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응주의자 대산세계문학총서 168
알베르토 모라비아 지음, 정란기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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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경멸><권태>로 알게 된 이탈리아 작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순응주의자>를 읽었다. , 지난 명절 전에 주문한 책의 도착을 기다리지 못하고 결국 영화를 구해서 먼저 봤다. 그리고 나서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 소설이 오리지널리티에서는 압도적이었지만 아무래도 흥미 위주로 만들어진 영화의 아우라에 눌려 책 읽는 속도는 좀 지지부진했던 것 같다. 이제 곧 콜슨 화이트헤드와 안드레 애시먼,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책들이 도착할 예정이기 때문에 부랴부랴 마저 다 읽었다. 개운하게 새로운 책들을 읽을 생각에 염통이 다 쩌릿하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문제적 인간은 삼십대 정부의 비밀 요원이자 골수 파시스트인 마르첼로 클레리치 무려 박사님이시다. 소설이 시간적 배경으로 삼은 1930년대로부터 17년 전인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유년 시절의 악몽 같은 기억 때문에 마르첼로는 정상에 강박을 느끼는 그런 지식인으로 성장했다. 그것은 십대 소년이었던 마르첼로가 자신에게 기묘한 방식으로 접근한 리노라는 운전사를 권총으로 쏴 죽였다는 죄책감의 발로가 출발점이었다. 영화에서는 정말 간단하게 다룬 장면이 소설에서는 정말 주인공의 트라우마로 결국 그가 비정상적인 파시스트가 되어 버린 숙명과 구구절절하게 마르첼로의 심리를 그대로 드러내주는 하나의 장치로 작동한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라도 희생할 수 있다고 믿는 비정상 파시스트 집단의 일원이었던 마르첼로에게 상부에서는 하나의 명령을 하달한다. 그것은 파리에서 일 두체 무솔리니 파시스트 정권에 저항하는 콰드리 교수를 처치하라는 것이었다. 학생 시절, 마르첼로는 콰드리 교수에게 지도 교수 역을 맡아 달라는 부탁을 하러 갔다가, 파시즘이 창궐하던 이탈리아에 신물이 난 콰드리 교수가 조국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지도 교수는 되어줄 수가 없다라고 말한 정도의 인연이 고작이다.

 

이제 막 아름다고 매력적인 약혼녀 줄리아(영화에서 줄리아 역을 맡은 배우의 캐스팅은 과히 최고였다고 생각한다)와 결혼을 앞둔 마르첼로는 그렇다면 파리로 신혼여행을 가는 것으로 위장해서 콰드리 교수를 처치할 계획을 세운다. 머릿속이 온통 질서유지와 권력에 대한 맹종으로 가득한 비정상 남자 마르첼로에게는 애인 줄리아는 물론이고, 결혼도 그저 타인에게 정상처럼 보이기 위한 카모플라지의 일환일 따름이다. 문제는 이 인간이 그런 배신행위에 희열마저 느낀다는 점이다(이거 진짜 미친 놈 아니야 그래?).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인간군상인 마르첼로는 뼛속까지 철저하게 비정상이지만, 주변은 물론이고 자신까지 속이면서 파리에서 자신을 환대해준 콰드리 교수를 배신하고 자신만의 구원을 추구한다. 파시즘 국가 이탈리아가 제공하는 안정적인 일자리와 권력의 보호라는 테두리가 지식인 마르첼로의 이성적 판단을 무너뜨리고 인간성마저 황폐화시킨 주범이 아닐까 추정해 본다. 모라비아 작가는 그런 파시스트 국가를 직접 체험해 보고, 권력자들에게 핍박까지 받았으니 그런 체제 아래서 산다는 게 얼마나 비참한 일인지 잘 알고 있었으리라. 잘 웃지도 않는 남자 마르첼로라는 인물을 통해 당시 이탈리아 지식인 사회의 추악한 단면을 그대로 드러낸다.

 

어찌어찌해서 파리에 간 마르첼로 부부는 콰드리 교수를 찾아가 대면한다. 그리고 여기에서 성서의 내용과 유사한 에피소드가 하나 등장하는데 그것은 바로 마르첼로가 동료 요원 오를란도에게 콰드리 교수를 알려 주는 장면이다. 참 그런데 영화에서는 요원의 이름이 오를란도가 아니라 망가니엘로가 아니었던가. 오를란도는 내가 아는 그 광란의기사 오를란도고? 잠시 여담이지만 그 책은 살 수 있을 때 샀어야 했는데, 비싸서 사지 못하고 있다가 그만 절판되어 버리고 말았다. 언제 과연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마르첼로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던 콰드리 교수의 매력적인 아내 리나는 눈에 띄게 그에게 적대감을 표출한다. 동시에 그의 아내 줄리아에게는 다른 방식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내외가 모두 비정상인 남자 마르첼로는 신혼여행길에서 자신에게 차갑게 대하는 리나에게 사랑을 느끼고, 중첩되는 배신을 마다하지 않는다. 콰드리 교수에 대한 첫 번째 배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로마 군사들에게 팔아넘긴 가룟 유다의 그것으로 치환된다. 한 마디로 그는 무고한 콰드리 교수를 희생시켜서 자신의 구원을 추구한 것이다. 콰드리 교수의 죽음과 자신이 비정상으로 변모하게 된 리노와의 관계는 별개의 문제라는 사실을 그는 굳이 외면한다.

