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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과 쓸개
김숨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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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숨. 그동안 나는 이 작가의 단편들을 다른 문학상 수상집이나 특별기획된 소설집에서만 만나왔다. 기억나는 것은 이름만큼이나 고요하고 숨막힐듯한 막막함이었달까. 굳이 육체적인 느낌을 떠올려보면 기온은 그다지 낮지 않지만 습도가 많고 기압이 낮아 뼛속까지 파고드는 축축한 서늘함이라 말하고 싶다. 굳이 또 분류하라 말한다면 이 느낌은 불쾌한 감각의 기억편에 속할 것이다. 느리고 더디지만 분명 두려워지는 심리적 공포를 유발하는 계획된 이야기들. 이 느낌이 내겐 어떤 편견으로 자리잡았던 모양이다. 분명 여러 작가들의 작품들 속에서 만난 그녀는 굳이 ‘죽음’을 천천히 읊조리는 작가였고 절대 이 설정된 규칙에서 벗어난 작품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도 그럴 것이 표제작이 된 ‘간과 쓸개’는 작년에 만난 <2010 작가가 선정한 올해의 소설>에서 그들 중 제일 기억나는 작품이기도 했다. 그때 그녀는 어느 봄날 홍대 책거리 행사에서 만난 어떤 노인을 보고 이 소설을 쓰게된 것 같다고 말했다. 노인은 책들이 쌓여있는 전시대로 힘없이 걸어와 한마디 말도 없이 90도로 허리가 꺽여진 채 매대로 고꾸라졌고 놀란 그녀에게 '힘이 없어서 이렇게 쓰러질 때가 종종있다'고 죄송하다고 맥없이 말하며 천천히 돌아갔다고 한다. 갑자기 쓰러진 노인과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작가는 바짝 다가온 누구에게나 드리울 수 있는 죽음의 그림자를 또렷이 목격하기라도 한 것일까. 이번 소설집에 모아놓은 단편들 역시 하나같이 서서히 정해진 그곳을 향해 모두들 죽어가고 있기로 책을 덮고 나서 길고 큰 숨이라도 쉬어야 일어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성란 작가는 이 분위기를 김숨이 발견한 깊고 어두운 ‘저수지’라 말했다. 어떤 평론가는 죽음을 연습하는 ‘예행연습’의 과정이 김숨의 소설작업이라 빗대어 말하기도 했다.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나도 죽음이 두렵다. 나이 들면서 더욱 실감하는 것이지만 언제 죽을지 몰라서 두렵고 언제 죽을지 안다 해도 두렵다. 그것은 죽음에 이르게 하는 온갖 종류의 고통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그러한 고통을 겪고 나서도 결코 살아나지 못한다는, 다시 돌아오지 못한다는 마지막에 대한 서글픔도 포함한다. 그 슬픔엔 그 길을 철저하게 혼자서 걸을 수 밖에 없다는 외로움이 가장 클 것이다. 천둥 번개가 몰아쳐 당장 사람이라도 잡아갈듯 무서운 밤에도 의심없이 잠들 수 있는 건 다음날 다시 일어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다. 내일아침 급작스레 심장마비라도 걸려 운명을 달리 할지 몰라도 어제까지는 별일 없이 일어났기에 내일도 그러할 것이라 믿는 관성같은 습관인 것이다. 그런데 죽음은 내가 미처 거짓말이라는 인식조차 하지 못한 사이 나를 거짓말처럼 데려간다. 그리곤 나는 사라진다. 아니 내가 사라졌는지조차 알 수도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 거짓말처럼 진실인 사실 하나 때문에 결국 고개를 숙이게 되는 존재들이 아닐까. 죽음을 예견하고 죽음을 알아간다는 건 고개를 들기보다 숙여야 할 일일지 모른다. 그렇게 한참을 숙이고 보면 그전엔 몰랐던 것들이 보이고, 다른 것들이 들리고, 알 수 없는 맛을 느낄지도 모른다. 오감은 예민해지고 인식은 빨라진다. 신체기관의 성장이나 발달과는 상관없이 퇴화하면서 더 촉발되는 이 감각의 효과는 가장 현실적인 비현실을 생성한다. 그것은 무릇 혐오나 구토의 현장을 고발하듯 스스로를 있는 힘껏 자극함으로써 生을 유지하려는 전략처럼 보이기도 한다. 김숨은 죽어가는 사람을 다시 살려내는 방법으로 자신의 죽어감을 충분히 설명하도록 하였다. 말한다고 다 알아듣지 못할지언정 그들은 분명 죽어감을 끝까지 설명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숨의 입을 통해 터져 나온 부고직전의 유서와도 같은 이들의 중얼거림은 그래도 아직은 나 살아있다는 투정이었을까. 자세히, 천천히 귀담아 듣지 않으면 쉽게도 놓쳐버리는 나지막한 음률, 숨쉬고 내쉬는 호흡과도 같은 죽음으로의 발걸음, 그것에 동참하는 길은 추적추적 빗물에 잠긴 운동화를 질질 끌고 따라가는 힘겨운 길이었다.

