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톱이 자라날 때 문학동네 청소년 4
방미진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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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이 성장을

나는 새끼손가락이 유난히 짧다. 남들은 네 번째 손가락 둘째 마디까지의 길이지만 내 경우 꼭 반 마디가 모자란다. 살면서 새끼손가락이 짧아서 불편을 겪었던 기억은 없다. 피아노를 전공한 것도 아니고 손을 사용하는 직업을 가진 적도 없으니 기껏해야 약속이나 귀지를 팔 때 등의 용도로 밖에 새끼손가락을 애용해 본 적도 없는 듯 하다. 하지만 성인이 된 후엔 손톱을 기르게 되면서 길이를 극복해볼 요량으로 다른 손톱보다 더 길게 꾸미고 다녔다. 손가락이 짧고 작으니 손톱의 크기 또한 세로로 얇아 제 손톱의 길이만큼 일대일 비율로 손톱을 길러놓고 보면 새끼손가락은 영낙없는 무기로도 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한손으로 아이를 안고 남은 손으로 마트 쇼핑비닐을 들다가 그만 새끼손가락의 그 길었던 손톱이 반 이상 뜨고 말았다. 생살이 아니고 단단한 손톱이라 아픔의 고통도 단단하리라 생각한건 큰 오산이었다. 그 후 왼쪽 새끼손가락 손톱은 한 번도 제 모양으로 자라난 적이 없었고 손톱의 색깔도 건강함을 잃었다. 애초부터 미성숙했던 취약부위가 내 신체의 위험지구가 되고나니 그 후로도 새끼손톱은 지금까지 여러 번 툭하면 같은 방법으로 손톱이 뜨게 되는 불상사를 겪고 있다. 손톱은 한번 다치면 다친 방향과 다친 흉터 그대로 회복되지 않은 채로 자라난다. 영구부패된 나무의 뿌리처럼 성장을 삐딱하게 유도한다. 그렇다고 시원하게 뽑아 버리고 다시 새 출발을 할 수도 없고 죽을 때까지 내 새끼손톱은 변형된 형태로 자라나고 깍이고 길러질 걸 생각하니 새삼 그 고집이 대단하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픔이 무디어져 끝내 무감각하게 될 뿐이지 손톱의 상흔은 계속하여 자라나는 것이었다. 이 책을 덮고 제일먼저 완치가 불가능해 영구 불안해진 내 손톱이 떠올랐다. 그리고 손톱역시 얼마나 아픔이 컸을까 내가 느끼지 못하는 지금은 다 잊어버린 상처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을까 생각하니 손톱도 엄연한 생명체였다는 깨우침이 절로 든다. 손톱은 지금 이순간도 상처위에서 자라고 있을 터인데 나는 그를 한 번도 대견하다 생각해 본적이 없다. 사람에게 있어 어떤 ‘상처’는 중단되거나 망각되지 않고 계속하여 성장하는 것은 아닐까.


            ‘상처’도 성장하면 성숙이 되는 걸까. 만약, ‘불안’이 상처라면 불안도 ‘성장’할 수 있을까?


이 책은 자의식이 형성되는 청소년기, 이들이 마주한 ‘불안’이라는 장애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질문하는 소설이다. 자의식은 자기 내면을 향한 냉철한 자기인식이며 이는 청소년기의 발달과업이기도 하다. 그런데 알다시피, 청소년기는 生을 통털어 그 어느 시기보다 이성적, 감성적으로 자기중심적이다. 이러한 청소년의 자아중심성(Egocentrism)을 연구했던 발달심리학자 엘킨트(Elkind, 1978)는 청소년기의 자의식을 ‘나는 특별한 존재이며 누구보다 독특하고 우주의 중심’이라는 생각이라 말한 바 있다. 자신만큼 남들도 자신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 생각하며 상대의 관점과 자신의 관점이 상이한 것을 인지하지 못한다. 우리도 그 시기를 거쳐 왔지만 이러한 자기중심적 사고는 잘못이나 실수가 아니라 자의식이 형성되는 과정의 하나일 뿐이었다. 대부분 자아중심성에서 비롯된 인지적 결함이나 과잉된 자의식을 통과의례처럼 겪은 후에야 자아중심성을 벗어나게 된다. 물론 성인이 되어서도 자기과신을 지속시키거나 지나친 타인의식이 삶의 방식이 되는 경우도 있다. 상처를 겪었다고 시간이 흘렀다고 나이가 들었다고 무조건 성숙한 자의식을 가지게 되는 것은 아닌 것이다. 학창시절 배운 지식을 떠올려보면 그것은 청소년기의 필연적 당면문제라 할 수 있는 ‘불안’을 어떻게 극복하였는가의 차이가 아닐까.

