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리브 키터리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권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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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팔트에 스며들다 
  

흙냄새를 기억하지 못하는 나는 계절에 따른 아스팔트의 냄새나 날씨에 따른 건물냄새엔 민감하고 세밀하다. 가령, 장마가 오기 전 유월의 밤꽃향이 짙어지는 저녁 해질 무렵 주차장이나 아직 기온이 오르지 않은 아침 출근길의 텅 빈 버스 정류장, 눈길에 묻은 흙이 털어내는 아파트 현관문 같이 살아있는 자연을 제외한 온갖 인공적인 것에 내 신경들이 숨을 쉰다. 시멘트 혹은 플라스틱, 콘크리트, 유리와 대리석, 도시를 이루는 모든 소재는 언제나 코끝을 자극하고 감각의 기억을 만들어왔다. 그러다가 가끔은 예기치 않게 젖은 나무들이 뿜어대는 벌레를 부르는 향에 놀라 보면 흠칫 눈물이 난다. 하나의 생명체대 유기체의 극적인 해후라도 이룬 듯 나는 살아있음이 반가웁다. 같이 살아는 있었던 거다. 살아왔고, 살아있고, 살아가야 할 나는 생명 그 자체로도 기쁠 일이지만 왜 이리 기쁘기도 힘든 것일까.

나는 이 책을 '내일은 많은 비가 예상된다'는 일기예보를 접했던 저녁 무렵 비릿한 아스팔트향이 반가워 잠시 감각이 일렁일 때 만났다. 자기 일 들이 바빠 몇 남지 않은 여고 동창생 중에 유일하게 같은 동네에 살고 있던 그 친구는 남편이 해외대사관에 근무를 하는 터라 이삼년에 한번 꼴로 외국으로 타향살이를 가야했다. 미국에서 돌아온 지 1년이 채 안되어 또다시 태국으로 발령을 받았다고 통화를 한 것은 한 달 전 이었다. 같은 동네에 살기는 했지만 나 역시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해 그 친구가 돌아오면 나는 떠나고 내가 돌아가면 그 친구가 떠나던 얄궂은 인연으로 십여 년을 같은 동네에 살았지만 정작 얼굴보고 떠들었던 기억은 손꼽을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엔 내가 컴백을 했더니 그 친구가 떠날 차례였던 것이다. 지난번 미국으로 떠날 땐 아이들이 아직 어리다는 핑계로 촌스럽지만 기념사진까지 박았다. 이번엔 그때만큼 아쉬움이 무뎌진 탓도 있었지만 어쩌다보니 그만 이별식의 기회를 놓치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 녀석 답지 않게 '책'을 보내 온 것이다. 그것도 짧은 손 편지와 함께.

나는 이 책의 내용을 대강은 알고 있었다. 그 친구가 나에게 이별의 징표처럼 보내온 선물 이전에 나 역시 다른 이에게 이 책을 선물했기 때문이다. 즉, 나는 선물만 보내고 읽어보지는 않은 상태였었는데 결국 그 친구로 인해 다시 내 앞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지금은 시간이 없어 자신은 돌아가서 읽을 테니 나는 책 읽으며 돌아올 때까지 자신 생각을 많이 하라는 이제 갓 마흔이 넘은 아줌마의 열일곱과 똑같던 글씨체가 연락도 안하고 떠난 서운함을 일시에 녹여주기는 했다. 친구가 적어준 내 이름 석자도 비온 뒤 아스팔트에 막 스며든 풀향기처럼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 녀석은 이 책의 내용을 잘 파악했고 나에게 어떤 감동을 주기 위한 깊은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틀림없이 서점직원에게 두어마디 들어보고 별 고민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있을 법한 일이지만 내 의지와 선택이 아닌 채로 뜻밖에 전달된 책인지라 나는 그냥 이렇게 책하나 던져주고 떠나버린 그 친구와 여느 택배상자와 다름 없이 건네받은 그때 그 순간이 이 작품의 주제이자 작가가 이렇게 멀리 있는 나에게도 끝내 전하려한 메시지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것은 정확하게 들어 맞았다.


