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사카 사람의 속마음 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2
마스다 미리 지음, 홍은주 옮김 / 비채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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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채×마스다 미리 컬렉션 2]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  마스다 미리 / 홍은주 / 비채 (2019) [원제 : 大阪人の胸のうち(2007)]

[My Review MMXLI / 비채 3번째 리뷰] 마스다 미리의 고향이 '오사카'인 모양이다. 한국인인 나로서는 '오사카(大阪)'라고 해서 딱히 떠오르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여행을 그닥 좋아하지 않아서 '국내여행'도 잘 가지 않는 '집돌이'인데, 외국이야 오죽 이해하지 못할 바야 짐작하고도 남을 일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잘 몰라서 '검색'을 좀 해보니, 오사카는 일본의 '간사이(関西) 지방'에 속한 지역이란다. 우리 말로 하면 '관문(關門)의 서쪽 지방'으로, 일본의 '세키가하라' 관문의 서쪽을 일컫는 지역을 말하는 거란다. 이 '간사이'에는 효고현, 교토부, 시가현, 오사카부, 와카야마현, 나라현, 미에현을 포함되어 있는데, 교토가 일본의 옛 수도였기 때문에 우리의 '경기도'에 해당하는 '긴키 지방'이라고도 불린다고 한다. 암튼, 마스다 미리는 '크게(大) 비탈진(阪) 지역'을 고향으로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이렇게 '사전적 검색'을 해도 오사카 사람들의 속마음까지 알 수는 없었다. 한국 사람이고 현재는 경기도에 살고 있지만, 평생을 서울 근처에서 살아온 나도 '서울 사람들의 속마음'을 말해달라고 하면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뭐, 서울 깍쟁이, 남산골 샌님...뭐, 이런 별칭들이 있긴 하지만, 이런 것들조차 몇 십 년 전에 불린 별칭들이고, 현재에는 잘 쓰지도 않고 있으며, 현재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들조차 그런 말이 있었는지도 잘 모를테니 말이다. 그런데 2007년에 쓰인 일본 오사카 사람들의 속마음을 회상한 작가의 에세이는 그보다 훨씬 더 옛날인 1980년~1990년대의 '오사카 사람들'의 일상을 추억한 것일텐데, 2025년을 살고 있는 외국 독자가 그 '속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한마디로 이 책 <오사카 사람의 속마음>은 도무지 내용파악을 할 수 없는 책일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이 책이 우리 나라에 소개된 까닭은 전적으로 '마스다 미리의 책들'이 엄청나게 인기를 끌었기 때문일 것이다. 굳이 전작주의자들을 위한 배려(?)가 담겼다고 볼 수는 없고, 그저 '인가작가'의 저작물이니 어찌어찌 '판권'을 사들여 이득을 챙겨보겠다는 의도였겠으나, 이런 '일본인 작가의 개인적인 추억'을 한국 독자에게까지 소개해주는 친절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난감할 따름이다. 그도 그럴 것이 '마스다 미리 작가의 특색'이 아주 섬세한 감성의 언어유희가 아주 일품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수짱 시리즈> 이후 수많은 독자들이 생겼을 정도다. 그래서 일본출판사는 '마스다 미리'가 일본인의 정서를 담뿍 담은 글들을 따로 모아서 연이어 출판하고 대박을 터뜨리곤 했는데, 아마도 이 책도 그런 책들에 섞여서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책은 '아니올시다'였다. 일본 사람들에게 '오사카'는 특별한 무엇이 있는 지역색(차별적 요소까지 포함된)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한국 독자들은 그런 사정까지 잘 모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 이를 테면, 외국인들에게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따로 구분되어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을지 몰라도, 그 두 지역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감정의 골까지 이해하기는 힘들 것이다. 물론, 그런 감정의 골이 '인류 공통적인 문제'로 드러났을 경우에는 잘 설명하면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라도 있겠지만, 한국인이 아닌 외국인이 그 지역의 사투리로 이야기하는 느낌적인 느낌까지 '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느냔 말이다. 전라도 사람이 "아따 거시기해부러"라고 말하는 것에는 '말하는 사람의 기분'이나 '말하는 상황이나 정황'에 따라서 엄청나게 '다른 뜻'으로 이해할 수 있고, 설령 '같은 뜻'이라고 할지라도 '말하는 사람의 성별이나 연령, 억양 등'에 따라서 또 여러 가지 뜻으로 이해될 수도 있기 때문에, 이를 '외국말'로 뒤쳐서(번역해서) 전달하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닌 셈이다. 마찬가지로 갱상도 사람이 하는 "쫌", "마"라고 하는 말도 얼마나 다양하게 해석이 가능하냔 말이다.