실제로 청소년의 뇌는 급작스런 발달로 인해 그 크기가 성인이상으로 커졌다가 다시 자체 공간부족으로 주름이 잡히는 과정을 겪게 되는데 전문가들은 이 과정이 곧 청소년기의 ‘불안‘을 상징한다고 주장한다. 뇌가 각자의 두개골의 크기에 맞게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기까지 청소년은 정서적으로 불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상상으로도 점점 부풀어진 뇌가 일시에 줄어들어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그림을 떠올리니 그 과정은 우리 일생에서 얼마나 중요했을까, 싶어진다. 애초부터 자리를 잘 잡아야 일생 편안한 운행이 되는 것 아닌가. 뇌 가운데서도 특히 충동적 행동을 억제한다고 알려진 ’전두엽‘의 부위는 가장 미성숙하다고 하니 청소년이 ‘불안’하지 않기를 바라는 우리야말로 얼마나 비과학적인 사람들인가 싶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에게 전두엽이 되어준 적이 있었을까. 그렇게 본다면 청소년은 ‘불안’을 극복해야 하는 것이 아니고 ‘불안’이 더욱 성장해야 하는 존재들은 아닐까. ‘불안의 성장’이야말로 자의식의 성숙, 청소년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이 소설은 바로 미성숙한 청소년의 ‘불안’이 성장하는 과정을 놀랍게도 침착하게 그리고 있다. 다섯 편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모두 가정과 학교에서 생명을 위협할 정도의 ‘불안’을 키우고 있었다. 무엇보다 작가가 이 ‘불안’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하는 세밀한 전개도는 청소년 문학으로서 이 작품이 가지는 최대치의 경쟁력이라 할 것이다. 작가는 이미 전작에서 호러를 적극 수용한 심리 스릴러로 청소년 소설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기에 이번 소설집은 새롭다기 보다는 한층 편안하게 느껴졌다. 소름이 오싹 끼치는 불안을 펼쳤지만 이야기의 보따리는 더없이 안정감있어 보였다. 그야말로 한결같이 탄탄한 ‘불안’이었다. 그들은 집과 학교, 화장실 혹은 벽이라는 차단된 공간에서 ‘불안’해 했으며, 친구나 형제와의 불편한 관계에 ‘불안’을 느끼는 존재였다. 갑작스레 당한 사고와 달라진 가정환경에 극심한 ‘불안’을 느끼고 무엇보다 자신 스스로 알지 못했던 자신을 발견하는 것에 두려운 ‘불안’을 감추지 못했다. 이러한 불안의 종류와 나타나는 양상을 더욱 극대화하는 장치로 작가는 과감하게 불안한 대상의 변형(transform)을 연출하였고 이 판타지 기법은 본래 서사의 장르를 이탈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고급스럽게 스며들었다. 영화로 치자면 시나리오가 탄탄해 구성상 흠잡을 데가 없었고 연출은 심리(mental)와 육체(phisical)를 오가는 호러테크닉에 강약조절이 능숙했다고나 할까. 아마 어떤 기자는 멘탈과 피지컬이 잘 조화되어 보기 드문 문제작이 탄생했다고 호평을 할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책을 덮고 심상치 않은 끄덕임에 청소년 소설의 독자는 청소년층에 국한되었다 생각한 편견에 슬몃 고개가 숙여졌다. 청소년관람가 영화라고 성인이 감동받지 말라는 법이 없듯 소설도 청소년 문학이라는 구분은 그저 관람등급에 불과하다는 생각, 그것은 공감과 감동의 층이 더 넓고 깊은 장르라는 뜻에 다름 아님을 새삼 깨우쳤다.

...하얀 벽에 더 하얀 거울을 - <하얀 벽>

첫 번째 이야기는 사라져도 남아있는 하얀 ‘불안’ 이었다. ‘나’는 수시로 거울을 보는 공주병환자에 가까웠다. 외모가 우월하므로 자신만이 주목을 받아야 하고 동경과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나’는 누군가 ‘나’ 이외에 성적이나 특기, 재력, 남자친구등의 이유로 관심을 받는 것이 가장 두려워 마음으로 친구를 경계하며 늘 불안해하는 주인공이었다. 이러한 삐뚤어진 독점력은 엘킨트 연구의 청소년기 자아중심성을 대변하는 ‘개인적 우화(personal fable)’의 일환이라 볼 수 있다. 민희(나)는 친구들과는 달리 자신은 특별한 존재이며 자신이 느끼는 감정과 경험은 친구들이 느끼는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믿어 ‘개인적 우화’에 빠져드는 주인공이었다. 자신감이나 위로의 수준이 아닌 ‘개인적 우화’가 절정에 달해 급기야 자신을 중심으로 친구들은 자신을 돋보이게 해주면서 배경처럼 존재하는 병풍이길 바라게 된다. 이 작품의 제목인 ‘하얀 벽’은 어쩌면 병풍역할을 해주었으면 하는 친구들을 감금한 민희의 내부 옹벽은 아니었을까.

