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레벨업 6
추공 지음, 이백 그림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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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만 레벨업 6>  추공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2019)

[My Review MMXXVIII / 파피루스(디앤씨미디어) 6번째 리뷰] 성진우가 '일본행'을 선언했다. 일본헌터협회가 '제주도 레이드'에서 한국측 S급 헌터들을 몰살시키려는 모략을 꾸미려다가 의도치 않은 변수로 인해서 자국(일본)의 S급 헌터가 7명이나 희생 당하는 처참한 결과를 낳았다. 이를 두고, '자업자득'이니 '사필귀정'이니 말이 많겠지만, 당장 일본에 S급 게이트가 열려버리기라도 하는 날에는 일본에서는 이를 막을 수 있는 헌터가 없게 된다. 제주도 레이드에서 '고토 류지'만이라도 어떻게 살아서 돌아왔더라면 좋았으련만, 일본측으로서는 '고토 류지'라는 최고 S급 헌터를 잃어버린 것이 너무도 큰 손실이었다.

그런데 정말로 일본에 '초대형 S급 게이트'가 생성되어 버린 것이다. 일주일 뒤면 게이트가 '던전 브레이크'될 것이고, 그 안에서 엄청난 마력을 뿜어내는 마수가 나오기라도 한다면 일본은 그야말로 '멸망 직전'까지 내몰리게 될 것이다. 일본에 생성된 게이트는 미국에서 겨우 막아낸 '카미쉬(용제: 용의 군주) 게이트'보다는 작지만, 세계적으로도 '두 번째로 많은 마력량'을 뿜어내서 일본 정부와 국민들을 초긴장 상태로 만들었다. 만약 이를 막지 못하고 게이트가 열려버린다면 일본은 '도시 한두 개'가 사라지는 정도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일본의 전국이 그야말로 초토화될 것이 분명하다. 제주도에 열렸던 S급 게이트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게이트였고, 제주도의 게이트에서는 '곤충형(개미) 마수'가 나오는 바람에 사방이 바다로 가로막고 있어 '제주도' 하나만 파괴되는 것으로 어찌어찌 막고서 시간을 벌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일본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된 초대형 S급 게이트에서는 '거인형 마수'가 30마리나 튀어나온 것이다. 더구나 거인이라고해서 행동이 굼뜬 것이 아니고 번개처럼 빠르게 움직이며 보이는 모든 것을 파괴했고, 보이는 모든 사람들을 먹어 치웠다. 그야말로 '살육전'으로 사람을 때리고 찢어발기며 먹어치우기까지 하는 괴물들이었다. 한 마리만 나와도 큰 피해가 났을 텐데, 무려 30마리가 각자의 방향으로 쏜살같이 치고 나가며 일본 전역을 파괴하고 있었다. 더구나 바다에서 헤엄까지 치고 건너갈 정도니, 이제 일본은 이대로 끝장이 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한국의 S급 헌터 성진우가 '일본행'을 자청한 것이다. 러시아의 S급 헌터 유리도 단 한 방에 거인에게 죽임을 당해서 전세계 S급 헌터들도 도와주겠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심지어 '국가 권력급 헌터'를 다섯 명이나 소유하고 있는 미국조차 일본을 외면하고 있었다. 그런데 한국의 헌터가, 그것도 혼자(아니 동행자가 있었는데, 아진 길드 부사장 유진호(D급 탱커))서 거인들을 상대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더구나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었다. 러시아 헌터처럼 '하루에 100억'을 지불해달라는 요구도 없었고, 단지 '거인들의 사체'만을 자신의 소유로 인정해달라는 요구만 했을 뿐이다. 그런데 이런 요구는 '게이트'를 클리어한 헌터가 당연하게 요구하는 것이기에 실제로는 아무런 조건도 없이 일본을 돕겠다는 얘기였다. 물론 성진우에게는 마수의 사체에서 얻을 수 있는 '그림자'가 가장 큰 이익이었지만, 성진우의 '스킬'이 무엇인지 잘 모르는 상황이었기에 그런 성진우의 행보는 전세계 헌터들의 귀감이 되었다.

어쨌거나 일본으로서는 무조건 도움을 받아야만 하는 처지였다. 그나마 남아 있던 일본의 S급 헌터들마저 거인과 맞서 싸우다가 죽어가는 형국이었기에 일본의 운명을 성진우에게 맡겨야만 했다. 하지만 성진우에겐 100레벨이 넘은 상황에서 엄청난 마력의 마수를 죽여야만 '레벨업'을 할 수 있다는 절박감마저 들었다. 그래서 성공여부를 떠나서 성진우에게도 꼭 필요한 레이드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진우는 거인들과 싸워서 이길 승산이 있던 것일까? 그리고 거인들과의 싸움을 통해서 밝혀질 비밀은 또 무엇일까?

아닌 게 아니라, 지난 '천사상 이중던전' 사건에서 '시스템의 설계자'와 마주쳤고, 성진우 본인이 '그림자 군주', 다시 말해, 9명의 군주 가운데 하나라는 사실을 각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각성하면서 성진우는 '인간'으로 남을지, '마수들의 군주'로 남을지 선택해야 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인간'으로 남는 것이었다. 그래서 '설계자의 의도'와는 다르게 성진우는 온전한 '그림자 군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없었다. 그림자 군주의 능력을 갖춘 '인간 헌터'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불완전한 존재'인 상태다. 이런 불완전함이 앞으로 어떤 결과를 맞이하게 될 것인지가 관건일 게다.

그리고 '그림자 군주'를 둘러싼 비밀도 조금이지만 밝혀지게 되었다. 9명의 군주와 대립하던 '지배자들'이 있고, 또 '악마들'도 군주들과 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림자 군주'였을 때, 하늘에서 내려온 '지배자'들과 한 판 승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림자 군주의 '소환능력' 덕분에 실력은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악마들'의 참전으로 그림자 군주는 곤경을 맞이했고, 이런 '그림자 군주'를 외면한 채 죽임을 당하도록 방치한 '나머지 군주들'은 배신자들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그림자 군주'는 처참한 패배를 했고, '설계자'는 성진우라는 E급 헌터의 몸속에 '그림자 군주의 일부'를 심어준 것이다.

그래도 의문은 남는다. 한 번 각성한 '헌터의 마력'은 아무리 노력해도 높일 수가 없었고, 유일하게 미국에서 각성한 '셀마 헌터'만이 재각성의 스킬을 갖고서 헌터들의 마력을 높여줄 수 있었는데, 성진우는 그녀의 도움이 없이도 스스로 '레벨업'을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시스템'을 만들었던 설계자마저 파괴 시켜버렸는데 말이다. 그런데도 성진우는 여전히 레벨업을 할 수 있다.

