를 수습하면서, 유약한 모습을 보이던 촉나라부터 정벌하고, 손권의 죽음으로 국력이 많이 약해진 오나라도 끝내 멸망하여 '중원'은 다시금 통일국가를 형성하고 하나로 뭉칠 수 있었다.

이렇게 분열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통일이 되는데 꼬박 100여년이 걸렸다(대략 180~280). 후한 때 '황건적의 난'과 '십상시의 난'으로 무너질대로 무너진 한황실을 수습하고자 수많은 군웅들이 할거하고서 서로 간 힘겨루기를 통해 쟁패의 세월을 보내고서 위의 조조, 촉의 유비, 그리고 오의 손권으로 천하가 셋으로 정립되었다가 다시금 '진나라'로 천하통일을 하기까지 수많은 영웅들이 등장했다가 사라진 이야기가 <삼국지연의>(이하 <삼국지>)라는 소설에 오롯이 남겨진 것이다.

그럼 우리가 <삼국지>를 읽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한때는 <삼국지>를 읽지 말자는 주장도 있었다. 천하가 혼란에 빠졌을 때 오직 '힘의 논리'로 영웅을 평가하고, '전쟁의 승패'로 정의를 가르는 '부정적인 영향'을 오늘날의 청소년들에게 끼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주장이었다. 솔직히 나도 이런 주장에 '동의'했었다. 전세계적으로 전쟁을 종식시키고 평화를 외치던 21세기 초엽이었기에 <삼국지>는 낡은 이념에 갇힌 나쁜책으로 오인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책이 '중국의 고전'이라는 점이었다. 세계적인 고전소설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기왕이면 '우리의 고전'을 읽힐 것이지 왜 남의 것부터 읽히려고 하는 것은 옳은 방향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 주장이었다. 이 역시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어느 정도 수긍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주장들이 쏙 들어갔다. 여전히 <삼국지>는 청소년 필독서이고, 성인들도 수 차례 읽고 또 읽는 책 가운데 으뜸이었다. 왜냐면 <삼국지>만큼 고전이 담고 있는 지혜를 방대하게 포함하고 있는 고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살면서 <삼국지>를 세 번 읽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할 정도로, <삼국지>에는 등장인물만 천 명이 훌쩍 넘어가고, 그들의 삶 하나하나에 '교훈'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천 개가 넘는 교훈'이 담긴 책인데 읽지 않으면 손해인 셈이다.

일례를 들면서, '제갈량과 사마의의 대결'속에서 교훈을 찾아보자. 10권의 주된 내용은 제갈량의 출사표(다섯 차례의 북벌)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물론 이 부분만 따로 분류해도 '책 2권 분량'이기 때문에 정녕 어마어마한 부분이지만, 만화책의 형식상 아주 간략하고 속도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 이 책 <중국정통 삼국지>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핵심파악'을 전혀 놓치지 않고 있어서 아무런 문제가 없을 정도다. 오히려 '동양화 속 여백의 미'를 보여주려는 것처럼 방대한 역사의 사건 가운데 '딱 하나의 점'을 찍듯 표현했지만, 그 점만으로도 모든 줄거리를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이다. 허나 이렇게 '띄엄띄엄' 서술하는 방식이 <삼국지> 초보나 입문자에겐 그닥 좋은 방식일리는 없다. 적어도 <삼국지> 중급 이상의 독자가 이 책을 읽는다면 색다른 묘미를 맛보며 <삼국지>를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아차 옆길로 샜다.

