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리다
파울로 코엘료 지음, 권미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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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법으로 휴식하다

나는 올 한해를 거의 나이와 시간, 계절과 세월에 씨름하며 여기까지 온 것 같다. 시시각각 그것들이 변화하는 미세한 과정을 온몸으로 마주하며 버텨내었다는 생각이다. 얼마나 울었는지 결코 아무도 모를만큼일 게다. 내 생애 가장 힘든 시절이었다. 앞으로 이와 같은 시절을 다시는 겪고 싶지 않아 나는 제대로 고통을 완수해내려 안간힘을 썼다. 가장 먼저 이용한 것은 문학이라는 마법이었다. 내가 선택한 마법의 세계에선 별다른 노력이 필요치 않을 것 같다는 쉬운 생각이 전부였다. 예상대로 마법의 길은 다른 이의 도움이 필요치 않았고 내 마음대로 멈출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세상과 교류한다는 명분으로 보이는 세상과 담을 쌓은 것과 같았다. 점점 책 한권을 읽고 다음 책을 집어 들기까지의 공백이 두려워 졌다. 그 짧은 틈새로 계절의 변화가 세상의 상처가 침입하게 될까봐 나는 점점 공백을 최소화하기 시작했고 그러는 사이 봄과 여름이 훌쩍 지나가 버린 것이다.

가을이 되자 살갗이 말라가듯 마음도 바스라지는 것 같았다. 이상했다. 책꽂이는 좁아지고 책상에 쉴 새 없이 책이 쌓여 가는데도 마음은 가라앉기만 했다. 우리 집은 도심 외곽 어느 산자락을 무너뜨려 세운 아파트 1층인지라 지난 여름 내내 자연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창문을 열어 놓으면 하루 종일 뻐꾸기를 비롯해 이름을 알 수 없는 새와 매미, 바람이 교신하며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깨우쳐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날씨가 쌀쌀해져 온 집안의 문을 닫고 난방을 틀기 시작하자 자연은 사라지고 창밖의 나무는 초록을 지키지 못하기 시작했다. 지난 여름 바람이 무섭던 어느 새벽, 나뭇가지가 베란다 창문을 세차게 때리면서 마치 기둥이 부러지기라도 할 듯 요동을 멈추지 못하던 그 때 그 나무였다. 눈부신 금빛이나 화려한 붉음으로 변신하지 못하고 건강상의 이유로 노화마저 중단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리쬐는 햇볕은 잎사귀의 메마름을 더욱 부추기고 지나가던 고양이마저 외면할지 모를 기색이 꼭 나의 그것과 닮았었다. 새삼 마음이 울렁였다. 그리고 억울했다. 나는 내가 계절이 바뀌어 가을이 된 것 조차 보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것은 자꾸만 메말라 가는 내 자신을 인식하지 않으려 한 거부현상의 결과와 다름 아니었다. 시간을 거부한다고 시간이 멈추는 것이 아니듯, 세상을 거부한다고 내가 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는데. 나도 한때는 누구보다 소중한 사람이었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그토록 나에게 상처를 준 세상이지만 다시 나를 보듬어줄 세상이 그리웠다. 누구 하나 나를 지목하지 않았지만 나는 나 혼자 세상에 분노하고 또 그런 만큼 세상을 몰래 기다렸던 것이다. 나는 내가 선택한 마법의 길에서 잠시 휴식해 보기로 했고 울렁이던 마음을 스스로 안아보고 싶었다. 망각이나 회피, 혹은 물욕이라는 목적을 떠나 진짜 내 마음을 위한 독서를 원하고 있었다. 가급적 겨울이 오기전이길 바래었고 혹시 책을 덮고 나서 기대에 못 미치더라도 후회하지 말기로 다짐했다. 그리곤 영하의 날씨가 막 시작되는 겨울의 초입에, 아니 늦가을 오후에 이렇게 책을 덮었다. 어찌 보면 이 책을 대하는 내 마음도 해답이나 위로를 바라는 강렬한 목적이 있었음을 인정한다. 하지만 나는 다른 책을 제쳐두고 이 책을 집어들 때 이미 알고 있었다. 내 영혼이 원하는 건 지금이라는 시간, 그리고 당신이라는 마법이었다고.

