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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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라는 불행

사실 이 책은 많이 힘겨웠다. 서른 편 가까운 에세이라고는 하지만 이십년 넘는 작가생활 전반에 걸친 자서전의 느낌이 나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에 강렬히 끌렸던 이유는 아마도 '그는 왜 쓰는 지'를 통해 '나는 왜 쓰는 지'를 한번 정리해보고 싶은 생각에서였다.(많은 분들이 나와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 지) 그런데 책을 덮고 난 지금 오히려 정리가 안되는 심정이 퍽이나 당혹스럽다. 결코 한눈에 요약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비록 동네수준의 서평자지만 글(서평)을 쓰면서도 왜 쓰는 지를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보지 않았다. 그냥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되었다가 맞을 것이다. 심지어는 서평도 (그가 말하는)글인가? 하는 오만한 생각도 했었다. 물론, 이 질문도 그동안의 서평생활(?)을 통해 나름의 성취와 발전이 있었기에 도대체 '나는 왜 서평을 쓰는가'에 이제야 봉착하게 된 새로운 난국으로서의 자기검열의 한 단계임을 모르지 않는다. 즉, 왜 처음에 그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는 지가 아니라 하다 보니 왜 계속 그러는 것 같으냐에 대한 사건이 아닌 현상에 대한 질문인 것이다. 자기가 하고 있는 것이니 그 이유를 말하기 쉽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 질문은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게 '나는 왜 사는지' 적어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문제였다. 이는 결국 '그동안 왜 살았는 지'와 '앞으로 어떻게 살 지'에 관한 질문과 무관하지 않지 않은가.

대부분 그림을 그리거나 노래를 하는 사람들에게 왜 그리는 지, 왜 노래하는 지를 물어보면 당연히 그림을 잘 그렸고 노래를 잘했을 거라는 전제를 공유한 상태에서 답을 바라게 된다. 답을 들어보지 않아도 우리는 대부분 자신의 재능을 발견했기에 예술을 향한 욕구때문이었을 것이라 예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은 의심없이 순차적으로 당연해 보인다.(노래와 그림에 소질도 없으면서 노래하고 그림그리는 사람은 글에 소질도 없으면서 글 쓰는 사람보다 적지 않을까) 예술가로서 성공여부를 떠나 타고난 재능과 필연적인 욕구는 바로 자신이 노래하고 그림을 그리는 가장 일차적인 요인이 될 지어다. 그런데 글쓰는 사람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는 생각이다. 당신은 왜 쓰는지 물어보면 재능과 욕구라는 답으로는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다. 질문을 던진 자나 대답하는 자 모두 무언가 진짜 이유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무언가 더 구체적이고 더 감동적인 사연이 있을 것 같은...그것은 아마도 글을 쓴다는 것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 결코 근사하거나 편하고 즐거운 방법이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보통사람들의 궁금증 일 것이다. 확실히 글을 안 쓰는 것은 글을 쓰는 것보다 편하니 말이다. 그런데 그들은 안 쓰는게 더 불편해서 덜 불편한 쪽을 택하는 사람들 아닐까.