일상을 필사(必死)하라

우연의 일치인지 김숨의 소설에는 간이나 폐, 위, 쓸개등의 장기가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된 말기병 환자들이 자주 등장한다. 무엇 때문에 이들이 병에 걸렸는지는 정확치 않지만 분명한 건 병자로서의 현재 삶은 누추하고 빈곤하며 내일의 희망이라곤 눈꼽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고독한 인물들이라는 것. 인간의 주요장기가 파손된 결과로 그들이 피로와 호흡과 소화, 분해등의 신체적 결손을 자기일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은 상당히 고통스럽게 느껴졌다. 가난한 처지에 병까지 걸린 가족 구성원의 불행을 나머지 가족들마저 외면하고 일상으로 편입시킬 때 환자의 외로움은 보다 죽음에 가까워 보였다. 주로 상처한 노인이나 사별한 미망인, 독신자등으로 대변되는 그들이 자신의 일상에서 시간과 공간을 견디는 방법은 ‘필사(必死)’의 관찰로 생각된다. 작가는 이것만이 이들이 내세울 수 있는 차별화전략이라 주장하는 듯했다. 인간은 누구나 반드시 죽는 ‘필사(必死)의 존재’지만 죽기 전까지는 죽을 힘을 다해 ‘필사(必死)적으로 살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 그런데 이 전략은 하성란 작가가 언급했듯이 작가의 쉽지 않았던 관찰 결과로 느껴져 소름이 돋았던 순간이 많았다. 이렇게까지 필사적이기에 그녀는 사실 젊지 않은가.

<간과 쓸개>에는 예순 일곱의 간암환자가 하루하루 저물어가는 자신의 일상을 서늘하게 고백하는 글이었다. 그는 30년 동안 소유해온 땅이 있었지만 자식들의 무언의 성화에 못이겨 땅을 처분하고 그들에게 지분을 골고루 나누어준다. 그런데 땅을 팔고 돌아와 누은 노인은 자신이 30년 동안 허울만 좋은 소유주였지 그 땅에 정작 고추하나 심어보지 않았다는 헛헛함에 잠못이룬다. 그 땅이 처음부터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는 생각은 서울의 병원에 정기검진을 오가며 자식들에게 느낀 서운함과 중첩되고 이제 땅마저 없어진 자신의 육신마저 자신의 것인지를 생각게 하지 않았을까. 노인은 몇십년 된 단층 양옥 자신의 집에 있는 수도 계량기 통에서 죽지 않은 귀뚜라미를 발견하며 ‘살아 있다는 것이 더할 수 없이 구차스럽고 징글징글’하다고 느끼고 식당에서 ‘노르스름한 튀김반죽을 뒤집어쓰고 안간힘으로 뒤채던 미꾸라지’를 보고 필사의 생명을 관찰한다. 누님이 가져오신 ‘기세가 조금도 꺾이지 않는 풍천장어’나 친구들이 키워보라고 하던 ‘뿌리가 잘리고 가지마저 잘려진 나무에 악착같이 매달려 살아있는 표고버섯’ 모두 ‘죽은 것도, 그렇다고 살아있는 것도 아닌 골목’ 신세인 자신과 다를 바가 없었던 것. 노인은 우연히 들른 식당 거울속 늙은 남자가 죽은 사람이라도 바라보듯 아무런 감흥없이, 그저 빤히 응시한 사람이 자신인 것을 깨닫고 죽음으로 가는 여행에 자신이 승선했음을 감지한다. 이 핑계 저 핑계로 찾아뵙지 못하던 병석의 누님은 간에서 만들어진 쓸개즙을 인체의 활동에 사용치 못하고 죽음의 액체처럼 흘려보내고 있다. 노인의 어린 시절 공포로 저장해놓은 검은 저수지의 두려운 기억은 누님의 쓸개즙과 정확히 같은 감각으로 부활되며 노인은 끝내 울음을 터뜨리고 만다. 노인은 어린 시절 저수지와 누님의 쓸개즙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죽음이 다가와 그것을 알면서도 부패해 가는 육신과 그로인해 악취가 난무해진 현장에 대처할 수 없는, 반드시 한번은 죽어야만 하는 필사(必死)의 체액이라도 발견한 것일까. 살면서 한번도 불만을 드러내 본적도 그것을 들킨 적도 없는 노인이 고개를 끄덕이는 방법은 입을 틀어 막고 숨죽여 울음을 삼키는 것 외엔 없었을까. 거울을 보며 그동안 눈에 띄지 않던 점이나 주름을 발견할 때가 있다. 가끔 앞으로 아무리 많은 날을 살아도 오늘이, 오늘의 내가 앞으로 보다는 가장 젊어서 빛나는 날이겠구나 싶을 때가 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못할 것임을 당연히 알고서 그것을 인식하는 일은 노인이 발견한 거울속의 자신과 다르지 않을 듯하다. 늙어간다는 것이 무작정 서러워지는 작품이었다. 그것은 아무리 벚꽃이 아름답게 피어도 곧 흐드러지고 말 추적한 봄날이 미리 서러운 애석한 심정일 것이다. 작가는 어느 봄날 90도로 허리가 꺽이면서 쓰러지던 노인에게서 그 애석한 서글픔을 발견하지 않았을지.

