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신체성
물질성
생태적 주체와 생태적 사유
인간의 몸

환경정의
환경보건
환경질병
환경윤리

1장 서론-몸된 자연

강력한 윤리적·정치적 가능성은 인간 신체성과 인간을 넘어서는 자연 사이의 문자 그대로의 접촉 지대로부터 부상한다. 인간이 언제나 인간을 넘어서는 세계와 맞물리는 지점인 횡단-신체성 trans-corporeality으로 인간 신체성을 상상한다는 건 인간을 구성하는 물질이 궁극적으로 ‘환경‘과 분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 준다. - P18

횡단-신체성은 이를 위한 하나의 대안이다. 이론적 장소로서 횡단-신체성은 신체이론·환경이론·과학연구가 생산적인 방식으로 서로 만나고 섞이는 장소를 지칭한다. 이와 같이 인간 신체와 비인간 자연을가로지르는 운동‘은 물질과 담론, 자연과 문화, 생물학과 텍스트의 영토들을 관통해 이동하는 풍부하고 복합적인 분석을 필요하게 만든다. - P21

페미니즘 이론은 신체성과 무심성無心性, 수동성으로 비된 자연으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했다. 인간의 특정 그룹과 비인간 생명체에게 모욕과 침묵을 강요하기 위해 조성되어 왔던 자연/문화, 몸/마음, 대상/주체, 자원/행위능력 등의 젠더화된 이원론을 타파하기 위해서 노력해야 마땅했을 것이다. - P25

투아나가 강하게 주장하듯, 페미니즘은 오로지 물질 그 자체에 직접적으로 개입함으로써 생물학적 결정론biological determinism을 무의미하게만들 수 있다. - P27

"인간 몸에 있는 대다수 세포들은 간성적inter-sex이고", "다섯 계 중 네 계에서 대부분 유기체는 재생산을 위해 성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경이롭게도 치마버섯은 "2만 8천 개 이상의 성을 가지고 있다" 그녀는 "우리는 자연이 변함없이 고정된 반면에 문화는 무한하게 유연하다는 주장을 더 이상 확신할 수 없다"는 말로 자신의 주장을 요약했다. 만일 이러한 생물학이 퀴어하게 들린다면, 그럴수록 더욱 좋다. ‘상황적 지식‘으로서 이 퀴어 생물학은 규범화하는 이성애-생물학의 내용과 분류뿐만 아니라, 그것이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 P27

자연의 대용어로 스콧은, "사물의 삶이 얼마나크게 인간적 의미와 감각을 초월하는지를 보여 주는 물리성physicality을 제안하였다." 그리고 에드워드 케이시와 데이비드 에이브럼과 같은환경주의 현상학자들은 인간의 경험과 인지가 [보편적인 것이 아니라] 제한된 특정 장소와 결부되어 있다고 주장한다. 케이시는 "장소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조건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와 유사하게, 로렌스 부엘은 "인간은 자신이 거주하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자신을 구축하는 문화생물학적 생명체이기 때문에 그가 생산하는 모든 인공물은 그러한 환경의 흔적을 간직한다"고 주장한다. 생태비평은 "텍스트와 세계 사이의 분리"를 계속해서 강조하는 연구의 태도를 지양해야 한다는 것이다." - P33

프롬은 "환경"은 "점점 더 세계 내 인간존재의 바로 그 구성물질인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메를로-퐁티Merleau-Ponty를 끌어들이면서, 에드워드 케이시도 유사한 주장을 한다. "내 몸과 자연은 인접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로 연속되어 있다. [・・・・・・] 문화와 자연으로 이뤄진 섬유들은 하나의 연속된 직물을 구성한다. 몸과 장소가 연속적임을 인정하려면 전통적인 분과학문적 경계를 가로질러야 한다. - P41

특히 장애연구는 몸과 장소 사이의 물질적/사회적 상호교환을 추적하기 위해 폐쇄된 몸이라는 의학 모델들을 거부한다. 로즈메리 갈런드-톰슨은 "장애연구는우리로 하여금 모든 몸이 수태의 순간부터 환경에 의해 형성된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우리는 계속해서 자신을 둘러싼 것에 반응하면서 변신하고, 몸에 역사를 기록한다. 몸이 세계와 마주칠 때 발생하는 변화를 우리는 장애라고 부른다"라고 설명한다. - P42