 

두 번째 배신은 이제 막 결혼한 아내 줄리아에 대한 것이다. 리나는 자신에게 무턱대고 들이대는 마르첼로에게 이게 신혼여행에서 아내가 버젓이 있는 상황에서 가당키나 한 일이냐고 준엄하게 마르첼로를 꾸짖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마르첼로가 줄리아를 사랑하는 게 아니고, 그저 자신의 강박적인 정상성을 가장하기 위해 액세서리 같은 존재로 줄리아가 필요하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영화에서 이런 복잡하기 짝이 없는 마르첼로 클레리치를 연기한 장 루이 트랭티냥의 연기는 정말 대단했다.

 

원래 소설에는 정말 다양하면서 마치 미래를 예언하는 것 같은 다양한 이야기들이 그야말로 넘쳐흐른다. 결국 시간이 흘러 전쟁이 4년째 되던 해, 잘나가던 독재자 무솔리니는 국왕의 한 마디에 실각해 버리고 만다. 마르첼로가 충성하던 조국 이탈리아는 독일의 동맹국에서 피점령국가로 추락해 버린다. 그렇게 일 두체를 외치던 이들은 하루아침에 입장을 바꿔, 두체의 청동조각상을 무너뜨리고 줄에 매어 거리에서 질질 끌고 다닌다. 그 장면은 훗날 루마니아를 철권으로 다스린 독재자 차우셰스쿠가 실각하고 맞게 될 비참한 운명의 예고편처럼 다가왔다. 말미의 에피소드에서 무너져 내리는 기존의 왜곡된 세계에서 벗어나 시류에 편승해서 새로운 탈바꿈을 예고하는 변신의 귀재로서의 마르첼로의 이미지는 대단했다.

 


파리에서 콰드리 부부가 마르첼로 부부를 데려간 댄스홀 시퀀스는 개인적으로 영화에서 최고의 비주얼한 장면으로 손꼽고 싶다. 두 명의 여주들의 사방으로 뿜어내는 매력은 그야말로 스크린을 날려 버릴 기세였다. 콰드리 교수와 리나의 최후 같은 경우 소설에서는 간략하게 다루고 있는 반면, 영화에서는 아주 비장한 디테일을 잡아냈다. 이렇게 영화와 소설의 같으면서도 다른 점들을 서로 비교해 가며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영화에 나오는 콰드리 교수가 마르첼로에게 비유하는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는 소설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개인적으로 파시즘에 물든 철부지 청년의 정신을 죽비로 때려 깨우쳐 주려는 노선사의 모습을 엿보는 그런 느낌도 들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순응주의자>는 대단히 정치적인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엄혹한 시절의 살아 있는 증언자가 말하는 그것을 추체험했다는 점에서라도 모라비아의 <순응주의자>는 높게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뱀다리] 소설을 읽기 전에 워밍업으로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의 영화 <순응주의자>를 먼저 본 건 신의 한수였다. 소설부터 먼저 봤다면, 아마 완독이 쉽지 않았을 지도.



고저 가을에는 국화가 최고다.

지난 주말, 카메라 들고 외출했다가

찍은 국화 사진을 올려 본다네.


참 국화는 영어로 크리샌더멈

(chrysanthemum)이라고 한다.

발음이 참 어렵기도 하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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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0-13 23:4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도 별 다섯 이군요~!! 저는 경멸이 너무 좋았어서 이 책도 기대가 되더라구요. 권태도 읽어야 하는데 ㅜㅜ 근데 좀 어렵나 보네요 😅

scott 2021-10-14 00:37   좋아요 4 | URL
이 작품은 주인공 마르첼로의 사춘기-청년기-중년기 로 세부분 크게 나눠서 읽으면 됩니다
영화가 워낙 수작이여서 (모라비아가 작품에서 표현 하지 않은 것들이 나옴)
작품 영화 모두 추천

영화가 지금 봐도 전혀 오래되었다고 느껴지지 않을 만큼 명작입니다. ^^

레삭매냐 2021-10-14 07:52   좋아요 4 | URL
모라비아 작가의 책들은 많이 영화화
가 돼서 책과 비교해 보며 읽는 재미
가 있더라구요 :>

가끔 지루한 부분들도 있어서요.

mini74 2021-10-14 00:0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뒤에 조금 남아서 실눈 뜨고 봤어요. 다들 별 다섯개. 제 마음에도 지금 마구마구 별이 뜨고 있습니다 ㅎㅎ *^^*

레삭매냐 2021-10-14 07:53   좋아요 2 | URL
역자 분이 오랫 동안 번역을
한 책이라는 말도 있더라구요.

그래서 언제나 나오나 싶었는
데 해 넘기지 않고 나와서 다행
이네요. 고고씽~입니다.

청아 2021-10-14 00: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사두었는데 밀린책이 많아 언제읽을지는 모르겠어요ㅠ
그래도 레삭매냐님 별5주셨으니 고저 서둘러야겠습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1-10-14 07:54   좋아요 2 | URL
땡기는 책은 바로 사시는 게
맞습니다.