남의 이야기가 구체적인 내 사건으로 
  
헨리가, 사람 참 지겹게 만드는 재주가 있는 아내 올리브를 두고 일터에서의 동반자 데니지를 마음으로만 사랑한 이야기인 <약국>은 죽도록 지겨워도 결국 제 다리 한쪽과도 같은 올리브와 긴긴 시간을 견디는 이야기로 들렸다. 어렸을 때 살던 집, 그러나 그 집에서 한 번도 행복한 기억은 없어 불행의 추억만 남겨진 그 집에 가보고 싶었던 케빈의 어머니와 그의 선생님었던 올리브 아버지가 자살한 이야기, <밀물>은 그들이 얼마나 生에 대한 애착이 절실했는지에 관한 고백으로 들렸다.

눈가의 부드럽게 잡힌 오십줄의 잔주름이지만 혹독한 일이라고는 일어난 적이 없어 보이는 앤지의 옛사랑과 지금의 사랑에 대한 상처는 네 살 때부터 자연스럽게 生의 일부로 피아노를 만져온 <피아노연주자>의 변함없이 소중한 일상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느껴졌다. 하나뿐인 아들의 결혼식 날 박학다식한 며느리를 얻으며 느껴야 할 '큰 기쁨'이 자신보다 아들에 대해 결코 아는 것이 많지 않아 보이는 그녀로부터 상실감이 되어 되돌아 왔을 때, 결국 그녀의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자신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하고만 <작은 기쁨>은 누구의 며느리가 되어본 적 있는 내가 미처 고개를 들지 못할 '큰 슬픔'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또한, 사람 좋은 인형 같던 남편 헨리와 투덜거리며 나누던 대화는 그녀 그리고 내가 남편에게 그만큼 하지 않고 묻어둔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기도 했다.

세 네 편을 읽고 나서 부터는 올리브 키터리지의 해안가 마을과 이웃들이 마치 우리 동네 와 내 이웃인 것처럼 적응이 되었고, 서사를 이끌어 나가는 작가만의 방식에도 완전히 익숙해져 한편 한편의 이야기가 내 몸처럼 내 목소리인 것처럼 내 눈과 손과 귀 같은 감각에 아주 가깝게 밀착되는 일체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럴수록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이야기를 통해 보다 구체적으로 회상되던 '나'의 일상이었다. 그것은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처럼 난처하기도 했는데, 예를 들면 <굶주림>의 경우, 내면적 상처로 인한 거식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끝내 어이없이 죽어버린 소녀의 죽음과 외로움에 공감하기 보다는 엉뚱하게도 둘 다 공부가 끝나지 않아 생활비가 없어 부모님에게 의지하던 신혼 초, 남편이 사들고 온 몇 개 안되던 도너츠를 나누어 먹던 기억이 불현듯 떠올라 목이 메이기도 했다. 분명 앞 작품에서도 등장한 '도넛'인데 기어이 내 기억속의 한자락을 끄집어 내고 만 소설 속 한 장면들은 큰 주제와 상관없이 늘 그 자리에 위치하던 올리브처럼 내 인생 어딘 가에서도 의미있게 자리를 차지했던 시간들 이었던 것이다.

생명을 위협하는 극적인 순간에 우연히 알게 된 남편의 생각, 같이 듣거나 보았던 분명 같이 겪은 일임에도 서로의 관점차가 상반되는 사실을 깨닫게 된 <다른 길>은 어쩌면 이 작품에서 나에겐 통째로 펀치를 날려대는 가장 적절한 자화상과도 같았다. 화장실에서 우연히 보게 된 헨리의 털없는 허연 정강이에 핀 검버섯은 늘어난 잔주름과 한웅큼 빠지던 내 머리카락 보다 더 잔인했고, '결혼하고서 당신은 무슨 일에도 한 번도 사과를 한 적이 없는 것 같다'는 헨리의 푸념은 '사과는 잘못한 사람이 먼저 하는 것'이라는 내 비판보다 훨씬 더 정당했다. 배우자의 생각을 알고, 그 생각이 영원히 불변할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마찬가지로 상대 또한 나와 같을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는 순간의 외로움은 언제나 배우자를 선택하지 않은 자의 그것보다 막강하리라 믿는다. 이 소설에선 거의 모든 편에 올리브를 비롯한 부부나 연인으로 존재하는 인물들이 상대를 어떻게 사랑하고 또 어떻게 상처를 주는 지에 대해 친절히 이야기 하고 있었다. 옮긴이는 이 작품이 '어른을 위한 성장소설'이라는 수식어로 헌사하였지만 나는 '부부를 위한 치유소설'이라는 조금은 덜 세련될지 모르는 또 하나의 날개를 기꺼이 달아주고 싶다. 

