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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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My Review MCMXL / 이봄 4번째 리뷰] 역시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수짱 시리즈'부터 읽어야 했다. 이 책을 읽고나서야 비로소 '마스다만의 필력'이 엿보였기 때문이다. 수짱의 입을 통해서 '30대 여성의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데, 그 솔직함이 너무 과해서 때로는 '불편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그것이 '여자의 일생'을 대변하는 것 같으면서도, 우리 사회가 외면하고 있는 '여성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면서 아슬아슬한 선을 넘나들기도 하고 있다. 그렇지만 그것이 또 '문제화'가 되어 여러 사람들을 골치아프게 만드는 것은 민폐라고 생각하여 머뭇거리는 것이, 한편으로는 우리 사회가 아직까지도 '성숙하지 못하다'는 반증인 것 같아 아쉽게 한다.

이 책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뭐지?>에서 언급하고 있는 내용은 주로 '30대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은 문제제기다.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여성이라면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그렇다고해서 이 문제들이 '일본사회'만의 문제인 것도 아니다. 비슷한 경제상황을 겪고 있는 수많은 '선진국 여성들'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유교적 여성관'을 지닌 동아시아여성만의 독특한 문제제기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수짱이 던지는 질문들은 이들 모두의 공통분모를 갖고 있는 '한국여성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마스다 미리의 책들이 수많은 여성들에게 공감을 얻은 것 같다. 그럼 하나씩 따져보자.

먼저, 30대 여성은 충분히 젊은가? 라는 질문부터 던져보자. 최근에는 여성의 평균수명이 80살에서 90살을 넘보고 있으니, 30대라면 상당히 젊은 편에 속한다. 앞으로 50~60년을 더 살 수 있는 나이다. 그래서 30대 여성이라도 요즘에는 상당히 '예쁘다'고 할 수 있고, 심지어 '젊어 보이는 나이'라는 점에선 논란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30대 여성들은 충분히 예쁜 나이이고, 젊은 나이인데도, 주위에서 '예쁘다', '젊어 보인다'는 얘기에 민감하다. 20대 때만해도 당연하게 듣는 소리였는데, 왜 '서른살'이 넘으면 그런 얘기가 칭찬으로 들리고, 그런 얘기를 더욱더 갈구하게 되는 걸까? 아직 40대가 된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만 '생물학적 나이'로 판단을 해보면, 30대 여성은 꽤나 늙은 나이에 속한다. 왜냐면 '임신과 출산'을 할 수 있는 나이로는 꽤나 늙은 나이이기 때문이다. 10대 후반부터 40대 초반까지를 '가임기간'으로 봤을 때, 여자 나이 30살은 '여자일 수 있는 나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심리적 불안을 일으키기에 충분한 나이다. 이는 '결혼연령'을 따지게 만드는 스트레스(압박감)를 동반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현대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임신과 출산'이 의무사항(?)은 아닐지라도, 사회적으로 '여성의 능력'인 것만은 틀림없기에 웬지 '그 능력'을 과시할 수 있다가 슬슬 자신감이 떨어지는 시기이기에 '30대'라는 나이에 대한 심리적 불안감이 작동하는 나이이기도 하다. 거기다 20대에 비하면 '피부탄력'이나 '신체건강', 심지어 '화장발'조차 잘 먹히지 않은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나이이기도 하다. 그래서 아무리 전날 혹사를 했더라도 다음날 아침이면 개운하게 일과를 시작하던 20대와는 달리 30대로 접어들면 왠지 찌뿌둥한 것이 '나이'가 들어서 그런 것이라는 짜증이 밀려오는 것에서 기인한 불안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여성나이 30대는 여러 모로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나이인 것이다.

