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콤플렉스는 외국인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존재로 보지 않게 한다. 외국인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는 매우 선택적이고, 심지어 차별적이다. 우리의 서양 콤플렉스와 강자숭배주의가 얼마나 기막힌 수준까지와 있는가는 네팔 여성 찬드라 꾸마리 구릉이 겪은 참혹한 이야기에서선명하게 볼 수 있다. 외국인 노동자 신분으로 일하던 찬드라 구릉이어느 일요일 서울의 한 음식점에서 밥을 먹고 돈을 내지 못했다는 죄때문에 경찰에 연행된 것까지는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행색이남루하고, 경찰이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말을 한다는 이유로 주거불명의 정신병자로 오인되고, 그 후 6년 반 동안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정신병원에서 갇혀 지냈다는 것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런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 P156

아마 찬드라 구릉이 영어를 말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렇게 터무니없이정신병자 취급을 받지는 않았을 게 틀림없다. 우리가 찬드라의 이야기에서 큰 절망을 느끼는 것은 설령 경찰이나 정신병원에서 시초에 본의아닌 오인이 있을 수 있었다 하더라도 시간이 경과하면서 이 여성이 적어도 외국인이라는 사실은 밝혀졌을 것인데 어떻게 그렇게 오래 방치될 수 있었는가 하는 점 때문이다. 실제로, 찬드라가 수용되어 있던 병원 쪽에서는 얼마 있지 않아 이 여성이 외국인이라는 사실을 인지하였고, 그래서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에 문의를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병원에서 잘못 파악한 이름ㅡ찬드라 고름 - 이 법무부에 비치되어 있는 외국인 노동자 명부에 보이지 않는다는 컴퓨터 조회의 결과 때문에 다시몇 년을 허무하게 정신병원에 갇혀 지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찬드라 고름‘이 ‘찬드라 구릉‘을 잘못 발음한 것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섬세한 배려만 있었던들 이 여성과 딸의 행방을 몰라 애태우던 네팔의가족들의 비극은 좀더 일찍 마감될 수 있었을 것이 아닌가. - P157

문제는 가난이 아니라, ‘풍요로운‘ 소비문화라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을 잊어버릴 때, 우리는 경제성장 없이는 인간다운생활을 할 수 없으리라는 어리석은 착각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박멸해야 할 바이러스처럼 가난을 무조건 혐오해왔다. 그 결과 ‘품위있는‘ 가난과 그 의미에 관한 성숙한 인식은 이 사회에서극도로 축소되었고, 우리의 삶은 외형적인 풍요에도 불구하고-혹은그 때문에-내면적으로는 심히 병들고 공허한 것이 되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비극적인 것은, 자립적인 생존의 기반이자 도덕적 삶의 원천인농경문화의 중요성에 대한 감각이 상실되어 버렸다는 사실이다. 식량자급률 25퍼센트 수준 - 그나마도 석유에 의존해서 - 이라는 한심한 농업현실로는 한 사회공동체의 장기적인 존속이 명백히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지금 우리는 목전의 이윤추구에 혈안이 되어, 마치 내일이 없는사람들처럼, 땅을 죽이는 일에 광분하고 있다. - P162

그들이 그렇게 되었던 것은 그들이 현상을 넘어 볼 수 있는 비전이나상상력을 결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텐데, 그러한 상상력의 결핍은그들이 엘리트로서의 자각 이전에 당대의 밑바닥 풀뿌리 민중과 운명을 함께하겠다는 자세가 결여되어 있었던 점에 연유했을 가능성이 크다. 예컨대, 신채호나 한용운의 경우, 최초에 얼마간의 사상적 혼란기가지난 다음에 그들이 끝끝내 사회진화론의 함정을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들 자신이 늘 민중과 함께 있겠다는 철저한 평등주의 사상, 혹은 근원적 자유의 사상을 획득하는 데 성공하였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 P168

아마도 밑바닥에서도 가장 밑바닥으로 밀려난 소외의 삶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는 사람이었기에 그 어머니에게는 "근대적인 교육이 가져다준 지식이나 이론은 없었지만 근대적인 개념에 지배당하지 않는 지혜 같은 것"이 있었을 것이라고 서경식은 말하고 있다. 요컨대, 그 어머니의 삶을 이끈 것은 흔히 지식인들을 사로잡고 있는 근대, 전근대,
탈근대 따위의 관념적 언어로써는 절대로 포착할 수 없는 생명에 대한본능적인 감각과 의식이었을 것이다. - P169

이 경쟁지상주의가 팽배한 사회에서 출산과 보육과 교육 과정에서 단계단계마다 부모나 자식이나 어김없이 겪을 엄청난 시련과 스트레스를 사전에 조금이라도 상상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어떤 부모가 자식을 낳아 기를 엄두를 내겠는가. 이것은 결코 출산장려금 따위로 해소될 문제가 아닌 것이다. 지금 출산율 저하라는 현상은 사람들이 대부분 무의식중에 행하는 ‘보이콧‘ 행위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 보이콧은 그동안 한국의 경제적발전의 성과를 긍정하고 미화해온 무수한 ‘교육받은‘ 엘리트들의 논리가 한마디로 허위이며 거짓말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 P171

일찍이 간디는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에서 정치적으로 해방되더라도,
만약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생존양식을 그대로 답습한다면, 그것은인도 민중의 입장에서 볼 때, 지배자의 피부빛깔이 달라진 것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간디의 정치적 후계자 네루는 간디의 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네루는 산업주의적 생산양식은 시대의 필연적인 추세라고 생각했고, 그의 지도 밑에서 인도는 현대적인 산업국가가 되기 위한 수많은 프로젝트를 시작하였다. 그 결과 인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대형 댐이 아직도 건설 중인 국가가 되었고,
교육받은 소수 엘리트들과 대다수 민중 사이의 소득 및 생활수준의 격차는 갈수록 심화되어왔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과정에서 독립이전보다도 풀뿌리 민중의 삶은 비교할 수 없이 참담한 것이 되었다는 점이다. - P1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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