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 서양 철학 클래식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지음, 누리번역 옮김 / 루미너리북스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루미너리북스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근원에 관하여>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 누리번역 / 루미너리북스 (2026) [원제 : Uber die vierfache Wurzel des Satzes vom zureichenden Grunde]

[My Review MMCCLV / 루미너리북스 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네 번째 리뷰는 염세주의 철학으로 유명한 아르투어 쇼펜하우어의 박사논문작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다. 사실 쇼펜하우어의 저작 가운데 가장 유명한 것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일 것이다. 우리 나라에 수없이 많은 '쇼펜하우어 자기계발서'도 거의 대부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중점적으로 여러 저작들에서 발췌를 할 정도로 그렇다. 그런데 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처음 알았는데,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읽기 전에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먼저 읽어야 한단다. 왜냐면 쇼펜하우어가 이 책을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의 '서문'에 해당한다고 밝혔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먼저 읽고 개념을 이해하지 않고는 그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고 단언할 정도였다. 그런데 우리 나라에 '쇼펜하우어 저작들' 가운데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제대로 뒤친(번역한) 책은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루미너리북스, 2026)이 유일했다.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관점 포인트 : 솔직히 나는 '철학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1차 사료에 해당하는 '철학 원전'을 즐겨 읽는 편은 아니다. 다시 말해 철학자 본인이 직접 쓴 '원전'을 읽는다는 것은 '철학자와의 대담'을 나누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나는 이게 부담스럽다. 철학자가 직접 쓴 글을 읽는 것은 철학책을 읽고 드는 '내 생각'을 철학자에게 직접적으로 '질문'을 던지는 것인데, 그에 대한 '답변'을 독자인 내가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인지 자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도 두번 세번 반복해서 읽다보면 얼추 이해까지는 되지만, 이제는 '그 이해'가 제대로 된 것인지 누군가에게 확인받고 싶은 충동에 휩싸여서 자꾸 '다른 책'을 뒤적거리게 된다. 철학자의 '원전'을 2차적으로 '해석'을 가미해서 나름대로 저술을 한 책들을 즐겨 읽는 까닭이 바로 이 때문이다. 적어도 이런 '해설서'를 읽을 때면 '삼자대면'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철학자와 독자, 그리고 철학자의 논거를 풀어낸 해설가, 이렇게 3명이 나누는 대화이기에, 조금은 쉬이 풀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철학자의 원전이었다. 약간의 '주석'이 달려 있긴 하지만, 오로지 원전의 내용을 충실히 뒤쳐낸 내용만을 읽고 쇼펜하우어의 깊이를 가늠해야만 했다.

그래서 이 책을 간략히 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책을 그대로 읽고 감명을 받기에는 너무 어려운 글로 설명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참을 읽고 또 읽어야 겨우 실오라기 하나를 끄집어 낼 정도의 조잡한 실력을 소유한 '문외한'인 탓이다. 먼저 마주하는 핵심은 다름 아닌 '충족이유율의 네 가지 뿌리에 대하여'다. 뭐, 사실 이것만 이해를 해도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어려운 말도 아니니 간단히 정리하고 넘어간다. 충족이유율이란 '모든 학문의 기초'라고 쇼펜하우어는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인식의 체계' 차원에서 학문을 이해했기 때문에, 충족이유율은 '그 자체로 확실한 진리'라고 말을 바꾸어도 같은 말일 것이다. 쇼펜하우어가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는 근거는 이미 많은 철학자들이 위의 사실을 언급했기 때문이다. 물론 앞선 철학자들은 '단편적으로'만 언급했을 뿐이고, 쇼펜하우어가 본격적으로 주장한 것이 사실이란다. 암튼 그 결과, 충족이유율의 본질은 바로 '왜?'라고 물을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다는 점에서 아주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 여기서부터 난관에 봉착했다. 충족이유율이 중요한 까닭은 알았는데, 그 중요성에 대한 근거가 되는 내용들이 하나하나 열거될 때마다 '철학 비전공자'로서 무지함을 절실히 느낄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 까닭조차 간단히 설명하자면,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해서 '철학의 계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먼저 '플라톤'의 이데아를 만나게 되고, 그 다음으로 '아리스토텔리스'의 형이상학을, '데카르트'의 자기원인을, '스피노자'의 범신론을, '라이프니츠'의 근거율을, '볼프'를 스쳐지나가며 궁극적으로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 다뤘던 선험적 관념론까지 아울러 '상식'으로 갖추고 있어야 겨우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디서 주워 들은 기억은 나지만 나에게 '철학'은 상식이 아니었던 탓에 쇼펜하우어의 '직접적인 설명'이 그리 와닿지 않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래서 염치 불구하고, 이후부터는 내 느낌대로 '이해'한 내용으로 최선을 다해 정리해보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그러나 그 이유가 모두 같은 필요는 없다는 말로 귀결이 된다. 서양 철학에서 '사유'를 매우 중요하게 다루는 데 반해서, '왜 사유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이유'를 제시한 적이 없었고,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사유는 엄밀하게 말해서 '진정한 사유'라고 볼 수 없다고 쇼펜하우어는 강조했다. 특히, 쇼펜하우어는 '헤겔 철학'을 크게 비판했는데, 그의 '유물론'이 바로 근본적인 이유를 밝히지 않은 사유의 결과였기 때문에 헤겔의 주장은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가짜'라는 극단적인 비판까지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헤겔의 '유물론'이 그토록 엉망이었던가? 엉망인 것치고는 '유물론'이 등장하던 그 시대에 너무나도 히트를 쳤기 때문이다. 실제로 헤겔이 대학에서 강의를 할 때 너무 인기가 많아서 쇼펜하우어는 시샘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왜냐면 헤겔과 '동시간'에 강의실을 열었는데, 헤겔 덕분에 쇼펜하우어는 강의를 들으러 들어오는 수강생이 거의 없을 정도였기 때문이란다. 그렇게 인기가 없었기에 결국 쇼펜하우어는 대학에서도 쫓겨나고 말이다. 그래서 쇼펜하우어가 헤겔 철학을 비판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실제로 헤겔 철학은 근대철학을 완성하고 현대철학을 연 공로를 인정받으면서도, 오늘날 헤겔이 칸트 철학을 잘못 해석한 탓에 철학사에 큰 오점을 남겼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비록 쇼펜하우어가 사망한 이후에 벌어진 일이지만, 그로 인해 쇼펜하우어는 사후에 크게 인정 받으며 오늘날까지 '쇼펜하우어의 철학'이 널리 인정받고 있는 것이다.