노래를 잘하고 그림을 잘 그리는 것이 재능이듯 글을 잘 쓰는 것도 분명 재능인데 사람들은 노래나 그림의 재능보다 글의 재능을 가진 자가 무언가 생각이 올바를 것이라 여기고 거짓이 덜할 것이라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는 글이 곧 그의 생각이라 믿고 글로 표현된 생각은 적어도 작가의 순연한 진심이라 믿고 싶은 까닭이다. 노래하는 자와 그림을 그리는 자는 뒤에서 욕을 하며 거짓을 일삼아도 작품이 훌륭하면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여기지만 글쓰는 자는 자신의 마음을 속여 가며 진실을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건 용서받지 못할 배신이자 죄악인 것이다. 작가들에게 요구하는 이 시대의 책무는 언제나 동시대의 화가와 가수에게보다 높고 막중했다. 일상에선 웃고 술마시고 춤추다가도 노래를 할 땐 세상 모든 이별을 다 겪어낸 것처럼 노래하는 가수는 이해하지만 해외의 트렌드를 빌려 표절의 수위를 넘나드는 작곡가도 이해해주려 하지만 남의 생각을 자신의 것처럼 꾸미거나 자신의 견해도 아니면서 거짓으로 결론을 주장하는 작가들에겐 절대 용서하고 싶지 않음이다. 가수와 화가는 몇 번의 결혼과 이혼, 재혼도 사생활이라는 똘레랑스를 우아하게 적용해주고 싶지만 몇해 전에 죽은 아내를 그리는 절절한 시로 유명세를 타 놓고선 돈 좀 벌었다고 바로 재혼하는 시인은 온 마음으로 질책한다. 등따숩고 배부르면 글이 안나오느니 우리는 광고에 출연해 유명해진 작가에겐 더 이상의 피같은 소설을 기대하지 않는다. 상처한 시인은 재혼하면 안되고 가난했던 소설가는 부자가 되면 안된다. 애절한 시와 고통스런 소설에의 감동이 줄어들 것을 염려한 독자된 이기심 때문이기도 하고 실제로 작가들의 부와 작품에 대한 감동은 반비례하는 경향이 있다. 문학은 상처와 슬픔의 축적이지 영광과 기쁨의 축적은 아니기 때문이다. 위선과 추악한 욕심과 세상 모든 거짓을 노래하고 그림그리는 예술가가 있듯 작가도 자신의 재능인 글을 가지고 위선하고 거짓하면 안되는 일일까. 절대, 안된다. 작가는 예술과 윤리의 영역이 분리되도록 허락된 사람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정치는? 경제는? 과학과 사회는? 작가는 윤리든 정치든 경제든 과학이든 사회든 그것들을 글쓰는 예술로 말해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것도 아주 진심으로 진실되게.

그래서 나는 문학하는 사람들을 싫어했고 문학을 하고자 하지 않았다. 작가들이란 인생에 패배해놓고선 어떻게든 문학으로 이것도 승리라 말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져놓고 이겼다 말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했다. 그래놓고선 자신들은 세상에서 굉장히도 진실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적어도 글을 쓰지 않는 사람들에 비해서) 현실에선 거짓을 일삼아 놓고선 글로는 거짓했음을 고백하여 마치 진실한 삶을 추구해온 것처럼 자신을 미화하는 습관도 있다. 평일 내내 욕하다가 주일에 교회가서 참회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진실해야 하기 때문인 것이지 진실한 것과는 다른 문제인데 작가에 대한 기대치를 곧 자신이 추구하는 인격치와 동일시하여 고매한 인격자로 살아가는 척을 하는 작가들도 있다는 이야기다. 살면서 진실만을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웃기고 힘든 일인지 알게 될수록 작가를 희망할 자신이 없었다. 재능에 대한 열등감보다는 작가로서의 책임을 짊어지고 싶지 않았고 차라리 내 돈내고 산 책 한권과 그 작가를 비판하는 쪽이 더 속편한 입장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작품으로서의 성공과 인격으로서의 성공이 합체된 작가는 언제나 경외감의 대상이었다. 그는 작가라는 예술을 했다기 보다 인간이라는 수행을 한 것이기 때문일 터이다. 하지만 문학하는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하여 진실하고자하는 노력을 문학하지 않는 사람들 보다 많이 한다는 점에 있어서 다른 예술분야보다 더 인정받아야 마땅하다 생각한다.

조지 오웰은 바로 이 두 가지를 누구보다도 동일시한 작가로서 그 최대치에 근접하려 노력한 사람이라는 생각이다. 본인도 말했듯이 위선을 발견해 내는 재능을 일찌감치 타고난 덕에 일상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 자신이 마주한 세상의 온갖 위선이라 하면 이미 오래전 죽은 작가라 할 지라도 발견할 수밖에 없었고 알게 된 이상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선에 둔감해지는 것이 살아가는 방편이 됨을 모르지 않는 나이기에 그의 인생은 누구보다 피곤하고 외로왔을 것이라는 연민이 떠나질 않았다. 어떤 작가가 안 피곤하고 안 외로울까마는 그의 글은 적어도 위선에 대해선 연구와 성과의 깊이가 상당히 전문적이다. 환자입장에서 밝혀내는 논리가 간편한 X레이 수준은 아닌 것. 각 부위별 CT단층 촬영및 MRI촬영이 반복되는 정밀검사의 영역인 것이다. 나도 대충 X레이 사진까지는 그동안 들어온 지식으로 이해, 판독이 가능하다 할 것이다. 하지만 정밀검사는 설명을 듣고 있으면서도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린다. 아니 시간을 들여 꼼꼼히 확인하고 싶다. 나는 그의 소설을 한편도 읽지 않았던 것이 살면서 한번도 부끄러웠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 소설도 안 읽어 놓고 에세이집을 가지고 이런 평가를 하는 것은 상당히 부끄럽다. 고개를 들 수 없지만 어쩌겠는가. 나는 일개 서평자이고 서평자를 택한 나로선 작가와 작품을 말할 수 있는 권리에 편승한 것이니 다만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미사여구로 감동의 문장을 남발하는 글만은 쓰지 않겠다는 초보수준의 다짐을 앞세우기로 하겠다.