그런데 '표준 일본어'도 제대로 모르는 한국독자가 '오사카 일본어의 사투리'를 어찌 구분할 수 있겠으며, 그런 오사카 사투리만의 절묘하고 미묘한 뉘앙스를 어찌 간파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전적으로 '마스다 미리'의 해석에만 귀를 기울일 수밖에 없는 처지로 전락하고 만다. 그런 좁은 입지에서 이 책을 이해하려 노력해보면, 오사카 사람들은 매우 순박하고 감정에 충실하며 쉽게 흥분하는 '다혈질적인 사람들'이 모여사는 곳인 듯 싶고, 한편으론 '만담이야기(개그)'가 재밌다고 하는 것을 보니, 일본사람들이 속단하기에 '오사카 사람들'은 웃긴 사람들이 많은 편이라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유추해보면, 한국 사람들 중에는 '경상도 사람'에다가 '충청도 사람'을 섞어놓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에둘러 표현하는 것보다는 자기 감정에 솔직하고, 말 한마디한마디에 '유머'를 담아서 쿵짝을 유도하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애니메이션 같은 것을 보면, 자신이 '오사카 출신'이라고 밝히면서 순수하고 정열적인 캐릭터를 보여주기도 하면서, 간간히 개그스런 행동으로 주위를 썰렁하게 만드는 캐릭터로 곧잘 등장하기 때문에 그렇게 짐작해보았다. 하지만 그나마 이런 캐릭터들은 대부분 '오사카 남자 캐릭터'가 많았기 때문에 마스다 미리처럼 '오사카 여자'가 말하는 귀여운 사투리 표현 같은 것을 전혀 짐작할 수도 없어서 책을 읽으면서도 답답해 했다.

세상의 모든 책이 다 '좋은 책'일 수는 없다. 하지만 '출판인'이라면 그걸 구분할 수 있는 안목이 있을 거라 믿는다. 그런데 이 책이 '한국독자'들에게 얼마나 유용할지 생각에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일본어를 '1급 이상'으로 취득할 목적을 갖고 있고, '일본 문화'에 대해 궁금증이 많은 분들에게만 권한다. 교양적인 호기심으로 만족하는 독자들이라면 굳이 읽지 않아도 될 책으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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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까지 걷고 싶다면 스쿼트를 하라
고바야시 히로유키 지음, 홍성민 옮김 / 동양북스(동양문고)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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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까지 걷고 싶다면 스쿼트를 하라 : 평생 건강하게 걷기 위한 하루 5분 실천 프로그램>  고바야시 히로유키 / 홍성민 / 동양북스 (2025) [개정판: 초판 2018년]

[My Review MMXXXVIII / 동양북스 3번째 리뷰] 책 제목이 '스쿼트'라서 운동이나 자세 교정 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는 책이라 짐작했는데, 보기 좋게 빗나갔다. 물론 '스쿼트 운동법'이 있긴 하다. 올바른 자세를 가르쳐주는 꼴랑 3쪽 분량의 '그림'이 전부다. 나머지는 왜 스쿼트 운동이 필요한지 강변하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고, 그보다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해서 '자율신경계의 중요성'에 대한 설명이 덧붙여졌다. 물론 이 모든 내용을 꿰뚫는 한 가지는 '스쿼트'가 맞다. 다시 말해, 올바른 자세로 스쿼트 운동을 꾸준히 하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다는 내용에 대한 자세한 설명이 담겨 있단 말이다.

사실, 스쿼트 운동법은 간단하다. 제자리에서 쪼그려 앉았다가 다시 서는 동작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나 간단한 운동을 꾸준히 하면 놀라울 정도로 건강해질 수 있다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물론 이렇게 놀라운 변화를 가져다주는 운동은 20~30대 젊은 계층은 잘 느끼기 힘들다. 왜냐면 이들은 이미 건강하기 때문이다. 물론 젊어서부터 건강한 운동 습관을 가지고 있다면 40대 이후에도 평균 이상의 건강을 유지할 수 있고, 50대 이후의 노년층에 들어서도 잔병치레 하나 없는 '건강한 삶'을 죽을 때까지 영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40대 이후에 급격히 건강이 무너진 경험을 한 사람들에게서 발견할 수 있다. 이들은 건강을 해치는 '질병'을 이겨내기 위해서 운동을 해야 하는데, 몸이 건강하지 못하니 '하고 싶은 운동'이 있어도 제대로 할 수 없고, 꼼짝도 못하고 누워만 있는 시간이 늘어나다가 더는 쾌유하지 못하는 '병든 몸'이 되어서 죽을 날만 기다리게 될 뿐이다. 그것도 지독한 고통을 겪으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엄청난 비극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고, 이미 어느 정도 진행되어 '아픈 몸'을 이끌고서도 손쉽게 쾌유 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하겠는가? 두 말 않고 당장 시작할 거라고 말할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을 알려 드려야 할 것이다. 바로 아침 저녁으로 '스쿼트 운동'을 하면 된단다. 단순하게 쪼그려 앉았다가 다시 일어서는 동작을 부담 없이 반복적으로 하기만 한다면 웬만한 질병을 다 물리칠 수 있는 '면역력'을 얻게 될 것이고, '혈액순환'을 좋게 만들어서 활력이 넘치는 생활을 영위할 수 있고, '자율신경'을 균형 있게 만들어주어서 몸 건강 뿐만 아니라 정신 건강까지도 좋게 만들 수 있다고 호언장담을 하고 있다.