나가는 글 : 사실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정점을 찍었다. 그런데 그 '의지'를 완벽히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꼭 이해해야 한다고 앞서 말했다. 그럼 거꾸로 '표상'을 이야기하면서 쇼펜하우어 철학을 정리해보자. 사실 쇼펜하우어 철학의 핵심은 '칸트', '플라톤', 그리고 '불교(인도 베단타)'의 융합이라고 보아도 좋다. 쇼펜하우어의 '표상'을 이해하려면 칸트의 '현상(물자체)', 플라톤의 '가상(이데아)', 베단타의 '마야(삼신)'에 해당하는 쇼펜하우어의 '의지'라는 개념을 이해하는 것이 핵심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표상'이 실재하기 위해서는 '의지'라는 관념적 결정체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서로 상충하는 개념인 '실재론(표상)과 관념론(의지)'이 불교적 해석이 가미된 '물아일체(?)'의 경지를 선보여야 했던 것이다. 사실 '물아일체'는 장자가 말한 개념이지만, 쇼펜하우어는 이런 물아일체의 개념을 인도 불교 베단타를 통해서 개념이해를 한 모양이다. 암튼 물질적인 것과 정신적인 것이 '혼연일체'가 되는 경지에 다다를 때 비로소 '의지는 표상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의지는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바로 '사유'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고, 그 사유는 바로 '확신할 수 있는 이유', '그 자체로 확실한 진리'의 결과인 것이다. 이제 다시 '충족이유율'로 이어지게 된다. 그래서 쇼펜하우어는 자신의 주요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를 먼저 읽으라고 확신한 것이다. 내가 이해한 것은 여기까지다. 나중에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비롯해서 다른 철학자들의 저작을 탐독하면서 이해한 내용이 있다면 다시 첨부하도록 하겠다.

그런데 쇼펜하우어는 서양 철학의 오류를 '이유'에서 찾았던 것일까?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고, 원인이 발생하면 반드시 결과가 따르게 되는 것처럼 모든 것에는 다 이유가 있기 마련인데, 서양 철학에서는 '그 이유'를 너무 가상적이고, 형이상학적이며, 관념적으로 따지고 들다보니 '실재하지 않은 근거'를 앞세워서 억지로 '이유'를 껴맞추려 했고, 그런 까닭에 '그 결과'조차 엉뚱하게 내릴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판단한 것 같다. 쇼펜하우어가 유독 비판했던 헤겔 철학도 '변증법'이란 이해하기 쉬운 개념을 내세워서 '모든 것'에 억지로 껴맞추려 했고, 그 결과로 내놓은 것들에 오류투성이가 될 수밖에 없었다고 증명한 셈이다.

그럼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완벽한 이유'를 제대로 분석하며 '확실한 결과'를 도출해야 할 것이다. 여기저기서 '가짜뉴스'가 판을 치고, '거짓'을 앞세워서 '혐오와 차별'을 일삼는 행태는 근절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심지어 잔혹한 전쟁조차 '정확한 이유'를 들어서 벌이는 것이 아닌 현실은 정말 참혹할 수밖에 없다. 이따위 전쟁이 과연 누구를 위해서 벌어지는 것인지 명명백백히 밝혀내야 할 것이다. 여러 모로 이 책을 읽은 덕분에 눈이 떠진 것 같다. 읽기 힘든 책이었지만 나름 보람을 느끼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 국내 최초 출간! 페르시아와 로마보다 먼저 세계 제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최초의 제국 더숲히스토리
야마다 시게오 지음, 박재영 옮김, 이희철 감수 / 더숲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더숲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쓴 리뷰입니다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 국내 최초 출간! 페르시아와 로마보다 먼저 세계 제국의 시스템을 설계한 최초의 제국> 야마다 시게오 / 박재영 / 이희철 / 더숲 (2026) [원제 : アッシリア_人類最古の帝国_トンボなし]

[My Review MMCCLIV / 더숲 1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세 번째 리뷰는 더숲히스토리 다섯 번째이자 국내 최초로 출간되는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다. '더숲히스토리' 시리즈는 우리가 익숙하게 알던 세계사가 아닌 잘 알지 못했던 세계사를 조명한 시리즈로, 지금까지 나온 책은 <바빌론의 역사>(2021), <비잔티움의 역사>(2023), <히타이트 제국의 역사>(2024), <무굴 제국의 역사>(2025), 그리고 이 책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가 올해 출간되었다. 그동안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그 역사를 집중적으로 파고 들어갈 기회는 거의 없었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나라에는 이 들의 역사를 집중조명할 전문가가 거의 없는 형편이고, 있다손 치더라도 책을 내어줄 출판사를 찾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어렵사리 출간할 역사책을 읽어줄 독자가 그닥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나마 적은 '역사에 관심이 생긴 독자들'조차 유명하고 낯익은 역사책을 찾아 읽지, 이름도 낯선 역사책을 굳이 찾아서 읽을 까닭을 찾기 힘들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출간하기가 힘들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이름도 생소한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를 읽어야 할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 책속으로 풍덩 빠져 보자.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 관점 포인트 : 여러분은 <길가메시 이야기>를 알 것이다. 고대 메소포타미아의 전설로 전해지는 영웅이야기인데 어떤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지 아는가? 바로 '아카드 어'라고 한다. 우리는 보통 '길가메시'를 수메르인이 지어낸 이야기로 알고 있지만, 그 이야기가 어떤 언어로 '기록'되어 있는지는 잘 몰랐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니 바로 '아카드 어'라고 한다. 그리고 '아카드 어'를 쓰는 민족이 바로 '아시리아 인'이다. 그들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오던 <길가메시 이야기>를 '쐐기문자'로 점토판에 '기록'을 남겼고, 이 '점토판 기록'이 오늘날 가장 최초로 <길가메시 이야기>가 적혀 있었다고 전해진 것이다. 만약 아시리아 인이 이런 '기록'을 남기지 않았더라면 구전은 언젠가 끊겼을 것이고,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는 <길가메시 이야기>를 몰랐을 것이다.

좋다. 바쁘게 사는 현대인들은 <길가메시 이야기>를 몰라도 된다. 모를 수도 있다. 몰라도 살아가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이렇게 역사에 무관심하게 살아가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길가메시 이야기>를 전했던 '아시리아 인'에 대한 오늘날의 이미지는 매우 포악하고 잔혹한 짓을 많이 한 민족으로 정해져 버렸다. 왜냐하면 <성경>속에 아시리아에 대한 표현이 남아 있는데, 딱 그렇게,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구약성경> 속에 아시리아 인은 북이스라엘 국가를 침략해서 멸망시켰고, 남유대 국가를 침공했다가 오랜 시일이 지나 전염병이 퍼져서 결국 패배해서 돌아갔다고 적혀 있다. 그럼 <구양성경>은 누가 썼는가? 바로 유대인이 쓴 '기록'이다. '구약'은 유대인의 역사와 상통하기 때문이다. 그후 아시리아는 멸망하고 사라진 뒤, 후세 사람들은 무엇으로 아시리아 인들이 남긴 문화유산을 기억할까? 다름 아닌 <성경>속 '구약 이야기'를 통해서 아시리아 인들을 떠올릴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신을 침략해서 멸망시키고 해코지한 민족을 '위대하고 아름다운 문화를 남겼다'고 기록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잔인하고 난폭했으며 야만인과 다를 바가 없다고 적어 놓았을 것이다. 왜냐면 역사는 '자신에게 유리하게' 기록하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유대교에서 갈라진 그리스도교를 믿는 서구인들은 <성경>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아시리아 인'에 대한 이미지가 굳어져 버린 상태였다.

