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마록 2 : 말세편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CLXX / 엘릭시르 14번째 리뷰] 책의 줄거리는 점점 심각해져만 간다. 책의 제목이 '말세편'인 것처럼 온세상이 멸망할 징조가 하나둘씩 나타나기 시작한다는 이야기전개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점입가경으로 전세계에서 내노라하는 종교의 수장들과 특수한 목적을 지닌 단체들이 하나 같이 한국의 퇴마사들을 향해 조여오고 있다. 바티칸의 이단심판관을 필두로 성당기사단, 검은편지결사, 그리고 중요 인물들을 암살하려는 목적의 어쌔신과 차이나 마피아까지 '홍수편' 이후로 활동에 제약을 받고 있는 퇴마사들을 개별적으로 찾아서 목숨을 빼앗으려 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애초에 <해동감결>을 소유하고 있던 일본내의 명왕교 잔당과 인도 힌두교의 이단교파인 깔끼파에서도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을 동원해서 퇴마사들을 곤경에 처하게 만든다. 거기에 '홍수편'에서 등장했던 대악마 블랙엔젤이 다시 등장해서 퇴마사들을 이러한 곤경에서 구해주는 상황까지 벌어진다. 아니 악마가 왜 퇴마사들을 도와주는 것일까? 이런 의문이 들때쯤 '악마의 교묘한 계획'이 번뜩 떠오르게 된다. 바로 퇴마사들이 하려는 '세상의 구원'을 돕는 척하면서, 오히려 세상을 악의 구렁텅이로 내몰기 위한 개수작이란 것을 말이다. 그런데도 퇴마사들은 '악마의 도움'을 받지 않을 수 없는 처지에 빠져들고 만다. 그건 바로 '같은' 인간이지만 생각은 전혀 '다른' 사람들끼리의 풀리지 않는 갈등이 끝내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지름길이었기 때문이다. 악마가 바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었다. 사람들끼리 서로 믿지 못하고 저들끼리 죽자고 서로 싸우길 바라는 것이었다.

이쯤해서 '말세'는 어떻게 실현되는가? 한 번 정리해 봄직하다.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 현재도 그렇고 인간의 미래를 예측한 '예언가'들은 한결 같이 '종말의 그날'을 언급했다. 가장 유명한 것이 <성경>에서 언급한 '요한묵시록'이고, 이를 바탕으로 노스트라다무스는 '정확한 날짜'까지 언급하며 암울한 미래를 예언했었다. 다행히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은 '날짜'가 틀린 것으로 확인 되었고, 세기말이 지난 21세기를 사는 우리들은 어느덧 '말세'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정말 말세는 지나간 것일까? 아니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일까? 만약 온다면 어떤 방식으로 찾아올까? 그리스도교 방식일까? 이슬람교 방식일까? 아님, 불교식이려나? 그것도 아니라면 '사이비종교'에서 말하는 아주 독특한 방식일까?

이런 이야기를 좋아하는 호사가들은 마치 '예언가의 재림'인듯 저마다 특색 있는 인류 종말의 형태를 아주 구체적으로 묘사하곤 하지만, 일단 어떤 특정 '종교의 방식'대로 말세가 찾아올리는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오고 '그분'을 믿는 몇몇 사람들은 구원을 받고 믿지 아니 하는 자들은 영원한 지옥의 구렁텅이에 빠져들 것이라는 묘사는 절대 없다는 것이다. 이런 '선별적인 구원 방식'이 왜 불가능하냐면 믿고 안 믿고를 무엇으로 '증빙'할 것이냔 말이다. 전지전능한 그분께서는 '불신자'를 구별할 능력이 있다손치더라도, <성경>에도 최후의 순간에 '그분'을 믿는다는 고백만 해도 천국행 티켓(구원)을 주겠노라 했다던데, 굳이 먼저 믿음을 증빙해야 할 까닭이 없지 않느냔 말이다. 그러니 이런 애매한 방법으론 말세를 막을 수도 없고, 말세를 피할 수도 없으니, 종교적 방식의 말세는 몰라도 상관이 없을 것이다.

종교가 아니라면 '도덕적 방식'일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나이드신 어른들은 버릇없는 젊은 세대를 못마땅하게 보면서 '말세'를 언급한다. 이렇게 부도덕한 세상이 도래하면 정말 세상은 망하는 것일까? 딱히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수천 년전 '어른'들도 그렇게나 많이 말세를 언급하였지만, 그 시대의 '젊은 세대'들이 아무리 망나니처럼 행동을 해도 세상은 잘만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젊은 세대들이 나이가 들면 또다시 '말세'를 언급하지만, 그 말세 또한 멀쩡하게 잘 돌아갔다.