말과 살, 흙은 이제 더 이상 개별적 개체가 아니다.
낸시 투아나는 주목할 만한 에세이 [끈적끈적한 다공성 :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증언하기]에서 유사한 혼합을 포착한다. 그녀는 바람, 비, 홍수, 살, 인종주의, 정치, 심리학, 수문학, 가난, 그리고 폴리염화비닐PVCs이 뒤섞이며 혼합되듯이, 허리케인 카트리나를 "사회적 실천과 자연 현상" 양자의 "복합적 상호작용"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상호작용주의 존재론interactionist ontology은 ‘끈적끈적한 다공성‘이라는 개념화로 요약된다. "살-내 살과 세계 살의 끈적끈적한다공성이 [존재한다.] 이 다공성은 우리가 세계에 속해 있고, 세계를 발생시키고, 세계 안에 존재하게 하는 경첩이다. 그것이 상호작용을 발생시키는 얇은 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끈적거린다고 부른다. 이 박막membrane들은 피부와 살, 예단과 상징적인 상상물, 습관과 신체화와 같은 다양한 유형을 지닌다. - P49

로레인 코드가 아름답고 정교하게 서술한 ‘생태적 주체‘라는 개념에 가깝다. 그것은 "자신의 인식론적-도덕적-정치적 활동에 대한 책임을 고백하고 그러한 책임을 떠안기 위해 집합적 · 개인적 입장을 표명하는 주체를 말한다. 코드가 옹호하는 ‘생태적 사유에 따르면, "우리의 연구는 지식이 생산되고 논의되며 유포되는 장소인 ‘저 아래 땅에 뿌리를 내려야 한다. - P55

내가 이 책 전체를 통해 주장하는 바는 자아의 구성 물질을 더 광범 - P62

위한 환경과 상호연결로 이해함으로써 주체성 개념에 일대 전환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질적 자아는 복합적인 경제적·정치적·문화적·과학적·물질적인 연결망과 얽힐 수밖에 없기에, 외관상 안과 밖의 경계가 분명했던 인간 주체는, 이제 불확실성의 소용돌이에 내던져진 자신을 발견한다. 과거에 단 한 번도 윤리적 또는 정치적 문제와 연관이없었던 실천과 행동이 별안간 눈앞에 놓인 위기들의 구성 요소가 된 것이다. 이것은 전지구적 기후 변화의 사례에서 특히 명백하게 나타난다. - P6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주 친밀한 폭력 - 여성주의와 가정 폭력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6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은 읽지 않으려 했다. 아니, 정희진 선생님의 책 중에 가장 마지막으로, 더 이상 읽을 책이 없을 때 읽으려 했다. 도서관에서도 여러 번 마주쳤고, 알라딘 중고서점에서도 몇 번인가 사려다 그만 두었다. 12월에 다녀온 정희진 선생님의 북토크에서 선생님께서 본인의 책 중 입문서로 가장 추천하는 책이다. 가장 만족스러운 책이다(정확한 워딩은 생각나지 않으나 이런 취지로 말씀하신 것으로 기억된다)라고 말씀하시지 않았다면. 그 말을 듣고서야 이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을 사면 바로 읽지 않을 것 같아서 도서관에서 빌려왔다.



제목의 친밀한폭력이라는 상반된, 어울리지 않는 단어의 조합. 그러나 아내 폭력의 현실을 이렇게 잘 나타낼 수 있는 제목이 있을까? 가정이라는 친밀한 공간에서(누구에게?), 누구나 편안함을 누리고(누가?) 사랑을 주고받고(누군 주고 누군 받고?) 이해 받아야 할 것 같은 친밀한 공간에서, 남들에게 말하지 못하고 말해도 이해 받지 못하고 흔한 부부간의 갈등이나 다툼으로 가볍게 생각하고,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는 폭력, 일방이 다른 일방에게 행하는 폭력이 만연해 있다는 것을.


