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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롱뇽과의 전쟁
카렐 차페크 지음, 김선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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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나는 이 책을 독파하자마자 침을 꿀꺽 삼키었다. 그제서야 재미가 종결된 시점에 찾아오는 본전같은 허기, 정신이 부른 대신 고파지는 육체의 신호, 하지만 이번엔 절대감에 맞닥뜨린 방어적인 본능으로 포장하련다. 내 짧은 소견으로 이 사람은 문학하는 작가라기보다는 예술하는 천재라는 생각이 드는데 카프카와 쿤데라가 체코사람인지 바로 생각나지 않는 나로서는 체코라는 나라를 다시 보게 되었다. 우리만 해도 김연아이후 스케이팅하면 어디서라도 좀 아는 체 하고 싶어지듯 체코국민은 카렐 차페크 때문에 적어도 노벨문학상 수상기회를 놓쳤다고 무슨 올림픽 금메달이나 되는 듯 야단법석을 떨어 댈것 같지는 않기 때문이다. 별거 아니다라는 생각은 속성을 꿰뚫어 보는 통찰력의 견지인데 이 사람의 농담은 고만고만한 동시대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이미 뛰어넘은 월반수준으로 느껴진다.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 함으로써 고개숙임보다 더 큰 깨우침을 준다.

나는 아주 옛날부터 감히 범접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경외스런 절대자를 대할 때면 이상하게도 일단 내 배부터 채우고 싶다는 자포자기 심정이 들고는 했다. 일종의 정신적인 항복의 의미로 그것을 메우고자 내 속에선 육체적인 보상을 구하는 시스템이 활동을 재개한 것일까. 인간이란 아무리 관념적인 세계에 빠져있다가도 결국 때가 되면 목구멍을 달래주어야 하는 단순한 생명체인데 나는 이 자가반응 시스템 자체가 이 소설의 메시지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을 읽은 끝에 결국 내가 보존하고 있는 내 생명이라는 것의 보편성에 어떤 위태로운 속성을 발견했다고나 할까. 생명은 위대하지만 인간은 그 생명을 지키기 위해 한없이 초라한 개체이구나, 하는 생각이 더 커졌기 때문이다. 생명이 소중한 것은 그것의 위대함 때문이 아니고 너무나 어이없는 이유로도 사라질 수 있는 위기감때문이라고.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살아있는 동안이 소중한 것, 이것이 책 한권 읽고 격심하게 배고파진 내가 내린 결론이다.

하지만 이 진부하고 상투적인 결론을 내리기까지 도롱뇽이 이토록 큰 역할을 하게될 지 누가 알았던가. 제목만 보고 나는 80년대 미국외화 시리즈의 한 장면, 미녀 파충류의 입속으로 들어가던 쥐 한 마리와도 같은 이야기일까 초등생처럼 의심했다. 그때 나는 중학생이었지만 파충류가 지배하는 지구세상이라든가 인간생명에 대한 소중함 같은 인류적(?)인 생각은 거의 기억나지 않고 그저 인간의 피부를 벗겨내면 초록색 변온동물의 울퉁불퉁한 표피가 드러나는 충격의 그 장면만 뇌리에 각인되었을뿐 더 이상 말초적 기억이 발전될 기회는 없었다고 본다. 올 여름 냉소가 만연된 어느 마을에 파충류의 바다괴물이 나타나 사람들의 냉혈이 아닌 온혈을 얻어간다는 판타지 장르의 『우울한 코브 마을의 모두 괜찮은 결말』이라는 소설을 읽기는 했지만 여기서 등장하는 도마뱀(Lizard)은 그야말로 유쾌한 상상력의 매개체로서 성적환상을 자극하는 감각적 소재로 화하였다. 그러니 내가 아는 파충류는 말초적이거나 환상적이거나 였지 절대 철학이거나 관념이 되지는 못하였던 터이다.

그런데 카렐 차페크는 도롱뇽으로 말초신경을 건드리거나 환상을 말하지 않고 지극히 이성적으로 현실을 이야기 한다. 현실은 오늘 하루가 가고 또 내일이 다가오듯 그렇게 천천히 티끌처럼 쌓여 가는데 어느날 되돌아보니 전쟁이라는 태산이 되고 말았다는 이야기다. 웃길까? 그가 처한 시대에서 자신의 현실과 전쟁을 말하는 방식은 곧 그 시대 작가들의 문학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이 사람의 방식은 굉장히 스페셜한데 다 모아 놓고 보면 또 막대하게 제너럴하다. 나는 사실 어느 한 분야에 전문적이면서도 전 분야를 아우르는 사람들을 존경하는 편인데 이 절대영역은 같은 인간으로서 어지간한 열패감을 느끼게 하는 터라 궁극에 내가 성취하고 싶은 인간의 장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사람은 경력을 보아하니 소설가는 기본이고 희곡작가, 동화작가, 전기 작가, 유머작가, 수필가, 삽화가, 번역가, 그리고 기자로서도 엄청나게 다재다능했다고 그러니 사람이 글로 할 수 있는 분야에서는 이른바 득도를 하신 게 아닌가 싶다. 스페셜리스트를 모두 이수해 낸 제너럴리스트인 것이다. 책을 덮고 외람되지만 평생 아주 훌륭한 작가가 되고자 불철주야 노력한 사람같지도 않아 보인다. 생의 최대 목표가 작가는 아니었지 싶다. 다시 말해 본인은 꼭 이러한 소설을 쓰고자 한 것은 아닌데 어쩌다 보니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이런 류의 소설이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품이 출간된 시기도 꼭 그가 운명하기 2,3년 전인데 작가로서 생의 후반부에 거의 모든 생의 이력이 집결될 수 밖에 없는 시점이었고 작품의 결론도 슬며시 다음세대를 향한 질문으로 유보하는 뉘앙스를 풍기기에 '나는 지금 시대의 사람으로서 이것이 내 최선이었다' 말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나는 이런 일을 해왔고 이렇게 생각하는 바이니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다. 문제될 것이 있는가? ...아무말 못하는 이 심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우선 소설에 주인공이 없다. 네덜란드 상선의 선장이면서 타나마사라는 섬에서 진주조개잡이를 하던 중 도롱뇽을 최초 발견한 반 토흐 선장일까. 반 토흐의 어린 시절 친구이면서 도롱뇽을 노동자원으로 활용해 결국 지구상에 도롱뇽의 번식을 초래한 재력가 G. H. 본디일까. 아니면 자신의 주인인 본디를 방문한 반 토흐 선장에게 문을 열어준 문지기 포본드라일까. 아니면 원시시대 도롱뇽의 화석인 안드리아스 스케우크 제리나 인간을 웃기고 울린 우두머리 도롱뇽일까. 표면적으로는 '그저 이 아이들(손자)이 나를 용서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마지막을 장식한 문지기 포본드라로 여겨지지만 나는 어쩐지 소설을 이렇게 밖에 끝낼 수 없음을 인위적으로 강조한 에필로그속의 작가, '그 다음은 나도 잘 모르겠다'는 혼잣말의 작가, 즉 그 자신이 주인공으로 분한 것이 아닌가 생각되는데... 마치 누구도 이룩할 수 없는 역사적인 발명품을 만들어 놓은 과학자가 그런데 이것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어려운 시험에 수석합격한 한 학생이 왜 내가 제일 성적이 좋은지 잘 모르겠다 말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모르겠다는 그 말이 겸손이나 회피가 아니라 심각한 진심으로 들리는데 그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그렇다. 나는 이 소설의 주인공이 도롱뇽이나 인간이 아닌 두 입장을 분석하고 정리한 중립성격의 아나운서 혹은 양쪽의 상반된 의견을 수렴, 전달하는 토크쇼 진행자로서의 작가자신이라 생각한다. 이로써 그는 그 시대 지식인으로서의 책무에 비교적 자유로와 질 수 있었으리라는 생각이다. 그는 아버지가 의사이고 형제들이 예술계로 진출하였으며 배우자로는 여배우를 택한 것으로 보아 늘 우등생으로서 그다지 열등감을 가질 생의 이력은 없어 보였다. 성공이나 야망을 성취하겠다는 개인의 목표보다는 자신이 가진 능력을 한데 모아 집결시킨 행위로서의 문학이 시대에 가지는 영향력을 상당히 우월적으로 고민한 듯하다. 비슷한 시기에 선진국 이웃나라에서 양심과 죄의식에서 벗어나려 문학을 하였던 조지오웰을 떠올려 보면 그가 행하는 문학 방식은 격조높은 고상함의 결정이라고 느껴지기도 하는데 그 시대로 본다면 문학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이 아닐까 싶다. 선량한 시골의사라도 인류구원의 보편적 난제에 봉착하게 된다면 누구보다 뜨거운 피가 돌듯 대 유럽 열강틈의 지식인이 감지한 인류문명의 위기란 더 객관적이고 더 치밀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이 작품에서 등장하는 세 명의 주요인물은 각각 기존의 인간문명에 새롭게 도착한 新문명을 발견, 개척, 수용하는 대표적 인물로 그려진다. 먼저 반 토흐 선장은 누구나 적개심과 두려움을 품었던 도롱뇽이라는 미지의 존재를 인간과 관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유능한 타자로 인식하는 위대한 '발견자'를 표상한다. 반 토흐 선장 이전에도 도롱뇽을 발견하는 인간들이 있어는 왔겠지만 선장의 허풍과 사기치는 능력이 어찌보면 인간이기에 흐르는 붉은 피와 더운 심장을 상징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외부의 온도에 따라 몸의 체온이 변하는 변온의 냉혈동물이 아니고 늘 따뜻하게 포용하는 심장을 가진 온혈동물인 것이다. 반 토흐 선장은 발견에서 그치지 않고 도롱뇽에게 칼이라는 도구를 쓰는 법을 가르쳐 진주를 캐게 하는 동화적 판타지를 실현해 보이는데 선장의 국적이 네덜란드라는 점이 흥미로왔다. 바다보다 낮은 땅을 개척하며 살아야 했던 나라, 한때 해상왕이었던 유랑인 기질의 국민성, 자신 속에 머물지 않고 다른 세계로 뛰쳐나가는 모험심... 반 토흐 선장이 도롱뇽을 보고 계산기를 두드린 심정이 가슴과 머리가 동시에 작동한 유능한 네덜란드인을 떠올리게 했다.