불안의 토양위에 자라난 ‘하얀 벽’은 민희의 이유있는 환상의 실체가 된다. 벽속에 안 보이는 누군가가 자신을 훑어보고 소리를 내며 끝내 밀가루 반죽처럼 물컹대며 흘러내린다. 배경처럼 존재하지 않고 주인공이 되어 자신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목구비가 예쁘진 않지만 볼수록 끌리는 기주, 자신보다 월등히 못났지만 주근깨가 매력적인 희진, 서서히 장난같은 시비를 걸어오는 영주, 모두가 자신에게 집중되어야 할 관심을 빼앗아 가는 경쟁자였기에 그들은 감금된 벽에서도 민희를 친구로 삼는다. 현실에선 그들을 무시하며 우쭐해진 기분을 즐길 수 있었지만 비현실에선 하얀 그들에게 지배당하며 끝내 불안이라는 벽을 뚫지 못하는 민희. 이렇듯 불안한 민희에게 작가는 공포를 선물로 선사하는 아량을 베풀었다. 바로 담임이 그 하얀 벽에 거울을 달다 손을 크게 다치게 된 것. 담임은 민희의 벽에 상처를 주었기로 벌을 받은 것일까. 아니면 민희가 자신을 올바로 볼 수 있는 거울을 걸어주는데 실패 한 것일까. 거울사건은 이 작품이 환상의 파국으로 가는 도화선으로 느껴졌다. 못자국에 묻은 빨간 피를 하얀 벽이 빨아들이는 장면은 사라짐이 곧 존재의 극명한 이유가 되는 공포의 미장센이었다.

거울사고 이후 민희가 외면했던 친구 기주는 사라지고 자신을 비방하는 의문의 편지가 날아들면서 민희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거울의 추락과 기주의 실종과 편지의 등장은 동시에 이루어졌기에 더욱 의미심장했고 작가는 호러장르의 입체적 구성이 주특기인 것으로 보였다.  거울을 현재 상태의 자의식이라 보았을 때 제대로 자리잡지 못한 자의식은 친구의 실종이라는 무의식적 결과(비현실)와 친구의 비난이라는 의식적 결과(현실)로 입체적인 혼란을 야기했다는 점이 흥미로왔다. 마음으로 질투하고 시기한 친구는 사라져서 지켜보고 드러내놓고 무시한 친구는 사라지지 않고 어딘가에서 지켜보았다. 둘 다 민희의 불안을 키워준 점에서 공평했고 민희의 관점을 확장시켰다는 점에서 정당했다. ‘벽에 대고 말하는 것 같다’고 상처를 준 친구는 정말로 ‘벽’이 되어 자신을 증명했고 민희는 그토록 불안한 하얀 ‘벽’에 자신을 비춘 후에 비로소 ‘벽’이 말하는 ‘벽’의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마음을 열게 된다. 벽이 말하는 이야기는 벽이 느끼는 감정이자 벽이 경험한 위험일 것이다. 그것은 불안이 성장해 마주하게 된 상대적 관점의 시작, 하얀 벽에 그려질 나와 다르지 않게 독특한 벽만의 벽화가 아닐까. 민희의 우화가 부디 불안을 통해 하얗게 성장한 후 자신만의 당당한 벽화로 탄생되었기를. 그리하여 그 하얀 벽위에 다시 더 하얀 자신만의 거울을 걸 수 있기를. 그 거울속에 피어나는 화사한 꽃송이와 마주하기를.

...내 영혼의 부활절 - <난 네가 되고>

이 작품은 자신이 존재하기 이전부터 늘 함께 존재했던 쌍둥이 자매의 치명적인 상호불안을 말하는 소설이다. 이들 쌍둥이를 만나게 한 것은 이들의 탄생이었지만 불행히도 이들을 갈라 놓은 것은 죽음이었다. 작가는 다양한 형제구성의 배열중 쌍둥이라는 조건이 한 청소년의 자의식에 미치는 영향을 사정없이 파고든다. 주인공은 불의의 사고로 먼저 죽은 언니로 인해 남겨진 나머지 동생이었고 시종일관 동생의 입장에서 언니는 가해자로 자신은 피해자로 서술되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내내 대학시절 쌍둥이 동생이었던 내 단짝친구 한명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녀는 쌍둥이 언니 컴플렉스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던 친구였다. 맞벌이 부모님 때문에 태어나자 마자 지방에 계신 할머니손에서 자란 그녀는 모든 면에서 우월한 언니를 우상으로 여기며 일상에서도 언니의 의견을 기준삼아 행동하는 친구였다. 대화의 시작은 늘상 ‘우리 언니가’로 시작했고 의사 결정도 ‘우리 언니에게’로 귀결되던 그녀에게 있어 언니는 어떤 존재였을까. 실제로 우리들이 그녀의 집을 방문했을 때 확인한 그녀의 언니는 사실 그녀보다 미모면에선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 같은 이목구비였지만 여성적인 매력은 내 친구가 더 많아 보였고 학벌로 보아도 그녀의 언니는 그녀보다 한 단계 낮은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답은 부모님에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언니를 장남삼아 아버지 대신의 역할을 부여했고 아무래도 자신의 손으로 기른 정때문인지 자기방식으로 교육하는데 수월했던 것이다. 외모적으로도 중성적인 캐릭터의 언니는 외향적 성격에 늘 자신감넘치는 학교, 사회생활을 했고 의사와 결혼해 안정적인 가정환경을 꾸리게 되었다. 하지만 언니없이는 독립적인 생활이 불가능했던 친구는 결혼 후에도 만성우울증에 시달리며 지금은 그 불똥이 어머니에게로 튀어 어머니와 거의 단절된 상태이다. 쌍둥이는 흔히들 우애가 더 깊어 갈등이 덜할 것 같지만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어느 형제보다 경쟁하고 상처가 많아 불안한 자의식을 지니게 될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다. 이들 쌍둥이의 청소년기는 바로 자신이 쌍둥이의 반쪽이 아니라 독립적인 인격체라는 것을 인식해야하는 고통스런 시기가 아닐까. 작가는 남겨진 동생을 통해 언니라는 쌍둥이로부터 분리되는 과정을 섬뜩하게 그려내고 있었다. ‘육체의 쌍둥이’는 사라져도 ‘영혼의 샴쌍둥이’는 더욱 살아나던 자의식의 혼란상태를 적나라하게 투시하고 있었다.