그럼 말세는 어떻게 찾아올까? 좀 더 현실적인 파멸을 언급하자면 '전쟁'밖에 없을 듯 싶은데, 온세상이 파멸될 듯한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 20세기에 펼쳐졌지만 세상은 지금도 멀쩡하게 돌아간다. 물론 3차 세계대전을 언급하고 있는 요즘은 쪼큼 걱정되긴 한다. 핵미사일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들끼리 서로서로 쏘아대면 하나뿐인 지구는 어디 하나 성한 데가 없어져 결국 인간은 절멸할 수도 있을테니 진정한 '말세'가 찾아올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도 진정한 말세와는 사뭇 다른 양상일 것이다. 분명 살기 힘든 세상이 되긴 하겠지만 '전쟁의 상처'는 언제나 극복하곤 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자명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럼 진정한 말세는 어떻게 찾아오는가? 그건 사람이 사람을 믿지 못하는 세상이 찾아오면 말세는 자연스럽게 진행될 것이다. 신 따위를 믿고 안 믿고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오히려 인간을 믿지 못해 '절대적인 존재'에 의지하기 위해서 신(종교)을 찾는 거라면 그게 바로 '말세의 시작'인 셈이다.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그런데 사람을 '절대'적으로 믿지 못하는 일이 발생하면서 인간은 '종교'를 만들었고 절대적인 신의 존재를 믿으면서 그 신의 말씀(뜻)만을 쫓는 행위를 통해서 위안을 얻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의 테두리 안에서는 절대로 싸움이 일어나선 안 된다. 그런 종교의 신이 하신 말씀 가운데 '서로 싸워도 좋다'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종교전쟁 따위가 발생하는 것일까? 도대체 어느 신(절대자)이 사람을 죽여도 좋다고 말씀하였나? 결론만 말하면, 그런 종교도 없고, 그런 말씀도 없다. 오직 사랑하고, 자애하고, 자비로워 지라고 말씀하셨을 뿐이다. 그럼에도 서로 죽고 죽이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을 때에는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고 말씀하셨다. 그것만이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고, 그런 세상이 곧 '천국(파라다이스)'이라고 일컫었다. 그러니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도 불사하는 이가 있다면 '그'야말로 완전한 '불신자'임에 틀림없다. 그렇기에 말세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면 절대 찾아올리 없다. 이것이 팩트다.

그러나 세상을 파멸로 이끄는 원인이 꼭 발생하곤 한다. 우리는 그를 '파멸자'라고 부른다. 누가 파멸자인지, 언제 어디서 태어나는지 알지 못하고, 스스로도 자신이 파멸자인지 깨닫지 못하나, 때가 되면 그 '파멸자'가 누구인지 확연히 알게 된다. 이 책 <퇴마록>은 바로 그러한 때를 '말세'라고 가리켰다. 그리고 그 파멸자가 언제, 어디서 등장하는지 <해동감결>에 고스란히 적혀 있고, 그때가 곧 임박할 것이라고도 정확히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파멸의 날은 고작 40여일 밖에 남지 않았단다. 그런데 독사에게 물렸을 때, 그 독을 해독할 수 있는 풀이 근처에 있다는 격언처럼 '파멸자'가 말세의 카운트다운을 시작함과 동시에 그 파멸자로부터 세상을 구해낼 '구원자'도 나타난다고 한다. 이 구원자, 또한 누구인지 아무도 알 수 없으며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다고 한다. 이렇게 아무 것도 정해진 것이 없이 이야기는 진행되지만 분명한 것은 '말세'가 곧 찾아온다는 사실 뿐이다. 과연 퇴마사들의 행보는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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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포그래픽, 셜록 - 그래픽으로 읽는 셜록 홈스 인포그래픽 시리즈
비브 크루트 지음, 문지혁 옮김 / 큐리어스(Qrious)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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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IX / 큐리어스 2번째 리뷰] 인포그래픽(infographics)는 '인포메이션 그래픽'의 줄임말이란다. 정보를 '시각화'하여 빠르게 인지할 수 있게 해주는, 한마디로 '한 눈에 쉽게 알아보게' 하는 그림 기술이라고 요약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인포그래픽 기법은 여러 방면에서 '쓰임새'가 확장되는 편인 듯 싶다. 그러나 '만들기'는 어려운데 '쓰임새'는 그리 중요하지 않게 여겨지지 않는 느낌도 들곤 한다. 왜냐면 '쉬워 보이는 것'들의 수명기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쉽다 못해 너무 가벼운 듯하게 만들면 만든 수고에 비해 '가치 비중'을 낮게 평가받기 십상일 듯 싶기 때문이다.

