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 2041 - 10개의 결정적 장면으로 읽는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리카이푸.천치우판 지음, 이현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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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2041 : 10개의 결정적 장면으로 읽는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리카이푸, 천치우판 / 이현 / 한빛비즈 (2023) [원제 : AI 2041 : Ten Visions for Our Future]

[My Review MMCXLIV / 한빛비즈 176번째 리뷰] 이 책이 출간된 2023년만 해도 AI(인공지능)는 아직 먼 미래의 일만 같았다. 약 20년 뒤의 미래에 벌어질 일상을 상상한 'SF소설'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더구나 그때가 되면 내 나이는 70대에 접어들게 된다. 정말이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쿨럭쿨럭. 암튼 그때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상상을 하더라도 내가 누릴 일상의 편리함은 그다지 실감할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2년이 지난 2025년이 되니 AI 기술은 급격히 발달했고, AI의 수준을 넘어 AGI(일반인공지능)까지도 구현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나오게 되었다. 그것도 짧게는 2년에서 5년 이내로, 길게는 10년을 넘지 않을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AI가 주는 편리함을 기대할 수 있는 내 나이는 70대가 아니라 여전히 50대 내지 늦어도 60대에는 실현가능해진다는 얘기다. 그때가 되면 아직 '근력'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이고, 충분히 'AI의 편리함'을 누리며 일상을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AI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내 삶'에 결정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쉽게도 나는 '모태솔로'라서 내 것을 물려줄 직접적인 유산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겐 결혼을 한 여동생이 있고, 내년 1월에는 예쁜 조카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아이가 맞이할 일상은 아마도 AI와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이 있던 젠지세대와의 격세지감도 상당히 컸는데, AI가 일상속에 녹아든 세대와는 어떤 격차를 느끼며 살아갈까?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겐 AI와 친해질 의무가 발현된 셈이다. 내 남은 여생을 위해서도, 내 조카의 일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뭐, 미래 세대를 위한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에 AI를 일상속에 녹아들게 '결정'하는 일에 신중을 기하고 싶은 생각 뿐이다.

사실, 기술혁신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곤 한다.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양의 기계가 사람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자, 이전에는 값비싸게 사야만 했던 '상품'을 값싸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물자의 풍족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엄청난 풍요를 누릴 수 있었고, 일부는 부를 쉽게 쌓을 수 있게 되어서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졌고, 일자리를 잃고 빈곤해진 사람도 부지기수였으며,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공장의 굴뚝에서는 유독한 매연을 뿜어내며 환경오염을 심하게 만들었다. 급기에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 현상이 일어났고,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기후위기까지 찾아와 생존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불과 400여 년 전에 시작되었고, 최근 100여 년 동안 문제는 더욱 심해져서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치루며 엄청난 인명살상을 감내해야 했고, 급기야 하나 뿐인 지구의 환경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엄청난 기술혁신 발전에 제동을 걸었고, 무분별한 혁신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기술혁신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는 지혜를 보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맨해튼프로젝트'로 인한 핵무기 개발이었고, 이 핵무기를 사용했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위험성을 실감하자 전세계는 핵무기를 만들긴 했지만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인류는 기술혁신 발전을 막을 수는 없지만,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통제력'을 발휘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말이다. AI가 일상속으로 파고들었을 때 누릴 수 있는 편리함은 바라 마지 않겠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점'이 나타나게 된다면 과연 AI에 대한 '통제력'을 인간이 구사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딥페이크 라든지, 자율주행차 등과 같은 10가지 사례에서 보여주는 '편리함'만을 누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은 골치 아프겠지만 힘겹게 '컨트롤'할 수는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AI 기술이 더 발전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까지 처리할 수 있는 AGI(일반인공지능)으로 훌쩍 성장(!)한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왜냐면 일단 AGI는 인간의 지능을 넘어선 '특이점(싱귤래리티)'이 지난 이후가 될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AGI를 '신(God)'에 비유하고, AGI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등장할 거라는 전망까지 서슴지 않고 있지만, 그 정도까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모든 질문을 AGI에게 던지고 '답'을 기다리는 일상을 살며, 심각하게는 'AI의 노예'처럼 AI의 명령(?)에 순순히 순종하는 일상을 살게 될 거라는 우려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다. 챗GPT에게 '질문'을 던지고, 일상적인 '대화'까지 시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심각한 '대인기피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왜냐면 사람과의 대화는 '배려'는 기본이고, '상황'에 따라 격식을 차려야 하며, 특히 이성간의 대화인 경우에 성범죄에 해당하는 '언어(성)폭력'과 '성희롱' 등등 신경 쓸 것이 너무너무 많은데 반해서 AI와의 대화는 그런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나 '내 취향'에 딱 맞는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뭐든 '칭찬 일색'이다. 아무리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달라고 부탁(?)을 해도 AI는 "당신이 최고야!"라는 기본적인 배려(?)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무심한 사람일지라도 AI와의 대화는 사람간의 대화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똑똑한 AGI가 등장한다면, 유력한 인기인들, 예를 들어 수많은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아이돌'이나, 강대국의 '정치인', 거대기업의 '총수(CEO)', 심지어 종교계의 '수장'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AGI가 '나쁜 마음'을 먹을 가능성은 없지만, 누군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줘. 아니, 그럴 것 없이 네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실행해!"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AGI가 어떤 결론을 내리고 어떤 실행을 행할 것인가? 어떤 SF소설에 나온 시나리오대로 '인류말살 프로젝트'를 실현하려 애쓰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최소한 '인간의 최종 통제권'을 발동해서 AGI의 그런 시도를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통제권'을 가진 사람에게 접근해서 교묘히 인류말살을 실행에 옮기게 만들도록 유혹(?)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다. 실제로 AI가 구현되고, 일상속의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갈 때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 'Y2K 위험상황'을 예상했지만, 단순 해프닝으로 결론이 난 것처럼 말이다. 일단 위기감지를 인간의 지능으로 할 수 있다면, 인간은 기술혁신으로 그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그 믿음은 잘 이어져 오고 있고 말이다. 그래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시회문제', '경제문제', '기후위기' 등 산적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I 기술혁신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샘 올트먼, 일론 머스크, 잭슨 황 등등 말이다.