또 한명 사업적 아이디어를 실현시켜 줄 사람을 찾다가 고향친구를 생각해 낸 선장을 문전박대하지 않고 직관에 의해 주인과 만남을 허락해준 문지기 포본드라는 다음 세대를 향해 인류의 지속적인 고민을 남겨놓은 인물이다. 그는 훗날 도롱뇽이 인간을 지배하는 형국이 된 세상에 이르러 그 시절 선장을 집에 들여보내 줌으로써 인류역사에 진취적인 공을 세웠음을 자각하듯이 똑같은 이유로 인류멸망의 위기를 초래했음에 자책하는 선량한 소시민을 표상한다. 도롱뇽에게 인간세계의 문을 열어 준 것이 전세계를 망하게 하는 시작이었다는 포본드라의 자책은 우리가 다같은 인간임을 자각케 하는 뼈있는 농담이기도 했지만 아무도 잘못했다고 여기지 않는 인간들 속에서 어렵사리 밝혀진 촛불심지를 발견하는 다행의 순간이기도 했다. 포본드라는 작품속에서 도롱뇽에 관한 온갖 기사를 스크랩하는 집착을 보여주는 사람이기도 했는데 결과적으로 그는 도롱뇽에게 인간세계의 문만을 열어 준 것이 아니고 그들의 사료를 인간들의 책꽂이에 차분히 꽂아두는 인류문명의 시행착오에 증인으로서의 역할을 하고 만 것이었다.

바로 이 책을 전혀 환상소설로 볼 수가 없는 이유가 포본드라의 책꽂이에 기인한다. 전체 3부 중 2부에 해당하는 <문명의 사다리를 오르다>에 동원된 컬러풀한 라이브러리는 이 책의 백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다른 작품에서는 평생가도 만나지 못할 독보적인 분량이었다. 포본드라가 도롱뇽으로 인해 새로운 육지와 섬들이 건설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는 그때부터 신문기사를 수집하기로 결심한 장면으로 시작되는 2부의 이야기는 글쟁이로서 카렐 차페크가 가진 역량을 모두 보여준 실험무대였다. 그는 오랜 기자생활과 학문연구, 번역작업, 여행경험, 극작가로서의 연출경력을 동원해 소설이 아닌 보고서, 신문기사, 인터뷰 취재글, 사회적 구호글, 각종단체의 호소문, 회의록등을 죄다 지어서(?) 종합선물화 하였는데 이 깊이와 넓이에 혀를 내두르지 않을 독자는 진정 도롱뇽 그들밖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기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반 토흐 선장의 동화적 판타지에서 시작해 저널리즘적 글쓰기가 소설로 분한 격조높은 사기행각이 그저 문학이라는 하위장르에 그만 우연히 정박하고 말았던 것은 아닌지. 바로 아무도 그처럼 다시 살아갈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다시는 그와 같은 작품은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그는 도롱뇽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한 것일까. 아니 왜 인간을 통해 도롱뇽을 말하려 한 것일까. 어렵지 않게 인간의 이기심이 불러온 탐욕의 결과로서 결국 인류가 멸망할 수 있음을 충고하는 것이겠지만 나는 그러한 알려진 거시적인 교훈외에 좀 꺼내기 미안한 생각을 해보았다. 도롱뇽이라는 신문명이 인간세상에 출현했을 때 사람들은 저마다 각자의 위치와 역할에서부터 그들을 고민하고 결론짓는 행태를 볼 수 있었다. 영화배우는 도롱뇽과의 스펙타클한 영화촬영을 생각하고 과학자는 열심히 논문을 작성한다. 경제쪽은 열심히 통계치를 뽑아내고 법률가는 도롱뇽과 같이 살기위한 세상의 법을 만들고 장사꾼은 노동력으로서, 상품으로서 그들을 궁리한다. 정치인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군인은 무기로서의 활용에 대해 신문기자는 모종의 특종을 위해  도롱뇽을 철저히 연구, 분석한다. 이렇듯 우리들 모두는 자신들이 살아가는 방법대로 대상이 되는 문명적 존재를 사유하고 수용할 수밖에 없는 존재들인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방법은 이렇게도 철저히 내 본위이고 내 중심인 것이다. 누군가 도롱뇽 입장에서 그들을 위해 발언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아마도 동물단체 회원이거나 그들의 변호사이었음이 틀림없다. 이것은 오늘을 살아가는 아주 분명하면서도 무서운 현실이 아닐까. 나는 그래서 이 작품은 지극히 잔인한 현실문학이라 생각하며 인간이 살아가며 독서라는 것을 멈추지 않는 한 영원히 유효한 현실로 남을 것이라는데 한 치의 이의가 없는 바이다.

내가 서늘한 것은 인간이 도롱뇽과도 전쟁을 할 수 있음이 아니라 그 무엇이라도 전쟁을 할 수밖에 없는 인간에 있었다. 차페크는 다행히도 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에 망명하지 않아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별히 애국자이어서 나라를 버릴 수 없었던 것일 수도 있지만 나는 전쟁이라는 시간과 공간에서 절대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 시대 지식인으로서 자신의 죽음에 자존을 지킨 행위였다고 느껴진다. 자신이 써온 글과 이루어온 문학에 약속을 지킨 것이라 생각된다. 투사나 열사만이 저항의 문학은 아닐 것이다. 차페크는 이미 그 위에서 자유로왔던 것은 아닐까.

다만, 인간이라는 존재가 정말 별 것도 아니라는 이 벌거벗은 느낌만은 오랜동안 소중히 간직해 볼 생각이다. 이데올로기와 산업화가 창궐했던 그 시절 천재적인 작가를 만나보아 뜻깊은 시간이었다. 모래알에 소중하게 떨어진 진주 한 알을 발견하듯 운좋게도 뼈아픈 진리 한 줌을 잡아 올린 느낌이다. 읽는 내내 적들이 절대 파충류 혹은 양서류 혹은 미지의 초록 동물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깨끗하고 반듯한 작품이었다. 역겨운 건 그들이 느낀 우리 인간들이라는 걸 재차 설명할 이유가 없을 터. 도롱뇽과의 전쟁은 악마와의 전쟁도 괴물과의 전쟁도 아닌 그저 우리끼리의 전쟁이었다. 그것이 도롱뇽이 되었건 공룡이 되었건 우린 아마 살아있는 한 숨이 끊어질 그날까지 전쟁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인간이길 깨닫기 위해 우린 상대를 발견하고 적대화할 수밖에 없는 소심한 존재들인 것이다. 그것은 슬프게도 시간이 되면 다시 허기가 살아나는 우리네 본능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럼에도 아니된다 그만하자 소리치는 것이다. 아무리 소리쳐 보아도 도롱뇽의 신음소리 만큼도 메아리가 돌아오지 않을 때 우린 이렇게 멋진 천재를 그리워하지 않을까. 그 다음은 잘 모르겠다 말하는 천재, 다만 이번엔 용서해 달라는 천재의 짜릿하가도 반가운 목소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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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2-14 22: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까지 살면서 난생 처음 이런 별종(?) 소설을 재미있게 읽은 것은 처음이에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도 소설이 준 인상이 강하게 남았었고요.
이번에 선정도서가 되어 소장하게 되셔서 부럽기도 하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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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으로 휴식하다

나는 올 한해를 거의 나이와 시간, 계절과 세월에 씨름하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시시각각 그것들이 변화하는 미세한 과정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버텨내었다는 생각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결코 아무도 모를만큼일 게다. 내 생애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시절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나는 제대로 고통을 완수해내려 안간힘을 썼다. 가장 먼저 이용한 것은 문학이라는 마법이었다. 내가 선택한 마법의 세계에선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는 쉬운 생각이 전부였다. 예상대로 마법의 길은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고 내 마음대로 멈출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상과 교류한다는 명분으로 보이는 세상과 담을 쌓은 것과 같았다. 점점 책 한권을 읽고 다음 책을 집어 들기까지의 공백이 두려워 졌다. 그 짧은 틈새로 계절의 변화가 세상의 상처가 침입하게 될까봐 나는 점점 공백을 최소화하기 시작했고 그러는 사이 봄과 여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가을이 되자 살갗이 말라가듯 마음도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책꽂이는 좁아지고 책상에 쉴 새 없이 책이 쌓여 가는데도 마음은 가라앉기만 했다. 우리 집은 도심 외곽 어느 산자락을 무너뜨려 세운 아파트 1층인지라 지난 여름 내내 자연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하루 종일 뻐꾸기를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새와 매미, 바람이 교신하며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날씨가 쌀쌀해져 온 집안의 문을 닫고 난방을 틀기 시작하자 자연은 사라지고 창밖의 나무는 초록을 지키지 못하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 바람이 무섭던 어느 새벽, 나뭇가지가 베란다 창문을 세차게 때리면서 마치 기둥이 부러지기라도 할 듯 요동을 멈추지 못하던 그 때 그 나무였다. 눈부신 금빛이나 화려한 붉음으로 변신하지 못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노화마저 중단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리쬐는 햇볕은 잎사귀의 메마름을 더욱 부추기고 지나가던 고양이마저 외면할지 모를 기색이 꼭 나의 그것과 닮았었다. 새삼 마음이 울렁였다. 그리고 억울했다. 나는 내가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된 것 조차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은 자꾸만 메말라 가는 내 자신을 인식하지 않으려 한 거부현상의 결과와 다름 아니었다. 시간을 거부한다고 시간이 멈추는 것이 아니듯, 세상을 거부한다고 내가 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도 한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토록 나에게 상처를 준 세상이지만 다시 나를 보듬어줄 세상이 그리웠다. 누구 하나 나를 지목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 혼자 세상에 분노하고 또 그런 만큼 세상을 몰래 기다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마법의 길에서 잠시 휴식해 보기로 했고 울렁이던 마음을 스스로 안아보고 싶었다. 망각이나 회피, 혹은 물욕이라는 목적을 떠나 진짜 내 마음을 위한 독서를 원하고 있었다. 가급적 겨울이 오기전이길 바래었고 혹시 책을 덮고 나서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후회하지 말기로 다짐했다. 그리곤 영하의 날씨가 막 시작되는 겨울의 초입에, 아니 늦가을 오후에 이렇게 책을 덮었다. 어찌 보면 이 책을 대하는 내 마음도 해답이나 위로를 바라는 강렬한 목적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집어들 때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영혼이 원하는 건 지금이라는 시간, 그리고 당신이라는 마법이었다고.