어쨌든 성진우는 '레벨업'을 해야 할 목적이 다시 생겼다. 미국에서 개최되는 '국제 길드 컨퍼런스'에 한국 대표로 초청되었기 때문이다. 그곳에서 엄청난 실력의 헌터들과 만나기 전에 충분히 '레벨업'을 해놓아야만 했던 것이다. 뚜렷한 이유는 몰라도 일단 '레벨업'을 해놓아야 어떤 일을 당하더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적중했다. 성진우가 레벨업을 조금이라도 게을리했더라면 결코 해결할 수 없는 사건사고들이 연이어서 발생하고 말았다. 이때 성진우의 '그림자 교환' 스킬이 유효하게 쓰였다. 그 누구든 '그림자'를 숙주처럼 심어놓기만 하면 언제 어느 곳이든 순식간에 이동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비록 '쿨타임'이 존재하는 스킬이지만, 엄청난 거리도 단숨에 이동할 수 있는 능력에 비해서 리스크가 적은 디버프였던 셈이다. 이제 성진우의 활동무대는 '지구 전역'이 될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언제나 가까운 곳에서 생기기 마련이다. 그동안 모습을 감추고 '재기(?)'를 노리던 '군주 세력들'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터져버린 게이트에서는 '거인들의 왕(군주)'이 있었고, 성진우가 처치했다. '용제'라 불리던 '용의 군주(카미쉬)'는 미국에서 모은 '국가 권력급 헌터들'에 의해서 죽었고, '그림자 군주'는 성진우 본인이니, 이제 남은 군주들은 6명이다. 거기다 '그림자 군주'와 싸웠던 '지배자들'도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지배자들은 '군주들'과 싸웠으니 성진우에게도 적인 셈이다. 그런데 지배자와 절체절명의 대결을 벌일 때 '배신'을 때린 애들이 군주들이었기에, 성진우는 지배자편도, 군주편도 아닌 셈이다. 그렇다면 누구의 편을 들어야만 하는가? 그때 '한국 헌터협회장 고건희'를 죽이러 온 마수가 '나머지 6군주' 가운데 한 명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밝혀냈다. 그리고 대한민국 1호 S급 헌터였던 고건희는 '지배자의 파편'으로 각성을 한 헌터였다는 사실도 밝혀졌다. 이렇게 성진우는 '군주'도 아닌, '지배자'도 아닌, '누구'의 편에서 싸움을 이어나가야만 할 것인가? 고민에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미국에서 개최한 국제 길드 컨퍼런스에서 성진우는 뜨거운 관심을 받았었다. 왜냐면 던전에서 등장한 인간이 있었는데, 그 인간의 모습이 다름 아닌 성진우의 아버지, '성일환'의 모습과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성일환의 마력 파장이 '마수의 것'과 완벽히 일치해서 의심스러운 상황인 것이다. 과연 성일환은 '인간'인 건가? '마수'인 건가? 어떤 쪽이든 성진우에겐 힘든 선택이 될 것이 틀림없다.

자, 이제 서서히 '게이트'가 갑자기 열리게 된 이유가 밝혀질 것이다. 군주와 지배자, 그리고 성진우의 끝없는 레벨업이 가능한 이유도 다 밝혀졌다. 그렇다면 이제 '최후의 싸움'이 남게 될 것이다. 과연 성진우는 '누구의 편'을 들 것인가? 고건희 회장은 '지배자의 도움'으로 각성했지만, '인간'으로 남았다. 돌아가신 줄 알았던 성진우의 아빠는 '인간'인지 '마수'인지 확인조차 할 수 없다. 성진우도 '군주의 도움'으로 새 삶을 살게 되었지만, '설계자의 의도'를 파악한 뒤에도 '인간'으로 남았다. 과연, 성진우의 선택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런 고민중에도 성진우의 레벨업은 계속된다. 일본에서, 미국에서, 또 어디서든 성진우는 레벨업을 한다. 지켜야할 존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존재가 곧 밝혀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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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성공시대 2 히틀러의 성공시대 2
김태권 글.그림 / 한겨레출판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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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틀러의 성공시대 2>  김태권 / 한겨레출판 (2013)

[My Review MMXXVII / 한겨레출판 10번째 리뷰] 이 책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히틀러' 같은 사람이 등장할 수 있느냐?'는 물음에 곰곰이 따져봤는데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당시에도 '아스팔트 보수층'이 등장해서 이명박·박근혜 정부를 열렬히 지지하던 시절이었고, 신한국당, 새누리당이 정부여당으로 강력한 보수의 힘을 결집시켰던 시절이어서 꽤나 답답한 시절이었음에도 대명천지 '21세기 대한민국'에서 히틀러 같은 독재자의 등장은 조금의 의혹과 조짐이 보이긴 하지만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런데 10여 년 뒤에 대한민국에서 '비상계엄령'이 선포되었다. 하마터면 '히틀러' 같은 윤틀러의 등장을 막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정말 위험천만한 '그날'에 한밤중인데도 민주시민들이 국회의사당 앞으로 모여들어서 '계엄군의 진입'을 막아내며 윤틀러의 독재정권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정말이지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왜 윤석열은 '히틀러'와 같은 독재자가 되길 꿈꿨던 것일까? 뭐, 정확히 말하자면 윤석열이 동경했던 대상은 '히틀러'가 아니라 '전두환'이었지만 말이다. 그러나 '독재자'라는 오명에서는 똑같이 취급할 수 있고, '윤석열'도 그와 동급으로 대우 받고 싶어서 대한민국 국민들을 향해 그런 만행을 저질렀을 것이 틀림없다. 이제 겨우 '탄핵'으로 대통령 자리에서 파면 당하고, 법원에서 1차 심판이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이지만, 그의 '내란우두머리 사형 판결'은 여러 모로 봤을 때, '확정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궁금한 점은 그게 아니다. 윤석열 집권기에 벌였던 일들이 '히틀러 집권과정'과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았다는 점에서 무척 놀랐다. 특히나 히틀러나 윤석열이 '음모론'을 너무 좋아했던 점은 정말이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거기다 히틀러의 친위세력이었던 '나치돌격대(SA)'와 윤석열의 친위세력을 자처했던 '백골단(비록 혁혁한 활동은 하지 못했지만)'과 '애국시민들'의 모양새도 놀랍도록 닮았다. 거기에 히틀러의 나치당 집권을 위해서 선전선동을 일삼았던 '괴벨스' 역할에는 윤석열 정권의 나팔수 역할을 자처한 '이진숙 방통위원장'과 '사랑제일교회 사이비교주 전광훈'과 자칭 '애국열사'로 불리길 바랐던 '전한길 한국사강사'로 아주 짝짜꿍이 잘 맞아떨어진다. 거기에 음모론을 퍼다 나르고, 그런 음모론을 자신의 인기정책으로 잘 활용했던 '히틀러'마냥 윤석열도 '극우유튜버'들이 퍼다 나른 온갖 음모론을 곧이 곧대로 믿고 따르는 모습이 정말이지 '히틀러의 현신'이라고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다.