거두 절미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서, 작가 코난 도일과 그가 창조한 명탐정 셜록 홈즈의 문학적 평가를 쉽게 내릴 수 있겠느냔 말이다. 전세계 수많은 '셜로키언(또는 홈지언)'이라는 열광적인 팬을 존재하는데, <셜록 홈즈>의 시리즈 하나하나에 품평을 내리는 것조차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런 광적이고 두터운 팬층을 19세기부터 21세기까지 150년이 훌쩍 넘는 시공간을 꿰뚫는 '셜록 홈즈'의 명성을 가볍게(?)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런 수많은 팬층을 만족(?)시키고자 만들어진 '인포그래픽'이 결코 쉽게 만들어질리도 만무하다. 그런데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면 '명탐정 셜록 홈즈'에 대한 명성이 바로 이해되고 덩달아서 '셜로키언'에 합류하게 될까? 그건 아니다. 이 책은 그리 매력적인 모습을 선보여주지 못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일까?

그건 우리가 '셜록 홈즈'에게 바라는 것은 명쾌한 추리를 통한 '감탄'이지, 그가 추리해낸 사건에 대한 총괄적인 '정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 책에서 얻은 정보가 무익하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 하지만 단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닌 '명탐정'이란 수식어가 허투루 쓰인 것이 아니었다는 '가치'를 논하는 담론을 읽고 싶었다. 아니면 셜록 홈즈의 사건 추리 과정에서 일반독자라면 '당연히' 놓치고, 열렬한 광팬만이어야만 찾을 수 있는 '숨겨진' 뒷이야기가 궁금했단 말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감탄'스런 대목이 별로 없었다.

벌써 12월이다. 한해를 마무리하면서 올해 계획했지만 미처 다 읽지 못한 책들 가운데 아쉬운 한 가지를 꼽자면, '추리소설'이었다. 그래서 내년엔 '애거사 크리스티'와 더불어 '코난 도일'과 '모리스 르 블랑'의 책들을 섭렵할 원대한(!) 계획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래서 우연히 발견한 이 책에 큰 기대를 품었는데, 읽자마자 아쉬움이 밀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내가 기대한 것은 혹시라도 내가 읽지 못하고 '놓쳐버린 명장면'이었는데 말이다.

그렇지만 '인포그래픽'이라는 장르에 대해서 새삼 다시 바라보게 되었다. 생각보다 정보를 더 잘 정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이제 연말이 되니 '온라인 서점'에서 한 해 동안 '책구매'한 내역과 '리뷰'한 기록이 바로 이런 '인포그래픽' 방식으로 정리될 것이다. 이때 부끄럽지 않은 기록이 되고자 매년 200편이 넘는 리뷰를 쓰고, 300권이 넘는 책을 읽어댔는데, 이제는 좀 유의미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서라도 닥치는대로 읽고 쓰는 습관보다 파고 드는 집요한(?) 면모를 선보여야 할 것 같다. 그래야 남은 내 인생도 부끄럽지 않을 것 같고, '내가 남긴 기록'이 좀 더 유의미해질 것 같다. 이제 넓힐 만큼 넓혔으니 이제부턴 '집중'이다. 그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이 책에서 귀띔 받은 것 같아 기분이 상쾌한 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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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 - 세상의 기준에 좌절하지 않는 어른의 생활법
양승렬 지음 / 한빛비즈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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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DCCCLXIV / 한빛비즈 159번째 리뷰] 초등학교 졸업선물로 받은 <명심보감>을 시작으로 어릴 적부터 적지 않은 유교경전을 읽었더랬다. 하지만 스승님께 사사받는 수업이 아닌 '독학'으로 읽었기 때문에 뜻풀이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그냥 되는대로 주워 섬기는 방식으로 오랫동안 읽은 셈이다. 하지만 그 덕분에 '좋은 말씀'에 대한 기준만큼은 명확히 새기고 있던 터라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남 부끄러운 일은 결코 하지 않는 자세로 살아왔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나는 사람을 보는 기준이 '인성(人性)'의 좋고 나쁨, 옳고 그름으로 갈리는 편이다. 다시 말해, 내가 고개 숙여 존경하고 우러르는 마음을 지닌 사람은 '마음이 고운 사람'뿐이다. 그렇게 착한 사람에게는 진심을 다해서 예를 다하려고 노력한다. 허나 심성이 고약하거나 품행이 방정맞지 못하거나, 특히 '언행일치'가 되지 않는 주둥이만 나불거리는 사람은 딱 질색이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람은 절로 '호감'을 사게 되고, 반대로 부정적인 사람은 '반감'을 띠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마찬가지로 예를 알고 그대로 실천하는 사람은 내것을 아끼지 않고 가깝게 지내고 싶은 반면, 하는 일마다 투덜거리고 제 일마저 남에게 떠넘기는 몰상식한 사람과는 상종조차 하고 싶지 않다. 너무 당연한 소리 아니냐고? 이런 당연한 소리가 바로 <논어>에 다 적혀 있다.