마법으로 체험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지난 시절 '한권의 책이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가졌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을 하나도 만나보지 못했다. 서점에 그토록 드나들면서 언제나 베스트셀러의 서가에서 그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런' 류의 소설에 선뜻 손이 가는 마음을 지니지 못했던 독자였다. 살인적인 업무와 빈틈없는 일상에 지쳐 '그런' 식의 영혼의 울림은 어쩐지 간지럽고 부담스러워 나같은 사람하고는 멀어도 한참이지 싶었다. 한창 경력의 건물만 짓고 있었으니 보나마나 다 알만한 이야기라며 독자이길 거부하는 내 마음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알 수 없어 그 영혼의 울림이 이토록 애타게 그리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영혼이 울린다는 말뜻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나였기에 이 여운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음이다. 그동안 살면서 영혼이 아닌 육체를 향해 얼마나 남을 울리고 또 그 남으로부터 울었던가. 나는 한명의 시인이 한편의 시를 쓰기까지 얼마나 울어야 했는지 알아 주는 독자가 되고 싶었다. 마치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랬다. 이 책은 바로 몸의 울음을 위로해주는 영혼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내 영혼을 울리고 있었다.

이 책은 브리다라는 스무살 처녀의 영적탐색의 길에 관한 여정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마법을 배우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간 마법사와 마녀를 통해 태양과 달의 전승을 배우고 마침내 자아를 발견한다는 어찌 보면 구태의연할 수 있는 평범한 서사를 그 줄기로 하고 있다. 주인공과 배경이 단순하며 사건은 대부분 마음의 변화로 일어나는 현상을 중심부로 택하였기에 다른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서사에 대한 부담, 충격이나 반전 등의 플롯, 인물의 캐릭터같은 피곤함은 전혀 인지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작품의 매력이었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기행문이나 치유를 위한 에세이의 성격도 감지되었다.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훌쩍 종착지에 도달해있다. 도보로만 길고 먼 숲을 천천히 걸어 돌아온 느낌이 든다. 언젠가 남이섬에서 양옆이 숲으로 우거진 메타세쿼이아길을 걸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피톤치드 물질로 온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았던 발걸음을 기억한다. 이 책은 글로 이루어진 숲이라고 해도 좋았다.

실제로 브리다는 마법사의 숲속에서 어둠의 밤을 온몸과 영혼으로 경험하는 수행의 신고식을 치르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 '밤은 하루의 일과에 불과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어둠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발견한다. 신선하고 가슴 아릿한 시작이었다. 나는 첫 장면부터 '믿음'이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걸 끄덕이면서 페이지를 넘기었다. 마치 산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르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것처럼. 산이 있어 오르는 것처럼 믿음역시 있기 때문에 신뢰한다는 진리를 나는 몰랐던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자신(작가)을 한번 믿어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곧 자기 자신(독자)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야기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미안케하는 작가의 의도였을까. 독서란 행위는 어짜피 책을 대함에 있어 작가에 대한 신뢰가 작품의 이해와 평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한 분야이다. 나는 믿음을 인지하자 자연스럽게 브리다가 어둠속에서 느꼈던 하룻밤의 두려움과 번민을 온전한 내 두려움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스무살로 돌아가 있었던 것, 아니 어쩌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브리다는 서점을 통해 위카라는 마녀를 소개받고 '소울메이트'에 대한 개념을 이해한다. 영혼이 분화할 때 남자와 여자로 나뉘었기에 언젠간 다시 하나로 결합할 수 밖에 없는 분신과도 같은 사랑. 소울메이트는 우리세대에게 학창시절 룸메이트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물론, 태어나 단 한명으로 존재하는 운명적인 내 영혼의 반쪽이라는 의미의 소울메이트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혼이라는 만남을 전제로 한 배우자의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소울메이트는 한 사람이 아닐 수 있으며 내 영혼이 나뉘어진 사람일지라도 사랑을 이루는 방법이 꼭 다시 하나로 결합하는 것은 아니라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명적 사람'이라기 보다는 '운명적 만남'을 떠올렸다. 단 한번일지라도 그 운명적 만남은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될 수 있다고 말이다.

작가는 브리다가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찾아가는 과정을 곧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브리다를 좇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지난시절 내 소울메이트들을 떠올려보는 시간이 주어졌다. 최종적인 마법사의 선택과 그것을 받아 들이는 브리다의 지혜는 내 청춘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더듬어 자꾸만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우린 얼마나 상대를 소유하려 애를 끓였으며 누군가를 빼앗지 못해 애를 태웠던가.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상대를 가지려 했고 버리려 했을 것이다. 그때 내 영혼의 소울메이트가 단 한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사람에 대한 집착은 혹시 매번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강박을 초래했던 것은 아닐까. 다음 사람을 사랑하였다고 그 전 사람과의 사랑이 의미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렇게 소울메이트로서의 한사람에 대한 강박은 곧 더 큰 상처를 야기하는 원인이 된듯하다. 상대에 대한 욕심은 곧 나 역시도 상대의 단 한사람이고픈 욕망과 동일했다. 마법사는 자신의 시행착오를 브리다에게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가도록 유도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랑은 있었지만 상대를 위한다기 보다 내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돌아선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브리다의 남자친구가 물리학 조교였던 것은 이상적인 설정이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탄생과 생명의 근원적 이유에 호기심을 가진 브리다의 우주적 자아성찰에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질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철학적 태도가 나를 안심케 했다. 나는 돌아서는 마법사가 된 듯 그녀의 남자친구를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작품에서 유치하지 않게 묘사된 상황으로 마법의 의식행위들도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문학을 영적세계로 끌어 올리는 작가의 신비로운 능력이라 느껴진다. 같은 불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도 예술영화를 연출해 내는 외국의 영화감독이 겹쳐지기도 했다. 마녀의 의식으로 구체적으로 묘사되던 브리다의 체험은 다소 원시적이며 주술적이었는데 소설의 영역에서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에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나 영상처럼 시각적 정보를 배제한 상태에서 글로만 영적인 에너지를 선사한다는 것은 종교적 영역에 가깝다 할 것이다. 불교나 기독교등의 여타 종교를 뛰어넘는 문학적 성취가 곧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의 '재능'으로 인식된다.

위카는 브리다에게 마법의 신비에 입문하는 과정을 가르치며 '달의 주기'를 체험함으로써 달전승을 깨우치도록 한다. 마법의 지팡이로서의 검이나 타로카드, 허브숲등은 자신의 영적인 에너지를 한데 모으는 도구였으며 세상의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이룩하는 행위였다. 옷을 입고 벗는 행위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를 통과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다지 특별나 보이지 않는 그 과정에서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바꾼다는 건,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바꾸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목소리의 충고는 특히 오래 남았다. 마음 바꾸기보다 몸 바꾸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로도 들렸고 변신이라는 방어기제를 내세워 외피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 같아도 실은 결국 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라고도 해석되었다. 마녀들의 전승 입문식 전에 꾸어야 한다는 '옷꿈'은 그대로 입문식에서의 행위로 재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꽤 길게 묘사된 마녀의 입문식 과정은 흡사 우리 조상들의 달의 정기를 받아들이는 부녀자들의 의식을 연상케 했는데 음력의 에너지를 가진 달, 즉 변화의 기운을 잉태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신비롭게 자각하는 행위로 느껴졌다. 행위의 절정에서는 자신의 (기존에 입던)옷을 벗고 달의 기운을 받아 새로운 재능이라는 옷을 입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작품 초반부부터 제기된 그녀의 재능을 옷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흡사 신비로운 뮤지컬의 한 장면이 상상되었다. 작가는 우주와 하나되는 여인의 삶을 달빛아래 마녀들의 숲속무대에서 종합연출한 훌륭한 감독이었다.

마법으로 불러보다

서로를 알아보는 소울메이트와 재능을 형상화한 의식행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의심이 믿음이 되는 과정이 내게는 중요했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궁극적인 이유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믿음, 소울메이트에 대한 믿음, 재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앞서 말한 모든 믿음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가 살아있다는 기적에 온 자신을 던지고 질문이 있다면 답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자신이 선택한 길을 평생 의심하지 않고 가는 것. 아니 평생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계속하여 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내가 나일 수 있는 가장 큰 재능임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깨우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진 재능을 절대 과대평가하지도 않았지만 재능에 따른 결과에도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았다. 오만하지도 않았지만 겸손하지도 않았던 나. 나의 재능은 언제나 나의 의심에 가려 벽과도 같은 불신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작가가 언급한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실수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버티고 있었다. 내가 인정하지 않은 재능은 곧 나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도전을 회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는 도전해 놓고서도 그것을 도전으로 생각지 않는 비겁으로 발전했다. 도전하지 않았기에 그 어떤 결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내게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기 위해 브리다가 자신을 어떻게 믿게 되는지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내 자신에 대한 신뢰는 내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내가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확인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렇게 가르쳐 준것이다. 나는 이미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도 재능이 존재했고 그로써 빛날 수 있었던 사람, 이미 빛나고 있는지 모를 사람이었다.

나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고마운 사람, 그는 내게 실수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라 말한다. 나는 다소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많아 지난 시절 많은 지인들을 피곤하게 하였다. 실수는 용납하기 어려운 과오인만큼 실수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도 내 자신을 가장 많이 괴롭혀왔다. 어쩌면 너무 완벽해서 실패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물이 났다. 그동안의 고생을 위해,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은 나를 위해, 떨어지는 낙엽이 억울한 나를 위해 나는 울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올 것은 오지 않는가.