소리없이 조용히 죽어가는 사람은 <북쪽 방房>에서도 살아났다. 32년 8개월을 중학교 지구과학 선생님인 평교사로 정년퇴직한 곽노는 간이 아니라 폐의 기능이 무너져 기침을 달고 사는 칠십 줄의 노인이었다. 곽노는 눈에 안보이는 ‘지구와 우주의 이치’ 보다는 눈에 보이는 ‘광물과 광석의 실재’에 더 관심을 가졌다. 물욕과 노욕에 물들어 있다고 보는 아내는 천주교 신자이지만 자신은 그러한 이중성이 싫어 필사로 육신의 부동을 지향하는 사람이었다. 곽노는 점점 허물어져 가는 자신의 육신때문인지 건넛집 창문으로 들어가는 장롱도 관으로 보이고 북쪽 방 아래 가발공장에서 들려오는 미싱소리와 담벼락에 던져지는 쇠공 소리도 마치 자신의 죽음을 서둘러 종용하는 외부공격으로 인식하는 듯했다. 곽노는 자신이 유배된 북쪽 방은 철광석을 닮았고 자신의 육신은 철광석에 함유된 철 성분이라 생각한다. 무엇보다 황홀했던 건 ‘시간의 흔적인 선線들이 구현해 내고 있는 질서’라 기억하며 광물의 집합체인 한 덩이의 퇴적함처럼 살다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곽노가 퇴적암의 횡적인 표층을 질서의 극치로 여겼기에 급작스런 마그마로 생성된 암석은 혐오의 대상인 것이다. 혐오는 곧 무질서를 의미한다. 일상의 무질서, 그 혐오의 절정에 곽노는 담벼락을 향한 쇠공 던지는 소리를 우족사러간 아내의 해체로 앙갚음하며 일상에 부동하려했던 자신의 환상을 쇠공던지는 사람, 혹은 쇠공의 탓을 한다. 곽노가 시간과 공간을 견디는 방식은 억지로 형성된 우발적인 성공이 아니라 자연스레 굳어지는 시간의 퇴적이었다. 그것이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종교였고 죽음을 준비하는 예행이었던 것. 숨쉬기 지독히도 힘들면 그저 숨을 덜 쉬면 되지 하는 곽노의 경지가 쓸쓸하게도 느껴지던 작품이었다. 서늘함을 유발하던 가발과 우족, 쇠공 등의 장치가 곽노의 일상을 지배하던 소품이라고 하기엔 참 비일상적으로 낯설었다. ‘곽노’를 발음하면 ‘광노’가 된다. ‘곽노’가 미치거나(狂) 빛나는(光)노인이 아니고 식물도 동물도 아닌 광물을 사랑하는 노인(鑛老)이라는 것에 혹시 사람은 자신이 살아온 대로 죽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아온 대로 죽어가는 것, 그것이야말로 살아가는 방식은 아닐까.

‘곽노’가 유배된 북쪽 방에서 생을 마감하는 목표를 가졌다면 <사막여우 우리 앞으로>에서 엄마는 버스 정류장 간이 매표소에서 죽기를 바랐다.(아니 끝까지 살기를 바랐다) 쉰 아홉이 될 때까지 엄마에게 매표소는 요람이자 침대이자 관구였다. 흡사 동물원의 우리라도 되는 듯 엄마의 다리는 홍학의 모가지처럼 말라갔고 엄마는 ‘나’와 동생들을 매표소에서 길러 길바닥으로 내보내었다. 엄마는 도시전체가 홍수에 잠겨도 상가주민들의 철거 시위에도 사흘밤낮을 견디며 매표소를 떠나지 않았다. 언급되진 않았지만 이 작품에서도 중병에 걸린(듯한) 엄마는 매표소에서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버티는 것만이 자신의 죽음을 맞이하는 방식이라 여겨온 듯하다. 하지만 엄마의 필사적 매표소 사수에도 불구하고 엄마는 매표소만을 딸에게 남기며 죽어버린다. 사막여우처럼 지독해 눈물을 보이지 않던 ‘나’는 성악의 꿈을 접고 동생들에게 떠밀려 매표소 안으로 들어간다. 이 작품에서 매표소는 세상과 철저하게 분리된 감옥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어느날 동물원 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동생들과 만나기로 한 ‘나’는 동생들을 찾아 헤매다가 진짜 동물의 우리 속으로 들어가 사람들의 구경거리를 자청한다. 아프리카 코끼리를 기르고 싶어 했지만 매표소 안에서 번식력이 왕성하던 햄스터와 수명이 긴 자라로 만족해야 했던 엄마를 떠올리며 ‘나’는 매표소로 돌아가 걸음만이라도 코끼리처럼 걸어야겠다고 다짐한다. 이 작품이 처량하고 서글펐던 가장 큰 이유는 한 평 남짓한 매표소라는 공간에서는 아무리 生과 死를 다해도 꿈은 가질 수 없어 포기하고 접어야 한다는 잔인한 현실에 있었다. 그래서일까.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매표소를 지키려던 모성의 괴력에도 불구하고 너무 허망하게 죽어버린 한 인간의 마지막은 목메이는 빈곤의 현실을 상기하도록 침묵으로 시위하는 듯했다. 이제 삶이 동물원 우리 속에 머무는 동물들과 다를 바가 없다고 느끼는 ‘나’는 지금 울 시간이 되었기 때문에 우는 것이라 말한다. 왜 울어야 하는지의 이유보다 어짜피 울 것이기에 언제인지가 더 중요한 ‘나’의 독백은 역으로 ‘울지 않았던 시간’을 돌아보게 한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남겨주신 매표소, 나의 꿈을 접게 한 매표소, 동생들의 목구멍이 달려있는 매표소에서의 시간만이 내가 울고 싶어도 울지 않도록 해주는 시간이라 실은 울지 않으려 울음을 참았던 시간만이 내가 살아있는 시간이라 외치는 나. 그건 엄마가 죽어나간 매표소이기에 똑같이 죽어야 하는 곳이 아닌 엄마의 죽음을 갚기 위해서라도 두 눈 똑바로 뜨고 햄스터처럼 자라처럼 살아내어야 하는 절박함이 아니었을까. ‘사막여우 우리 앞에서’ ‘나’는 사막여우를 보며 지금은 울 시간이지만 돌아가선 사막여우처럼 울지 않겠다는 약속을 한 것은 아니었을까. 매표소에서 신문이나 껌이라도 사들고 집으로 오고 싶은 이야기, 휘영청 밝은 달을 친구삼아 오늘도 잘 견뎌내었다 자위하며 발걸음을 내딛고픈 이야기였다.

