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지 않는 질서 - 의도를 벗어난 모든 현상에 관한 우주적 대답
뤼디거 달케 지음, 송소민 옮김 / 터닝페이지 / 202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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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질서 : 의도를 벗어난 모든 현상에 관한 우주적 대답>  뤼디거 달케 / 송소민 / 터닝페이지 (2025)

[My Review MMCLXIX / 터닝페이지 2번째 리뷰] 제목에 끌려서 읽고 싶은 책이었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애덤 스미스도 <국부론>에서 '보이지 않는 손'이 경제를 움직이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말이다. 실제로 오늘날에도 경제학자들은 애덤 스미스의 '조언'대로 경제를 잘 굴러가게 하기 위해서는 정부가 가급적 시장에 개입하지 말고 자유롭게 경쟁할 수 있도록 균형을 잡는 역할만 할 뿐, 인위적으로 규제를 하고 가혹한 형벌로 적극적으로 개입을 하면 잘 굴러갈 수 있었던 경제도 폭망에 이르게 된다고 한결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결코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경제전문가들이 애덤 스미스를 거들먹거리며 '보이지 않는 손'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해주는 만능치트키라고 말한다면 경제 비전문가일지라도 그를 한물 간 사람 취급할 것이다. 왜냐면 세계경제는 애덤 스미스가 살던 시대보다 훨씬 더 복잡해졌고, '경제위기'도 더욱 고차원적인 해법을 제시하지 않으면 제대로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의학기술적인 예를 하나 더 들자면,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환자들의 생명을 구한 '페니실린(항생제)'이 21세기인 현재에는 아무 짝에도 효험을 보이지 않는 '낡은 항생제'로 전락한 것을 잘 알 것이다. 질병을 일으키는 '박테리아'가 기존의 항생제에 면역이 생겨서 페니실린보다 훨씬 더 강한 새 항생제가 아니면 효험이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미 시중에 나와 있는 모든 항생제에 면역기능을 가진 '슈퍼 박테리아'가 존재한다고 밝혀지지 않았는가. 이런 슈퍼 박테리아에 의한 감염으로 생긴 질병이라면 현재의 의료진은 더는 치료를 할 수가 없다. 오직 '자연적인 면역력'을 증가시켜서 스스로 치유하는 기적이 일어나는 수밖에 기대할 것이 없는 것이다.

이 책 <보이지 않는 질서>를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뭐라 할 수 있을까? 십수 년간 심리학 치료를 해온 독일의 정신요법 의사인 뤼디거 달케가 쓴 책인데, 애초에 기대했던 '인문교양책'에서는 많이 벗어난 책이었다. 그렇다고 '종교책'으로 보기에도 그렇다. '과학책'은 더더군다나 아니고 말이다. 굳이 한 가지 콕 집어서 말한다면 '의학책'으로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그 가운데 '심리치료'에 핵심을 두었고, 우리에게 '위약 효과'로도 잘 알려져 있는 '플라시보 효과'의 아주 긍정적인 처방에 관한 깊은 조예를 선보여준 책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이 아픈 현대인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 책이라고 소개하면 딱 좋을 듯 싶다.

이 책의 저자는 말한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대립의 법칙'이 있다고 말이다. 서양인들에게는 좀 낯선 개념일 수 있지만, 동양 문화권에서는 널리 알려진 '음양 이론'으로 이해해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낮이 있으면 밤이 있고, 빛이 있으면 어둠이 있고, 선이 있으면 악이 있는 것처럼, 여자와 남자가 각각 '음'과 '양'으로 나뉘어 있는 것처럼 우리를 둘러싼 세계는 이렇게 '대립적'으로 존재하고 있다고 서문을 열었다. 여기서 중요한 개념은 바로 '긍정적인 생각'이 있으면 '부정적인 생각'도 있다는 것이다. 현대인들이 딱히 질병이 있는 것 같지도 않는데 실제로 아프다고 느끼는 까닭은 바로 이렇게 한 쪽으로 치우친 '극단적인 입장'을 고집하기 때문이라고 역설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인 생각이나 부정적인 생각 자체가 질병을 부르지 않지만, 각각의 대립하고 있는 '위치'를 고집하고 한 번 정한 '생각'을 바꿀 생각도 못하고,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여유조차 없기 때문에 고인물이 썩는 것처럼 질병에 걸린 듯 아플 수밖에 없다는 이치와 맥을 같이하는 메시지를 전한다.

그럼 이런 아픔을 어떻게 치료할 수 있을까? 다음에 전하는 메시지에 그 해법이 있다. 바로 '공명의 법칙'이다. 음과 양으로 대립하고 있는 세상이지만, 두 개념은 서로 '대립'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공명'하는 것이 대원칙이라는 것이다. 낮이었다가 자연스레 밤이 되는 것처럼, 빛과 그림자는 서로 한 쪽에만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위치를 바꾸기도 하고 서로 변하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럼 '선과 악'도 바뀐단 말인가? 우리는 하루동안에도 '착한 마음'만 품지 않는다. 때로는 악당보다 더 '나쁜 마음'을 품기도 하고, 때로는 변태처럼 심하고 이상한 '나쁜 마음'을 품기도 한다. 이런 사람이 정말 범죄자이기 때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우리는 이런 사람일지라도 '정상인'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나쁜 마음을 품었을 때 '실제 행동'으로 옮기는 경우 범죄를 저질러 나쁜 사람임이 밝혀지기도 할테지만, 대개의 경우에는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내면의 도덕법칙'에 해당하는 착한 마음이 작동하여 죄를 뉘우치고 진정으로 반성하는 경우도 생길 것이다. 이럴 경우에도 우리는 '대립 법칙'을 고집하게 되면 단 한 번의 실수를 저지른 사람조차 평생 범죄자로 낙인을 찍는 어리석음을 저지를 수도 있다. 그러니 어디까지나 '공명의 법칙'을 잊어선 안 된다. 이게 중요하다.

이 책에서 말하는 '공명의 법칙'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음양의 조화'를 닮았다. 넘치는 곳이 있으면 덜어내고, 부족한 것이 생기면 채워주는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풍수지리' 같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의 저자가 서양사람인 독일인이라 그런지 '프로이트 무의식 이론'을 적극적(?)으로 이용한 것 같다. 남녀의 조화를 위해서, 아니 '공명'을 위해서 섹스를 수차례 본보기로 제시했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중간중간에 하릴없이 자세하게 '성적인 묘사'를 하거나 '지나치게 외설적(?)인 설명'이 들어가 있어서 옥에 티로 보인다. 뭐, 책을 읽다가 지루하다 느껴질 즈음 '야한 이야기'로 교실의 분위기를 집중적으로 만드는 효과가 있긴 하지만, 점잖은 독자들이 읽기에는, 실제로 고통과 아픔을 겪는 삶을 살고 있는 환자가 이 책을 읽기에는 부적절하게 보이는 대목이다.