다시, '제갈량 vs 사마의'의 내용을 돌아가자. <삼국지> 후반부는 거의 대부분 위나라와 촉나라의 대결이 주를 이룬다. 오나라에 대한 분량은 유비가 손권을 쳐들어갔던 '이릉대전' 이후부터는 급속히 줄어들어서, 거의 나오지 않을 정도다. 제갈량은 촉오동맹을 맺고서 함께 위나라를 압박하자고 오나라에게 요구하지만, 오나라는 '어부지리'를 얻을 속셈이었는지, 위촉간의 전쟁만 관망할 뿐, 좀처럼 '협공'에 나서지는 않는다. 물론 이는 제갈량도 마찬가지였다. 막상 오나라가 '장료'를 죽이고 위나라에 대대적인 공세를 취할 때, 제갈량은 '또다시 북벌'에 나서기 위해서 재정비를 할 시간을 벌려고만 했을 뿐, 오나라의 승전보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이런 촉오동맹의 틈바구니에서 사마의는 제대로 실력발휘를 하고 있었다. 조비가 살아있을 때에는 그나마 스승인 사마의에게 '군권'을 맡기며 위나라의 국운을 모두 맡을 정도로 큰 활약을 했지만, 조비가 죽을 때 유언으로 남긴 것이 '사마의에게 군권을 맡기지 마라'는 것이었다. 그만큼 사마의는 엄청난 실력을 감추고 있는 것 뿐만 아니라 위나라조차 꿀꺽할 만한 위인이라고 낙인이 찍힌 셈이었다. 그래서 조비 사후부터 사마의는 변방의 관직으로 내쳐질 정도로 힘을 잃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제갈량의 총공세' 덕분에 사마의는 다시금 모든 권력을 다시 되찾게 된다. 제갈량의 공세를 막을 수 있는 인물이 '사마중달' 밖에 없었던 탓이다. 그래서 사마의도 몇 차례 제갈공명을 죽일 기회를 얻었지만 살려보내주는(?) 계책을 쓸 정도였다. 이것만 보더라도, '제갈량 vs 사마의'의 승패는 단연코 사마의의 승리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삼국지>에서는 이 둘의 대결이 그야말로 엎치락뒤치락 팽팽한 대결양상으로 펼쳐진다. 그것도 '뛰어난 장수'를 앞세워서 토벌하는 방식의 결전이 아니라 '지략 vs 지략'의 대결양상을 보여주며 흥분의 도가니에 빠뜨리고 만다. 심지어 '패배'를 하면서도 상대에게 결정타를 날리는 제갈량의 지혜는 참으로 통쾌하면서 배울 점이 참 많다. 반면에 사마의는 '결전의 순간'까지 참고 또 참았다가 '단 한 번의 기회'를 승기로 잡아서 끝내 최후의 승자가 되는 것을 배울 수 있겠다.

허나 '실제 역사'에는 사마의의 일방적인 승리로 기록되어 있을 뿐이다. 특히, 사마의가 호로곡의 함정에 빠져 죽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도 애초에 없는 내용이며,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이기다'라는 일화도 뻥이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사마의는 조심, 또 조심하며 병력을 진군시켰고, 제갈량이 수많은 계책을 내놓아도 사마의는 공명의 계략을 하나하나 파헤쳐서 끝내 승리를 거뒀다. 거기다 애초에 촉나라의 군사력은 위나라의 군사력에 비해 1/10 수준이었기에 싸워서 질 까닭이 없었다. 더구나 촉나라는 변변한 장수조차 없어서 '반골 기질'이 다분한 위연조차 내치지 못하고 궁디팡팡 다독이면서 전쟁에 임했을까? <삼국지>에서는 관흥, 장포, 조통 등 영웅들의 아들이 제갈량과 함께 싸웠다고 화려하게 수놓았지만, 실제 역사에서 '영웅들의 아들들'은 별다른 활약을 하지도 못했는지 기록조차 거의 없다. 게다가 제 아버지들처럼 오래 살지도 못하고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만다. 이런 판국에 제갈량은 '마속'을 울면서 참하고, '강유'같은 인재를 구하려 전쟁통에서도 고군분투를 한다. 그만큼 제갈량은 참으로 처절하게 싸운 것이다. 반면에 사마의는 물론 내부적인 문제로 '권력'을 제대로 쥐지는 못했지만, 제갈량의 활약을 적절하게 활용하며 '권력'을 차지하는 용의주도함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삼국지>는 이야기할 거리가 넘쳐나서 문제다. 그렇다고 일일이 거론을 하기에는 너무 방대하고, 띄엄띄엄 소개를 하자니 '하나의 사건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내용을 다룰 수밖에 없다. 그러니 <삼국지>를 제대로 읽고 나면 '해박한 통찰력'을 갖출 수밖에 없다.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인생역정을 엿보았으니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삼국지>가 비록 '실제 역사'와는 사뭇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고, 때로는 '거짓 날조된 역사'를 보여주고 있는 단점이 있긴 하지만, 이른바 '촉한정통론'(송나라 주희가 처음 주장)의 논점에서처럼 천하를 거머쥘 위대한 영웅서사에는 '부도덕한 점'을 용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 '실제 역사'를 읽는 것보다 훨씬 더 유용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단다.