리처드 겔즈의 연구에 따르면, 5년간 미국에서아내 폭력으로 사망한 여성의 수는 베트남 전쟁에서 사망한 미국인의 수와 비슷하며 미국의 소아마비 환자 모금 본부(March of Dimes)에 의하면 임신중 남편의 구타가 기형과 유아 사망의 주 원인이라고 보고하고 있다. 일본 정부의 조사 결과 기혼 여성의 5퍼센트는아내 폭력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낀다고 호소하였다. - P38



이 책을 읽으며 경제력에 대해 착각 내지 오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들이 경제력이 있다면 가정폭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전업주부로 살다보니 경제력이 없어 폭력을 견디고 있는 많은 사람들. 경제력이 있었다면 남편의 폭력으로부터 벗어났을 여성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책에 있는 사례 중에서 많은 경우 남성이 무직이거나 돈을 벌어도 돈을 주지 않고 오히려 여성이 돈을 벌어 남편과 가정을 부양하는 경우가 많다. 왜 그녀들은 지옥에서 탈출하지 않는가? 어린 자식 때문일 수도 있고, 여성 스스로 가정은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고, 이혼녀로 낙인 찍히는 것이 더 두려운 사람도 있지만, 또 다른 이유 중에 하나는 공포.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거나 도망치다가 남편에 의해 죽을 수도 있다는 공포’. 폭력은 예측가능한 고통이지만, 언제 남편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예측 불가능한 공포그래서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 도망쳐 나왔지만 알 수 없는 불안공포속에서 살기보다 예측가능한 고통속으로 들어간다.


사례의 폭력 남편들은 자신의 남자다움을 위해 사회적으로 성공하거나 돈을 벌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본 연구의 50사례 49명의 남편 중 약 40퍼센트인 19사례가 무직이었다. 직업이 있다 해도 부인과 함께 자영업을 하는 경우는 대부분 아내 혼자 일했다. 이 문제로 아내가 불만스러워하거나 항의하면 남편은 폭력으로 대응한다. 이는 현대 가부장적 자본주의 사회를 유지하는 근본 원리인 성별 분업 논리가 실제로는 분업이 아니라 협박과 강제 속에서 여성의 이중 노동에 의해 유지된다는 것을 보여준다.(실제로 여성은 세계 공식 노동력의 3분의 1, 비공식 노동력의 5분의 4를 담당하면서, 전 세계수입의 10퍼센트만을 받으며 세계 재산의 1퍼센트만을 소유한다.) - P158



이 책의 주장은 폭력이 문제야가 아니라 가족 내 성 역할 규범을 통해 아내 폭력이 정상화, 사적화 되는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글의 초점은 가족이라기보다 폭력이다. 즉 본 연구가 밝히고자 한 것은 가족이 해체되어야 하는 이유가 아니라, ‘아내 폭력이 재생산되는 구조에 관한 것이었다. 이 연구는 가족 관계에서는 폭력이 발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가족에서는 폭력이 발생할 리가 없다는 담론에 대한 비판이다

남성과 여성의 관계를 포함하여 모든 인간 관계가 권력 관계라면, 어떤 의미에서 폭력은 불가피한 인간 문제이다. 나의 관심은 부부 간에 폭력이 발생한다는 사실이 아니라 부부 간에는 폭력이 발생할 리 없다고 믿게 하는 사회적 권력은 무엇인가에 관한 것이었다. ‘아내 폭력이 문제화되어야 하는 이유는 폭력이 가족 관계에서 발생해서라기보다는 가족 내 성 역할 규범을 통해 폭력이 정상화, 사적화(私的化, privatization)되기 때문이다. - P250



아직도 가정 폭력, 데이트 폭력을 가벼이 생각하는 세상. 이 책의 초판으로부터 20년 이상 지난 지금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북어 운운하는 속담은 퇴출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맘충과 된장녀라 불리는 세상은 얼마나 달라졌는가?




댓글(2)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4-01-27 2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4-01-28 0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공포의 권력 동문선 문예신서 116
줄리아 크리스테바 지음, 서민원 옮김 / 동문선 / 2001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드디어 다 보았다! 글자를 보았을 뿐이다. 역자 서문이 과장이 아니다. 최소한의 지식이 없어서 단 한 발짝도 전진할 수 없었다. 죽기 전에 크리스테바 언니를 (책으로) 직접 만날 일이 있을까. 다른 책의 인용이나 해석의 간접적 만남만 가능할 듯. 아브젝시옹과 오염과 혐오와 고통과 공포만 남았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1-27 2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 고생하셨습니다. 저는 아직 더 읽어야 하지만 저도 다 읽으면 별 셋 줄것 같습니다. ㅠㅠ 정말 고생하셨어요, 햇살과함께 님 ㅠㅠ 그리고 진심으로 완독 축하합니다!!