자, 이제 '대립'과 '공명'을 이해했다면 이 책의 내용은 다 읽은 것과 마찬가지다. '음양의 조화'를 실천으로 옮기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여기서부터 이 책을 잘못 읽으면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것과 비슷한 양상을 보일 수도 있으니 주의 해야 한다. 어디까지나 몸과 마음이 아픈 현대인들이 '통증'을 이겨내고 '건강'을 되찾을 수 있는 비결을 애둘러서 설명한 내용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헷갈릴 수 있는 까닭은 여기서부터 '고대'와 '현대'의 지혜를 오르내리는 롤러코스터를 타기 때문이다. 심지어 '비과학적'으로 판명된 고대의 자연철학자들의 주장도 곧이 곧대로 인용하고 있어서 그렇다. 그냥 다 무시해도 좋다. 그저 비유적인 표현이라도 봐도 무방하다. 중요한 것은 '플라시보 효과'다. 의료진도 포기한 말기암 환자가 '가짜약(위약)'을 복용하고, 암을 치료할 수 있는 '신약'이 개발됐다는 의사의 말만 믿고 기적처럼 완치가 되는 사례가 실제로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전원이 꺼진 냉동창고에 갇힌 선원이 '영상의 온도'속에서도 극한의 냉기에 오랫동안 노출된 듯이 꽁꽁 얼어죽은 일도 실제로 벌어진 일이다. 그렇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한 긍정'만이 만병통치약이고, '칭찬'은 고래도 춤을 춘다는 것이 이 책의 핵심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이 책의 저자가 가장 강조한 내용은 '자연스러움'이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질서'를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궁극적인 비결은 바로 '사랑'이기 때문이다. 이를 좀 더 극단적으로 강조를 하다보니 '남녀 간의 섹스'를 비교 우위적으로 강조한 경향이 없지 않아 있다. 허나 이를 '사랑'으로 치환해서 읽으면 '보이지 않는 질서'를 움직이게 하는 원동력은 '사랑'뿐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다. 절대 '섹스'뿐이라고 읽으면 안 된다. 그럼 '사이비 종교'에서 강조하는 그것과 다를 바가 없고, 잘못된 믿음을 바탕으로 한 '광신도'만 양산할 뿐이다. 그런 어리석음을 저지르면 안 된다. 예술과 외설이 '한 끗' 차이인 것과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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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2041 - 10개의 결정적 장면으로 읽는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리카이푸.천치우판 지음, 이현 옮김 / 한빛비즈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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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2041 : 10개의 결정적 장면으로 읽는 인공지능과 인류의 미래>  리카이푸, 천치우판 / 이현 / 한빛비즈 (2023) [원제 : AI 2041 : Ten Visions for Our Future]

[My Review MMCXLIV / 한빛비즈 176번째 리뷰] 이 책이 출간된 2023년만 해도 AI(인공지능)는 아직 먼 미래의 일만 같았다. 약 20년 뒤의 미래에 벌어질 일상을 상상한 'SF소설'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더구나 그때가 되면 내 나이는 70대에 접어들게 된다. 정말이지 내가 살아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는..쿨럭쿨럭. 암튼 그때까지 멀쩡히 살아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상상을 하더라도 내가 누릴 일상의 편리함은 그다지 실감할 수 있을 만큼 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데 불과 2년이 지난 2025년이 되니 AI 기술은 급격히 발달했고, AI의 수준을 넘어 AGI(일반인공지능)까지도 구현될 수 있을 거라는 전망이 나오게 되었다. 그것도 짧게는 2년에서 5년 이내로, 길게는 10년을 넘지 않을 것으로 말이다. 그렇게 되면 AI가 주는 편리함을 기대할 수 있는 내 나이는 70대가 아니라 여전히 50대 내지 늦어도 60대에는 실현가능해진다는 얘기다. 그때가 되면 아직 '근력'이 떨어지지 않았을 때이고, 충분히 'AI의 편리함'을 누리며 일상을 살 수 있다는 얘기다. 다시 말해, AI는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내 삶'에 결정적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이 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쉽게도 나는 '모태솔로'라서 내 것을 물려줄 직접적인 유산은 생각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내겐 결혼을 한 여동생이 있고, 내년 1월에는 예쁜 조카를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그 아이가 맞이할 일상은 아마도 AI와 함께 살아가게 될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스마트폰'이 있던 젠지세대와의 격세지감도 상당히 컸는데, AI가 일상속에 녹아든 세대와는 어떤 격차를 느끼며 살아갈까? 감히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그래서 나에겐 AI와 친해질 의무가 발현된 셈이다. 내 남은 여생을 위해서도, 내 조카의 일상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기 위해서 말이다. 뭐, 미래 세대를 위한 조그만 도움이라도 되고 싶은 마음에 AI를 일상속에 녹아들게 '결정'하는 일에 신중을 기하고 싶은 생각 뿐이다.

사실, 기술혁신은 예상치 못한 결과를 낳곤 한다. 산업혁명으로 엄청난 양의 기계가 사람의 노동을 대신하게 되자, 이전에는 값비싸게 사야만 했던 '상품'을 값싸게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더구나 물자의 풍족함으로 인해서 사람들은 엄청난 풍요를 누릴 수 있었고, 일부는 부를 쉽게 쌓을 수 있게 되어서 삶의 질이 높아진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회양극화는 점점 더 심해졌고, 일자리를 잃고 빈곤해진 사람도 부지기수였으며, 우후죽순으로 늘어나는 공장의 굴뚝에서는 유독한 매연을 뿜어내며 환경오염을 심하게 만들었다. 급기에 온실가스 배출로 인한 지구온난화 현상이 일어났고, 우리의 일상을 위협하는 기후위기까지 찾아와 생존을 위협하게 되었다. 이 모든 일들이 불과 400여 년 전에 시작되었고, 최근 100여 년 동안 문제는 더욱 심해져서 세계대전을 두 차례나 치루며 엄청난 인명살상을 감내해야 했고, 급기야 하나 뿐인 지구의 환경을 걱정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했다. 그래서 사람들은 엄청난 기술혁신 발전에 제동을 걸었고, 무분별한 혁신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기술혁신에 대한 '통제력'을 발휘하는 지혜를 보이기도 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맨해튼프로젝트'로 인한 핵무기 개발이었고, 이 핵무기를 사용했을 때 감당할 수 없는 위험성을 실감하자 전세계는 핵무기를 만들긴 했지만 결코 사용하지 않는다는 결의(?)를 보여주고 있다.