그런데 수짱의 엄마와 고모가 모두 '30대 일본여성'이라는 것이 이 만화의 핵심사항이다. 수짱의 엄마는 '기혼'이고, 수짱의 고모는 '미혼'이다. 이렇게 '결혼유무'에 관한 두 사람의 대조적인 모습이 이 책의 백미인 것도 있다. 중요한 것은 기혼인 여성도, 미혼인 여성도 모두 '불만족스런 30대'에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점이다. 기혼 30대 여성은 직장도 없이 경제적인 능력을 모두 남편에게 의지하고 '가사노동'을 하는 것만으로 존재가치를 인정받는 '아내'이자 '엄마'이기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왜냐면 '같은 나이'인데도 어떤 친구는 '이혼'을 하고서 '직장'을 다니고 있고, 자기가 번 돈으로 '외국여행'도 다니며, '남자친구'와 데이트도 하고 섹스(?)도 즐기고 있는 것을 보면서, 자신은 '날개가 꺾여버려 자유를 잃은 불쌍한 존재'로 여겨지는 탓이다. 그래서 자신도 '직장'을 구하면 어떨까? 고민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이 또 '남편의 경제력'이 무능력한 탓으로 비춰질까봐 걱정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남편에게 조언을 구하고서 흔쾌히 허락(?)까지 받아놓았지만, 이 또한 '주인(일본에선 '남편'을 '주인(主人)'이라고도 부른다)'에게 허락받는 것처럼 느껴저서 서글퍼진다. 왜 노예도 아닌데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미혼 30대 여성도 고민스러운 것은 마찬가지다. 수짱의 고모는 '자발적 백수'인 상태다. 직장을 충분히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추고 있는데도, 이런저런 사정 때문에 그냥 쉬고 있다. 물론 '집'도 있다. 그러니 경제적 능력이 부족한 것도 아니다. 그냥 현재 느끼는 '자유'를 만끽하여 여유롭고 느긋하게 있을 뿐이다. 근데 자기 또래의 여성들이 '결혼'을 하고, '자녀'를 기르고, '가정'을 꾸리며 바쁘게 살아가는데 자신은 여유롭다는 것에 왠지 모를 불안감이 휩싸여온다. 이대로 영영 결혼도 못하는 건 아닐까? 잃어버린 30년인데 영영 회사로 복귀하지 못하는 건 아닐까? 이대로 늙어버려서 여성적인 매력까지 잃어버리고 그대로 늙어버리는 것은 아닌가? 등등 여러 가지 생각이 떠나질 않는다.

그러면서 두 여성은 동시에 물음을 던진다. '내가 정말 원하는 게 뭐지?'하고 말이다. 21세기 일본에서 살아가는 30대 여성은 도대체 정말로 무엇을 가장 바라고 있는 걸까? 이걸 가지면 저것도 갖고 싶고, 고로케 살다보면 요로케 살아가야 바람직한 것이 아닐지 의구심이 밀려온다. 물론 이런 고민들은 '30대 남성들'도 똑같이 하곤 한다. 그러나 여성들과 비교하면 좀 단순(?)한 고민들이다. 왜냐면 남성들은 '생물학적 고민'도 40대 이후이고, '경제적인 고민'도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사회구조적 문제로 접근해서 풀어버리는 경향이 크기 때문이다. 오히려 남성들의 고민은 '경제적인 능력'에 함몰되어 있는 편이다. 그리고 이런 문제들은 남성들이 꽉 쥐고 있는 경제주도권으로 어느 정도 해결해버리곤 한다. 왜냐면 사회적으로 남성들의 취업은 꽤나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성인'이 되면 으레 '취직'을 해야 사람구실한다고 여겨서 취업을 할 의지만 있으면 어디서든 일을 할 수 있다. 그리고 '결혼'을 하면 다니던 직장에서 격려를 해주며, '자녀'가 생기면 더 많은 격려를 해주는 분위기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남성들의 고민은 꽤나 단순한 편이다. 여성이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 육아를 할 때마다 '직장상사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것에 비한다면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의 결론은 무엇일까? 안타깝게도 꽤나 소극적이다. 수짱의 엄마가 자신도 '직장'을 구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주인'이라 부르지 않고 '남편'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결말을 내놓았기 때문이다. 직장을 구하고서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나선 것이 아니라 그저 '열린 결말'로 앞으로 변화할 수 있다는 여지만 남겨놓았을 뿐이다. 그럼에도 2012년쯤의 일본사회에서는 큰 시도였는지도 모른다. 일본에선 아직도 '여성인권'적인 면에서 낙후된 모습을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한때 전세계적으로 큰 붐을 일었던 '미투사건'도 유독 일본사회에선 그 영향력이 미미했다. 그리고 아직도 일본여성은 '결혼'과 동시에 '직장퇴사'를 하고 '가사와 육아'에 전념하는 사회현상이 여전하다. 맞벌이를 하면 '남편의 경제적 능력이 없다'는 것을 자랑하는 꼴이라면서 기피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일본의 현실에서 수짱이 던지는 질문들은 여성독자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물론 모든 선진국 여성들이 겪는 문제이기도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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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는 연애중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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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My Review MCMXXXV / 이봄 3번째 리뷰] <내 누나>(2014), <내 누나 속편>(2017)에 이은 세 번째 '단행본'이다. 일본의 패션 잡지 '앙앙(an an)'에 연재한 만화를 모아서 펴낸 책인듯 싶은데, 다 읽으니 그저 그랬다. 처음으로 읽었던 <내 누나>는 너무 좋았다. 누나가 남동생에게 인생선배로서 코칭을 해주는 컨셉이 정말 좋았기 때문이다. 더불어서 남자는 잘 모르는 '여자의 속마음'을 남자들의 눈높이에 맞춰서 설명해주는 점에 배울 점이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리 세 편을 다 읽기는 했는데, 굳이 3권이나 읽을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같은 레퍼토리'를 무한 반복한 듯한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여성패션 잡지 성격상 '여성의 속마음'을 대변해주는 내용이 인기 있을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으나, '남성독자'인 나에겐 '그래서, 여자들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의문점으로 결말을 내릴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30대 커리어우먼인 '지하루'가 말하는 내용은 늘 '여성이 바라고 바라는 남자'가 대화의 1순위였다. 그래서 '어제'의 데이트 상대가 어쨌고, '오늘'의 데이트 상대는 어땠으며, '내일'의 데이트 상대는 저랬으면 참 좋겠다는 것이 대화의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지하루가 늘 내뱉는 말은 "살 빼고 싶다"는 말이다. 근데 남동생이 누나에게 "늘 같은 말 뿐이다"라고 핀잔이라도 줄라치면 누나는 "오늘은 '그런 뜻'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네. 여자의 말에는 '같은 말'이 없어. 비록 '같은 말'처럼 들리더라도 '상황'이 달라지면 말뜻도 달라지는 거야. 여자의 '본마음'을 캐치하지 않으면 인기남이 되기 힘들어. 여자가 '듣고 싶은 말'을 할 줄 아는 남자가 되어야 해"라고 말할 뿐이다.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왜 상황이 달라졌는데, '같은 말'을 하는 걸까요? 같은 말을 했으면 '뜻'도 같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여자들은 그 말의 본래 뜻을 잘 이해하는데, 왜 남자들은 이해할 수 없는 말을 쓰는 걸까요?