양심과 죄의식의 축적

아마도 책을 읽으며 근자에 이렇게 밑줄을 그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다. 그만큼 한줄 한줄이 내 가슴을 찌르기도 했고 머리가 번쩍하고 정신이 들기도 했다. 우선 그의 문장은 절대 감성과 이성 그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아 자로잰 듯 공평한 느낌이다. 물론 이 느낌은 굳이 분류하자면 이성에 가깝기는 하다. 저널리스트로서의 날카롭고 지적인 면모가 그의 특성이자 매력이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문학이 '상처와 슬픔'의 축적이라 한다면(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라 찾아보니 문학이 슬픔의 축적이라 한 사람은 최승자 시인이다) 조지 오웰의 글은 '양심과 죄의식'의 축적이라 느껴진다. 그런데 이 축적된 글을 마주한 나로서는 그의 양심과 죄의식이 억울하게만 느껴진다. 즉, 그다지 작가로서 혹은 선진국이라는 영국시민으로서 크게 잘못하며 살아온 것 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 시대의 독일이나 일본 작가였다면 모를까 하는 단순한 생각이 내 수준이었던 것이다. 우리시대에도 그랬고 작가들은 유난히도 폐병으로 생을 마감하는 경우가 많은데 숨쉬기 힘들다는 것은 정신적으로도 많은 것을 상징한다고 생각한다. 제대로 숨을 쉬지 못하였기 때문에 숨쉬기 힘든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전 및 환경적 요인이나 생활수준, 작가의 생활방식등이 폐병과 쉽게 연결되곤 하지만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은 결국 자신을 옥죄는 무엇이 병을 초래하는 것이 아닐까. 조지 오웰의 글은 거의 전편이 자신을 옥죄던 세상의 무엇인가에 저항하는 방편으로 느껴진다. 그 거대한 세상의 중심엔 영국이라는 위선과 전쟁이라는 과실과 작가라는 책임이 사이좋게 연대를 이루고 있었다.

1. 영국에서 작가하기

스물아홉편의 글 중에 가장 많은 분량을 차지하는 세편의 글에 공통점이 있다. 바로 자신이 태어난 조국 영국이라는 나라에 대한 신랄한 분석과 비난이다. 신사의 나라 영국이 물론 미국이나 독일 심지어는 일본보다도 위선적이라는 생각을 안해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렇게 뼛속까지 자국의 국체(國體)를 꼬집는 글은 만나보지 못했던 터라 같은 시기 동양의 일본으로부터 그가 죄책감을 느꼈다는 식민지처지였던 우리로선 오히려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영국, 당신의 영국>, <민족주의 비망록>, <정말, 정말 좋았지> 이 세편을 읽다보면 영국은 참 형편없는 나라였구나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는데 특히 오웰이 여덟살 때부터 다녔다는 사립학교 시절의 경험을 그려낸 <정말, 정말 좋았지>는 한때 아이를 데리고 영국으로 가서 교육을 시킬까도 진지하게 고민했던 학부모였기에 내 자신에게 화가 나서 미치는 줄 알았다. 이 글은 오웰이 어떻게 해서 최초 죄의식을 가지게 되었고 그것이 누구를 향한 것이었는지 깨닫게 되는 과정이라 할 수 있다. 쓰여진 연도로 보면 그의 작가생활 후반부에(1947) 속하지만 내용상(1911-1916) 전기로 본다면 맨 앞부분에 위치해야 할 글이다. 이 글을 읽고 비로소 오웰의 대책없는 죄의식의 뿌리를 찾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귀족이나 백만장자, 혹은 중산층 이상의 자녀들과 같이 학교생활을 하면서 철저한 속물근성의 교장과 그의 부인에게 생의 패배감을 부당하게 세뇌당하게 되는데 겉으로는 고마워해야 하지만 오웰의 마음에 싹튼 증오는 평생을 떨쳐버릴 수 없는 죄의식으로 발전한다. 결국 그 시기에 지식인이 얼마나 지적으로 속물적일 수 있는지 몸소 배우고 체험한 오웰은 영국 상류층과 중산층 특유의 결함을 이 기숙학교에서의 뿌리깊고도 잘못된 관행에서 시작한다고 결론짓는다. 이 글은 자신의 어린 시절 내면의 상처를 가장 감성적으로 표현했지만 또 가장 지적으로 길게 반항한 글이었다. 옳은 것과 그른 것,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강자와 약자, 가진 자와 못가진 자에 대한 기준이 늘 일치하지 않는 다는 것으로부터 자신도 죄를 지을 수 있음을, 살아남는 생존본능도 범죄가 될 수 있음을 깨닫는다. 그러니까 그는 자의식이 형성될 시기부터 죄의식 때문에 자신을 떳떳한 사람으로 성공할 사람으로 생각지 않은 것이다. 비록 실패 할 것이 뻔하고 옳은 일을 하지 않는 자신이지만 그 안에서 최선을 다하고 행복하고 싶었기 때문에 나름의 도덕과 양심을 지키기 위해 글을 쓴 것이었다.