근데, 정작 중요한 것은 '히틀러'와 '윤석열'이 얼마만큼의 싱크로율로 잘 맞아떨어지느냐가 아니다. 독재자가 될 것이 너무 뻔한 인물을 왜 독일국민와 대한민국국민이 지지하고 뽑아주었느냐가 핵심포인트인 것이다. 이 둘의 공통점은 자기들이 쿠데타를 통해서 '권력의 자리'에 올라선 것이 아니라 '선거'를 통해서 정정당당하게 '권력자'가 되었고, '권력의 정당성'에서 한 수 접어서 먹고 들어갔다는 점에서 우려스러움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히틀러도 독일국민이 뽑아주었고, 윤석열도 국민의 손으로 직접 뽑았다. 그게 '팩트'다.

그런데 당시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사회적 분위기였다는 것도 '일치'하고 있어서 놀랍다. 굉장히 좌우로 갈라져서 '정국 불안'이 심했고, '좌우 갈등'은 더 심했고, '경제 상황'은 악화일로였다는 점이다. 그런 혼란속에서 '히틀러'같은, '윤석열'같은 못난이들이 권력을 움켜쥐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당시에 못난이들을 뽑은 국민들 탓만 해서는 안 된다. 무지한 국민들 탓을 해봐야 이제와서 무엇을 하겠는가? 오히려 '민주주의'를 파괴하려 했던 세력을 발본색원해서 두 번 다시는 그런 과오의 전철을 밟지 못하도록 엄벌해야 하는 것이 훨씬 중요해졌다. 다시 말해, 민주주의 체제에서 '투표'는 모든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소중한 권리이자 엄중한 의무인데, 이런 중차대한 '선거'의 의의를 훼손하고 '독재자의 등장'을 획책하려는 못된 세력들을 솎아낼 수 있는 능력과 노력이 절실하다는 얘기다.

1930년대 독일 상황은 '전쟁패배'로 인한 정국혼란과 경제악화를 헤쳐나가기는커녕 도리어 '무능의 극치'를 보여줬던 정치계의 어리석은 행보가 줄다름을 치던 시절이었다. 여기에 자본가들의 '보수진영'과 노동자들의 '진보진영'이 서로 극렬하게 대립하던 때였기 때문에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치킨게임'이 일상이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자 새로운 인물을 독일국민들은 절실히 요구했는데, 그게 바로 '히틀러'였던 것이다. 하지만 당시 엘리트계층들은 '히틀러'가 깜도 안 되는 망상적 정신분열환자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독보적인 연설능력으로 독보적인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던 히틀러를 '얼굴마담' 삼아 자기네 진영에게 유리(집권)하도록 써먹고서는 내다버릴 생각만 했었던 것이다. 윤석열도 비슷한 처지였지 않았나? 박근혜 '유죄판결'을 성사시킨 검찰총장 출신이라 대중의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는데, 문재인 대통령 후임으로 내세울 마땅한 '대선 주자'가 없었던 보수집권세력들에게 '얼굴마담'으로 쓰고서 저고리핫바지 대통령으로 써먹기 딱 좋을 인물이라며 열렬히 영입하던 모습과 말이다.

그런데 실상은 달랐다. 히틀러와 윤석열에 '권력'을 쥐어주자마자 그들은 '자신의 본심'을 숨기지 않고서 국민들을 짓밟고서 군림하기로 작정했다. 물론 '정정당당한 절차'와 '법치주의'로 말이다. 그 절차와 법치가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닌 '자기 이익'만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었다는 점도 정말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 그리고 그런 '과욕'을 달성하기 위해서 '정적'을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윤석열이 정부여당에 '친윤파'로 채워넣기 위해서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무리를 한 것이나, 비상계엄을 준비하면서 '수방사 지하벙커'를 반정부인사 수감소로 활용하려 했던 점이 그렇다. 그러나 히틀러는 좀 더 잘했다. 권력의 자리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친위대들이 '정적'들을 사사로이 처단하는 일은 그저 일상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조금이라도 히틀러의 비위에 맞지 않고 수틀리는 짓을 하면 '수용소'에 수감시켰고, 그 유명한 '홀로코스트(대학살)'를 시행했다. 처음엔 '진보좌파', 그다음엔 '공산당원', 그다음엔 '자본가', 그다음엔 '유대인' 등등 전쟁의 광기를 뿜뿜하다 끝내 자살하기에 이르기까지 히틀러는 수많은 사람들을 공공연하게 죽여버렸다. 만약 윤석열의 계몽령이 계획대로 시행되었다면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도대체 이런 일이 어떻게 벌어질 수 있었을까? 당시 독일국민들이나 한국국민들이 머리에 총을 맞았단 말인가? 저런 인물인줄 전혀 모르고서 그저 순진하게 당하고만 했었냔 말이다. 그런데 그게 '가능할 때'가 있었다. 바로 정치적 대립과 갈등이 심할 때, 이런 '독재자'들이 어부지리로 정권을 잡게되는 놀라운 일이 말이다. 1920년대 당시 독일사회는 끔찍한 혼란상태였다. 패전으로 인해 나라살림은 엉망진창이 되었는데도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은 끝도 없었다. 정치인들도 둘로 갈라져서 크게 대립했고, 여러 파들로 나뉘어서 또다시 혼란을 가중시켰다. 이런 혼란한 틈을 타서 히틀러는 '인기몰이'를 시작했고, 독일국민들도 설마설마하다가 '히틀러' 같은 망상가에게 권력을 헌납하는 꼴을 당했던 것이다. 대한민국도 마찬가지 아니었던가. 사회갈등은 심각했고, 정국혼란은 한 치 앞도 전망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때 윤석열이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런 위기를 헤쳐나갈 것이라 수많은 국민들이 믿어 의심치 않았다. 분명 윤석열은 바람직한 대안이 아니라고 반대의견도 있었으나 '소수의견' 취급을 했다. 그런 정황의 근거들은 많았다. 손바닥에 王자를 그리고 나온 것을 보고서도 놀라지 않은 사람이 그렇게나 많았다는 사실이 정말 개탄스러울 지경이었지만, 그 당시 분위기는 '정권교체'만이 답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보라! 윤석열 3년 동안 대한민국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말이다.

이제 우리는 '민주주의'를 다시 되돌아보아야 할 때다. 우리가 쌓아올린 민주주의가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도 철저히 반성해야 한다. 그리고 두 번 다시 '비상계엄'을 저지르는 멍충이를 두둔하는 세력도 가만 둬선 안 된다. 독일사회가 '나치의 부활'을 철저히 막은 것처럼 한국사회도 '친윤의 부활'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 그리고 '음모론'으로 갈등을 조장하고, 그로써 '이익'을 챙기려는 세력들도 좌시해선 안 된다. 전광훈 아들딸이 '알뜰폰' 팔아서 사익을 챙겼다는 수사도 철저히 해야 한다. '내란선동'으로 이득을 챙겼던 극우유튜버들도 철퇴를 가해야 한다. 그래서 저들이 다시는 '독재자'를 비호하고, '국가위기'로 사익을 취하는 나쁜짓을 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한다.

