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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의 고군분투 생활기
제스 월터 지음, 오세원 옮김 / 바다출판사 / 2011년 1월
평점 :
절판



죽음을 말하는 숫자

웃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웃기지 않았다. 그러나 울 수도 없었다. 세상엔 웃을 일도 울 일도 많지만 이번 일은 남들이 아닌 꼭 내 일 같았기 때문이다. 바다건너 중년 미국남자의 일이라고 하기엔 많은 상황이 지금의 나와 기분나쁘게도 일치했다. 그래서 처음엔 ‘가장 웃긴 올해의 책’이라는 타임지의 메인카피에 낚였다는 생각을 했지만 곧 ‘현재 우리네 삶을 보여주는’이라는 앞의 수식 때문에 멈칫거렸다. 지금 내가 사는 모습이니 웃긴 게 맞다는 생각이 들었고 웃긴 이야기라고 꼭 웃으라는 법은 없으니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웃기지만 인간은 복잡한 동물이므로 슬플 수 있으니 이런 이야기에 연민을 느낄 수 있겠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내 이야기가 아닐 경우에 해당되었고 누군가 콕 집어 나들으라고 한 이야기 같다면 겉으론 태연한 척해도 속으론 피를 흘리는 것이 또 우리들 속내인 것이다. 이번 소설의 가장 큰 악덕은 바로 속으로 멍들도록 적나라하게 현실적이었다는 것, 그래서 이야기는 고래심줄만큼 질기고 이불속 진드기만큼 끈덕지다는 것이 역으로 미덕이 되는 소설이었다. 산다는 건 이렇게도 낱낱이 적어놓고 보면 영화보다 더 기가막힌 것일까. 이 소설의 99%는 그 기가 막힌 生의 딱 일주일간의 이야기다. 기자출신의 독설적, 독단적, 독보적, 마침내 독창적인 글빨에 시종일관 기가 짓눌려 독서를 했다. 나는 정말 이 책을, 이 작가를 견뎌내느라 고군분투했음이다. 흡사 이 작품의 주인공이 견뎌내던 악몽의 일주일과도 같이.

주인공은 사십대 중반의 전직 신문사 경제기자이다. 기자 경력만 (하필, 젠장)18년이라 들었다. 그런데 어찌어찌하다 해고를 당했단다. 그래서 더는 할부금을 낼 수가 없게 되었단다. 알다시피 한정된 월급으로 도시를 살다보면 나는 ‘각종 대금을 지불해 내려 이 곳에 왔던가’하는 생각이 월급날, 그날 하루 떨어지는 낙엽마냥 도처에 정처없이 굴러다닌다. 신용카드 대금, 아파트 관리비, 보험료, 각종 세금, 휴대폰을 비롯한 각종 공과금, 아이들 학원및 병원비, 기타 책값등의 문화생활비, 의류및 잡화 지출비 등등 그것들을 빠짐없이 내면서도 그 나머지로 식비까지 충당해야 하는 우리 인생이 어김없이 날아드는 월말 고지서만큼이나 지긋지긋해 보인다. 그런데 이런 다람쥐 쳇바퀴도는 생활에서 딱 한 달만 월급이 끊겨버리면 우린 마트에서 카트밀며 일주일치 먹거리를 살 수가 없고 그때 그때 한 개씩 우유를 사먹으러 세븐 일레븐에 갈 수 밖에 없으며 월급이 세 달이상 밀리면 세븐 일레븐이나 나인 일레븐이나 숫자상으로 큰 차이를 못 느끼게 되는 것이다, 라고 이 소설은 말한다. 그건 전직이 신문기자였건 신문팔이였건 신문배달이었건 월급으로 할부금을 조달하는 신세라면 다 똑같다고 말이다. 경제도 싫고 기자는 더 싫지만 그 둘을 합쳐놓으니 손해보는 일은 절대 안하고 살 것만 같은 사람이었다. 또 (계산적인 시장분석에 의해)아내는 얼마나 예쁘고 글래머러스 했던가. 이들의 토끼같은 두 아들은 얼마나 귀여울 것인가.(우리 소설같았으면 아들 하나, 딸 하나로 완벽성을 강조했겠지만) 절대 저임금 노동자의 자녀들이 다니는 집 앞의 공립학교에는 애가타서 보낼 수가 없는 아이들인 것이다. 하루종일 TV로 사시는 노망기가 있는 아버지만 제외하면(아버지가 노망인 이유는 소설의 결말에 반전제시용이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잡지에서 등장할 것같은 빅토리아 풍의 미국 이층집에서 닛산 알티마가(짜증나게 이 책은 줄곧 올티마라고 번역했다. 설마, 기아 옵티마의 오타인줄 알았다. 그래서 닛산이 싸구려라고 조롱하는 것에 자주 마음이 상했다. 닛산은 그들의 리스트에라도 등장하지...닛산이하는 그럼 쓰레기란 말인가) 아닌 BMW 5 시리즈쯤은 거뜬히 구경할 수 있을 것 같은 모양새인 것이다.(자가용과 옷차림을 제 2의 신분과시용으로 생각하는 우리네 정서에서 보아도 닛산은 쫌 그랬다. 우리도 맥시마 사느니 차라리 SM 7도 아닌 SM 5 사겠다. 몇 십 킬로 떨어진 사립학교에 아이들을 등교시키는 차량이라면 렉서스 이상은 되줘야 하는 거 아닌지.) 암튼, 이 마흔 여섯의 펜대 굴려 먹고 살아오신 아저씨가 알티마가 아닌 맥시마를 끌고 두 아들이 아침에 시리얼에 부어먹을 우유를 사러 세븐 일레븐에 가는 장면이 소설의 시작이었다. 기실 세븐 일레븐(7/11)으로 가는 길은 주인공 맷에게 있어 뉴욕의 테러 나인 일레븐(9/11)에 버금가는 인생의 테러, 테러의 일상, 그것의 시작이었다.