저도 읽은 책들보다 사서 쟁
여두고 읽지 못한 책들이
부지기수랍니다. 그래도 언젠
간 읽을 거라는 신념으로 !

hanin‘ tough !!!

scott 2021-10-14 00: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국화 사진은
마르첼로의 최후를 추모 하는 것 같네요 ^^

레삭매냐 2021-10-14 07:55   좋아요 3 | URL
와우 그런 멋진 해석이시라니오 !!!

카메라 메모리에 들어 있던 거라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올린 건데 -
해석이 멋지십니다 참말로.

바람돌이 2021-10-14 00: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레삭매냐님 이 글 읽다가 중간에서 끊습니다. 저 지금 한창 재밌게 보고 있는데 말이죠. 뒷부분은 제가 책 다 읽고 와서 마저 보는걸로.... ㅎㅎ

레삭매냐 2021-10-14 07:56   좋아요 2 | URL
최대 가능한 스포를 최대한
자제했는데 - 지금 읽고 있으시
다면 감상에 저해될 여지가 있
으니 ^^

컴백 순, 플리즈.

페넬로페 2021-10-14 06:0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영화부터 봐야겠네요^^
레삭매냐님께서 올려주시는 책들은 사거나, 빌리거나, 읽거나 중 하나는 하고 있습니다.
비록 거북이처럼 늦지만요~~
이 책도 기대됩니다^^
가을은 역시 국화꽃이 분위기가 납니다**

레삭매냐 2021-10-14 07:57   좋아요 3 | URL
제가 이 책을 지난 명절 전에 받으려고
그렇게 노력했으나... 결국 명절이 끝난
다음에 받게 되었으며 읽는 데도 한참
이 걸렸네요.

그래두 다 읽고 나니 아주 뿌듯하네요.

가을엔 역시 국화지요...

초딩 2021-10-14 09: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 너무 보고 싶네요.
그리고 책을 담는 이 새로운 구도 더더욱 좋습니다 ^^
저도 한 번 따라 찍어 볼래요 ^^
좋은 하루 되세요~

레삭매냐 2021-10-14 19:32   좋아요 1 | URL
책 사진 칭찬 감사합니다 -

리뷰 쓰고 나서 급하게 올리
느라 막찍사였네요...

coolcat329 2021-10-15 16: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드디어 읽으셨군요.
줄거리 보니 이 책도 재미있을거같아요. 골수 파시스트가 주인공인 정치 소설!

레삭매냐 2021-10-15 16:35   좋아요 2 | URL
아주 재미지답니다 :>

근데 웃기는 건, 골수 파시스트라고
하면 왠지 자신의 신념에 강력한
믿음을 가진 그런 캐릭터라고 생각
되는데 주인공 마르첼로는 전혀 그
렇지 않고 왠지 오락가락하는 그런
연약한 캐릭터더라구요...

coolcat329 2021-10-15 16:59   좋아요 2 | URL
오 그렇군요.그래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셨군요. ㅎㅎ
 


 

내가 꼽은 10월의 기대작에 대해 이바구를 풀어 보련다.

 














일단 지금 선주문장을 날린 콜슨 화이트헤드의 <할렘 셔플>이다. 작가 이름만 보고 주문한 책이다. 말이 필요 없지 않은가. 무려 퓰리처상을 두 번이나 꿀꺽하신 분이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도 충격이었지만, 작년 가을에 만난 <니클의 소년들>은 끝장이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렇게 좋은 글감을 아마 영화쟁이들이 그냥 놔두지 않으리라. 지금 당장은 아니어도 나중에라도 영화로 만들어지겠지. 책을 과연 어떻게 영화로 만들었을지 궁금하다.

 

참고로 아직 배송은 시작되지 않았다.

 















다음 타자는 UCLA 교수님인 에릭 재거(예이거:내가 본 동영상에서는 그렇게 들었다)2004년에 발표한 넌픽션 <라스트 듀얼>이다. 이 책은 곧 영화로 만들어져 개봉 예정이라고 한다. 감독은 내가 사랑해마지 않아 보고 또 봐도 질리지 않는 <블레이드 러너>를 만든 리들리 스콧이다. 그가 <글라디에이터>의 감독인 것도 알고 있겠지.

 




1386년 프랑스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논픽션이다. 출판사는 오렌지디라는 곳으로 신생인지 아니면 어느 유명 출판사의 임프린트인지 모르겠다. 지금 배송을 기다리고 있는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의 출판사이기도 하다. 이 출판사 혜안이 있는 걸까? 이런 수작들을 잇달아 내놓다니 말이다. 아무래도 임프린트의 향기가 솔솔나는 그런 느낌.

 

스코틀랜드 원정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장 드 크루주(맷 데이먼 분)는 기가 막힌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 마르그리트(조디 코머 분)가 라이벌 자크 르그리(애덤 드라이버 분)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르그리는 크루주의 절친이기도 했다. 물론 흐르는 시간 속에 이제는 원수가 되어 버렸지만. 지금도 다루기 힘든 사건을 중세 프랑스에서는 과연 어떤 식으로 진행이 되었을까? 범죄-스캔달-재판으로 이어지는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역사적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프랑스의 마지막 결투 재판이었다고 하는데, 크루주가 르그리를 상대로 결투에 나선다고 하자 수많은 인파가 그들의 결투를 보기 위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영화 트레일러에도 등장하는 크루주와 르그리의 결투 씨퀀스는 상당히 정교하게 고증이 잘된 편이라고 한다. 만약 크루주가 결투에 진다면 그의 아내 마르그리트는 위증죄로 산 채로 화형에 처할 판이었다. 자신의 명예와 아내의 목숨을 위해서라도 크루주는 반드시 르그리에게 승리를 거두어야 할 판이었다.