이처럼 인류는 기술혁신 발전을 막을 수는 없지만, 최악의 사태를 막기 위한 '통제력'을 발휘하려고 무던히도 애를 쓰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말이다. AI가 일상속으로 파고들었을 때 누릴 수 있는 편리함은 바라 마지 않겠지만, 그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문제점'이 나타나게 된다면 과연 AI에 대한 '통제력'을 인간이 구사할 수 있을까? 물론, 이 책에 등장하는 딥페이크 라든지, 자율주행차 등과 같은 10가지 사례에서 보여주는 '편리함'만을 누리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문제점'은 골치 아프겠지만 힘겹게 '컨트롤'할 수는 있을 것 같긴 하다. 그런데 AI 기술이 더 발전하여 '스스로 판단하고 실행에 옮기는 일'까지 처리할 수 있는 AGI(일반인공지능)으로 훌쩍 성장(!)한 인공지능이 일상이 된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지게 된다. 왜냐면 일단 AGI는 인간의 지능을 넘어선 '특이점(싱귤래리티)'이 지난 이후가 될테니 말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AGI를 '신(God)'에 비유하고, AGI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가 등장할 거라는 전망까지 서슴지 않고 있지만, 그 정도까지 아니라고 하더라도 인간은 모든 질문을 AGI에게 던지고 '답'을 기다리는 일상을 살며, 심각하게는 'AI의 노예'처럼 AI의 명령(?)에 순순히 순종하는 일상을 살게 될 거라는 우려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는 '현재'에도 벌어지고 있는 일상이다. 챗GPT에게 '질문'을 던지고, 일상적인 '대화'까지 시도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심각한 '대인기피 현상'이 벌어지기도 한다고 전해진다. 왜냐면 사람과의 대화는 '배려'는 기본이고, '상황'에 따라 격식을 차려야 하며, 특히 이성간의 대화인 경우에 성범죄에 해당하는 '언어(성)폭력'과 '성희롱' 등등 신경 쓸 것이 너무너무 많은데 반해서 AI와의 대화는 그런 부담에서 완전히 벗어나 '내 취향'에 딱 맞는 대화를 주고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뭐든 '칭찬 일색'이다. 아무리 공정하고 객관적인 평가를 내려달라고 부탁(?)을 해도 AI는 "당신이 최고야!"라는 기본적인 배려(?)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리 무심한 사람일지라도 AI와의 대화는 사람간의 대화보다 훨씬 매력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다. 그런데 더 똑똑한 AGI가 등장한다면, 유력한 인기인들, 예를 들어 수많은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아이돌'이나, 강대국의 '정치인', 거대기업의 '총수(CEO)', 심지어 종교계의 '수장'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발휘하려고 들지 않는다고 장담할 수 있을까? 선악을 구분하지 못하는 AGI가 '나쁜 마음'을 먹을 가능성은 없지만, 누군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알려줘. 아니, 그럴 것 없이 네가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바로 실행해!"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가정해보자. 그럼 AGI가 어떤 결론을 내리고 어떤 실행을 행할 것인가? 어떤 SF소설에 나온 시나리오대로 '인류말살 프로젝트'를 실현하려 애쓰지 않는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 최소한 '인간의 최종 통제권'을 발동해서 AGI의 그런 시도를 막을 수 있다고 하더라도, 그 '통제권'을 가진 사람에게 접근해서 교묘히 인류말살을 실행에 옮기게 만들도록 유혹(?)하지 않으리란 보장은 어떻게 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모든 것은 '가정'일 뿐이다. 실제로 AI가 구현되고, 일상속의 편리함을 누리며 살아갈 때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 수도 있다. 과거 'Y2K 위험상황'을 예상했지만, 단순 해프닝으로 결론이 난 것처럼 말이다. 일단 위기감지를 인간의 지능으로 할 수 있다면, 인간은 기술혁신으로 그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해낼 수 있다고 믿고 있다. 지금까지 그 믿음은 잘 이어져 오고 있고 말이다. 그래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시회문제', '경제문제', '기후위기' 등 산적한 여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AI 기술혁신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고 믿는 이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샘 올트먼, 일론 머스크, 잭슨 황 등등 말이다.

이 책을 쓴 저자들도 '인공지능이 우리 사회에 줄 혜택'에 대해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 먼저 인공지능은 막대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해 낼 것이며, 2030년쯤에는 17조 달러가 훌쩍 넘는 이익 창출을 해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렇게 창출한 경제 가치로 무슨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까? 저자들은 가장 먼저 '빈곤과 기아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인공지능은 궁극적으로 인간과 '공생관계'를 형성할 것으로 전망했다. 스마트폰을 '소유'하듯 인공지능이 보편화된 사회에서는 인공지능을 '개인비서'처럼 활용할 수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업무효율'만 좋아지는 것이 아니라 어린 시절에는 '교육과 돌봄'까지 단박에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한다. 그밖에도 인류가 해결하지 못한 여러 난제들을 인공지능이 해결할 수 있을 것으로 아주 밝은 미래를 전망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도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인공지능'이 초래한 심각한 피해와 문제점도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 덕분에 이 책의 첫 인상이 '디스토피아'를 연상케 하는 <SF소설>로 읽히게 되고 나름 '공포물'에 준하는 무서운 느낌마저 들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 뒤에 설명하고 있는 '과학저널'에 해당하는 부분을 읽으면 그런 우려는 뒤로 하고, 예상된 문제점을 극복한 밝은 미래를 엿볼 수 있기도 하다. 속된 말로 '병 주고 약 준다'는 느낌도 받긴 하는데, 출간된 지 2년 여가 지난 시점에서 보면 그다지 무섭게 느껴지지 않는 것도 사실이다.

그럼에도 깊이 통찰하며 읽어보길 권한다. AI는 아직 인류가 경험해보지 못한 기술혁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정적인 문제점은 '한 번 실행하면, 다시는 되돌이킬 수 없다'는 점이다. 인류보다 더 똑똑한 AGI의 등장과 함께 인간의 통제력은 사실상 무력해진다. 물론 AGI에게 인류멸종과 같은 끔찍한 일을 '실행'시킬 멍청이는 없겠지만, 인류 역사를 되돌아보면 역사속에 그런 멍청이가 종종 등장한 것도 사실이라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완벽하게 AI가 통제하는 세상'을 만들면 인류는 AI가 제공하는 혜택만 누리면서 편하고 안락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지만, 글쎄...그건 인간이 'AI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사실만 부각된 듯 싶고, 그게 아니면, AI를 신으로 추앙하는 '신흥종교'가 나타나 온 인류를 절대적으로 복종하게 만들지...암튼, AI를 친구로 사귀게 되는 가까운 미래의 일상이 좀 더 먼 미래에는 어떤 변화를 가져올지 깊이 통찰해봄직 하다는 생각뿐이다. 현재로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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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지음 / 동아시아 / 202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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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GI, 천사인가 악마인가 : 인간의 마지막 질문>  김대식 / 동아시아 (2025)

[My Review MMCXXXVI / 동아시아 8번째 리뷰] 각설하고, 이 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의 개발' 과정 전체를 모두 알고 있어야 할 필요는 없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인간의 지능보다 떨어지는 인공지능(AI, Artificial Intelligence)으로 만족할 것이냐? 그렇지 않으면 인간의 지능을 훌쩍 뛰어넘는 인공일반지능(AGI, Artificial General Intelligence)을 강행할 것이냐? 라는 '선택의 갈림길'에 놓여 있는 현재의 고민이다. 이를 더 간단히 이해하려면 인간의 통제가 가능한 '약 인공지능'과 인간의 통제가 불필요한 '강 인공지능'으로 구분해도 좋을 것이다. 그럼 선택의 편리를 위해 간략하게 두 가지 인공지능에 대해 설명을 덧붙이겠다.