미국을 보고하는 방법

작가는 소설구성상 처음과 마지막을 ‘세븐 일레븐’으로 배치했다. ‘또 다른 7/11’이 그 시작이라면 ‘세븐 일레븐 이후’가 그 마지막이었다. 미국에서 9/11은 어떤 의미일까. 우리에게도 9/11은 엊그제 터진 일본의 쓰나미만큼이나 충격과 공포의 상처이다. 작가는 미국사회에서 9/11 테러로 인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24시간 편의점인 7/11에서의 ‘개인적인 추락’과 중첩시키며 누구에게다 다가오는 삶의 두려움을 극적으로 밀어 부쳤다. 그때 상상할 수 없었던 뉴욕의 빌딩이 무너졌다면 오늘 예기치 않았던 맷의 슬리퍼도 미끄러졌다고. 맷의 어머니는 임종하기 전에 ‘네 생각엔 7/11이 또 일어날 것 같니’라며 9/11을 우리 일상속에 체화된 세븐 일레븐으로 치환해놓고 돌아가셨다. 말도 안되는 걱정거리를 염려하며 삶을 마감한 어머니에게 9/11은 살아생전 어떤 의미였을까. 맷은 지구온난화, 지진과 같은 천재지변, 총기사고나 묻지마 범죄같이 하루를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피할 수 없는 극적인 죽음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며 살아왔다. 그런데 어머닌 임종의 순간까지도 7/11으로 변신한 9/11 테러를 언급하며 앞으로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는 아들의 목소리를 끝내 확인하고자 했다. 즉, 자신의 후대에게는 절대 9/11 테러에 준하는 끔찍한 사고는 더 이상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사라지면서 남겨지길 바라는 눈 감기전 최종 마지막 희망이 세븐 일레븐이라는 착각으로 튀어 나와버린 것이다. 그런데 과연 하루 종일 오픈중인 세븐 일레븐이 도시 삶의 공포 아이콘이라는 착각은 정말 착각에 불과했을까. 이 작품을 덮고 나니 편리하라고 24시간 내내 열려있는 세븐 일레븐이 꼭 24시간 노출되어 있는 원자력 발전소와 같이 느껴졌다. 그건 꼭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이 작품의 묘한 매력과도 같은 어머니의 농담같은 유언이었다. 그건 어쩌면 어머니의 아들인 맷이 자신의 아들에게 아버지로서 소설의 마지막에 하고 싶었던 말은 아닐까. 그건 대략 십 오년전 쯤 ‘요새는 7을 일레븐으로 읽느냐’고 물어보신 내 어머니가 내게 하고 싶었던 말씀은 아닐까. 엊그제 일본의 지진과 쓰나미만 보아도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는 우리네 현실을 생각한다면 그건 오늘날 지구라는 같은 공간에 삶이라는 같은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그 누구라도 마지막에 하고 싶은 말일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는 그러한 일이 절대 일어나지 말기를 바라는,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만큼은 마주치고 싶지 않은, 만약 꼭 한번 마주쳐야 한다면 그건 나와 내 가족이고 싶지는 않은 보통 사람들의 이기, 암묵적인 희망, 그래서 말 안해도 알만한 소심한 비겁인 것이다.