햇살과함께 2024-01-28 07:37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도 완독 축하합니다!
2월 책은 재미있기를! 이제 구매해야겠네요 ㅎ
 

6장 - 11장

<밤의 끝으로의 여행> 셀린

6장 셀린 - 희극 배우도, 순교자도 아닌

한 문장의 리듬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그 문장 자체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니체의 <선악의 피안》에서 - P201

7장 고통 / 공포

친족이건 그렇지 않건간에 인간이란 결국에는 썩은 고깃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밤의 끝으로의 여행> 셀린 - P218

공포와 고통, 그리고 그것들의 아브젝시옹으로의 집중이야말로 셀린의 글쓰기가 지닌 묵시록적인 세계관에 가장 적합한 지적인 것으로 보인다. - P234

8장 모든 영원성을 망쳐 놓는 여성들…

삶을 주는 자이면서 삶을 빼앗는 자, 이렇듯 셀린의 어머니는 또한 아름다움과 죽음이 결합하는 야누스이다. 아름다움과 죽음의 결합이야말로 글쓰기의 조건이다. 왜냐하면 한정된 삶이 자신의 말로 된 레이스의 추가 부분의 발견을 갈망하기 때문이며, 또한 삶자체가 인간의 죽음이라는 삶의 가차없는 종말과 승화 작용의 덧없음을 표시하는 검은 힘이기 때문이다. - P244

이같은 아버지 살해 이야기는 페르디낭이 천장을 바라보며 몽상하던 지극히 개인적인 꿈속에서 찾아내려 하는 이야기가 아닐까.

음유 시인 티보의 모습이 보인다………… 그는 언제나 돈이 필요했던것이다……… 그는 아버지 조아드를 죽일 것이다………… 어쨌든 이 세상에서 아버지 하나가 줄어드는 셈이 되니까……… 천장에서 기마 시합이 벌어지는 것이 보인다……… 창을 들고 싸우는 기사의 모습이 보인다…………

이 광란의 열쇠가 아버지 살해 라면 아버지 살해는 단지 죄책감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제동이 걸리지 않는 어떠한 영향력이나 통제로부터도 자유로운 여성 앞에서의 무시무시한 공포와연결된다. 셀린에게서 나타난 아브젝시옹의 원천 중의 하나는 이같은 아버지의 몰락이다.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괴물 같은 아들은, 셀린의 눈에는 유일한 진실로 보이는 무한성이 고갈된 세상에 대해 아버지의 권력을 빼앗기에 충분한 만큼의 권력을 가장하고 나타난다. 아들이자 작가는 오귀스트가 질병에까지 이르는 비명·악몽 · 기진맥진·착란, 머리 주변의 찬 수건의 상태로 이해되도록 한다. 그리고 독자는 이같은 지옥이 페르디낭에게도 공통적이라는 사실을 설명하지 않아도 알고 있다. 한편 처음부터 아버지의 모습은 어린아이와 우스꽝스런 남자다움이 혼합되어 그려진다. - P259

9장 유대인이 되든가, 죽든가

이같은 논리적 균형을 가로질러 충격을 주는 진실의 말은 밝혀지고야 만다. 그것이 펼쳐지는 장은 사회학적이거나 정치적인 경험의 장과는 다르다. 우리는 그 속에서 이성이 통합하려 하고 일체시키려 하며 전체화시키려 하는 순간부터 환상과 착란으로 변할 뿐인, 무엇도 대신할 수 없는 생생한 기록을 발견하는 것이다. 부정주의처럼 담화를 짓누르는 무정부주의나 허무주의는 이제 전복되어 하나의 대상으로 나타난다. 증오하는 동시에 욕망하는 위협과 공격성, 선망하면서 동시에 혐오하는 대상으로.
그 대상은 바로 유대인이다. 그들을 통해서 비로소 모든 모순들이 풀리고 설명되는, 이를테면 유대인이야말로 모든 사고의 중심지인 것이다. 우리는 셀린의 팜플렛을 구성하는 공통된 두 개의 특징을 밝혀냄으로써 셀린식 담화의 체계 속에서 유대인의 역할을 보다 더 명료하게 관조해 낼 수 있을 것이다. - P270