그가 애국과 민족, 그리고 영국인의 국민성에 대해 이야기 할 때는 언제나 히틀러를 말할 때보다 더 날카롭다. 영국을 대표하는 작가로서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 생각한 듯하다. 영국국민은 누구보다도 애국적인데 이 심성을 예술적 재능은 없으면서 꽃에는 열렬히 반응하는 이중적태도로 비유해 설명한다. 전쟁과 군국주의를 가장 혐오하는 것 같아도 실은 한때 지구상의 1/4의 영토를 점령한 식민지 지배국가임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렇게 위선이 가장 강력한 안전장치가 되어온 영국에서 문학을 대표하는 세익스피어를 비난하는 톨스토이를 반박하는 그 역시도 객관을 앞세운 애국자였음을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영국과 영국인은 사악하지만 또 완전히 사악하지만은 않아서 더 사악하다는 결론을 내리며 그러한 영국에서 자라온 자신 역시 좌파 지식인과 작가를 분리 할 수 없듯이 자신의 글에 정치성이 결여될 수 없음을 불가분의 모순처럼 역설하고 있다.

작가가 정치와 관련있는 글을 어떻게 쓰는지에 관한 본보기는 <민족주의 비망록>이 대변해주는데 여기서 그는 애국주의와 민족주의의 다름을, 관념의 실체가 아닌 부정적인 대상을 지칭하는 습성으로서의 민족주의에 대한 개념을 설파하며 영국이 이 개념을 어떻게 이용해왔는지 차근차근 짚어본다. 영국은 공산주의든 민주주의든 이 민족주의적 충심을 개입시켜 그때그때 애국을 발휘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오웰은 민족주의자가 자기편이 저지른 잔학행위를 반대하지 않으며 뻔히 일어난 객관적 사실을 무시할 수 있으며 사실이 알려져 괴로운 것 보다는 모름으로써 인정하지 않는 편을 택한다는 것이다. 인종차별이나 평화주의, 종교분쟁, 공산주의 까지도 민족주의가 전이된 것이며 이것은 모두 도덕을 앞서는 기질 혹은 습성이라는 것이다. 오웰은 이 습성을 적나라하게 꼬집으면서도 지식인으로서의 작가는 사실을 그대로 받아 들이는 태도를 가지고 정치행동 이전에 자신의 사고과정을 오염시키지 말라고 충고한다. 그러한 도덕적 노력이야 말로 정치에 개입할 수밖에 없는 작가에게 가장 필요한 소양이고 오웰은 이러한 글을 쓰면서 오히려 흔들릴수 있었던 자신의 의지를 다지는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2. 전쟁에도 작가하기