이 작품을 나처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불신하는, 세상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전하지 않는 냉담한 독자들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집어들기 바란다. 문학이라는 마법은 얼마든지 걸려보아도 좋을 시간인 것이다. 인간은 어짜피 자신이 깨달을 수 있는 것들만 깨닫는다. 분명 자신의 채널로 마치 한 몸인듯 강하게 이끌리는 메시지가 용기를 줄 것이라 믿는다. 영혼의 울림은 세상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고 내 안에서 밀쳐오는 외침인 것이다. 그것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린 이렇게 스스로들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문학이라는 마법의 길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 마법이 풀리는 날 다시 현실의 목소리로 불러보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던가"


살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매번이지 않다. 그 순간에 자신을 온전히 믿기도 쉽지 않다. 믿었다고 실수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래도 살자. 살아서 믿자. 믿어서 내딛자. 그럼으로 사랑하자.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된 이유 아니겠는가. 인간으로서 공평한 재능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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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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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이 책을 좀 미루어 두었었다. 어떤 예감때문인 지 올해를 정리하는 시점에 책을 덮고 싶었는데 아마도 윤대녕의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통해 산다고 하는 이 대책없는 것, 그것을 또 견뎌낸 올 한해를 조용히 격려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매일을 숨쉬고 또 그 다음날을 맞는 것이 따로 칭찬받을 일이 되진 않겠지만 나는 그마저도 칭찬해 줄 사람이 필요했었나 보다. 그렇게 중요한 약속을 따로 빼어놓듯 나는 조용히 이 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곤 큰 기다림때문 이었는지 나는 책을 덮고 사뭇 경건해 지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내 입술로 가져가 버린 나...어쩐 일인지 깍지낀 두 손에 힘이 주어져 입술도 꼭 깨물어 보았다. 천천히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그런 나를 그냥 잠시 내버려 두었고 올 한해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스스로 끝내 대견해진 나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이 책은 마흔 아홉된 소설가 윤대녕의 소설작업 바깥의 사적인 풍경과 텍스트 가장 안쪽의 심상을 고백하는 산문 글이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과 가족들, 만나온 사람들, 읽어온 세월과 느껴온 자연을 지금 시점에서 정리한 글이라 나이들어 그동안 문학해 온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곧추 세우는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말하는 방식은 한눈에도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고 마치 어느 산사에서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새소리 물소리를 동무삼아 고조곤히 사연을 전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잔잔함의 여운이 내겐 얼마나 길 것인지 나는 두 어장을 넘기면서 이내 간파해 버렸다. 산사에서의 운명적 만남이라도 이루고 온 듯 나는 올 한해 이 곳 속세에서 보고 느끼고 이루어 온 것들을 차근히 되짚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가 그랬던 순서와 방식대로 내 한해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불효를 고백하던 어머니와 늘 거리를 두었던 아버지,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친 할아버지, 역마살 낀 자신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아내를 이야기 할 때엔 유난히도 '마흔 넘어', 혹은 '마흔이 다 되어', 아니면 '마흔아홉에'를 언급하며 세월 지나 돌아본 심경을 마치 참회하는 투로 고백을 하곤 하는데 나는 그가 나이를 호명할 때마다 찔린데 또 찔리는 심정으로 마음이 영 편치를 않았다. 올 한해 지겹도록 마흔을 부르짖은 나는 그의 나이를 읽어가며 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마흔의 종지부를 찍고야 말겠다는 생각도 했음이다. 그랬다. 마흔을 받아들이는데 결국 내 전 생애가 걸리게 된 것을 깨닫고만 나는 올 한해 그 과정의 하나로 무차별적인 독서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 일상에서 어떤 반복되는 패턴을 얻게 되었다. 그동안의 내 인생을 정리해 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집어 들었던 것이 지난 봄, 유래없이 폭설이 계속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곤 정말로 살아온 그간의 기억들을 정리하는 훌륭한 방편이 되어 주었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마흔을 잊어보려 했는데 오히려 더 되새겨진 꼴이 되긴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올 한해 내가 한 일과 그 중에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쓴 일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총정리의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이 마흔을 살아낸 내 자신을 격려하는 일이기도 했다. 대충 내 예감은 맞았던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는 애절한 문학청년의 시절이 분명 있었음을 술회하는 작가에 속했지만 내 경운 청춘을 다 지나고 보니 문학에의 염원이 생기게 된 늦깍이 작가 지망생...쯤 되려나. 전문적인 문학의 공부를 따로 한 것도 아니고 원대한 문학의 꿈도 품어보진 않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 그렇다면 글을 써야하는 가에 대한 대책없는 질문에 어이없이 생명이 위협당한 경우라 할 것이다.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점검해 보는 중간 단계로서 보다 안전해 보이는 독서와 서평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올봄부터 착수한 계획은 큰 차질없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 책의 후반부에도 윤대녕이 읽은 책을 소회하는 독서일기가 있는데 간단하면서도 본인이 강렬하게 느낀 인상만 핵심으로 전해주기에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부담없이 이해하고 넘어가기 편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경운 책 한권 읽고 책과 관련된 그동안의 사연을 밑도 끝도 없이 풀어내는 경향이 있어 서평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았었나 그런 생각도 드는데 결국 서평을 써가면서 책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원없이 떠들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이 만족감은 아마 내가 올 한해를 견뎌온 가장 핵심적인 기쁨의 고통, 그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레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얼마나 웃긴가. 아니 얼마나 슬픈가. 인생이여, 세월이여...여인의 변덕이여...

어떤 유명한 과학자가 그랬다. 어떤 일이 일어난 후로는 절대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나는 어쩌면 소설이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사실을 인정하기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지라 나는 며칠 전 신문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에세이로 기재한 글을 대신하겠다. 소설가는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고 있는 유명한 작가인데 그녀의 책상엔 원고를 보아달라고 매달 수천페이지의 글이 도착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육십이 넘은 목사한분이 방대한 분량의 장편을 부쳐와 출간을 하고 싶으니 꼭 좀 읽어 달라 부탁을 하더라는 것. 소설가는 몇페이지 읽고는 문장의 수준과 모든 구성이 책을 내기엔 부적절하다는 답변을 하고 싶었으나 너무나 간곡한 목사의 상처를 염려해 출간하려면 대폭 수정이 필요하다고 에둘러 말을 전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며 선생님이 꼼꼼히 읽어주셨다니 책을 내지 않아도 마음이 괜찮다고 울먹이더라는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하나뿐인 의사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노인의 인생무상과 아들의 억울함에 관한 자신의 고백이었다. 아...나는 그글을 읽고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그만 얼굴이 뜨거워져 어쩔 줄 몰라 했다.

소설가는 목사의 글이 온정신과 몸을 다해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토로하는 개인적인 글일뿐 그 글이 어떠한 문학적 가치는 가지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래도 된 것이었다. 목사는 글을 썼고 소설가는 그 글을 읽어 주었으니 말이다. 소설가는 목사를 등단시키는데 조력하는 일 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것에 세상의 답이 있다고 하였다. 시켜주려 읽어보았는데 읽어주니 그만두더라...그의 마음은 단 한명의 세상이라도 풀어질 만큼 이었을까.

'오늘 오후 15시 경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미시령 동서관통도로에서 **구청 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되면서 관통도로 터널을 지나 500M 쯤에 위치한 울산바위 주차장에 정차 중이던 승용차를 추돌하여 승용차는 10m 절벽 아래로 추락, 2명이 사망...승용차는 완전히 부서져...'

3년 전 내 어머니는 이 기사속에서 당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모와 같이 즉사한 2명중 한명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 오후였다. 그날은 또 다른 칠순이모의 생일을 축하하러 형제들이 강원도로 여행을 가시던 중이었고 어머니는 정차된 차에서 막 내릴려던 찰나에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살아남은 이모들을 지금까지 외면하는 것으로 용서의 마음을 여간해서 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조카이기도 하다. 그날의 일을 그럴싸한 소설로 구성하여 두어 번 공모에 낙선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상하게도 낙선의 기쁨만큼은 후련하게 만끽하고는 했는데 아마도 그 목사님과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누군가는 내 글을 읽어 보았겠지...하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쓰기에 대한 막연한 바램이 잦아들 즈음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인데 어쩌나...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어 나중에 이런 사람이 되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또 지병처럼 들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나지막히 단정하게 적어볼 수 있다면...내 어머니와 내 고향과 아버지를 말할 수 있다면...내가 읽은 책을 말할 수 있다면...어느 잠못들던 밤의 이야기와 버리지 못한 것들을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이 책은 글을 쓰고 싶었던 나를 돌아보게 하면서 다시 내 앞날을 그려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윤대녕은 이 책의 제목이 된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이라는 글에 정지 교통신호를 기다리다 우연히 만난 어느 시인과의 계속되는 인연을 소개하며 삶은 사소한 일상의 연속이라는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시인 역시도 휴대폰을 가지러 다시 가지 않았다면 그날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일상에는 늘 극적인 요소가 내재한다는 신비로움이야말로 우리가 매순간 극적인 순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질문한다.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질끈 감고 순간의 만남, 찰나의 이별에 총이라도 맞은 듯 가슴을 쥐어 뜯었다. 내 어머니가 탄 차가 1분만 주차장에 늦게 도착했더라면... 내 어머니 차를 추돌한 차가 1분만 더 일찍 지나가 버렸다면...아니, 내 어머니가 몇초 만이라도 빨리 차에서 내렸더라면... 누군가는 그 동일한 순간에 生의 희열에 감동하고 또 누군가는 死의 절명에 운명하는 이 모든 우리 인생은 얼마나 극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또 하나 내가 고백하고 싶은 건 윤대녕의 이별방식, 그가 소설에서 보여준 헤어짐의 미학적 관념세계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개인적 사연이라고나 할까. 나는 내친김에 이 책으로 올해 나이 마흔된 내 첫사랑의 종지부도 찍고 싶어진다. 윤대녕은 꼭 내 국어선생님과도 같은 연배의 작가인데 소설가는 못되셨지만 아직도 사립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그 시절 내 영혼의 별, 한명의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십년도 더 된 내 여고시절의 앨범엔 국어 선생님과의 영화보다 더 근사한 바닷가 사진이 있고 하얗게 부숴지던 섬세한 포말처럼 같은 색의 이를 드러내고 읽어주시던 <서시>와 <별 헤는 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교무실에 비밀간첩이라도 된 듯 몰래 잠입해 선생님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아내곤 어느 일요일 아침 무작정 주소를 찾아 비장하게 몸을 던진 74번 버스도 운행중 이시다. 그때 내가 가진 옷중에 가장 예쁜 치마를 골라 입고 처음으로 건너본 한강다리는 얼마나 두려웠던지. 다닥다닥 집들이 모여 있는 언덕 아래 정류장에서 심호흡을 하고 떨어트린 동전 두 개는 얼마나 아득했는지. 선생님의 어머니로 보이는 어르신의 '지금은 없다'는 차가운 대답...실망한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마지못해 요 앞 목욕탕에 갔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바보처럼 또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그렇게 두 번은 다시 걸 용기가 없어 그대로 돌아선 발걸음은 다행히 여고생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선생님의 '거절아닌 외면'을 영원한 비밀로 간직할 수 있었음이다.