머리가 좋았던 완벽주의자 주영언니, 늘 내 약점만 들추고 이용하던 주영언니, 언니가 죽고 내가 살아 지영이가 아닌 주영이로 살고 싶다는 욕망이 실현된 그날, 지영이는 주영이가 되는 절호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건 환상이 꿈이 되고 꿈이 이루어지는 새로운 인생의 서막이었다. 하지만 주영이처럼 행세하고 주영이로 산다해서 지영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건 자신이 주영이가 아닌 지영이임을 더 분명하게 자각하는 깨우침의 연극일 뿐이었다. 언니 주영이로 사는 기회는 곧 자신인 지영이가 죽어지는 기회였다는 걸 그녀는 왜 몰랐을까. 그건 주영이도 아니고 지영이도 아닌 아무것도 아닌 자기인정의 부채이자 자기부정의 실체였다. 자신이 자신으로 살아간다는 것에 자신감을 갖기란 이토록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자신이 비로소 자기자신이 된다는 것은 그만큼 고통스런 감동의 순간인 것이다. 관속으로 사라지는 지영이의 영혼을 보면서 혹 누구처럼 되고 싶었던 내 어린 자의식도 함께 날려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훅, 하고 불면 누구처럼이고 싶은 욕심은 사라지고 원래 나이어도 나인채로 반가운 내 영혼의 실체와 마주할 수 있다면. 지영이도 먼 훗날 영혼의 샴쌍둥이와 헤어진 그때 그날이 자신이라는 영혼을 되찾은 날이었음을 꼭 깨달아 주기를.

...곰팡이가 꽃이 되는 방법 - <붉은 곰팡이> 

이 작품을 덮으면서 나는 기성작가의 소설 하성란의 <곰팡이 꽃, 1999>과 김애란의 <벌레들, 2010>을 반사적으로 떠올렸다. 서사전반에 걸친 분위기가 이 두 작품을 완벽히도 믹스한 느낌이 들었달까. 작가는 갑자기 닥친 가난이 구체적 공포로 다가오는 끔찍한 현장을 곰팡이가 피어오르는 지하방으로 촘촘하게 렌더링했다. 청소년기의 가난은 시작의 절망이자 미래의 상실이다. 처음엔 그다지 인식하지 못했던 곰팡이는 지하방에서 가난을 견뎌낼수록 정비례의 증가를 보이며 스멀스멀 벽면에 피어난다. 곰팡이가 번식하는 지하방의 화장실은 ‘공중에 뚫린 굴처럼 시커먼 입을 벌리고 먹이를 삼킬듯한 동물의 입모양’ 같기도 하고 동시에 악취나는 ‘찌꺼기를 죄다 뱉어내는 항문’같기도 하다. 이때 지하방에 그려지던 곰팡이 벽화는 죽어가는 것들 속에서도 잘도 살아나 급기야 동생과 엄마를 뒤덮어 육체적, 정신적 바이러스를 유포하고 그것에 감염된 가족을 바라보는 나는 불안을 억누르고 애써 객관성을 찾으려 한다. 가족을 감싸안는 화자의 어른스러운 시선과 곰팡이 속에서도 살아가는 자신을 뚜렷하게 자각하던 의식적 사유들이 무척 인상깊었다. 특히, 곰팡이는 ‘누군가의 피를 빨아들여 피어나는 죽음의 꽃’이므로 ‘내 몸에 핀 커다랗고 붉은 곰팡이’로부터 역설적인 삶의 강렬한 의지를 발견하는 소설의 마지막은 서서히 차오르던 묵직한 감동이었다. 곰팡이라는 불안을 통해 꽃이라는 성장을 이루어낸 주인공, 공포를 만들어 낸 건 곰팡이를 바라보는 우리일뿐 곰팡이가 아니라는 작가의 격려는 청소년이 아닌 내게도 큰 위로가 되었고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교훈이기도 했다.

개인적으로 내가 좋아하는 두 명의 작가(하성란, 김애란)의 서사에서 자주 느끼던 정밀묘사의 기법, 생명을 위협하는 우리 일상, 절망이나 죽음에서 피어나는 삶의 은유들을 소름끼치게 재확인한 것은 독자로서 큰 수확이기도 했다. 이 작품에서 번져가던 곰팡이는 김애란의 <벌레들>에서 꼭 서울의 한 재개발지대에 이사 온 신혼부부가 그토록 몸서리치던 각종 벌레들과 같았다. 아이를 낳아야 하는 여자는 외부로부터 밀려들어오는 벌레들 속에서 지속적인 불안을 감지하고 고작 벌레라는 생명체에 짓눌린 채 평화를 위협당한다.