그렇지만 정작 <논어>를 읽어본 사람은 내 주변을 보아도 그리 많지 않다. 행여 드물게도 읽어본 사람을 만나면 반가워서 소감을 물으면 "너무 지루하고, 어렵고 딱딱한 말투 때문에 다 읽지 못했다"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하긴 나도 처음에 읽을 땐 딱 그랬으니, 뭐라 할 말은 없다. 그래도 '친절한(?) 해석'이 달려 있는 책들을 읽으면 그나마 읽을 만하다는 소극적인 권유를 하지만, 고루한 옛말투로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기도 하다. 그래서 <논어>를 '현대어'로 풀어낸 책이 절실했는데, 이 책 <조선의 그림으로 시작하는 하루 논어>가 딱 그랬다.

물론, 이 책의 글쓴이가 지적하듯이 <논어>를 '완역본'으로 읽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데 동의하는 편이지만, 한자어휘를 남발한 책을 완독한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기에 그리 권하고 싶지는 않다. 더구나 요즘 세대들은 '고사성어'에 담겨 있는 지혜를 읽으면서도 "어쩔 TV~"로 대꾸하곤 하는데 말이다. 뭔가 '가르치려는 의도'가 조금이라도 엿보이면 반감부터 생겨 어깃장을 놓곤 하니 조심스러운 접근법을 연구하는 것도 필요할 지경이다. 그런 의미에서라도 '쉬운 풀이'가 절실한 편이다. 그런 차원에서 이 책은 <논어>의 전체를 실은 것이 아니라 '64개의 문장'만을 꼭 알아야 할 내용으로 삼고, 오늘날의 적절한 해석을 일일이 달아놓았으니, 그나마 읽을 만한 <논어>가 된 것으로 보인다. 솔직히 말하지만, '조선 그림'에 대한 해설도 꽤나 '교육적'으로 보여서 '수행평가'에나 도움이 될 법한 '예시(모범답안)'로 삼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결국 중요한 것은 <논어>, 그 자체니까 말이다.

아시는 분은 알겠지만, <논어>를 쓴 사람은 '공자'가 아니다. 위대한 성현들인 '예수'도 <성경>을 직접 쓰지 않았고, '무함마드'도 <꾸란>을 쓰지 않았으며, '석가모니'도 <불경>을 손수 적지 않았다. 심지어 '소크라테스'도 자신의 저작물을 직접 남긴 것이 없다. 그런데도 이들의 '말씀'이 고스란히 전해져 내려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바로 그들의 '제자'가 그분들의 '말씀'이 너무 귀하고 소중해서 제자들끼리 스승님(?)께서 말씀하신 내용을 기억해놓았다가 따로 모아서 책으로 남긴 것이 이른바 <바이블>이라고 불리는 '경전'인 셈이다. 그래서 나도 이런 성현들의 위대한 발자취를 조금이나마 따라하고자 '나의 가르침'을 전달하기 위해 손수 집필하지 아니 하고 '내 제자들'에게 열실히 필기를 하라고..쿨럭쿨럭

암튼,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고, <논어>는 공자님의 말씀을 제자들이 적어 놓은 책이란 말이다. 더구나 공자는 교실 안에서 강의를 하는 '딱딱한 수업'을 하지 않았단다. 제자들과 함께 좋은 산천구경을 하며 다니다가 나무 그늘이 드리워지고 BGM으로 시냇물 소리가 졸졸졸 흐르는 곳에서 노닐다가 악기를 연주하다 흥이 오르면 '좋은 말씀' 하나씩 하나씩 풀어내고, 제자들은 그런 스승님의 흥취에 장단을 맞추다가 문득 '궁금증'이 떠오르면 질문을 던지는 꽤나 느슨하고 열린 수업을 진행하곤 했다고 한다. 그런 터이니 '강의 커리큘럼'이 따로 있을 리 없고, '교과 목표' 따위를 드러낸 교과서가 있을 리 만무하다. 그저 '떠오르는 영감'을 주는대로 받아 먹는 식으로 제자들도 공자님의 말씀을 적었을 뿐이다. 그러니 <논어>에 '읽는 순서' 따위는 없다. 아무 대나 손이 가는 대로 펴서 읽어도 무방하다는 뜻이다.