물론, 오늘날에는 '난세의 간웅'인 조조의 삶을 조명한 책들도 많이 나왔다. 이른바 '조조의 실용적인 면모'를 긍정적으로 바라본 관점이다. 뭐니뭐니해도 조조가 승자이고, 실리도 가장 많이 챙겼으니, 오늘날의 '자본주의 시장체제'에서 유비처럼 사업을 하면 망하기 딱 좋지만, 조조처럼 사업을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식으로 조조를 옹호하는 관점이 있기도 하다. 허나 나라를 이끌어가는 지도자가 '실리적인 것'만 추구하면 좋지 않은 결과를 낳는다는 진리를 통해서 '촉한정통론'은 일종의 권위를 얻게 된다. 이른바 '유비의 리더십'이 여러 모로 보아서 매우 바람직하다는 주장이다. 유비는 돗자리와 짚신을 삼아서 생계를 꾸리던 '하층민'이었다. 그런 그가 국가적인 위기 때, 분연히 일어서서 여러 군웅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자그마한 현령 자리를 차지하며 '지도자의 길'을 나아가게 된다. 그리고 관우, 장비, 간옹, 손건, 미축, 조운 등 단 한 번도 배반하지 않은 충성스런 신하들과 '대의'를 논하며, 천하제패를 꿈꾼다. 그러다 '제갈공명'이라는 날개를 달고서 촉한의 황제까지 올라서서 '한황실의 부흥'을 위해서 죽는 날까지 노력을 아끼지 않는 모습은 정녕 모범적인 위인의 모습이 아니겠는가. 이런 유비 세력에 '정통성'을 부여한 <삼국지>는 비로소 '고전소설의 귀감'으로 받들어질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반면에 '역사의 승자'로 기록된 조조와 사마의는 어땠는가? 그들이 세운 나라는 '천하통일'이라는 위엄을 완수한 것치고 너무도 빠르게 멸망하였고, 천하는 다시 '분열의 시대'를 맞이했다. 실제 역사상의 위업을 차지한 그들이지만, 그들에게서 본받고 감명받을 점은 별로 없다고 할 수 있겠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지만, 소설은 '승자의 기록'에 연연하지 않는다. 오히려 '아름다운 패배'를 오롯히 살려내어 안타까움을 표하곤 한다. 그렇게 아름다운 이들이 '승자'가 되었더라면 이 세상은 좀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하는 '희망'을 노래하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게 수많은 군중들은 조조가 아닌 '유비'가 최종적인 승자가 되었으면 더 좋았겠다고 상상하길 즐긴다.

