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원리주의란 모든 것은 기술의 힘으로 제어되고 극복될 수 있으리라는 완고한 신념에 붙들려 있는 정신적 태도라 할 수 있는데, 이때 기술은 또 상황의 전체적인 국면을 고려하는 생태적 관점이 아니라 상황의 전체 맥락으로부터 고립시켜 문제를 해소시키려는 환원주의적 관점에 뿌리박고 있다. 물론 이런 관점은 주어진 문제를 해결하는데 비상한 효율성을 발휘하고, 부분적으로 뛰어난 합리성을 갖지만, 상황 전체의 장기적인 맥락에 비추어 볼 때, 그러한 효율성과 합리성은 지극히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행동으로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다 잘 알고 있는 일이며, 산업기술주의 문명의 지속불가능성이 바로 여기서 비롯하고 있음은 더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는 일이다. - P134

그러나 실제로 《녹색평론》을 통해서 우리가 직접 목표로 한 것은 그리 거창한 것이었다고 할 수 없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아마 우리가 희망해온 것은 그러한 근본적인 질문의 전파를 통해서 지금 뿌리로부터 병든 문명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 연대의 그물이 형성되고, 그것을 통해서 사람들의 삶이 조금이나마 더 견딜 만한 것이 되도록 돕는 일이었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 P141

지난 10년 동안 <녹색평론》을 통하여 우리가 일관되게 이야기해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끝없는 성장, 팽창을 내재적인 요건으로 할 수밖에 없는 산업경제, 산업문화가 물러나고, 새로운 차원의 농업 중심 사회가 재건되는 것만이 생태적, 사회적 위기와 모순을 벗어나는 유일하게 건강한 길이라는 논리였다. 그리고 이러한 원칙이 근본적으로 옳은 것이라면, 우리는 지금보다 훨씬 더 가난해지고, 또 평등하게 가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공존공영(共存共榮)이 아니라 공빈공락(共貧共樂)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라는 것을 숙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었다. - P144

유사 이래의 전면적인 생태적 위기로 인해 우리가 뒤늦게나마 깨달은 것은 재화와 서비스의 총량적 증가를 통한 부의 분배라는 종래의 논리는 아무리 기술적 수단이 발달한다 할지라도 결국 생태적 파국을 불가피하게 하며, 따라서 타자들 - 사람이든 아니든 - 에게 상처를 주지않고 우리가 인간다운 위엄과 자유와 행복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가난하게 겸손하게 사는 도리밖에 없다는 사실일 것이다. 내가 목소리를 낮추어야 딴 사람이 말을 할 수 있고, 사람이 조용해져야 새들이 노래를 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 P144

미국은 항상 옳고, 세계 어느 곳이든지 미국이 보기에 ‘가르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되는 곳이면 언제나 정치적으로 또는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기는 뿌리 깊은 오만은 실제 미국의 엘리트 문화 전체를 물들이고 있음이 틀림없다. - P148

일찍이 간디는 서구문명에 대하여 그것은 ‘문명‘이라는 이름에 값할만한 게 못 된다고 일갈한 바 있다. 간디에 의하면, 참다운 문명이란 자발적으로 물욕을 포기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 P149

간디는 사람들의 기본욕구의 충족을 위해서는 이 지구는 극히 풍요로운 곳이지만, 탐욕 앞에서 지구는 지극히 결핍된 곳이라는 뜻의 말을 하였다. 이 지상의 평화로운 삶을 위해서 이보다 더 간명한 진리를 드러내는 말은 없을 것이다. - P150

무고한 아프간 백성들에 대한 공격을 당장 그만두라는 우리의 외침이 위선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미국적 생활방식‘과의 결별을 준비하고, 우리의 삶을 자립적, 자치적인 것으로 바꾸어가려는 노력을 하지 않으면 안된다. 무한경쟁의 자유시장 경제에 우리가 속절없이 매여있는 한, 우리는 투기꾼들이 판치는 노름판의 상황에 일희일비하는 누추하고 비루한 야만의 삶을 벗어날 수가 없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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