그렇게 이 책은 내 여고시절 선생님과 나누었던 빛바랜 약속들과 다시 극적으로 조우하게 하였다. 나는 아직 선생님과 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지난 시절 나는 윤대녕의 글에서 80년대식의 사랑과 이별만을 찾아 헤메던 고집스런 독자였다. <대설주의보>에서 해란과 같은 여주인공의 낭만적 이름이나 그다지 쿨하지 못한 이별의 방식들, 몽환적인 분위기에서의 꿈과같은 안녕, 더 가까워 보이지 않는 문어체의 대화들에 나는 마치 내 첫사랑의 순정이라도 되찾은 듯 기뻐하던 독자였다. 늘 그리워 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 다시 말하면 헤어지긴 했으나 헤어진 적이 없는 관계, 그러니까 안 만나도 되지만 다시 만나도 되는 절대 헤어졌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관계...우린 얼마나 더 많이 헤어지고 더 많이 기다렸고 그래서 다시 마주쳤던가.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늘 지난 시절 헤어는 졌지만 미처 헤어지지 못한 그들, 차마 헤어지자 한마디 없이 헤어 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모두 헤어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하나둘 다시 내 앞에 나타나고는 했다. 윤대녕은 내게 이별을 말함으로써 절대 이별하지 못하게 하는, 헤어질 수 없는 작가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윤대녕이 고집한 이별방식의 기원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불교사상에 동의하며 어떤 사람과도 여간해서는 헤어지지 않는다는 인연을 보호하는 원칙,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돌아오는 24절기마다 사람을 만나는 음력의 시간과 계절을 사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의 소설에서도 희미하게나마 기약없는 약속을 다시 기억해내곤 했던 이유는 거리를 두면서도 사람과 한번 맺은 인연은 인위적으로 저버리지 않는 그의 의지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말 기도같은 독서를 마치고 돌아와 마음에 촛불하나 밝혀놓은 어렴풋한 나를 보게 된다. 나는 올 한해 그럭저럭 책들과 함께 내 글들과 함께 행복했다. 오대산으로 제주도로 원주로 강원도로 마음살이 부대낄 때마다 정처없이 떠나곤 하던 그가 부럽지 않을 만큼 나도 내 자신을 향해 한껏 웃어주고 마음다해 울어 주었다. 아무리 어렵고 도무지 재미없는 책도 신기하게 이해가 되고 눈물이 났다. 여행으로 늘 여름을 나던 내가 한여름의 열대야를 책으로 이겨내지 않았던가. 나에게 어느 하나 극적이지 않은 책들은 없었을 것이다.

늦었을까. 잊었을까.

많은 일을 했고 많은 곳을 가보았지만 늘 가슴 한구석 끄트머리에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몹쓸 병처럼, 갚아지지 않을 평생의 빚처럼 남아있는 어둠의 약속. 할 수 있는 것과 무엇이 되는 것 사이에서 늘 주저하며 언제나 한걸음 물러서던 비겁의 다짐. 나는 오늘도 확인, 또 확인하려 그를 읽고 글을 쓴다.

선생님,
아직도 그날 밤 별처럼 여전히 저를 기억하실 수 있나요.
너무 늦었지만 다시 비추어 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선생님을 뵌 지 이십 몇 년이 지난 그 어느 날
제가 선생님을 불현듯 찾아 가더라도 변함없이 저를 잊지 않았다.
말씀 해 주실 그 미소, 그려 보아도 될까요.
그땐 꼭 네가 꿈을 이룰 지 알았고 나를 찾을 지도 예감했다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그날 밤 우리가 세어보던 '별'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를 담고,
그리고 나머지 모든 '별'에 너의 '꿈'을 담아 그렇게 오늘을 기다렸다
벅차게 안아주실 수 있을까요.

윤대녕 작가님,
이 극적인 만남을 기다려 보는 것에 얼마나 동의 하실런가요.
선생님과 절대 헤어진 것이 아니라 믿어 주실런가요.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은 제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빙긋이 눈감아 주실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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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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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에 스며들다 
  

흙냄새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계절에 따른 아스팔트의 냄새나 날씨에 따른 건물냄새엔 민감하고 세밀하다. 가령, 장마가 오기 전 유월의 밤꽃향이 짙어지는 저녁 해질 무렵 주차장이나 아직 기온이 오르지 않은 아침 출근길의 텅 빈 버스 정류장, 눈길에 묻은 흙이 털어내는 아파트 현관문 같이 살아있는 자연을 제외한 온갖 인공적인 것에 내 신경들이 숨을 쉰다. 시멘트 혹은 플라스틱, 콘크리트, 유리와 대리석, 도시를 이루는 모든 소재는 언제나 코끝을 자극하고 감각의 기억을 만들어왔다. 그러다가 가끔은 예기치 않게 젖은 나무들이 뿜어대는 벌레를 부르는 향에 놀라 보면 흠칫 눈물이 난다. 하나의 생명체대 유기체의 극적인 해후라도 이룬 듯 나는 살아있음이 반가웁다. 같이 살아는 있었던 거다.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가야 할 나는 생명 그 자체로도 기쁠 일이지만 왜 이리 기쁘기도 힘든 것일까.

나는 이 책을 '내일은 많은 비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를 접했던 저녁 무렵 비릿한 아스팔트향이 반가워 잠시 감각이 일렁일 때 만났다. 자기 일 들이 바빠 몇 남지 않은 여고 동창생 중에 유일하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그 친구는 남편이 해외대사관에 근무를 하는 터라 이삼년에 한번 꼴로 외국으로 타향살이를 가야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1년이 채 안되어 또다시 태국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통화를 한 것은 한 달 전 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기는 했지만 나 역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해 그 친구가 돌아오면 나는 떠나고 내가 돌아가면 그 친구가 떠나던 얄궂은 인연으로 십여 년을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정작 얼굴보고 떠들었던 기억은 손꼽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내가 컴백을 했더니 그 친구가 떠날 차례였던 것이다. 지난번 미국으로 떠날 땐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촌스럽지만 기념사진까지 박았다. 이번엔 그때만큼 아쉬움이 무뎌진 탓도 있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만 이별식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녀석 답지 않게 '책'을 보내 온 것이다. 그것도 짧은 손 편지와 함께.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이별의 징표처럼 보내온 선물 이전에 나 역시 다른 이에게 이 책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선물만 보내고 읽어보지는 않은 상태였었는데 결국 그 친구로 인해 다시 내 앞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자신은 돌아가서 읽을 테니 나는 책 읽으며 돌아올 때까지 자신 생각을 많이 하라는 이제 갓 마흔이 넘은 아줌마의 열일곱과 똑같던 글씨체가 연락도 안하고 떠난 서운함을 일시에 녹여주기는 했다. 친구가 적어준 내 이름 석자도 비온 뒤 아스팔트에 막 스며든 풀향기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 녀석은 이 책의 내용을 잘 파악했고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한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틀림없이 서점직원에게 두어마디 들어보고 별 고민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있을 법한 일이지만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닌 채로 뜻밖에 전달된 책인지라 나는 그냥 이렇게 책하나 던져주고 떠나버린 그 친구와 여느 택배상자와 다름 없이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이 이 작품의 주제이자 작가가 이렇게 멀리 있는 나에게도 끝내 전하려한 메시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남의 이야기가 구체적인 내 사건으로 
  
헨리가,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아내 올리브를 두고 일터에서의 동반자 데니지를 마음으로만 사랑한 이야기인 <약국>은 죽도록 지겨워도 결국 제 다리 한쪽과도 같은 올리브와 긴긴 시간을 견디는 이야기로 들렸다. 어렸을 때 살던 집, 그러나 그 집에서 한 번도 행복한 기억은 없어 불행의 추억만 남겨진 그 집에 가보고 싶었던 케빈의 어머니와 그의 선생님었던 올리브 아버지가 자살한 이야기, <밀물>은 그들이 얼마나 生에 대한 애착이 절실했는지에 관한 고백으로 들렸다.

눈가의 부드럽게 잡힌 오십줄의 잔주름이지만 혹독한 일이라고는 일어난 적이 없어 보이는 앤지의 옛사랑과 지금의 사랑에 대한 상처는 네 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生의 일부로 피아노를 만져온 <피아노연주자>의 변함없이 소중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 날 박학다식한 며느리를 얻으며 느껴야 할 '큰 기쁨'이 자신보다 아들에 대해 결코 아는 것이 많지 않아 보이는 그녀로부터 상실감이 되어 되돌아 왔을 때, 결국 그녀의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자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만 <작은 기쁨>은 누구의 며느리가 되어본 적 있는 내가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할 '큰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또한, 사람 좋은 인형 같던 남편 헨리와 투덜거리며 나누던 대화는 그녀 그리고 내가 남편에게 그만큼 하지 않고 묻어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세 네 편을 읽고 나서 부터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해안가 마을과 이웃들이 마치 우리 동네 와 내 이웃인 것처럼 적응이 되었고,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작가만의 방식에도 완전히 익숙해져 한편 한편의 이야기가 내 몸처럼 내 목소리인 것처럼 내 눈과 손과 귀 같은 감각에 아주 가깝게 밀착되는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이야기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회상되던 '나'의 일상이었다. 그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난처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굶주림>의 경우, 내면적 상처로 인한 거식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어이없이 죽어버린 소녀의 죽음과 외로움에 공감하기 보다는 엉뚱하게도 둘 다 공부가 끝나지 않아 생활비가 없어 부모님에게 의지하던 신혼 초, 남편이 사들고 온 몇 개 안되던 도너츠를 나누어 먹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목이 메이기도 했다. 분명 앞 작품에서도 등장한 '도넛'인데 기어이 내 기억속의 한자락을 끄집어 내고 만 소설 속 한 장면들은 큰 주제와 상관없이 늘 그 자리에 위치하던 올리브처럼 내 인생 어딘 가에서도 의미있게 자리를 차지했던 시간들 이었던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극적인 순간에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의 생각, 같이 듣거나 보았던 분명 같이 겪은 일임에도 서로의 관점차가 상반되는 사실을 깨닫게 된 <다른 길>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나에겐 통째로 펀치를 날려대는 가장 적절한 자화상과도 같았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헨리의 털없는 허연 정강이에 핀 검버섯은 늘어난 잔주름과 한웅큼 빠지던 내 머리카락 보다 더 잔인했고, '결혼하고서 당신은 무슨 일에도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헨리의 푸념은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라는 내 비판보다 훨씬 더 정당했다. 배우자의 생각을 알고, 그 생각이 영원히 불변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찬가지로 상대 또한 나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의 외로움은 언제나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은 자의 그것보다 막강하리라 믿는다. 이 소설에선 거의 모든 편에 올리브를 비롯한 부부나 연인으로 존재하는 인물들이 상대를 어떻게 사랑하고 또 어떻게 상처를 주는 지에 대해 친절히 이야기 하고 있었다. 옮긴이는 이 작품이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이라는 수식어로 헌사하였지만 나는 '부부를 위한 치유소설'이라는 조금은 덜 세련될지 모르는 또 하나의 날개를 기꺼이 달아주고 싶다. 