이런 식이니 <논어>를 '격식'을 따져가며 읽을 필요가 전혀 없고, 읽는데 부담을 가질 필요도 전혀 없다. 오히려 그런 부담감을 갖는 순간 <논어>를 제대로 읽기 힘들게 만든다. 그리고 '격식'을 내려놓고 읽다보면 때론 '파격'적으로 읽을 수도 있는데, 그럴 땐 '그런 맛'으로 읽어도 무방하다. <경전>을 곧이 곧대로 해석하려는 '교조적인 분위기'가 오히려 성현의 말씀을 곡해하고, 원래의 뜻을 왜곡하는 어리석음을 저지르는 짓이 되는 경우가 더 흔하기 때문이다. '좋은 말씀'은 우리 마음을 풍성하게 해주는 '마음의 양식'이 되는 법이다. 그러니 <논어>를 읽을 때에도 아무 거리낌없고 막힘 없이 읽어내려가면 되는 것이다.

이를 테면, <논어>의 가장 유명한 문장인 '學而時習之 不亦說乎也'도 '배우고 때때로 익히면 기쁘지 않겠느냐'라고 직역을 해버리면, 그 뜻이 살지 못한다. 이 문장의 뜻은 한마디로 '아는 것이 많아지면 즐거워진다'는 공부하는 학생이 지녀야 할 가장 기본적인 자세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자세라고 하더라도 '강요'하게 되면 즐거울 턱이 없다. 그래서 공자는 '때 시'를 강조한 듯 싶다. 언제 '학습'을 하면 가장 기쁘겠는가? 바로 '알고 싶은 것'이 생겼을 바로 '그 때' 알 수 있고, 깨우칠 수 있다면, 머릿속에 전구가 밝게 빛나듯, 지혜의 샘물이 콸콸 솟아나듯 '앓의 경지'에 다다랐을 때야말로 진정 기쁠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로 풀이를 하면, 이해가 쏙쏙 될 것이다. 이처럼 오래된 문장을 '곧이 곧대로' 이해하려고 할 필요가 없다. 공자가 살던 시대와 오늘날이 수천 년이라는 세월의 격차가 있는데, 이를 '세대차이'로 셈을 해본다면 얼마나 큰 차이겠느냔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과거의 지혜'가 세월이 흘렀다고 '낡은 지혜'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니다. 왜냐면 그 때에도 '사람'이 살았고, 지금도 '사람'이 살고 있으니, '사람' 사는 데에는 다 그렇고 그렇게 살아가는 법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이를 '욕망' 또는 '욕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욕망은 수천 년의 시간이 지나도 달라질 것이 없단 말이다. 다만, 사람이 살아가던 '세상의 모습(양식)'이 달라졌을 뿐이다. 그러니 그 '양식'만 조금 다르게 해석하면 '좋은 말씀'은 그대로 오늘날에도 '유용한 지혜'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본다면 <논어>는 절대 고리타분한 옛글이 아니다. 오늘날에도 생생히 살아 있는 지혜로 우리가 엿보고 배울 만한 '훌륭한 교과서'인 셈이다. 다만 그 교과서를 '현대어'로 슬기롭게 바꾸어 읽을 수 있는 '짬바(경륜, 또는 경험, 삶의 지혜 따위)'가 필요한 셈이다. 일단 이 책의 글쓴이가 '풀이'한 내용을 참고 삼아 읽어보길 바란다. 그러면 <논어>뿐만 아니라 '다른 경전'들도 충분히 쉽게 해석하며 읽어 나가는 짬바(?)가 생길 것이다. 그런 짬바로 '좋은 말씀'을 다시 되새기며 읽다보면 우리가 사는 세상이 조금쯤은 살기 좋은 세상이라는 것도 느끼게 될 것이다. 좋지 않은 점이 보인다면 '고치고 싶은' 용기도 생길 것이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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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세이프 씽킹 - 불안을 성공으로 바꾸는 사고법
조나 삭스 지음, 서은경 옮김 / 한빛비즈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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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세이프 씽킹>  조나 식스 / 서은경 (2024)

[My Review MDCCCLXIII / 한빛비즈 158번째 리뷰] 성공에 이르는 길은 '레드 오션'이 아니라 '블루 오션'에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레드 오션'은 이미 경쟁이 치열한 곳이다. 왜냐면 그곳은 '이미' 성공해서 널리 알려진 '안정'적인 경쟁구역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블루 오션'은 '아직' 미개척지와 다름 없다. 그곳은 아직까지 성공했다고 알려지지도 않았고 '아무도' 가본 적이 없는 낯선 길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당신이 가야 할 길은 어느 쪽일까?

