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폭발하는 1960년대
실비아 플라스 <에어리얼> [아빠]
에이드리언 리치 [며느리의 스냅사진들]
니나 시몬 <해적 제니> <힘을 빼고> <네 여자>
글로리아 스타이넘 vs 헬렌 걸리 브라운
수전 손택 vs 존 디디온
슐라미스 파이어스톤

2부. 폭발하는 1960년대

이제 그녀는 날고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끔찍하게, 붉은
하늘의 상처처럼,
그녀를 죽인 기관차처럼 -
그 웅장한 무덤, 밀랍의 집 위를 나는
붉은 혜성처럼.

웅장한 무덤. 여성들이 갇혀 있는 역사의 무덤을 말하는 걸까? 곤충학 교수(『뒹벌과 그들의 생태』의 저자)였던 그녀의 죽은 아버지가 어쩐지 여전히 살아 있는 것 같은, 그녀의 상상 속웅장한 무덤일까? 그녀가 여덟 살 때 죽은 아버지인데도? 밀랍의 집은 또 어떤가. 실제 벌집을 가리키는 것에 더해, <레이디스홈 저널〉의 지면 속에서 영원히 손짓하며 유혹하는 1950년대의 가정생활이라는 가짜 집을 가리키는 것은 아닐까? 혹은 코트그린 그 자체, 남편이 런던에서 자신의 정부와 문우들과신나게 나다니던 동안 그녀가 두 아이와 함께 생매장당했던 그영국 역사의 환상이라는 바로 그곳일까? - P119

에어리얼이라는 이름의 주도적인 요정이 등장하는 『템페스트』에서 셰익스피어는 아버지와 딸의 사랑을 탐구했는데, 그녀는 이 사실에 늘 사로잡혀 있었다. 히브리어 ‘아리엘 Ariel‘이 ‘신의 암사자‘를 의미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쓸쓸했던 2월 아침그녀가 책상에 놓아두었던 원고의 팩시밀리 모사본을 보면 두제목을 두고 그녀가 얼마나 오락가락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는 ‘아빠‘라는 제목으로 소녀 시절의 의존적 상황을 (아마 분노를 품거나 웃음을 지으면서) 되돌아본다는 의미를 담았고 다른하나는 격노한 암사자‘에어리얼‘로서, 또는 가부장적인 프로스페로"로부터 자유로워져 자율적인 자아를 지닌 존재나 자발적으로 자기 희생적 존재가 된 요정으로서 미래를 향해 날아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 P124

동시에 플라스는 이 동년배에게 격렬한 경쟁의식을 느끼기도 했다. 그녀가 자신의 충동과 재능을 공유한 자기 세대의 유일한 여성이라고 제대로 알아보았던 것이다. "누가 라이벌일까?" 플라스는 일기 속에서 자문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아마 가장 근접한 사람은 에이드리언 리치일 것"이라고 자답했다. - P129

그 다음 여덟 개 단락은 에세이 같기도 하고 보고서 같기도하다. 어쩌면 리치도 베티 프리단이나 시몬 드 보부아르처럼 여성의 상황을 점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제2의 성이 된다는 것, 그리고 그 결과 가부장제 문화라는 기본법 아래에서 여성성의 신화를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말이다. 그녀는 세 번째 단락 첫 문장에서 "생각하는 여자는 괴물들과 함께 잔다"고 주장한다. "그녀는 자신을 꽉 물고 있는 부리가 된다." 여성은, 특히 주제넘게 생각이란 것을 하는 여성은 정말 괴물일까? - P131