 
남의 불행으로 내 상처를
 
소설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 부터는 그런대로 평정심을 찾아 보려던 나에게 좀 더 예리하게 직접적인 면도날을 그어대고 하얀 포말이 부숴 지는 아름다운 바닷가 작은 마을이 아니라 한명 한명 끊임없이 파도가 몰아치는 고독한 섬에 난파된 듯한 고립감마저 느끼고 말았다. 제인부부의 <겨울음악회> 나들이에서 만난 딸 친구 엄마의 뭔가를 아는 듯한 '세상 참 좁기도 하지' 이 한마디는 결국 무덤까지 가지고 갈수 있었던 남편의 말하지 않은 실수로 밝혀지고, 방금 전까지 같이 보았던 크리스마스 전구 불빛을 삼켜버리는 듯했지만 앞으로 남은 生의 시간에 서로를 뺀다는 걸 상상할 수 없었던 그들은 자신의 손만큼이나 친숙한 상대의 손을 잡고 결국 서로를 바라본다. 남의 걱정이나 불행을 부러 접하는 것으로 안도감을 느끼는 이웃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바로 올리브의 처절하고 참담한 현실 속으로 당당하게 침입한다.

헨리가 급작스런 뇌졸중으로 쓰러져 요양원에서 힘겨운 시간들을 보내고 있을 때 올리브는 한때 학교동료이기도 했던 루이즈를 찾아가 살인범 아들을 둔 부모로서의 고통이나 그로인해 자신만큼 혹은 자신보다 더 불행해진 모습을 확인하고 싶었지만 오히려 자신의 그러한 속내만 들켜버리고 결국은 조롱까지 당하게 되는 <튤립>에서는 작품이 끝난 후라도 올리브가 차라리 땅이 얼어버리기 전에 튤립을 심지는 말기를 바랬었다. 남의 자식의 치명적인 허물을 보고 내 자식의 잘못에 안도한다거나, 배우자의 어린사진을 보고 내 자신을 용서하기 힘들었다던가, 간병인 엄마보다 늘 입원한 아버지의 안부만 궁금했던 내 자신도 튤립을 심을 자격은 없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여행바구니>에서도 올리브는 남편을 잃은 옛 제자 말린의 장례식을 도와주러 간 자리에서 크나큰 슬픔에 닥친 그녀의 실의에 찬 모습을 보고 위로를 받고 싶었지만 의외로 무너지지 않은 제자의 모습에 오히려 자신의 상처만 더 커지고 제자가 생전 남편과 같이 여행을 약속하며 간직해온 속절없는 바구니처럼 덩그러니 남겨지게 된다.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자기 허물보다 남의 약점이나 실수를 발견하고 관찰해 내는데 보다 특출나다. 하지만 남의 불행으로 운 좋게 얻은 안도감은 정작 내가 불행해졌을 때 나와 똑같을지 모를 상대들로부터 주지도 않은 상처를 덤으로 받게 되는 악순환의 씨가 된다는 점에서 묻지도 받지도 말아야할 것임에 틀림없지만 작가는 올리브를 감정의 始原을 상대에게서 찾은 우범의 결과로 상대적 감정의 피해당사자이자 자기 감정의 가해자로 만들어 어쩔 수 없는 나약한 인간임을 꽤 설득력있게 보여주고 있었다. 세상 모든 이들은 자신이 필요로 하는 걸 얻기 위해 분투하고 있기에. 