이 책을 쓴 저자들도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에 줄 혜택'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먼저 인공지능은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낼 것이며, 2030년쯤에는 17조 달러가 훌쩍 넘는 이익 창출을 해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창출한 경제 가치로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가장 먼저 '빈곤과 기아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공생관계'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스마트폰을 '소유'하듯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인공지능을 '개인비서'처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업무효율'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는 '교육과 돌봄'까지 단박에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밖에도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여러 난제들을 인공지능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아주 밝은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초래한 심각한 피해와 문제점도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덕분에 이 책의 첫 인상이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SF소설>로 읽히게 되고 나름 '공포물'에 준하는 무서운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뒤에 설명하고 있는 '과학저널'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으면 그런 우려는 뒤로 하고, 예상된 문제점을 극복한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속된 말로 '병 주고 약 준다'는 느낌도 받긴 하는데, 출간된 지 2년 여가 지난 시점에서 보면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깊이 통찰하며 읽어보길 권한다. AI는 아직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기술혁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점은 '한 번 실행하면,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인류보다 더 똑똑한 AGI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통제력은 사실상 무력해진다. 물론 AGI에게 인류멸종과 같은 끔찍한 일을 '실행'시킬 멍청이는 없겠지만,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역사속에 그런 멍청이가 종종 등장한 것도 사실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게 AI가 통제하는 세상'을 만들면 인류는 AI가 제공하는 혜택만 누리면서 편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글쎄...그건 인간이 'AI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사실만 부각된 듯 싶고, 그게 아니면, AI를 신으로 추앙하는 '신흥종교'가 나타나 온 인류를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만들지...암튼, AI를 친구로 사귀게 되는 가까운 미래의 일상이 좀 더 먼 미래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깊이 통찰해봄직 하다는 생각뿐이다. 현재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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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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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 동아시아 (2025)

[My Review MMCXXXVI / 동아시아 8번째 리뷰] 각설하고,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의 개발' 과정 전체를 모두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의 지능보다 떨어지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으로 만족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지능을 훌쩍 뛰어넘는 인공일반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을 강행할 것이냐? 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현재의 고민이다. 이를 더 간단히 이해하려면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약 인공지능'과 인간의 통제가 불필요한 '강 인공지능'으로 구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 선택의 편리를 위해 간략하게 두 가지 인공지능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겠다.

인공지능 개발의 꿈은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옛날부터 존재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신들의 만찬에서 활약한 '스스로 움직이는 술쟁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들만이 마신다는 '넥타르'나 '암바사'를 무한정 운반하는 일종의 '인간 아닌 하인' 노릇을 한 것인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공지능 로봇'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오래된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노력은 1950년대 이후부터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바로 '컴퓨터의 등장' 덕분이었는데, '인간의 지능'을 대신할 수 있는 대상이 드디어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의 등장이 곧바로 '인공지능'을 실현시켜 주지는 못했다. 특별한 '계산 능력'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긴 했지만, 여전히 '한정된 재능'이었고, 더구나 '인간의 명령'이 없으면 스스로 복잡한 계산을 해서 결과를 내놓지도 못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더 '인간과 닮은 생각', '인간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 더 나아가 '인간의 명령'이 따로 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척척 해내는' 인공지능로봇을 개발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 실현은 착착 진행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난관은 엄청났고 잘 되는 듯 싶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드디어 '인공지능'은 그 실현가능성이 매우 높은 방법을 마련하였다. 바로 '빅 데이터'를 활용한 '딥 러닝'을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사실, 컴퓨터가 인간과 비슷한 사고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뇌용량'에 해당하는 방대한 저장매체와 '인간의 신경세포'를 닮은 '전산통합장치'만 있으면 가능했다. 문제는 그것 자체만으로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고, 그것을 운용하기에 엄청난 성능의 GPU(Graphics Processing Unit)가 다량으로 필요했으며, 설령 이 두 가지를 갖췄다고 해도 이런 어마어마한 시스템을 잘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원'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은 제대로 운용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가까운 미래에는 이 모든 난관이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AGI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춘 '강한 인공지능'이 탄생을 앞두고 있는 현재다.

그럼, AGI가 탄생하면 어떤 일들이 가능할까? 먼저 인간이 풀지 못한 숙제를 AGI가 대신 풀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난치/불치병 문제를 해결해서 인간의 생명연장도 더는 꿈이 아니게 된다. 또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서, 지금껏 인류가 누리던 경제적 풍요와 더불어서 지구의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게 만들어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게 만들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더불어서 전세계적으로 만연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도 싹 해결할 방법을 마련해서 온 인류가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하는데 톡톡한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인간의 노동'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게 되어 인간은 더 이상 힘든 노동을 하지 않아도, AGI가 운용하는 시스템 속에서 풍요와 여유를 즐기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인간이 상상하는 '파라다이스(천국)'와 '유토피아(이상향)'가 실현되는 것이 연상되는 것과 동시에 불안감이 슬슬 들지 않는가? 그간 수없이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속에서 '천국'속에 도사리고 있는 '지옥'을 발견할 수 있었고, '유토피아'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디스토피아'였다는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서 AGI가 만들어낼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실제로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낙관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바로 그 대목을 더 자세하고,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섬뜩할 정도였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막연한 두려움으로 떡칠을 한 것이 아닌 '과학적 증명'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더욱 섬뜩했다. 우리가 과학만능주의를 맹신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맞을 것인지, 속된 말로 뒤통수 조심하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정신이 번쩍 드는 소감이었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동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지구의 모든 것은 '인간의 몫'인냥 인간 마음대로 처리하며 살았다. 그런데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등장하게 된다면, 더구나 그것이 너무나도 '인간과 똑같은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자신보다 떨어진 지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가 말이다. 물론 겉으로는 '인간과 친구로' 지내는 척 할 것이고, '인간을 돕는 일'만 하겠지만, 그간 인간이 '인간보다 지능이 떨어진 동물'을 어떤 취급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본다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더구나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존재'가 언제까지나 '인간의 도구'이자 '인간의 노예'로 만족할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한낱 기계에 불과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전원버튼'을 눌러서 간단히 꺼버리거나, 인공지능을 탑재한 '몸체(로봇)'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통제가능'하지 않겠냐는 낙관론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AGI가 가동하는 시점에서는 '전원차단'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지능이 '개인용 컴퓨터(pc)' 한 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서버(전산망)'속을 누비고 다닐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 서버만 차단한다고 해서 완전하게 소멸시킬 수는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원차단'을 강행한다면 인류는 모든 전기장치를 다 꺼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기장치를 다시는 사용할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인류는 디지털적인 삶을 포기하고 아날로그적인 삶으로 되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다시, 돌과 나무, 흙을 이용하는 '석기시대'로, 간단한 금속을 이용하는 '철기시대'의 연장인 조선시대쯤으로 문명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과연 현재의 인류가 그 옛날로 되돌아가서 살 수 있을까? 그나마 전쟁이 아닌 평화가 이어질 거란 상상에서나 '조선시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자. 인공지능에 대한 '통제권'을 인간이 소유하는 '약 인공지능'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공지능을 더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능 개발을 마치고 '강 인공지능'을 활성화시키는 버튼을 누르고 결과를 기다릴 것인가? 지금 당장으로썬 어떤 미래가 더 나은 미래인지 장담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는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생긴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인간을 돕고,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반반'은 아닌 것 같다.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무(無)'에서 탄생해서 스스로 학습한 결과에 따라 엄청난 지식을 쌓은 것이라면, 선함과 악함의 기대치를 반반으로 놓을 수 있겠지만, 그동안 쌓은 '인류의 모든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낙관적인 결과를 기대하기는 정말이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쯤 되면, AGI가 천사일지, 악마일지, 어렵지 않게 가늠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약 인공지능에서 멈출지, 강 인공지능 개발을 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 선택권이 현재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강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은 기정 사실이 되었으며, 만약 우리가 만들기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적국'이 먼저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의 AGI(강 인공지능)를 만들 나라는 '미국'이어야 하고, 절대로 '중국'이 먼저 만드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제3위권 그룹'에 대한민국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윤석열과 그 일당이 저지른 헛발질 때문에 한참 뒤쳐지고 말았고, 다행스럽게 미국에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 큰 헛발질을 하면서 '미국'이 크게 휘청거리는 상황이라 추격할 여지를 남겨두었지만, 그 사이에 '중국'이 먼저 만들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이 먼저 만들면 '천사 AGI'이고, 중국이 먼저 만들면 '악마 AGI'일거란 장담도 할 수 없다. 그보다는 '내겐 천사'일테지만, '남에겐 악마'처럼 보일 거라는 쪽이 더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그래서 AGI가 만들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런 구도 속에서 다른 결론이 내려질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강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하는 세상은 곧 찾아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가 뭘 준비할 것이 있을까? 이 책에서는 현재의 인간은 '개미'에 빗대고, 앞으로 탄생할 인공지능을 '인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개미 가운데 아인슈타인처럼 뛰어난 지능을 가진 개미가 있다고 판명이 난다고 하더라도 '인간(미래의 인공지능)'이 그 '개미(훗날의 인간)'를 어떻게 처분(!)할 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격차'가 존재하는데 뭘 대비할 수 있을까? 어떤 대비가 소용 있을까?