이쯤 되면 '속는 셈'치고 스쿼트 운동을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속이는 것이 아니란다. 실제로 '의사'이기도 한 저자는 자신이 맡은 환자를 대상으로 '스쿼트 운동'을 권하니 아주 좋은 경과를 보여주는 사례가 꽤나 많았으며, 심지어 활력을 잃고 골골대던 자기 자신조차 '스쿼트 운동'을 시작하면서 일주일만에 의미 있는 신체변화를 경험하면서 더욱 확신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이 정도면 그냥 속아주는 것이 좋다. 돈 한 푼 들지 않고, 많은 시간을 잡아먹지도 않고, 딱 세 뼘 정도의 공간만 있어도 할 수 있는 운동이니 아무런 부담 없이 해도 좋을 것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스쿼트 운동'은 특별히 어려운 자세도 아니다. 먼저 '고관절'을 풀어주는 간단한 동작으로 시작해서, 허리를 구부리지 않고 '등'을 반듯하게 펴줘서 올바른 스쿼트 자세를 만들면 모든 준비가 끝난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허벅지'를 조지기 시작하면 된다. 무릎은 90도가 될 때까지 굽히고, 등은 최대한 곧게 펴준다. 그 자세를 유지하면서 앉았다 일어서는 동작을 20회씩 3세트 정도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해주면 끝이다. 중요한 것은 '허벅지'에 힘이 들어간다는 느낌이 팍팍 들게 하는 것이다. 이때 앉는 동작에 숨을 내쉬고, 일어서는 동작에 숨을 들이마신다. 동작이 자연스럽고 부담이 덜 되면 차츰차츰 '운동 횟수'를 늘려주면 좋다.

스쿼트 운동은 절대로 '고강도 운동'으로 해선 안 된다. 그러면 오히려 효과가 반감이 된단다. 오히려 '저강도 운동'을 하더라도 아침 저녁으로 꾸준히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이란다. 특히 50대 이상의 노년은 '고강도 운동'보다 꾸준히 매일매일 하는 것이 더 좋단다. 그 까닭은 젊었을 때에는 고강도 운동을 하더라도 금방 회복이 되어서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지만, 노년의 나이거나 질병으로 몸이 아픈 상태에서 갑자기 '고강도 운동'을 시작하면 오히려 운동 효과를 긍정적으로 보기도 전에 '또 다른 고통'을 겪게 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란다. 더구나 '자율신경계의 균형'을 이루기 위해서는 고강도 운동을 피해야 한다고 한다. 너무 탬포가 빠르거나 숨을 헐떡일 정도의 숨가뿐 운동을 하게 되면 우리 몸속의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의 부조화가 뚜렷해지면서 '운동 효과'를 원하는만큼 끌어올릴 수가 없게 된다고 한다. 그러니 무리하게 하지 말고 처음 시작할 때는 '5회 정도' 가볍게 했다가 조금 수월해지면 조금씩 횟수를 늘려나가는 방식으로 꾸준히 하면 아주 좋은 효과를 맛볼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슬슬 50대가 넘어가니 몸 여기저기가 쑤시고 결리고 아파 죽겠다. 특히 '허리통증'이 심했을 때에는 누워있는 자세조차 고통스러워서 거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울 정도였다. 그렇게 반년 이상을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밥을 먹을 때도 앉은 자세가 힘들어서 서서 밥을 먹을 정도였다. 그때 가장 많이 느꼈던 것이 바로 '허벅지 근육'이 급격하게 줄어드는 느낌이 들었다. 늘 바지를 입으면 허벅지가 낑겼는데, 그 당시에는 허벅지가 날씬해져서 '슬림핏'이 살아날 정도였다. 하지만 멋스러워진 것과는 반비례로 내 건강은 빠르게 나빠지기 시작했다. 당뇨 증세가 보이기 시작한 것도 그즈음이었다. 지금이야 15킬로 이상 감량에 성공해서 당뇨약도 끊었지만, 그 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아찔할 정도였다. 그래서 '스쿼트 운동'에 관심이 높아졌던 모양이다. 그리고 '계단 오르기 운동'도 매일매일 꾸준히 해온 덕분에 체중 감량에 성공할 수 있었다.

암튼, 저자는 '스쿼트 운동'으로 정말 많은 효과를 보았다고 한다. 지금은 7층 이상의 계단을 올라도 전혀 숨이 차지 않는다고 한다. 스쿼트 운동을 하기 전에는 '건널목'을 건널 때조차 비틀비틀 거릴 정도로 허약한 상태였고, 1층의 계단만 올라도 심장이 쿵쾅쿵쾅 거릴 정도로 죽을 맛이었다고 한다. 올해 65세로 '스포츠닥터' 활동을 해온 사람의 경험담이 수록되어 있어서 읽다 보면 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곤 했다. 나도 꾸준히 '스쿼트 운동'을 시작해 보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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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힘든 말
마스다 미리 지음, 이영미 옮김 / 애니북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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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기 힘든 말>  마스다 미리 / 이영미 / 애니북스 (2015) [원제 : 言えないコトバ]

[My Review MMXXXVII / 애니북스 6번째 리뷰] 에세이 책은 잘 읽지 않는 편인데, '마스다 미리' 덕분에 줄기차게 읽게 생겼다. 애초에 그녀의 '만화(단행본)'를 읽지 말았어야 했는데, 이왕 읽기 시작한 것이니 끝장을 보려고 한다. 그래서 [수필리뷰] 시리즈도 새로 카테고리를 만들었다. 어디 한 번 줄기차게 읽고 써보련다.