마법으로 체험하다

부끄럽지만 나는 지난 시절 '한권의 책이 가장 많은 언어로 번역된 기록'을 가졌다는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을 하나도 만나보지 못했다. 서점에 그토록 드나들면서 언제나 베스트셀러의 서가에서 그를 쉽게 확인할 수 있었지만 '이런' 류의 소설에 선뜻 손이 가는 마음을 지니지 못했던 독자였다. 살인적인 업무와 빈틈없는 일상에 지쳐 '그런' 식의 영혼의 울림은 어쩐지 간지럽고 부담스러워 나같은 사람하고는 멀어도 한참이지 싶었다. 한창 경력의 건물만 짓고 있었으니 보나마나 다 알만한 이야기라며 독자이길 거부하는 내 마음을 정당화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알 수 없어 그 영혼의 울림이 이토록 애타게 그리울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니 영혼이 울린다는 말뜻조차 이해할 수 없었던 나였기에 이 여운은 결코 예사롭지 않았음이다. 그동안 살면서 영혼이 아닌 육체를 향해 얼마나 남을 울리고 또 그 남으로부터 울었던가. 나는 한명의 시인이 한편의 시를 쓰기까지 얼마나 울어야 했는지 알아 주는 독자가 되고 싶었다. 마치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누군가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일지도 몰랐다. 그랬다. 이 책은 바로 몸의 울음을 위로해주는 영혼의 대답이었다. 그것은 신기하게도 내 영혼을 울리고 있었다.

이 책은 브리다라는 스무살 처녀의 영적탐색의 길에 관한 여정을 아름답게 그리고 있다. 마법을 배우고 싶어 물어물어 찾아간 마법사와 마녀를 통해 태양과 달의 전승을 배우고 마침내 자아를 발견한다는 어찌 보면 구태의연할 수 있는 평범한 서사를 그 줄기로 하고 있다. 주인공과 배경이 단순하며 사건은 대부분 마음의 변화로 일어나는 현상을 중심부로 택하였기에 다른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서사에 대한 부담, 충격이나 반전 등의 플롯, 인물의 캐릭터같은 피곤함은 전혀 인지할 수가 없다. 그것은 이 작품의 매력이었다. 물흐르듯 자연스럽고 기행문이나 치유를 위한 에세이의 성격도 감지되었다. 때문에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어느새 훌쩍 종착지에 도달해있다. 도보로만 길고 먼 숲을 천천히 걸어 돌아온 느낌이 든다. 언젠가 남이섬에서 양옆이 숲으로 우거진 메타세쿼이아길을 걸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심신을 안정시키는 피톤치드 물질로 온 가슴이 뻥 뚫릴 것 같았던 발걸음을 기억한다. 이 책은 글로 이루어진 숲이라고 해도 좋았다.

실제로 브리다는 마법사의 숲속에서 어둠의 밤을 온몸과 영혼으로 경험하는 수행의 신고식을 치르게 된다. 그곳에서 그녀는 어린 시절 '밤은 하루의 일과에 불과하다'는 아버지의 말씀을 떠올리며 어둠도 자신을 보호할 수 있다는 믿음을 발견한다. 신선하고 가슴 아릿한 시작이었다. 나는 첫 장면부터 '믿음'이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받아들이느냐 마느냐의 문제라는 걸 끄덕이면서 페이지를 넘기었다. 마치 산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오르느냐 마느냐의 문제인 것처럼. 산이 있어 오르는 것처럼 믿음역시 있기 때문에 신뢰한다는 진리를 나는 몰랐던 것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자신(작가)을 한번 믿어보라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 곧 자기 자신(독자)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이야기에 대한 일말의 의심을 미안케하는 작가의 의도였을까. 독서란 행위는 어짜피 책을 대함에 있어 작가에 대한 신뢰가 작품의 이해와 평가에 미치는 영향력이 막대한 분야이다. 나는 믿음을 인지하자 자연스럽게 브리다가 어둠속에서 느꼈던 하룻밤의 두려움과 번민을 온전한 내 두려움으로 인식할 수 있었다. 나는 스무살로 돌아가 있었던 것, 아니 어쩌면 그때로 돌아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브리다는 서점을 통해 위카라는 마녀를 소개받고 '소울메이트'에 대한 개념을 이해한다. 영혼이 분화할 때 남자와 여자로 나뉘었기에 언젠간 다시 하나로 결합할 수 밖에 없는 분신과도 같은 사랑. 소울메이트는 우리세대에게 학창시절 룸메이트라는 존재를 떠올리게 하는 새로운 개념이었다. 물론, 태어나 단 한명으로 존재하는 운명적인 내 영혼의 반쪽이라는 의미의 소울메이트를 몰랐던 것은 아니다. 허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혼이라는 만남을 전제로 한 배우자의 개념에 더 가까운 것이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소울메이트는 한 사람이 아닐 수 있으며 내 영혼이 나뉘어진 사람일지라도 사랑을 이루는 방법이 꼭 다시 하나로 결합하는 것은 아니라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운명적 사람'이라기 보다는 '운명적 만남'을 떠올렸다. 단 한번일지라도 그 운명적 만남은 영원한 사랑으로 기억될 수 있다고 말이다.