 

결국 이 책도 아마 주문장을 날려야할 것 같다.

 















3번 타자는 N. 스콧 모머데이의 <여명으로 빚은 집

>이다. 역시나 난생 처음 들어 보는 작가인데, 이 책은 현대 북미 원주민 문학의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라고 한다. 모든 책들을 다 살 수는 없으니 아무래도 이 책은 도서관 희망도서로...

 















마지막 4번은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던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라는 책이다. 작년에 <우리가 불 속에서 잃어버린 것들>가 현대문학에서 소개되었는데 이번에는 오렌지디라는 출판사로 갈아탔다. 역자는 동일하다. 그 점에 대해서는 마음에 든다. 항상 하는 말이지만, 가능하면 한 역자가 한 작가의 작품에 대해 줄창 번역을 맡아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아무래도 역자가 바뀌게 되면, 번역 소설을 접해야 하는 독자로서는 왠지 모를 당황스러움에 사로잡히게 되니 말이다.

 

마리아나 엔리케스는 최근 서울국제작가축제에 참가하기 위해 우리나라를 찾은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침대에서 담배를 피우는 것은 위험하다> 올해 부커 인터내셔벌 숏리스트 6개 작품 중의 하나로 최종심에 오르기도 했다. 참고로 다비드 오빠, 아니 디옵의 작품이 수상작으로 결정됐다.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라틴 아메리카 환상문학의 선두주자라고 하는데, 모두 12편의 단편이 들어 있다. 200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올해 영어로 번역되면서 부커 인터내셔널 후보에 오르게 되었다.

 

이제 한 20일 정도 남은 10월 동안 이렇게 네 편의 소설을 읽으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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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10-12 00:0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모오모~ 역시 레삭매냐님 덕분에 새로운 작가를 알게 되네요~ <니클의 소년들>이 한동안 서재에서 보였는데, 끝장이었다니 너무 읽어보고 싶네요~ 차분히 한권 한권 리뷰 올라오는 거 기다려 볼래요!ㅎㅎ

레삭매냐 2021-10-12 07:56   좋아요 2 | URL
아직 나오지 않은 책들도
있어서 속히 도착하길 바랄
뿐입니다.

그전에 모라비아의 <순응
주의자>부터 읽어야 쿨럭...

바람돌이 2021-10-12 00: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니클의 소년들은 저도 좋게 읽었는데 새로운 작품이 번역되었군요. 저도 보관함으로 쑝!
나머지 작품들도 리뷰 기다립니다. ^^

레삭매냐 2021-10-12 07:57   좋아요 1 | URL
출판사에서 콜슨 화이트헤드의 신간
은 아주 신속하게 번역한 것 같습니
다. 빨랑 도착하기만을 아기다리
고기다리~

페넬로페 2021-10-12 00:1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할렘 셔플‘ 기대됩니다.
‘니클의 소년들‘에 감명받아 그나마 아는 작가라서요~~
나머지는 저한테 생소한데 천천히 조금씩 읽어나가야겠어요^^

레삭매냐 2021-10-12 07:59   좋아요 2 | URL
콜슨 화이트헤드 말고는
저도 다 모르는 작가들이랍니다.

<니클의 소년들>은 정말 수작
이었지요.

마리아나 엔리케스의 신간 첫번째
인스톨은 미리보기로 읽었는데
왠지 키로가 작가의 그것과 닮기
도 한 것 같고... 고딕 스타일다운
것 같습니다.

persona 2021-10-12 00: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초면에 죄송합니다만, 오렌지디는 리디북스의 종이책 플랫폼이라고 합니다. 좋은 책 추천 감사드립니다. 다 재미있어보이네요!^^

레삭매냐 2021-10-12 07:59   좋아요 2 | URL
오~ 그랬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몰랐네요. 리디에서 갠춘한
책들을 내고 있군요.

탁월한 설렉션이라고 생각
합니다.

초딩 2021-10-12 00: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니클의 소년들 알라딘에서 구해왔는데, 언능 읽고 할렘 셔플도 가고 싶네요 ^^
ㅎㅎㅎ

레삭매냐 2021-10-12 08:00   좋아요 1 | URL
<니클의 소년들> 받고
언능 <할렘 셔플> 고고씽~입네다.

새파랑 2021-10-12 06: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늘 소개해주신 네편 모두 소개가 읽고 싶게 만드네요~! 전 4번이 너무 읽고 싶네요 ^^

레삭매냐 2021-10-12 09:40   좋아요 1 | URL
일상화된 죽음이 왠지
키로가 작가의 그것과 일맥상통
한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좀 더 읽어봐야겠지만요.

coolcat329 2021-10-12 06:4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화이트헤드의 신작이 나왔군요.
제가 레삭매냐님 글 읽고 니클을 읽어서 화이트헤드하면 매냐님 생각이 나는데 역시나 주문을~~😅
원주민 문학도 궁금하고~
가을은 정말 책의 계절이네요.