그렇다고 해서 '마스다 미리'의 수필책을 좋아해서 읽고 있는 것은 아니다. 아쉽게도 내가 마스다 미리 책들에 내어준 '별점'은 별다섯부터 별둘까지 다채로웠기 때문이다.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공감'할 수 있는 책들도 있긴 했지만, 대부분은 '별셋'이었다. 그런데 이 책은 '별둘'이다. 왜냐면 공감하는 부분이 없지는 않았지만, '(일본인도) 하기 힘든 (일본)말'을 굳이 뒤쳐내어(번역해)서 '한국 독자들'에게 소개한 것인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이런 내용을 굳이 소개해봐야 '한국 독자들'이 얼마나 공감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들기도 했다.

이를 테면 '이런 식'이다. 일본에서는 '백화점'을 '데빠토(デパート)'라고 부른다. 영어의 'department'를 줄여서 부르는 명칭인데, 마스다 미리는 옛날 사람(?)이라서 '백화점'이라 부르는 것이 익숙한데, 젊은 사람들은 '데빠토'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는 에피소드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일본인이 '백화점'이라고 한국식으로 발음할 리가 없다. 백화점(ひゃっかてん)의 일본식 발음은 '햣카뎅'으로 할 것이다. 정리하면 일본에서는 80년대에는 '햣카뎅'이라고 주로 발음하며 '백화점'을 일컬었는데, 90년대 이후부터는 '데빠토'라고 대다수가 발음을 한 모양이다. 그런데 옛날 사람에 가까운(?) 글쓴이는 어릴 적에 '햣카뎅'이라고 발음하던 추억이 있어 최근(2012)에도 '햣카뎅'이라고 부르고 싶었는데, 주위에서 하도 '데빠토'라고 하니 왠지 조금 서글퍼진다는 그런 내용이다. 이걸 '한국 독자들'이 얼마나 공감하며 읽을 수 있을까? 차라리 '광화문연가'라는 노래를 '이문세 목소리'으로 기억하는지, '이수영 목소리'로 떠올리는지 이야기하는 것이 공감 가지 않겠는가? 한국 독자들에게는 '백화점'은 백화점일 뿐이고, '쇼핑 몰(mall)'이나 '아울렛', '마트' 등으로 부르고 있는데 말이다.

그리고 말이다. 딱히 '상관' 없는 일이기도 하다. 햣카뎅이라고 부르든, 데빠토라고 부르든, 그게 그렇게 크게 신경 쓸 일일까? 의미만 전달된다면 별로 문제될 것도 없고, 마스다 미리, 본인만 크게 걸고 넘어가지 않는다면 아무 문제도 발생하지 않을 텐데 말이다. 물론 '미묘한 차이'가 있다는 것에는 십분 공감을 한다. 나도 '어감'을 많이 따지는 편이고, '낯설다'는 느낌이 들면 <사전>을 뒤져보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며 '적확한 단어/어휘'를 시간과 장소에 걸맞게 바르게 쓰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편이기에 마스다 미리의 고민(?)이 남 일처럼 멀게 느껴지지 않고, 마스다 미리가 느꼈을 기분 나쁨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말이다. 그거 대단히 피곤한 일이다. 그저 혼자만의 상상으로 그칠 경우엔 혼자서 피식 웃고 말거나 홀로 심각해지는 것으로 끝날 상황이지만, 그걸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부터 '피곤한 사람'으로 낙인 찍히기 딱 좋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일을 참 많이 겪었다.

그래서 지금은 나 혼자만 끙끙거릴지언정 그런 '고민'이나 '상상'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 편이다. 그걸 말해봐야 십중팔구는 이해하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고민을 '글'이나 '만화'로 써내는 것은 나쁘지 않은 선택 같다. 왜냐면 그런 생각에 이르기까지 충분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에 실린 내용 가운데 몇몇은 '공감'이 가기도 했다. 예를 들면, 사람을 면전에 두고서 '쓸모 있다/쓸모없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삼가야할 '언어예절'이고, 그걸 아무런 의식도 없이 습관처럼 내뱉는 사람이라면 정말이지 '몰상식'한 사람으로 치부해도 괜찮을 정도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그런 에피소드가 그리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일본인'이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내용들이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뒤치지(번역하지)' 않고 본연의 일본말 그대로 옮겨 놓았다면, 일본어 공부를 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아주 좋은 책일 수 있을 것이다. 언어공부란 '문화습득'의 또 다른 방법일 수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서'를 읽는 것으로 일본어의 시대변천을 살펴볼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을 선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특색이 '뒤쳐지는(번역된) 과정'을 통하면서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그리고서 '우리말'로 풀어놓고 보니 도리어 어색한 점이 더 많이 눈에 띄고 말았다.