일상을 지켜내라

<모일, 저녁>
은 2009 현대문학상 수상집에서 만난 작품이다. 그때 현대문학상 수상자는 하성란이었지만 ‘알파의 시간’이 꽤 어려워 나는 김숨의 작품이 더 가깝게 느껴졌다.

“다 읽고는 식욕이 현저하게 떨어지는 작품이다. 아마 독자들도 시점이 점심이건 저녁이건 같았으리라 위로해본다. 주인공은 부모님이 삼십년 째 거주하고 있는 신탄진 빌라에 모일, 저녁에 들렀고 아버지는 전어를, 엄마는 기타 반찬을 준비하는 동안(겨우 두어 시간 정도)에 그 지겹도록 변하지 않는 일상을 바라보며 남일 이야기 하듯 부모님과 현재 처한 상황을 피비린내 나도록 냉정하게 묘사한다. 끝에 남는 잔상은 살기위해 뱀장어를 매일밤 백마리나 잡아대는 아버지의 몸부림, 그 얼굴위로 피어오른 연탄연기..참 매캐하고 그로테스크한 90년대 컬트 영화였다고나 할까. 이 작품이 <알파의 시간>을 넘지 못한 건 피비린내의 수위조절이 아니었을까 하는 뒤늦은 우려. 하지만 언젠가는 뛰어넘을 것으로 보이는 범상치 않는 서사의 흐름.”

꼭 일년 전에 나는 <모일, 저녁>을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소설집 속의 이 작품은 아홉편들 중 가장 얌전해보였다고 할까. 다시 읽어본 이야기속에는 뱀장어 잡는 일을 하는 예순 세 살의 아버지, 연탄불에 전어를 굽는 아버지의 뒷모습이 많이도 서럽다고 느껴졌다. 화자인 ‘나’는 삼십년 째 한 곳에 뿌리박힌 듯 살고 있는 아버지, 평생 죽을 때까지 은행 빚을 갚는 것에 전전긍긍하며 살아가야 하는 아버지가 모월 모일의 저녁에 담배와 소주를 사러나갔다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오늘밤 뱀장어라도 한 마리 더 잡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야기를 종결한다. 아버지는 뱀장어 잡는 일이 끔찍하다기 보다 사람들이 그것을 어찌나 먹어대든지 사람이 그렇게 무서울 수가 없었다고 중얼거린다. 아버지가 느낀 무서움은 지하에 오래전부터 늙은 채로 거기 살았던 할머니가 전어 굽는 냄새를 맡고는 올라와 밥상에 앉는 모습을 바라보는 딸의 두려움과 일치했다. 전어 대가리만 빼놓고 새까맣게 타버린 전어지만 어찌나 먹고 싶어 하든지 ‘나’는 그 살고자하는 인간들의 욕심과 마주하기 싫었던 것이다. 매일밤 백마리의 뱀장어를 죽여야 하루 일당이라도 떨어지는 아버지의 노동은 물리적으로 감각적인 자극을 제공하는 작가의 계산된 행위였을까. 아버지는 뱀장어 잡는 일을 사법고시만 십오년 째 준비하며 폐인이 되가고 있는 삼촌에게 전수하려는 의지를 가족에게 내비친다. 아무리 고시 준비생이지만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는 뱀장어 잡는 법도 문제가 되지는 않는 법. 특별할 것 없는 빈곤층의 어느 저녁을 스페셜하게 데워낸 작가의 글쓰는 체온이 구워지는 전어만큼이나 뜨겁게 느껴졌다. 무덤덤하게 늘 일상화된, 일상에 전어 굽는 냄새처럼 피할 수 없도록 스며든 슬픔일랑 어떻게 견뎌야 하는 걸까. 혹시 때가 되면 말없이 사라져야 했던 아버지의 칼같은 일상의 법칙, 지긋지긋하고 끔찍해도 변함없이 일상을 처리하며 살아온 관성의 이력이 그들의 오늘을 버티게 하는 것은 아닐까.