“내가 서 있는 자리, 바로 그 근처에서였다. 벌레의 이동은 나무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나무는 자궁이 적출된 여자처럼 헤프게 다리를 벌리고 있었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안고, 허리를 숙인 채 구멍 속에 손전등을 비춰봤다. 밑둥이 뻥 뚫려 있었고, 이상하게 속이 텅 비어 있었다. 깊숙한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벌레가 기어 나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종류의, 수천 마리도 더 돼 보이는 벌레들이. 믿기지 않는 광경이었다. 나는 전등을 손에 쥔 채 벌벌 떨었다.” <벌레들 中>

“녹차의 티백 찌꺼기와 두터운 오렌지 껍질, 다이어트 코카콜라. 모두 다 저열량의 음식들뿐이다. 돌돌 말린 비닐 팩을 들어낸다. 미모사 향의 섬유 유연제다. 미끌미끌하게 썩은 밥풀들이 달라붙어 있지만 시큼한 악취 가운데서도 비닐 팩에서는 상큼한 향기가 난다. 남자가 복도에서 맡았던 그 냄새다. 쓰레기 봉투 맨 밑바닥에 손도 대지 않은 생크림 케이크가 문드러져 있다. 하얀 우윳빛 생크림이 군데군데 벗겨진 사이로 포도 시럽이 잔뜩 발린 삼단 케이크가 드러나 있다. 그 위에 하늘하늘하게 곰팡이꽃이 피어 있다.” <곰팡이꽃 中>

주인공의 몸에서 피어난 붉은 곰팡이는 쓰레기 봉투를 뒤지면서 살아가는 한 남자의 일상을 통해 ‘진실‘이란 생크림 케잌에 피어난 ’곰팡이꽃‘처럼 버려지고 냄새나는 곳에서 더 명확히 발견되는 것이라 말하는 하성란의 <곰팡이꽃>을 연상시킨다. 방미진 작가가 붉은 곰팡이에서 삶의 질긴 희망을 찾고자 했다면 하성란 작가는 푸른 곰팡이에서 삶의 낯선 진실을 발견하지 않았을까. 긴장된 표현과 내밀한 주제면에서 미스테리 수사의 놀라운 완성도를 보여준 작가의 성장배경이 미스테리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환영과 악몽을 자유자재로 컨트롤하는 작가처럼 이 작품의 청소년도 훗날 불안처럼 자라나던 곰팡이를 끝내 꽃으로 역전시키는 반전의 주인공이 되어주길. 그리하여 소설속 곰팡이 신화를 현실에서 완성시켜 주시길.

...퇴화도 성장의 증거 - <손톱이 자라날 때>

표제작이 된 이 작품은 엘킨트의 청소년기 자아중심성의 또 다른 특징, ‘상상속의 청중(imaginary audience)’에 지배되는 심리적 불안을 그려낸 소설이다. ‘상상의 청중’이란 자신이 남들보다 유별나게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긍정적인 자의식과 실수를 해도 유독 자신에게만 집중된다고 느끼는 부정적인 자의식에 의해 탄생된 타자들이다. 청소년은 이 상상의 청중 앞에서 자신이 주인공이 되어 노래하고 연기하고 자신을 자랑하는 성향이 있다고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역시 친구가 자신을 두려워 한다는 사실에 우쭐함을 느끼고 상상속의 청중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학교생활을 하고 있다. 자신만의 특기로 남들보다 눈에 띄고 싶어하는 욕망을 가진 이 시기에 아이들은 채워지지 않는 욕망을 자신보다 약하고 못난 아이를 괴롭히고 무시하는 것으로 대체시킨다. 주인공은 외모적으로도 자신이 없고 집안이 좋지도 않으며 부모님이 학교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쪽도 아니기에 자신을 드러낼만한 무기가 없었다. 이때 우연히 발견한 자신의 손톱이 주인공의 유일한 무기가 되며 손톱을 기르는 것이 곧 자신의 존재를 알리는 전략이 되버린 것이다.

‘상상속의 청중’에 대한 방어기제로 손톱이 부각된 것이 이 작품의 차별화된 매력이었다. ‘상상속의 청중’에 이미 압도된 주인공은 곧 자아도취에 빠져들며 자신의 매력인 손톱을 맹신한다. 길러 나온 손톱으로 친구를 위협하고 계속하여 손톱에 상처받을 희생양을 물색한다. 멋진 손톱이라는 차별화된 능력은 폭력도 불사하며 급기야 파멸을 유도하는 근사한 마법의 판타지가 된다. 이제 제살과 같아진 손톱이 불편하고 아파와도 제 살을 도려낼순 없듯 누구라도 할퀴지 않고서는 손톱을 견딜 수 없게 된 것이다. 작가가 파고들던 이 손톱의 파멸여행은 예민한 손톱의 신경만큼이나 끈질기게 우리 신경을 자극하며 주인공의 고통에 동참하도록 하였다. 어쩌면 ‘모두에게 막처럼 들러붙어 있는 답답한 공기를 시원하게 긁어줄 강한 자극’을 나도 모르게 더 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가려움이라는 고통을 면피하게 위해 결국 피부를 긁어 피가 나는 고통을 택하게 되는 피부병 환자의 환부처럼 그 마지막은 쳐다보기 힘들 정도로 처참했다.