오웰은 47세라는 길지 않은 생애에 이십여 년의 작가생활을 하면서 시대가 가진 운명인 전쟁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본 적이 없었다. 그가 그 어렵다는 사립학교를 졸업하고 어떤 반감으로 '인도 제국경찰'에 지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대학이라는 성공을 향하지 않고 인도라는 동양을 택한 것은 일종의 양심돌파구였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막연한 양심의 가책을 해결하려다 되려 더 지독하고 구체적인 양심만 짊어지고 온 경우가 된 것은 아니었을까. 작가활동을 하고 있던 중에도 파시즘에 맞서기 위해 달려간 스페인 전장은 마찬가지로 둥그런 양심을 보상받기 보다는 더욱 전체주의에 맞서는 네모진 양심을 길러낸 것은 아니었을까. 스페인 내전 후에도 그는 계속되는 경제불안과 2차 대전의 발발로 정신적인 무력감과 육체적인 병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처럼 양심을 털어내려 할수록 얄궂게도 더욱 그 배로 들러 붙는 것, 오웰에게 있어 양심은 혹 떼려다 더 붙이는 결과가 반복됨을 알 수 있는데 이것은 결국 작가된 운명으로 벗어날 수 없는 시지프스의 형벌과도 같지 않았을까 싶다.

오웰은 인도경찰 근무시 바로 앞에 걸어가는 사형수의 갈색등을 보고 양팔이 결박된 그 와중에도 물웅덩이를 피하느라 살짝 옆으로 비껴가는 그를 보고 건강하고 의식있는 한 사람의 목숨줄을 끊어버리는 일의 부당함에 새삼 전율한다. 제국주의자를 증오하는 인도사람들의 눈빛에 못 이겨 마을에 뛰어든 코끼리를 어쩔 수 없이 죽여버린 스스로에 대한 자괴감에 몸부린 친다. 그는 인도경찰 시절 백인의 동양지배가 부질없음을 폭력을 휘두르는 건 백인이지만 결국 폭력적이미지에 걸맞게 예상하는 대로 행동해야만 하는 가식적 꼭두각시에 불과하다는 깨우침을 얻게 된다. 스페인 내전에 대한 진실보도를 하지 않는 자국에 대해 파시스트 선전에 이용되지 않기를 바라는 지식인들의 속내를 비난하며 영국은 진상보도를 하지 않았기에 파시즘을 제대로 알 기회를 부여받지 못했으며 결국 자신도 그 때문에 내전에서 파시스트를 반대하는 적들에게 총상을 입었다는 논리를 끌어 낸다. 파시즘에 맞서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명분으로 참가했던 혁명군 전사로서의 기억이라곤 동물적 허기와 온갖 악취, 수면부족, 얼음과 찬바람이 전부라고 말한다. 파시스트를 쏘러간 오웰은 눈앞에서 바지를 추스르는 인간을 보고 자신과 다를 바 없는 그를 쏘지 못했으며 남루하다는 이유로 도둑으로 몰린 인도병의 눈빛도 쉽게 잊지 못한다. 위병소에서 자신의 손을 잡아준 유럽노동계층 이탈리아 민병대원의 인간다움 삶을 성취하고자 했던 온기도 잊지 못한다.

전쟁이 반복되는 시대에 그는 인간다운 삶과 진실로서의 역사를 증언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것은 희망이 아닌 절망을 말함으로써 희망을 찾으려는 욕구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변절자로서의 지식인과 역사를 진실로 기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절망을 이겨보려 글을 써온 것은 아닐까. 그 자신도 변절하지 않기 위해 진실로서의 역사만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의 정치와 과학과 예술과 전쟁을 기록했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은 끝까지 자신의 믿음을 포기하지 않는 결과로서 작가의 삶을 살게 한 것은 아닐까.

3. 글쓰며 작가하기

오웰은 서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도 있으며 방송국에서 라디오 프로듀서로도 활동한 경력이 있다. 문학잡지의 편집장을 맡으면서 오랜 세월 서평을 써 온 것으로 보아 언론인이나 자신을 비롯해 주변에 책 좀 읽고 글 좀 쓰는 이른바 지식인들에 대한 견해를 표명할 기회가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아니 늘 세상을 향해 떠들고 소리치는 사람들의 행태와 심리에 대해 불만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작가된 양심이라는 것은 과거를 밝히는 의미도 있지만 애초부터 잘못도 하지 않은 무고한 사람들에게 지워지는 향후를 대비한 우리시대 일종의 보험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흡사 선생님이라는 직업에 가해지는 사회적 역할과도 비슷한데 작가는 진실을 모르고 있는 것도 죄가 되는게 아닐까. 나이드니 들추는 게 꼭 지혜라는 생각은 들지 않아 때로는 묻어버리는 것이 누이좋고 매부좋은 거라는 생각도 드는 게 사실이다. 오웰은 들추면서 묻어버리는 이 절묘한 테크닉을 타고난 듯 하다. 자신도 작가이면서 세상 모든 작가에게 요구하는 그의 글들이 나는 왜 그런지 철저히 작가된 슬픔이자 뼈아픈 고독으로 느껴졌다.