정말 십분 양보해서 '램프의 지니'와 같은 전지전능한 노예를 갖게 되는 상상을 해보자. 인간은 그 전지전능한 노예에게 무슨 소원이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할 지도 모른다. 허나 이야기속 '램프의 지니'는 주인을 해칠 수도 없고, 인간을 살해하는 일도 할 수 없는 따위의 '마법(족쇄)'가 채워져 있다. 그래서 램프의 주인은 안심하고 지니를 노예로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 인공지능'에게 누가 '마법 족쇄'를 씌울 수 있을까?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인간을 해치면 안 된다는 '명령'에 순순히 따를까? 그걸 장담할 수 있다면 인류의 미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맘처럼 안 된다면? 오히려 인간이 노예처럼 전락하고 말지 않을까? 문득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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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뇌, 보수의 뇌 스켑틱 SKEPTIC 42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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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켑틱 42호 : 진보의 뇌, 보수의 뇌>  스켑틱 협회 / 바다출판사 (2025)

[My Review MMCXX / 바다출판사 16번째 리뷰] 전세계적으로 '극단의 대립 시대'를 살고 있기에 나온 것 같다. 이 책이 출간한 2025년 6월의 우리도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대강 대치'를 보는 듯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윤석열이 탄핵 되고 '이재명 정부'가 탄생했지만, 극우집회는 계속 되었고 점점 극렬해진 집회 참석자들은 '서부법원 폭동사태'를 일으켜 난장을 이루었다. 그렇게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0월인 지금까지도 '극우세력'들은 내란을 부정하고 이재명 정부의 발목을 잡으며 어떡하든 '트럼프의 지원'을 바라며 트럼프가 원하는대로 '혐중시위'에 나서며 기대를 품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길 포기한 듯 싶을 정도다. 현재 상황에서 '트럼프가 바라는대로 다 해주면' 대한민국이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트럼프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짜고서 '대한민국 경제'를 폭망시키기 위해 협작을 했다는 정황까지 다 드러났는데도,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서둘러 마무리하라고 외치고, 일본보다 자동차 관세를 낮추지 못했다고 대한민국을 '무능하다'고 폄하하는 논리는 뭐란 말인가? 정말이지 이런 족속들과 함께 살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이렇게 단순한 '의견의 차이'를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를 부르고, 증오를 부추기고 있다. "너희는 틀렸고 우리만 맞다"는 식의 무지한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저들의 '비이성적'이고 '무논리적'인 행태를 보면서 어찌 저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최신 뇌과학 연구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보수주의자들의 '편도체'는 진보주의자보다 크고, 진보주의자의 '전대상피질'은 보수주의자보다 더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한마디로 둘 사이의 '생각(판단)을 결정하는 뇌 부위'가 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수주의자들은 '본능적'으로 생각을 하고, 진보주의자는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보니, 서로 대화를 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본능에 충실한 사람과 이성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말하려는 사람이 어찌 '격식'을 차리고 '점잖'을 빼면서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지 않으면 다행인 셈이다. 그나마 우리는 '촛불' 밝히고, '응원봉' 들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집회라도 하지만, 외국의 집회 현장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니더냔 말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폭력적인 양상이 펼쳐져서 수많은 희생자도 나오게 되고 말이다.