맷은 아내 리사를 보았을 때 ‘우리는 서로에게서 우리를 파멸시킬 가능성을 보았고 우리 각자의 7/11에 이끌렸는지 모른다’는 기억을 통해 7/11이 자본주의를 살아가는 물질적 ‘욕망의 습관’이라는 꽤 효율적, 경제적 암시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얼마나 위험성을 내포한 무의식적인 두려움이었는지 깨닫는다. 숫자로 표식화된 7/11의 다층적 의미는 주로 도표와 그래프, 통계수치라는 데이터를 가지고 기사를 써온 맷에게 가장 분명한 생활의 단서이자 인생의 증표를 다양하게 프리젠테이션한다고 생각되었다. 맷이 보여주는 프리젠테이션은 정상적인 사람들은 내일을 위해 잠자리에 들었을 시간, 될 대로 되란 심정의 사람들이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자신이 가진 절망의 패에 불을 붙이고자 찾게 되는 심야의 장소 세븐 일레븐이 내포한 ‘위험경고장’이거나 ‘안전독촉장’의 사회적 의미를 함의하고 있었다. 그건 무심코 들르는 편의점에서의 총기살인 사건만큼이나 내 피부에 와 닿는 공포는 아니지만 문제는 우린 바로 그렇게 무의식적으로 편의점에 들른다는 ‘습관성’과 ‘불규칙성’에 있다. 이 철저한 자본주의 도시에서 바쁘게 살다보면 꼭 한번은 세븐 일레븐에 들어갈 일이 있듯이 만의 하나 운 없게도 총기살인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365일 영업중인 광고문구인 것이다. 작가는 9/11이 주는 기호적 상징과 도처에 퍼져있는 세븐 일레븐이 제공하는 일상적 의미의 공통점을 무의식적인 공포, 무방비 상태에서의 죽음, 무자비한 파산과 연결지으며 미국에서 미국을 견디는 방법을 차분히 보고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맷은 이 ‘7/11’이라는 공포의 기억을 어떻게 빠져나왔을까. 과연 빠져 나오긴 했을까. 이 작품의 제목이 ‘고군분투 생활기’임을 감안하면 잘 헤쳐 나왔다는 생각도 들지만 정작 맷의 고군분투하는 생활은 바야흐로 이제부터 시작일 듯 한데 그렇담 아직 공포의 터널은 진행중이라는 말일까. 그런데 우리네 인생은 무엇이든 처음 시작이 두려워 그렇지 막상 시작하고 나면 또 그렇게 두려울 것도 없이 적응되고 마는 것이 인생의 오래된 관성법칙 아니던가. 가만 보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은 두려움을 알고 처절하게 느껴보았기 때문에 다음을 시작할 수 있는 무던함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그런 의미에서 소설 초미에 ‘우리는 두려워하는 것만을 두려워할 뿐이라는 말을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는 맷의 의미심장한 회상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시사한다. 우리는 두렵다고 생각되는 것, 내게 두려움을 주었던 그 기억이 두려운 것이지 두려움의 실체가 두려운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두려움의 실체는 바로 겪어내는 순간부터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 그래서 사실 두려움 속에 던져진다는 것은 그다지 두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 그것이 두려움의 본질임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던 듯하다. 맷의 이야기는 사실 두려움의 실체를 겪어내기 이전의 불안과 공포에 초점을 둔 이야기였기에 책을 덮어 낸 지금 맷이나 우리나 그다지 두렵지 않다는 것, 그것 또한 이 소설이 이룩한 성취가 아닐까.