두 번째 모욕적인 일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필라델피아 커티스음악원에 장학생으로 들어가기 위해 줄리어드에서 레슨을 받던 시절에 일어났다. 커티스음악원이 입학을 거부한 것이다. 그녀는 뒤늦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그들이흑인을 입학시킨다고 해도 무명의 흑인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며, 만약 무명의 흑인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게 무명의 흑인 소녀는 아닐 것이며, 만약 무명의 흑인 소녀를 입학시킨다고 해도 그게 몹시 가난한 무명의 흑인 소녀는 아닐 것이다." 이 입학 거부 사건에 대한 반발심에서 그녀의 새 이름이 생겨났다. 이 사건 이후 그녀는 돈을 벌기 위해 ‘애틀랜틱시티 바‘에서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는데, 그때 그 일자리의 요구 사항대로 노래도 같이 불렀다. 니나(남자 친구가 붙여준 이름) 시몬(프랑스배우 시몬 시뇨레를 오마주하며 사용한 이름)58은 자신의 어머니에게 딸이 악마의 음악에 젖어 산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만든 이름이었다. - P138

시몬이 발표한 <해적 제니> <힘을 빼고> <네 여자>는 (음조나 구성 면에서 서로 매우 다른 곡들이다) 인종의 성 정치에 관한 그녀의 통찰력을 보여준다. - P142

나중에 그녀가 "미합중뱀the United Snakes ofAmerica"이라고 부르기도 했던 나라에 대한 종말론적 복수극 환상인 <해적 제니〉는, 흑인의 조국으로 탈출하기를 염원하는 시몬의 연출 기량을 보여준다. - P143

노래의 유쾌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힘을 빼고>는 블랙 파워 운동에 참가한 남성 우월주의자들의 편견을 겨냥한다. 앤절라 데이비스는 이에 대해 "자신들의 정치 활동을 남성성 행사와 혼동하는 (・・・) 흑인 남성 운동가들 사이에 퍼진 유감스러운 증상"이라고 칭했다. - P145

<네 여자>는 시몬의 친구인 제임스 볼드윈의 베스트셀러 산문집 『아무도 내 이름을 모른다』(1961)가 출간되고 나서 4년뒤에 나왔다. 시몬의 노래에 나오는 인물들은 정체성 확립을 위해 애를 쓴다. "흑인 여성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다. 자신이 제어할 수 없는 사항들에 의해 정체성이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규정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될 때까지 영원히 같은 곤경에 빠져 옴짝달싹 못 할 것이다. 이게 바로 이 노래의 취지였다"고 시몬은 『너에게 주문을걸 거야』에 썼다. 블랙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널리 퍼지기 전, 니나 시몬은 블랙 페미니즘의 통찰을 표현해냈다. - P148

1980년대에 오면 스타이넘은 이런 설명과 함께 "본질주의"라고 불리게 되는 이론(성별이란 본래 생물학적으로 갖추고 태어나는 고유한 것이라는 이론)과 "사회적 구성주의"로 불리게되는 이론(시몬 드 보부아르가 표현했듯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성별은 천성적으로 갖고 태어나는 게 아니라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는 이론) 간의 논쟁을 다룬다. 선견지명을 보여준 남녀공학에 다니는 여대생 베타의 도덕적 무장해제」의 결론은 "피임 혁명의 진짜 위험"에 대한 이야기다. "여성의 역할 변화에 상응하는 남성의 태도 변화 없이 여성의 역할 변화만 가속화될 때 위험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 P157

성교가 아니라 자위 행위가 가장 강렬한 오르가슴을 발생시킨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페넬로페*는 이제 태피스트리를 짰다

* 트로이전쟁에 출정한 남편 율리시스의 귀향을 20년 동안 베 짜기를 하면서 기다린, 그리스 신화 속 인물. - P161

풀었다 하면서 남편 율리시스를 수동적으로 기다릴 필요가 없게 된 것이다. 1960년대 말, 페미니스트들은 『인간의 성적 반응』이 확산시킨 주장(해방된 존재든 해방되지 않은 존재든 남성은 재생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여성의 성적 만족 면에서는 필요하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는 주장)의 의미를 널리 풀어놓게 된다. - P162