그런데 반전이 일어났단다. 오늘날 메소포타미아 고대 유적을 발굴하는 유적탐사팀이 '아시리아 인'들이 남긴 '점토판'을 분석한 결과, 아시리아 제국이 로마제국처럼 초기에는 '공화정 체제'를 만들어 민주적인 제도로 집정관을 뽑아 지도자로 삼아 정치를 이어나갔고, 훗날 제국의 영토가 넓어지자 자연스레 왕이 등장해서 한껏 넓어진 국토를 다스리는 제국 시스템을 구축했으며, 이를 지탱하는 경제체제도 갖추고, 시민들은 다양한 문화예술을 즐기면서 '문명인'과 다를 바 없는 풍요로운 문화를 누리며 살았다는 기록이 생생히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유대인이 살던 지역은 초라한 변방에 불과했고, 강대국이 주변국을 정복하며 제국의 역량을 어김없이 발휘하는 것은 역사적으로도 자연스러웠기에 '아시리아 제국'을 한낱 야만인처럼 취급하기에는 너무나 적절치 못했다는 결론에 다다랐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역사를 '기록'을 통해서 들여다 본다. 물론 그 '기록'이 완벽할 수는 없고, 때로는 너무 빈약해서 진면목을 살펴보기에 너무 부족할 수도 있고, 때로는 '승자의 일방적인 기록'이나 '패자의 악의적인 왜곡'으로 잘못된 내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래서 역사는 팩트체크를 위해서 '교차검증'을 하고 있으며 '하나의 사료'나 '한쪽의 사료'만으로 공정하고 객관적인 역사라고 섣불리 평가내리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래서 여러 기록이 '한 목소리'로 공명을 이룰 때, 비로소 '객관성'을 확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역사책을 읽으며 다양한 해석을 하며 '역사의 필요성'을 논하게 되는 것이다. 단지 '객관적 사실'만을 역사라고 부르지 않는 까닭이다. 그 사실을 토대로 '역사의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 진정 역사책을 읽는 까닭인 것이다.

앞서 언급한 <성경>만이 유일하게 남은 기록이었다면 현재까지도 '아시리아'는 어두운 이미지로 남았을 것이다. 하지만 '새로운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서 우리는 <성경>에 남긴 기록이 온전한 것이 아니며 심지어 '왜곡'이 심한 기록이라는 것도 밝혀냈다. 그런데 맨 처음에 질문한 것을 떠올려 보자. 우리가 역사에 관심을 갖지 않으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를 말이다. 그나마 남아 있는 '기록'은 <성경>이라고 하는 어마어마한 종교적 권위를 가진 '기록'이고, 그 기록에 의해서 '왜곡된 거짓'을 진실인냥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다름 아닌 '힘이 센 강자의 의도'대로 그냥 믿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물론 내가 '강자에 속한 집단'이라면 큰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약자 집단'이고, 멸망한 줄 알았던 '아시리아인의 후손'이라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가짜뉴스에 의한 혐오와 차별을 쏟아지듯 받으며 살게 될 것이다. 더구나 '역사'에 관심도 없으니 제대로 된 항변도 할 수 없고, 그저 당하는 일만 남았을 뿐이다.

그런데 반대로 역사에 관심이 많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강자도 '역사적 진실'을 바로 알고 '가짜뉴스'를 판별하고, '혐오와 차별'을 일삼는 부끄러운 짓을 멈출 것이다. 그리고 잘못된 역사를 바로 잡는 '정의로운 일'에 앞장 서게 될 것이다. 또한, 약자도 '역사적 진실'을 깨닫는 순간, 자신에게 쏟아지는 옳지 못하고 부당한 억압과 차별, 그리고 폭력 앞에서도 당당해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는 이런 부끄러운 행동을 저지르지 않게 해주기도 한다. 그리고 옳지 못한 일을 바로 잡을 수도 있다.

나가는 글 : 대한민국은 지난 100여 년간 엄청난 격동의 역사를 보냈다. 망국의 슬픔이 가시기도 전에 식민지 백성의 고난이 시작되었고,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독립을 이뤘지만, 곧이어 터진 전쟁의 아픔을 겪으며 완벽한 굶주림을 겪어야 했고, 그렇게 전쟁이 끝나고 겨우 굶주림을 면했구나 싶더니, 민주주의가 탄압당한 군사독재가 펼쳐졌고, 그 어둡고 처절했던 시절을 민주화항쟁으로 극복하고 이뤄낸 대한민국이 드디어 선진국이 되고, 진정한 강대국으로 성장해서 전세계 인류의 공영과 평화를 이룩하는데 이바지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감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이런 부강한 대한민국이 되기까지 얼마나 '약소국의 설움'을 당했던가 말이다. 그때마다 고개 숙인 대한민국 국민들을 일어서게 만든 것은 다름 아닌 '자랑스런 우리 역사'다. 반만년의 유구한 역사를 이어오면서 다른 나라를 침략해서 정복활동을 하지도 않았으면서, 외적의 침략에는 분연히 맞서서 이겨내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준 우리 역사의 끝에 전세계를 호령하는 강대국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당히 힘을 과시하는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란 말이다. 우리는 이런 역사를 자랑스러워 해야 하고 세계 만방에 널리 알려야 한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역사를 잘못 배운 이들이 부끄러운 짓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버젓이 자행하고 있다. 자국의 역사를 수치스럽게 여기며, 다른 강대국들의 비위를 맞추어 '자국의 역사'마저 먹칠을 하고야 마는 멍충이들이 너무 많다. 우리끼리는 얼마든지 싸워도 좋다. 그것이 실리를 두고 싸우는 것이든, 명분을 두고 의견을 다투는 것이든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런데 어이 없게도 우리땅에서 '다른 나라 국기'를 들고서 '다른 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자국 정부'를 흔들고, '자국민을 헐뜯는' 멍충이를 어떻게 봐줘야 한단 말인가? 이들은 역사를 잘못 배운 이들이다.

한국사든, 세계사든, '역사'라는 한 울타리로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배워야 한다. 그래야 세계속에서 한국이 맥을 같이 할 수 있고, 한국사를 배우는 것으로 세계사를 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계사는 '위대한 역사'로 가치를 높여 다루고, 그런 위대한 역사를 이끌어간 몇몇 강대국들 위주의 '편협한 세계사'를 배운다면 잘못된 역사관을 가지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이런 역사관으로 '한국사'를 바라보면 심각한 왜곡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더구나 '세계사'를 서양의 위대함을 증명하기 위해서 배우는 것이 절대 아니다. 비록 세계사가 유럽과 미국 등 서구 중심적인 서술로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이는 '역사의 흐름'을 파악하기 위한 '하나의 예시'일 뿐이지, 서양의 역사만이 바르고 옳은 것이고, 서양 이외의 역사는 비주류이고, 특이성을 지니고 있다고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렇기에 세계사와 한국사는 '더불어'서 같은 맥락으로 역사적 흐름을 비교분석하고, 어디에서든 딱 들어맞는 '보편타당한 역사관'을 갖춰야 한다.