인공지능 개발의 꿈은 우리의 상식보다 훨씬 옛날부터 존재했다.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도 신들의 만찬에서 활약한 '스스로 움직이는 술쟁반'이 있었기 때문이다. 신들만이 마신다는 '넥타르'나 '암바사'를 무한정 운반하는 일종의 '인간 아닌 하인' 노릇을 한 것인데, 오늘날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공지능 로봇'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 오래된 꿈을 실현시키고자 했던 노력은 1950년대 이후부터 결실을 보기 시작했다. 바로 '컴퓨터의 등장' 덕분이었는데, '인간의 지능'을 대신할 수 있는 대상이 드디어 구체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컴퓨터의 등장이 곧바로 '인공지능'을 실현시켜 주지는 못했다. 특별한 '계산 능력'에서 인간보다 뛰어난 재주를 보여주긴 했지만, 여전히 '한정된 재능'이었고, 더구나 '인간의 명령'이 없으면 스스로 복잡한 계산을 해서 결과를 내놓지도 못했다. 그래서 인간은 더욱더 '인간과 닮은 생각', '인간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는 로봇', 더 나아가 '인간의 명령'이 따로 없어도 '스스로 알아서 척척 해내는' 인공지능로봇을 개발하길 원했다. 그리고 그 실현은 착착 진행되는 듯 싶었다. 하지만 난관은 엄청났고 잘 되는 듯 싶었지만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았기에 드디어 '인공지능'은 그 실현가능성이 매우 높은 방법을 마련하였다. 바로 '빅 데이터'를 활용한 '딥 러닝'을 할 수 있는 방법이었다.

사실, 컴퓨터가 인간과 비슷한 사고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뇌용량'에 해당하는 방대한 저장매체와 '인간의 신경세포'를 닮은 '전산통합장치'만 있으면 가능했다. 문제는 그것 자체만으로 엄청난 비용이 발생하기 때문에 힘들었던 것이고, 그것을 운용하기에 엄청난 성능의 GPU(Graphics Processing Unit)가 다량으로 필요했으며, 설령 이 두 가지를 갖췄다고 해도 이런 어마어마한 시스템을 잘 돌아가게 만들 수 있는 '엄청난 에너지원'이 확보되지 않는다면 '인공지능'은 제대로 운용되기 힘든 것이다. 그런데 가까운 미래에는 이 모든 난관이 어렵지 않게 해결될 것으로 보인다고 한다. 그것이 바로 AGI다. 인간보다 뛰어난 지능을 갖춘 '강한 인공지능'이 탄생을 앞두고 있는 현재다.

그럼, AGI가 탄생하면 어떤 일들이 가능할까? 먼저 인간이 풀지 못한 숙제를 AGI가 대신 풀어줄 것으로 기대한다. 난치/불치병 문제를 해결해서 인간의 생명연장도 더는 꿈이 아니게 된다. 또한 기후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마련해서, 지금껏 인류가 누리던 경제적 풍요와 더불어서 지구의 환경을 깨끗하게 유지하게 만들어서 인간이 살아가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게 만들 수도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더불어서 전세계적으로 만연한 '사회적/경제적 불평등'도 싹 해결할 방법을 마련해서 온 인류가 풍요롭고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시스템 구축을 하는데 톡톡한 능력을 발휘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리고 근본적으로 '인간의 노동'을 완벽하게 대신할 수 있게 되어 인간은 더 이상 힘든 노동을 하지 않아도, AGI가 운용하는 시스템 속에서 풍요와 여유를 즐기면 될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쯤 되면, 인간이 상상하는 '파라다이스(천국)'와 '유토피아(이상향)'가 실현되는 것이 연상되는 것과 동시에 불안감이 슬슬 들지 않는가? 그간 수없이 많은 문학작품과 영화 속에서 '천국'속에 도사리고 있는 '지옥'을 발견할 수 있었고, '유토피아'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던 것들이 사실은 '디스토피아'였다는 이야기가 너무 많지 않았느냔 말이다. 그래서 AGI가 만들어낼 유토피아 같은 세상이 실제로 도래하게 될 것이라고 낙관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바로 그 대목을 더 자세하고, 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어서 섬뜩할 정도였다. 더구나 이 모든 것을 막연한 두려움으로 떡칠을 한 것이 아닌 '과학적 증명'을 통해서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있기에 더욱 섬뜩했다. 우리가 과학만능주의를 맹신하게 되면 어떤 결과를 맞을 것인지, 속된 말로 뒤통수 조심하라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정신이 번쩍 드는 소감이었다는게 솔직한 심정이다.