우리는 이 뻔한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익숙한 것'에서 탈피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그래서 남들이 다 하는 안정적인 삶에서 조금이라도 이탈을 하면 불안에 빠져 허우적거릴 정도로 나약해 빠졌다. 과감한 도전이 필요한데도 그러지 못한다. 왜냐면 그 길만이 '성공하는 지름길'이라고 철떡같이 믿고 있기 때문이다. [영어유치원-사립초등학교-국제중-명문외고-명문대-대기업 입사] 이런 공식을 줄줄이 세워놓고 고~대로 따라기 급급하다. 그렇게 대기업 신입사원이 되면 '성공한 삶'일까? 정답은 그냥 '월급쟁이'다. 대기업 정사원이 되었으니 조금 더 받는 월급쟁이 말이다.

이 책 <언세이프 씽킹>에서는 그런 삶을 '성공'이라 부르지 않는다. 치열한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는, 한마디로 '경쟁사회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는' 몸부림에 불과하다고 직언한다. 왜? 너무 '안전'을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차라리 조금 불편하겠지만 '도전'을 하고, '모험'을 하는 삶이 어쩌면 성공에 이르는 진짜 빠른 길일 수도 있고, 설령 성공에 이르지 못했다하더라도 굉장히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삶이어서 다른 이에게 귀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가치' 있는 삶이야말로 <언세이프 씽킹>이 추구하는 진정한 성공적인 삶이다.

나는 '자기계발서'를 맹신하지 않는다. 수많은 '자기계발서'들이 나처럼만 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걸 다 따라해봤던 경험자로서 그렇게 해도 성공하지는 못하더라는 값진 교훈만 얻었다. 그래서 난 '성공의 법칙' 따위는 없다고 말하는 편이다. 그리고 '부를 쌓는 것'이 곧 '성공'이라는 생각도 버렸다. 단순히 돈만 많이 벌거나 모을 수 있는 방법이라면, 그렇게 성공했다한들 그닥 행복할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면 가난하게 살다보니 돈을 그리 많이 들이지 않고도 행복해지는 방법을 이미 터득했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건강'이다. 돈 좀 벌어보겠다고 이리저리 용을 쓰다보니 덜컥 '건강'을 해치게 되었고, 그렇게 건강에 적신호가 켜지니 돈 많은 것은 아무 짝에도 쓸데가 없었다. 정작 돈을 주고 '건강'을 다시 살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다시 건강을 회복한 비법은 '규칙적인 일상'을 되찾는 것이었다. 일할 때 일하고, 쉴 때 푹 쉬고, 적당히 운동하고, 적게 먹는 습관을 들였더니 차츰차츰 건강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도 약을 복용하고 있지만 병원신세는 크게 지고 있지 않다. 이런 몸으로 또다시 '성공신화의 늪'에 빠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렇다면 무엇이 '성공'에 이르는 삶이란 말인가? 두 말 할 것도 없이 '가치' 있는 삶'이다. 그리고 가치 있는 삶이란 남들이 '해보지 않은' 나만의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기 위해서는 '안전(세이프)한 생각'이 아닌 '안전하지 않은(언세이프) 생각'을 실천하는 용기를 뿜어내야만 한다. 그래야 온전히 나만의 독창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나만의 삶'은 종종 진정한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웬만한 <위인전>을 읽어보면 저절로 고갤 주억거리게 될 것이다. 그런 위인들의 삶이 참으로 '안전하지 않은 생각들'의 연속이었다고 말이다. 남들 하는 것처럼 '따라쟁이'였다면 결코 인류를 위해서 위대한 업적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 틀림없다.