이는 아무 역사책 어느 곳을 펼쳐도 다 맞아떨어진다. 그래서 이 책 <아시리아 제국의 역사>를 보아도 '아시리아의 흥망성쇠'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세계사의 흐름을 따르고 있고, 흥한 이유와 망한 이유가 한 눈에 보인다. 그 까닭은 다름 아닌 '똑같은 인간'이 벌여놓은 역사이기 때문이다. 시공간을 넘나들어도 '인간이 사는 모습'은 매한가지다. 아시리아 인이 살아가는 모습과 대한민국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이 유별나게 달라보일 것이 없다. 물론 기원전 23세기와 서기 21세기라는 반만년이라는 '세월의 차이'는 보일 수 있어도, 그들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를 만들어가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의 모습과 다를 것이 없었던 것이다.

끝으로, 이 책을 작게는 '오늘날 중동 국가의 현안'을 파악하기 위한 교양으로 읽어도 좋을 것이다. 미-이란 전쟁이 휴전을 꾀하는 와중에도 '이스라엘'이 전쟁을 확전시키려는 까닭을 '아시리아 제국 내의 민족적 갈등과 해결 방법'을 엿보면서 예측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크게 보길 바란다. 한 제국의 흥망성쇠를 보면서 흥하는 원인과 망하는 원인이 오늘날의 한 국가에서도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아시리아 제국의 멸망할 때의 모습에서 현 미국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부분이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도 머지 않아 멸망할 징조를 보이고 있다고 볼 수도 있는 셈이다. 물론 그 원인을 해결하고 막으면 '망국의 길'을 걷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시리아의 처참한 말로가 오늘날 미국이 처한 상황과 묘하게 겹치는 부분이 있다. 그리고 아시리아 제국이 위축되는 시점에서 부상한 '메디아 부족'과 미국의 위세가 꺾이고 있는 시점에서 부상하고 있는 '대한민국'도 묘하게 겹쳐 보인다. 물론, 오늘날의 대한민국을 한낱 '메디아 부족'과 견주기엔 적당하지 않지만, 미국의 입장에서 대한민국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고 있는 것은 분명 위협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물론 이런 흐름을 잘 파악하고 미국이 나름 대처를 잘 한다면 미래는 달라질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대세가 바뀔 것 같지는 않다. 역사는 늘 그런 '페이지'를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모로 아주 흥미로운 역사책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0 - 완결
고우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10> 고우영 / 문학동네 (2026)

[My Review MMCCLIII / 문학동네 41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두 번째 리뷰는 대한민국 만화삼국지의 원조 <고우영 삼국지 10>다. 해마다 읽고 있는 <삼국지>인데 올해는 '만화 삼국지'로 골랐고 가장 먼저 '고우영 화백의 작품'을 골랐다. 현재 '이희재 <만화삼국지>''무적핑크 <삼국지톡>'도 함께 읽고 있는데, 기회가 된다면 '어린이/청소년 만화삼국지'도 읽어볼 참이다. 이런저런 삼국지를 검색하다보니 정말 다양하고 여러 작가의 <삼국지>가 다채롭게 펼쳐져 있다는 것을 새삼 알게 되었다. 작년에는 '한중일 삼국지'를 비교했는데, 중국과 일본은 나름의 '정통적인 해석'을 바탕으로 재미를 추구한 것에 비해서 한국은 <삼국지>에 진심인 것이 큰 특색이었다. 다시 말해, 한국은 <삼국지연의>를 '소설'로 읽는 것이 아니라 '역사책'으로 대했다는 얘기다. 그러면서 <정사 삼국지>와 비교분석한 내용이 첨부된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었다. 이는 '만화 삼국지'에서도 비슷했다. 하지만 <고우영 삼국지>는 군사독재라는 시대적 상황을 고려한 탓인지 풍자와 해학이 담뿍 들어 있는 것이 특색이었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고우영 삼국지 10> 관점 포인트 : 마지막 10권에서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보통의 <삼국지>가 제갈량이 죽은 '오장원'을 대서사의 마지막으로 삼지만, 진정한 '삼국지의 대단원'은 사마염의 진(晉) 통일(280)로 보기 때문에 제갈량 사후(234)에도 무려 40여 년이나 더 이야기가 이어져야 한다. 그런데도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는 거의 알지 못한다. 나오는 등장인물도 매우 생소해서 분명 <삼국지>인데, '삼국지'처럼 느껴지지 않을 정도다. 그나마 최후까지 남은 촉의 장수 '강유'가 위나라에 거짓항복을 했다가 반기를 드는 장면을 읽으며 추억을 더듬을 정도다. 그만큼 <삼국지>에서 초반에 등장하는 유관장 삼형제, 조조, 제갈량 등의 인물들의 비중이 큰 탓이다.

그래서일까. 10권의 시작은 이미 지난 편에서 죽은 관우와 장비의 혼령이 '이릉대전'에서 참패를 한 유비에게 찾아오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공인 '제갈량'에게 한 황실의 회복이란 숙제를 남겨주며 세상을 등지고 만다. 이렇게 10권은 온통 '제갈량 이야기'로 가득하다. 이렇게 이야기가 편중되어 흐르는 것이 민망했는지 조비가 헌제를 겁박해서 황제자리를 찬탈하고, 황제에 오르자 친형제마저 죽이는 비정한 모습을 강조하며 '위나라'에 정통성 따위는 없다고 강변하며, 다시 한 황실을 재건하는데 온힘을 다하는 제갈량의 충의로운 모습에 집중 재조명 한다. 헌데 스토리 전개가 너무 빠르다. 제갈량이 출사표를 낸 것이 5번(6번이란 주장도 있다)인데, 그렇게 오랜 북벌의 과정을 거의 한 번으로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 그러면서 마초는 아예 등장조차 하지 못했고, 위연조차 마지막 장면에서 겨우 한 컷을 장식할 따름이다. 만약 지면을 조금 더 할애 받고, 연재의 굴레에서 벗어나 마음껏 그려냈다면 더욱 뜻깊은 수작이 탄생했을 것이나 그건 오늘의 대한민국에서도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만큼 '만화'를 천대하는 사회분위기가 남아 있기 때문에 열악한 제작 환경을 극복하기 힘든 면이 있다. 그나마 'K-웹툰'이 세계적인 인기를 끌면서 한국 만화의 명맥을 새롭게 일구어 가고 있는 형편이지만, 여전히 '만화책'이나 '애니메이션' 부분에서는 뒤쳐져 있다. 세계적인 흥행을 끌고 있는 <K-POP 데몬 헌터스>와 <나 혼자만 레벨업> 등이 우리 나라에서 제작되지 못하고 있는지만 봐도 단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은가. 암튼, <고우영 삼국지>는 10권으로 완간이 되었다. 이렇게 '완간'된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고, '올컬러 완전판'으로 다시 재탄생하게 된 것도 엄청난 일인 셈이다.