처음엔 이런 '차이점'이 신선했고 '여자의 속마음'을 알고 싶어서 더 많은 정보를 얻고자 탐독하려고도 했으나, 그 열기는 금방 시들해지고 말았다. 지하루가 바라는 것이, 다시 말해, 30대 여성이 '사회생활'을 통해서 얻고자 하는 것이 그저 그런 '속물근성(?)'과 그리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30대 남성이 바라는 '속물근성'가 그리 차이가 나지 않은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현대의 도시남녀들은 서로가 바라는 '속물'이고,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그 수준에서 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보니 '여자의 속마음'을 굳이 알아챌 필요도 없게 되었다. 그저 저들의 '개인적 취향'에 걸맞는 남녀가 만나 사랑을 하는 것이 전부인 '만화'가 되고 말았다. 이걸 굳이 3권이나 읽고서 깨달을 필요가 없는 셈이었다.

마스다 미리의 인기비결은 그럼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물론 그 인기가 '현재진행형'은 아니지만, 한시절을 풍미했던 인기작가의 성공비결을 분석하는 것도 나름 의미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잘 보이진 않았다. 그저 '유머스러움'이라는 것이 유일한 비결처럼 보였다. 그마저 '철지난 유머'여서 그리 신명나지 않았지만 말이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것은 아닌 듯 싶었다. 다른 팬들도 <내 누나> 시리즈에서는 크게 실망하고, <수짱> 시리즈에서 받았던 감명을 이어가지 못한 작품이라고 평가를 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연 <수짱>에서는 그 인기비결을 제대로 발견할 수 있을까? 다음 책은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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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의 시대 - 한국 스켑틱 Skeptic 2018 Vol.15 스켑틱 SKEPTIC 15
스켑틱 협회 편집부 지음 / 바다출판사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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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My Review MCMXXXIV / 바다출판사 14번째 리뷰] 25년에 7년전 잡지를 읽고 있는 것이 우스꽝스러울 수도 있지만, 그것이 '과학잡지'이고, 또한 '과학적 회의주의'에 입각한 칼럼을 읽는다는 것은 전혀 우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왜냐면 그 시절 '철지난 논쟁'이 7년이나 지난 지금도 여전하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2018년은 '박근혜 탄핵'이 이루어지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지 2년째가 되는 해다. 그 시절에 날선 공방이 오고 가던 것은 바로 '유사역사학'과 '사이비역사'에 대한 날선 비난이었다. 이 잡지의 제목이 '무신론의 시대'라고 달려 있으나, 조금 유심히 살펴보면 살짝 작은 글자로 '누가 역사를 왜곡하는가'라는 제목의 칼럼도 달려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당시에 '역사왜곡'을 하려던 세력이 있었단 말인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있긴 있었다. 그것도 아주 오랜 시간에 걸쳐 철저한 역사왜곡이 진행되어 왔었다. 바로 '일제의 식민사학'이었다. 일제는 '한국지배'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한국의 역사를 일본 역사의 지위 '아래' 두려는 작업을 실시했으나 쉽지 않았다. 왜냐면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한국의 역사는 늘 일본 역사보다 상위에 존재했기 때문이다. 이를 뒤집기 위해 억지주장이라도 해야 했으나 확실한 물증도 없이 역사를 왜곡했다가는 서구열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유일한 아시아국가로서 체면이 손상될 우려가 있기에 매우 치밀하고 철저한 '왜곡'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 결과 내놓은 것들이 '임나일본부설'이었고, '광개토대왕 비문조작', 그리고 '칠지도 명문해석 논란' 따위 였다. 하지만 이런 왜곡 시도는 허술했던 탓에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대부분 '왜곡의 실체'까지 파악하여 '반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땅의 역사학자들이 저지른 '식민사학의 뿌리'는 매우 큰 문제를 낳았다. 우리 역사의 실체를 낮잡아보는 '자학사관의 모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 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못났다'고 공식화 해버리니 도저히 손을 쓸 도리가 없게 되어 버린 것이다.