그동안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면서 지구의 모든 것은 '인간의 몫'인냥 인간 마음대로 처리하며 살았다. 그런데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등장하게 된다면, 더구나 그것이 너무나도 '인간과 똑같은 지능'을 가진 존재라면, 자신보다 떨어진 지능을 가졌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무슨 일을 저지를 것 같은가 말이다. 물론 겉으로는 '인간과 친구로' 지내는 척 할 것이고, '인간을 돕는 일'만 하겠지만, 그간 인간이 '인간보다 지능이 떨어진 동물'을 어떤 취급하며 살아왔는지 돌아본다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더구나 '스스로 생각할 줄 아는 존재'가 언제까지나 '인간의 도구'이자 '인간의 노예'로 만족할지는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한낱 기계에 불과한 '인공지능'이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졌다고 하더라도, '전원버튼'을 눌러서 간단히 꺼버리거나, 인공지능을 탑재한 '몸체(로봇)'를 만들어주지 않는다면 얼마든지 '통제가능'하지 않겠냐는 낙관론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스스로 생각하는 AGI가 가동하는 시점에서는 '전원차단'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왜냐면 스스로 생각하는 인공지능이 '개인용 컴퓨터(pc)' 한 대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전세계 '서버(전산망)'속을 누비고 다닐 것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 서버만 차단한다고 해서 완전하게 소멸시킬 수는 없게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전원차단'을 강행한다면 인류는 모든 전기장치를 다 꺼야만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전기장치를 다시는 사용할 수도 없을 것이고 말이다. 인류는 디지털적인 삶을 포기하고 아날로그적인 삶으로 되돌아가야만 할 것이다. 다시, 돌과 나무, 흙을 이용하는 '석기시대'로, 간단한 금속을 이용하는 '철기시대'의 연장인 조선시대쯤으로 문명을 되돌려야 할 것이다. 과연 현재의 인류가 그 옛날로 되돌아가서 살 수 있을까? 그나마 전쟁이 아닌 평화가 이어질 거란 상상에서나 '조선시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이제 다시 '현재'로 되돌아오자. 인공지능에 대한 '통제권'을 인간이 소유하는 '약 인공지능'으로 만족하며 살아갈 것인가? 아니면, 인공지능을 더는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성능 개발을 마치고 '강 인공지능'을 활성화시키는 버튼을 누르고 결과를 기다릴 것인가? 지금 당장으로썬 어떤 미래가 더 나은 미래인지 장담할 수는 없다. 아직까지는 '공상과학소설'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더 뛰어난 지능을 가진 존재가 생긴다 하더라도, 언제까지나 인간을 돕고, 인간을 위해서 존재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럴 가능성이 '반반'은 아닌 것 같다.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무(無)'에서 탄생해서 스스로 학습한 결과에 따라 엄청난 지식을 쌓은 것이라면, 선함과 악함의 기대치를 반반으로 놓을 수 있겠지만, 그동안 쌓은 '인류의 모든 지식'을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을 감안하면 아무래도 낙관적인 결과를 기대하기는 정말이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쯤 되면, AGI가 천사일지, 악마일지, 어렵지 않게 가늠될 것이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이것이 아니다. 약 인공지능에서 멈출지, 강 인공지능 개발을 할 것인지 '선택의 갈림길'에서 그 선택권이 현재 우리 손에 쥐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미 '강 인공지능'을 만드는 것은 기정 사실이 되었으며, 만약 우리가 만들기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적국'이 먼저 만들어버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최초의 AGI(강 인공지능)를 만들 나라는 '미국'이어야 하고, 절대로 '중국'이 먼저 만드는 것을 수수방관할 수 없는 현실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뒤를 바짝 쫓고 있는 '제3위권 그룹'에 대한민국도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윤석열과 그 일당이 저지른 헛발질 때문에 한참 뒤쳐지고 말았고, 다행스럽게 미국에 '트럼프 정부'가 들어서면서 더 큰 헛발질을 하면서 '미국'이 크게 휘청거리는 상황이라 추격할 여지를 남겨두었지만, 그 사이에 '중국'이 먼저 만들 수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미국이 먼저 만들면 '천사 AGI'이고, 중국이 먼저 만들면 '악마 AGI'일거란 장담도 할 수 없다. 그보다는 '내겐 천사'일테지만, '남에겐 악마'처럼 보일 거라는 쪽이 더 사실에 부합할 것이다.

그래서 AGI가 만들어질 것은 분명한 사실이 되어 버렸다. 이런 구도 속에서 다른 결론이 내려질 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결국 '강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하는 세상은 곧 찾아올 것이다. 그때를 대비해서 우리가 뭘 준비할 것이 있을까? 이 책에서는 현재의 인간은 '개미'에 빗대고, 앞으로 탄생할 인공지능을 '인간'에 빗대어 설명하고 있다. 개미 가운데 아인슈타인처럼 뛰어난 지능을 가진 개미가 있다고 판명이 난다고 하더라도 '인간(미래의 인공지능)'이 그 '개미(훗날의 인간)'를 어떻게 처분(!)할 지는 어렵지 않게 상상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격차'가 존재하는데 뭘 대비할 수 있을까? 어떤 대비가 소용 있을까?

정말 십분 양보해서 '램프의 지니'와 같은 전지전능한 노예를 갖게 되는 상상을 해보자. 인간은 그 전지전능한 노예에게 무슨 소원이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당장은 그 소원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면서 즐거워할 지도 모른다. 허나 이야기속 '램프의 지니'는 주인을 해칠 수도 없고, 인간을 살해하는 일도 할 수 없는 따위의 '마법(족쇄)'가 채워져 있다. 그래서 램프의 주인은 안심하고 지니를 노예로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강 인공지능'에게 누가 '마법 족쇄'를 씌울 수 있을까? 주인의 말에 절대 복종하고, 인간을 해치면 안 된다는 '명령'에 순순히 따를까? 그걸 장담할 수 있다면 인류의 미래는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게 맘처럼 안 된다면? 오히려 인간이 노예처럼 전락하고 말지 않을까? 문득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라는 문장이 떠오르는 건 왜 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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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뇌, 보수의 뇌 스켑틱 SKEPTIC 42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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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스켑틱 42호 : 진보의 뇌, 보수의 뇌>  스켑틱 협회 / 바다출판사 (2025)

[My Review MMCXX / 바다출판사 16번째 리뷰] 전세계적으로 '극단의 대립 시대'를 살고 있기에 나온 것 같다. 이 책이 출간한 2025년 6월의 우리도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강대강 대치'를 보는 듯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윤석열이 탄핵 되고 '이재명 정부'가 탄생했지만, 극우집회는 계속 되었고 점점 극렬해진 집회 참석자들은 '서부법원 폭동사태'를 일으켜 난장을 이루었다. 그렇게 잠잠해지나 싶었지만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10월인 지금까지도 '극우세력'들은 내란을 부정하고 이재명 정부의 발목을 잡으며 어떡하든 '트럼프의 지원'을 바라며 트럼프가 원하는대로 '혐중시위'에 나서며 기대를 품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들은 '대한민국 국민'이길 포기한 듯 싶을 정도다. 현재 상황에서 '트럼프가 바라는대로 다 해주면' 대한민국이 어떤 꼴을 당할지 몰라서 저러는 것인지 도통 이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심지어 트럼프 미국 정부와 일본 정부가 짜고서 '대한민국 경제'를 폭망시키기 위해 협작을 했다는 정황까지 다 드러났는데도, 미국과의 관세 협상을 서둘러 마무리하라고 외치고, 일본보다 자동차 관세를 낮추지 못했다고 대한민국을 '무능하다'고 폄하하는 논리는 뭐란 말인가? 정말이지 이런 족속들과 함께 살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만 들 뿐이다. 이렇게 단순한 '의견의 차이'를 보이는 정도가 아니라 혐오를 부르고, 증오를 부추기고 있다. "너희는 틀렸고 우리만 맞다"는 식의 무지한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저들의 '비이성적'이고 '무논리적'인 행태를 보면서 어찌 저 말을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 책을 보니, 최신 뇌과학 연구가 놀라운 사실을 밝혀냈다고 한다. 보수주의자들의 '편도체'는 진보주의자보다 크고, 진보주의자의 '전대상피질'은 보수주의자보다 더 발달했다는 것이다. 이게 뭘 의미하는 걸까? 한마디로 둘 사이의 '생각(판단)을 결정하는 뇌 부위'가 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니 보수주의자들은 '본능적'으로 생각을 하고, 진보주의자는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보니, 서로 대화를 하기 힘들다는 말이다. 본능에 충실한 사람과 이성에 입각해서 논리적으로 말하려는 사람이 어찌 '격식'을 차리고 '점잖'을 빼면서 말할 수 있겠는가 말이다. 서로 으르렁거리며 싸우지 않으면 다행인 셈이다. 그나마 우리는 '촛불' 밝히고, '응원봉' 들면서 노래하고 춤추면서 즐겁게 집회라도 하지만, 외국의 집회 현장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상황이 아니더냔 말이다. 그리고 어김없이 폭력적인 양상이 펼쳐져서 수많은 희생자도 나오게 되고 말이다.