물론 '희망'과 '현실'은 엄연히 다르다. 신데렐라가 왕자와 무도회에서 아름다운 춤을 추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해피엔딩'으로 서둘러 끝맺는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다. 그 뒷이야기까지 설명하기 시작하면 희망은 사라지고 '현실'만 남게 되어 해피엔딩은 물 건너가게 되는 셈이다. 그래서 <삼국지>는 '촉한정통론'까지만이다. 그렇다고 '실제 역사'를 부정하고, <삼국지>를 '정사'로 편입하려는 의도는 온당치 못한 일이다. 어디까지나 '삶의 지혜'를 얻는 선에서 그쳐야 한다. 그렇기에 <삼국지>가 '실제 역사'와 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다고해서 실망하거나 거짓이라고 속상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소설의 허구성'에 분노하지 않는 것처럼 <삼국지>를 읽으면서도 '긍정적인 교훈'을 뽑아내어 읽으면 그만이다. 나의 <삼국지> 읽기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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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2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조은하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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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IV / 문학동네 22번째 리뷰] 마스다 미리의 책은 '남성독자'들에게 해롭다는 결론을 내렸다. 다분히 '여성독자 편향성'을 띤 만화이고, 남성독자가 읽었을 때에는 '알아서 득이 될 것'이 없는 편이니 차라리 읽지 않는 편이 더 낫다는 해석을 내놓으려 한다. 왜냐면 사랑하는 남성과 함께 있을 때의 '여자들의 속마음'이 절묘하게 표현되어 있는데, 이런 속마음이 대부분 '남성들이 알아채면 상당히 기분 나쁨'을 유발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몇 가지 예시를 소개하겠다.

제36화 <최고의 두 사람>에 나오는 치에코와 사쿠짱의 대화 내용이다.

"있지, 사쿠짱"

"응?"

"만약 다시 태어나도 나랑 결혼하고 싶어?"

"응."

"흐음~"

"흐음~은 또 뭐야. 그럼 치에코는 어떤데?"

"나? 나도 사쿠짱이면 좋겠어. 근데...다음엔 20대 말고 마흔 살 정도에 만나고 싶어. 생각해봐. 나랑 사쿠짱이 너무 잘 맞는 거 이미 잘 알고 있으니 좀더 다양한 연애를 해본 후에 만나는 게 이득이지 않겠어?

"(이득이라...) 다양한 연애라면 어떤 걸 말하는데?"

"글쎄~ (이런 남자, 저런 남자 예를 든다) 그런 남자랑 연애하는 거지."

"치에코한테는 안 어울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나중에 사쿠짱을 만날 테니까. 좀 다른 느낌의 남자랑 많이 사귀어 볼거야."

"아, 그래. 근데.. 치에코가 그렇게 여유 부리고 있는 사이에 내가 다른 여자랑 결혼할지도 몰라."

"이 바람둥이!"

"누가 할 소리."

"괜찮아. 그때는 내가 빼앗으면 되니까. 후후"

"상대 여자가 엄청난 미인이라면?"

"그런 거 전~혀 걱정 안 돼. 내 최고의 라이벌은 나랑 닮은 여자야."

"어련하시겠어요."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걸까? 부부끼리의 대화이니 그저 평범한 수준의 대화일 수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식의 대화가 계속 자주 나온다. 이런 대화는 불공평하다. 왜냐면 승자는 어차피 '여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대화를 하면서 남성쪽이 화를 내거나 토라지거나 기분 나빠하면 여성쪽은 '남자답지 못하다'고 폄하하기 일쑤이기 때문이다. 또 이런 유의 대화가 계속 반복되면 투닥투닥 싸우게 된다. 그러면 끝내 여성쪽은 울음을 터뜨리고 남성쪽은 "미안해."라며 사과를 해야 끝이 난다. 여기서 치에코는 한술 더 떠서 "빨리 사과했으면 끝났을 것을. 너무해"라는 말로 한 번 더 확인사살(?)을 하곤 한다. 그러면 사쿠짱은 치에코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서 꽤나 애를 쓰곤 한다. 왜 여성들은 이런 '불공평한 게임'을 조장하고, 거기에 '항상 이기는 쪽'을 선택할 수 있게 배려(?)해야 좋은 남친, 좋은 남편이라고 떼를 쓰는가? 이런 식의 '에피소드'를 몇 차례 거듭해서 읽었더니 사쿠짱이 너무 불쌍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물론, 치에코도 사쿠짱을 무척 사랑한다. 마트에서 물건을 고를 때에도 '자신의 것'보다 '사쿠짱의 것'을 먼저 생각하고, 저녁식사를 준비할 때에도 '사쿠짱이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려 애쓰고, 사쿠짱이 연말모임에서 술 마시고 늦게 들어올 때면, 따뜻한 물주머니를 사쿠짱의 이불속에 넣어놓아서 사쿠짱이 밤늦게 들어와서 춥다고 부들부들 떨때, 이불속으로 들어가니 생각밖으로 따뜻해서 스르륵 잠이 드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며 흐믓해하는 치에코의 모습을 통해서, 그 사랑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치에코가 "만약에 말야~"로 대화를 시작할 때면 어김없이 사쿠짱의 마음을 핥켜버리고 만다. 그때마다 사쿠짱은 "허허~"하고 웃어넘기지만, 남성독자인 나는 화가 났다. 이건 '작가의 짜여진 의도가 담겨 있다'고 말이다.