이에 소위 '민족사관'으로 우리 역사의 자긍심을 되살리자는 민족주의 역사관을 가진 학자들이 '식민사관'에 맞불을 놓으니, 이런 역사학이 '비과학적'이라면서 국뽕에 물든 '국수주의'에 불과한 날조된 역사라고 비난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렇게 비난을 쏟아내는 학자들이 대학강단에 선 사람들이 주축이 되었기에 '강단사학자'라고 불리고, 이에 맞서 국수주의 역사관을 주장하는 학자들이 재야에 묻혀서 '학계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연구하고 발표한다고 하여 '재야사학자'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양단에 서서 서로를 향한 날선 비판과 비난이 마구마구 쏟아지기를 반복하던 와중에 '박근혜 정권'은 역사교과서를 기존 '검정교과서'에서 '국정교과서'로 단일화를 하겠다는 발표를 해버린다. 이유는 학생들이 배우는 '검정교과서'가 좌익사상에 물들고 북한을 찬양하는 내용이 담겨 있어서 대단히 우려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국정교과서'를 편찬해서 학생들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가르치겠다고 발표를 했는데, 하필 그런 '국정교과서'를 편찬하는 주최가 '뉴라이트 계열'의 학자들인 것이 도마에 올랐다. 여기저기에서 교육정책에까지 '식민사관'과 '보수우익적 정치색'을 심으려는 것이냐면서 엄청난 논란이 되었었다. 그리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자 '국정교과서' 이야기는 잠잠해졌고, 그때 만들어진 '국정교과서'를 채택한 고등학교가 전국에서 딱 1곳뿐이었다는 뉴스가 장식되었었다.

그런데 현재 2025년이 된 지금은 어떤가? 민주주의가 위협당하며 '반국가세력'을 처단하려고 계엄령을 선포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그 당시에 '뉴라이트'가 주장했던 이야기는 '극우유튜버'들이 계속 이어왔고, 그런 극우적 망상을 신봉한 윤석열은 끝내 '계엄령'을 선포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이걸 과연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 당시 '젊은역사학자모임'이라는 강단사학자들이 <한국 고대사와 사이비 역사학>(2017), <욕망 너머의 한국 고대사>(2018)이라는 책을 저술하면서 '한국의 고대사'는 재야사학자들(그들은 '사이비역사학자'라고 부른다)에 의해 날조되다시피 했다며 '과학적 연구 검증'이 시급히 필요하다는 주장을 내세운다. 그리고 젊은 역사학자들은 한국의 역사에 '과학적 검증'을 들이대서 아주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할 수 있다는 그럴 듯한 논리를 내세웠다. 겉보기에는 아주 신선했다. 대중들은 '한국 역사'에 자긍심을 키워가고 있으니, 그런 자긍심에 '과학적 검증'으로 사실을 입증할 수만 있다면 더 좋을테니까 말이다. 그런데 대중들의 이런 기대에 쇠말뚝을 박고 말았다. 과학적 검증 결과, 대중들이 즐겨보는 '재야사학자'들의 역사저술은 '사이비'에, '날조'였고, '유사과학'과 마찬가지인 '유사역사학'으로 점철되어 한국의 역사는 기본적으로 자긍심이고 뭐고 할 것 없이 '객관적'으로 짜친 역사라는 이야기만 늘어놓았기 때문이다. 과거 '식민사관의 뿌리'가 제거되지 못한 결과, '자학사관의 한국사'가 다시 불거지게 된 것이다.

그런데 이 잡지에 그 '강단사학자'의 이름이 보인다. 기경량, 안정준...이들은 '회의주의 과학잡지'에 자신들의 논리를 '과학적'으로 포장해서 사이비과학을 경계하듯 유사역사학도 경계해야 한다면서, 역시나 '한국의 고대사'를, 나아가 '한국의 역사'를 또다시 폄훼하고 있다. 그들의 주된 공격대상은 <규원사화>, <단기고사>, <환단고기>가 명백한 '위서(가짜 역사책)'이니 이를 바탕으로 한 '위대한 한국의 고대사'도 사실무근이며, '한사군'은 실존했고, '낙랑군'은 현재의 평양에 위치했으며, '임나일본부'까지는 아니어도 과거의 일본이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고, 과학으로도 증명할 수 있으므로,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식민시절의 늙은 학자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가 아니다. 젊은 조교수들의 입에서 나온 얘기다. 서울대학교 역사학부를 졸업한 수재들이 이런 소리를 한단다. 일본의 극우논객이 할 법한 이야기를 아주 술술 거침없이 이야기하고 있어서 경악을 했더랬는데, 이 잡지에, 그 시절에, 또 올리고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버젓이 살아숨쉬며 '애국시민'을 선동하는 극우세력으로 활동영역을 넓히고 있는 것이다.