이 작품이 나름의 희망을 암시하는 건 바로 그 두려움이라는 소설적 서사가 겨냥하는 정확한 좌표지점에 있었다. 실은 망하고 나면 어떻게 될 것인지에 대한 두려움이 99이고 막상 망하고 난 후 겪어내는 그것은 두려움 그 후의 평화였다는 점에서 우리는 두려움의 본질과 맞장 뜰 기회를 마련한 것이다. 작가는 맷이 파산에의 두려움에 떨고 있는 일주일간의 상황과 심리상태를 지겹도록 시시각각 중계하면서 같은 고통에 동참한 독자들로 하여금 진한 인삼엑기스와도 같은 동질감과 함께 사후 평화를 유도한다. 불행도 (누구나에게 공평하게)내 일이니 당연 평화 역시 남의 것일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그건 ‘망해도 견뎌볼 만하다’, ‘망하고 나니 더 자유롭다’, ‘망했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미국 언론인 출신 작가의 자기 실태보고서였기에 더더욱 리얼하고 애틋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고 행복해지기 위해 굳이 망하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냥 망해도 행복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사회적 지위의 추락, 경제적 파산등 표준적인 표현도 있으련만 나는 굳이 ‘망했다’고 짧게 말하고 굵게 적고 싶다. 처절하게 망해본 적 있는 사람들은 대체로 각설하고 ‘망했다’고 말한다. 수식하고 설명하는 건 기회의 문제인데 그건 그 다음의 일이기 때문에.

미국을 견디는 방법

결국, 이 소설은 해고당한 전직 신문기자가 맥시마의 밀린 할부금 3만 달러를 갚기 위해(주택 담보 대출로 차를 샀으므로 집을 잃지 않기 위해) 일주일 동안 동분서주하게 세븐 일레븐을 맴돌다 지치는 이야기였다. 어이없지만 미치도록 슬픈 사실이었다.(차종이 BMW만 되었어도...) 꼭 무리한 대출로 집을 구입해 꿈에 그리던 아파트의 소유주가 되었으나 이자에 못이겨 그 대출금을 갚기 위해 집을 팔아야 했던 내가 아는 이웃들의 이야기와도 같았다. 어떻게 마련한 생애 첫 집인가. 맷에게 그 집은 지난 몇 년 동안 부와 안정의 척도이자 상징이었던 집이었다. 집을 잃는다는 것은 허울좋은 중산층의 위세뿐인 그 허울을 벗어던지는 일이었고 그것은 곧 사회적 지위의 추락이자 개인적 자존심의 박탈이다. 불행은 꼭 한꺼번에 팩키지로 청구된다고 그와중에 아내는 왕년의 남자친구 척과 외도중이시다. 대출회사는 늘 그렇듯 이쪽에선 죽어도 연락이 되지 않고 사립학교는 더 이상 보낼 처지가 되지 않고 아내는 이층에서 컴퓨터만 끼고 살아간다. 이럴 때 등장하는 하필 대학시절 맛본 적 있는 마리화나의 유혹은 어쩐지 통속적이고 진부하단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투자정보를 시 형태로 제공하는 웹사이트, 남들이 시도한 적 없는 금융문학에 대한 열망으로 사업을 말아먹은 맷의 낭만성을 고려해보면 마리화나야 말로 막다른 절벽에서 마주친 일생 일대의 행운이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누구에게나 공감줄 수 있는 시구절로 주식시장의 등락을 말하고 투자소식을 전한다면 세상이 좀 따스해지는 거 아닐까 싶어서이다. 물론, 세상 따스하자고 내놓은 발상이 아님을 잘 알지만 도표와 그래프에 지친 그 옛날 문학청년이 시인의 감성으로 경제기사를 쓰겠다는 야무진 계획은 자신이 진단한 것처럼 실없는 오만으로 보이진 않았다. 맷은 나름의 비즈니스 모델로 ‘시인’의 ‘시적 감수성’을 차별화전략으로 내세웠지만 세상은 그러한 감수성을 인정하지 않고 ‘시인’의 경제적 전망만을 평가했을 뿐이었다. 자기 자신이 늘 분석해오던 많고 많았던 그 뻔한 경제기사처럼.