한편, 앞서 2부의 주인공으로 '제갈량'을 꼽았다. 그렇다면 제갈량의 숙적 사마의는 어떨까? 아쉽게도 이 부분도 너무 빠른 전개로 인해 제대로 등장하지 못하고 있다. 숙명의 라이벌로 그려내어 제갈량과 사마의가 무려 5차례나 공방전을 벌이는 장면을 보여주어도 좋고, 오나라의 육손까지 합류해서 서로 치고 받는 지략대결이 정말 볼만 했을텐데 말이다. 그런데 그걸 휘뚜루마뚜루 단 한 권 분량으로 스쳐지나가버리고 말았다. 그럼에도 유비의 유언을 받들어 끝까지 충의를 다하는 제갈량의 참모습을 잘 그래내었기에 제갈량이 마지막으로 '오장원'에서 죽는 장면은 참으로 클라이막스다웠다. 온 힘을 다해 죽는 그 순간까지 한 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모습이 아름다운 까닭은, 그것이 '올바른 일'이었기에 그럴 것이다. 힘의 균형이 위나라로 기울어졌으나, 위나라는 그 힘을 올바른 일에 쓰기는커녕 '제 잇속'을 챙기기 위해 썼을 뿐, 도덕적명분 따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 밑에 있던 신하들도 충성을 바치되 '제 잇속'을 챙길 수 있을 때만 충성했을 뿐, 더 큰 잇속을 챙길 기회를 포착하자 서슴없이 '조씨 왕조'를 끝장내고 '사마씨 왕조'를 새로 개창한 것이다. 어찌 혼란한 세상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반면에 '촉나라'는 비록 힘은 없지만 도덕적 명분을 쌓고 '대의'를 빛내면서 권토중래를 꿈꾼 인물들로 가득하다. 유비가 그랬고, 관우가 그랬고, 제갈량도 그랬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삼국지>를 읽으며 유관장 삼형제의 고난을 '감정이입'하며 보고 또 보는 까닭이다. 대한민국의 역사가 그렇지 않았는가 말이다. 약소국의 비애로 얼룩진 '지난 100여 년의 역사'는 그야말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고난의 역사였다. 그런데도 대한민국은 결코 약소국으로 머물러 있지 않으려 했다.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라는 세계 초강대국 틈바구니에서도 기죽지 않고, 언젠간 하늘 높이 비상하는 꿈을 꾸며 고난과 역경을 이겨냈던 것이다. 거기에 군사독재와 민주주의 탄압이라는 시련까지 더했던 시절을 추억하면서 <고우영 삼국지>를 읽으니 지금 '선진국'이자 '강대국'으로 발돋움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보면서 감개무량할 따름이다.

나가는 글 : 우리도 한때는 '실리'를 따지며 조조의 편에 서고자 했던 적도 있다. 비록 부도덕하기 이를 데 없고, 자기 한 몸 살리기 위해서라면 '자기 사람'마저 죽이거나 짓밟고 올라서려 했던 그야말로 '패왕'이었다. 오직 힘으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내세울 뿐이었고, 그 힘을 넘보는 자에겐 상상도 할 수 없는 잔혹한 짓을 일삼았던 조조다. 그래서 오직 '힘의 원리'만으로 움직이던 국제관계에서 늘 약소국의 설움을 받던 대한민국도 '조조'처럼 힘 있는 위치에 서고 싶어 동경했던 적도 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조조처럼 행동하기에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조조처럼 '실리'를 추구하던 박정희, 전두환 같은 인물들이 '내부의 폭군'으로 군림하는데에만 성공하고, 대외적으로 힘을 발휘하지도 못한채 한껏 위축된 모습만 보여주지 않았던가 말이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에 급급해서 '내부의 반대자'를 척결하는데에는 그토록 패왕처럼 군림했던 이들이었건만 다른 강대국들 앞에서는 힘도 써보지 못하고 쪼다처럼 행동했을 뿐이다. 이렇게 대한민국에서 조조는 인기가 없고, 실리도 챙기지 못하는 캐릭터로 남았을 뿐이다. 반면에 유비에게는 한없는 사랑을 퍼줬다. 비록 이리 치이고 저리 밟히는 '힘 없는 지도자'에 불과했지만, 더 큰 욕심을 채우기 위해 '도덕적 명분'을 쌓고 또 쌓는 소신 정치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21세기 대한민국은 자원 빈국이지만 인재를 양성해서 '기술강국'으로 거듭났고, 다른 나라를 함부로 침략한 역사가 없어서 '도덕적 명분'까지 함께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대한민국에서 만든 무기체계는 전세계 어디에 내다 팔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강한 위력을 갖췄으면서도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할 의사가 전혀 없음을 대외적으로 표방해도 전세계는 전적으로 신뢰를 보낼 정도가 되었다. 역사상 이렇게 '도덕적으로 강한 힘을 과시한 나라'가 있었느냔 말이다. 19세기 서구열강은 제국주의를 표방하며 저들의 힘을 과시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힘으로 전세계 약소국들을 식민지로 삼아 억압과 수탈을 그치지 않았는데, 오늘날 대한민국은 과거의 그 약탈제국들을 압도하는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그 힘'을 함부로 써서 상대를 굴복시키려 들지 않고 있다. 이런 '강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다른 약소국들에게 '함께 잘 살자'고 손을 내미는 나라가 어디 있었더란 말인가. 단언컨대 대한민국이 유일하다.

이것이 '유비가 꿈꾸던 나라' 아니었을까? 그리고 제갈량이 그 꿈을 이루려 그리 노력했던 것 아닐까? <고우영 삼국지>를 읽으며 이런 생각을 떠올려 보았다. 어릴 적부터 유독 '유비'에게 친근감을 느꼈던 까닭도 이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최소한의 주식투자 - ETF부터 코스피·미국 주식까지 평생 재테크를 위한 돈이 되는 공부
홍순빈 지음 / 매일경제신문사 / 2026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최소한의 주식투자 : ETF부터 코스피·미국 주식까지 평생 재테크를 위한 돈이 되는 공부> 홍순빈 / 매일경제신문사 (2026)

[My Review MMCCLII / 매일경제신문사 8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한 번째 리뷰는 최소한의 투자 공부로 평생 돈벌이를 꿈꾸는 <최소한의 주식투자>다. 요즘처럼 주식투자에 '관심'을 갖기 힘든 시기도 없을 것이다. 윤석열 정부 내내 코스피 2000선에서 꼬무락거리던 것이 비상계엄 한 방에 나락으로 떨어지는가 싶더니 탄핵 국면에 들어서면서 서서히 회복되던 주가가 이재명 정부가 들어서자 무섭게 반등을 하더니 3000선, 4000선, 5000선을 돌파하더니, 급기야 6000선 고지를 훌쩍 넘어서는 기염을 토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역사상 이런 주가호황은 찾아볼 수 없었고, 이렇게 극적인 반등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그런데 당신은 대한민국 주가가 이렇게 달라졌는지 아시는가? 나 같은 '주린이(주식투자 어린이)'들은 잘 모른다. 그냥 약소국이자 '코리아 디스카운트'였던 국면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대한민국의 이미지'가 전세계에 긍정적으로 비춰짐과 동시에 진정한 '강대국' 반열에 올라섰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듣고 있어도, 그저 그런갑다 싶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 가지 더! 그래서 나같은 주린이도 '주식투자' 좀 해보면 큰 돈 좀 만져볼 수 있다는 얘긴가가 궁금할 뿐이다. 그럼 책속으로 풍덩 빠져보자.