작가는 브리다가 자신의 소울메이트를 찾아가는 과정을 곧 자신을 발견하는 과정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브리다를 좇아가다 보니 자연스레 지난시절 내 소울메이트들을 떠올려보는 시간이 주어졌다. 최종적인 마법사의 선택과 그것을 받아 들이는 브리다의 지혜는 내 청춘의 수많은 시행착오를 더듬어 자꾸만 내 자신을 부끄럽게 만들었다. 우린 얼마나 상대를 소유하려 애를 끓였으며 누군가를 빼앗지 못해 애를 태웠던가. 사랑하고 헤어지는 것만큼이나 상대를 가지려 했고 버리려 했을 것이다. 그때 내 영혼의 소울메이트가 단 한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어땠을까. 한사람에 대한 집착은 혹시 매번 이번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강박을 초래했던 것은 아닐까. 다음 사람을 사랑하였다고 그 전 사람과의 사랑이 의미없는 것은 아닐 것이다. 돌이켜보니 그렇게 소울메이트로서의 한사람에 대한 강박은 곧 더 큰 상처를 야기하는 원인이 된듯하다. 상대에 대한 욕심은 곧 나 역시도 상대의 단 한사람이고픈 욕망과 동일했다. 마법사는 자신의 시행착오를 브리다에게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 그녀가 자유롭게 자신의 길을 가도록 유도한다. 나에게도 그런 사랑은 있었지만 상대를 위한다기 보다 내 자존심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아서 돌아선 것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브리다의 남자친구가 물리학 조교였던 것은 이상적인 설정이었다는 생각이다. 인간의 탄생과 생명의 근원적 이유에 호기심을 가진 브리다의 우주적 자아성찰에 도움을 주었을 뿐 아니라 질문 자체를 소중하게 여기는 그의 철학적 태도가 나를 안심케 했다. 나는 돌아서는 마법사가 된 듯 그녀의 남자친구를 믿어볼 수밖에 없었다.

작품에서 유치하지 않게 묘사된 상황으로 마법의 의식행위들도 인상적이었다. 이것은 전적으로 문학을 영적세계로 끌어 올리는 작가의 신비로운 능력이라 느껴진다. 같은 불륜이라는 소재를 가지고도 예술영화를 연출해 내는 외국의 영화감독이 겹쳐지기도 했다. 마녀의 의식으로 구체적으로 묘사되던 브리다의 체험은 다소 원시적이며 주술적이었는데 소설의 영역에서 독자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에너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이나 영상처럼 시각적 정보를 배제한 상태에서 글로만 영적인 에너지를 선사한다는 것은 종교적 영역에 가깝다 할 것이다. 불교나 기독교등의 여타 종교를 뛰어넘는 문학적 성취가 곧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전파되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는 작가의 '재능'으로 인식된다.

위카는 브리다에게 마법의 신비에 입문하는 과정을 가르치며 '달의 주기'를 체험함으로써 달전승을 깨우치도록 한다. 마법의 지팡이로서의 검이나 타로카드, 허브숲등은 자신의 영적인 에너지를 한데 모으는 도구였으며 세상의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것은 자신에 대한 믿음을 이룩하는 행위였다. 옷을 입고 벗는 행위는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연결하는 다리를 통과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그다지 특별나 보이지 않는 그 과정에서 '밖으로 드러나 보이는 것을 바꾼다는 건, 내면에 존재하는 것을 바꾸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라는 목소리의 충고는 특히 오래 남았다. 마음 바꾸기보다 몸 바꾸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로도 들렸고 변신이라는 방어기제를 내세워 외피를 쉽게 바꿀 수 있는 것 같아도 실은 결국 마음을 먹어야 가능한 일이라고도 해석되었다. 마녀들의 전승 입문식 전에 꾸어야 한다는 '옷꿈'은 그대로 입문식에서의 행위로 재연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꽤 길게 묘사된 마녀의 입문식 과정은 흡사 우리 조상들의 달의 정기를 받아들이는 부녀자들의 의식을 연상케 했는데 음력의 에너지를 가진 달, 즉 변화의 기운을 잉태한 여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인식하고 그것을 신비롭게 자각하는 행위로 느껴졌다. 행위의 절정에서는 자신의 (기존에 입던)옷을 벗고 달의 기운을 받아 새로운 재능이라는 옷을 입는 것으로 표현했는데 작품 초반부부터 제기된 그녀의 재능을 옷으로 형상화 한 것이다. 흡사 신비로운 뮤지컬의 한 장면이 상상되었다. 작가는 우주와 하나되는 여인의 삶을 달빛아래 마녀들의 숲속무대에서 종합연출한 훌륭한 감독이었다.

