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활발발>에서 만났던 고정희 시인의 시를 또 본다.
수지 오바크 <몸에 갇힌 사람들>
2장. 섹슈얼리티 정치학
그리하여 여자가 되는 것은 한 마리 살진 사자와 사는 일이다? 여자가 되는 것은 두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 옆에 잠들고 여자가 되는 것은 세 마리 네 마리 으르렁거리는 사자의 새끼를 낳는 일이다?
고정희의 시 <여자가 되는 것은 사자와 사는 일인가>는 ‘남자는 사나운 사자‘라는 얘기가 아니다. 사자는 움직일 필요 없이 가만있어도 된다는 뜻이다. 오로지 사자의 기분과 이익만이 법이요 정의인 사자의 우리 안에서 사자의 일거수일투족에 마음 졸이고 눈치보고 비위 맞추면서 끊임없이 사자에 맞춰 자신을 변화시키는 것, 이것이 바로 ‘여자가 되는 길‘이다. 사회, 학교, 가정, 국가, 지구촌, 이 세상 모든 것이 변한다 해도 여자가 남자에게 맞춰야 하는 한남성은 "네 탓이오" 하면서 자신을 변화시킬 필요가 없는 추악한 존재가 될 것이다. 사자 우리 안에서 변해야 할 것은 세상과 여자들이다. 사자는 자아 구조 조정이라는 고통을 시도할 이유가 없다. 다른 말로 하면 흑인이 흑인으로 사는 한 백인이라는 범주가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서구를 숭배하는 비서구가 서구의 권력을 지속시켜주는 것처럼, 남자를 남자이게끔 만드는 것은 여자다. - P125
버스안 여고생으로 보이는 두 사람의 대화다. "(가임 적령기인) 30대 초반 여자 인구가 제일 적다며?" "당연하지! 그렇게 여아 낙태를 해댔으니, 여자들이 남아났겠냐." 이렇게 똑똑한 여성들이 앞으로 한국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갈까 싶어 걱정될 정도였다. 현재인권 관련 국제기구들은 한국의 심각한 여성 인권 문제를 아내에 대한 폭력(가정폭력)과 성형 시술로 보고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이 분야에서 한국의 ‘상징‘은 여아 낙태였다. 한국의 태아 성 감별 의료 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한다. 최근에는 여아를 원하는 부모들이 성 감별을 통해 남아를 낙태하기도 한다. - P137
임신 중단을 둘러싸고 한국 사회가 가장 염려해야 하는 사항은, 낙태는 여성의 선택권이나 태아의 생명권을 침해하는 문제가 아니라 성관계 시 남성의 권력과 무책임으로 인한 사후 피임, 즉 여성의 몸에 대한 폭력이라는 사실이다. 콘돔은 인류의 발명품 중 가장 획기적인 물건이었다. 인구 조절이 가능해졌고 여성은 임신 여부를 스스로 선택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 시대 여성들은 자기 의사와 무관하게 평생을 임신, 출산, 육아로 보냈다. 근대 이전에는 전쟁으로 사망하는 사람보다 출산 도중에 목숨을 잃는 여성이 더 많을 정도였다. - P140
성교육은 반드시 필요하지만 출산 과정에 국한할 필요도 없고 바람직하지도 않다. 섹스의 전제는 출산이 아니라 피임이다. 계획에 따른 출산은 피임에서 시작돼야 한다. 지금은 순서가 반대다. 한국 사회는 포르노 산업의 영향이 절대적이어서 남성 성기 중심의 삽입 섹스에 집착한다. 이 고정관념부터 버려야 한다. 성교는 성 활동의 극히 일부분이다. 성에는 다층적 차원의 사회성이 있다. 인간은 재생산(출산), 자아실현, 쾌락, 정체성, 건강, 친밀감 형성, 치유등 다양한 이유로 성 활동을 한다. 내 주변에는 무성애자(無性愛者, asexual)도 상당히 많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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