<최소한의 주식투자> 관점 포인트 : 나는 책을 들고 다니면서 읽는다. 산책을 할 때도 읽고, 출퇴근 시간에도 읽으며, 심지어 직장에서 일을 할 때도 몰래몰래 펼쳐놓고 짬짬이 책을 읽는다. 물론 '종이책'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요즘에는 '전자책'도 즐겨 읽는다. 특히 일하면서 몰래 읽기에 딱..쿨럭쿨럭. 암튼 '종이책'을 선호하는 편인데, 그 까닭은 '겉표지'가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때문이다. 은연중에 '나는 이런 책 읽는 사람입니다'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딱 좋은 방법이다. 이 책도 그렇게 들고 다니며 읽다가 지인에게 질문을 받았다. "주식투자로 돈 좀 벌었어요?"라고 말이다.

사실 그렇긴 하다. 아직 본격적인 주식투자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런저런 '펀드'와 '연금' 등 위험요소가 덜하고 안정적인 수익을 보장하는 '간접투자'를 소소하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데 그게 위에 열거한 시기에 딱 들어맞아서 '평균 20% 정도의 수익'을 냈기 때문이다. 물론 아직 '현금화'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최종적인 수익으로 볼 수 없고, 변동성은 여전히 감수해야 할 리스크다. 그런데도 위의 질문에 대한 대답을 직접적으로 하지는 않는다. 저들이 묻는 질문의 의도는 그저 '결과'일 뿐이고, 손해를 봤다 싶으면 '안해서 다행이다'는 표정을 짓고, 손익이 났다고 하면 '배 아파서 어쩌나'라는 식의 표정을 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 뒤에 이어지는 대화도 굉장히 식상하다. 너도나도 주식투자로 이익을 봤다는 요즘에도 "어느 종목을 사야 '얼마'를 벌 수 있어요?"라는 단순무식한 질문을 던지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이들은 '주식투자 공부하기는 싫고, 투자이익은 얻고 싶으니, 당신이 좀 공부했으면 '함께' 묻어서 이익 좀 나눠가져요'라는 속셈이기 때문이다. 뭐, 누구나 그런 '이기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으니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정작 '투자손익계산서'가 나올 즈음에는 손실에 대해서 '남탓'만 실컷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주식투자에 대해 가르쳐주고 싶은 마음이 전혀 생기지 않는다.

이것은 내 심보가 고약하기 때문이 아니다. 주식투자는 절대로 저런 방식으로, 저런 마음가짐으로 시작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어디까지나 '투자'는 개인의 선택이고, 그 '선택'의 결과는 전적으로 본인이 책임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 중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투자공부'는 철저히 스스로 해야 한다. 비록 투자전문가의 코칭을 받았다고 하더라도 투자결과에 대한 책임은 본인이 지는 것이고, 남탓을 해서는 절대 안 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합리적으로 생각을 해봐도 자칭 '투자전문가'라는 사람들이 콕콕 찍어주는 종목만 올라간다는 보장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들이 '신'이나 '점쟁이'가 아닐진데 어찌 그리 용할 수 있겠느냔 말이다. 단지 '주식시장에 올라온 정보'를 분석해본 뒤에 이런저런 종목에 투자를 하면 좋겠다는 전망을 할 뿐이다.

그렇다. 주식시장 정보를 제대로 분석할 힘만 터득한다면 누구라도 '투자방법'을 꿰어 찰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나 같은 '주린이'를 위한 주식정보 분석 지침서를 어디서 구할 수 있을까? 초보 투자자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그런 책이면 더 좋을텐데 말이다. 시중에 그런 책을 검색해보면 정말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책 <최소한의 주식투자>(홍순빈)도 그런 투자공부를 하기에 딱 좋은 책 가운데 하나다. 그럼 왜 좋은지 좀더 파고 들어가보자.

혹시 '운전면허시험'을 치르기 위해서 공부를 해본 적이 있는가? 그렇다면 이런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너무 많이 공부하면 떨어진다"고 말이다. 실제로 '교통법규'가 어려워서 시험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헷갈려서 시험에 불합격하는 경우가 더 많기 때문에 나온 말이다. 주식투자도 마찬가지다. 분명 투자전문가들에게나 어울릴 법한 어려운 책을 봐야 할 때가 오긴 할 것이다. 그런데 주식초보자가 '그런 책'을 읽으면 어떻게 될까? 분명 투자를 본격적으로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고 말 것이다. 그럼 '주식투자 입문서' 같은 책을 골라 읽으면 좋을텐데, 그런 책은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손자병법에는 '지피지기 백전불태'라는 말이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전혀 위태롭지 않다는 뜻이다. 이를 주식투자 공부에 대입하면, '나의 투자성향'과 '그에 딱맞는 투자상품'을 눈높이 수준에서 설명해주는 책을 찾으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뒤에 실질적으로 '주식투자를 위한 매수와 매도 방법'을 할 수 있는 설명이 곁들여져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바로 <최소한의 주식투자>가 바로 그 책이다.

나가는 글 : 나의 투자성향도 '주린이' 수준에서 골라볼 수 있을 것이다. '안정형/공격형', '단기적/장기적', 투자금이 '1억이상/1억이하' 등등 자신의 현재를 객관적으로 평가하고 앞으로 투자할 수 있는 '방향성'을 재고하면 '나만의 투자성향'을 간략하게나마 분석할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내놓은 투자성향에 딱맞는 '주식투자상품'을 전문가와 상담하면서 적합한 투자상품을 골라 직접 투자를 해보는 방법이 가장 기초적인 투자방법일 것이다. 물론 '원금손실'의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을 것이다. 이 말의 뜻은 '당신의 투자'로 인해서 이익도 얻을 수 있음을 알려준다. 이렇듯 투자를 할 때에는 언제나 이익과 손해 '양 방향'을 동시에 가지고 있음을 고려해야 한다. 쉽게 말해서 동시에 결코 잡을 수 없는 '두 마리 토끼'를 붙잡고 있는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그런데 이런 투자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왜 투자를 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안 해도 된다. 그런데 당신이 아무리 주식투자 같은 위험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이미 '소극적이나마 투자행위'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바로 은행 예적금 상품 말이다. 그리고 '내집 마련'을 위한 청약 같은 것으로도 당신은 이미 투자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소극적인 투자상품'으로 인해서 당신은 해마다 '손실'을 보고 있었다. 무슨 말이냐고? 은행이자가 '물가상승'보다 훨씬 더 낮은 편이기 때문에 은행이자로 조금씩 금액이 불어나는 듯 싶지만, 결국에는 손해를 보고 있는 셈이다. 과거에는 은행이자가 10%를 훌쩍 넘겼기에 저축만 해도 안정적인 (투자)수익을 얻을 수 있었지만, 해마다 은행이자는 하락세였고, IMF 이후에는 은행도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목격했다. 그리고 해마다 물가는 고공행진을 하면서 더는 은행이자만으로 자산을 불릴 수 없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은 '부동산 투자'를 통해서 안정적이고 고수익을 보장받곤 했다. 하지만 앞으로는 그럴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현재까지도 '내집 1채'만으로 부동산 수익을 얻기는 힘들었고, 수익을 크게 내기 위해서는 결국 '부동산 투기'를 해야 했는데, 앞으로는 그런 '투기 근절'을 위한 부동산 정책이 해마다 나올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상적인 '부동산 투자'라 하더라도 안정적인 수익을 내기는 힘들어질테고, 더구나 큰 수익을 냈다하더라도 '세금 폭탄'을 맞을 가능성이 매우 높아질 전망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투기'를 하기에는 내가 가지고 있는 자산이 형편없이 적은 것이 '부동산 투자 진입장벽'을 높여놨고 말이다.