레삭매냐 2021-10-12 09:43   좋아요 1 | URL
넵, 저도 모르는 사이에
신간이 나왔더라구요.

그래서 바로 냅다 질렀습니다 :>

원주민 문학, 고 책은 도서관
희망도서로 신청하려구요.

mini74 2021-10-12 08: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직 배송은 시작되지 않았다. 이 문장이 왜 이리 뭔가 결연하면서 유머스러운지 ㅎㅎㅎ저도 4권 다 기대됩니다. ㅎㅎ

레삭매냐 2021-10-12 09:44   좋아요 1 | URL
그거슨... 일단 책일 도착하면
바로 씹어 먹어... 아니 확
읽겠다라는 결연한 의지의
표명이 아닐까 추정해 봅니다
ㅋㅋㅋ

고 사이에 <순응주의자> 마저
읽을라구요.

막시무스 2021-10-12 11:4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들 대부분 화이트헤드에 관심이 많으신것 같네요..저도 레삭매냐님의 <니클의 소년들> 끝장설에 적극 동의하면서 신작을 기다려 봅니다.ㅎ 즐건 하루되세요!ㅎ

레삭매냐 2021-10-12 14:05   좋아요 0 | URL
아무래도 국내에 기존에 세 권의
책이 나와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요?

게다가 퓰리처 수상 두 번이라는
아우라도 만만치 않구요.

감사합니다. 연휴 후유증이 만만치
않네요 ㅠ

독서괭 2021-10-12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니클의 소년들> 끝장설!! 오오..!! 언제 읽나 모르겠으나 일단 담겠습니다. 소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1-10-12 19:29   좋아요 0 | URL
아닛, 이달에는 왜 이렇게 군침
도는 책들이 마구 나오는 건지요 -

안드레 애시먼의 책도 질렀습니다
ㅠㅠ

화이트헤드, 강추합니다.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 대산세계문학총서 169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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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잠시 동안 라틴 아메리카 친구들과 영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아 그리고 보니 나의 룸메이트도 아르헨티나 출신 페데리코였구나. 내 루미는 나에게 스페인 말을 좀 알려 주겠다고 했었지. 하루는 칠레 아가씨들이 사는 아파트에 파티 초대를 받아서 반 친구들과 함께 우루루 몰려간 적이 있다. 이미 플로어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선수들은 아파트에 들어가자마자 파티 호스티스들에게 선물(아마 맥주였을 것이다)을 안겨 주고 바로 춤판에 돌입했다. 그들에게 밤 11시는 초저녁이라는 말을 들었다. 체력도 좋고, 춤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들에게 썬업은 기본이란다. 내가 보기에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들은 브라질리언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쉬지 않고, 소파며 일체 가구들을 치운 플로어를 누볐다. 우루과이 출신 작가로 아르헨티나의 미시오네스에 반해 그곳에 살게 된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그들이 밤을 사랑하는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깨닫게 됐다. 그들의 낮은 너무 덥기 때문에, 모든 활동은 밤에 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키로가 작가가 작중에서 자주 표현하는 미시오네스와 파라나강이 너무 궁금해서 결국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니 이구아수 폭포를 기점으로 한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 삼각지점에 위치한 동네였다. 그곳에는 스페인 정복시절 유적도 있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모양이다. 아마 키로가 작가도 비슷한 코스로 그곳에 들렀다가 정주한 모양이다. 아마존 밀림은 그렇게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가 보다 싶었다.

 

키로가 작가의 책은 작년 여름쯤 다른 출판사 책으로 처음 만났다. 내가 또 새로운 작가나 작품에 대해 도전의식이 넘치지 않는가. 이번에 문지에서 새로운 판형으로 대산세계문학 총서 시리즈가 나온다고 해서 단박에 사들였다. 모라비아 작가의 <순응주의자>가 먼저였는데 후발주자인 키로가 작가의 책부터 다 읽었다.

 

역자는 그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세 가지 테마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설명한다. 죽음, 유배 그리고 자연(밀림)이다. 죽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우리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언젠가 마지막 날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아마도 각각에게 평생의 질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을 너무 일찍부터 기대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때가 되면 다 맞이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들은 비장하기 짝이 없다. 건장한 달품팔이 주앙 페드로는 한달 월급 2페소를 주지 않으려는 주인과 총싸움을 벌인다. 언제나 그렇듯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2페소를 아끼겠다고, 자신이 실컷 일을 부려먹은 달품팔이에게 돈을 주지 않고 총질을 해대는 농장주나, 복수에 나서 결국 상대방을 꺼꾸러뜨리는 주앙 페드로나 대단들하시다. 물론 나는 비슷한 처지의 후자의 편을 들련다.

 

딸과 아들을 한 명씩 거느린 어느 홀아비는 하녀가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여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다 결국 죽음에 이른다. 지금 같으면 바로 밥도 얻어 먹지 못하고 내쫓길 그런 남자가 아닐까 싶다. 다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기가 지금부터 한 백년 정도 전이라는 점을 고려하자. 마당에 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모래벼룩에게 물려 감염되고 집안일을 해줄 여자를 구하지 못해 결국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홀아비의 이야기라. 그런데 오지에 덜렁 남은 딸과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보니 그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밀림에 유배된 자가 아니었을까.