하지만 이 책도 '성공법칙'을 말하기는 마찬가지다. '안전하지 않은 생각(언세이프 씽킹)'을 실천하면 누구나 성공에 이르는 놀라운 비법이라고 강조하기 있기 때문이다. 허나 교육자로서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이런 '언세이프 씽킹'은 언제나 '피프티피프티 법칙(50:50 법칙)'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창의성'을 기르는 수업을 진행하겠다면 학부모와 학생들 모두 반가워하지만, 그런 참신한 교육을 통해서 '창의성'이 높아진 것이 '학교내신(성적)'에 조금이라도 누를 끼치게 되면 곧바로 '보습학원'으로 달려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학생과 학부모를 말릴 수 없었다. 그들의 선택이 완벽하고 완전하게 '틀린 삶'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선택을 하고도 '명문대'에 입학하고, 돈 잘 벌고, 결혼 잘 해서, 애 낳고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만의 교육소신은 상당히 위축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창의적'이지 않아도 그럭저럭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난 그런 삶이 '성공'에 가깝다고 인정하지 않는다. 남들보다 조금 더 풍요롭고 여유롭게 사는 것이 '성공'이라고 한다면 남들보다 조금 덜 풍요롭고 쪼들리게 사는 것은 '실패'한 삶이란 말인가? 그건 절대로 아니기 때문에 그런 넉넉함을 '성공'이라고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진정한 성공이란 흔들리지 않는 안정감이 밑바탕이 되어야 한다. 그런 굳건한 힘 위에 쌓은 것이라야 위대한 금자탑을 쌓아올릴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금자탑은 애초에 많은 사람들이 '시도'조차 하지 않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왠지 불안해서 도전조차 하지 못했는데, 그런 걸 과감히 도전해서 많은 이들이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성공'이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올리다 무너진 것이 바로 '실패'고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굳건한 힘 위에 쌓다 쓰러진 탑을 보고서 손가락질 하기보다는 안타까워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다시 '도전'하는 모습을 보고 응원과 박수를 아끼지 않게 된다. 그것이 바로 '성공'에 이르는 지름길이고, 진정한 성공인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안전하지 않은 생각'을 생활화해야 한다. 쌓아올리고, 또 쌓아올리는 이들을 향한 열화와 같은 응원과 박수가 끊이지 않게 말이다. 그들이야말로 진정 용기있고, 올곧은 저항을 할 줄 알며, 올바른 비판정신으로 똘똘 뭉친 사람들이다. 기존의 틀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못하고 안정만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일깨워주길 바란다. 새로운 것을 향해 도전하고 모험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말이다. 남들과 '똑같은' 삶이 아닌 '나만의 삶'을 추구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비판적이고 합리적인 생각 끝에 조금은 '불안한 선택'을 하는 것이 당신의 삶에 '최고'는 아닐지언정 '최선'을 선사해줄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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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마록 1 : 말세편 퇴마록
이우혁 지음 / 엘릭시르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DCCCLXI / 엘릭시르 13번째 리뷰] 드디어 '말세편'의 서막이다. <퇴마록> 시리즈 가운데 가장 스케일이 크고 가장 복잡한 스토리로 전개될 것이다. 그 서막의 시작은 '치우천왕'이야기로 시작한다. 우리에겐 '고조선'이란 이름이 더 익숙하겠지만, 사실 '조선(朝鮮)'이란 명칭은 오늘날의 한자 발음일 뿐, 반만년 전에는 '우리식'으로 어떻게 읽혔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단지 '한자'로만 전해져 왔을 뿐, 그 당시에 적혔을 우리글 '신시문자(또는 신지문자)'를 오늘날에 읽고 쓸 줄 모르니 답답할 노릇이다. 다만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옛 조선의 이름은 '쥬신'이라 불렀다고 전해지는 까닭에 '고조선'을 '쥬신'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쥬신'은 오늘날의 한반도 북부와 만주, 요동만을 일컸는 영토가 아닌 더 많은 '연맹체'를 합쳐서 아울렀기에 '크다'는 뜻을 써서 '대쥬신(大朝鮮)'이라 불렀고, 그 연맹체의 우두머리를 '환웅'이라 불렀단다. <삼국유사>에도 단군왕검이 1500살을 살다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여러 임금이 '단군왕검'이란 하나의 호칭으로 불렸다는 증거일 수 있으므로, 환웅도 대를 이어 죽 이어져오다가 '자오지환웅(치우천왕)' 때 대제국 조선을 완성했다고 한다. 중국 기록에는 삼황오제 가운데 한 명인 '황제'와 '치우'가 탁록전투에서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고 하니 '대제국 조선'도 그와 비슷한 시기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에 뛰어난 예언자 '우사 맥달'이 있었으니, 그녀가 남긴 '예언서'가 바로 <해동감결>과 이 책의 비밀을 풀어낼 열쇠에 해당하는 <우사경>이었다. 이 책에 담긴 내용은 그 당시로부터 반만 년 뒤에 세상이 멸망에 이르게 되는 '말세'가 도래하니, 이를 막고 인류를 구원할 4명의 인물이 나타날 것이며, 그 4명은 '한민족의 핏줄'을 이어받았고, 온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목숨마저 내놓을 선인(善人)이니, 그들이 말세의 도래를 막기 위한 방법을 알 수 있게 두 권의 책을 전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문제는 두 권의 책을 5000여 년이란 세월을 견디고 온전하게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종이를 발명한 채륜이란 사람도 지금으로부터 2000여 년 전인 한(漢)나라 때 사람이니, 그보다 3000년 전엔 나뭇조각이나 대나무조각에 글을 써서 두루마리처럼 둘둘 말아놓은 '목간'이나 '죽간'이었다. 그러나 '목간'도, '죽간'도, 심지어 '종이'라도 5000년의 세월을 견디기란 대단히 힘들 것이다. 그래서 두 권의 책을 지켜야 할 사명을 띤 사람이 필요했고, 그 사람의 후손이나, 모임의 수장이 두 권의 내용을 손으로 직접 옮겨 적으며 소중히 간직하는 방법을 띠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옮겨 적는 방법도 한계가 있다. 더군다나 오래된 옛글자로 전해져 오는 내용을 제대로 읽지도 못하는 후대의 사람들이 무한정 '베껴쓰기'를 할 것이라는 보장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대예언자 우사 맥달은 한가지 묘안을 마련했는데, 예언에 해당하는 중요한 내용은 쉽사리 알지 못하도록 '암호화'했지만, '불사(不死)'라는 단어만은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적어놓은 것이다. 그러니 이 책을 보관중인 사람이거나, 우연히 이 책을 발견한 사람일지라도 '불사'라는 단어만 보아도 이 책을 소중히 간직해서 전해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두 권의 예언서가 반만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도 후대에 꼭 전해져야 할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도록 안배했다.