서평은 오웰의 생업인 동시에 작가로서의 소양을 쌓는데 큰 자양분이 되었다고 한다. <어느 서평자의 고백> 편은 어쩌면 모든 서평자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해주는 짜릿함이 컸다고 본다. 평하는 대상이 '책'이라는 문화적 무게 때문에 글을 쓴 사람이 '작가'라는 지식인이기에 감동은 커녕 욕이 나오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의 작품일지라도 어떤 다른 이유들로 솔직할 수 없는 서평자의 비애를 까발린 글이라고 할까.

실제로 전혀 그 작품과 작가에게 감흥을 느끼지 않았지만 출판사 홍보차원의 리뷰대회의 목적성에 확실히 부합해주기 위해 거짓감동을 나열하여 영예의 수상을 한 지인도 있다. 이 부분은 나 역시도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입장이라 이른바 떡밥이 걸려있거나 보상이 주어지는 서평에는 함부로 비판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어짜피 그들의 홍보목적에 이용되는 내 글에다가 솔직한 비난을 해놓고서 그들이 주는 떡밥을 기대하는 건 오히려 위선에 불과하다는 생각이다. 그래도 느끼지 않은 것은 느꼈다 말하고 싶지 않은 기본적인 양심은 있어 비록 아마추어 글쟁이지만 진실됨을 잃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이 느낀 것만 이야기하자는 최소한의 원칙이 나와 꼭 같지는 않은 사람들도 있었다. 느끼지도 않은 것을 지어내거나 느낀 것을 과장하거나 남이 느낀 것을 자신이 느낀 것에 덧대는 작자들이 그들이다. 딱 동네수준의 서평자들에게 어울릴만한 작태가 아닐까 싶은 이 광경을 지난 몇 개월, 그러니까 서평이라는 것을 써보자고 마음먹은 후 잊어먹을만 하면 보아왔다. 정식 작가들도 아니고 서평 한편으로 떼 돈버는 글쟁이도 아닌데 꼭 그렇게 까지 해야하는 가에 대한 자괴감은 서평을 쓰고 싶지 않게 만드는 일등공신이었다. 오웰은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서평은 본질적으로 사기라 지적한다. 불멸의 영혼을 하수구에 한 번에 한파인트씩 흘려 보내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나는 어느날 갑자기 서평을 쓰기 시작한 내 불쌍한 영혼을 하수구에 흘려보내지 않으려고 어떤 책도 가볍게 혹은 쉽게 혹은 막연하게, 대충 넘어가지 않았다. 그들을 향한 원망의 불똥이 우습게도 그러나 당연하게 나에게로 튄 꼴이다. 오웰처럼 말이다. 그래서 더 지독하게 파헤치고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러다보니 서평이 점점 길어지기 시작했고 내 리뷰는 내가 써놓고 보아도 심했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런 성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는지 나는 글 한 편당 떡밥이 걸리는 확률이 높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런데 응모를 했나 언제 당첨이 되었는지 모르고 넘어가는 일도 생겨 급기야 당신은 리뷰대회 수상만을 목적으로 글을 쓴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은 바이다. 아니라고 증명할 길은 별로 없어 보였고 나로선 더욱 서평을 진실하고도 성의있게 쓰는 것 외엔 달리 탈출구가 없었다. 그런 말을 들을 줄 알았다면 그동안 운좋게 리뷰대회 수상을 했을 때 좋아라도 해볼 걸 하는 후회도 들었다.(그렇게 좋지 않았던 이유는 계속해서 글을 써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한 답으로 느껴졌기에 서두에도 밝혔지만 나는 어떤 형태로도 문학을 좋아는 하지만 하고 싶지 않았던 사람으로 남고 싶었기 때문이다) 알게 모르게들 그렇게 많이 내 글을 읽는 지도 몰랐던 나는 어느덧 서평자로서의 책임이 드리우는 걸 느끼기 시작했고 결국 이런 책까지 집어들게 된 것이다.