 

다음은 밀림 이야기. 어느 순간, 밀림에 인간들이 등장한다. 파라나강이 도도하게 흐르는 바로 그 밀림의 주인인 독사들이 인간의 등장에 위협을 느끼고 바로 회의를 연다. 어디서나 낯설고 새로운 존재들은 위협으로 간주된다. 수백 년 전에 황금을 찾아 유카탄 반도에 도착한 코르테스 일행이 아즈텍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인 독을 지닌 야라라쿠사 독사들이 주축이 된 회의는 결국 자신의 영지에서 인간들을 내쫓겠다는 결의로 이어진다. 독사 회의에서 밀림을 파괴하는 인간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크루사다(아마 십자군전쟁의 스페인식 표현이 아닐까 싶다)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건너온 킹코브라까지 가세해서 인간들과 전투를 벌이지만, 인간들이 휘두르는 밀림용 마체테에 스네이크 군단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어쩌면 야라라쿠사 독사들과 밀림에게 앞으로 전개될 처연한 운명의 전주곡이라고나 할까.

 



밀림이라는 공간에는 참 기이한 사람들도 많이 산다. 도수가 쎈 알코올을 만들기 위해 사탕수수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오렌지를 증류해서 50% 주정의 술을 만들겠다고 나선 이들도 있었다. 선술집에서는 비축해둔 사탕수수주가 다 떨어지자 공업용 알코올을 1리터씩 먹었다가 죽는 사람이 다 생기질 않나. 공무원 오르가스는 사법부 감사관에게 자신의 태업이 걸리자,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을 보조 서기와 몇날며칠을 걸려 완수하고 증수로 물이 불어난 파라나강을 거쳐 산이그나시오를 출발해서 행정 중심지인 포사다스까지 가는 목숨을 건 여정에 나서기도 한다. 덕분에 해당 지역의 지명들을 지도에서 찾으며 오르가스의 행적을 추적하는 재미도 있었다.

 

멋쟁이 달품팔이 올리베라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급여에 대해 정확하고, 옷을 버릴까봐 주인이 명령한 우물파는 일은 못하겠다고 당당하게 지껄이는 그의 모습은 당당했다. 주체적 인간으로서 당당한 올리베라에게 농장주인 화자는 오히려 쩔쩔매는 것 같다. 또 하지만 올리베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주인의 상식을 벗어난 선까지 극대화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나중에 기묘하게 사라져 버린 일화까지, 범상치 않은 미시오네스 사람들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 역자도 미시오네스 지방을 가본 것 같은데, 해당 지역을 가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울창한 밀림이라는 이름의 대자연이 주는 매력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저 저자가 기술하는 방향을 따라가 보는 수밖에. 아마 현지를 보고 나면 키로가 작가가 서술한 글들이 더 와 닿을까나. 미시오네스에 대한 헌사로 추정되는 키로가의 글을 읽다 보니, 작년에 코로나로 작고하신 루이스 세풀베다 아저씨가 생각났다. 키로가의 이상향이 미시오네스라면, 세풀베다의 그것은 아마도 파타고니아가 아니었을까. 세대와 공간이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두 명의 선각자들은 아름답고 치명적인 대자연이 인간에 의해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되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왜 우리는 그런 자연과 공존하지 못하는 걸까? 자본에 대한 부질없는 탐욕이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누릴 미래를 부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라시오 키로가는 평생 단편을 주로 쓴 모양이다. 그의 다른 소설이 읽어 보고 싶은데, 그 소망은 아무래도 난망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작년에 만난 책을 다시 한 번 읽어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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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1-10-11 11: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라시오 키로가. 처음 들어본 작가를 알게 해주신 좋은 리뷰 고맙습니다. 담아가요 ^^

레삭매냐 2021-10-11 12:06   좋아요 4 | URL
작가의 주요 테마인 죽음에
대한 이야기는 좀 그렇지만
나머지 부분들은 참 매혹적
이었습니다.

stella.K 2021-10-11 13:3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내가 또 새로운 작가나 작품에 대해 도전의식이 넘치지 않는가. ㅋㅋ
그렇죠. 인정!

아, 그렇군요. 저도 더운 나라에서 살면 밤 11시를 초저녁으로 알고
파이팅 넘치게 살았을까요? 저는 밤엔 무조건 사야합니다. 특히 10시 전후로.
그때가 초유짜듯 정말 달게 잘 때죠. 그리고 TV만 끄면 초롱초롱해자는
이 모순을 우짜면 좋을지 모르겠습니다.ㅠ

레삭매냐 2021-10-11 19:25   좋아요 1 | URL
기후나 문화에 따라 상황이
달라지지 않나 싶습니다...

그네들은 낮에 자니깐요 ㅋㅋ
그래서 밤에 더 활동적이 되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을 해
봅니다.