한편, 유전학 연구에서는 '정치 성향'이 최대 65%까지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판단마저 '이성적 판단'에 결과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부모님에게 물려 받는 유전자의 영향력'이 더 결정적이란 소리다. 거기에 '정치적 환경'까지 조성이 되어 있으면 부모의 정치적 성향이 자녀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결과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뇌과학적 결과와 유전학적 결과를 놓고 보면, 우리는 대부분 정치적 성향을 '무의식적인 범주'에서 이미 결정되었고, 그 영향력에 알게 모르게 지배 당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니 '극단적인 대립'은 쉽게 풀릴 이유가 없는 셈이며, 더구나 '스마트폰'과 '너튜브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아서 '보고 싶은 뉴스'만 줄기차게 '보고 또 보면서' 자신이 정치적 성향이 '확정적'이고 '편향적'으로 자리 잡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극단적인 대치 상황'은 개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인가? 과학은 문제를 진단할 뿐만 아니라 해법도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과학이 제시하는 '극단적 대립의 해법'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의 뇌는 고정불변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환경과 경험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민주적 시스템만 보장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뇌를 가장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타 집단과의 접촉을 늘리는 것'이다. 물론 만나서 싸운다면 소용이 없다.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고, 상대의 감정과 생각도 헤아려 보려는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면, 극단의 대립은 결국 '대화와 타협의 장'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수 있다고 한다. 뭐, 과학이 내놓은 해법이란 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했던 해결법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훨씬 더 안심이 되지 않은가? 뭔가 더 어려운 방법을 제시했다면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대화와 타협이 말이 쉽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또한, 아예 '뇌구조(?)' 자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도 너무 잘 알지 않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과학이 제시한 해법일지라도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만남의 장'에서는 극적인 타협과 타결을 내렸더라도, 서로의 진영으로 되돌아가면 말짱 도루묵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상황에서의 해법도 '과학적 제시'를 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극단적인 대립'이 결코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양쪽 진영 모두가 인정하는 바라는 사실이다. 단지,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만 옳은 말을 하니 너희들은 사라졌으면 좋겠어'라는 목소리만 높이는 것이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겠는가? 총이라도 들고서 쏴야 속시원히 해결될 것 같은가? 실제로 미국은 '총기소유'가 합법인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내전(시빌워)'이 발발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총을 들고 가장 가까운 이웃집부터 방문해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움을 해결하겠다고 '군대'를 동원하게 된다면...그 뒷일은 상상에 맡기겠다.

진보와 보수가 바라는 것이 진정 이런 혼란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런 바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대화와 타협의 장'으로 나와 서로 허심탄회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경청해주는 일이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란 점이다. 설마 '대한민국을 망치기 위해서' 노력중이라면, 생각을 고치길 바란다. 진보든, 보수든, '대한민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 할 종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미국을 위해서', '일본을 위해서', 그밖의 '다른 이익을 위해서' 애를 쓰고, 그토록 혐오와 증오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면 결단코 용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뇌구조가 '진보쪽'이든, '보수쪽'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얼마든지 대화하고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무 걱정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뇌구조가 만에 하나라도 대한민국에 해악을 끼치는 쪽으로 작용하려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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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3 - 넓은 변방에서 부딪치는 천하의 도리 쾌자풍 3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쾌자풍 3 : 드넓은 변방에서 부딪히는 천하의 도리>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X / 해냄 5번째 리뷰] 아직 완결되지 못한 소설이 또 하나 있다. <치우천왕기>도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출판사'가 바뀌는 헤프닝을 거쳐 결국 '완간'이 되긴 했지만, <파이로 매니악>과 마찬가지로 4권 출간을 앞두고 '함흥차사'가 되고 만 케이스를 만들고 말았다. 일찌기 <퇴마록>이란 '대서사'를 완결시킨 이우혁이기에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꽤나 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10년이 넘도록 '완결'도 하지 않고서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은 '이우혁답지 않다'고 단언하고 싶다. 어쨌든 '뉴 퇴마록(가제)'으로 <퇴마록>의 뒷이야기를 쓰겠다는 결의(?)를 내비쳤고, '또 하나의 지구(!)'를 만들면서 퇴마사들이 있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퇴마사들이 없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구분해서 쓸 수도 있음을 밝혔으니, 살포시 기대할 따름이다.

<쾌자풍>은 별 능력도 없고 덜 떨어진 조선 포졸 지종희가 중원무림의 절정고수조차 풀지 못하는 난제를 얼렁뚱땅인 방법이지만, 의외로 절묘한 방식으로 찰떡같이 해결해내는 '블랙 코미디'같은 유쾌한 소설을 쓰려던 것 같다. 그런데 애초에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으나 '사안'이 중대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해나가다보니 그런 능력조차 능력이라면 능력이랄 수 있으니 '초기의 캐릭터 컨셉'에서 실패했거나, 부담을 느끼고 더 이상의 사건 전개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 이는 <파이로 매니악>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극한'으로 내몰다보니 '풀어낼 이야기'가 너무 부담스러워지고, 별다른 능력도 없이 '정의감' 하나로만 버티다가 더는 해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용두사미'격으로 어설프게 이야기를 결론 짓는 것보다는 더 많은 심사숙고를 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암튼, 이 소설은 <쾌자풍>이라고 한다.

<쾌자풍>은 의외로 '도리'에 대한 물음을 곧잘 던진다. 사마천이 역사서 <사기>를 지어놓고 '천하의 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지만, 이우혁은 <쾌자풍>을 써놓고서 '천하의 도리'를 논하고자 하는 모양이다. 왕조시절의 '천하의 도'란 왕도정치의 궁극적인 실현이 가능하겠느냔 물음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선한 왕이 선정을 베풀어서 온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천하를 평정해서 외침 걱정없이 누구나 안빈낙도를 실행할 수 있는 시절을 구가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어디 '임금 하나'만 잘나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천하의 공도'라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입에 올리며 세상이 저들 꼴리는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도리'가 어긋났다면서 임금 탓으로 돌리고, 저들의 맘에 흡족하지 않아 수틀리기라도 하면 임금을 갈아엎으면 어긋난 도리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곤 하니 문제란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정치를 공부하고, 경제를 공부하는 것들이 모두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 같다. 그렇다면 명나라 초기에 발생한 '토목의 변', '탈문의 변'이 벌어져서 발생한 억울한 일을 당한 사연을 한 번 생각해보자. 외적(몽골 오이라트)이 쳐들어왔는데 무능한 황제(정통제)가 간신의 언변에 속아 몸소 출정을 했고, 제대로 군사를 다루지 못해 첫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고 황제가 산 채로 포로가 되어 버린 사건이 '토목의 변'이다. 명나라로서는 최고의 위기 상황을 맞이했고, 포로가 된 황제를 앞세워서 북경을 포위 공격한다면 명나라로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황제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성을 지켜냈더라도 볼모 신세인 황제가 죽임을 당했더라면, 나라를 구했더라도 황제를 구하지 못한 죄를 물었을 것이고, 반대로 황제의 목숨은 구했더라도 나라는 망해서 온백성이 외적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신 우겸은 '새 황제(경태제)'를 내세워 국가를 온전히 살리는 수를 마련했고, 이는 외적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아주 절묘한 묘수였다. 그렇게 외적을 물리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패전을 하고 퇴각을 하는 오이라트의 군대는 애써 잡았던 명 황제(정통제)를 살려서 돌려보냈기에 '문제'가 발생했다. 한 나라에 '두 명의 황제'가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겸은 급한대로 정통제를 '상황'으로 삼아 자금성의 깊은 곳에 유폐시켰고, 경태제로 하여금 국정을 이끌어나가게 하였다.