독일에서 법정소송까지 간 연인의 사례가 있다. 두 연인이 출출해서 피자를 주문하려고 했다. 근데 여자는 배가 그닥 고프지 않으니 자신의 것은 주문하지 않기로 했다. 그래서 남자는 자신이 좋아하는 '치즈듬뿍피자'를 시키려 했단다. 그때 여자가 '치즈듬뿍피자'보다 '과일듬뿍피자'를 주문하라고 말했다. 그래서 남자가 피자 2판을 주문할까? 물었더니, 여자는 1판만 시키라고 했다. 자신은 배가 불러서 피자를 먹지 않겠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남자는 '치즈듬뿍피자' 1판을 주문했다. 그랬더니 여자가 화를 내면서 왜 '과일듬뿍피자'를 주문하지 않느냐고 했단다. 그래서 남자가 너는 먹지 않고 나만 먹을 건데, 내가 좋아하는 피자를 시키는 것이 당연하지 않느냐고 말했더니, 여자가 말하길, 내가 먹고 싶어져서 '한 조각'을 먹을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럴 때를 대비해서 남친이라면 사랑하는 여친을 위해서 여친이 좋아하는 피자를 주문하는 것이 센스 아니냐고 따져 물었단다. 그렇다면 애초에 2판을 주문해서 서로 좋아하는 피자를 먹으면 되었지 않느냐고 남자가 말했더니, 여자는 화를 내면서 배가 불러서 많이 먹지도 못할 건데 왜 2판을 시키냐면서, 1판만 시키는 것이 정상적인 센스 아니겠냐고 답했다고 한다. 어이 없어진 남자가 그렇기에 애초에 1판을 시킨 것이 아니냐고 항변을 했더니, 여자는 근데 왜 주문한 피자가 '과일듬뿍피자'가 아니었느냐고 따져 묻더란다. 남자는 말문이 막혀서 겨우 대답했는데, 그건 네가 피자를 먹지 않겠다고 말해서 그런 것 아니겠느냐고? 내가 잘못한게 도대체 뭐길래 이렇게 화를 내는 거냐고 말하자. 할 말이 없어진 여자친구는 화를 참지 못하고 남자의 뺨을 주먹으로 때렸고, 남자친구도 똑같이 주먹으로 여자친구를 얼굴을 때려서, 결국엔 법정소송까지 갔단다. 독일 법정의 판결은 '남자친구'의 승소. 판결이유는 애초에 불가능한 상황을 조장하고서 급기야 폭력까지 행사한 여자친구에게 귀책사유가 있으며, 남자친구의 폭력은 그에 따른 '정당방위'로 판결이 났다고 함.