피할 수 없이 반복되는 각박한 일상에 스며든 슬픔은 <럭키슈퍼>에서도 기세등등했다. <모일, 저녁>의 아버지가 가족의 생계를 위해 매일 뱀장어를 잡는 행위는 <럭키슈퍼>에서 엄마가 매일 두부나 콩나물을 팔고 받아낸 동전을 세는 행위와 같았다. 엄마는 새벽 여섯 시부터 밤 열한시까지 슈퍼를 열어 유통기한이 넘은 각종 식품들을 팔고 있다. 말이 슈퍼이지 실상은 두평 남짓한 구멍가게이고 길 건너 ‘서울슈퍼’가 생긴 이후에는 노가다나 파출부, 건달들만 간간히 들러 물건을 사가는 실정이다. <모일, 저녁>에서 오랜만에 들른 딸에게 전어를 구웠다면 <럭키슈퍼>에선 서울슈퍼에 손님을 뺏기지 않기 위해 떼어 놓은 생태가 있었다. 그런데 생태는 날이 저물어 아가미에 거품처럼 벌레가 꼬여들고 생태를 사간 이웃들은 양심도 없다며 반품, 환불을 요구한다. 엄마는 생태들에 들러붙어 악다구니를 써대는 기생충을 박박 씻어 찌개를 만들고 온 가족은 할 수 없이 엄마의 눈치를 보며 찌개를 먹게 된다. 이 모든 일상이 가게에 딸린 방에서 혼자 잠이 드는 예비 고등학생 ‘나’에게는 큰일도 아니지만 그렇다고 작은 일도 아닌 매일의 평범한 일상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가게가 몰락의 기로에서 추락이 확실해지자 엄마는 기한 지난 식품처럼 아빠의 유통기한을 새로 써서 어떻게든 아빠를 팔아보겠다고 도움을 요청한다. 실직으로 유통기한이 한참 지난 아빠의 이마위에 날짜를 새로 적겠다는 엄마의 바늘이 머리를 콕콕 찌르듯 예리한 자상을 남기며 작품은 한치의 여운조차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팍팍한 일상을 견디는 방법은 일상을 바늘처럼 정확하게 지켜내는 것이었을까. 하루 종일 손님이 없어도 하루 종일 정해진 시간에 문을 열고 지켜야 하는 가게의 진리를 ‘나’는 알게 된 것이다. 이 작품은 88년 서울올림픽이 개최된 해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럭키 금성’이나 ‘럭키 서울’에 익숙한 내 세대에게 ‘럭키슈퍼’는 지금의 이마트보다 더 다정하고 알싸한 이름이다. 한창 가게이름들에 외래어가 접목되던 그 시기에 대형상가과 대규모 상인에 눌려 (올림픽 유치를 이유로)잘 지내고 있던 노점상들이 강제 철거된 그 시절 이야기가 생각나던 작품이었다. 서울엔 알고 보면 그렇게 럭키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았었다.

일상을 뒤틀어라

<흑문조>
에서 화자는 부모님에게 돈을 빌려 허름한 집을 마련한다. 부모님의 간이나 폐, 심장이라도 내다 판 심정으로 마련한 집이지만 집은 화목하고 따스한 기운과는 거리가 멀었다. 화자가 말하는 집은 한마디로 ‘흑문조를 기르기에 좋은 집’으로 요약할 수 있으며 ‘시멘트의 독성’과 ‘찌든 곰팡내’, ‘칠흑같은 어둠’을 그 골자로 하고 있다. 지하실엔 귀뚜라미가 뛰어다니고 계단을 사이에 둔 옆집 남자는 끊임없이 계단을 허물자고 요청한다. 이야기의 핵심은 보일러 기계가 말썽나 기술자들을 불렀고 그들은 터진 보일러 배관을 찾느라 집안 구석구석에 구멍을 파 놓게 되었다는 것. 구멍천지가 된 집안에는 지하에 있던 귀뚜라미가 뛰어다니고 어렵게 수리를 마치고 나서 화자는 흑문조의 꿈을 꾸게 된다. 흑문조의 범상치 않은 불길한 예견때문인지 화자는 흑문조를 알아보러 외출을 하지만 돌아와 보니 계단이 감쪽같이 사라져 있어 그제서야 부모님에게 진 빚을 떠올리며 흑문조를 잊게 된다. 화자는 누추하고 더러운 집안 환경에서 발생하는 일상을 다리를 잃고 허공을 맴도는 흑문조의 흉조로 감지하고 새가 예견했을지 모를 일상에 죽음같은 공포를 느낀다. 지하실에 벌레가 있고 보일러가 고장나고 옆집과의 트러블 같은 해프닝은 별스러울 것 없는 우리네 일상이지만 김숨은 삶이 어떻게 물질적 환경에 지배당하며 뒤틀린 일상을 잉태해내는지 그리고 그것은 얼마나 생명을 위협하는지 필사의 감각으로 화자를 해명하는듯 해보였다. 그럼 우린 흑문조 같은 헛된 불길에 휩쓸려 계단을 지켜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 어떠한 길조를 떠올려야 할까. 흑문조가 사라지면서 남겨진 건 여실히 존재하는 부모님에게 빌린 돈이었다. 흑문조를 맨 처음 누설한 건 손님의 한마디였다. 자격지심에서 비롯된 불길은 결국 자기예언의 다른 버전에 불과했다. 흑문조는 실은 스스로 길러오던 화자의 마음속 새였던 것은 아닐까. 다리가 부러져 날지 못하는 흑문조를 집으로 데리고와 기를 것이 아니라 흑문조의 상처가 아물 때까지 기다려주는 배려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새를 본래 좋아하지 않아서 인지 새를 통해 흉조와 길조를 예견하는 풍습을 존중하지 않는 편이다. 하지만 흑문조와 화자의 불안을 미세하게 중첩시킨 문장의 날개짓은 미학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이야기였다는 생각이다. 하얗게 안보이는 불안을 까맣게 보이는 현상으로 그려낸 흑문조는 흡사 김숨의 소설속 불사조는 아니었을지.