대학교 2학년 때 손택은 "1947년(열네 살 때)부터 1950년8월28일(열일곱 살 때)까지 사귀었던 연인들의 목록을 작성했다. 모두 합쳐 서른여섯 명이었다. 그녀의 전기 작가 벤저민 모저의 말마따나 ‘바이의 전진‘이라는 제목의 이 목록은 그녀가 "이성애자와 만나는 비율을 높여 이성애자로 변하기 위해 애썼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녀는 짧은 구애 기간을 거쳐 사회학 강사였던 스물여덟의 필립 리프와 결혼했는데, 그때 그녀의나이는 겨우 열일곱이었다. 결혼 직전 그녀는 일기에 단순하고 엄숙하게 이렇게 썼다. "1951년 1월 3일 : 나는 내 의지를 충분히 의식하면서 + 자멸을 향해 가는 내 의지를 두려워하면서, 필립과 결혼한다." 과거를 돌아볼 때 그녀는 조지 엘리엇의 『미들마치』에 나오는 현학적인 안티 히어로에 빗대 이렇게 말하곤했다. "나는 캐저반 씨와 결혼한 것이었다." - P163

베트남에 갔던 여성 작가들은 시인 메리 매카시가 말했던 것처럼 "우리나라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결과는 아마 이 전쟁의 승리"일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들은 이 전쟁이 자신들의 모국과 언어, 그리고 때로는 역설적이게도 이들 자신을 좀먹으며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강조했다.57 매카시는 1967년사이공에 도착했을 때, 특히 1968년 북베트남 지역을 돌아다니면서 "자신감 넘치는 미국인"으로서의 "우월성에 대한 확신"을잃었다. 손택의 「하노이 여행」이 발표되자 매카시는 자신과손택 둘 다 "양심의 시험에 이끌린 것"이라고 말했다. 59 동시대의 다수 남성들처럼 매카시와 손택은 미국의 전쟁광들을 비난하는 쪽에서 북베트남의 공산주의자들을 응원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 P178

그러나 페미니스트들의 항의는 일부 블랙 파워 운동 지도자들의 미소지니에 반발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1960년대 중반, 메리 킹과 케이시 헤이든은 민권운동 내에서 여성에게 보조적 역할을 맡기는 것에 반발하는 항의문을 돌렸다. "남성이 우월하다는 가정이 널리 퍼져 있고 깊이 뿌리박혀있으며, 여성은 흑인보다 백인이 우월하다는 생각에서 피해를 입는 것만큼이나심각한 피해를 받고 있다." 여성에 대한 편견을 묘사하기 위해 1930년대에 부각된 ‘성차별주의"라는 단어가 "인종차별주의"에 상응하는 용어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이내 저항 집회에서는 빈정거림과 야유 속에서도 ‘여성해방‘에 관한 결의가 논의되었다. 여성들은 인종차별에 맞서 싸우며 연대했던 남성들이 내보이는 성차별주의와 계속해서 마주해야 했기 때문이다. - P188

언론의 자유 운동조직, 신좌파단체, 반전운동 단체들 내의 성차별주의 역시 여성 운동가들의 의식을 고양시켰다. 좌파 여성들은 자신들이 "남성들이 전달하는 발언을 타이핑하거나, 직접 정책 수립을 하는 대신 커피를 타면서 ‘구질서‘를 대체하는정치를 하겠다는 남성들을 돕는 액세서리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1968년 컬럼비아대학교 시위 때는 컬럼비아대학교의 남학생들과 바너드대학교의 여학생들이 함께을 합쳐 경찰의 야만적 행위에 용감하게 맞섰지만, 오직 여학생들만이 "겨우 공중전화 부스 크기만 한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었다. 그해 여름 이 반체제 학생들의 대변인이었던 마크 러드는 "여자 친구에게 자기는 다른 일을 하느라 바쁘니 가서 ‘병아리해방 전사‘ 수업을 들으라고 조언했다." - P1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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