국민의힘 국회의원 윤상현은 말한다. 국민들은 개돼지라서 '박근혜 탄핵'시키고도 국회의원으로 또 뽑아준다. 그러니 '지금'은 욕을 먹겠지만 '나중'을 생각하면 윤석열을 지키는게 더 이익이라고 말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 법정에서 사형판결을 받은 '내란우두머리 전두환'도 석방시키고서 천수를 누리다 고이 죽게 해주는 '관용(?)을 베푸는 국민'이 대한민국 국민이었기 때문이다. 노태우도 그랬고, 이명박, 박근혜도 줄줄이 석방시켜주어야 '국민통합'을 이룬다면서 다 풀어준 너그러운 국민들이다. 근데 내 생각에는 그게 '국민통합'에 어떤 보탬이 되었는지 이해가 안 된다. 왜 범죄를 저지르고 확정판결을 받은 사람의 형량을 줄여주는 것이 사회통합의 물꼬를 트는 일이라고 주장하는 걸까? 이게 대한민국 국민들을 우롱하는 일은 아니냔 말이다. 국민들을 얼마나 우습게 보면 철저히 자기 이익만을 추구하고 국민들을 개돼지로 여기는 사람을 뽑아주고 또 뽑아줄 거라 믿게 만드냔 말이다. 이 참에 보여주길 바란다. 윤석열만 처단하는 것으로 끝을 내지 말고, 그 일당들까지 발본색원하여 두 번 다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도록 개망신을 줘야 마땅하다. 연예인은 '자숙기간'을 거치고 나와도 죽을 때까지 욕을 하면서, 왜 정치권력, 경제권력을 가지고 있는 '실질적인 기득권 계층'에게는 욕 한 번 못하냔 말이다. 제발 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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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토마스 프랭크 지음, 김병순 옮김 / 갈라파고스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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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 :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  토마스 프랭크 / 김병순 / 갈라파고스 (2012) [원제 : What's the Matter with Kansas? (2004)]

[My Review MMXXVI / 갈라파고스 5번째 리뷰] 보수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혹시 '아무 생각'이 없는 건 아닐까? '콘크리트 지지층', '아스팔트 보수'를 넘어 이젠 '극우파'를 자처하는데에도 아무런 부끄럼을 타지 않을 지경에 이르렀다. 물론 보수지지층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들이 믿고 따르는 '보수'가 점점 이상해지는데 '정당정치'를 하고 있는 우리 정치생태에 유권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로지 '투표'밖에 할 일이 없을 지경이니 말이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보수지지자'가 소중한 한 표를 행사하는데 있어서 매우 신중치 못하는 것을 넘어 '무개념 투표'를 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다름 아닌, '12·3 비상계엄' 이후에 벌어진 '탄핵정국'에서 보여준 극렬한 극우폭동사태 때문이다. 서부지검 폭동사태는 우발적(?)인 것이라고 보더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그 사태 '이전'이나 '이후'에도 극렬한 집단시위는 달라지지 않았기에 더욱 의심스러운 것이다. 너무도 '상식이하'의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느냔 말이다. 아무리 자신이 지지하지 않는 정치인과 정당일지라도 '과격'을 넘어서 '폭력'적인 일을 저질러서는 안 되는 것 아니냔 말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가 이처럼 후퇴할 수는 없다.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란 말이다. 그래서 보수지지자들의 뇌구조(?)를 파헤칠 수 있는 책 한 권을 뽑아 들었다. 바로 <왜 가난한 사람들은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가>다. 이 책에서 밝힌 이유를 살펴보련다.

이 책의 원제는 <캔자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나(What's the Matter with Kansas?>다. 출간된 해는 2004년이었는데, 당시 미국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있었다. 그리고 부시(공화당)가 당선되었다. 뭐, 그럴 수 있다. 공화당 후보가 대통령 후보에 오르고, 실제로 당선된 것이 처음은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전통적으로 '진보 일색'이었던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 들의 터전이었던 '캔자스 주'가 민주당이 아닌 공화당 후보를 지지했다는 점에서 글쓴이 토마스 프랭크는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고 설파했다. 가난한 노동자와 농민 들이 '무조건' 진보 진영을 지지해야만 하는 규칙 같은 것은 없지만, 적어도 '보수 진영'을 지지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기 때문이다. 왜 가난한 이들이 '부자들의, 부자들에 의한,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쏟아내는 보수 진영을 지지하느냔 말이다. 그들의 정책을 지지해봐야 돌아오는 것은 '쥐꼬리만한 세금 감면'과 '현저히 줄어든 복지정책'으로 저들이 처한 가난을 극복할 수 있는 대안이 전혀 없을텐데 말이다. 그렇기에 캔자스 주 시민들은 전통적으로 '민주당'을 지지했고, 부자들에게 '세금폭탄'을 안기고 저들이 지원받을 수 있는 '복지정책'은 최대한 많이 끌어오려는 진보적인 색채를 뚜렷이 보여줬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진보적이던 캔자스 주 시민들이 '보수'를 지지하기 시작했단다. 그들이 당선되면 가난한 사람들을 외면하고 부자들만을 위한 정책을 쏟아낼 것이 분명한데도 말이다. 도대체 왜?

이 책을 들여다보면, '미국 정치의 민낯'이 낱낱이 밝혀졌다고 하지만, 우리가 미국 정치에 속속들이 알 수는 없는 관계로, 책의 비판적인 내용들이 우리의 피부에 가깝게 느껴지지는 않는다. 그저 '강 건너 불구경'하는 느낌이 쎄한 책이긴 하다. 하지만 그 핵심만 파악하고 보면 전혀 다른 느낌을 받게 된다. 이 책의 핵심이 바로 '가난한 이들의 뇌구조(!)는 단순하다'는 논조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저소득계층의 사람들은 학력이 낮은 편이다'라는 뜻이다. 뭐, 그렇다고 가난한 사람들의 '무능력'을 비꼬는 내용은 아니다. 솔직히 말해서 '노동자'와 '농민'을 생업으로 삼은 집안의 자녀들이 '고학력, 고소득 직장'을 구하려는 열망이 상대적으로 낮은 편인 것은 사실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미국의 농부라고해서 무작정 가난하다고 선입견을 가지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미국땅은 굉장히 넓다. 사람의 일손으로 일구는 땅뙤기가 아니라 트랙터로 '직진'만 반나절을 해야 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대농장을 운영하고 있기에 절대빈곤계층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그들이 농사를 지을 때 '필요한 지식'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캔자스 주에 살고 있는 농부들이 '고학력군'에 속할 필요성이 그닥 없는 셈이다. 노동자는 말할 것도 없고 말이다.