 
세상에 자리 발견하기
 
올리브의 제자이기는 하지만 다소 거리가 있어 보였던 젊은이가 등장하는 <병속에 든 배>와  <범죄자>는 그 나이가 비켜간 입장과 시각으로 주인공과 올리브와의 거리만큼 어느 정도 객관성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어짜피 아빠가 각각 다른 비현실적인 가족관계속에서의 줄리, 위니자매(병속에 든 배)와 아빠는 죽고 엄마로부터는 버림받은 레베카(범죄자)의 이야기는 그래도 그들에게 앞으로 기회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그들의 상처와 그들만의 치유방식에 공감하고 싶지는 않았다. 결혼하고 싶었던 남자친구에게 총구를 겨누던 미인대회출신의 엄마나 하루 종일 지하실에서 물에 떠보지도 못할 것 같은 배를 만드는 아빠가 오히려 안쓰러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딸들에게 팬케?을 만들어 같이 먹자는 아빠의 일상이 비오던 날 부쳐주시던 어머니의 부침개처럼 그리웠다. 레베카가 옛 남자친구를 못잊고 헤어짐에 슬퍼하던 것 보다는 나이가 들어 버터를 더 찾는 아버지를 보고 버터가 아버지를 끝장 낼 거라 아버지의 버터사랑에 기대를 걸었다는 레베카의 애증에 더 가슴이 아팠다. 아버지의 병환이 길고 깊어지자 긴병에 효자 없다고 이 고통이 언제 끝날지 기다리곤 했던 내 모습과 다를 바 없었다. 줄리나 레베카는 가출과 물건을 도난 하는 것으로 자신의 상처를 극복하려했지만 훗날 가족이나 친구와의 관계 속에서 역할과 자리를 발견하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 올 것이라 믿고 싶다.

이 소설에서 주인공 올리브의 심리묘사가 가장 직접적으로 느껴진 <불안>과 마지막 수록작품인 <강>역시, 죽을 땐 제발 숨이 금세 끊어졌으면 싶다가도 끝까지 포기 할 수 없었던 인간관계 속에서의 역할과 자리에 관한 물음을 조용히 던져 주었다. 앞선 단편들에서 올리브는 가끔씩 '말풍선'으로만 등장하는 사람으로 느껴지기도 했고 주인공의 이웃으로 등장해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보이는 바닷가 마을 한 자리에 선생님으로 부인과 어머니로 위치해 있었다. 하찮아 보이는 주변인 혹은 어엿한 사건 속에서도 그렇게 모여진 이야기는 결국 자신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였고, 남들이 말하는 올리브의 이야기이기도 했다.

올리브는 도와달라는 아들의 부탁으로 날아가는 비행기를 타고는 비로소 희망이 무엇인지 기억났고, 소박해 보이는 아들의 새 부인과 부인이 낳아온 두 명의 아이들 틈 속에서 일상을 같이 하며 작지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행사할 때 가족이라는 기쁨을 다시금 맛보기도 했다. 어디든지 같이 도망갈 수 있을 것 같던 마흔 넷에 만난 사랑을 지키기 위해 헨리와 헤어지지 않은 것을 천만 다행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두 아들 내외가 아침에 나누던 대수롭지 않은 대화에 마음이 상한 올리브는 아들과 해묵은 서로의 상처를 긁어대며 작품들 중에서 가장 크게 화를 내고는 쓸쓸히 돌아선다. 9.11로 야기된 미국시민의 불안을 글 속에 투영하였다는 <불안>에서 드러난 올리브의 분노는 '불안감은 분노'라는 새 며느리 앤과의 대화에서 암시하듯 자신의 역할이 필요한 것으로 희망을 느꼈던 감정과 평행을 이루며 역할이 사라진 가족관계에서 분노로 남겨진 올리브를 더욱 애처롭게 만들었다.

<강>이라는 마지막 작품은 다른 작품과는 달리 유독 제목이 암시하는 상징적 의미에 집착하도록 했다. <종합병원>이나 <전원일기>같은 매주 주제는 다르지만 같은 형식의 틀과 뼈를 이루는 주인공들로 구성된 주간드라마의 마지막 회 같았다고나 할까. 이야기의 시점이 헨리가 죽은 후이기도 하고 일흔둘의 올리브가 죽음을 앞둔 노년으로서 어떻게든 자신의 인생을 슬기롭게 정리하는 듯한 메시지를 곱게 접어 우리에게 전달해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혼자는 죽고 싶지 않다는 잭에게 사람은 혼자 태어나 혼자 죽는다는 올리브의 대답이나 올리브가 아직 남편이 살아 있는 친구와 전화를 할 때엔 아버지를 먼저 떠나보낸(먼저 과부가 된) 어머니가 이따금 친구들과 나누던 전화통화를 엿듣는 기분도 들었다. 올리브는 잭이 병원에서 자신을 필요로 한 그 곳에 작지만 아직도 세상의 자리가 존재함에 다시 희망을 느끼고 이른 아침의 산책을 이어간다. 올리브의 자리(노년-silver)는 강변에 다시 봄이 오고 그런 봄이 오는 것이 기쁘다는 것을 견딜 수 없을 지라도 계속 흘러가는 금빛 강물(Gold)과도 같았고, 강물이 흘러가는 한 삶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최고의 일상인으로 다시 만나
 