물론 한국 독자들에게도 '인가 작가'인 마스다 미리의 책이니 우선적으로 읽고 싶은 분들이 있어서 출간되었을 것이라 짐작한다. 그리고 마스다 미리 작가의 '섬세함'에 놀라고, '디테일'한 설명에 반해서 그녀의 책이라면 두말 하지 않고 읽는 열성팬들도 꽤나 많을 것이다. 그래도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적어도 내 평점은 '별둘'이다. 더 깎을 순 있어도 더 높여줄 순 없다. 그나마 별하나가 아니라 별둘인 까닭은 몇몇 '공감'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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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레벨업 8 - 완결
추공 지음, 이백 그림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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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레벨업 8>  추공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2019)

[My Review MMXXXVI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8번째 리뷰] 아무 것도 없는 무(無)의 공간에서 '절대자'는 무료함을 잊기 위해 여흥을 즐기려 한다. 그래서 창조해 낸 것이 바로 '지배자'와 '군주' 들이다. 그리고 그 여흥의 흥미를 돋우기 위해서 둘 사이에 싸움을 붙였다. 절대자는 흥겨웠다. 지배자와 군주 들의 싸움이 치열하면 치열할수록 좋았고, 팽팽하면 팽팽할수록 흥겨웠기 때문이다. 허나 지배자도 군주 들도 어엿한 생명이 있는 존재들이기에 죽거나 사라지지 않기 위해서는 피가 튀고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살육전'에서 최선을 다해서 싸웠다. 서로를 향한 '파괴 본능'만을 앞세워서 말이다. 그렇게 치열한 전쟁 속에서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는 않았다. 하지만 각자가 가지고 있는 '전투 특성' 때문에 힘의 균형이 깨지기 시작했다. 숱하게 싸우고 또 싸우고 난 뒤에야 깨진 균형이지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균형은 점점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죽음의 왕, 그림자 군주'의 힘 때문이었다.

애초에 7명의 지배자와 9명의 군주 들은 서로의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였다. 그렇게 엎치락 뒤치락 싸움이 계속 되는데, 결국은 지배자와 군주 들도 '죽음'을 겪게 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절대자'가 창조한 존재인 까닭에 죽음을 경험하더라도 '완전 소멸'은 되지 않는 존재들이었다. 하지만 지배자와 군주 들을 따르는 종(부하)들의 경우엔 달랐다. 그 종들은 죽고 난 뒤에 '그림자 군주'를 따르는 '그림자 군단'에 합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애초에는 7명의 지배자들과 9명의 군주들이 나뉘어서 싸워도 서로 대등할 수 있었지만, 나중에는 '그림자 군주' 홀로 모든 지배자들과 하늘을 뒤덮을 정도의 지배자 군단들과도 맞서 싸울 정도로 어마어마한 힘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지배자'들은 점점 패색이 짙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해서 싸움에 질 때마다 '윤회의 잔'을 이용해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패배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는 일이 반복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절대자가 창조한 존재들의 경우에는 아무리 '시간'을 거스른다고해도 '과거의 기억'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다시 말해, 지엄한 존재들의 경우에는 '윤회의 잔'을 뒤집기 이전의 기억까지 다 가지고 '똑같은 시간'만 되풀이 되었던 것이다. 그렇게 수 차례로 거듭해서 싸우다가 '군주들'이 배신을 하고 말았다. 그림자 군주가 거느린 '그림자 군단'이 너무 커져서 힘의 균형이 깨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림자 군주를 제외한 나머지 군주들이 지배자와 맞서서 홀로 싸우고 있는 그림자 군주의 뒷통수를 쳐버린 것이다. 그렇게 지배자와 그림자 군주가 치열한 싸움 끝에 둘 다 기진맥진해진 상황에 '나머지 군주들'이 먼저 그림자 군주를 제거하고, 그림자 군주에 의해 제압 당한 '지배자들'도 모두 제거해버린 것이다. 이때 배신을 지휘한 우두머리가 바로 '파멸의 군주, 용제'다. 다른 군주들에 비해서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그가 자신과 유일하게 맞서 싸울 수 있다고 여긴 '그림자 군주'를 제거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렇게 파멸의 군주에 의해서 제거된 '지배자들'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서 '광휘의 파편'을 지구 곳곳으로 보냈고, 그 파편 조각이 몸속에 스며든 인간들은 엄청난 에너지원인 '마나의 영향력'을 받아 '국가 권력급 헌터'로 거듭 나게 되었다. 그리고 아직 '마나의 양'이 충분하지 않은 지구를 찾아온 '파멸의 군주(용제)'의 종(카미쉬)을 보내 '광휘의 파편 조각'마저 제거하려 했으나, 전세계 국가 권력급 헌터들이 모여서 카미쉬를 물리치는 위업을 펼친 것이다. 한편, 군주들에 의해 배신을 당한 '그림자 군주'는 자신이 '죽음의 신'인 탓에 완전히 소멸되지는 않았다. 허나 파멸의 군주에게 당한 데미지가 너무 컸기에 회복하기에 너무 오래 걸릴 것으로 짐작되자, 한 가지 묘책을 내놓게 된다. 바로 '설계자'의 도움을 받아서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를 키우려 한 것이다. 마치 지배자들이 '광휘의 파편 조각'으로 국가 권력급 헌터를 만들어낸 것처럼 말이다. 암튼, 그렇게해서 '설계자'에 의해 낙점을 받은 후계자가 바로 E급 헌터, 성진우였다.