그런데 보수가 바로 이 빈틈을 파고 든 것이다. 전통적으로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지역을 중심으로 보수가 은밀한 접근을 시도한 것이다. 진보적인 색채가 강한 지역의 '저학력 일색'인 노동자와 농민 들을 대상으로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전략을 펼친 것이다. 이른바 '미국을 위대하게 만들 영웅'인 당신들이 부도덕한(?) 민주당 후보를 지지하겠느냔 말들을 퍼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얘기는 하지 않는다. 이를 테면, '낙태 금지 법안'을 폐기하려는 민주당의 정책을 음해하기 시작하고, '생명의 존엄성'을 잘 아는 캔자스 주 시민들이 소중한 생명을 잉태하고, 출산하는 것을 막으려는 저열한 짓거리에 동참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는다면서, '상식적인 윤리'를 내세우며 민주당의 정책들에 딴죽을 걸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틀린 말은 아니다. '낙태'라는 것이 우리 일상에 주는 충격이 얼마나 큰 일인지 생각해보면 찬성하는 쪽보다는 반대하는 것이 '당연하다' 여길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진보지지자였던 유권자들을 자연스럽게 보수지지자로 끌어들이는 활동을 꾸준히 벌였던 것이다. 여기에 '정치'뿐만 아니라 '종교', '이념'적 색채까지 마구마구 버무리면 진보진영의 상식은 너무나도 위험한(?) 생각이고, 진보정당의 정책들도 마찬가지로 너무도 위험한 정책이라는 것을 훨씬 쉽게 전파할 수 있게 된다. 바로 '이민자 문제'다.

이민자 문제는 '인권의 문제'이기도 하다. 그런데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긴 한데, '이민자의 인권'을 보호해주려다 정작 '나의 인권'이 침해 당할 위기에 처하게 되면 상황은 급반전하게 된다. 그동안 미국의 정책 변화를 지켜보면 이해하기 쉽다. 애초부터 '이민자의 나라'였던 미국이 '이민'을 긍정적으로 여긴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렇게 터전을 일군 '1세대 이민자'인 백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살았을 때에는 매우 안정적이었다. 소수이긴 하지만 흑인 이민자들도 정당한 대우를 받으면서 함께 살아갔다. 그러다가 '흑인은 노예다'라는 차별적인 인식이 팽배해지더니 '인종차별'은 미국 백인들의 큰 골칫거리가 되었다. 저들이 '프론티어 정신'으로 영토를 급격히 넓혀나가던 '제국주의 시절'에는 흑인이건, 인디언이건, '유색인종'들은 차별해도 괜찮은 대상이었지만, 거대한 미국땅을 효과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선 엄청난 일손이 필요했고, 그 일손을 충당하기 위해서 '유색인종'의 이민은 꾸준히 늘어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백인들도 '차별은 나쁘다'는 생각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갔고, 특히 '진보정당'이었던 민주당은 차별정책을 폐지하거나 보완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은 곧바로 '상식'으로 받아들여져서 미국은 누구라도 차별받지 않는 '자유의 나라'가 되어야 하는 것이 상식인 시절을 맞이했었다.

그런데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고 몰려드는 이민자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고, 급기야 '백인 서민계층' 노동자들의 일자리마저 빼앗아버리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여론이 속속 감지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하버드 대학 같은 '고학력계층'에서도 '같은 점수'를 받고도 '유색인종'에게 할당된 몫이 있어 '백인 학생'이 차별을 받게 되는 일이 벌어졌다. 심지어 '백인 학생'보다 낮은 점수를 받은 '유색인 학생'이 장학금을 타는 일이 벌어지자 '진보진영'을 지지하는 비율이 점점 낮아지고, 이민자 정책을 옹호하는 정치인의 인기는 점점 식어만 갔다. 여기에 '미디어 언론'의 기승은 더했다. 백인 범죄에 대해서는 쉬쉬하고 유색인 범죄에 대해서만 '대서특필'을 하는 일이 비일비재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유색인=예비 범죄자'라는 인식이 팽배해졌고, 이런 이유 때문에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계 이민자들은 '백색테러'에 벌벌 떨면서 지내야할 정도로 치안이 불안한 사회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도 보수정당은 이를 '위대한 미국을 만드는 애국적인 행동'이라고 추켜세우기 시작한다. 나아가서 모든 이민자를 받지 않겠다는 정책까지 밀어붙인다. 심지어 미국시민권을 '고액'을 내야만 내주겠다는 선언을 하기에 이른다. 애초에 가난한 이민자들은 올 생각도 하지 말라는 얘기다. 특히, '가난한 유색인종' 말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발언을 일삼는 정치인들이 꽤나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토마스 프랭크는 지적한다. '진보는 너무 어렵게 말한다. 반면에 보수는 쉽게 말한다'라고 말이다. 뭔 말이냐면, 비가 내리는 이유가 궁금한 아이에게 대답을 해줄 경우에 '선량한 똑똑이들'은 과학적인 이론을 내세우며 한낮은 태양빛 때문에 온도가 올라 수중기가 발생하면, 뜨거운 공기가 상승하듯 따뜻해진 공기속의 수증기로 상승하는데, 그 수중기가 일정량 이상으로 모이게 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구름'이 생성되고, 그 구름속에서 '응결'한 수증기가 물방울이 되었다가 얼음알갱이가 되었다가 하면서 반복을 하게 되는데, 이런 과정을 구름속에서 오르락내리락하던 작은 얼음알갱이에 수증기가 달라붙어서 점점 크기가 커지게 되고, 그러다 결국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무거워지면 빗방울이 되어 대지를 적시게 된다고 말한다고 지적한다. 그에 반해 '은밀한 선동꾼들'은 그걸 '신의 섭리'라면서 '하느님의 눈물'이라고 우아하게 포장하고 만단다. 너무 쉽지 않은가? 당신이 유권자라면 누구의 말을 곧이 듣겠는가?

이처럼 '진보진영의 상식'은 너무 어렵다는 말이다. '인권'은 소중하지만 왜 '이민자의 인권'까지 챙겨줘야 하냔 말이다. 또한 '인권'을 소중히 여기는 진보세력들은 한 생명을 앗아가는 '낙태'는 왜 찬성하느냔 말이다. 모든 이의 인권이 소중하다면 '뱃속의 아기'도 소중히 다뤄야 당연한 것 아닌가? 너무 간단하니 '보수진영의 논리'가 먹혀 들어가는 것이다. 어렵게 생각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캔자스 주 가난한 시민들은 '애국시민'으로 거듭나면서 젊어서는 '민주당'을 지지했던 투쟁세대가 늙어서는 '공화당'을 지지하는 보수세력으로 주저앉고 말았다고 토마스 프랭크는 낙심하고 있다.

우리는 어떤가? 정말 비슷하지 않은가? 한 나라의 대통령조차 '음모론 신봉자'가 되어 계엄령을 선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서 민주시민들의 저지로 막아낸 계엄령을 '야당의 선동'에 이용당한 어리석은 짓이라며 자신은 '계엄령'을 선포한 것이 아니라 '계몽령'을 선포했다고 우기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국회를 점령(?)한 '야당의 폭거'를 막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며 어느 한국사강사는 울분을 토한다. 국회의 정당한 요구에 '거부권'으로 일관한 행정수반의 책임은 없단 말인가? 아니 자칭 '한국사 강사'라는 사람이 '비상계엄'의 의미조차 이해하지 못하고, 윤석열의 계엄령이 '비상식적'이었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냔 말이다. 또한, 이들을 행태는 종교의 탈을 쓴 '전광훈 사이비교주(목사직 박탈 당했으므로)'의 국민저항권 운운하는 발언으로 종합할 수 있다. 감히 '종교의 이름'을 내걸고 정치적 활동을 일삼는 '전광훈의 상식'이 상식일 수 있냔 말이다. 저들의 선동에 놀아나는 '극우지지자'들은 또 어떤가? 그들은 한결 같이 가난하고 애국심만 가득하다.