<흑문조>처럼 불길한 불청객은 <육肉의 시간>에선 미이라로 등장했다. 아이가 없던 마흔줄의 부부에게 낯선 여자의 방문은 일상의 질서를 망가뜨리는 원흉이었지만 여자는 또 다른 여자로부터 동요하지 않으려 자신을 정렬시켜 나간다. 유난히도 질서와 평온을 가정의 제일 소중한 가치로 여기는 화자에게 여자가 내뿜는 기운은 흡사 <흑문조>가 제공하던 불길한 예감과 동일해 보였다. 마침 고대 이집트 유물전시로 바쁜 박물관 연구원 남편은 ‘발굴’이나 ‘전시’에만 가치를 둘뿐 화자와는 소통이 되지 않는 고대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질 정도였다. 여자는 ‘그자들이 심장과 간과 폐를 가져갔다’ 말하고 온종일 찰흙을 치대어 그림자 같은 형상을 주조하는데 골몰한다. 여자가 형상의 구멍에 숨을 불어넣던 것이 흥미로왔는데 쓸모는 없었지만 그 숨을 통해 입체적으로 부풀려지는 동적 활력이 무섭게 느껴졌다. 쓸모없는 것에 숨을 불어넣는 행위가 내겐 작가가 하잘것 없는 일상에 문장의 힘을 실어넣는 행위를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인지 창틀에 세워진 형상들은 흡사 진시황릉에서 출토된 흙을 구워 만든 수많은 병마용을 연상케했다. 그들은 모두 죽어있지만 그 어떤 살아있는 사람보다 더 생생한 외양으로 여자를 엄호하는 수호신처럼 느껴졌다. 여자는 소금을 국자로 퍼먹고 미라처럼 부패하지 않는 채로 그들 부부와 동거했다. (믿었던)남편은 급기야 미이라처럼 누워있는 여자와 (기다렸다는 듯이)육체적 관계를 시도하고 관계 후 (예정되어 있던 것처럼) 사라진다. 지난 30여년 동안 종교처럼 매달려 왔다는 발굴관계자들도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화자는 여자를 통해 무엇을 보았고 무엇을 느낀 것일까. 중요한건 남편과 그들의 욕망이 사라졌다고 여자마저 사라진 건 아니었다. 부패하지 않은 채로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던 여자의 육체만은 더 분명한 진실인듯 화자의 눈앞에 변함이 없었던 것. 작가가 말한 <육肉의 시간>이란 지금까지였던 걸까. 지금부터인 걸까.

어느날 갑자기 <흑문조>가 날아든 일상과 마찬가지로 부패하지 않는 육체로 방문한 여자는 일상에서의 잠재된 불안과 소통되지 않는 현재시간에 대한 불만을 그 기저로 탄생한 환영은 아니었을까. 불임으로 예상되는 아내, 미이라같은 유물에 몰두하는 남편, 이들에게 있어 육체는 욕망을 실현할 수 있는 매개체가 되지는 못했을 것 같다. 마흔줄에 들어선 이들에게 아이라는 내세의 희망은 실현가능성 없는 미이라 같은 현상이지만 만약 육체가 부패하지 않고 미이라처럼 보존되는 것이라면 얼마든 시도해볼 만한 이벤트는 아니었을까. 가정의 질서를 위해 아내는 이 모든 환영을 참아내며 남편의 씨받이로서 미이라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까. 그렇게 본다면 <육肉의 시간>은 (미이라같은)육체를 인식하고 (미이라와의)육체적 행위를 받아들이는 시간은 아니었을지. 심장과 폐와 간이라는 육체의 주요장기는  없었지만 절대 썩지 않아 영구보존할 수 있는 욕망의 창고처럼. 그것은 혹 뼈와 살이, 피와 핏줄이 마구 뒤틀려 해체된 정신을 무의식적으로 지배하던 우리 육체적 욕망의 미이라는 아니었을까.