파리를 잡는 개구리처럼 혀가 쭉 뻗어 나온 친구, 눈이 다섯 개나 달린 친구, 목에 붙은 혹이 아이의 머리처럼 고개든 친구처럼 신체의 특정부위가 지나치게 발달하는 대신 다른 부분이 퇴화라도 된 듯 비정상적인 발달은 잘못 뻗어나가는 자의식의 진화를 상징하는 듯했다. 하지만 괴기스럽게 일그러진 교실에서 신체가 변형된 아이들이 하나같이 우스꽝스럽다기 보다는 가엾고 서늘하게 다가왔다. 우리 모두는 그토록 일그러진 교실과 무너진 친구들을 수없이 그려내고 지워가며 어른이 되었다는 동병상련의 안스러움이었을까. 남보다 예뻐야 하고 친구보다 강해야 살아남는다는 생각이 끝내 퇴화된 손톱을 활성화시켰다는 것이 나는 어쩐지 슬펐다. 손톱은 알다시피 피부 표피가 각질화되어 생긴 퇴화된 세포이다. 즉, 손톱자체는 생명력이 없어 재생능력이 없다. 그러므로 손톱이 ‘자라난다’ 말하지만 실은 퇴화된 오래된 손톱을 방금 전 새롭게 퇴화된 새 손톱이 밀어내는 것이라 본다면 손톱은 ‘죽어간다’는 말이 맞지 않을까. 아이러니 한 것은 이 퇴화된 세포는 인간의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존재하며 죽음으로써 퇴화를 중단한다는 것이다. 마치 사람이 살아가고 있지만 기실 하루하루 죽어가는 것과 같은 이치로. 죽어가는 손톱을 더욱 활성화 시키는 일, 손톱의 성장은 곧 퇴화로의 진화, 그것은 결국 죽음을 부르는 일이었다. 우리몸에서 유일하게 죽어야 성장하는 손톱의 생체비밀, 그건 꼭 불안이 사라져야 성숙이 잉태되는 우리 청소년의 법칙, 아니 우리네 인생의 진리는 아니었을까.

우리 모두에게도 손톱이 자라나는 시간동안 퇴화되어야 할 자의식이 새롭게 성장하는 시간이면 좋겠다. 퇴화된 그것들을 깨끗하게 다듬어 불안을 정리하는 시간이면 좋겠다. 손톱이 평생 퇴화한다는 생물학적 의미가 꼭 평생동안 자의식이 성장한다는 말과도 같이 느껴져 새삼 딱딱하기만 한 내 손톱을 꾹꾹 눌러보게 된다. 가끔 찢어진 손톱에 머리칼이라도 걸려들어 전기가 통하는 아픔에 관류된 순간을 떠올려본다. 비록 죽어간 세포지만 얼마나 살아있는 아픔이었던가. 설사 손톱은 몰라주었다 해도 내가 살아있어 느끼었던 아픔만큼은 너무나 분명히 생생하다. 그것은 한편 내가 건강하게 살아가는 분명한 증거라는 생각, 그것만은 잊지 못할 듯하다. 손톱은 변함없이 퇴화되어도 아이들의 성장만은 멈추지 않기를. 우리 아이들의 진화는 아파도 자라나는 끈질긴 손톱처럼 일평생동안 진취적 이기를. 퇴화될 것은 과감하게 사라지고 그 죽음이 곧 새로운 탄생이 되어주기를.

...진짜 겨누어야 할 상대는 - <고누다>

‘고누다’란 말은 목표물을 향해 무언가를 ‘겨누다’의 방언이라 한다. 이 작품의 주인공 이름이 ‘고누다’ 인 것을 보면 아마도 손가락으로 총쏘는 시늉을 하는 행위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상징하기에 명명되어진 ‘겨누다’의 인칭명사인 듯하다. 내게 이 작품은 다섯 편의 이야기중 가장 어렵고도 불편했으며 그런 만큼 주제의 심도는 어른을 겨누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로 깊이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첫 번째 이야기, <하얀 벽>이 ‘개인적 우화’에 의한 여학생의 공주병심리를 들추었다면 이번 이야기는 같은 ‘개인적 우화’로 비롯되었지만 자신에게 특출난 능력이 있다고 믿는 과잉된 자의식으로서의 우상화를 언급하고 있었다. 고누다는 두 번째 손가락으로 누군가를 겨누어 ‘둘’이라고 말하기만 하면 그 누군가는 둘이 되는, 즉 ‘뭔가를 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아이들이 자신을 싫어하는 건 복제할 수 있는 월등한 능력때문이라 믿으며 그 때문에 혼자가 된 것을 합리화한다. 다섯 살 때부터 옆집 아주머니의 흰눈이를 둘로 만들어 버린 이후 고누다는 바퀴벌레와 고양이, 친구들 할 거 없이 생명이 있어 움직이고 입이 있는 것들을 둘로 나누기 시작한다. 특히, 겉과 속이 다르게 행동하는 가식적인 친구들을 둘로 나눌 때 가장 쾌감을 느끼는 고누다를 확인하는 일은 어쩐지 편치 않아 고누다만큼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모든 인간은 진짜인 자신과 가짜인 자신을 합체한 존재라는 것을 자꾸만 강조하는 작가의 경고인 것만 같아 흠칫했다. 사람을 진짜인 모습과 가짜인 모습으로 나눌 수 있다면 상상이긴 하지만 멋진 능력임에 틀림없었다. 이 작품은 그렇게 둘로 분리된 인간이라면 진짜와 가짜중 누가 자신으로 승리할 것인지 묻는 이야기기도 했다.