 
남의 불행으로 내 상처를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부터는 그런대로 평정심을 찾아 보려던 나에게 좀 더 예리하게 직접적인 면도날을 그어대고 하얀 포말이 부숴 지는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마을이 아니라 한명 한명 끊임없이 파도가 몰아치는 고독한 섬에 난파된 듯한 고립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제인부부의 <겨울음악회> 나들이에서 만난 딸 친구 엄마의 뭔가를 아는 듯한 '세상 참 좁기도 하지' 이 한마디는 결국 무덤까지 가지고 갈수 있었던 남편의 말하지 않은 실수로 밝혀지고, 방금 전까지 같이 보았던 크리스마스 전구 불빛을 삼켜버리는 듯했지만 앞으로 남은 生의 시간에 서로를 뺀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신의 손만큼이나 친숙한 상대의 손을 잡고 결국 서로를 바라본다. 남의 걱정이나 불행을 부러 접하는 것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이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올리브의 처절하고 참담한 현실 속으로 당당하게 침입한다.

헨리가 급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올리브는 한때 학교동료이기도 했던 루이즈를 찾아가 살인범 아들을 둔 부모로서의 고통이나 그로인해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불행해진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그러한 속내만 들켜버리고 결국은 조롱까지 당하게 되는 <튤립>에서는 작품이 끝난 후라도 올리브가 차라리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튤립을 심지는 말기를 바랬었다. 남의 자식의 치명적인 허물을 보고 내 자식의 잘못에 안도한다거나, 배우자의 어린사진을 보고 내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던가, 간병인 엄마보다 늘 입원한 아버지의 안부만 궁금했던 내 자신도 튤립을 심을 자격은 없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여행바구니>에서도 올리브는 남편을 잃은 옛 제자 말린의 장례식을 도와주러 간 자리에서 크나큰 슬픔에 닥친 그녀의 실의에 찬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의외로 무너지지 않은 제자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의 상처만 더 커지고 제자가 생전 남편과 같이 여행을 약속하며 간직해온 속절없는 바구니처럼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다.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자기 허물보다 남의 약점이나 실수를 발견하고 관찰해 내는데 보다 특출나다. 하지만 남의 불행으로 운 좋게 얻은 안도감은 정작 내가 불행해졌을 때 나와 똑같을지 모를 상대들로부터 주지도 않은 상처를 덤으로 받게 되는 악순환의 씨가 된다는 점에서 묻지도 받지도 말아야할 것임에 틀림없지만 작가는 올리브를 감정의 始原을 상대에게서 찾은 우범의 결과로 상대적 감정의 피해당사자이자 자기 감정의 가해자로 만들어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꽤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이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에. 

 
세상에 자리 발견하기
 
올리브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던 젊은이가 등장하는 <병속에 든 배>와  <범죄자>는 그 나이가 비켜간 입장과 시각으로 주인공과 올리브와의 거리만큼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어짜피 아빠가 각각 다른 비현실적인 가족관계속에서의 줄리, 위니자매(병속에 든 배)와 아빠는 죽고 엄마로부터는 버림받은 레베카(범죄자)의 이야기는 그래도 그들에게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의 상처와 그들만의 치유방식에 공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친구에게 총구를 겨누던 미인대회출신의 엄마나 하루 종일 지하실에서 물에 떠보지도 못할 것 같은 배를 만드는 아빠가 오히려 안쓰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들에게 팬케?을 만들어 같이 먹자는 아빠의 일상이 비오던 날 부쳐주시던 어머니의 부침개처럼 그리웠다. 레베카가 옛 남자친구를 못잊고 헤어짐에 슬퍼하던 것 보다는 나이가 들어 버터를 더 찾는 아버지를 보고 버터가 아버지를 끝장 낼 거라 아버지의 버터사랑에 기대를 걸었다는 레베카의 애증에 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의 병환이 길고 깊어지자 긴병에 효자 없다고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기다리곤 했던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줄리나 레베카는 가출과 물건을 도난 하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려했지만 훗날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역할과 자리를 발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올 것이라 믿고 싶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올리브의 심리묘사가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진 <불안>과 마지막 수록작품인 <강>역시, 죽을 땐 제발 숨이 금세 끊어졌으면 싶다가도 끝까지 포기 할 수 없었던 인간관계 속에서의 역할과 자리에 관한 물음을 조용히 던져 주었다. 앞선 단편들에서 올리브는 가끔씩 '말풍선'으로만 등장하는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주인공의 이웃으로 등장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바닷가 마을 한 자리에 선생님으로 부인과 어머니로 위치해 있었다. 하찮아 보이는 주변인 혹은 어엿한 사건 속에서도 그렇게 모여진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였고, 남들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올리브는 도와달라는 아들의 부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는 비로소 희망이 무엇인지 기억났고, 소박해 보이는 아들의 새 부인과 부인이 낳아온 두 명의 아이들 틈 속에서 일상을 같이 하며 작지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행사할 때 가족이라는 기쁨을 다시금 맛보기도 했다. 어디든지 같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던 마흔 넷에 만난 사랑을 지키기 위해 헨리와 헤어지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아들 내외가 아침에 나누던 대수롭지 않은 대화에 마음이 상한 올리브는 아들과 해묵은 서로의 상처를 긁어대며 작품들 중에서 가장 크게 화를 내고는 쓸쓸히 돌아선다. 9.11로 야기된 미국시민의 불안을 글 속에 투영하였다는 <불안>에서 드러난 올리브의 분노는 '불안감은 분노'라는 새 며느리 앤과의 대화에서 암시하듯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 것으로 희망을 느꼈던 감정과 평행을 이루며 역할이 사라진 가족관계에서 분노로 남겨진 올리브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다.

<강>이라는 마지막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유독 제목이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에 집착하도록 했다. <종합병원>이나 <전원일기>같은 매주 주제는 다르지만 같은 형식의 틀과 뼈를 이루는 주인공들로 구성된 주간드라마의 마지막 회 같았다고나 할까. 이야기의 시점이 헨리가 죽은 후이기도 하고 일흔둘의 올리브가 죽음을 앞둔 노년으로서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슬기롭게 정리하는 듯한 메시지를 곱게 접어 우리에게 전달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혼자는 죽고 싶지 않다는 잭에게 사람은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다는 올리브의 대답이나 올리브가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친구와 전화를 할 때엔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먼저 과부가 된) 어머니가 이따금 친구들과 나누던 전화통화를 엿듣는 기분도 들었다. 올리브는 잭이 병원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 그 곳에 작지만 아직도 세상의 자리가 존재함에 다시 희망을 느끼고 이른 아침의 산책을 이어간다. 올리브의 자리(노년-silver)는 강변에 다시 봄이 오고 그런 봄이 오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견딜 수 없을 지라도 계속 흘러가는 금빛 강물(Gold)과도 같았고, 강물이 흘러가는 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일상인으로 다시 만나
 
이 책은 사실 나에게 비일상으로 다가왔던 뜻밖의 감사와는 달리 이야기에 빠져 몰두하기는 어려웠다. 주인공들의 일상 속에서 유난히도 개인적인 '잡념'이 많이 떠올라 생각의 가지치기를 극복하느라 힘겨웠다. 그래서 더더욱 어떠한 한 문장이라도 놓칠 수 없었고, 책을 덮고 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늘 과식을 한 것처럼 머리가 더부룩했다. 아침에 펼치면 산책이 하고 싶었고, 낮에 읽으면 누군가와 맛난 점심을 먹고 싶었고, 밤에 덮으면 일기라도 쓰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배우의 경우라면 실제 극중에서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면 물 만난 듯 잘 표현해 내겠지만 독자인 나는 거울같은 이야기에 합체 되지 못하고 그저 '같다는 것', '같을 것'이라는 무거운 공감만 껴안은 채 며칠을 끙끙대었다. '죽도록 지겨워', '하루가 또 갔네요', '난 괜찮아' 와 같은 짧은 한마디는 잘 구워진 생선을 맛있게 먹다가도 갑자기 목에 가시가 걸리는 순간과도 같았고 바로 내입에서 나온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녀석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똑같이 자신의 엄마와 아버지와 동생과 남편과 시어머니를 그리고 한번은 친구인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그녀석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었을 것이고, 행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과 내가 똑같을 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힘겨움 없는 같음'은 일회적인 행운이나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토록 '힘겨운 같음'이 일상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새삼 벅차고 감격스럽다.

얼마전 신문에서 '늙으면 엄살이 심해지고 원래 요구가 많은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간호사들끼리의 주고받던 무심한 한마디 때문에 대장암을 견디고 끝내 이겨버린 어느 老교사의 사연을 접했다. 나이가 들수록 일상에서 접하는 감정의 씨줄날줄간의 간격이 더 촘촘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나이로부터 얻을 거라 생각되는 관용, 포용이나 후덕함은 커녕 오히려 사소한 먼지 같은 것들도 일단 들어오면 잘 빠져나가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고 튕겨져 나가는 순간을 맞이할 때가 많다는 것에 얼마나 놀라곤 하는지 모른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에 대한 경외감은 그래서 더 커져만 간다. 내 어머니는 일평생 하루의 시작과 끝이 얼마나 경건한지 그리고 그것을 변함없이 지켜가는 일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인지 몸소 실천하는 '최고의 일상인'이었다. 이 책의 서두에 작가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라고 밝혔다. 아마 작가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나는 어머니가 가신 후에야 일상을 존중하고 신념하며 그로부터 얻은 힘으로 가족의 일상을 지원해주신 내 어머니께 비로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것이 내 삶의 마법이자 지팡이였음을 너무 늦지는 않게 깨달았던 것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친구의 분주한 일상도 눈에 그려진다. 크리스마스를 밝혀줄 꼬마전구가 녀석의 집에서도 반짝이고 있지 않을까. 내가 보지 않아도 여전히 열심일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우린 서로가 손꼽는 '최고의 일상인'이 되어 만날 것이고 늘 그렇듯이 적지 않은 세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건 서로를 등지지 않은 것에 수줍은 한마디를 건낼 날이 올 것이다.