얄븐독자 2021-10-11 14: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문동판과 겹치는 게 있어 번역비교를 재미삼아 해봤는데... 과연 이렇게 차이가 나도 될까 싶은 문장들이 거슬리기도했습니다. 극단적 예를 들면 부엌으로 ‘들어오지 마‘와 ‘들어가지 마‘ 는 화자의 위치가 안이냐 밖이냐의 차이가 있는데 이걸 번역자는 진짜 몰랐을까 그런 의구심이 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원서를 모르고 단순번역 비교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습니다만 ㅋ 여튼 저도 대산 리뉴얼 판 소식에 알게되어 읽고 있습니다

레삭매냐 2021-10-11 18:25   좋아요 0 | URL
공감하는 바입니다 -

제가 스페인말을 할 것도 아니니
더더욱 번역에 의존할 수밖에요.
고저 믿고 볼 따름입니다.

그레이스 2021-10-11 14:1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미지의 작가들 ˝너 ~~ 가봤니?˝하고 물어보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1-10-11 18:55   좋아요 0 | URL
신예 작가도 아니고 이미 고인
이 되신 분이라면 더더욱 그런
것 같습니다.

새파랑 2021-10-11 1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랑 광기 죽음의 이야기> 그 작가의 장편이네요. 그 책도 음침한 기억인데 ㅎㅎ 닭잡는 이야기가 강렬했던 기억이 😅

레삭매냐 2021-10-11 18:56   좋아요 1 | URL
키로가 작가의 장편은 아니구요,
18편인가 단편 모음집이랍니다.

<사랑 광기 죽음의 이야기>랑
겹치는 단편들도 있구요 **

아무래도 작가의 가족사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라로 2021-10-11 18: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샥매냐님은 알라딘의 대표적인 책벌레,,,^^;; 멋지세요!!^^

레삭매냐 2021-10-11 19:25   좋아요 0 | URL
네이 알라딘피셜 북웜인가요 ㅋㅋ

앞으로 더 열심으로 읽도록 하겠습니다.

바람돌이 2021-10-11 22: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혀 모르는 세계를 알아가는 재미가 또 독서의 기막힌 좋은점이죠. 이런 책은 막 가슴 두근거리면서 읽게 될거 같아요. ㅎㅎ
그나저나 저 지금 순응주의자 시작했는데 대산 세계 문학 새 표지 너무 좋지 않나요? 저 순응주의자 표지 보고 뿅 갔어요. 지금까지는 문동 세계문학 표지가 최고였는데 문동과는 다른 대산 새 표지의 색감도 끝내주네요. ㅎㅎ

레삭매냐 2021-10-12 19:30   좋아요 1 | URL
너무 정확한 지적이시라 -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새로운 작가와 그들의 책에
경의를 보내는 바입니다.

저는 문지의 새로운 판형도
좋지만, 왠지 예전 스타일이
아쉽더라구요. 이번 표지는
드자이너들이 너무 날로 먹
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쿨럭

바람돌이 2021-10-12 22:33   좋아요 1 | URL
앞으로 모든 책의 표지를 이렇게 색깔만 바꿔서 단다면 날로 먹는 느낌도 있겠네요. ㅎㅎ 아 근데 전 순응주의자의 표지 파란색이 너무 예뻐서 일단은 껌벅 죽고 갑니다.
 


(노벨문학상 작가지만 한국 출판계에서 철저하게 외면당한 루이즈 글릭)


지난주에 노벨문학상 발표가 났다.

생전 처음 들어본 작가가 상을 받았다.

 

지금은 탄자니아, 예전에는 탕가니카라고 불리던 동네에서 태어난 작가라고 한다.

이름은 압둘라자크 구르나. 19481220일 생으로 우리 나이로는 73세다.

 

잔지바르 술탄국 출신으로 () 18세가 되던 해인 잔지바르 혁명으로 고향을 떠나 영국으로 망명했다. 그러니까 미스터 구르나는 난민이었던 것이다. 영국에서 학위를 받고, 나중에 은퇴할 때까지 교수직을 역임한 켄트 대학에서 서아프리카 소설 연구로 PhD 학위를 받았다.

 

유럽 쪽에서는 나름 알려진 작가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는 전혀 소개된 바가 없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번역된 책이 하나도 없다는 말이다. 10편의 소설을 비롯해서 다양한 저술들이 있다.

 

이 시점에서 작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은 사람이 누군가 싶어서 찾아보니...

미국 시인 루이즈 글릭이라고 한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시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지 일년이 다 되도록 단 한 권의 시집도 번역이 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놀랍지 않은가!

자그마치 노벨문학상 작가인데 말이다.

 

예전에 그렇게 말이 많던 밥 딜런의 책들도(아마 그가 쓴 책은 아니고 평전 그런 게 아니었나 싶다) 나왔는데 말이다. 명색이 노벨문학상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의 음반들을 사서 듣는 건 좀...

 

노벨문학상을 수여하는 스웨덴 한림원이 무슨 변명을 하더라도, 이번 수상 역시 정치적 논쟁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 같다. 성추문으로 노벨문학상이 거센 타격을 받은 후, 유럽 남성작가 위주라는 비판에서 벗어나기 위해 열심히 새로운 작가를 찾은 것으로 보인다. 미스터 구르카는 그런 점에서 아주 적당한 타협이 아닐까 싶다.