유대인이란 허섭스레기와 욕망의 대상, 시체와 삶, 대변과 쾌락, 살해의 공격성과 가장 승화된 권력 사이의 합접물인 것이다. "내가 무엇을 아는가?" "유대인이 되든가, 죽든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사실만이 분명해진다……… 이제 본능이 명하는 대로 곁눈질하지 말고 앞으로! 유대인은 지배자로 승격되고 여성이 된다. 양가적이고 자기와 타자, 주체와 객체, 좀더 깊이는 안과 밖 사이의 완고한 한계를 잃어버린경계선, 변질된 지배자로서의 여성 말이다. 공포와 매혹의 대상, 아브젝트 자체인 여성이 되는 것이다. 유대인은 아브젝트하다. 더럽게 오염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런 그와 동일시하려는 것이다. 그를 욕망하는 이같은 치명적인 형제애는 한계를 잃게 하고, 나를 아브젝시옹으로 축소시켜 대변, 여성, 수동적인 부패한 육신으로 만든다. 그래서 ‘셀린, 이 저열한 자식‘이 되는 것이다. - P28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4장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
5장 …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여

4장 <성서> 속의 혐오에 대한 기호학

《성서》에 나타나는 부정(不淨)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흐름으로나누어진다. 첫번째는 로버트슨 스미스(《셈족 종교에 관한 강의》,1889)의 해석으로서, 부정이란 신의 뜻에 위반하는 것이기 때문에《성서》의 부정을 운명적인 의지에 복종하는 유대 유일 신앙에 나타나는 내면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입장이다. 따라서 부정은 신성함과는 이질적인 악마적인 힘이라기보다는, 그것이 신의 의지에 복종한다는 관점에서 터부에 대한 일종의 중화 작용(더러움에 대한의식 고유의 것)이다.
바루크 A. 레빈‘에 따른 또 하나의 해석은 부정은 성스러움을 위협하는 악마적인 힘의 지표이다. 그에게 부정함은 성스러움과 독립해서 작용하는 것으로서 악의 정신의 자율적인 힘과 같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립되는 두 해석을 통해, 사실은 부정에 관련된 《성서》의 사상이 복잡한 역동성을 지니고 있음을 강조코자 한다. - P143

처음부터 《성서》의 텍스트는 인간과 신의 차이가 그 음식물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 P149

혐오의 대상(l‘abominé)이란 결국 성스러움에 대한 맞장구이다. 동시에 성스러움의 고갈, 즉 종말이다. - P169

5장 …너,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자여

더러움은 내재화 운동을 통해 《성서》 속에 이미 내재하는 상징성이나 도덕률에 관련된 죄의식과 혼동된다. 그리고 이러한 물질적인 가증함과 보다 대상 지향적인 융합으로부터 새로운 하나의범주가 만들어진다. 그것은 죄이다. 삼켜지고 흡수되었다고 말할수 있을 그리스도교의 더러움은 이교주의의 앙갚음이자 모성적 원칙과의 화해이다. 프로이트는 《모세와 유일 신앙》에서 그리스도교란 이교주의와 유대적 유일 신앙 사이의 협약이라고 밝히면서 그같은 사실을 강조한다. 《성서》의 논리는 전복되었음에도 불구하고《성서》의 기만적인 논리는 밖이 아니라 안에 있다) 그대로 지속된다. 우리는 《성서》의 논리가 지속됨을 차이화의 과정·분리·분할의 작용들 속에서 발견한다. - P179

그리스도만이 이같은 이질성을 성공시켰으므로 죄 없는 육체이다. 신성한 심판에 거역해서 안으로 부정한 자들은 그같은 잘못을 고백하고 예수가 성취한 승화에 가까이 가야 한다. 그리스도교의 존재가 환상으로의 도피임이 틀림없음에도 불구하고, 적어도 범우주적 신앙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신도들이 자신의 죄를 고백하기만 하면 각자가 유일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승천을 갈망해도 된다는 사실에서 기인한다. "너희 죄는 용서받았느니라." - P183


댓글(3)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락방 2024-01-25 08: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성서 부분 읽었어요. 이 책에서 저는 현재까지 성서 부분이 제일 재미있어요. 그렇다고 이해를 하는 건 아니지만 좀 그랬어요.

햇살과함께 2024-01-25 08:51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 성경 읽기도 하셨으니!
저도 그나마 앞 장들보다는 성경 문구는 조금 익숙한 문장들이라..
그러나 정신을 똑바로 차려도 이해가 안되는 마당에 감기약 먹고 몽롱한 상태로 비몽사몽...
자꾸 남은 날과 남은 페이지를 비교하고요 ㅎㅎ

다락방 2024-01-25 11:28   좋아요 1 | URL
저도 오늘 뒤에 얼만큼 남았나 안읽어도 되는 부분은 얼마나 되나 한 번 들춰봤어요. ㅋㅋ 같은 마음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