물론, 이와 같은 사례는 극단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남자의 사고방식'과 '여자의 사고방식'이 서로 매우 다르다는 점을 인지할 수 있다. 남자는 '결과중심적 사고'를 하는 반면에, 여자는 '과정중심의 사고'를 한다는 점이다. 사쿠짱은 뭐가 되었든 치에코가 좋아하는 걸로 선택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치에코는 자신의 선택이 최상의 선택이었다는 것을 사쿠짱의 입으로 '인정'받고 '칭찬'받는 것을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남자들은 치에코의 사랑이 매우 힘들다는 것을 안다. 왜냐면 남자가 여자를 생각하며 준비한 것을 여자는 '자신의 마음에 딱 맞지 않는다'는 실망의 말을 듣기 때문이다. 이런 실망하는 모든 표현이 두려운 남자는 '선택권'을 여자쪽에게 일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여자는 또 불평불만을 늘어놓기 시작한다. 왜 '내 마음에 쏙 드는 것'을 찾으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느냐면서, 사랑이 식은 거냐, 혹시 딴여자가 생긴거냐, 등등등 오만가지 것들을 사유로 들면서 남자를 들들 볶아댄다. 이렇게 몇 차례 들들 볶이고나면 남자들은 십중팔구 '선택권'을 여자에게 넘겨버리고 만다. 사랑이 식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과 싸우는 일을 만들기 싫어서 그렇다. 이게 남자의 사랑법이다.

그런데 마스다 미리는 온통 '치에코, 이 여자가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에만 몰두할 뿐, 사쿠짱이 치에코를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는 내용이 없다. 그저 치에코의 맘에만 관심을 두고 '치에코의 편'만 들기로 작정을 했다. 물론 이 '단행본'에 실리기 전에는 <앙앙>이라는 30대 여성들이 주로 보는 대중잡지에 연재를 했기에 그랬을 수도 있다. 이런 여성잡지에 실릴만한 만화가 '남성독자'를 전혀 배려하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조언을 해드리는 것이다. 마스다 미리의 책을 읽기에 '남성독자'는 배려의 대상이 아님을 말이다.

그런데 난 '남성독자'다. 그런데 왜 마스다 미리의 만화책을 연이어서 읽고 있는 것일까? 칼 융의 심리학이론에 나오는 '아니마(남성의 무의식 속에 있는 여성적 요소)'가 무의식적으로 작용했기 때문일까? 아닌 게 아니라, 내가 꽤나 페미니스트적인 관심으로 독서를 하는 경향이 없지는 않다. 그렇다면 그동안엔 무탈하게 읽다가 <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2>을 읽으면 열폭한 것인가? 어쩌면 말이다. 부러워서 그런 것일 수도 있겠다. 나에게도 치에코 씨와 같은 아내가 있었더라면 치에코 씨가 무뚝뚝한 사쿠짱 때문에 '속앓이'를 하는 일따위는 절대로 없게 할 수 있을텐데 하는 생각에 다달았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치에코 씨'가 토라진 이유를 단박에 다 알아챘다. 그런데 그런 이유도 알아채지 못하는 둔탱이 사쿠짱은 치에코 씨 같은 아내를 만났는데, 왜 나는 이태껏 솔로란 말인가. 내가 분노한 까닭은 다름 아닌 이 부분에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내 이상형으로 많은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저 '늘 내 곁에만' 있어주면 된다. 그런데 그런 여자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원인은 나한테 있을 것이다. 못 생겼고 부자도 아니고 뚱뚱...아니다. 지금은 살을 쏙빼서 완전 날씬하다. 덕분에 잘 생겼다는 얘기도 부쩍 듣고 있고, 부자까진 아니어도 돈도 쓸만큼은 벌고 차곡차곡 모아서 불려가고 있다. 거기다 센스까지 장착했으니...소소한 행복을 꿈꿔도 좋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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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에코 씨의 소소한 행복 1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조은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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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CIII / 문학동네 21번째 리뷰] 일본인 부부는 '한 이불'을 덮고 자지 않는다고 한다. 직접 확인한 사실이 아니기에 아닌 부부도 있겠지만, 수많은 소설과 만화책, 그리고 영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서 '간접적인 확인'을 해본 결과, 그런 것 같다. 뭐, 나도 결혼을 하면 '한 침대'는 좀 생각해보려고 한다. 워낙 뒤척임이 많은 잠버릇을 소유하고 있다보니 옆에 누가 자고 있으면 불편해서 그런다. 그래도 사랑하는 사이라면 '합체와 분리'가 용이한 킹사이즈 침대를 고려해볼 수는 있겠으나, 대개의 일본인 부부들은 아예 '두 침대'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뜬금없이 '부부의 침실'을 소잿거리로 삼은 까닭은 다름이 아니라, 마스다 미리의 만화가 유독 그런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가 좋은 것 같으면서도 '혼네(속마음)'는 그렇지가 않다. 재는 것도 많고, 따지는 것도 많고, 뭔가 불만이 쌓이고 불평을 쏟아낼 것도 같은데, 적어도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척 한다. 그러면서 직접적으로 말하기보다는 애둘러서 '딴소리'를 한다. 그치만 '혼네'가 분명히 담겨 있다. 11년을 같이 산 부부라면 그런 것을 모를 리가 없다. 그런데도 '다테마에(드러낸 마음)'는 죄다 엉뚱한 소리뿐이다. 도대체 그런 얘기를 듣고서 속마음이 그런 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싶을 정도로 딴소리를 꺼내곤 한다.