이 책은 사실 나에게 비일상으로 다가왔던 뜻밖의 감사와는 달리 이야기에 빠져 몰두하기는 어려웠다. 주인공들의 일상 속에서 유난히도 개인적인 '잡념'이 많이 떠올라 생각의 가지치기를 극복하느라 힘겨웠다. 그래서 더더욱 어떠한 한 문장이라도 놓칠 수 없었고, 책을 덮고 나면 떠오르는 여러 가지 생각들로 늘 과식을 한 것처럼 머리가 더부룩했다. 아침에 펼치면 산책이 하고 싶었고, 낮에 읽으면 누군가와 맛난 점심을 먹고 싶었고, 밤에 덮으면 일기라도 쓰고 잠자리에 들고 싶었다.

배우의 경우라면 실제 극중에서 자신의 성격과 비슷한 캐릭터를 만나면 물 만난 듯 잘 표현해 내겠지만 독자인 나는 거울같은 이야기에 합체 되지 못하고 그저 '같다는 것', '같을 것'이라는 무거운 공감만 껴안은 채 며칠을 끙끙대었다. '죽도록 지겨워', '하루가 또 갔네요', '난 괜찮아' 와 같은 짧은 한마디는 잘 구워진 생선을 맛있게 먹다가도 갑자기 목에 가시가 걸리는 순간과도 같았고 바로 내입에서 나온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 녀석은 무엇을 느꼈을까. 이 책을 읽으며 똑같이 자신의 엄마와 아버지와 동생과 남편과 시어머니를 그리고 한번은 친구인 나를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느꼈던 감정들을 그녀석도 느꼈을 것이다. 그래서 힘들었을 것이고, 행복했을 것이다. 이렇게 자신과 내가 똑같을 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힘겨움 없는 같음'은 일회적인 행운이나 우연일지 모르지만 이토록 '힘겨운 같음'이 일상을 견디고 살아내야 하는 우리의 운명인 것처럼 새삼 벅차고 감격스럽다.

얼마전 신문에서 '늙으면 엄살이 심해지고 원래 요구가 많은 것이니 너무 신경쓰지 말라'는 간호사들끼리의 주고받던 무심한 한마디 때문에 대장암을 견디고 끝내 이겨버린 어느 老교사의 사연을 접했다. 나이가 들수록 일상에서 접하는 감정의 씨줄날줄간의 간격이 더 촘촘해지는 것을 느낀다. 그리하여 나이로부터 얻을 거라 생각되는 관용, 포용이나 후덕함은 커녕 오히려 사소한 먼지 같은 것들도 일단 들어오면 잘 빠져나가지 않거나 심지어는 아예 들어오지도 못하고 튕겨져 나가는 순간을 맞이할 때가 많다는 것에 얼마나 놀라곤 하는지 모른다. 한해 두해 나이를 먹을수록 어머니에 대한 경외감은 그래서 더 커져만 간다. 내 어머니는 일평생 하루의 시작과 끝이 얼마나 경건한지 그리고 그것을 변함없이 지켜가는 일이 얼마나 자신의 삶을 지탱하는 것인지 몸소 실천하는 '최고의 일상인'이었다. 이 책의 서두에 작가는 '삶을 마법으로 만들 줄 아는 분이자 내가 아는 최고의 이야기꾼인 어머니에게'라고 밝혔다. 아마 작가의 어머니도 나의 어머니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 짐작한다. 나는 어머니가 가신 후에야 일상을 존중하고 신념하며 그로부터 얻은 힘으로 가족의 일상을 지원해주신 내 어머니께 비로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을 시작하였던 것 같다. 그것이 내 삶의 마법이자 지팡이였음을 너무 늦지는 않게 깨달았던 것이다.

겨울을 좋아하는 친구의 분주한 일상도 눈에 그려진다. 크리스마스를 밝혀줄 꼬마전구가 녀석의 집에서도 반짝이고 있지 않을까. 내가 보지 않아도 여전히 열심일 친구가 보고 싶어진다. 우린 서로가 손꼽는 '최고의 일상인'이 되어 만날 것이고 늘 그렇듯이 적지 않은 세월 어디를 가든 무엇을 하건 서로를 등지지 않은 것에 수줍은 한마디를 건낼 날이 올 것이다.

살아는 있었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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