이들이 '사이비'라면서 공격했던 재야사학자들이 애써 키운 '한국 역사의 자긍심'은 모두 날조에 가깝고, 잘못된 사실에서 기인한 '욕망'이니 버려야 옳다고 말한다. 도대체 이런 목적으로 '과학적 검증'을 하는 까닭이 무엇일까? 그 당시에도 궁금했지만, 지금은 더 궁금하다. 그럼 잠시 '무신론의 시대'를 살펴 보자.

이 잡지가 편찬된 2018년을 기준으로 미국시민들의 '종교관'을 여론조사했는데, 놀랍게도 '나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고 의견을 밝힌 비율이 2000년 초반보다 늘어났다고 한다. 심지어 '교회를 가지 않는다'는 사람도 늘어났고,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 사람들의 비율도 확실히 늘어났다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무신론'이 대세를 굳혀 가고 있다고 본 것인데, 과연 그런 것인지 의심스러운 부분은 있다. 하긴 유럽에 있는 수많은 성당과 교회에서 더 이상의 '예배(미사)'를 하지 않는다는 뉴스를 들은 적이 있다. 신도들이 찾지 않으니 점점 관광목적으로 방치될 뿐, 실제 원래의 용도로 쓰이지 않고 있는 건축물이 점점 늘어난다고 말이다. 이처럼 서양사람들의 '종교관', '신앙심'이 예전 같지 않다는 것에는 동의하는 바다. 그러나 전세계적으로 '무신론'이 확신되고 있느냐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말하기에는 회의적이다. 여전히 신앙은 굳건한 지위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들이 꽤나 많기 때문이다. 다만 '과학'이 발달하면서 신에 대한 믿음은 줄긴 했으나 그것이 '종교의 위세'까지 꺾지는 못할 것이라는 의견이 중론인 건 사실이다.

그도 그럴 것이 대한민국만 봐도 '신'을 믿는 사람은 절대적으로 열세다. 그러나 '종교'를 가지고 있느냐는 물음에는 대다수가 '있다'고 대답한다. 이 말인즉슨 '과학'이 발달한 나라에서 '신의 존재'를 믿느냐 아니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지만, '종교활동'을 통해서 신앙심, 그 이상의 무엇에 대단히 열심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성당이나 교회, 절 등에서 '신앙인'들이 설교나 법회를 열 적에 종교에 관련된 이야기보다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더 많이 하는 것을 볼 수가 있단다. 그리고 종교인들이 '특정정파'를 지지해야 한다거나 '특정인물'을 대통령으로 뽑아야 나라가 산다는 따위의 설법을 아주 자연스럽고 공공연하게 한다고 한다. 이게 바람직한 신앙이고, 종교인지는 차치하고서, 수많은 신도들이 신부님의 말씀, 목사님의 설교, 스님의 강독을 들으면서 '믿숩니다'를 외친다는 사실이다.

이런 일련의 현상이 지금의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현상의 일부분일 것이다. 전광훈이 나와서 '헌재'를 폭파하라는 설교에, 전한길은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결사항전을 해야 한다고 강의를 한다. 왜 종교와 역사가 맞물려서 쌍으로 메롱을 떠는가 말이다. 식민사학자들이 '유사역사학'이라고 비난을 할 때, 그런 비난을 좋아할 대상이 누군지 주목했다. 전광훈, 전한길의 한목소리에 누가 좋아할지 생각해보면 답은 얼추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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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누나 속편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박정임 옮김 / 이봄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My Review MCMXXX / 이봄 2번째 리뷰] '마스다 미리'의 작품 중 '두 번째'로 읽는 책이다. 전편에 이은 속편인데, 이 작품의 매력이 무엇인지 조금 고민하게 된다. 혹시 여성독자들만을 '위한' 기획의도는 아니었는지 살짝 의심도 해보니, 남성독자들에 대한 배려는 전혀 하지 않았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그렇다고 불친절하다는 것은 아니고 철저히 '여성의 관점'에서만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면 제목은 '내 누나'인데 그 내용은 '울 언니'로 읽히기 때문이다. 지하루 누나는 절대로 남동생을 위해서 '속마음'을 드러내지 않는다. 오직 '여성독자'들을 위해서만 썰을 풀어낼 뿐이다. 이런 뉘앙스를 읽어내니, 이 책에 대한 애정도가 확 내려가고 말았다. 적어도 '남성독자'인 나에겐 말이다.