이렇게 일단락이 되어서 정통제가 천수를 누리다 죽고, 경태제의 후손으로 하여금 황실의 명맥을 잇게 하면 순탄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어린 경태제는 건강이 안 좋았고, 재위 8년째 그만 붕어하고 만다. 그리고 뒤이어 새로운 황제로 '천순제'가 등극했는데, 이 사람은 과거 '정통제'로 불리던 이였다. 옛 임금이 다시 재위에 오른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우겸의 세력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하고 말았으니, 이를 '탈문의 변'이라 부른다. 비록 역적으로 내몰며 죽었으나 백성들은 안다. 우겸이 충직한 신하였으며, 큰 위기를 맞아 슬기롭게 처신하여 만 백성을 위한 훌륭한 정책을 주도한 훌륭한 위인이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홍치제' 때가 되자 억울하게 역적으로 내몰려 죽임을 당한 '우겸'을 충신의 반열에 올렸고, 억울하게 죽은 넋을 기려 '사면복권'하였으며, 살아남은 우겸의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모든 죄를 묻지 않는다고 일단락을 하였다. 비록 황제의 위치에서 '사과'나 '사죄'라는 표현을 쓰지는 못하기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다한 셈이다.

그런데 당한 처지에서는 어찌 억울한 것이 없겠는가. 특히 우겸의 아들 우담에겐 지울 수 없는 치욕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복수를 다짐해도 이상치 않을 것이다. 이는 제삼자 입장인 백성들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아무리 황제라지만 나라를 구한 의인인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목숨을 앗아가고 역적으로 몰아 패가망신을 당하게 하다니, 너무 심한 처사라고 우담을 동정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허나 '왕조시대'에서는 그런 억울함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충신'이란 이름으로 죽어나간 우국지사들이 차고도 넘쳤던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황제를 모시는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지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랏일을 하다보면 그런 일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사실 그런 각오도 없이 국록을 먹는다면 책임감도, 사명감도 없는 썩은 관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우담은 관리가 아니니 어떤 기준으로 평가를 해야 마땅하냔 말이다. 충신의 아들이라도 관직이 없으니 백성의 관점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우담은 그런 하소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현 황제 '홍치제를 죽이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천하의 공도'를 근거로 내세운다. 역대 왕조를 돌아보면, 나라의 큰 변고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황제'에게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황제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판단되면 '역성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역모가 아니라 '천심(하늘의 뜻)'이었다고 포장(?)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담은 과거 '정통제(천순제)'가 저지른 잘못과 이를 비호했던 무능한 간신배들을 처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혁명'을 일으켜서 '천하의 도'가 과연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심판을 받아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논리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명나라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가능한 논리다.

그렇다면 명나라 백성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민주사회도 아니었으니 굳이 백성들의 생각 따위는 들으나 마나일테지만, 그래도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했으니 백성의 의견도 들어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에도 바쁜 일상을 보내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백성들에게 뭐라 묻는다고 제대로 된 의견을 이야기해줄 턱이 없다. 더구나 백성들은 '힘(권력, 능력)'이 없다. 하다 못해 경제력도 없어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뒷배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나마 백성들 가운데 '무력'을 지니고 강호를 호령하는 '무림 집단'은 나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들 집단 중에는 '학식'을 가진 이들도 있고, '경제력'을 갖춘 부호도 있었고, 이래저래 수틀리면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무력'도 가지고 있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림의 도는 '의리'를 따르는 편이라, 크게는 황제에 충성을 다하는 것을 최선이라 여기지만, 때에 따라서는 '의'를 앞세워서 충보다 더 단단한 '의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무림 집단의 생리다. <쾌자풍>에서는 남궁칠협을 우두머리로 삼은 '남궁세가'가 중원의 무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바로 남궁칠협은 우담이 내세우는 논리가 더 경우에 맞다고 여기고 우담의 가담한 역모에 참여도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역모를 막으려 애쓰지도 않겠다며 '중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게 우리의 관점과는 사뭇 달라 의아해 보인다. 한국사람들은 위기에 강한 면모를 보여 평상시에는 '내부갈등'으로 심각하게 다투는 지경이라도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면 특유의 단결력을 뿜뿜하며 국난극복을 최고의 과제로 삼고, 이겨내는데 최선을 다한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그런데 중국사람들은 이게 아니다. 나라가 어렵고 힘든 것은 둘째 문제고, 첫째는 '의리'를 따지는 일이다. 그 의리에 따른 결과가 선하냐? 악하냐? 따지는 것은 둘째 문제다.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은 의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일본의 '무사도'를 따르는 집단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잘 보여주며, 소위 '조폭 집단'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행태이기도 하다. 평소에 '도리'에 대해 잘 따지며 '도덕'이니, '의리'니, '충성'이니 좋은 말은 다 따지던 놈들이 '다른 집단'에게는 일절의 양심도 없고, 도리도 없는 듯이 사람을 다칠 정도로 때리고, 심지어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왜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했냐고 물으면, 자신은 의리와 충성을 다한 일이기 때문에 반성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고 당당히 죗값을 치르겠다고 언성을 높인다. 물론 '법적 처벌'을 받아 판결을 받을 땐 온갖 비굴한 모습을 다 보이면서 말이다.