어쨋거나 나는 오늘도 서평을 쓰고 있으며 오웰이 그랬던 것처럼 괴롭긴 해도 스스로 꽤 즐겼던 분야로서 글쓰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 나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한 강도 높은 비하가 어떤 의미에서 자신감의 표현이라 생각한다. <어떤 서평자의 고백>은 최고치의 비하를 통해 최상의 자신감을 표현한 역설의 고백으로 들린다. 왜냐하면 그는 평생 자신이 영화평론가보다는 그래도 낫다고 생각하는 그 서평을 써왔으며 그로 인해 인정받았으며 내가 보기엔 서평쓰는 방식이 곧 오웰의 글쓰는 패턴이 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자신감도 자괴스런 슬픔으로 밖에 표현할 줄 몰랐기에 (가장 잘하는 방법으로)그렇게 쓴 것뿐. 그는 최고의 서평자였음에 틀림없다.

그 외 영어권에서 언어의 타락을 부추기는 타성에 젖은 관습을 지적하는 <정치와 영어>편도 무릎을 탁탁치며 읽었다. 그가 타락한 글쓰기의 하나로 지적한 죽어가는 비유, 이른바 상투적인 관용어에 의지하는 비유와 젠 체하는 용어는 피해갈 수 없는 글쟁이들의 필요악에 가깝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시쓰는 사람들의 산문을 좋아하지 않는 편인데(어쩌면 내가 시를 못 씀에 있어 시를 쓰지 않으니 시 쓰는 사람들도 산문을 넘보지 말라는 억지도 포함한다) 그래서인지 지나친 은유자체로 문장을 완성하는 습관을 가진 류의 작가는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산문에 있어 감성과 이성을 모든 은유로 포장하는 행위는 시적부력을 이용한 반칙에 가깝다 생각하기 때문이다. 젠 체하는 용어 역시 괜스레 라틴어, 그리스어원을 찾아 집어 넣고 심리학 용어를 가져오고 누가 시키지 않아도 내 맘대로 합성어를 만들어 내는 행위를...나는 곧잘 시행해왔다. 변명을 하자면 꼭 유식해보이고자 함보다는 내 논리를 강화하기 위한 다양한 접근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이중부정으로 멋부리기, 쓸데없는 수동태의 사용, 모호한 결론내기등등 국문과 교수의 강의와도 같은 그의 글에 많은 자극을 받았다. 문득 그의 글을 읽으니 무슨 뜻인지 도무지 모르기만 하라는 뜻으로 여겨지는 많은 평론가들의 문학비평글들이 떠오르기도 했다. 오웰은 이렇게 포현된 언어가 결국은 생각을 타락시킨다고 실패자라는 기분에 마신 술이 결국 실패자를 만드는 꼴은 되지 말자고 신신 당부한다.

서평자의 입장에서 평생가도 이런 서평은 쓸 수 없겠다 싶은 절망을 안겨준 글도 있었다. <정치 대 문학: 『걸리버 여행기』에 대하여>와 <리어, 톨스토이 그리고 어릿광대> 이 두편은 걸리버 여행기를 집필한 작가 조나단 스위프트와 세익스피어를 힐난한 톨스토이에 대한 평론이다. 공정한 비판이란 이런 것이구나 싶은 글이었고 작가의 성격및 심리와 작품간의 관계를 끌어내는 그의 통찰력은 내가 읽어본 그 어떤 평론보다도 독창적이면서 치밀하고 타당했다. 위대한 작품을 써낸 작가가 꼭 위대하지 않다는 것은 알았지만 왜 그러한지 조목조목 밝혀내는 것도 놀라웠고 하지만 결국 자신이 가장 좋아하며 위대한 작품이라는 것에는 동의하고 마는 그의 결론도 뿌듯했다. 엊그제 톨스토이 100주년을 맞이한 러시아의 쓸쓸한 분위기를 전하는 기사를 보았는데 가장 영국을 대표하는 세익스피어를 폄하하며 특히 <리어왕>을 혹평하는 톨스토이를 심리적으로 공격하는 오웰의 반격은 2010년을 살고 있는 내 입장에선 어짜피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작가들의 영국대 러시아의 문학자존심 대결로 읽혀지기도 했다. 얼추 세익스피어의 폭넓은 사고력 대 톨스토이의 성인되고자 함으로 요약되는 이 재미를 나는 두어 번 읽어내려 가며 박수를 쳤다. <전쟁과 평화>와 <안나 까레리나>라도 썼으니 언급이라도 해준다는 마지막 결론은 그야말로 짜릿한 독설이었다. 나 역시 오웰이니 박수친다 아니었을까.