E급 헌터는 '일반인'과 거의 구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마나의 힘'이 약한 헌터로 각성한 자다. 그래서 게이트를 통해서 나타나는 마수들과 싸울 힘을 갖고는 있지만, 마나의 힘이 없어 싸울 수 없는 일반인처럼 마수들에 의해 '일방적인 학살'을 당할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을 맡게 된 셈이다. 그렇게 약한 헌터가 바로 '성진우'였다. 그런데도 성진우는 '죽음'을 무릅쓰고 던전을 돌면서 마수 사냥에 나섰다. 왜냐면 초창기 헌터로 각성한 아버지는 던전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해서 '행방불명'이 되었고, 생계를 책임지던 어머니는 '익면증'에 걸려서 잠이 든 것처럼 쓰려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 뿐인 동생의 학비와 생활비를 구하기 위해서 '소년 가장'이 되어 버린 성진우는 큰 돈을 벌 수 있는 '헌터의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필 E급 헌터로 각성하는 바람에 원하던 큰 돈은 벌지도 못하고, '헌터협회'에서 주최하는 던전 사냥에 참가하는 대가로 받은 지원금으로 값비싼 어머니의 치료비와 동생의 학비를 겨우겨우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지원금을 다 써버린 성진우는 변변한 무기나 방어구도 구하지 못하고 겨우 마련한 칼 한 자루를 들고서 겨우겨우 던전을 돌았던 것이다.

그렇게 몇 번의 던전 참가를 통해서 얻게 된 별명이 '최약 병기'였다. 가뜩이나 약한 E급 헌터로 각성한데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E급이나 D급 게이트를 돌고 있었기에 붙은 별명이었다. 사실 던전 게이트에 들어가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신보다 '등급'이 낮은 마력을 뿜어내는 게이트라면 별탈이 없겠지만, '동급'이거나 '상위' 등급의 게이트에 들어가서 마수 사냥을 한다는 것은 '목숨'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잠깐의 방심만으로도 마수들의 공격에 순식간에 목숨을 잃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성진우도 D급 게이트에 참가했다가 심각한 치명상을 받은 적이 여러 번이었다. 심지어 자신의 등급과 동급인 E급 게이트에서도 가장 약한 마수인 '고블린'에게 치명상을 당할 정도로 약해 빠진 헌터였던 것이다. 그러니 헌터들에게 게이트 참가를 권할 때에 8명 이상의 헌터로 구성을 하는 것을 규정으로 정할 정도였다. 그래도 게이트는 끊임없이 나타났고, 헌터의 수는 늘 부족했기 때문에 '협회'에서도 헌터들이 생명을 잃어버릴 정도의 위험한 배정은 하지 않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성진우 헌터가 참가하는 던전은 늘 '최약체 마수'만 등장한다는 공식(?)이 소문으로 나돌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만큼 '안전한(?) 레이드'라는 보장이었기에 성진우가 참가하는 게이트 사냥은 안심하고 참가할 수 있다고 여긴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안심하고 참여한 게이트에서 '이중 던전' 사고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이중 던전'은 바로 그림자 군주의 의뢰를 통해서 '설계자'가 꾸민 게이트였던 것이다. 이 게이트에서 성진우는 '죽을 위기'를 극복하고 '플레이어'로 다시 재각성(?)할 수 있었다. 그리고 플레이어가 된 성진우는 끝없는 레벨업을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설계자'의 친절한(?) 안내를 착실하게 따르면서 성진우는 '그림자 군주'가 될 훈련을 착착 해냈던 것이다. 그렇게 레벨 100을 넘기고 진정한 '그림자 군주의 힘'을 다룰 수 있게 될 때쯤, 제주도를 넘어 일본에서 '거인들의 왕(군주 가운데 한 명)'을 제거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죽음의 군주'라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마주한 엄청난 힘을 가진 '군주들'과 마주하게 되고, 잊고 있었던 '과거의 기억'도 떠올리며 진정한 '그림자 군주'의 힘을 개방하게 된다. 그리고 '파멸의 군주, 용제'와의 한 판 승부를 펼치는데, 결국 최종 승리는 성진우였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성진우가 승리하긴 했지만 '파멸의 군주'가 남긴 상처와 그에게 당한 희생자는 너무도 많았던 것이다. 이렇게 종지부를 찍게 되면 성진우가 '알고 있던 세상'은 한 켠이 무너진 채로 남게 될 것이다. 그걸 받아들이지 못한 성진우는 지배자들에게 '윤회의 잔'을 이용할 수 있게 부탁을 했고, 그 힘을 통해서 '시간'을 되돌릴 작정을 한다. 그렇게 되면 성진우는 이미 '세상을 구한 영웅'이었는데, 처음으로 게이트가 열리기 '이전'으로 시간을 되돌리길 원했기에 아무도 성진우를 기억하지 못하게 될 것이고, 예정대로 '파멸의 군주'는 다시 찾아오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그 때에는 어떻게 '파멸의 군주'를 상대할 것이냐는 지배자의 물음에 성진우는 분명히 말한다. 자기 혼자서 상대하겠다고 말이다. 지배자들의 도움도 필요 없다면서 말이다. 진정한 '그림자 군주'의 힘을 개방한 성진우로서 완전히 불가능한 일도 아닐 테지만, 그럴 경우에는 아무도 성진우를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지배자들의 경고가 있는데도, 성진우는 소중한 것을 잃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 결정을 선택한다. 세상은 온전히 지킬 수 있겠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그런 선택을 말이다.

