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 - 윤대녕 산문집
윤대녕 지음 / 푸르메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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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이 책을 좀 미루어 두었었다. 어떤 예감때문인 지 올해를 정리하는 시점에 책을 덮고 싶었는데 아마도 윤대녕의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을 통해 산다고 하는 이 대책없는 것, 그것을 또 견뎌낸 올 한해를 조용히 격려하고 싶었는 지도 모르겠다. 매일을 숨쉬고 또 그 다음날을 맞는 것이 따로 칭찬받을 일이 되진 않겠지만 나는 그마저도 칭찬해 줄 사람이 필요했었나 보다. 그렇게 중요한 약속을 따로 빼어놓듯 나는 조용히 이 책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곤 큰 기다림때문 이었는지 나는 책을 덮고 사뭇 경건해 지기까지 했다. 나도 모르게 두 손을 모아 내 입술로 가져가 버린 나...어쩐 일인지 깍지낀 두 손에 힘이 주어져 입술도 꼭 깨물어 보았다. 천천히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그런 나를 그냥 잠시 내버려 두었고 올 한해가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스스로 끝내 대견해진 나는 눈물을 닦지 않았다.

이 책은 마흔 아홉된 소설가 윤대녕의 소설작업 바깥의 사적인 풍경과 텍스트 가장 안쪽의 심상을 고백하는 산문 글이다. 자신이 살아온 배경과 가족들, 만나온 사람들, 읽어온 세월과 느껴온 자연을 지금 시점에서 정리한 글이라 나이들어 그동안 문학해 온 자신을 돌아보고 다시 곧추 세우는 의미있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그가 자신을 말하는 방식은 한눈에도 무척 조심스러워 보였고 마치 어느 산사에서 차 한잔을 사이에 두고 새소리 물소리를 동무삼아 고조곤히 사연을 전해주는 느낌이 들었다. 이 잔잔함의 여운이 내겐 얼마나 길 것인지 나는 두 어장을 넘기면서 이내 간파해 버렸다. 산사에서의 운명적 만남이라도 이루고 온 듯 나는 올 한해 이 곳 속세에서 보고 느끼고 이루어 온 것들을 차근히 되짚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나는 그가 그랬던 순서와 방식대로 내 한해를 정리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불효를 고백하던 어머니와 늘 거리를 두었던 아버지, 어린 시절 자신을 가르친 할아버지, 역마살 낀 자신을 한결같이 기다려준 아내를 이야기 할 때엔 유난히도 '마흔 넘어', 혹은 '마흔이 다 되어', 아니면 '마흔아홉에'를 언급하며 세월 지나 돌아본 심경을 마치 참회하는 투로 고백을 하곤 하는데 나는 그가 나이를 호명할 때마다 찔린데 또 찔리는 심정으로 마음이 영 편치를 않았다. 올 한해 지겹도록 마흔을 부르짖은 나는 그의 나이를 읽어가며 내 이 책을 마지막으로 마흔의 종지부를 찍고야 말겠다는 생각도 했음이다. 그랬다. 마흔을 받아들이는데 결국 내 전 생애가 걸리게 된 것을 깨닫고만 나는 올 한해 그 과정의 하나로 무차별적인 독서를 시작하였고 그 결과로 일상에서 어떤 반복되는 패턴을 얻게 되었다. 그동안의 내 인생을 정리해 보자는 심정으로 책을 집어 들었던 것이 지난 봄, 유래없이 폭설이 계속되는 시점이었다. 그리곤 정말로 살아온 그간의 기억들을 정리하는 훌륭한 방편이 되어 주었다고나 할까. 어찌 보면 마흔을 잊어보려 했는데 오히려 더 되새겨진 꼴이 되긴 했다. 하지만 이 책은 올 한해 내가 한 일과 그 중에서도 책을 읽고 글을 쓴 일을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총정리의 시간을 제공해 주었다. 그것이 마흔을 살아낸 내 자신을 격려하는 일이기도 했다. 대충 내 예감은 맞았던 것이다.