살아는 있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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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토랩소디>를 읽고 리뷰를 남겨 주세요.
토마토 랩소디
애덤 셸 지음, 문영혜 옮김 / 문예중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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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와인을 많이 좋아했다. 처음엔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한잔씩 훌쩍 거리다가 어느날인가 부터 와인맛을 알게 된 경우인데 심각하게 소믈리에 공부를 해볼까도 생각했었다. 늦게 배운 도둑질이 날 새는 줄 모른다고 나는 급기야 와인 장사도 했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이탈리아의 토스카나 지방은 와인생산지로도 유명한데 바로 이탈리아의 자존심이라고 하는 토착품종인 산지오베제(Sangiovese)를 그 품종으로 재배하는 곳이다. 중장년층은 프랑스의 카베르네 소비뇽 위주의 풀바디한 와인을 즐겨 찾지만 패셔너블한 젊은 층은 과일향이 독특한 이탈리아산 산지오베제를 많이들 찾는다. 남자손님보다는 여자손님에게 더 반응이 좋은 편인데 뭐라고 할까...맛이 상당히 관능적이라 목으로 넘기기 전에 느껴지는 미감이 살짝 마음을 들뜨게 하는 경향이 있다. 이건 19금이긴 한데 와인을 마시고 키스를 하면 입안이 텁텁한 느낌 때문에 썩 유쾌하지(?) 않은 경향이 있으나 산지오베제는 향수같은 과일향이 나는 덕에 시간이 지나도 안심(?)할 수 가 있다. 그래서 나는 사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 커플인 경우 산지오베제를 주로 권해왔다. 또 프랑스와인은 마음을 가라앉혀 대화를 심각하게 하는 반면 이탈리아 와인은 사람을 수다스럽게해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만드는 특성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난 일년 간 잊었던 와인이 어찌나 당기던지 잠시 죽어 지내던 미각이 기적적으로 되살아나는 듯 했다. 하필 내가 운영하던 가게는 이탈리안 음식들로 낮장사를 했기 때문에 스파게티를 지겹도록 삶아야 했는데 주방장이 도망을 가는 바람에 한 삼개월 토마토 소스를 뽑느라 고생한 적도 있다. 그래서 책을 읽는 내내 홀에서, 주방에서 시끌벅적했던 지난 시절이 떠올라 와인과 토마토의 추억에 젖느라 시간가는 줄 모르고 책을 덮었다. 인생이란 참 알 수가 없다. 울다가 웃으면 어디가 어떻게 된다고 하던데 나는 와인레스토랑을 하면서 웃다가도 울고 울면서도 웃어버린 적이... 더럿 있었다. 이 책은 그렇게 울다가 웃는, 아니 웃다가도 우는 책이다.

요즘도 이런 책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살펴보니 작가가 나와 갑장인데 모르긴 해도 이 사람 아마 대가족속에서 '재미난 이야기 시끄럽게 떠들기'를 취미와 특기로 가진 가족구성원들과 습관처럼 화끈한 삶을 살아온 사람이지 싶다. 최근에 이렇게 서사의 밀도가 높은 소설을 만나본 지가 꽤 오래되었는데 시나리오로서도 완성도가 높아 극영화를 염두해 둔 작업으로도 느껴진다. 언뜻 보기엔 영화로도 유명해진『달콤 쌉싸름한 초콜릿』(라우라 에스키벨, 1989)과 같은 요리문학의 장르로도 볼 수 있는데 요리자체에 페미니즘이나 에로티즘을 반영해 여성의 자아를 부각하는 것에서 진일보해 하나의 식자재가 나라를 이동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인종과 종교, 문명의 충돌및 역사적 배경을 남녀간의 금지된 러브스토리와 잘 조합해 훌륭한 문학적 레시피를 완성했다는 고전적 성취를 거뜬히 이룬 듯하다. 영화로 본다면 비극적 요소가 결국엔 희극이 되는 해피엔드의 로맨틱 코미디 장르를 벗어날 수는 없어 보이나 작가의 연출은 다분 중세 이탈리아 시골마을을 배경으로 하는 블록버스터형 드라마를 지향하고 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이야기와 표정이 섬세하게 살아있어 개성강한 조연들이 남녀주인공 못지 않게 활약이 클 듯하다. 이력에는 영화를 전공하고 CF감독과 시나리오작가, 주방장, 요가강사등의 꽤 다양한 직업을 두루 거친 것으로 보아 영화감독의 크레딧에서 그의 이름을 확인날도 멀지 않은 것 아닐까.

이야기는 논노라는 유대인 노인의 나귀가 고독하고도 처량한 울음소리로 마을의 새벽을 깨우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나귀는 16세기 중반 에스파냐의 종교박해를 피해 토마토를 이탈리아에 가져온 유대인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당시시점의 고독과 회한을 상징하는 동물일 것이다. 요즘의 판타지 영화로 치자면 주인공의 수호정령을 의미하는 데몬의 성격을 가지는데 소설의 후반부에 이 나귀가 손자를 위해 큰 역할을 하고 근사하게 죽자 바로 노인도 유사한 모습으로 죽게 되는 삶의 연계성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이야기는 生을 자극하는 나귀의 울음소리와 死를 받아들이는 나귀의 울음소리 사이에 위치하는데 처음 울음소리를 듣고 주인공 모두가 각자 자신의 인생에 감지되는 불편한 심기를 느꼈다면 마지막 울음소리에선 비로소 사랑과 용서로 인생의 의미를 깨우친다는 서사적 대칭구조를 취하고 있다. 늙은 군주를 떠올리게 하는 나귀와 동일시되는 노인은 이 나귀의 새벽울음소리에 카톨릭교도의 마을에서 유대인으로 산다는 것에 회한을 느껴 같이 눈물을 흘리지만 죽을 때는 나귀가 그러했던 것처럼 함박웃음을 머금고 기꺼이 행복한 죽음을 맞이한다. 가장 슬픈 순간에 가장 기쁠 수 있는 삶의 아이러니가 이 작품의 주제라고도 할 수 있는데 노인은 소설속의 가장 기쁘고 다행스러운 순간에 어이없게도 죽음을 맞이하면서 작품의 주제를 가장 멋들어지게 실천하는 카타르시스를 선사한다.

유대인 노인의 손자 다비도는 토마토를 재배하고 토스카나 마을의 카톨릭처녀 마리는 올리브를 재배한다. 청년과 처녀는 모두 땅을 사랑하고 토마토와 올리브에 있어 전문가로 등장한다. 다비도에게 있어 토마토는 빨강의 풍요와 생명의 기운을 의미하며 마리에게 올리브는 아버지와의 초록빛 추억과 조상에 대한 경의를 상징한다. 청년의 토마토가 자신의 심장이라면 처녀의 올리브는 혈관에 흐르는 피와도 같아 보인다. 이 두 사람은 하나의 심장에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랑을 성취할 수 있었을까. 표면적으로는 토마토청년과 올리브처녀의 로미오와 줄리엣식 금지된 사랑이라는 서사의 큰 줄기가 핵심인 것은 틀림없지만 막상 이들이 만나는 장면은 그리 빈번하지 않으며 첫만남과 첫키스, 마을의 축제, 그리고 심판의 날이 되기까지 이들을 지탱해주는 더욱 탄탄한 스토리는 오히려 마을사람들의 웃기다가도 짠한 사연들에 있다고 보여진다. 즉, 토스카나 마을의 대공이면서도 마음편하게 농사를 짓는 것이 꿈인 코시모 대공과 분노를 요리할 줄 아는 그의 요리사 루이지, 마리의 의붓아버지이면서 온갖 음모와 계략으로 두사람의 사랑을 방해하는 주세페, 주세페의 가엾은 똘마니 베니토, 대공의 어린 시절 친구이면서 남장으로 바보행세를 하는 보보, 가장 공정하면서도 지혜로운 마법사 굿 파드레 신부와 복사 베르톨리, 그리고 무카와 시뇨레, 벤체초를 비롯한 왁자지껄한 시장사람들의 유머러스하고 생생한 목소리, 이들의 잡음과 소음이야 말로 이 작품의 가장 진솔한 매력으로 생각된다.

작가는 이들 개성강한 주변 인물들의 사연을 하나씩 늘어 놓으면서 과연 우리네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일 지 스스로 생각을 유도해 내는 작법을 시도하고 있는데 그 답으로 토마토 청년과 올리브처녀를 바라보게 하고 있다. 그런데 구태의연하게 선은 좋은 것이요 악은 벌을 받는 것이라는 권선징악으로 인생을 마무리하지는 않고 산다는 건 토마토처럼 상큼발랄하다가도 올리브처럼 쌉싸름한 것이라 이 두 가지가 절묘하게 하나가 되어 그럭저럭 누구도 견뎌볼 만한 것이라는 꽤 서글픈 그러나 끄덕이고 싶은 이야기를 하고 있다. 인생을 견디는 이유는 포도로 포도주를 만들고 올리브로 올리브유를 만들고 토마토로 소스를 만드는 이야기로 설명이 되어 진다며 이 과정은 꼭 기쁨과 슬픔이 늘 공존하는 우리네 인생과 같다고 말하고 있다.

인물의 역학구조를 보면 가장 대립되는 인물은 다비도의 할아버지 논노와 마리의 의붓아버지 주세페로 볼 수 있으며 이들을 중간에서 조율하는 중립의 역할이 가짓빛 피부를 가진 신비의 인물 굿 파드레 신부라 할 수 있다. 다비도의 할아버지는 원래 에스파냐의 재무장관출신으로 뛰어난 두뇌덕에 콜럼버스의 신대륙 항해에 참여했다가 신세계 원주민들과 10년을 산 후 유럽으로 돌아온 기적의 생환자였다. 논노는 수학과 언어가 뛰어난 유대인 지도자를 표방하며 이기고 쟁취하는 것 보다는 지고 빼앗기더라도 살아남는 생존이 곧 미덕이라 생각하는 현실주의자 이기도 했다. 논노는 원주민으로부터 토마토 씨앗을 선물로 받아 이탈리아의 비옥한 땅에 열매를 맺는 '헌신'과 '사랑'을 실천하게 되는데 그는 극중에서 가장 연장자이면서 많은 상처를 겪은 현자賢子로서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조언을 남긴다. 씨앗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으나 심고 가꾸면 열매를 맺게 되고 많은 노력과 희생을 치루고 나면 열매를 먹을 수 있으며 축복받았다면 그 열매의 맛까지 달아서 사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손자에게 전해준다. 즉, '노력없이 단맛을 원하지 말라'는 논노의 인생원칙은 그대로 다비도와 마리의 삶의 원칙에 복제되기도 하며 토마토가 온갖 희생을 치르며 이탈리아에 정착하게 되는 고단한 과정을 암시하기도 한다. 나는 책을 덮고도 다비노와 마리보다는 노인의 말과 행동이 더 오래 남았다. 그는 주연보다 더 멋진 조연이었다.