이제 남은 것은 두 권의 예언서를 '누가' 발견하고 '어디에' 보관했는지가 중요할 것이다. 그렇게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서복'이다. 그는 진(秦)나라 시황제의 명을 받아 '불로장생의 약'을 구하러 동방으로 떠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가 죽지 않는 영약이 난다는 동방의 영산을 찾아헤맸고, 그렇게 찾아헤맨 산이 바로 '백두산, 금강산, 한라산'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또 다른 일설에는 그가 진시황의 명을 받기도 전에 스스로 자청을 하여 천 명의 어린 선남선녀를 직접 뽑아 배에 태우고 '제주도'로 가서 불로초를 찾았다고도 전해진다. <퇴마록>에서는 이를 기틀로 삼아 서복이 찾은 것이 '불로초'가 아니라 '불사의 기록'이 적혀 있는 <해동감결>과 <우사경>을 발견했고, 이를 해석했으나 원했던 '불로불사'의 내용이 아닌 것을 알자 두 권의 책을 바다 건너 왜(일본)로 가져갔다가 <해동감결>은 일본의 명왕교가 소유하고 있었고, <우사경>은 더 기가막힌 곡절을 겪은 뒤에 개항기 시절 막부의 창고에 묵혀있던 것을 미국이 수탈해서 가져갔으나 아무도 그 내용을 알지 못해 방치 되었다가 '차이나타운'에서 우연히 발견되었다는 스토리를 전개시켰다.

1권에 해당하는 이야기들은 모두 이 두 권의 책 내용을 해석하거나 행방을 찾아 퇴마사 일행들이 떠나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여기에 '말세'와 관련되어 전세계 종교와 종파, 비밀결사단체 등등이 자신들에게 전해져내려오는 비밀이 속속 밝혀지는 등 전반적인 이야기의 스케일이 너무나도 방대해져서 독자들을 어리벙벙하게 만들 정도다. 그러나 아직 '본격적'인 이야기는 시작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기억하기 바란다. 뒤이어 나올 이야기는 더욱더 놀라운 충격의 연속일테니 말이다. 그리고 퇴마사들의 능력은 '말세'를 대비하여 초인적인 능력을 발휘할 예정이니 기대하셔도 좋다. 박 신부의 '기도력', 이현암의 '기공술', 장준후의 '주문술', 그리고 현승희의 '염력(사이코키네시스)'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강해져서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들이 펼칠 활약도 놓치지 않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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