마법으로 불러보다

서로를 알아보는 소울메이트와 재능을 형상화한 의식행위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의심이 믿음이 되는 과정이 내게는 중요했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집어든 궁극적인 이유와도 같았기 때문이다. 우주에 대한 믿음, 소울메이트에 대한 믿음, 재능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도 자신에 대한 믿음이 없다면 앞서 말한 모든 믿음은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내가 살아있다는 기적에 온 자신을 던지고 질문이 있다면 답도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자신이 선택한 길을 평생 의심하지 않고 가는 것. 아니 평생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자신의 길을 계속하여 가는 것. 그것이야 말로 내가 나일 수 있는 가장 큰 재능임을 나는 이 책을 통해서 깨우친 것이다.

나는 그동안 내가 가진 재능을 절대 과대평가하지도 않았지만 재능에 따른 결과에도 그다지 기뻐하지도 않았다. 오만하지도 않았지만 겸손하지도 않았던 나. 나의 재능은 언제나 나의 의심에 가려 벽과도 같은 불신으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것이다. 그 중심에 바로 작가가 언급한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실수와 상처에 대한 두려움이 버티고 있었다. 내가 인정하지 않은 재능은 곧 나에 대한 불신으로 나타났고 그것은 도전을 회피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또는 도전해 놓고서도 그것을 도전으로 생각지 않는 비겁으로 발전했다. 도전하지 않았기에 그 어떤 결과도 인정하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는 내게 실수를 두려워하지 말라는 충고를 하기 위해 브리다가 자신을 어떻게 믿게 되는지 증명해 보였던 것이다. 내 자신에 대한 신뢰는 내 자신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생각에서 오는 것이며 그것은 내가 사랑할 수 있고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라는 확인에서 기인한다는 것을 이렇게 가르쳐 준것이다. 나는 이미 소중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나도 재능이 존재했고 그로써 빛날 수 있었던 사람, 이미 빛나고 있는지 모를 사람이었다.

나는 의심하지 않기로 했다. 고마운 사람, 그는 내게 실수야 말로 세상을 움직이는 것이라 말한다. 나는 다소 완벽주의자적인 성향이 많아 지난 시절 많은 지인들을 피곤하게 하였다. 실수는 용납하기 어려운 과오인만큼 실수하지 않기 위해 누구보다도 내 자신을 가장 많이 괴롭혀왔다. 어쩌면 너무 완벽해서 실패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눈물이 났다. 그동안의 고생을 위해,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은 나를 위해, 떨어지는 낙엽이 억울한 나를 위해 나는 울었다. 겨울이 오고 있었다. 올 것은 오지 않는가.

이 작품을 나처럼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자신을 불신하는, 세상에 상처받지 않기 위해 도전하지 않는 냉담한 독자들이 잠시 가던 길을 멈추고 집어들기 바란다. 문학이라는 마법은 얼마든지 걸려보아도 좋을 시간인 것이다. 인간은 어짜피 자신이 깨달을 수 있는 것들만 깨닫는다. 분명 자신의 채널로 마치 한 몸인듯 강하게 이끌리는 메시지가 용기를 줄 것이라 믿는다. 영혼의 울림은 세상 저편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아니고 내 안에서 밀쳐오는 외침인 것이다. 그것은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들었느냐 못 들었느냐의 문제인 것이다. 우린 이렇게 스스로들 그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나약한 존재이기에 문학이라는 마법의 길을 선택하는 게 아닐까. 마법이 풀리는 날 다시 현실의 목소리로 불러보자.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었던가"


살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순간이 매번이지 않다. 그 순간에 자신을 온전히 믿기도 쉽지 않다. 믿었다고 실수하지 말란 법도 없다. 그래도 살자. 살아서 믿자. 믿어서 내딛자. 그럼으로 사랑하자. 그것만이 인간이 인간된 이유 아니겠는가. 인간으로서 공평한 재능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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