그래서 소소한 자산으로 연간 10~20%의 안정적인 수입을 원한다면 결국 '주식투자' 같은 것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매달 50만 원씩 적금을 불입해서 얻을 수 있는 은행이자가 연 3~4% 정도인데, 이걸 투자상품에 넣어둔다면 연 10% 이상의 수익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는 말이다. 물론 '원금손실'을 볼 위험성은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왜 주식투자인가? 높은 수익을 100% 보장받을 수는 없고, 투자실패했을 경우 '원금손실'까지 볼 수 있지만, 그럼에도 이익이 되는 것은 '절세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ISA 상품과 '퇴직연금'을 활용하는 방법 등이 있는데, 제대로 굴리면 투자수익은 적어도 '세금혜택'으로 오히려 이익을 볼 수도 있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주식투자'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 이 책은 초보자를 위해서 눈높이를 상당히 낮춘 책이긴 하지만 웬만큼 내공을 갈고 닦은 투자자도 '기본기'를 연마할 수 있는 수작이다. 그래서 투자공부의 기초체력을 기르는데 딱 좋은 책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책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다름 아닌 '나만의 투자 포트폴리오 만들기'다. 포트폴리오를 쉽게 말하면, '달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라'는 유명한 격언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이다. 물론 '수익'이 날만한 투자상품에만 골라서 투자를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테고, 가장 높은 수익이 날만한 상품에 '올인'으로 투자하는 것이 가장 큰 수익을 내는 투자방법일 것이다. 그러나 투자에는 언제나 '양방향성'을 고려해야 하고, 높은 수익에는 높은 위험이 따르는 법이다. 그래서 한 쪽에서 손해를 보더라도 다른 한 쪽에서 이익을 내어 '평균 이상'의 수익을 낸다면 아주 훌륭한 투자를 한 셈이다. 대다수의 경제전문가, 투자전문가도 바로 이런 '포트폴리오'를 만들어서 51%의 안정적인 수익과 49%의 손실을 감수하며 투자를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1~2%의 차익을 챙기는 투자자가 절대적인 고수이고, 세계 10위권의 부자들의 투자법이 바로 '그들의 포트폴리오'에 담겨 있는 셈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서도 당부하는 내용이지만, 주식투자 초보자들이 늘 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투자종목'에 대한 정보도 없이 주가의 동향만 보고 '묻지마 투자'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이 산 '종목'에 대한 향후 전망과 '투자한 기업'에 대한 성장가능성을 확인한 뒤에 투자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그리고 '빚투(일명 '레버리지')'는 절대로 하지 말자. 남의 자본금을 빌려서 투자하는 습관은 '원금손실'의 가능성이 상존하는 까닭에 매우 위험한 투자방법이다. 물론 결과가 좋으면 다행이지만, 단 한 번이라도 실패하게 된다면 다시 회복할 수 없는 나락을 맛봐야 하기 때문이다. 과거 대기업들이 '대마불사'라면서 자신들이 망하면 국가가 망하게 된다면서 막대한 국민세금으로 되살려주던 관행(?)이 일종의 '레버리지가 가져온 폐해'였다. 이는 대기업 사주의 방만한 경영 실패를 국민들에게 부담 지운 부도덕한 행태다. 이런 레버리지의 폐해에 분노하면서, 자신은 소소한 투자자니까 괜찮다는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면 잘못된 생각이다. 큰 거 한 방으로 인생역전할 수 있다는 낙관주의에 빠져 살면 '개인'만 고달픈 게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에 악영향을 끼치는 행위이기 때문에 절대로 방관해서는 안 될 행태이기도 하다.

나도 주식초보로 이제 겨우 입문하기 시작해서 이런저런 책들을 기웃거리고 있다. 그러다 만난 이 책에서 정말 소중한 정보를 참 많이 얻었다. 입문자에서 초보자, 초보자에서 중급자를 넘어 '상급 투자자'가 되기 위해서 앞으로도 수많은 주식투자 공부를 할테지만, 이 책만큼은 올바른 주식투자를 몸에 벨 때까지 수시로 읽을 것 같다. 아주 기본 중에 기본을 쉽게 풀어서 설명한 책이기 때문이다. 책대로 따라만 하기에도 딱 좋다.



#리뷰 #최소한의주식투자 #홍순빈 #매일경제 #매일경제신문사 #재테크 #투자 #매경출판 #주식투자 #주식 #ETF #코스피 #경제공부 #경제 #경제책 #경제도서 #미국주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9
고우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우영 삼국지 올컬러 완전판 9> 고우영 / 문학동네 (2021)

[My Review MMCCLI / 문학동네 40번째 리뷰] 고품격 월간 리뷰전문지 <책이 있는 구석방> 여든 번째 리뷰는 어느덧 종반부로 치닫고 우리에게 익숙한 주인공들이 하나둘 떠나기 시작하는 <고우영 삼국지 9>다. 삼국지를 읽으면서 의도치 않게 1부와 2부로 구분하게 되는 지점이 있는데, 바로 '제갈량의 등장과 관우의 퇴장'으로 바로 '주인공의 교체'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고우영 삼국지>는 총 10권 가운데 이 경계가 꽤나 후반부에 진행되어 '주인공이 교체됨'과 동시에 이야기가 빠르게 마무리로 치닫게 된다. 이는 대부분의 삼국지가 그런 경향을 띠곤 하지만, 여타의 삼국지가 이 '교체 시점'이 대부분 5~6권에서 시도되어 2부에 새로 등장한 주인공들도 꽤 활약할 '시공간적 여유'를 누릴 수 있지만, <고우영 삼국지>는 1부에 꽤 치중하는 플롯을 구성하였다. 그럼 이게 장점일까, 단점일까? 책속에 풍덩 빠져서 확인해보자.

<고우영 삼국지 9> 관점 포인트 : 삼국지에서 '관우의 죽음'은 남다르다. 일찍이 동탁, 여포, 원소, 손견, 손책, 주유 등 걸출한 인물들의 죽음도 다루고 있지만 '관우의 죽음'은 꽤나 특별하게 다루기 때문이다. 한낱 '장수'에 불과했지만 사후에 '왕의 죽음'에 걸맞는 파격적 대우를 받았으며, 심지어 관우의 죽음과 연관된 이들까지 연달아 비명횡사하면서 더욱 특별하게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사'에서도 관우의 죽음은 특별하게 다뤘을까? 그렇지는 않다. 그저 '평범한 장수'의 죽음과 그닥 다를 바가 없다. 단지 촉 진영에서는 크게 다룰 수밖에 없었고, 위 진영에서는 조조가 흠모했던 장수였던만큼 '딱 그만큼'만 다뤘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관중은 부풀려서 '관우의 죽음'을 다뤘다. 왜 그랬을까? 그건 나관중이 조조가 아닌 유비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결정적 증거이기 때문이다. 그 증거는 '도원결의'에서부터 시작했고, 결국 '관우의 죽음'으로 확언을 받은 셈이다.