진짜와 가짜게임을 흡입력있게 전개시켜 나가는 작가의 혼란스런 유도심문은 여러 가지를 생각케 했다. 그 중에서도 친구가 없어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보라와 사귀기 위해 가짜 ‘보라2’를 만든 고누다가 가짜 ‘보라2’와 벌이는 논쟁은 이 작품의 핵심이자 백미였다. 진보라라는 이름의 친구를 가짜 ‘보라2’로 복제하고 난 후 ‘보라2’에게선 보라색 피와 같은 포도주스의 냄새가 감지된다. 이는 고누다가 진짜와 가짜사이에서 진정한 정체성을 찾기 위해 꼭 넘어야 할 보라색 불안의 파도로 이해되었다. 하지만 가짜친구를 통해 얻은 것은 진짜 ‘친구연습'이 아니라 진짜 ’자기연습‘이었다는 것을 역으로 깨닫는다. 주변의 모든 것을 진짜와 가짜로 분리하였더니 분노를 가지고 태어난 가짜, 좀비같이 가짜 자신을 먹어버리는 진짜를 구분할 수 없어 자신마저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해야 하는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미 진짜인 자신을 진짜인지 가짜인지 확인하는 방법은 역시 자신을 가짜로 만드는 방법 외엔 없었던 것. 가짜가 되고나서야 진짜인 자신을 뒤늦게 인지하는 고누다의 완벽한 실수는 마치 우리네 어른들의 오래된 위선과 어리석음을 상기시킨다. 고누다가 겨누어야 할 대상은 결국 가짜인 자신으로 진짜인듯 살아가거나 진짜인 자신을 잃고 가짜인 자신을 자신으로 믿으며 살아가는 남들이 아니라, 진짜와 가짜로 나누지 않고도 합체된 자신으로 살아가야 할 바로 자신다운 자신이아니었을까.

이 소설이 어렵게 다가왔던 건 바로 인간은 자신의 가짜 가면(페르소나)을 벗고 진짜 맨 얼굴로 살아가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그야말로 질문만 하였지 답을 제시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에서였다. 고누다는 자신의 페르소나를 애써 벗어봤자 맨얼굴이 드러나는 대신에 또 다른 새로운 페르소나를 발견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보라2’가 ‘진보라’의 강제로 벗겨진 페르소나였지만 ‘보라2’마저도 새로운 페르소나를 만들어 진짜를 숨기지 않았는가. 내가 내린 결론은 인간에겐 페르소나도 맨얼굴도 모두 중요하며 이 둘을 분리한다고 해서 진실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것과는 다른 문제라는 것이다. 맨얼굴이 없다면 페르소나가 필요치 않고 페르소나 역시 맨얼굴이기에 필요한 장치인 것이다. 다만 때에 따라 페르소나를 벗을 수 있는 용기는 맨얼굴의 건강과 지속적인 관리에 있지 않을까. 맨얼굴이 형편없다면 절대 페르소나를 벗으려 하지 않을 것이니까. 그러므로 고누다를 통해 작가가 말하려 했던 진실은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통한 진짜찾기가 아니라 진짜에 대한 끊임없는 자기 성찰만이 가짜인 자신을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이 아닐까 싶다. ‘고누다’가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성장하는 길은 이름 그대로 가짜인 자신을 고누고(디디다) 그 위에서 진짜인 자신을 고누며(받치다) 진짜와 가짜사이에서 늘 불안할 수 있는 자신을 고누는(겨누다)일인 듯하다. 그것은 이미 가짜와 진짜의 구분조차 의미없어진 이미 굳어버린 자의식을 좀처럼 교정할 길 없는 우리 성인들에게도 해당되는 충고는 아닐까. 한번 들으면 잊어버릴 것 같지 않은 ‘고누다’, 그 이름 석자의 비밀을 가슴에 새겨본다.