전편인 <내 누나>를 읽었을 땐, 여성들의 감춰진 속마음을 엿볼 수 있어서 괜춘했다. 여성독자라면 '공감대'를 형성해 2시간 넘게 수다를 떨 수도 있었을 테고, 남성독자라면 '신세계'를 발견한 듯 여성들의 속마음을 이해하려 노력했을테니 말이다. 그런데 '속편'에서는 그런 시동을 걸지도 않고서 시작부터 대놓고 '어린 남동생에게 조언을 발사한다'는 느낌만 받았다. 이것이 여성독자들에겐 역시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지언정, 남성독자들은 '불편함'만 느끼는 무엇이 발동되는 것만 같았다. 왜 기분이 괜춘치 않을까?

먼저, 지하루 누나의 발언이 '고압'적이다. "여성을 알려고 하지마. 남자는 죽었다 깨나도 이해할 수 없는게 여자의 마음이니까!" 이게 정말 알려고 노력도 하지 말라는 말이면, 남자들은 그냥 수긍할텐데, 여자의 속마음은 그게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자는 알려고 노력해야지. 그걸 안 하니까. 여자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별볼일 없는 남자인거야~라는 것을 남자가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하면서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니까?"라고 설명을 덧붙이는 여성들 앞에 겸허한 자세로 배우려는 남자들에게 여성들은 한소리를 한다. "이걸 꼭 설명해야 알아 듣겠니?"라면서 '여성들의 고도심리술'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성들의 단순함을 한껏 비아냥거리고 만다.

이걸 굳이 철학적 난제로 풀어 비유하자면, 학자들은 풀기 힘든 문제를 만났을 때는 만병통치약처럼 내뱉는 말이 있는데, 그게 바로 "이 문제는 '구조적 문제'를 품고 있기 때문에 풀어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이것을 해결하려면 저것이 상충하고, 저것을 해결하려면 이것이 꼬이게 되는 '난제' 중의 '난제'인 것입니다."라고 답변하는 것이다. 그냥 '정답'을 모른다고 말하면 될 것을 그저 뭔가 있는 것처럼 말을 꼬아놓을 뿐이다. 이것 잘 알아들은 질문자(사회자)는 그 문제에 대한 질문을 철회하고 다른 질문을 던지는 것으로 진행의 묘미를 살리는데 반해, 어리석은 진행자는 궁금하다면서 꼬치꼬치 캐물어서 곤란하게 만들고 분위기를 싸하게 만들 뿐이다.

그렇다면 여성도 '자신의 마음'을 잘 몰라서 저렇게 대답하는 걸까?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하겠으니, '질문'에 답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질문'으로 답을 대신해서 위기를 모면하려고 하는 것일까? 딴에는 '틀린 말'이 아니겠으나, 굳이 맞다 틀리다라고 따질 문제가 아님을 이해해야 한다. 그저 '정답'이 없는 것일 뿐이다. 마음에 대한 답이 분명하다면 '심리학'이 과학의 한 분야인데 '정답'을 찾지 못하고 헤맬 턱이 없기 때문이다. 물론 심리학이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도 아니지만 말이다. 암튼 '마음'은 과학이 절대 아닌 까닭에 그 누구도 '여자의 마음'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거나 과학적으로 증명된 '정답'을 찾을 수 없다.