이에 반해 주세페는 마리의 아버지를 죽이고 올리브 농장을 빼앗아 마리에게 노동을 착취하며 논노의 땅까지도 넘보는 파렴치하고도 탐욕적인 인물로 작품속 악의 축이라 할 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러한 주세페의 비열한 인간성을 익히 알고는 있지만 재력을 가진 그에게 행여 피해를 입을까 입바른 소리를 하지는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군중심리에 편승한 우매한 농민들의 마녀사냥식의 열띤 토론은 흡사 연극무대의 한 장면처럼 한명 한명의 대사에 강렬한 힘이 실려 있어 작가의 인물에 대한 애착을 느낄 수 있었다. 주세페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끝까지 베니토와 보보, 시장 상인들을 뒤에서 조종하고 사주하는 사기꾼으로 악역으로서 성실을 다했다. 원래 포도주를 양조하는 사람들이 아주 지혜롭거나 사악하거나 극단적인 행보를 보이곤 하는데 비밀이나 진실을 알아버린 사람들은 그 비밀과 진실을 약으로도 혹은 독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양날의 칼을 손에 쥐게 되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는 그 충격으로 뇌졸중에 걸려 반신불수가 된 상황에서도 아버지의 올리브 농법을 더 창의적으로 개발해 자신만의 레시피를 가지게 된 마리는 이탈리아의 생활력 강한 진취적 여성상을 표방한다. 실제로 이탈리아 국민성이 우리와 비슷해 다혈질의 여성들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마리에게 시종일관 유대인이라는 열패감으로 적극적이지는 못했던 다비노가 마을의 '술취한 성인의 축제' 나귀경주에 참가해 늠름하게 우승하는 모습이나 마지막 심판의 광장에서 모든 것은 유대인의 마법과 책략으로 여자를 농간한 것이니 마리를 살려 달라 애원하는 장면은 누가 주인공이 되었건 영화라면 반드시 하이라이트 장면이 될 것으로 보였다. 작가의 스토리텔링이 워낙 구조가 탄탄해 매 순간 매 단락 극적인 스토리가 진행되는 서사의 흐름이 약간의 피곤을 유발하는 경향은 있으나 신기하게도 캐릭터 모두에게 몰입하게 하는 이야기 추진력도 무시할 수 없어 적지 않은 조연급의 인물들이 또 매 신(scene)에서 주인공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도 그 가운데 가장 극적인 연출을 꼽으라면 아마 선술집에서 한판 벌어지던 보보의 시칠리아 인형극과 박진감 넘치던 나귀경주 장면이 아닐까. 이 두 장면은 시나리오 작가출신 답게 빼어난 영상미와 현란한 카메라 촬영기법을 적절히 취사하여 글을 읽으면서도 머릿속에선 어느 허리우드의 영화를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곤 했다. 우리가 영화를 많이 본 것인지 작가가 상상력이 뛰어 난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대사의 호흡과 주인공의 액션등은 분명 극본의 형식을 많이 취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만찬에 참석한 고위직 손님들 앞에서 공연되는 오페라인형극은 귀족의 약점과 어리석음을 신랄하게 꼬집는다는 점에서 우리의 박첨지놀이와 같은 풍자와 해학이 가득한 인형극놀이를 연상케 했다. 특히 다비도가 경주의 출발선에서 논노의 늙은 나귀를 타고 할아버지의 자존심을 알아채는 장면, 경주 당사자가 아닌 낯선 이로서 루이지의 시선으로 군중과 경주자들을 바라보는 광경, 축제속에서 한데 어울려 포도주를 나눠 마시며 각자의 상처들을 씻어 내리는 모습, 마지막까지 접전을 벌인 다비도와 베니토의 시선으로 숨막히는 경주를 중계하는 부분은 이 작품에서 가장 화려한 성찬을 선사한 절정의 코스에 해당된다 할 것이다. 중요한 장면이니 만큼 겉으로 드러나는 대사외에 인물들의 내면 심리를 입체적으로 크로스 시키는 능력은 이 작품의 백미라 해도 좋았다.

또 하나 소설속에서 화자는 마치 변사라도 되는 듯 이탈리아 극작가 포초 멘초냐의 <극작법에 관한 신뢰할 만한 논문>을 예로 들며 논문에서 밝힌 원칙을 자신의 소설작법을 완성해 나가는 원칙으로 사용하여 그것을 재차 설명하는 아주 영리한 기법을 시도하고 있는데 나는 이 작법을 가시적으로 활용하는 작법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의 삶에 장애와 고통을 부여하라'는 아주 기본적인 원칙에서부터 '급류와 소용돌이', '낯선 이의 시선을 통해 바라보기', '강물은 흘러서 바다로 가야한다'등의 작법을 언급하며 자신의 의도에 논리를 부여하며 동의를 구하는 센스가 미리 연출된 계산임을 알면서도 계속 설득당하고 싶은 매력을 느끼게 하였다. 신선했다. 형식을 서사와 일치시킨 작가의 재치와 기지에 박수를 보낸다.

올리브처럼 짭쪼롭하고 토마토처럼 물컹한 독서였다. 덕분에 책을 덮으며 느닷없이 철지난 토마토가 먹고 싶어졌다. 사실 어릴 때는 어머니가 토마토에 설탕을 쳐주시는 바람에 진짜 토마토의 맛을 모르고 자랐고 학생때는 햄버거에 뿌려진 토마토 케첩이 내가 아는 토마토의 전부였고 이제 건강에 좋다고 토마토를 갈아 먹기 시작한 것도 십년 정도 될까. 토마토는 고추처럼 맵지도 않고 딸기처럼 달지도 않다. 그런 만큼 메인요리에 스며들어 어디든지 잘 어울리고 다른 음식의 풍미도 자극하는 과일이다. 감수성이 풍부한 이탈리아 사람들처럼 사교적이고 관능적인 과일임에 틀림없다. 우리의 주인공 다비도와 마리는 토마토가 가득 버무려진 가마솥에서 사랑을 나누고 그것으로 자신들만의 사랑스런 소스를 만들지 않았던가. 이보다 더 로맨틱하고 에로틱한 소스는 없을 것이다.

작가는 글쓰는 작업만큼이나 음식을 요리하는 과정을 무척이나 사랑스러워 했던 것으로 보인다. 인생이란 달콤한 토마토에 절인 올리브처럼 짠 눈물이 떨어지는 것이라 말한 것을 보면 단맛도 신맛도 쓴맛도 골고루 실패해보고 또 거짓말처럼 성공도 해보았으리라. 그러고 보니 울다가 웃은 이야기가 하나 생각난다. 그날 주방장이 도망간 날 우린 가게문을 닫을 수 없어 할 수 없이 내가 주방으로 들어갔다. 도망을 갔다는 괘씸함보다 레시피를 하나도 알려주지 않은 사실이 원망스러워 눈물이 왈칵 쏟아지려 했지만 왜 그런지 그날 따라 손님이 끊이질 않아(토요일이었다)실은 울 시간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열시쯤 되었을까. 주말인데도 식사를 못할 사정이 있었던지 초로의 신사 한분이 스파게티를 한 그릇 주문했고 나는 야박하게 거절할 수 없어 다 정리하고 들여놓은 소스통을 다시 꺼내고 면을 그제서야 삶아 거의 엉망으로 스파게티를 내놓았다. 너무 급한 나머지 불조절에 실패해 위에 기름이 뜨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신사는 너무나 맛있다며 자기가 먹은 스파게티중 가장 최고였다고 거짓말로 인사를 하는 것이 아닌가. 이렇게 배를 채웠으니 또 한끼 때웠다고 늦게 와서 식사를 주문하는 실례를 범해서 자기가 미안하다고 하는 바람에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집에가서 맥주와 먹게 피자를 한판 구워달라고 추가주문을 하는 것이다. 오늘은 자신이 부인과 이혼한 날이라 집에가도 혼자라는 것이다. 또 마음이 약해진 나는 급히 주방에 들어가 피자도우를 꺼냈는데 거짓말처럼 주방장이 피자를 만들던 모습이 하나씩 기억이 나면서 나도 모르게 피자토핑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파게티 신사의 처량한 말한마디에 콧날이 시큰해졌다가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지막 토핑인 방울 토마토를 올려놓고 보니 꼭 도망간 주방장 얼굴로 보이는 것이다. 너무 웃겼다. 웃음을 참을 수 없어 키득키득 소리가 새어나왔다. 웃음으로 피자를 겨우 포장하고 손님은 퇴장했다. 그런데 그릇을 치우다가 바깥에 손님이 서있는 모습을 목격하고 말았다. 전화기 폴더를 열었다가 다시 닫는 순간이었다. 손님은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지 않았고 나는 그제서야 참았던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그 손님이 집에 가면 너무 외롭지 싶어 눈물이 났다. 그 순간 왜 내 설움이 같이 터진 것일까... 

웃어 넘겨야 할 슬픔이라고 했다. 울 일을 감수하는 것이 인생이라 했다. 그러다 보면 웃을 일도 생기는 것이 인생이기 때문이다. 왜 아니겠는가. 실컷 울고 나면 그게 그렇게 웃길 수도 있는 것이지. 말 못해서 울고 말하다가 웃고 남이 우니까 울고 남이 웃으니 웃는다. 두려워서도 울고 두렵지 말라고도 웃는다. 어쩌면 인간이 태어나 가장 잘하는 일은 날 때부터 울었던 일과 잘때도 웃었던 일일 지 모른다. 어짜피 울을 거 어짜피 웃을 거 사는 동안 실컷 울고 실컷 웃어야 하지 않겠나. 어떻게 살 수 있을 것인가. 이 모진 세상 한 번도 울지 않고. 어떻게 죽을 수 있을 것인가. 이 좋은 세상 한 번도 웃지 않고. 울지 않으면 웃지 않으면 우린 살 수 없는 것이다. 당신이 웃으니 나도 따라 웃어 볼테다. 내가 운다면 당신도 날 안아달라. 혹시 내가 울 때 당신 웃거나 내가 웃을 때 당신 울더라도 역시 웃거나 울어 넘겨 보겠다. 그렇게 더 할 수 없이 웃고 여한이 없을 만큼 울었을 때 우리 그때도 또 한번 웃자. 누군가는 그런 나를 위해 울어줄 사람 있다고 믿자. 달콤해도 쌉싸름한 당신과 나, 그 맛은 우리 다같은 인간의 맛, 공평한 비극의 희극맛, 산다면 꼭 보아야 할 우리 자신맛, 소설보다 맛있는 리얼 성찬맛, 그것은 인생, 인생이라는 최고의 만찬 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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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10-12-04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참 많이 읽고 싶었는데, 보관함에만 넣어두고 못 읽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님 리뷰 읽으니 꼭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스파게티를 좋아해 이탈리아를 좋아하는데...
그리고 기억 하겠습니다. 산지오베제!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