이에 반해 맷은 시를 통해 세계금융에 대한 분석과 그 체제하에 놓여있는 인간들에게 멋진 시를 쓰는 것으로 아쉬운 낭만을 대신했다. ‘세계금융의 위기는 우리 금융자체로부터 기인한 것이며 자본을 창출하고 투자하는데 별다른 규제가 없었던 우리 시스템 전체에 결함이 있는 것이니 그런 면에서 보자면 바로 우리들 인간성 자체까지 흠이 있다는 것’이라는 뼈아픈 깨달음을 시적자아를 빌어 토로한다. 어느 신문사, 어느 은행의 사장에게 말하고 싶었는지 모르지만 작가는 이 말이 하고 싶어 시인이 되기로 한 것은 아니었을까. 이런 세상에선 아무것도 우리가 소유하는 것은 없으며 우린 단지 그것들을 잠깐 빌려 쓰는 것(아버지와 아내마저도) 존재일 뿐이라는 맷의 고백은 그것이 경제기사가 아니라 비경제적 시였기로 흠칫했던 대목이었다. 이 책에선 시말고도 동화같은 순수성을 행복의 모티브로 삼아온 맷의 애틋한 유년기도 있었다. 의외로 나는 맷의 동화가 시작되고 완성되는 이야기에 눈물이 날만큼 뭉클했다. 맷은 하층 노동계급 신분으로서 목재소의 작업복을 자랑스럽게 여기던 아버지로부터 어린 시절 작은 레고 조각으로 만든 오두막집의 꿈을 키워온 아들이었다. 맷이 꿈꾼 통나무집은 결코 화려하지 않지만 가족들과 살면서 행복을 키우는 장소였을 터이다. 이 꿈은 자신의 아들에게도 이어져 닌넨도 위가 아닌 집 앞 뜰에 지어진 나무놀이집으로 자리매김한다. 그러나 인생은 아이러니하게도 아내와 바람난 럼버랜드의 왕자, 바로 아버지와 같은 직업을 가진 목재소 주인 척을 통해 그들의 꿈이 형상화된다. 척에게 아내와의 외도를 비난하고 싶었던 맷은 척이 싣고 온 나무들로 노망든 아버지와 두 아들, 그리고 자신마저 합세해 ‘2번 국경요새’를 완성하게 된다. 시작부터 전혀 그럴 의도가 없었지만 무언가를 완성하고 나면 그 과정은 정말 소설같지 않은가. 작가는 묻는다. 맷은 왜 실직을 당하기 전까지 마음만 있었지 아이들에게 나무놀이집을 지어주지 못했던 것일까. 왜 하필 다 망해서 경찰서로 끌려가기 직전에 나무놀이집을 완성할 수 밖에 없었을까. 맷의 아버진 치매가 걸려도 자신이 행복을 위해 묵묵히 해온 그 작업의 과정만큼은 잊지 않고 있었다. 아들을 잊고 손자를 잊고 자신마저 잊었지만 나무집을 만드는 법을 잊지 않은 아버지의 망치질은 이 작품이 울려주는 깊은 종소리는 아니었을까.