그렇게 성진우는 다시 한 번 '최후의 싸움'을 다시 치루고 승리를 거둔다. 다시 한 번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된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할 뿐이다. 그리고서 이야기는 <외전>으로 이어진다. 사실 이미 끝난 이야기에 이어지는 '뒷이야기'가 김이 빠질 법도 하다. 그런데 <나 혼자만 레벨업>은 그게 아니다. 다 끝난 듯한 이야기를 마무리하고서 '그 뒷이야기'를 하면서 더 신 나고 재미난 이야기를 펼쳐보였기 때문이다. 보통 <외전>의 생명은 '디테일'에 있다. 굵직굵직한 주요 이야기의 빈틈을 완벽하게 메꾸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 혼자만 레벨업>에서는 '외전'이 사실상 '본편'이라고 할 만큼 자세하게 펼쳐진다. 그리고 완전히 달라진 '세계관'으로 다시금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그 이야기가 훨씬 더 흥미롭다. 마치 '신데렐라'가 왕자와 결혼을 하고 난 뒤에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서 끝나버린 이야기의 뒤를 이어나가면서 '어떻게' 행복한지 생생하게 전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나 혼자만 레벨업>이 바로 그렇다. 성진우라는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세상에서 성진우는 다시 '중학생'이 되어서 곧이어 찾아올 '파멸의 군주'를 물리치고 또 한 번 세상을 구한 영웅이 되었으나, 그 사실을 아무도 알지 못하는 세상에 한가롭게 살아간다. 그 이야기가 몹시 흥미롭게 진행되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그리고 그 <외전>마저 끝마쳤을 때, '또 다른 이야기'로 다시 찾아왔으면 하는 아쉬움만 가득할 것이다. 정말 간만에 '여운' 가득한 판타지 소설을 만나고 즐겼다. 기회가 된다면 또 리뷰하고 싶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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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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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떨림>  아멜리 노통브 / 전미연 / 열린책들 (2014) [원제 : Stupeur et tremblements (1999년)]

[My Review MMXXXIII / 열린책들 23번째 리뷰] 아멜리 노통브를 극찬하는 이들은 그녀의 문체에서 '잔인함과 유머'가 공존하고 있다고 설명을 늘어놓는다. 인정한다. 그녀에겐 유머스러움이 가득하다. 그리고 그 유머와 함께 곁들여진 '잔혹함'이 그녀를 더욱 돋보이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난 그런 그녀의 문체가 혐오스러워졌다. 그로테스크(기괴함)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잔혹한 유머에 나는 왜 한때 나마 열광했었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책 뿐만 아니다. 그녀의 모든 소설이 다 그렇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녀에게 보냈던 '나의 찬사' 위에 덧바르는 리뷰를 쓰고자 한다. 잘못 썼다면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여기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그녀의 첫 소설 <살인자의 건강법>(1992)에 뒤를 이은 '실시간적 배경'을 모티브로 삼고 있다. 그녀의 첫 소설이 공전의 대히트를 치고 난 앞뒤의 '전후사정'을 개인적인 경험담을 소재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담도 이브도 없는>에서 소회를 밝힌 '연애담(아멜리의 첫사랑)'의 뒷부분에 소개된 '첫 직장 뒷담화(?)'가 이 소설의 전체 줄거리를 가로지르고 있다. 일본에서 태어난 벨기에 사람 '아멜리'가 고국(?)을 떠나 일본에서 '프랑스어 과외'를 하던 중에 얻어 걸린 '번듯한 직장'에서 경험한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적나라하게 까발려졌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일본 기업의 문화는 '서양인'에게 쉽게 적응할 수 없는 문화적 차이(이질감)를 아주 논리적이고 냉철하게 분석하여 소개하고 있음으로 일본인 독자들도 하여금 자신들의 문화에 대한 성찰의 기회를 준 아멜리 노통브에게 심심한 감사를 표하는 기이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는 셈이다.

우리식으로 비유하며 정리하자면, 우리 나라에서 태어난 '서양여자'가 다섯 살까지 살다 고국으로 되돌아 갔는데, 어릴 적 기억이 너무도 생생하고, 그 추억이 너무 아름답게 느껴져서 어른이 되어 다시 대한민국을 찾아오게 되었고, 그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간절해서 '대한민국'에 눌러 앉기 위해 '직장'까지 얻게 되었는데, 한국의 직장 문화에 쉽사리 적응하지 못하고 어려움만 잔뜩 겪다가 꼴랑 1년 만에 '사직서'를 내고서 고국으로 되돌아갔는데, 그 1년 간의 경험담을 소재로 삼아서 쓴 소설을 '고국의 독자들'에게 먼저 선보이고 공전의 히트를 친 것이다. 고국의 독자들은 이런 느낌이었을 것이다.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의 직장 문화는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서양인이 견뎌내기에 너무도 낯설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며 '우스개소리'를 곁들여서 잔혹하게 묘사했는데, 이걸 '한국의 출판사'가 한국의 문화에 대한 서양인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질책(!)으로 받아들이고 버젓이 '뒤침(번역)'을 한 뒤에 출간을 했더니, 한국의 독자들이 열광적인 환호(?)를 보내더라는 식이다.