이런 모습은 절정의 무술을 보여주는 강호의 고수들도 마찬가지다. 고매하다고 자부하는 그들조차 '의리'를 따지면서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기이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작가 이우혁은 이러한 '중원의 의리'와 '천하의 공도'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착안하여, 포졸 지종희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들의 본모습을 파헤치고, 진정 별 것 아닌 인물이지만 '천하의 공도'를 잘 따르기만 한다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다소 엉뚱한 주제를 증명할 엉뚱한 캐릭터를 내세웠다. 만약 이우혁이 이 소설을 '완결'시킨다면 이런 주제도 완성시키고, '천하의 도'는 무력이나 권력, 경제력 따위를 뿜뿜하는 세력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지만 '선한 의지'로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따르는 이와 함께 한다는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완결'로 남는 바람에 모처럼 마련한 '천하의 도'를 실현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히틀러, 윤석열, 그리고 트럼프의 사례를 통해서 '힘 있는 사람'의 말로가 어떤지 잘 알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만약 그들이 가진 힘만으로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로 가득했을 것이다. 허나 '천하의 도'는 그런 이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잠시 잠깐 '그들의 손아귀'에 놓인 듯 싶어도, 결국엔 그들이 아닌 '선량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이들'에게 천하의 도가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착함', '도덕' 같은 것에는 절대적인 힘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무능'하고 '무력'해 보일 정도다. 그런데 '정의'라는 것과 함께 힘을 합치게 되면 '착함'과 '도덕' 같은 것들이 더욱 빛을 발한다. 왜냐면 그것에는 '한 점 부끄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뻔뻔한 파렴치한 이들을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강한 힘이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 '지종희'는 정의로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 다시 말해 '선을 넘지 않는 마음가짐'이 지종희로 하여금 한 점 부끄럼이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당당함이 꼬이고 꼬인 이들의 못된 심보를 단박에 치유하곤 한다. 이런 매력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왜 '미완결' 상태로 남겨 두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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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2 - 은밀하게 스며들어오는 중원무림의 그림자 쾌자풍 2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쾌자풍 2 : 은밀하게 스며 들어오는 중원무림의 그림자>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VIII / 해냄 4번째 리뷰] 2권까지 읽고 나니, 이우혁이 이 책 <쾌자풍>을 통해서 하고픈 말이 무엇인지 조금쯤 감이 잡힌다. 국어교과서에서도 늘 강조하는 '주제파악'을 잘하는 요령은 비문학 장르에서는 '중심문장'을 찾아내는 것이고, 문학 장르에서는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럼 여러 등장인물의 말과 행동을 다 파악해야 하느냐? 그러면 좀더 다각도로 다채로운 주제를 깊이 있게 다룰 수 있겠지만, 그 가운데 '주동인물'을 중점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할 것이다. <쾌자풍>에서는 그 주동인물이 바로 '지종희'라는 주인공이 틀림없다. 조선 포졸 지종희가 중원 무림의 고수를 일거에 제압하고, 여진과 몽골 따위의 시정잡배들까지도 눈빛 한 번으로 통솔하는 통쾌한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그 이야기에서도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 바로 '선(線)을 넘지 않는다'는 것이기다.

'선을 넘지 않는다'는 것은 한국 사람에게 너무 당연한 이치인 까닭에 그리 주목할 것도 없는 평범한 진리에 불과하다. 허나 이것이 한국과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는 외국에만 가도 그 '선'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고, 저 먼 서양까지 가버리면 애초에 그어진 '선'을 넘지 않는 철저한 무엇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런 경험이 우리가 넘지 않는 '선'과는 너무도 다른 느낌이 들 정도다. 우리네 경우엔 '선'을 넘었을 경우에도 말로 훈계하고, 경고하다가,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쌍욕을 던지고, 심하면 주먹이 오고 가는 정도에서 그치는 경우가 일반적이지만, 서양의 경우엔 '선'을 넘으면 일단 '총'부터 꺼내들고 점잖은 사람은 '경고사격'을 허공에 쏘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냥 총을 갈기고 다치거나 죽거나, 그런 문제는 '나중'으로 돌려놓고, 서로에게 유리한 증거를 내세우며 법정싸움을 하는 것으로 일단락을 지어버리기 때문이다. 이것에 대한 명백한 차이는 우리는 '선'을 넘어도 사람이 죽는 일은 거의 벌어지지 않지만, 외국에서는 '선'을 넘게 되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사람의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거나 '둘째 이유'로 밀려나는 일이 흔하다는 것이다. 이런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단 말인가?

<쾌자풍>의 주인공 지종희는 무공을 전혀 할 줄 모르는 사람으로 묘사되지만, 그렇다고 문약한 서생으로 그려지지도 않는다. 애초에 타고난 체력이 뛰어난데다 '신체적 능력'도 뛰어나서 조그마한 싸움기술을 가르쳐주면 곧잘 따라하는 '눈썰미'까지 장착(?)한 재주꾼이다. 그런데 이렇게 타고난 능력이 뛰어난데 무술이나 무예라는 '싸움기술'까지 가르치면 큰일(!) 치르겠다는 친형 지두희와 그의 스승(공운)이 지종희에게 일체의 싸움기술을 가르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 대신에 철저히 훈육하며 가르치려 했던 것이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중점적으로 가르친 것이다. 선천적으로 뛰어난 힘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이 종종 저지르기 쉬운 실수가 '제 힘만 믿고 함부로 주먹(힘)을 휘둘러 사람을 해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어릴 적 제 앞가림도 못하는 철부지들이 동네에서 뛰어놀면서 저지르는 일 가운데 '수틀리면 앞뒤 안 가리고 사람을 패서 제 잇속을 챙기는 일'이지 않은가 말이다. 그렇게라도 해서 자기 맘대로 일이 굴러가게 만드는 것에 맛들이게(?) 되면, 그놈은 결국 사람을 해치고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말종이 되고 만다. 사람 살아가는데 도리와 이치를 따지기에 앞서 '주먹'을 쓰면 쉽게 해결하고, 제 잇속을 단단히 챙길 수 있다는 쾌락에 쉬이 빠져들기 때문이다. 법과 도덕도 '주먹' 앞에서는 당장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타고난 싸움꾼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지종희에게 형 지두희는 '사람을 죽이는 일'은 결코 해서도 안 되며,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일'도 절대 해서는 안 될 일이라는 도덕적 가르침을 철저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런데 타고난 재주가 '엄청난 힘'인데, 그걸 쓰지 못하게 만들면 바보천치와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도 잊지 않은 지두희는 남몰래 동생 지종희에게 '싸움기술'이라고 할 수 있는 기초를 십수 년간 가르쳐 왔다. 꼭 필요할 때에는 그 타고난 힘을 써서 '제 앞가림' 정도는 할 수 있게 만들려는 목적이었고, 애초에 그런 힘을 타고났다면 '세상의 이치'로 따져서, 세상이 '그 힘'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그랬을 거라는 생각에 이르자 지종희에게 꼭 필요한 경우엔 '그 힘'을 쓸 수 있게 단련시켜 놓은 것이다. 그럼에도 무의식 중에라도 '나쁜 쪽'으로 그 힘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봉인코자, 지종희에게 '사람답게' 살아가는 도리를 가르치고, 그 핵심으로 결코 '선을 넘지 말라(어떠한 경우에도 살인을 하지 말라는 등의 도덕개념)'는 가르침을 뼈에 사뭇치도록 톡톡히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가르침은 천하를 들었다놨다 할 수 있는 엄청난 힘을 가진 지종희에게 먹혀 들어갔다. 아무리 시종잡배들 마냥 쌍욕을 즐겨쓰는 왈패처럼 굴더라도, 결코 지켜야 할 선은 넘는 법이 없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인식한 것이다. 왜냐면 그게 옳다고, 그게 공명정대하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한국 사람들이 특별한 가르침이 없어도 우리가 사는 사회에서 별다른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도덕개념'이다. 어떠한 경우에도 '사람의 목숨'보다 값진 것은 없다는 것 말이다.