이제 우리는 '보수 우파'의 진면목을 다시금 살펴볼 때다. 가난한 노동자는 무조건 '진보'이고, 부유한 부자는 반드시 '보수'를 지지해야 할 까닭은 없다. 그러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때에는 '근거'가 정당해야 한다. 그리고 그 근거는 '자신의 생각'을 기반으로 삼아야 한다. 누군가의 말에 휩쓸리지 말아야 한다. 왜 '남의 생각'을 맹목적으로 따라가느냔 말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특히나 정치에 있어서 '자기 목소리'만 높이는 사람은 100% '선동꾼'이다. 반면에 정치 좀 잘하는 사람들의 특징은 '남의 말을 경청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조목조목 밝히는 사람의 말에 더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한 번' 지지했더라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한다. 정치인은 '권력의 맛'을 보면 반드시 썩게 되어 있다. 아무리 청렴결백한 사람이었더라도 오랜 세월 정치에 몸을 담으면 정말이지 '오물덩어리'와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오물덩어리가 되지 않기 위해 끝없이 '자기성찰'을 해야할 위인이 정치인인데, 그런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다고 오해는 하지 말자. 늙고 낡은 정치인을 대신해서 젊고 참신한 정치인을 뽑으면 정치를 잘 할 거라는 생각은 아주 큰 오산이다. 이른바 '정치경험'이 일천한 이들이 권력의 맛을 보게 되면 더 빨리 쉬어버리기 일쑤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가? '자기 생각'대로 소신있게 지지하길 바란다. 그리고 그렇게 지지했다면 무거운 책임감을 갖고 지지한 정치인을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 그가 잘하면 잘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말고, 잘 못하면 못한다고 맴매를 아끼지 말라. 그렇게 해도 잘할까 말까다. 이 책을 읽으면 '가난한 사람들'이 보수의 민낯을 까발려볼 수 있다. 그리고 동시에 진보의 물색 없음도 동시에 볼 수 있다. 도대체 그 똑똑하다는 진보인사들이 왜 저열한 보수의 선동질 하나 막지 못한단 말인가? 그리고 진보다 어렵게 말하기보다 쉽게 말하는 '상식'을 배워야 한다. 강렬하게 다가오는 진리는 언제나 '심플'하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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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말습관 - 불행도 다행으로 만드는 나만의 기술
이주윤 지음 / 한빛비즈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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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란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말습관 : 불행도 다행으로 만드는 나만의 기술>  이주윤 / 한빛비즈 (2025)

[My Review MMXXV / 한빛비즈 170번째 리뷰] 수많은 자기계발서 가운데 가장 읽기 힘든 책이 하나 있다. '성공'을 이루기 위해 애쓰는 책들은 너무 쉬워서 탈이다. 정작 쉬운 내용에 비해서 '성공할 확률'은 현저히 낮은 것이 의문투성이긴 하지만 말이다. '성찰'을 바라는 책들은 너무 오묘해서 탈이다. 이미 도덕군자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바른생활의 사나이'로 평생을 살아왔는데, 뭘 더 성찰해야만 한단 말인가? 담배는 피운 적도 없고, 술은 진작에 끊었고, 나쁜짓은 해본 적도 없고, 여자를 울려 본 적도 없다. 사귄 적도 없으니까 말이다. 모태솔로..라고 하면 거짓말일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어디 나 때문에 울어본 분이 계시다면 손 들어주시길 바란다. 늘 내가 차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내가 '성찰'을 너무 많이 해서 달인이..쿨럭쿨럭

암튼, 내가 읽기 가장 힘든 자기계발서는 다름 아닌 '나를 사랑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자기애'가 충만한 자기계발서다. 자기조차 자신을 사랑하지도 않는데 어떤 이가 나를 사랑해주겠느냐는 말에 쉽게 공감이 가지만, 나를 '제삼자'의 관점에서 객관화 시켜놓고 볼작시면.."너무 완벽하잖아"라고 얘기해줘야 하는데, 천성이 비꼬는(?) 걸 좋아하고, 자기비판의 끝판왕이다보니, 이게 잘 안 된다. 물론 웬만한 기준으로 점수를 매기면 늘 '평균이상'이긴 하다. 그런데 문제는 '내 이상'이 너무 하이클래스라는 점이다. 조금의 티끌도 용서치 않는 엄격한(?) 판정단이 나의 내면에 도사리고 있다보니, '자기 자신'에게조차 늘 엄격해서 탈이다. 그래서 조금쯤은 '독하다'는 말을 듣는 편이다.

대표적인 예로 '담배'를 끊은 놈과는 상종을 하지 말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런데 나는 더 독종이었다. 주변에 다 담배를 피우는데 나만 담배를 피운 적이 없다. 늘 친구들과 만나면 '너구리 굴'에서 만나는 것인지 줄담배를 피워대지만, 그 속에서도 나는 담배를 피워보고 싶다는 생각조차 허용하지 않았다. 이유는 단순했다. 어릴 적부터 '가난'했기 때문이다. 그러니 '용돈'이란걸 받아본 적이 없다. 늘 돈이 궁했고, 궁한 만큼 돈을 허투루 쓰는 법을 몰랐다. 그래서 늘 얻어 먹는 일이 많았고, 너무 부담스런 걸 얻어 먹을 땐 많이 부끄러웠지만, 돈으로 갚는 일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늘 보답하며 살았다. 지금이야 '내돈내산'으로 먹고 사는데 큰 불편을 겪지는 않지만, 어릴 적부터 몸에 벤 '절약습관' 하나만큼은 절대 떼어놓은 적이 없다. 가끔은 '충동구매'를 하기도 하지만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질러본 적도 없다. 그렇게 나는 담배 끊은 놈보다 더 독종으로 살아왔다.

또, 독한 면모를 갖춘 것으로는 일단 '끝장'을 보기로 하면 해낸다는 것이다. 나는 모든 면에서 'A급'은 아니다. 하지만 늘 'B급 이상'이라고 자부하고 있다. 다시 말해, 뭐든 '잘하는 축'에 끼지는 못하지만 절대로 '못하는 축'에 끼어본 적은 없다고 자부한 것이다. 이런 성향이다보니 무슨 일이든 '두각'을 나타낸 적은 없다. 하지만 '끝장'을 본 것은 늘 내쪽이었다. 다른 이들 모두가 '1등'에게 시선을 쏟고 응원과 환호를 하고 말지만, 그들 가운데 '완주'를 한 것은 1등밖에 없다. 2등, 3등조차 완주를 포기하고 나름의 '시상식'에 참석하는 것으로 끝맺고 말지만, 나는 모든 관중이 다 떠나고 난 뒤에도 묵묵히 '내 페이스'에 맞춰서 나아가곤 한다. 그리고 불 꺼지고 아무도 없는 '경기장'에 나홀로 레이스 완주를 하고서 '나만의 기록'만을 남긴채 아무런 환호와 축하도 없이 '자기만족'을 하고 만다.