나는 소설을 쓰고 싶었다. 그는 애절한 문학청년의 시절이 분명 있었음을 술회하는 작가에 속했지만 내 경운 청춘을 다 지나고 보니 문학에의 염원이 생기게 된 늦깍이 작가 지망생...쯤 되려나. 전문적인 문학의 공부를 따로 한 것도 아니고 원대한 문학의 꿈도 품어보진 않았지만 어느날 갑자기 글을 쓰고 싶어 그렇다면 글을 써야하는 가에 대한 대책없는 질문에 어이없이 생명이 위협당한 경우라 할 것이다. 나는 질문에 대한 답을 점검해 보는 중간 단계로서 보다 안전해 보이는 독서와 서평의 시간을 가지기로 했고 올봄부터 착수한 계획은 큰 차질없이 지금까지 이어졌다. 이 책의 후반부에도 윤대녕이 읽은 책을 소회하는 독서일기가 있는데 간단하면서도 본인이 강렬하게 느낀 인상만 핵심으로 전해주기에 책을 읽지 않은 사람도 부담없이 이해하고 넘어가기 편했다는 생각이 든다. 내 경운 책 한권 읽고 책과 관련된 그동안의 사연을 밑도 끝도 없이 풀어내는 경향이 있어 서평이 산으로 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세상에 하고 싶은 말이 그리도 많았었나 그런 생각도 드는데 결국 서평을 써가면서 책이야기가 아닌 내 이야기를 원없이 떠들었다는 뿌듯함을 느끼기도 했던 것 같다. 이 만족감은 아마 내가 올 한해를 견뎌온 가장 핵심적인 기쁨의 고통, 그 심장부에 위치하고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이 되었다. 그러면서 나는 자연스레 소설을 쓰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 버렸다. 얼마나 웃긴가. 아니 얼마나 슬픈가. 인생이여, 세월이여...여인의 변덕이여...

어떤 유명한 과학자가 그랬다. 어떤 일이 일어난 후로는 절대 그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나는 어쩌면 소설이 쓰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내 이야기를 누군가에게 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이 사실을 인정하기란 매우 고통스러운 일인지라 나는 며칠 전 신문에서 유명한 소설가가 에세이로 기재한 글을 대신하겠다. 소설가는 대학교에서 문예창작을 가르치는 일을 병행하고 있는 유명한 작가인데 그녀의 책상엔 원고를 보아달라고 매달 수천페이지의 글이 도착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 중에 육십이 넘은 목사한분이 방대한 분량의 장편을 부쳐와 출간을 하고 싶으니 꼭 좀 읽어 달라 부탁을 하더라는 것. 소설가는 몇페이지 읽고는 문장의 수준과 모든 구성이 책을 내기엔 부적절하다는 답변을 하고 싶었으나 너무나 간곡한 목사의 상처를 염려해 출간하려면 대폭 수정이 필요하다고 에둘러 말을 전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는 이제 마음이 바뀌었다며 선생님이 꼼꼼히 읽어주셨다니 책을 내지 않아도 마음이 괜찮다고 울먹이더라는 것이다. 소설의 내용은 하나뿐인 의사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노인의 인생무상과 아들의 억울함에 관한 자신의 고백이었다. 아...나는 그글을 읽고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들킨 것 같아 그만 얼굴이 뜨거워져 어쩔 줄 몰라 했다.

소설가는 목사의 글이 온정신과 몸을 다해 자신의 억울함을 세상에 토로하는 개인적인 글일뿐 그 글이 어떠한 문학적 가치는 가지지 못했다고 밝히고 있었다. 그래도 된 것이었다. 목사는 글을 썼고 소설가는 그 글을 읽어 주었으니 말이다. 소설가는 목사를 등단시키는데 조력하는 일 보다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었다는 것에 세상의 답이 있다고 하였다. 시켜주려 읽어보았는데 읽어주니 그만두더라...그의 마음은 단 한명의 세상이라도 풀어질 만큼 이었을까.

'오늘 오후 15시 경 강원도 고성군 토성면 미시령 동서관통도로에서 **구청 버스 브레이크가 파열되면서 관통도로 터널을 지나 500M 쯤에 위치한 울산바위 주차장에 정차 중이던 승용차를 추돌하여 승용차는 10m 절벽 아래로 추락, 2명이 사망...승용차는 완전히 부서져...'

3년 전 내 어머니는 이 기사속에서 당시 운전대를 잡고 있던 이모와 같이 즉사한 2명중 한명이었다. 벚꽃이 만개한 봄날 오후였다. 그날은 또 다른 칠순이모의 생일을 축하하러 형제들이 강원도로 여행을 가시던 중이었고 어머니는 정차된 차에서 막 내릴려던 찰나에 사고를 당한 것이었다. 나는 그날 이후 살아남은 이모들을 지금까지 외면하는 것으로 용서의 마음을 여간해서 열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조카이기도 하다. 그날의 일을 그럴싸한 소설로 구성하여 두어 번 공모에 낙선한 경험을 가지고 있는 나는 이상하게도 낙선의 기쁨만큼은 후련하게 만끽하고는 했는데 아마도 그 목사님과 비슷한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래도 누군가는 내 글을 읽어 보았겠지...하는.