반가운 검열

이 책은 나로 하여금 서평을 계속 써야 하는가, 쓴다면 어떻게 써야 하는가, 문학의 길을 희망해야 하는가, 작가의 꿈을 버리지 말아야 하는가, 작가가 된다면 어떤 글을 쓸 것인가에 대한 잠시 미루어둔 의제들을 다시 꺼내어 차근차근 되돌아 보게 하였다. 그가 글을 쓰는 이유로 밝힌 것들과 나의 이유와 일치되는 것이 아무리 다시 보아도 그다지 없어 보인 다는 것이 영 서운하고 다소 충격적이기 까지 하지만 분명한건 앞으로도 글을 쓰는 행위에 자유로울 것 같지는 않다는 것. 위의 모든 고민이 해결되지 않아도 나는 계속해서 글을 쓰고 있거나 쓰려고 하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솔직히 내가 얼마간 작가로서의 소질이 있다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작가의 길을 향해야 하는 가엔 늘 동의하지 못하는 실정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도전을 유보하는 내 심리엔 재능에 대한 불신, 자신감의 결여도 있겠지만 만에 하나 작가가 된다고 하더라도 그 길이 행복할 것인가, 나는 그 고난마저도 작가로서의 운명으로 생각하고 기꺼이 미래를 내 던질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자기검열이 아직 이루어 지지 않은 탓이라 생각한다. 실은 그 중간 단계로서 안전해 보이는 서평작업을 선택한 것이었는데 이번에 보기 좋게 제대로 자기검열을 당했다는 생각이다. 그런 면에서 조지 오웰은 내게 있어 앞으로도 훌륭한 검열관이 되어 줄 것 같다.

아직은 턱없이 부족함을 안다. 그래도 나는 글쓰기가 좋고 글을 쓰고 나면 많은 것을 토해내었다는 원초적인 기쁨이 반갑다. 이제는 말하는 것보다 글로써 전달하는 것이 더 편할 때도 있다. 글을 쓰면서 가장 위로가 되는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은 탓일 게다. 아주 먼 훗날 내가 만약 '나는 왜 쓰는가'를 제목으로 책을 낼 수 있을(아니면 내가 죽어서라도 누가 내줄만큼)까. 혹시 그 정도가 된다면 여러 꼭지들 중 꼭 조지오웰의 작품과 그의 죄의식을 신랄하게 비평해 보고 싶다. 걸리버 여행기를 여섯 번 읽었다고 하니 나 또한 그의 작품을 그만큼 읽어야 할 것이다. 그 때가 된다면 지금의 나처럼 글을 계속 써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어떤 서평자에게도 번득이는 자기검열의 시간을 마련해줄 수 있을까. 나는 불행히도 부디 누군가가 나를 비평하고 내 책을 서평하는 그날이 오기를 기원한다. 나는 얼마든지 톨스토이가 되어 내 이상을 분석당할테니 당신은 오웰처럼 내 허구를 꼬집으라. 원하시면 세익스피어가 되어 드릴테니 내 언어를 마음껏 조롱하시라. 꽁꽁 숨겨진 내 열등감과 위선을 찾아내어 달라. 십년이든 백년이든 그대앞에 끝까지 살아남아 작품으로 그 생존을 증명하고 그리하여 내 이름 하나 기억되고 싶다. 그것은 내 인생 최대의 불행이겠지만 그렇기에 작가 최상의 행복일 것이다. 나는 끝내 불행으로 행복하고 싶다. 오웰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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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1-2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간혹 몇 몇 글은 쉽게 잘 안 읽혀지더라고요. 배경지식이 좀 있어야 이해할 수 있는 글이 있었고요,
그래고 이번 에세이들을 통해서 오웰의 문학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어서 좋은거 같아요.
소설을 읽기 전에 진작에 에세이들을 먼저 읽었으면 좋았을것 같다는 아쉬움도 들기도 했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한사람 2010-11-26 09:32   좋아요 0 | URL

전 이 책이 힘겨워도..읽는 내내 좋았어요
오래전 사람이라는 생각도 안들고..
영국인이라는 생각도 안들었죠^^

september 2010-11-25 19: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어째서 써야만 하는가?"

반딧불이 2011-03-13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렇게 훌륭한 글을 이제서야 읽었습니다. 아무래도 오늘 밤 잠자리는 행복하면서도 부끄럽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