이걸 장점이라고 할 수 있을까? 자기만족의 관점에선 대성공이지만, 결정적으로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는 점에선 '대실패'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것도 나이를 좀 먹었더니 쏠쏠한 '데이터'를 갖추게 되었다. 젊었을 때엔 주목 받지 못했지만, 나름의 경력이 쌓이고, 관록이 쌓이니, 그것 나름대로 '저력'이 되더란 말이다. 이를 테면, '리뷰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해가 2005년이었으니 올해로 딱 20주년을 맞았다. 당시엔 1년에 많이 써봐야 20편이 고작이었다. 그래서 같이 시작한 다른 사람에 비해서 형편없는 수준이었고, 결국 주목은 다른 사람의 몫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벤트'가 끝난 뒤에도 계속 '나홀로 레이스'를 달렸다. 형편없이 못 쓴 리뷰로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고, 그마저 부지런히 쓰지도 않고 띄엄띄엄 쓰다보니 애써 관심을 보여줬던 분들도 발길을 끊기 일쑤였다. 그런데 그렇게 '나홀로 부침(浮沈)'을 하면서도 쓰고 또 쓰다보니 어느새 2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나름 '오기'와 '고집'으로 무작정 리뷰쓰기로 일관했지만, 그마저도 20년을 쓰다보니 어느 덧 '봐줄만'은 한 리뷰를 쓸 수 있게 되었다. 거기에 나만의 '결벽과 강박,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 똥고집으로 응결시킨 욕구가 '1년에 300편 리뷰쓰기'를 목표로 삼을 정도가 되었다. '끝장'을 보려고 말이다.

이런 '끝장'을 보고야 마는 성향은 '다이어트'에도 한몫 단단히 했다. 지난해 7월에 건강이 좋지 않다(고도비만으로 인한 당뇨증세)는 진단을 받은 게 '계기'가 되었지만, 일단 시작을 하니 '독기'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방법은 단순무식했다. '먹으면 안 되는 음식 vs 먹어도 되는 음식'으로 구분해놓고 철저히 시행한 것이다. 그동안 체중감량을 많이 시도했고, 대부분은 '운동'을 강도 높게 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운동을 시작한 지 3~4개월 동안에 5~8킬로그램을 빼는 것까지는 늘 성공했지만, 결국엔 다시 '요요현상'을 맞아 살이 다시 찌기 일쑤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확실한 체중감량을 위해서 '먹는 양'은 획기적으로 줄여버린 것이다. 어차피 '당뇨판정'까지 받고 이대로 심해지면 곱게 죽지 못할 거라는 강박감이 단단히 작용한 듯도 싶다. 그렇게 '음식섭취'는 줄이고, '운동량'은 늘리는 방법을 사용하니 두 달만에 9킬로그램을 뺐다. 그로부터 석 달 뒤에는 15킬로그램을 뺐다. 그뒤에는 '음식섭취량'을 살짝 늘렸다. 5개월 동안 15킬로그램을 급속하게 빼니 '현기증'이 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줄이고, 더 움직여도 살이 빠지지 않기도 했다. 그런데 먹는 양을 조금 늘리니 다시 살이 빠지기 시작해서 최종적으로 17~18킬로그램을 뺐다. 허리사이즈는 5인치가 줄었고, 키도 1센티 줄어든 것 같다. 그리고 10달이 지난 지금은 먹던 '당뇨약'도 끊고 별다른 요요현상 없이 계속 유지중이다.

이 책 <소란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말습관>을 읽으니 '나'를 되돌아보는 시간이 되어서 참 좋았다. 그동안에는 '나'에 대해서 너무 엄격한 잣대를 들이밀면서 '자기비하'도 서슴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곤 했는데, 이주윤 작가의 '말습관'을 곰곰이 따져보니, 나에게 너무 엄격할 필요가 그닥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말습관이 '자기합리화'를 부를 가능성도 있다. 분명 '내 잘못'인데도 이를 부정하고, '내 잘못'이 아니라고 그럴 듯하게 둘러대어서 '자신에게 유리한 결론'을 함부로 내리는 것을 나는 극도로 혐오하기 때문이다. 남이 그러는 것도 극혐인데, 나 자신이 그러고 있으면 정말이지 참을 수가 없다. 내가 달리 '바른생활의 사나이'라고 별명처럼 불리는 것이 아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너무 엄격해서 탈이지만, 내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몰염치한 짓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럴 바에야 차라리 접싯물에 코박고 캭 뒈지고 말지~라는 말을 스스로에게 하는 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주윤 작가가 스스로 전개하는 '칭찬하는 말습관'을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나는 낯간지러워서 못하겠다. 물론 '하면 좋은 걸' 알겠는데, 그걸 하고 있는 내 모습이 너무 낯설었기 때문이다. 평생 해 본 적이 없는 '셀프 칭찬'이라서 말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누구에게 칭찬을 받아본 적도 별로 없었다. 늘 'B급 이상'이었으니 못나지도 않았지만, 잘난 척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서 '미모 칭찬'에 몸 둘 바를 못 두겠다. 늘 배불뚝이에 D라인을 자랑하던 내가 15킬로그램 이상 감량에 성공하고, 날씬한 모습을 보여주니, 왜 이렇게들 잘 생겼다, 젊어졌다, 옷이 멋지다 등등 간지럼을 태우곤 한다. 이럴 때마다 "원래 잘 생겼었어", "늘 입던 옷이야"라고 되받아쳐야 하는데, 이걸 못한다. 다 늙어서 얼굴 빨개져서 헤벌쭉 웃기나 하고 있으니, '가관(可觀)이다[볼만하다]' 소리나 듣지 않는데 다행이다.

그나저나 나만의 '소란한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말습관'을 꼽으라면 뭐라고 하면 좋을까? [독종이라도 끝장을 보는 독종이면 끝내준다]. 나같은 독종에게 딱 어울리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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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바로 써먹는 어린이 초등 교과 어휘 맛있는 공부 67
한날 지음 / 파란정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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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있는 공부 67] <읽으면서 바로 써먹는 어린이 초등 교과 어휘>  한날 / 파란정원 (2025)
[My Review MMXXIV / 파란정원 17번째 리뷰] 학창시절에 영어단어를 외우려 '깜지'를 쓰던 추억이 떠오른다. 그 당시엔 단지 '시험점수'를 높이기 위한 단순반복적인 학습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영어어휘'를 풍부하게 만들어서 '영어구문'을 술술 읽어나가려는 가장 기초적인 학습법으로 판단된다. 물론 그런 단순무식한 방식이 그리 효과적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어떤 공부든 간에 '어휘'를 풍족하게 해야 넓고 깊은 공부를 할 수 있다는 진리를 막연하게나마 실천했던 것 같다. 누가 가르쳐주는 방법도 아닌데 말이다. 그렇기에 초등교과 때부터 '어휘'를 풍부하게 만드는 학습은 꼭 해야만 한다. 그건 누구나 아는 일이고, 정작 궁금한 것은 '학습방법'일 것이다.