그렇게 시간이 지나면서 소설쓰기에 대한 막연한 바램이 잦아들 즈음 이 책을 만나게 된 것인데 어쩌나...사람의 욕심은 끝도 없어 나중에 이런 사람이 되어 내 이야기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또 지병처럼 들고 마는 것이다. 이렇게 나지막히 단정하게 적어볼 수 있다면...내 어머니와 내 고향과 아버지를 말할 수 있다면...내가 읽은 책을 말할 수 있다면...어느 잠못들던 밤의 이야기와 버리지 못한 것들을 그리고 그 이유를 말할 수 있다면. 이 책은 글을 쓰고 싶었던 나를 돌아보게 하면서 다시 내 앞날을 그려보게 하는 작품이었다.

윤대녕은 이 책의 제목이 된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이라는 글에 정지 교통신호를 기다리다 우연히 만난 어느 시인과의 계속되는 인연을 소개하며 삶은 사소한 일상의 연속이라는 깨달음을 강조하고 있다. 그 시인 역시도 휴대폰을 가지러 다시 가지 않았다면 그날의 만남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면서 일상에는 늘 극적인 요소가 내재한다는 신비로움이야말로 우리가 매순간 극적인 순간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질문한다. 나는 그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질끈 감고 순간의 만남, 찰나의 이별에 총이라도 맞은 듯 가슴을 쥐어 뜯었다. 내 어머니가 탄 차가 1분만 주차장에 늦게 도착했더라면... 내 어머니 차를 추돌한 차가 1분만 더 일찍 지나가 버렸다면...아니, 내 어머니가 몇초 만이라도 빨리 차에서 내렸더라면... 누군가는 그 동일한 순간에 生의 희열에 감동하고 또 누군가는 死의 절명에 운명하는 이 모든 우리 인생은 얼마나 극적이고 피할 수 없는 것인가.

또 하나 내가 고백하고 싶은 건 윤대녕의 이별방식, 그가 소설에서 보여준 헤어짐의 미학적 관념세계를 잊지 못해 그리워하는 개인적 사연이라고나 할까. 나는 내친김에 이 책으로 올해 나이 마흔된 내 첫사랑의 종지부도 찍고 싶어진다. 윤대녕은 꼭 내 국어선생님과도 같은 연배의 작가인데 소설가는 못되셨지만 아직도 사립여고에서 교편을 잡고 계시는 그 시절 내 영혼의 별, 한명의 선생님을 떠올리게 한다. 이 십년도 더 된 내 여고시절의 앨범엔 국어 선생님과의 영화보다 더 근사한 바닷가 사진이 있고 하얗게 부숴지던 섬세한 포말처럼 같은 색의 이를 드러내고 읽어주시던 <서시>와 <별 헤는 밤>의 목소리가 담겨있다. 교무실에 비밀간첩이라도 된 듯 몰래 잠입해 선생님의 주소와 연락처를 알아내곤 어느 일요일 아침 무작정 주소를 찾아 비장하게 몸을 던진 74번 버스도 운행중 이시다. 그때 내가 가진 옷중에 가장 예쁜 치마를 골라 입고 처음으로 건너본 한강다리는 얼마나 두려웠던지. 다닥다닥 집들이 모여 있는 언덕 아래 정류장에서 심호흡을 하고 떨어트린 동전 두 개는 얼마나 아득했는지. 선생님의 어머니로 보이는 어르신의 '지금은 없다'는 차가운 대답...실망한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마지못해 요 앞 목욕탕에 갔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 바보처럼 또 얼마나 안심이 되던지...그렇게 두 번은 다시 걸 용기가 없어 그대로 돌아선 발걸음은 다행히 여고생의 자존심을 세워주며 선생님의 '거절아닌 외면'을 영원한 비밀로 간직할 수 있었음이다.