일상을 반복하라

반복되는 질문과 대답, 그러나 그곳이 어디인지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실체를 가늠할 수 없는 의문의 대상, 환상의 객체로서 보이지 않는 두려움이 일상을 조여드는 작품도 있었다. <룸미러>에서 ‘아이들이 깨면 어쩌려고 그래’는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 ‘그들은 오늘밤에도 그곳으로 갈 거 라더군‘의 한마디와 조우하며 작가는 계속되는 일상의 불안에 타당성을 부여했다. 실제로 작품 초반부엔 그저 큰 뜻없이 지나간 한마디였지만 페이지를 넘길수록 그 한마디는 훗날을 예언하는 어떤 정령처럼 다가왔다. 마치 헤어지자 헤어지자 반복하면 정말 이별하듯 그들은 오늘 만들어진 말로써 내일을 견디는 존재들이었다.

<룸미러>에서 1998년형 베르나 자동차를 타고 가는 일가족의 목적지는 친척의 장례식장이다. 이들 부부는 뒷좌석에 곤히 잠든 아이들이 절대 깨어나길 바라지 않는다. 운전중 어떠한 상황이 닥쳐도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깨어나면 어쩌려고‘ 이다. 잠든 아이를 태우고 운전을 수없이 해본 내 경험상 아이가 깨어나는 것이 이토록 조심해야 하는 일인가 싶어 짜증이 날 정도로 기분이 좋지는 않았다. 이 작품에서 아이가 깨어난다는 것은 일상의 평화가 깨어지는 것쯤으로 이해되었다. 그것은 아이가 잠든 시간이 가장 평화롭다는 뜻이기도 한데 결국 이들은 아이를 위해 아이가 놀라지 않았으면 하는 안전추구의 심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아이가 잠에서 깨어나 평화를 방해받는 것이 죽도록 싫다는 뜻에 다름 아닌 것이다. 이들에겐 왜 아이한테 신경을 써야하는 상태가 필요이상으로 부담스러울 만큼 과민한 사건일까. 사실 아이가 깨지 않는 시간동안은 아이가 깨어 있을때보다 더 불안한 상황이 많았는데 이들은 아이가 깨면 마치 불안이 더 확장되어 자신이 감당할수 없다는 식의 논리를 가진 것으로 보였다. 소설을 이야기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나는 이 작품을 외아들이면서 소심한 성격의 한 가장이 운전이라는 반복된 일상을 최대한 자기 방식으로 방어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이들은 장례식장으로 향하던 도중 도로에서 돼지나 새의 심리적, 우발적인 공격을 당하고 곧바로 <룸미러>에 비친 아이들을 확인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룸미러는 특정한 공간안에서 내재된 온갖 종류의 불안을, 그 불안의 뒷모습을 나타내는 실은 그다지 보고 싶지 않은 부분적인 거울인 것이다. 룸미러는 반드시 사각지대가 있다. 이들의 불안이 절정에 이를 때 차는 기름이 떨어지고 때마침 늘어선 행렬은 멈추게 된다. 잠든 아이를 놓아두고 이들은 벌어진 광경을 확인하러 각자 길을 떠난다. 그곳에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이들은 끝내 말해주지 않으며 끝까지 아이들이 깰 뻔한 걱정을 고집스럽게 주장한다. 무슨 광경인지는 중요하지 않고 혹시 그 광경으로 인해 아니면 자신들을 기다리다 지쳐 아이들이 깨어났을지의 여부만이 여전히 의미있다는 이야기인 것이다. 무서웠다. 우리가 두렵다고 생각하는 현상이나 실체는 사실 두려웠다는 기억의 발현일 것이다. 그런데 ’아이들이 깨어나면 안된다‘는 두려움은 ’경제를 살려야 한다‘나 ’건강을 위해 운동을 하자‘는 당연하고도 기계적인 메시지 같아 마치 그 메시지를 살리기 위해 그렇게 실천하는 듯이 느껴지는 강박적인 구석이 있었다. 아이들이 자신처럼 자랄까봐 두렵다는 남편의 고백은 어느정도 답이 되어줄 수 있을까. 그는 아이들이 깨어나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그냥 아이들이 두려운 것이었다. 벌레가 두렵기 때문에 벌레가 기어다니는 것이 두렵듯이. 본능적인 두려움이 어떻게 일상을 지배하는지 이 작품은 굉장히 현실적으로 서사를 이끌었다.