딴에는 이게 맞는 듯 싶다. <두려움과 떨림>이라는 제목조차 너무도 일본스럽기 때문이다. 애초에 '누구' 앞에서 두려움과 떨림을 가져야 하는가? 다름 아닌 '일본의 왕(천황)' 앞에서 모두가 그래야 하는 것처럼 서양인들도 예외는 없다는 식으로 제목을 갖다 붙이고서, 어느 한 일본대기업의 직장문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문화들을 '일본의 전통(?)'이라면서 자랑스럽게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느 대기업이 '외국 사원'을 뽑아놓고 '자국의 문화'에 한 치도 어긋남이 없이 알맞게 적응을 해야 한다고 우겼던 것일까? 열심히 일을 하면 할수록 아멜리는 점점 더 '한직(한가한 직책)'으로 밀려났기 때문이다. 끝내는 '화장실'을 사무실 삼아 '화장지 바꾸는 작업(미화원이 해도 될 일)'을 외국계 직원이 해야 마땅할 직책으로 만들어 버렸다. 왜 이런 하릴없는 '고급 인력낭비'를 하고 있느냔 말이다. 그리고서 이를 '일본 사람들의 체면치레'를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통과의례'로 어물쩍 넘어가고 있다.

이 소설을 읽은 서양사람들의 반응이 어떨지는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열이면 열, 모두 '일본은 이상한 나라'로 읽고 말 것이다. 왜냐면 <두려움과 떨림> 속에서 정상적인 일본 사람들이 아주 없지는 않지만, 그들조차, 일본기업의 이상한 직장 문화에 특별히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고치려 드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이 일로 인해서 고초를 겪은 아멜리에게 "미안하다"는 말만 전할 뿐, 그녀의 퇴직을 만류하거나 잘못된 '직장 문화'를 고치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단 한 명도 없기 때문이다. 그저 일본의 문화가 원래부터 그런 것이니 '서양 사람'인 당신은 어쩔 수 없이 극복할 수 없을테니, 최대한 자연스럽게 퇴사하는 것이 일본기업이나 당신 개인의 이익(?)을 위해서 당연한 조치라는 것을 받아들여야만 한다고 서술하는데도 이에 대한 비판이나 억울함을 호소하는 분위기를 찾을 수 없다.

도리어 '아멜리 노통브의 농담'이 시의적절했다면서 이 소설을 계기로 '일본의 문화'를 서양에 알릴 수 있는 기회로 삼고 앞으로는 더욱 더 '일본의 문화'에 잘 적응할 수 있는 서양 사람들의 도전을 환영한다는 '프론티어(?) 정신'을 설파하는데 할애하고 있는 듯 싶다. 여기에 한국의 독자들도 '반면교사'로 삼는 누를 범한다. 일본과 마찬가지로 한국의 직장문화도 '잘못되고 고쳐야 할 점'이 많으니, 아멜리와 같은 서양사람들의 '냉철하고 객관적인 비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서 바꾸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면서 말이다.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동양인이 서양(유럽)의 기업에 취직했다가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비판'을 넘어 '맹비난'을 퍼부은 소설을 쓰면, 서양도 그 책을 기꺼이 뒤쳐내어 자국의 잘못된 직장 문화를 개선하는 계기로 삼을 것 같은가? 천만의 말씀일게다. 오히려 무례하고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면서 국제사법재판소에 재소를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왜 이 소설에 극찬을 아끼지 않는 걸까? 나는 매우 불쾌하다. 아멜리, 당신이 뭐 돼? 67년생이면 87년도에 일본기업의 문화가 비판을 넘어서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할만큼 불쾌하기 짝이 없다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 당시 일본의 경제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경제 2위' 달성이라는 기염을 토하며 어마어마한 성장을 하고, 전세계가 '일본의 선진 기업문화'를 배우고자 하는 분위기였다. 물론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그 당시 일본 기업의 행태는 끔찍할 정도의 '고강도 노동'을 당연하게 여기는 잘못을 저지른 '인권유린의 현장'일 수 있지만, 적어도 1999년 당시에만 해도 맹비난을 할 정도는 아니었단 말이다. 그런데 아멜리는 그런 것을 알고서 그런 것인지, 모르고서 그런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두려움과 떨림'으로 이 소설을 펴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일본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는 표현은 잊지 않고 꺼내든다. 맹비난을 아낌없이 선사했지만 애정한다는 것만큼은 진심이라는 듯이 말이다.

정녕 사랑하기 때문에 따끔한 회초리를 들고서 사정없이 후드러 팬 것일까? 하지만 사랑했다고 보기에는 소설속에서 묘사된 '일본인의 모습'은 망신창이가 되고 말았다. 어쩜 인간이 '저런 짓'을 서슴없이 저지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말이다. 그나마 '자기(아멜리) 편'을 들어준 일본인에 대한 애정 어린 설명도 빼놓지 않았다. 하지만 '자기 편'을 들지 않은 일본인에 대해서는 인정사정 없이 뭇매를 선사했다. 인격 이하의 비난도 빼놓지 않고서 말이다. 이런 걸 '유머'라고 할 수 있을까? '잔혹한 유머'라고 설명하면 좀 덜 창피하고 덜 노여울까? 아니, 난 그렇지 않았다. 같은 동양인의 관점에서 굉장한 모욕으로 받아들였고, 이따위 소설을 '소설'이라고 펴낸 아멜리 노통브에 대해서 노여움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당신은 일본을 너무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그건 삐뚫어진 감정이지 결코 '사랑'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 따위 기괴한 애정 표현을 '사랑'으로 포장하지 말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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