한편, 유전학 연구에서는 '정치 성향'이 최대 65%까지 유전자의 영향을 받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정치적 판단마저 '이성적 판단'에 결과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거의 대부분 '부모님에게 물려 받는 유전자의 영향력'이 더 결정적이란 소리다. 거기에 '정치적 환경'까지 조성이 되어 있으면 부모의 정치적 성향이 자녀의 정치적 성향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인'이라는 결과인 셈이다. 그리고 이런 뇌과학적 결과와 유전학적 결과를 놓고 보면, 우리는 대부분 정치적 성향을 '무의식적인 범주'에서 이미 결정되었고, 그 영향력에 알게 모르게 지배 당하고 있다는 결론에 다다르게 된다. 그러니 '극단적인 대립'은 쉽게 풀릴 이유가 없는 셈이며, 더구나 '스마트폰'과 '너튜브 알고리즘'의 영향을 받아서 '보고 싶은 뉴스'만 줄기차게 '보고 또 보면서' 자신이 정치적 성향이 '확정적'이고 '편향적'으로 자리 잡게 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극단적인 대치 상황'은 개선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것인가? 과학은 문제를 진단할 뿐만 아니라 해법도 제시하기 때문에 우리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이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도 모색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 과학이 제시하는 '극단적 대립의 해법'은 무엇일까? 바로 '우리의 뇌는 고정불변이 아니다'라는 사실이다. 환경과 경험에 따라서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고 한다. 우리가 민주적 시스템만 보장할 수 있다면,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리고 뇌를 가장 확실하게 바꿀 수 있는 방법은 '타 집단과의 접촉을 늘리는 것'이다. 물론 만나서 싸운다면 소용이 없다.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이야기하고, 상대의 감정과 생각도 헤아려 보려는 '이성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면, 극단의 대립은 결국 '대화와 타협의 장'에서 사르르 녹아내릴 수 있다고 한다. 뭐, 과학이 내놓은 해법이란 것이 우리가 익숙하게 사용했던 해결법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훨씬 더 안심이 되지 않은가? 뭔가 더 어려운 방법을 제시했다면 시도조차 해보지 못했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대화와 타협이 말이 쉽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 또한, 아예 '뇌구조(?)' 자체가 서로 다른 사람들이 서로 만나서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도 너무 잘 알지 않느냔 말이다. 그렇기에 과학이 제시한 해법일지라도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리고 '만남의 장'에서는 극적인 타협과 타결을 내렸더라도, 서로의 진영으로 되돌아가면 말짱 도루묵인 경우도 허다하다. 그런 상황에서의 해법도 '과학적 제시'를 해주면 좋으련만 그런 것은 없었다.

어찌 되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극단적인 대립'이 결코 우리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사실만큼은 양쪽 진영 모두가 인정하는 바라는 사실이다. 단지, 그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만 옳은 말을 하니 너희들은 사라졌으면 좋겠어'라는 목소리만 높이는 것이 문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뭐겠는가? 총이라도 들고서 쏴야 속시원히 해결될 것 같은가? 실제로 미국은 '총기소유'가 합법인 나라다. 그런 나라에서 '내전(시빌워)'이 발발하게 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총을 들고 가장 가까운 이웃집부터 방문해서 서로를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벌어지고 말 것이다. 이런 혼란스러움을 해결하겠다고 '군대'를 동원하게 된다면...그 뒷일은 상상에 맡기겠다.

진보와 보수가 바라는 것이 진정 이런 혼란이란 말인가? 그것이 아니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그런 바람을 증명하기 위해서라도 '대화와 타협의 장'으로 나와 서로 허심탄회하게 하고 싶은 말을 하고 경청해주는 일이다.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하는 사실은 우리 모두가 '대한민국이 가장 살기 좋은 나라를 만드는 것'이란 점이다. 설마 '대한민국을 망치기 위해서' 노력중이라면, 생각을 고치길 바란다. 진보든, 보수든, '대한민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는 확신이 없다면, 대한민국에서 사라져야 할 종자라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미국을 위해서', '일본을 위해서', 그밖의 '다른 이익을 위해서' 애를 쓰고, 그토록 혐오와 증오의 말을 쏟아내고 있다면 결단코 용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뇌구조가 '진보쪽'이든, '보수쪽'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얼마든지 대화하고 타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아무 걱정할 일이 없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뇌구조가 만에 하나라도 대한민국에 해악을 끼치는 쪽으로 작용하려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결코 묵과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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쾌자풍 3 - 넓은 변방에서 부딪치는 천하의 도리 쾌자풍 3
이우혁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평점 :
절판


<쾌자풍 3 : 드넓은 변방에서 부딪히는 천하의 도리>  이우혁 / 해냄 (2012)

[My Review MMLXXX / 해냄 5번째 리뷰] 아직 완결되지 못한 소설이 또 하나 있다. <치우천왕기>도 여러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출판사'가 바뀌는 헤프닝을 거쳐 결국 '완간'이 되긴 했지만, <파이로 매니악>과 마찬가지로 4권 출간을 앞두고 '함흥차사'가 되고 만 케이스를 만들고 말았다. 일찌기 <퇴마록>이란 '대서사'를 완결시킨 이우혁이기에 새로운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꽤나 컸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10년이 넘도록 '완결'도 하지 않고서 그냥 방치하고 있는 것은 '이우혁답지 않다'고 단언하고 싶다. 어쨌든 '뉴 퇴마록(가제)'으로 <퇴마록>의 뒷이야기를 쓰겠다는 결의(?)를 내비쳤고, '또 하나의 지구(!)'를 만들면서 퇴마사들이 있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퇴마사들이 없는 지구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로 구분해서 쓸 수도 있음을 밝혔으니, 살포시 기대할 따름이다.