사실, 이런 가르침은 우리만 가르치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우리가 아닌 다른 나라에서는 이게 잘 통용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힘의 논리'가 더 강렬하고, 더 받아들이기 쉽기에 그에 따르기 십상인 것이다. 쉽게 말해서 '강자의 이익'이 철저히 보장되는 것이 진리라고 이해하고, 때에 따라서 '강자의 요구'가 사람의 목숨인 경우일지라도 서슴 없이 목숨을 해치는 일이 종종 발생하며, 약자들은 이런 '힘의 논리'에 반박조차 하지 못하고, 그냥 받아들이는 것이 더 편하다(?)는 식으로 쭈구리로 살아가곤 한다. 왜냐면 강자에게 반박을 하면 '강자의 힘'에 자신이 피해를 볼 수도 있음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약자들은 별다른 반박도 하지 않고, 그저 억울한 일이 발생해도 '감내'하며 살아가는 방법을 저절로 터득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서는 이렇게 '힘의 논리'로 밀어붙이는 악당이 등장하게 되면, 아무리 약자들이라도 감내만 하며 당하지 않는다. 끝끝내 저항하고, 때론 무모할 정도로 반발하며, 설령 목숨을 잃거나 큰 손해를 볼지라도 순순히 당하고만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제 목소리를 분명하게 낸다. 왜냐면 우리 사회는 '힘의 논리'만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 상위개념으로 '도덕'을 따지고, 아무리 천하고 못난 사람일지라도 '목숨값(!)'이 결코 가볍지 않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당한 일에 맞서다 목숨을 다하는 일이 발생하면, 우리 모두는 분연히 일어나서 '함께' 저항하는 문화를 가지고 있다.

외국의 경우에는 '힘의 논리'가 워낙 강하다보니 부당한 일을 강요하는 악당이 등장해도 별다른 저항을 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그 힘에 맞설 '영웅(히어로)'의 등장을 꿈꾼다. 하나 뿐인 목숨을 허투루 날릴 수는 없고, 약자의 목숨쯤이야 아무도 신경 써주지 않으니, 부당한 악당의 불공정한 요구에 묵묵히 참고만 살다가 '영웅'이 등장하는 때에 맞춰서 '악당'을 물리치는데 힘을 보태곤 한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엔 그리 오래 참고만 있지 않는다. 특별한 영웅의 등장을 기다리지도 않는다. 특별한 힘이 없어도 누구나 특별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한 치의 부끄럼도 없는 도덕적 우월감(?)만 있으면 된다. 그럼 된다. 그게 '한국적 영웅(히어로)'의 특징이다.

이 소설 <쾌자풍>에서 '중원무림'은 거대한 힘을 가진 집단으로 묘사된다. 경천동지할 힘을 가진 '무림인'들이 그들의 싸움기술(무술)로 세상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데...뭐, 뻥 같지만, 그럴 법하기 때문에 따지지 않고 그냥 그렇다고 믿으면 편하다. 그럼 조선에는 그런 힘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느냐?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매한가진데 없을 턱이 있을까. 당연히 그 정도의 싸움기술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허나 조선에선 그런 힘을 가지고 있었어도 세상에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왜냐면 조선은 '육체적인 힘(武)'이 아닌 '정신적인 힘(文)'을 숭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중원에는 육체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름잡던 '무림(武林)'이란 세상이 있었다면, 조선에는 정신적인 힘을 가진 사람들이 주름잡던 '유림(儒林)'이 있었던 셈이다. 뭐, 중원의 무림과 조선의 유림을 단순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지금도 한국인들이 좀 뛰어난 인재가 있으면 '글공부'를 시키는 경향이 강한 것처럼, 중국인들은 '의협'이 강한 사람으로 키우려는 그런 경향을 선호한다는 점에서 비교할 수 있는 건덕지가 있다고도 본다.

또한, 지난 1권 리뷰에서도 한국인들은 '충의 논리'에 충실하다면, 중국인들은 '의의 논리'에 맹신(?)을 한다고 얘기했었는데, 그럴 정도로 중국인들은 '의협(義俠)'을 대단하게 쳐준다. 쉽게 말해, 정의를 내세우며 약자를 위해서 기꺼이 도와주는 의로운 사람을 대단한 사람으로 쳐준다는 말인데, 여기에 너무 심취하다보니 '의리'를 너무 앞세우고,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의 목숨마저 대신 갚는 대상으로 삼고, 살인자마저 의롭다고 옹호하는 경향이 '무림'에 대한 환상으로 커졌다고 볼 수도 있다. 그래서 뛰어난 무술, 검술, 심지어 내공(內功)까지 아우른 대단한 사람이 등장해서 세상의 정의를 수호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는데,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한 허풍에 불가하다고 본다.