그럼 '여자들이 말하는 여자의 마음'은 무엇일까? 솔직히 말하면, 남자의 마음과 그리 다르지 않다. 남자들이 '예쁜 여자'를 선호하고, '예쁜 여자'가 하는 말과 행동을 모두 사랑하는 것처럼, 여자들도 '멋진 남자'를 좋아하고, '멋진 남자'가 하는 말과 행동을 모두 사랑한다. 이렇게 겉모습에 마음이 요동치고 흔들리는 것은 매한가지다. 그런데도 여자들은 '외모'가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고, 그 '무엇'이 있어야 한다고 한결같이 말한다. 그리고 여자들은 그 무엇에 심쿵하고, 설렐 수 있다고 말이다. 물론 남자도 마찬가지다. 예쁘고 섹시한 여자의 외모에 홀딱 반했다고 하더라도, 여자의 그 '무엇'을 늘 찾아헤맨다. 그리고 그 무엇에 빠져서 헬렐레하는 남자들을 향해 여자들은 혀를 끌끌 차면서 '여우짓'에 홀랑 넘어간다고 비아냥거리곤 하는데, 남자들이 여자의 여우짓에 홀리는 것처럼, 여자들도 남자들의 '늑대짓'에 홀딱 넘어가 허어적거리는 것을 보고서 한심해 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여우짓과 늑대짓을 한눈에 알아보는 '동성'들은 한결같이 말한다. "남자는 남자가 알아보는 법이야"라고 말이다. 여자도 똑같은 말을 하지 않던가. 그렇게 서로 홀릴 수 있는 까닭은 서로의 감성과 이성을 잘 알아채지 못하는 '이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남자는 남자끼리 있을 때, 여자는 여자끼리 있을 때, 서로의 '본마음'을 잘 알 수 있다. 하지만 서로 섞여 있으면 '본마음'을 잘 모를 수도 있다. 이를 두고서 어리석네, 홀렸네, 콩깎지가 씌었네..라고 비아냥거릴 필요가 있느냔 말이다. 그저 잘 모르니 그런 실수를 하는 것이다. 그리고 서로를 잘 모르니 '설렐'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전편 <내 누나>보다 속편 <내 누나>는 좀 별로였다. 이 책의 '합본'도 있던데, 차라리 그 책을 읽었으면 이런 불편함을 덜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뒤로 갈수록 매번 '같은 패턴'이라 살짝 지루한 감이 있을지언정 전편에서 느꼈던 '신선함'을, 속편에서 '기대이하'로 추락시킬 까닭은 없었을테니 말이다. 도대체 마스다 미리 작가에게 무슨 매력이 있길래 '유명세'를 떨쳤던 것인지, '다른 책'을 좀 살펴보련다.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날카로운 시선으로 탐지해내는 무엇이 있다는 평이 많던데 말이다. 일단 시작한 시리즈 <내 누나는 연애중>까지 마저 읽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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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이라는 세계
리니 지음 / 더퀘스트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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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y Review MCMXXII / 더퀘스트 2번째 리뷰] '필사'라는 것을 시작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작년 연말에 어처구니 없는 '비상계엄'이 발표되자 '윤석열 씨'로 시작하는 필사도 겸하기 시작했으니까. 작년 11월 4일이 첫 시작이었다. 하지만 '다이어리'를 작성해본 경험은 오래 전부터 있었다. 2002년 월드컵 직후에 대한민국 축구가 월드컵 4강에 진출했는데, 나도 뭔가를 해봐야겠다면서 시작한 목표가 '1년에 책 100권 읽기'였고, 읽은책 목록을 다이어리에 '기록'하기 시작했으니까 말이다. 벌써 20년이 훌쩍 넘었다. 아쉽게도 그 당시에 썼던 다이어리들은 보관상태가 엉망이어서 '다이어리 가죽자켓'에 곰팡이가 쓸기도 했고, 글씨도 삐뚤빼뚤이라서 한 10여 년 전에 버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도 '독서기록'은 쭉 써오긴 했는데, 2005년부터는 손글씨가 아닌 '온라인'에 리뷰형태로 남겨왔기 때문에 '종이'로 기록된 것은 거의 없다시피 하다. 그러다 작년 11월에 다시 시작한 것이 '필사'였다. 그리고 지금까지 쓰고 있으니 나름 세 달째 쓰고 있고, 거의 날마다 사진을 찍어 '블로그'나 '온라인서점', 그리고 '투비'와 '브런치'에 올리고 있다. 인기는 별로 없다. 그래도 '시작'을 했으니 꾸준히 할 생각이다.

이렇게 '필사'를 시작하고 보니, '필사'에 관련된 책들이 이렇게나 많이 나와 있는 줄은 몰랐다. 해마다 연말연시가 되면 '문구점'에 각종 공책이나 다이어리 제품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길래 '누군가' 사서 쓰기는 하다보다 싶었는데, '필사'나 '기록' 관련 책이 이렇게나 넘쳐나고 있다는 사실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요즘 더욱더 부지런히 쓰고 있기는 하다. 배우고 싶은 선배(?)님들의 '필사기록'이 참 많아서 좋기도 하고 말이다. 왜냐면 '가이드라인'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지금은 무작정 '따라쓰기'를 하고 있다. 이렇게도 써보고, 저렇게도 써보면, 결국 '나만의 스타일'이 완성된다는 것을 지난 20년간 꾸준히 '리뷰'를 써오면서 잘 알기 때문이다. 다만 '온라인 타이핑'과 '오프라인 손글씨'의 차이점은 빠르고 느린 '속도의 차이'이기도 하지만, 손으로 쓰는 것은 '쓰면 쓸수록' 점점 손에 익어가는 느낌이 들고, 온라인과는 달리 '틀리지 않으려고' 애쓰는 과정이 녹아 있기에 더 소중하게 느껴져서 '애착'이 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렇게 애착이 가는 시점부터 고민과 불평이 늘기 시작하는 건 어쩔 수 없다. 두 가지 불만이 쌓이기 시작하는데, '전문적인 필사가들'만큼 자신이 직접 쓴 '글씨의 모양'이 마음대로 써지지 않기 때문이다. 글씨체도 맘에 안 들고, 글씨크기도 고민이고, 고수님들이 작성한 '기록'들은 한없이 예쁘기만 한데, 왜 내가 쓴 글씨는 삐뚤빼뚤이고, 컸다가 작아지고, 왼쪽의 글자배열은 어느 정도 줄을 맞출 수 있겠는데, 어찌해서 오른쪽의 글자배열은 들쑥날쑥인 건지...이런 불만이 점점 쌓이다보면 어느새 '필사'를 빼먹고, 나중에는 귀찮아서 쓰지 않고 마는 경험이 다들 있기 때문일 것이다. 다른 하나는 '전문가들의 다이어리'는 한권 한권이 '깔끔하게 정리되어서' 멋져 보이는데, 내가 직접 쓴 다이어리는 왜이리 허술하고 맹탕인 건지, 다 쓰고도 그냥 쓰레기통에 버리고 싶을 정도로 엉망이라 남 보여주기 부끄럽기만 하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런 걱정은 하지 않는 게 좋다. '필사공책'이나 '다이어리'는 한 10년쯤은 '연습' 삼아 이렇게 저렇게 써보다가, 그 가운데 '어멋! 이건 딱 내 스타일이야!!'라는 것이 유레카! 처럼 발견이 될 때, 그걸 중심으로 삼아 차곡차곡 쌓아나가면 되기 때문이다. 나도 이런 깨달음을 온라인리뷰 20년을 써보고서야 겨우 깨닫게 되었다. 그러니 처음부터 완벽한 '완성형 필사기록'을 남겨야지..라는 욕심을 버리고, 1000원짜리 싸구려 공책을 사서, 모나미 검정 볼펜으로 쓱쓱싹싹 꾸준히 써나가는 연습부터 하다가, 그 공책이 10권쯤 쌓였을 때, 예쁜 다이어리와 잘 써지는 펜을 구입해서 '나만의 다이어리'를 작성해나가는 방법이 나와 같은 초심자에게는 딱 어울리는 방법일 것이다. 현재 필사 3달째인 나는 '집에 굴러다니는 아무 공책'에다가 '공짜 선물로 받은 펜'으로 매일매일 쓰는 연습부터 하고 있다. 리뷰쓰기는 '20년차'지만, 손글씨는 이제 '완전초보' 딱지를 떼기 전까진 이런 작업을 매일매일 할 것이기 때문이다.