불안으로 평화를

이번 소설집, 다섯 편의 이야기는 다섯 가지의 거대한 불안 성장통만 같았다.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읽는 내내 몸의 여기저기는 썩 편치를 않았다. 마치 지난 시절 내가 거쳐 왔을지 모를 잠재적인 불안이 열꽃처럼 돋아나듯 마음마저 울퉁불퉁 해지던 시간이었다. 겨울처럼 차디찬 하얀 벽이 꽃피는 봄날의 담벼락이 되고 푸른 곰팡이도 붉은 꽃이 되는 시간들은 죽은 세포가 떨어져 나가 다음의 조직이 자라나듯 자연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세상의 어느 누구가 손톱이 자라나는 순간을 자각한단 말인가. 그런데 자라고 난 후는 얼마든지 확인이 가능한 일이었다. 문학이 주는 환상이 현실의 고통을 자극한다는 것이 놀라워지는 소설이었다. 이제 얼마간 나도 성장한 것일까. 손톱이 자라나듯 내 안의 무언가 퇴화된 조직들이 떨어져 나간 것일까. 불안도 성장하고 나니 평화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깨우치는 내밀한 시간, 이 감사의 시간에 인사는 해야겠다. 불안을 헤쳐 나가기 위해 불안을 거대화 하고 불안을 견디기 위해 불안을 세밀화한 이토록 강렬한 최대의 자극, 이 근사한 불안을 선사한 작가에게 슬몃 미소를 지어본다. 불안이야 말로 최대 안정의 주범이었다는 것에. 어떤 유명한 우주비행사가 그랬다. ‘우주체험을 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고. 한 권의 책을 우주로 여기는 내게 있어 이 책은 새로운 우주 체험이었다. 분명 ‘이 책을 체험한 뒤에는 전과 똑같은 인간일 수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다. 불안보다 더 불안한 이 책을 통과한 뒤 달라진 나를 확인하는 일은 이 책이 제공한 가장 큰 평화가 아닐까. 세상의 모든 고통은 성장을 통해 치유됨을 조용히 깨우치며 세상의 모든 불안은 불안하기에 안정될 수 있음을 깨달으며 이 책을 덮어본다.

한줌의 평화, 그것은 죽음으로 생명을 증명하는 손톱처럼 자라나기도 한다는 것. 손톱이 자라나는 것은 불안과 절망의 세포가 사라져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을. 그렇기에 손톱이 자라나는 아픔은 生을 이겨내는 단단한 동력이 되는 것이었음을. 그것은 한 평생 진짜 우리 자신으로 살아가야 할 용기를 얻어가는 일이었음을. 누구든 자기 자신을 이루는 일은 그 어떤 성장보다도 벅차고 무엇보다 가장 행복한 일이었음을. 나는 오늘 비로소 성숙해진 마음으로 내 상처난 손톱을 어루만져 본다. 그리고 차분히 다듬어본다. 자라나고 자라남이 지난날의 내 불안이었기에 깍여지고 깍여짐이 내 상처였기에 나는 지금 이렇듯 평화로운 것일까. 이제 앞으로 불안해지면 불안해 질 때마다 안그래도 불안했던 손톱을 쳐다보게 될 지 모르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작품은 원래 불안했기로 지금 평화가 더 소중한 내 손톱에 바치는 불안의 선물, 선물의 불안이었던 것이다. 문득 궁금하다, 이 작품을 통과한 당신도 나와 같은 손톱으로 生의 성장을 거듭할지. 우린 언젠가 그렇게 자란 손으로 성숙하게 조우하게 될 지. 작고 여린 손톱이 자라날 때, 나는 오늘처럼 기특한 내 안의 작은 평화를 떠올리겠다. 당신도 그랬음 좋겠다. 아니 이미 당신도 그럴 것이다. 이 책의 불안이 당신을 조금이나 불안하게 한 적이 있다 한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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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사르 2011-05-31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헤. 한사람님 리뷰 중 제가 읽어본 책 리뷰 먼저 읽어볼랍니다. ^^ 근데 우와~ 리뷰 엄청 길어요. 와..대단대단. 리뷰길이나 몰입도로 봐서 한사람님은 장편소설작가 필입니닷. ^^ 단편소설작가와 장편소설작가는 호흡이 다르다고 들었는데요, 한사람님의 리뷰는 딱 장편소설 느낌의 긴 호흡이시네요.

성장하는 상처라..저는 상처는 치유되고 재생되는 게 좋다, 라는 의미만 생각해봐서인지 성장하는 상처라는 거는 생각 못해봤어요. 그런데 내면의 불안, 상처는 그렇게 성장의 의미가 들어가도 좋겠네요. 음..괜찮은데요.

다섯편의 단편이 불안성장통같다는 말에 공감입니다.

달사르 2011-05-31 20:24   좋아요 0 | URL
리뷰 앞에 별을 체크해놓고, 시간을 두고 좀더 읽어봐야겠어요. 공감지점이 많은 듯 합니다.
(한사람님, 리뷰 앞에 별을 체크하면 노란 색이 되는데요. 그러면 제 블럭에서 이 리뷰로 곧장 올 수 있답니다. 참 신기하지요? ㅎ 혹시 이미 아시는 거 아닌가요?^^ )

한사람 2011-05-31 21:26   좋아요 0 | URL

그래요? 몰랐어요 !!!
그런 기능이 있었군요 ~

장편소설 필이 난다구요?
제 리뷰가 대부분 장황하고 ㅋ 만연체죠
단문으로 끊어쓰고 싶은데 잘 안되더라구요

다 지난걸 이렇게 읽어주셔서 뭐라 감사를..해야 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