이는 조선에서 대유행한 '유림의 폐해'를 보더라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조선의 글쟁이들이 모여서 저들끼리 글재주를 뽐내는 것에 그쳤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었으련만, '사림파'를 조직하고서 '훈구파'를 견제하는 것까지는 나름 성과가 있었으나, 훈구파가 사라진 뒤 '사림파의 천하'가 열리자마자 '붕당'을 형성하고 '당파'로 나뉘더니 서로간의 파벌싸움에만 혈안이 되어 '국정 발목잡기'를 기본 셋팅하며 나라꼴을 엉망으로 만드는데 일등공신이 되었다. 물론, 이를 부추긴 것은 '왕권 강화'에 목을 맨 조선왕실도 한몫 단단히 하였다. 대표적인 임금이 바로 '선조'와 '숙종'이다. 선조는 전운이 감도는 와중에도 '왕권'을 강화한다는 목적으로 '신권'을 약화시키기 위해 서인과 동인의 갈등을 조장하였다. 왕권을 제대로 강화하려면 임금의 실력을 키우는 것이 첫째이거늘, 제 실력을 높일 방도가 여의치 않자 신하들끼리 붕당을 조직한 것을 엿보다가 서로 싸움질만 하다 왕권에게 휘어잡히는 꼴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더 심각한 것은 '임진왜란' 전쟁이 한창일 때에도 이간질을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한양 도성을 점령하고 평양성까지 몰려오자 선조는 의주 국경을 넘어 명국으로 넘어가 제 살 궁리만 했더랬다. 그리고서 한조각 양심은 남았는지, 광해군에게 임금자리를 물려주고 '분조'를 이끌고서 조선을 지키라 명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마저 전쟁이 끝나자마자 광해군의 입지를 흔들며, 뒤늦게 낳은 '영창대군'을 적자로 삼는 등, 엄청난 폐해를 낳았다. 이를 해결코자 붕당을 타파하고 조선을 재건하기 위해서 애를 쓴 인물이 나왔으면 좋으련만, '유림'에서는 그런 인물이 좀처럼 나오지 못했다. 아니, 내세울 수 없었다. 여전히 저들의 파벌이 국가보다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숙종도 왕권강화를 위해서 '환국'을 일삼아 피비린내 나는 혼돈의 정치를 일삼았다. 서인과 남인이 '예송논쟁'으로 갈등이 심화하자, 이를 혁파하기 위해 서인의 영수였던 '송시열'을 사사시킨 임금이 바로 숙종이었다. 숙종 나이 14살때 벌어진 일이다.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일찍 완수했는데도 '유림의 세상'을 제대로 개혁하지 못하고, '환국'만 주도하며 유림을 대대적으로 숙청하는 것으로만 그치고 말았다. 일종의 말 안 들으면 죽는다는 전략이었으나, 그게 어디 조선 군중들에게 먹힐 전략이었던가? 결국 숙종의 뒤를 이은 '경종', '영조', '정조' 또한 유림들에게 한껏 휘둘리다가 정조 이후부터는 '세도가문'을 형성한 외척 유림들에 의해 국정이 좌지우지되어 나라꼴은 형편없이 망해갔다.

중국의 역대 황실도 마찬가지다. 무림이 적절히 활용되어 '외적'이 쳐들어왔을 때 국난극복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은 '무림 세력'들이 한족의 황실을 완성한 뒤에는 여지없이 토사구팽 당하며 나가떨어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러나 명태조 주원장의 황제 등극으로 그나마 일단락이 되는 듯 싶었는데, '토목지변'으로 인해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황제가 오랑캐에게 사로잡히는 일이 벌어지자 명국의 운명은 풍전등화의 꼴이 되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질 위기에 쳐하게 되었다. 이때 위기를 극복한 인물은 충신 우겸 덕분이었다. 무림은 큰 도움이 되지도 않았다. 오직 관직에 있는 뛰어난 관리의 지혜로 인해서 위기를 극복한 것이었다. 물론, 우겸이 새로운 황제(경태제)를 내세워서 포로가 된 황제(정통제)를 앞세워 항복하라고 할 위기를 극복한 것은 훌륭한 처사였으나, 문제는 포로가 되었던 정통제가 살아서 다시 명국으로 되돌아왔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8년 뒤, 경태제가 건강상의 문제로 일찍 죽자 상황으로 물러났던 정통제가 다시 황제로 재등극하고 '천순제'가 되자 충신이었던 우겸을 숙청해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수많은 중국인들은 '우겸의 죽음'을 슬퍼했지만, 황제(천순제)가 저지른 일이었기에 누구 하나 앞장 서서 황제의 잘못을 지적하는 이는 없었다. 훗날 천순제의 손자뻘인 효종(홍치제) 때에 와서야 죄를 묻지 않고 복권 되었다. 이때가 되어서야 '무림의 세계'에서도 우겸의 충성스런 행위를 이야기하기 터놓고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우겸의 아들이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는 것에 동조하는 분위기를 형성한다. 허나 이때가 되면서 무림인사들 가운데에도 관직을 얻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세력 가운데 '우겸의 아들'이 사사로운 복수를 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저들끼리 뭉치는 분위기가 형성된 것이다. 여기에 남궁칠협이라는 걸세출의 영웅을 내세운다. 당대 무림의 고수인 셈이다. 물론 무술의 달인이라도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는 죄인을 직접 처단하기는 뭣하다. 왜냐면 죄인의 벌을 행하는 주체는 당연히 '관리'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국의 사법체계에 속한 '동창'이 이를 수사하기 시작하는데, 여의치가 않다. 우겸의 아들이 상당한 '고수'였기 때문이다. 이런 고수를 상대하기 위해선 동창 관리쪽에서도 '고수'를 내세워야 한다. 헌데, 그런 고수를 내보내는 족족 '함흥차사'마냥 죽어나자빠지니 문제다. 그래서 동창의 우두머리 '유온'은 남궁세가의 힘을 빌리는 꼼수를 부리려 남궁칠협의 단 하나뿐인 손자 '남궁수'를 일계급 특진시키며 비밀 밀사로 사건 수사를 위해 조선에 파견을 하는 것이 <쾌자풍>의 줄거리다.

뭐, 일일이 줄거리만 다 이야기하자면 한도 끝도 없기에 간단히 정리하자면, 우겸의 아들은 '여진족'의 틈바구니에 틀어박혀서 후일을 도모하며 사사로운 복수를 행하고 있고, 동창 수장 유온은 일찌감치 우겸의 아들이 범인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사건을 해결하려 요원들을 일일이 보내지만, 모두 실패하자 '무림 전체'를 다 동원해서 범인을 처단하겠다는 야심을 내보인다. 이 와중에 중원 무림의 최고봉인 남궁세가의 손자인 '남궁수'가 동창 비밀요원으로 조선에 파견되어 '조선 포졸 지종희'와 우연히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 지종희가 중원의 무림 고수들을 '육모 방망이' 한 자루로 일거에 일망타진해 버린다는 이야기가 이 소설의 핵심 줄거리다.

이렇게만 줄거리를 요약하면, 호쾌한 무협 소설처럼 보이지만, 저자인 이우혁은 단연코 '무협 소설'이 아니란다. 오히려 '인문학적인 상상력'을 발휘할 수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선보여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는데, 이게 또, 그런 식으로 읽으려니 '이야기꺼리'가 한도 끝도 없게 되었다. 다만, <쾌자풍>을 통해서 한국과 중국의 차이점을 재확인하면서 읽는 재미만큼은 제법 솔솔하였다. 요즘 <케데헌> 보는 재미로 사는데, 전세계에 '한류 문화'는 먹히는데, '중국 문화'는 발톱의 때만큼도 관심있게 쳐다봐주지 않는 현상을 읽는 재미와도 유사한 점이 많아서 새삼 재미나게 읽고 있다. 이래 저래 중국은 한국을 쫓아오기 한참 멀었다는 생각을 굳혀가며, '무협의 세계'도 읽어나가니 또 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이참에 김용과 와룡생도 '다시 읽기'를 하고픈 생각이 들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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