손글씨도 한글자 한글자 '예쁘게' 쓰는 것도 좋겠지만, '줄'을 맞춰서 쓰는 연습이나 '글씨크기'를 일정하게 쓰는 연습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다이어리 작성 고수들'은 글씨체가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안다. 물론 '예쁜 글씨체'나 '유행하는 글씨체'가 따로 있기도 하고, '펜글씨 교본' 같은 것도 많이 있지만, 어떤 글씨체라도 웬만하면 '줄 맞추고', '크기만 일정'하면 나름대로 개성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연습만 꾸준히 하게 되면, 굳이 '다이어리'에 옮겨 쓸 것도 없이, 책의 한귀퉁이에 써넣은 '메모'만으로도 꽤나 볼만한 기록을 남길 수 있고, 그렇게 '코멘트'나 '밑줄'을 남긴 책은 읽을 때마다 '추억'이 되살아나서 기쁘고 '예쁜 글씨'에 또 한 번 만족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기록'을 잘 남기기 위해서는 '글씨 쓰는 연습'부터 하는 것이 첫 번째다. 개성 넘치는 글씨는 대환영이고, 중요한 것은 '줄'과 '크기'만 일정하게 쓸 수 있는 스킬을 갈고 닦아야 한다는 것! 잊지 마시길 바란다.

그 다음에서야 이 책 <기록이라는 세계>의 저자인 '리니'님들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올 것이다. 리니님이 남긴 기록물을 참고 삼아 '자기만의 스타일'을 찾아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아직 '내 수준'은 초보임이 분명하기에 리니님처럼 '완성형 기록물'을 남기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느 정도 따라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을 때 꼭 따라하고 싶은 방법이 있기는 하다. '인생의 오답노트'를 작성해보는 것이다. 오! 이 방법은 꼭 따라하고 싶어졌다. 사실 '오답노트 학습법'의 효용성을 진정으로 깨달은 것도 학창시절이 아니라 논술쌤으로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학습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는 방법이 '오답노트 작성'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이고 보니, '인생의 오답노트'도 귀에 너무나도 솔깃했던 것이다. 50살이 넘도록 살아온 내 인생에 '오답'이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사실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들이 아예 없는 셈이다. 그래서 써야할 '오답노트'가 쌓이고 쌓였음을 생각해볼 때, 이건 정말 '노다지'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를 꼽는다면 '고전 리뷰'를 필사해보겠다는 것이다. 이건 지금도 하고 있고, 쭉 해오기도 한 것인데, '온라인 타이핑'으로 한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한 번 해보고 싶어졌다. 물론 '고전 리뷰'를 그동안 5000자 이상씩 써왔는데, 그걸 모두 '손글씨'로 쓰는 것은 무리일테고, 그렇게 쓴 리뷰를 거르고 걸러서 '딱 한 문장', 혹은 '딱 한 문단'으로 정리해서 기록으로 남기면 좋을 듯 싶다. 지금 당장은 아니고, 손글씨 연습부터 하고서 어느 정도 '자신감'이 붙었을 때 시작하려고 한다. 꽤나 멋진 기록물이 될 것 같다는 생각만으로도 뿌듯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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