애초에 '정사 삼국지'에서 최후의 승자는 사마의의 후손인 '사마염'이다. 사마염이 세운 '진(晉)나라'가 정통성을 이어받기 위해서는 조조의 아들 조비가 세운 '위(魏)나라'를 추켜세울 수밖에 없었고, 그러기 위해서 나라의 기틀을 세우고, 한(漢)나라가 망해갈 때부터 모든 권력의 정점에 서 있었다는 정통성을 부여한 것이다. 허나 시대가 흘러 한족이 아닌 '이민족의 왕조들'이 이어지면서 중국의 역사는 누더기가 되었고, 남북조를 통일했던 '송(宋)나라'조차 거란(遼), 여진(金), 몽골(元)의 침략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가 우여곡절 끝에 주원장에 의해 다시금 한족의 나라인 명(明)나라가 건국되면서 뿔뿔이 흩어졌던 한족의 정체성을 다시 끌어모으고자 했던 것이다. 그런데 애써 모으려는 것이 '조조의 실리'였다면, 이는 한족만의 정체성을 내세우기 곤란했을 것이다. 왜냐면 '실리'는 이민족들도 곧잘 내세우던 논리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명백한 명분을 쌓고자 더 먼 '한고조 유방'때까지 거슬러 오를 수밖에 없었고, 유방의 후손임을 내세운 '전한 경제의 아들 중산정왕의 먼 후손'인 유비를 주인공으로 삼은 '삼국지'를 펼쳐내기에 이른 것이다.

실제로 유비는 조조가 인정한 영웅이었다고 전한다. 허나 이조차 근거는 미약하다. 비록 유비가 '촉한의 황제'까지 오른 인물이긴 하지만 짚신을 신고 돗자리를 만들어 팔던 떠돌이 무사 나부랭이를 상대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랬던 유비가 '제갈량'을 얻고 날개를 단듯 서쪽으로 날아가 '천하'를 나눠가질 정도로 성장했다. 조조의 처지에서는 속이 타들어가는 심정이었을 것이다. 아무런 가치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미약할 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때를 놓치지 저렇게 커버렸으니 말이다. 그래서 조조측은 이런 방심한 것을 솔직히(?) 서술하기보다는 차라리 유비를 영웅처럼 대접하고, 그런 영웅이었기에 '위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겨룰 만한 상대였다고 '정신승리(?)'를 거뒀을지도 모른다.

암튼, 이렇게 유비는 거물로 성장한 불세출의 영웅임이 틀림없었고, 그 유비와 '의형제'를 맺은 두 장수가 있었으니, 바로 관우와 장비라는 서사를 나관중은 꾸며서 대활약을 하게끔 만든 것이다. 이것이 나관중의 <삼국지>에 내세운 새로운 세계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유관장 삼형제가 대활약을 하던 시기를 '1부'로 삼고 종횡무진 누비게 만들었다. 그런데 책 제목처럼 '위촉오 삼국'이 형성되고 천하를 두고 한 판 승부가 제대로 펼쳐질 찰나에 느닷없이 '유관장 삼형제'가 차례대로 죽고 만다. 졸지에 주인공을 잃은 이야기가 제대로 이어갈 수 있을까? 더구나 천하를 통일한 위나라가 등장하기까지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다. 이는 '주인공' 없이도 이야기가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말과 다름 없다. 그래서 2부를 이끌어나갈 새로운 주인공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제갈량의 등장'이다. 그리고 제갈량이 1부의 주인공이 남긴 한 황실의 정통을 이어가야 한다는 '유지'를 받들어 무려 5차례의 출사표를 들이대며 끝없는 출정이 이어진다.

나가는 글 : 이렇게 '제갈량의 등장과 관우의 죽음'은 <삼국지>를 읽는 독자들에게 대전환점을 전한다. 그런데 여기서 호불호가 갈린다. 솔직히 유관장 삼형제가 다 빠지고 난 뒤에는 몰입도가 확 빠지는 것이 사실이긴 하다. 그도 그럴 것이 '유비'라는 걸출한 영웅의 뒤를 이은 후세가 '유선'이라는 바보였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서도 설화가 전해진다. 애초부터 바보는 아니었는데 조자룡이 구사일생으로 구해낸 아두(유선의 아명)를 유비가 내동댕이 치는 바람에 그 충격으로 멍청해졌다는 논리다. 그런데 갓난아기의 지능지수를 측정할 객관적 자료는 없기에 신빙성은 떨어진다. 오히려 구사일생으로 생명을 건졌다는 측은지심이 발동해서 유선을 어릴적부터 '응석받이'로 키운 탓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정도다. 암튼 유선은 '영웅의 그릇'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래서 독자들은 유선에게서 아무런 동정심을 발휘할 수 없었고, 이는 손견의 아들인 손책과 손권으로 이어지는 것과도, 조조의 아들인 조비로 권력의 향배가 이어지는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함이었다.

그래서 유비는 '이릉대전'에서 패배한 뒤에 제갈량에게 황제의 자리를 이어받도록 유언을 남길 정도였다. 허나 이는 불가했다. 황제의 자리는 '절대적인 충성'을 받아야 할 존엄한 자리다. 그런데 그걸 합리화하기 위해서는 애초에 '황제의 혈통'이거나 절대적인 힘을 가진 '패왕'이어야만 가능했다. 그런데 제갈량에게는 두 가지 가운데 아무 것도 없었다. 그리고 이제 막 촉나라를 세웠는데, 이를 공고히 할 유능한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터라 '제갈량' 스스로 황제에 자리에 오르고 나면 실제로 총괄하고 활약할 '적임자'가 없었던 탓이다. 실제로 제갈량의 후사를 위임할 정도로 유능했던 젊은이는 고작해야 '마속'과 '강유' 뿐이었고, 그런 마속조차 가정공방전에서 어처구니 없는 실책을 함으로써 대패를 한 책임을 물어 죽일 정도의 얕은 그릇이었고, 강유는 너무 늦게 만났다. 그러니 제갈량이 구중궁궐에 틀어밖혀 호사를 누린들 장밋빛 미래가 보였을까? 차라리 '2인자의 길'을 걷는 것이 더 낫다는 결론을 내렸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래서 제갈량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도 '관우의 죽음'은 촉나라의 기둥이 뽑혀나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더구나 관우의 뒤를 이어 장비와 유비까지 차례대로 죽어 나갔고, 그 빈 자리를 채울 만한 새로운 인재는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제갈량은 절체절명의 위기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결국 제갈량을 '출사표'까니 내밀며 자신의 생명을 독촉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죽음에 이를 데까지 몰아붙인 강행군으로 끝내 제갈량은 결코 많지 않은 나이(181~234)에 죽고 만다. 다음 권에서 계속.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