내가 이 작품에서 희미하게 엿본 미국의 희망이라는 건 바로 그들이 한나절 땀흘려 가꾼 나무놀이집이 아닐까 싶었다. 맷은 우연히(어쩌면 필연적으로) 다시 경험한 마리화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몇 달간만 장사를 해서 밀린 대출금을 갚고 아이들을 사립학교에 보낼수 있을 정도만 되면 그만두리란 야무진 계획을 세운다. 세븐 일레븐에서 우연히 조우한 제이미와 마약파는 변호사 데이브의 꾀임에 넘어갔다고는 하지만 중요한 건 맷이 이미 마리화나의 위력을 알고 있다는 데 있었다. 하필 머리좋은 협잡꾼 데이브와 차종이 닛산 맥시마로 같다는 건 그들의 사회적 지위와 그에 따르는 도덕성, 경제적 능력이 결국 거기서 거기라는 암시로 느껴졌다. 맷은 위드랜드 마리화나 공화국, 시체들을 보관해 놓은 영화세트장 같은 수경재배실에 넋을 잃고 마리화나를 경제적으로 환산하기 시작한다. 이는 꼭 아내가 쇼핑강박증에 걸려 물건을 사재기하는 심리와 다를 게 없는 어리석은 탈출방안이었다. 맷은 기자시절 취재차 마약에 중독된 청소년들을 위한 봉사 프로그램을 발표하는 기자회견장에서 (병원관계자)리사를 처음 만나 지금까지 불법과 대치하는 중산층으로(그래야 불법을 비난할 수 있으니까) 살아왔다. 맷이 마약을 인정하는 일은 결국 자기 자신과 아내, 자신들로 태어난 아들까지 전 가족 모두를 부정하는 결과였다는 점에서 맷의 선택은 예정된 파국을 불러오는 비극의 단서라 생각할 만했다. 그런데 작가는 파국을 목전에 두고 그 마지막 시점에 나무집을 지었다. 오늘 지구가 멸망해도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심정으로. 소설 속 아버지와 아들, 손자, 그리고 적수인 아내의 남자, 거기다 자신을 잡으러 온 경찰까지 합세해 비록 내일이면 팔리고 말, 게임이나 할 아이들이 절대 놀아보지 않을 집 앞에다가 말이다. 지어놓고 보니 누가 뭐래도 아버지와 아들과 손자의 집인 것은 분명해보였다. 그래서 마리화나와 맞바꾼 통나무집은 다행히도 계속해서 미국의 영원한 동화같은 꿈으로 남을 수 있었다. 울어야 할까. 어쩔 수 없이 웃어드려야 할 그러다보면 서로 마주하고 웃을 수도 있지 싶은, 이 책은 시인이 쓴 금융문학이 맞기는 했던 것 아닐지.

행복을 말하는 숫자

아버지를 그리는 아들의, 아들을 위한 소설이었다. 소설에서 자동차 세일즈를 하던 아내 리사의 아버지, 두 번째 가정으로서 그녀가 열두살 때 심장마비로 죽은 부성의 부재를 노망든 자신의 아버지가 멋지게 부활시키며 반전의 홈런을 선사했다. 맷은 망하고 나서야 중산층 시절 원망과 분노와 가식적인 평화로 행복한 척 해왔던 자신의 부부관계를 반성하고 다시 아내를 바라본다. 이때 추락과 동시에 동반상승되던 행복주의 가치는 이미 미국의 것만은 아니었다. 차 없이 버스로 출근했지만 버스를 타지 않았다면 버스 안에서 한 쪽 장갑을 잃어버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아버지의 미소는 절대 만날 수 없었을 것이다. 맷은 위선적인 중산층 쓰레기의 손에 남들을 자기기준으로만 평가하고 비웃던 같잖은 얼굴을 묻고 소리죽여 울었다. 턱없이 낮은 연봉의 회사에 재취직해 차근차근 재기의 기회를 준비한다. 비록 나무놀이집은 내 집 앞의 뜰이 아니라 삼층 아파트 베란다에서 내다 보이는 건너편 잔디위에 놓여 있지만 맷은 미국인이므로 한 번 더 해볼 자격이 있지 않은가. 파산하면서 부채에서 벗어나자 행복의 가능성을 엿보게 된 맷의 마지막은 많이도 쓸쓸했다. 자신을 위한 위로처럼 보이는 독백은 마음을 무겁게 한다. 맷이 다시 재기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1년? 3년? 아니면, 5년...?