그럼 어휘를 많이 익히고 정확하게 기억하고 일상에서도 바로 써먹을 수 있게 학습할 수 있는 최적의 방법은 무엇일까? 그건 바로 '다른 학생'을 가르쳐보는 방법이다. 일단 '배우는 자세'는 매우 수동적인 학습법임을 깨달아야 한다. 수업시간에 학생들의 모습을 떠올리면 바로 알 수 있다. 한 반에 30명의 학생이 있다면 수업시간 40분 동안 내내 집중을 하며 선생님의 수업을 듣는 학생이 과연 몇 명이나 될까? 안타깝지만 한 반에 1~2명이 있다면 정말 대단한 거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은 수업시간 틈틈이 '딴짓'을 하기 마련이다. 이런 방식의 학습법으로는 '어휘공부'를 한다고 해도 그리 높은 효과를 얻기 힘들다.

그렇다면 혼자서 하는 '자습'은 좋은 학습일까? 요즘 스터디까페 같은 곳을 가면 '독서실' 분위기도 나면서 '혼자서' 집중하면서 공부할 수 있는 최적의 환경을 갖춘 공간이 참 많다. 그런 곳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서 홀로 '어휘공부'를 한다면 꽤나 많은 어휘를 익힐 수 있을 것 같은데, 좋은 효과가 나타날까? 아쉽지만 그렇지 않다. 이런 방식으로 많은 어휘를 암기할 수 있을지 몰라도, 어디까지나 '단기적인 기억'으로만 저장될 뿐, 2~3일만 지나면 다시 까먹기 일쑤다.

그럼 수업중에 딴짓하지 않고 뇌세포를 '풀가동'하는 학습법이면서, 동시에 '단기간의 암기력'이 아닌 '장기간'이 지나도 오래오래 기억할 수 있는 최적의 학습법은 다름 아닌 '(남을) 가르치는 학습법'이다. 세간에서는 '거꾸로 학습법'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보통은 수학과외를 받는 학생이 선생님의 강의를 일방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선생님을 대신해서 학생들이 직접 문제풀이를 하면서 다른 학생들 앞에서 '교수법'을 시행하는 학습법이기도 하다. 이걸 '어휘공부'에 적용해도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사다리꼴'이라는 어휘의 뜻은 한 쌍의 대변이 평행한 사각형을 말해요. 평행사변형, 직사각형, 정사각형 모두 사다리꼴이지요. 여기서 '대변'이라는 낱말은 서로 마주보고 있는 변이란 뜻이기 때문에 '한 쌍 이상의 대변이 평행한 사각형'은 모두 사다리꼴이라 부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세 쌍의 대변이 평행한 도형'은 사다리꼴이 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세 쌍의 대변'이 존재한다면 변의 수가 최소 6개 이상인 도형이어야 하기 때문에 '사각형'이 아닌 도형입니다. 사다리꼴은 '사각형' 도형이기 때문에 변의 수는 4개여야만 합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이해해서 알고 있는 '어휘'를 남들 앞에서 가르쳐보는 학습을 해보면, 자신이 알고 있는 '어휘'는 더욱더 완벽하게 이해될 것이기 때문에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장기 기억'속에 영원히 간직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이런 학습은 '따로 시간을 내서' 할 수도 있지만, 일상속에서 아주 간단히 실행할 수도 있는 학습법이기에 다른 학생에게 '선행'을 베푼다는 기분도 만끽하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뽐내기도 하면서, 친절하게 가르쳐주면 인기도 많이 얻는 친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더불어서 '다른 학생의 학습수준'에 따라서 눈높이에 걸맞게 유형변화를 주면서 가르쳐준다면 더욱더 효과적일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이런 '남에게 가르쳐주는 학습법'을 쓰기 위해서는 '두 명 이상'이 모였을 때만 가능하다는 단점이 있다. 더구나 다른 학생이 먼저 물어보아야만 할 수 있는 학습법이기도 하다. 다른 학생이 묻지도 않는데 '내 공부'를 위해서 억지로 가르쳐준다고 할 수도 없지 않은가 말이다. 이럴 때에도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어휘공부' 방법은 없을까? 물론 있다. 바로 이 책 <읽으면서 바로 써먹는 초등 교과 어휘>다. 제목부터 '읽으면서 바로 써먹는'이라고 적혀 있지 않은가. 그러니 읽는 것만으로도 '알고 싶은 어휘'와 '어휘의 뜻풀이'가 적혀 있고, 그리고 바로 그 아래에는 '만화형식'으로 그 어휘를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무엇을 위해 어떻게 써먹으면 좋을지 아주 정확하게 나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혼자 공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정말 딱 알맞은 '어휘공부책'이다. 더구나 한 과목이 아닌 '국어', '도덕', '사회', '수학', '과학' 모두 다섯 과목의 어휘가 풍부하게 수록되어 있기 때문에 단 한 권만 읽어도 익힐 수 있는 어휘가 매우 풍부해서 '딱 한 권만' 읽고 싶은 학생들에게도 매우 적합한 책이다.

더구나 '학습책'이라고 하면 '만화'만 읽고 후다닥 넘겨버리는 어린 친구들이 참 많다. 그런 친구들은 '학습만화'의 진정한 효과를 얻기 힘들어서 아무리 많은 수의 '학습만화'를 읽었더라도 실력은 그다지 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친구들도 이 책을 읽을 땐 아무런 걱정이 없다. 이 책의 특장점이 바로 '만화가 전부'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만화만 읽어도 충분한 학습효과를 얻을 수 있는 장점을 갖고 있는 학습책이다. 그리고 이 책에 수록된 '만화'를 읽은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공부를 잘 할 수밖에 없다. 왜냐면 책을 읽기만 했는데 '이해하는 어휘'가 마구마구 늘어났기 때문이다. 그렇게 자기도 모르는 새에 '아는 것'이 많아졌기 때문에 학교 수업을 멍하게 듣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게 된다. 또한, 친구들 앞에서 '고급 어휘'를 자기도 모르게 쓰면서 다른 친구들이 그 어휘의 뜻을 모르는 것을 답답해 할 것이다. 이 책의 마법같은 힘이 바로 이것이다.

정말 놀라운 힘이 아닌가. 이제 어린 친구들은 이 책을 부모님이 알지 못하도록 꽁꽁 감춰둬야만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부모님이 먼저 이 책의 장점을 알고서 친구들에게 억지로라도 읽히려 하려 들게 뻔하기 때문이다. 이제 정말 클났다. 어쩌면 좋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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