<내 비밀스런 이웃들>에서도 불안해 보이는 부부는 여전했다. 마흔 넘어 일자리를 구하려는 아내와 통조림 회사에 다니는 남편에게 이웃은 소통불가한 존재들로 위치했다. 집주인은 아들의 뇌수술을 빌미로 전세금을 올려 달라 요구하고 302호 여자는 치킨을 가로챈 데다가 202호 남자는 암에 걸려 곧 죽을 거라고 한다. 전세금을 친정에 부탁할까 전화를 하면 아버지는 늘 주무시고 계신다. 아내는 어느날 옥상에 자라를 버린 사람으로 오해를 받고 내친김에 욕실에 자라를 키우기 시작한다. 이 모든 아내의 일상에 남편은 오로지 ‘그들은 오늘밤에도 그곳으로 갈거라’는 선문답으로 대화를 마무리 한다. 남편은 촛불집회로 인산인해를 이룬 시내 광경을 매일밤 뉴스로 확인하며 맥주를 마시고 아내는 같은 뉴스에서 꼭꼭 닫혀있는 빌딩, 불이 꺼진 창문, 봉쇄된 입구만을 재차 확인할 뿐이었다. 시커멓게 서있는 빌딩처럼 영 소통불가한 이웃이었지만 남편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는 그녀에게 이웃남자는 ‘오늘밤 그곳으로 갔’을 거라는 답을 한다. 그곳은 대체 어디이며 남편은 정말 그곳에 간 것일까. 부부의 서로 다른 관심사가 조형해낸 일상의 불안은 비밀스런 이웃에 의해 그 비밀이 와해되는 과정을 겪게 된다. 애초부터 비밀은 존재하지 않았고 몰랐기 때문에 비밀이 된 것이기 때문이다. 비밀은 욕실의 자라처럼 하나가 둘이 되고 둘이 다시 하나가 되는 비밀스런 경향이 있었을 뿐인 것이다. 이 작품 역시 전세사는 고단한 맞벌이 부부의 건강치 못한 일상의 풍경을 살짜기 시국의 뉴스로 탓을 하며 비밀아닌 비밀을 은밀히 전달하는 수사를 선보였다. 남편이 간 곳이 그곳인지의 여부보다는 이웃마저 그곳으로 갔다고 말하는 불안의 공감대, 공감의 노출, 그 사실이 더 중요해보였다. 혹시 현대인에게 이웃이란 각자의 불안을 소통하면서 끊임없이 비밀을 생성하는 공동작업의 동반자는 아닐까. 이 작품에선 비밀도 이웃간 일종의 균형장치로 이해되었다. <룸미러>와 함께 경제적으로 여유롭지 못한 가정이 현실의 불안을 극복하는 방식은 역으로 불안을 규격화, 정형화하여 정해진 불안으로 얼마간의 안정을 느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김숨이 조제한 말들은 마치 불안하라, 불안하라 주문하듯 들렸고 역으로 그 주문 때문에 다소나마 불안을 잊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김숨은 별스럽지 않은 인생 다반사의 풍경을 점점 긴장스럽게 절정의 파국으로 치닫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꼭 저러다가 무슨 일이 일어날것만 같은 예감과 불안을 선사하는 탁월한 긴장유발자.



- 문장 웹진 <흑문조> -


   여자가 숨을 불어 넣던 구멍들을 따라 균열이 부챗살처럼 번져 나갔다. 249p


아홉편의 작품들은 질병의 축제이자 축제로 생겨난 일상의 환부로 가득했다. 쉽지 않았다.  아플 것은 알았지만 확인하는 것은 괴로운 일이다. 어쩌다보니 서평이 줄거리 중심이 되었다. 그만큼 모든 이야기의 구성이 탄탄하고 놓칠수 없는 이야기였다. 가난과 질병, 죽음, 생계의 고통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벗어날 수 없는 가장 큰 현실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이 현실에 짓눌려 현실을 현실에서 현실처럼 살아내지 못한다면 어쩐지 현실적으로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는 만큼 보이는 것이 현실인걸까. 김숨의 소설은 희망을 쉽게 발견하기는 어렵다. 외려 발견하려 할수록 저수지 밑으로 침잠하는 성격을 가졌다. 작가가 그러했듯 그냥 소설을 가만히 관찰하고 느끼는 것이 최선으로 보인다. 결론보다는 인식자체가 더 중요해보인다. 그런데 가만히 그 저수지를 향해 미약하나마 가녀린 숨을 불어 넣다보면 어느새 미세한 균열의 파동이 감지된다. 고요하게 떠오르는 낯설은 존재, 살아있는 것인지 죽어진 것인지 구분할 수 없는 미지의 기대, 예민한 촉수로만 느껴지는 감각의 실체, 그것은 분명 내가 살아있기에 반응하는 삶의 자각은 아닐까. 어떤 자각을 하였을지는 김숨의 숨을 통해 부풀려진 우리 감각의 정도에 있을 듯하다. 그것은 어느날 갑자기 날아든 한마리의 새처럼 뜬금없이 거실에 뛰어든 한마리의 귀뚜라미처럼 누군가 옥상에 두고간 한마리의 자라처럼 파다닥 꿈틀거리는 긴장의 호흡일지 모른다. 숨막히는 현실과 숨쉴틈 없는 일상에도 여전히 숨쉬고 있다는 조금은 적나라한 우리 생명의 실상일지 모른다. 모든 죽어가는 생명에도 꿈틀거리는 마지막 의지는 살아있듯 현실의 맥박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끈질기고 더 위대한 것이 아닐까. 문득 살아 숨쉬는 이 시간에 감사하고 싶다. 그녀가 소설에 숨을 불어 넣으면 우리는 이곳에서 살아 숨쉴 수 있다. 아마도 그것이 그녀가 이토록 힘겹게 숨쉬는 이유가 되지 않을까. 더불어 우리 역시 그녀처럼 우리 삶에 마지막 안간힘을 다해 살아있는 숨을 불어 넣어야 하지 않을까. 살아 숨쉬는 그 마지막 순간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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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1-04-08 13: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 잘읽었습니다~ 지금 읽고 있는 책인데 궁금증에 대한 질문의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네오 2011-04-09 08:04   좋아요 0 | URL
거기 네오 맞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