돈이 있어 보았다. 집도 있어 보았다. 그때 행복했는지는 모르겠다. 다만 지금 생각해보면 꽤 여유로운 편에 속했던 그 시절엔 왜 그렇게 남의 집, 남의 차, 남의 옷들만 보였는지 모르겠다. 정원이 많은 유치원은 위생상 문제가 있을 것 같아 좀 더 멀어도 소수정예의 값비싼 유치원에 아이를 보내었다. 우리 생활 패턴상 중형차가 필요없었지만 아파트 주차장에 세워진 이웃들의 차에 빠지지 않으려 무슨 경쟁하듯 차종을 바꾸었다. 같은 라인에 사는 아줌마들은 이사를 오면 약속이나 한듯 제일먼저 전세이냐 자가이냐를 스스럼없이 물어보았다. 간절히 여행을 원한 것도 아니면서 아이 친구가 제주도를 다녀왔다고 하니 우린 그럼 일본에 다녀오자며 명절연휴를 꼬박 일본에서 지내고 돌아왔다. 입학하고 아이 첫 생일이라 이벤트 회사에 맡기자는 학부모들 틈에 끼어 연회장을 빌려 무슨 칠순잔치 하듯 생일축하 쇼를 연출했다. 별 고민없이 매사가 그런 식이었고 그것에 특별히 문제를 느끼지 못하고 살아왔다. 돌이켜보면 시사매거진에나 나올 법한 일을 눈하나 깜짝 않고 태연하게 치루어 내었다. 이 책의 맷처럼 모든 것이 그렇게 문제없이 잘나가고 있을 때(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생각할 때) 망상적인 자기유혹에 어이없게도 빠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그건 시로 경제기사를 쓰겠다는 자기 성공에 대한 고집같은, 여지껏 살면서 운빨은 괜찮은 것 같은 자기 우월, 예를 들면 어떤 막연한 장소에 근사한 술집을 차려놓고 갑자기 자기인생의 낭만을 찾아보겠다는 그것이야 말로 자신의 삶을 바꾸어줄 묘안으로 여겨지는. 나 역시 그 유혹에 빠져들어 맷처럼 호되게 실패를 맛보았고 파산직전에 또 그 이상의 유혹에 빠져들 뻔 했지만 운좋게도 아직 마리화나같이 치명적인 한방은 만나지 못한 실정이다. 매일 저녁 한강변 아파트 탑층에서 한강다리 너머 타오르던 노을을 만끽하다 갑자기 줄어든 모든 환경은 꼭 한강에서 투신하는 느낌의 인생의 추락이었달까. 돈이 없고 나니 비로소 나는 돈이 있던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나. 다시 재기할 수 있을까.

나처럼 경제적으로 큰 실패를 맛본 사람이라면 이 소설은 어느 정도 답이 되줄 수 있을 것 같다. 혹 답은 못되어도 하루 이틀 유익한 벗은 되 줄 것 같다. 장갑을 잃어버린 아이에게도 호주머니가 있듯 찾아보면 불행속에도 행복은 있는 거라고. 이 인분의 아이스크림으로 각자 배를 채울 순 없겠지만 한 개의 아이스크림이라도 나누어 먹을 수 있는 그 행복이야말로 더 달콤하지 않겠느냐고. 행복은 그렇게 모두 갖추어지고 모두 완성되어야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부족해도 서로가 갖추어 가며 완성되는 그 모습을 보는 것이 더 큰 기쁨이라고. 혹시 당신도 더 큰 집 더 큰 가구를 좇아 오늘도 더 큰 거짓으로 행복을 연출하고 돌아왔다면 빨리 그 거짓을 내려놓으라고. 지금부터라도 영혼이 깃들 수 있는 집을 찾아 첫걸음을 내 딛으라고.

그래, 할 수 없이 7/11이 9/11의 다른 버전이 아니고 행복을 편리하게 구입하는 행복편의점이 되도록 마음을 바꾸어야겠다. 일곱 시에 일어나 열한시가 될 때까지 하루 종일 행복하라는 숫자로 내 맘대로 변환해야겠다. 원칙도 기준도 없지만 이 책을 읽었기에 떠오른 생각, 혹시 당신도 나와 같은 생각이라면 좋겠다. 일본에 쓰나미가 밀려오고 미국에 테러가 닥쳐와도 우리 행복의 숫자만큼은 이견이 없었음 좋겠다. 아쉽지만 그것만이 내가 이 책을 읽었다 하며 당신에게 건낼 수 있는 최선인듯 하다. 그리고 내 자신에게도 다짐할 수 있는 기회인 듯 하다. 세븐 일레븐, 시인이든 기자이든 한번 망해본 동병상련의 마음이야 잠시 제쳐두고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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