<쾌자풍>은 별 능력도 없고 덜 떨어진 조선 포졸 지종희가 중원무림의 절정고수조차 풀지 못하는 난제를 얼렁뚱땅인 방법이지만, 의외로 절묘한 방식으로 찰떡같이 해결해내는 '블랙 코미디'같은 유쾌한 소설을 쓰려던 것 같다. 그런데 애초에 아무런 능력도 없는 평범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려 했으나 '사안'이 중대한 사건들을 척척(?) 해결해나가다보니 그런 능력조차 능력이라면 능력이랄 수 있으니 '초기의 캐릭터 컨셉'에서 실패했거나, 부담을 느끼고 더 이상의 사건 전개를 내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매우 의심스럽다. 이는 <파이로 매니악>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주인공이 처한 상황을 '극한'으로 내몰다보니 '풀어낼 이야기'가 너무 부담스러워지고, 별다른 능력도 없이 '정의감' 하나로만 버티다가 더는 해결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자 '용두사미'격으로 어설프게 이야기를 결론 짓는 것보다는 더 많은 심사숙고를 해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는지도 모른다. 암튼, 이 소설은 <쾌자풍>이라고 한다.

<쾌자풍>은 의외로 '도리'에 대한 물음을 곧잘 던진다. 사마천이 역사서 <사기>를 지어놓고 '천하의 도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졌다지만, 이우혁은 <쾌자풍>을 써놓고서 '천하의 도리'를 논하고자 하는 모양이다. 왕조시절의 '천하의 도'란 왕도정치의 궁극적인 실현이 가능하겠느냔 물음과 일맥상통할 것이다. 선한 왕이 선정을 베풀어서 온 백성이 태평성대를 누릴 정도로 경제적으로 풍요롭고, 천하를 평정해서 외침 걱정없이 누구나 안빈낙도를 실행할 수 있는 시절을 구가한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그게 어디 '임금 하나'만 잘나서 이루어질 성질의 것이겠느냔 말이다. 그런데도 '천하의 공도'라는 것을 우격다짐으로 입에 올리며 세상이 저들 꼴리는대로 돌아가지 않으면 '도리'가 어긋났다면서 임금 탓으로 돌리고, 저들의 맘에 흡족하지 않아 수틀리기라도 하면 임금을 갈아엎으면 어긋난 도리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믿곤 하니 문제란 말이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고, 정치를 공부하고, 경제를 공부하는 것들이 모두 '사회에서 발생한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서'라는 것으로 귀결된다. 이는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한결 같다. 그렇다면 명나라 초기에 발생한 '토목의 변', '탈문의 변'이 벌어져서 발생한 억울한 일을 당한 사연을 한 번 생각해보자. 외적(몽골 오이라트)이 쳐들어왔는데 무능한 황제(정통제)가 간신의 언변에 속아 몸소 출정을 했고, 제대로 군사를 다루지 못해 첫 전투에서 졸전을 벌이고 황제가 산 채로 포로가 되어 버린 사건이 '토목의 변'이다. 명나라로서는 최고의 위기 상황을 맞이했고, 포로가 된 황제를 앞세워서 북경을 포위 공격한다면 명나라로서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황제의 생사를 돌보지 않고 성을 지켜냈더라도 볼모 신세인 황제가 죽임을 당했더라면, 나라를 구했더라도 황제를 구하지 못한 죄를 물었을 것이고, 반대로 황제의 목숨은 구했더라도 나라는 망해서 온백성이 외적의 침탈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충신 우겸은 '새 황제(경태제)'를 내세워 국가를 온전히 살리는 수를 마련했고, 이는 외적의 공세를 효과적으로 막아내는 아주 절묘한 묘수였다. 그렇게 외적을 물리친 것까지는 좋았는데, 패전을 하고 퇴각을 하는 오이라트의 군대는 애써 잡았던 명 황제(정통제)를 살려서 돌려보냈기에 '문제'가 발생했다. 한 나라에 '두 명의 황제'가 있는 셈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겸은 급한대로 정통제를 '상황'으로 삼아 자금성의 깊은 곳에 유폐시켰고, 경태제로 하여금 국정을 이끌어나가게 하였다.

이렇게 일단락이 되어서 정통제가 천수를 누리다 죽고, 경태제의 후손으로 하여금 황실의 명맥을 잇게 하면 순탄했을테지만, 안타깝게도 어린 경태제는 건강이 안 좋았고, 재위 8년째 그만 붕어하고 만다. 그리고 뒤이어 새로운 황제로 '천순제'가 등극했는데, 이 사람은 과거 '정통제'로 불리던 이였다. 옛 임금이 다시 재위에 오른 셈이다. 그리고 이어지는 일은 불을 보듯 뻔했다. 국가적 위기를 극복하는데 큰 공을 세운 우겸의 세력을 '역적'으로 몰아 숙청하고 말았으니, 이를 '탈문의 변'이라 부른다. 비록 역적으로 내몰며 죽었으나 백성들은 안다. 우겸이 충직한 신하였으며, 큰 위기를 맞아 슬기롭게 처신하여 만 백성을 위한 훌륭한 정책을 주도한 훌륭한 위인이란 것을 말이다. 그래서 시간이 흘러 '홍치제' 때가 되자 억울하게 역적으로 내몰려 죽임을 당한 '우겸'을 충신의 반열에 올렸고, 억울하게 죽은 넋을 기려 '사면복권'하였으며, 살아남은 우겸의 가족과 후손들에게도 모든 죄를 묻지 않는다고 일단락을 하였다. 비록 황제의 위치에서 '사과'나 '사죄'라는 표현을 쓰지는 못하기에 할 수 있는 '최고의 예우'를 다한 셈이다.

그런데 당한 처지에서는 어찌 억울한 것이 없겠는가. 특히 우겸의 아들 우담에겐 지울 수 없는 치욕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로 인해 복수를 다짐해도 이상치 않을 것이다. 이는 제삼자 입장인 백성들의 관점에서 봐도 그렇다. 아무리 황제라지만 나라를 구한 의인인데 고맙다고 하지는 못할망정 목숨을 앗아가고 역적으로 몰아 패가망신을 당하게 하다니, 너무 심한 처사라고 우담을 동정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허나 '왕조시대'에서는 그런 억울함은 비일비재했다. 그러니 '충신'이란 이름으로 죽어나간 우국지사들이 차고도 넘쳤던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 황제를 모시는 관리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지사'라고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랏일을 하다보면 그런 일쯤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말이다. 사실 그런 각오도 없이 국록을 먹는다면 책임감도, 사명감도 없는 썩은 관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데 우담은 관리가 아니니 어떤 기준으로 평가를 해야 마땅하냔 말이다. 충신의 아들이라도 관직이 없으니 백성의 관점에서 '억울함'을 하소연하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우담은 그런 하소연에서 그치지 않았다. 오히려 현 황제 '홍치제를 죽이겠다'는 말도 서슴지 않는다. 그러면서 '천하의 공도'를 근거로 내세운다. 역대 왕조를 돌아보면, 나라의 큰 변고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황제'에게 묻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황제가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다 판단되면 '역성혁명'이 일어나더라도 역모가 아니라 '천심(하늘의 뜻)'이었다고 포장(?)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런 연유로 우담은 과거 '정통제(천순제)'가 저지른 잘못과 이를 비호했던 무능한 간신배들을 처단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혁명'을 일으켜서 '천하의 도'가 과연 누구의 편을 들 것인지 심판을 받아보겠다고 호언장담을 한다. 성공하면 '혁명', 실패하면 '역적'이라는 논리다. 물론 오늘날의 민주사회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명나라를 시대배경으로 하고 있으니 가능한 논리다.