그래서 치에코와 사쿠짱의 결혼 생활은 알콩달콩한 것 같으면서도 진짜 사랑하는 사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답답하게 느껴진다. 나쓰메 소세키는 일본인이라면 '사랑'을 직접적으로 표현하기보다는 애꿎은 '달빛이 참 아름답다'는 방식을 선호할 것이라서, 외국의 서적을 뒤칠(번역할) 때에도, 그런 일본인의 정서를 반영해야 옳다고 말했다고 한다. 뭐, 이해는 간다. 운치 있는 달밤에 연인과 단 둘이 사랑의 밀어를 속닥거릴 때 '달빛 어쩌구'라고 말을 꺼내면, 아~ 이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있구나..라는 마음이 들면서 두 볼이 발그레지는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11년이 지난 후에 "자기야, 그때 달빛이 아름다웠던 밤 기억나? 그때 당신이 했던 말을 다시 듣고 싶어."라는 말을 듣고 기억을 떠올릴 사람이 있기는 할까? '직접적인 표현'도 기억이 날까 말까 할텐데, '간접적으로 애둘러 표현'했던 기억을 떠올릴 수 있을까? 이런 걸 기억해내는 것을 '소소한 행복'이라고 말하고 있는 치에코 씨다.

분명 마스다 미리의 만화와는 다른 면이 엿보인다. 매번 '독신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았던 것에 비해, '11년 차 부부'이지만 '신혼 부부' 못지 않게 꽁냥거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작품의 분위기는 사뭇 달라보였다. 그런데 만화의 내용속으로 들어가보면, 달라진 게 없다. 앞서 '사와무라 씨 댁' 시리즈를 소개할 때에도 얘기했던 것처럼 여전히 '한결같다'는 느낌이 앞선다. 마스다 미리의 책들은 어김없이 죄다 '소소한 것들' 뿐이다. 그러한 아기자기한 것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없이 좋아라하겠지만, 그래도 10년 전에 연재한 만화와 10년 후에 연재한 만화의 내용이 한결같다면...좀

마스다 미리는 '우리네 일상'을 아주 잘 묘사하고, 그 속에서 '생각할 거리'를 투사해낸다는 점에서 대단한 작가임에 틀림없겠지만, 결국 '대단한 것'을 기대할 수 없고, '심오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일상다반사' 속에서 내 마음은 이런데, 네 마음은 어떠니? 아라라...쏘데스네. 얏빠리 스게~ 뭐 이런 영혼없는 추임새만 늘어놓는 것에 불과하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도 왜 일까? 그런 소소한 일상속에서 '무언가' 만족할 만한 것을 찾아내는 즐거움도 동시에 느껴진다. 아주 큰 즐거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그저 소소할 따름이다. 그래서 난 또 '다음 권'을 읽게 된다. 도대체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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