그렇게 이 책은 내 여고시절 선생님과 나누었던 빛바랜 약속들과 다시 극적으로 조우하게 하였다. 나는 아직 선생님과 헤어지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학생이기 때문에. 지난 시절 나는 윤대녕의 글에서 80년대식의 사랑과 이별만을 찾아 헤메던 고집스런 독자였다. <대설주의보>에서 해란과 같은 여주인공의 낭만적 이름이나 그다지 쿨하지 못한 이별의 방식들, 몽환적인 분위기에서의 꿈과같은 안녕, 더 가까워 보이지 않는 문어체의 대화들에 나는 마치 내 첫사랑의 순정이라도 되찾은 듯 기뻐하던 독자였다. 늘 그리워 하지는 않아도 언젠가 서로를 다시 찾게 되고 그때마다 헤어지는 것조차 무의미한 관계, 다시 말하면 헤어지긴 했으나 헤어진 적이 없는 관계, 그러니까 안 만나도 되지만 다시 만나도 되는 절대 헤어졌다고는 말하지 못하는 관계...우린 얼마나 더 많이 헤어지고 더 많이 기다렸고 그래서 다시 마주쳤던가. 그의 글을 읽고 나면 늘 지난 시절 헤어는 졌지만 미처 헤어지지 못한 그들, 차마 헤어지자 한마디 없이 헤어 질 수밖에 없었던 그들이 모두 헤어짐에 동의할 수 없다며 하나둘 다시 내 앞에 나타나고는 했다. 윤대녕은 내게 이별을 말함으로써 절대 이별하지 못하게 하는, 헤어질 수 없는 작가였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윤대녕이 고집한 이별방식의 기원도 어렴풋이 감지할 수 있었는데 그것은 그가 불교사상에 동의하며 어떤 사람과도 여간해서는 헤어지지 않는다는 인연을 보호하는 원칙,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는 돌아오는 24절기마다 사람을 만나는 음력의 시간과 계절을 사는 사람이었다. 내가 그의 소설에서도 희미하게나마 기약없는 약속을 다시 기억해내곤 했던 이유는 거리를 두면서도 사람과 한번 맺은 인연은 인위적으로 저버리지 않는 그의 의지때문이 아니었을까.

정말 기도같은 독서를 마치고 돌아와 마음에 촛불하나 밝혀놓은 어렴풋한 나를 보게 된다. 나는 올 한해 그럭저럭 책들과 함께 내 글들과 함께 행복했다. 오대산으로 제주도로 원주로 강원도로 마음살이 부대낄 때마다 정처없이 떠나곤 하던 그가 부럽지 않을 만큼 나도 내 자신을 향해 한껏 웃어주고 마음다해 울어 주었다. 아무리 어렵고 도무지 재미없는 책도 신기하게 이해가 되고 눈물이 났다. 여행으로 늘 여름을 나던 내가 한여름의 열대야를 책으로 이겨내지 않았던가. 나에게 어느 하나 극적이지 않은 책들은 없었을 것이다.

늦었을까. 잊었을까.

많은 일을 했고 많은 곳을 가보았지만 늘 가슴 한구석 끄트머리에 오랫동안 사라지지 않고 몹쓸 병처럼, 갚아지지 않을 평생의 빚처럼 남아있는 어둠의 약속. 할 수 있는 것과 무엇이 되는 것 사이에서 늘 주저하며 언제나 한걸음 물러서던 비겁의 다짐. 나는 오늘도 확인, 또 확인하려 그를 읽고 글을 쓴다.

선생님,
아직도 그날 밤 별처럼 여전히 저를 기억하실 수 있나요.
너무 늦었지만 다시 비추어 볼 수 있을까요.
아마도 선생님을 뵌 지 이십 몇 년이 지난 그 어느 날
제가 선생님을 불현듯 찾아 가더라도 변함없이 저를 잊지 않았다.
말씀 해 주실 그 미소, 그려 보아도 될까요.
그땐 꼭 네가 꿈을 이룰 지 알았고 나를 찾을 지도 예감했다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그날 밤 우리가 세어보던 '별'하나에 추억과,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를 담고,
그리고 나머지 모든 '별'에 너의 '꿈'을 담아 그렇게 오늘을 기다렸다
벅차게 안아주실 수 있을까요.

윤대녕 작가님,
이 극적인 만남을 기다려 보는 것에 얼마나 동의 하실런가요.
선생님과 절대 헤어진 것이 아니라 믿어 주실런가요.
이 모든 극적인 순간들은 제게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  
빙긋이 눈감아 주실런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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