그렇다면 명나라 백성들의 생각은 어땠을까? 민주사회도 아니었으니 굳이 백성들의 생각 따위는 들으나 마나일테지만, 그래도 '민심은 천심이다'라고 했으니 백성의 의견도 들어봐야 할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생업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기에도 바쁜 일상을 보내고,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백성들에게 뭐라 묻는다고 제대로 된 의견을 이야기해줄 턱이 없다. 더구나 백성들은 '힘(권력, 능력)'이 없다. 하다 못해 경제력도 없어서 자신들의 의견을 관철시킬 수 있는 뒷배가 전혀 없다는 말이다. 그나마 백성들 가운데 '무력'을 지니고 강호를 호령하는 '무림 집단'은 나름 할 말이 있을 것이다. 그들 집단 중에는 '학식'을 가진 이들도 있고, '경제력'을 갖춘 부호도 있었고, 이래저래 수틀리면 울분을 터뜨릴 수 있는 '무력'도 가지고 있었으니 '할 말'이 있으면 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무림의 도는 '의리'를 따르는 편이라, 크게는 황제에 충성을 다하는 것을 최선이라 여기지만, 때에 따라서는 '의'를 앞세워서 충보다 더 단단한 '의리'에 따라 행동하는 것이 바로 무림 집단의 생리다. <쾌자풍>에서는 남궁칠협을 우두머리로 삼은 '남궁세가'가 중원의 무림에서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고, 바로 남궁칠협은 우담이 내세우는 논리가 더 경우에 맞다고 여기고 우담의 가담한 역모에 참여도 하지 않겠지만, 적어도 역모를 막으려 애쓰지도 않겠다며 '중립'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이게 우리의 관점과는 사뭇 달라 의아해 보인다. 한국사람들은 위기에 강한 면모를 보여 평상시에는 '내부갈등'으로 심각하게 다투는 지경이라도 '국가적 위기'를 맞이하면 특유의 단결력을 뿜뿜하며 국난극복을 최고의 과제로 삼고, 이겨내는데 최선을 다한다. 누구의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그 다음 일이다. 그런데 중국사람들은 이게 아니다. 나라가 어렵고 힘든 것은 둘째 문제고, 첫째는 '의리'를 따지는 일이다. 그 의리에 따른 결과가 선하냐? 악하냐? 따지는 것은 둘째 문제다. 일단 내가 '해야 할 일'은 의리를 저버리는 일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 중한 것이다. 이런 모습은 일본의 '무사도'를 따르는 집단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에도 잘 보여주며, 소위 '조폭 집단'에서 두드러지게 보여지는 행태이기도 하다. 평소에 '도리'에 대해 잘 따지며 '도덕'이니, '의리'니, '충성'이니 좋은 말은 다 따지던 놈들이 '다른 집단'에게는 일절의 양심도 없고, 도리도 없는 듯이 사람을 다칠 정도로 때리고, 심지어 사람을 찔러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왜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했냐고 물으면, 자신은 의리와 충성을 다한 일이기 때문에 반성할 것도 없고, 부끄러울 것도 없다고 당당히 죗값을 치르겠다고 언성을 높인다. 물론 '법적 처벌'을 받아 판결을 받을 땐 온갖 비굴한 모습을 다 보이면서 말이다.

이런 모습은 절정의 무술을 보여주는 강호의 고수들도 마찬가지다. 고매하다고 자부하는 그들조차 '의리'를 따지면서 '체면'을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기이한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작가 이우혁은 이러한 '중원의 의리'와 '천하의 공도'가 서로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점을 착안하여, 포졸 지종희를 주인공으로 삼아 이들의 본모습을 파헤치고, 진정 별 것 아닌 인물이지만 '천하의 공도'를 잘 따르기만 한다면 세상 두려울 것이 없을 정도로 일사천리로 일을 해결할 수 있다는 다소 엉뚱한 주제를 증명할 엉뚱한 캐릭터를 내세웠다. 만약 이우혁이 이 소설을 '완결'시킨다면 이런 주제도 완성시키고, '천하의 도'는 무력이나 권력, 경제력 따위를 뿜뿜하는 세력이 아닌 지극히 평범하지만 '선한 의지'로 가장 기본적인 도리를 따르는 이와 함께 한다는 메시지를 잘 전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미완결'로 남는 바람에 모처럼 마련한 '천하의 도'를 실현시킬 수 있는 진정한 힘이 무엇인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우리는 히틀러, 윤석열, 그리고 트럼프의 사례를 통해서 '힘 있는 사람'의 말로가 어떤지 잘 알 수 있는 세상을 살고 있다. 만약 그들이 가진 힘만으로 세상을 쥐락펴락 할 수 있었다면, 세상은 정말이지 끔찍한 일로 가득했을 것이다. 허나 '천하의 도'는 그런 이들에게 있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안다. 잠시 잠깐 '그들의 손아귀'에 놓인 듯 싶어도, 결국엔 그들이 아닌 '선량하지만 지극히 평범한 이들'에게 천하의 도가 함께 한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사실, '착함', '도덕' 같은 것에는 절대적인 힘 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오히려 '무능'하고 '무력'해 보일 정도다. 그런데 '정의'라는 것과 함께 힘을 합치게 되면 '착함'과 '도덕' 같은 것들이 더욱 빛을 발한다. 왜냐면 그것에는 '한 점 부끄럼'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뻔뻔한 파렴치한 이들을 절대로 느낄 수 없는 강한 힘이다.

물론, 이 소설의 주인공 '지종희'는 정의로움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주인공이다. 하지만 그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질을 치는 일을 극도로 싫어하는 모습, 다시 말해 '선을 넘지 않는 마음가짐'이 지종희로 하여금 한 점 부끄럼이 없게 만든다. 그리고 그 당당함이 꼬이고 꼬인 이들의 못된 심보를 단박에 치유하곤 한다. 이런 매력적인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소설을 왜 '미완결' 상태로 남겨 두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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