 



(미스터 구르나의 대표작들)


우선 그는 아프리카 출신 난민이다. 일단 제3세계 작가라는 점에서 득점이다. 유럽 작가들이 다 해먹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우 수가 있다. 게다가 지난 8월 대규모 아프간 난민이 발생하게 되면서, 다시 한 번 난민 이슈가 부상되었다. 아니 아프리카 출신에 난민이기까지! 더 좋은 건 미스터 구르카가 모국어인 스와힐리어가 아닌 영어로 작품활동을 해왔다는 점이다.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사용하는 아프리카 출신 난민 작가라...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는 그런 선택이 아니었을까.

 

국내 출판계에서는 이런 추세를 미리 읽었다면 투자하는 셈치고, 이런 작가에게 투자를 했어야 한다. 당장은 돈이 되지 않더라도, 미래의 잭팟을 기대하는 심정으로 시대정신에 부합하는 새로운 작가들을 발굴해서 한두 작품만 번역해서 출간했어도 가을 노벨문학상 특수를 제대로 누렸을 텐데... 우리 책쟁이들도 당장은 읽지 않더라도, 호기심 구매를 했을텐데 말이다.

 

노벨문학상 발표가 나자마자 오프라인 서점의 매대를 장식할 수 있는 영광은 올해에도 그렇게 날아가 버렸다. 매년 단군 이래 가장 어렵다는 신기록을 매년 갱신하고 있는 출판계가 적은 투자로 그야말로 대박을 터뜨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걷어차고 있는 건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뱀다리] LA Times 추천 미스터 구르나 5 Books


1. “By the Sea” (2002)

2. “Gravel Heart” (2017)

3. “Admiring Silence” (1996)

4. “The Last Gift” (2014)

5. “Paradise” (1994)


과연 미스터 구르나의 10권의 소설 가운데 어떤 책이 가장 먼저 번역이 될지 궁금하다.

개인적으로 아마 부커상 최종심에 오른 <낙원>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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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0-10 22:4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러고보면 정말 예전엔 노벨상 발표나면 각종 서점들이 그 책들로 도배가 돼서 오히려 너무 심하단 생각도 했었는데 작년도 올해도 번역책 하나 없군요. 구르나가 선정된데는 이런 이유도 어느 정도 있나보군요. 새로운 면을 알게되네요 ~ 좋은 글 고맙습니다 ~얼릉 번역되면 좋겠어요. 궁금해요 ㅎㅎ

레삭매냐 2021-10-11 00:28   좋아요 3 | URL
노벨문학상이 점점 정치적으로
변질되는 것 같아 아쉬울 따름
입니다...

문학에 대한 상을 주는 것 자
체가 참 그렇긴 하지만요.

일단 책은 궁금하니 번역부터
쩜.

단발머리 2021-10-10 23:0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출판사 관계자들 다들 잠 못 이루는 밤일텐데 레삭매냐님 일침에 더 맘이 아프겠군요.
한 권이라도 나왔으면 좋았을텐데요. 안 읽어도 다 사기는 할테니 판매는 걱정 없을 텐데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10-11 00:29   좋아요 2 | URL
을매나 속이 애릴 까요...

이제는 판권값이 치솟아서
그전에 미리 쟁여 두지 않았
다면 바가지 쓰게 생겼네요.

그 덕에 책값이 비싸지지나
않았으면 합니다 ㅋㅋ

청아 2021-10-10 23: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작년 수상자의 작품이 번역이 안되었다니 놀랍네요!! 시집이라서 큰 인기를 끌지 못할거라 생각한건지...이번 수상작은 번역을 꼭 해주길. 과연 얼마나 기다려야 나올지도 궁금해요. 프루스트 작품도 제가 출판사랑 통화까지 했는데 나온다고 하고선 전혀 소식이 없네요.😭

레삭매냐 2021-10-11 00:31   좋아요 4 | URL
정말 놀랍지 않나요? 그래도
명색이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인데
국내 역서가 하나도 없다는 점이
말이죠.

하긴 시집이 장사가 안되긴 하니
깐요. 저도 시집은...

뭐 때가 되면 나오지 않을까요,
노벨문학상의 열기가 다 식은
다음에요. 그때 사는 사람들은
진짜 책쟁이덜!

얄븐독자 2021-10-11 05:4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노벨상 효과가 예전만 못하다고 생각하고 거기에 너무나 생소한 작가라 저는 번역작이 있었다해도 판매량은 크지않았을것 같습니다 역대 노벨상 수상작가가 모두 흥행한것도 아닌것 같고요
출판사 편을 들자는건 아니지만 생소한 작가를 놓칠수도 있다고 보구요 다만 부커상 후보 작가들 정도라면 관심을 갖고 소개 차원에서 좀 내줬으면 하는 아쉬움은 듭니다

레삭매냐 2021-10-11 11:27   좋아요 1 | URL
지적해 주신 세 가지 뽀인트가
모두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아예 번역도 하지 않은 모양이
입니다.

유명하지도 않고, 팔릴 것 같지
도 않으며 노벨문학상의 아우라
도 예전만 못하더라는.

탁월하신 분석이십니다.

그레이스 2021-10-11 09: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우리나라 출판계에서 시가 홀대 받는 이유 아닐까요
시집이 많이 팔리지도 않고, 번역시도 그렇구요. ㅠ
시집 중 개인 블로그나 sns에 올려져 소비되고 있는 현상도 그렇구요. ㅠ
시집출간을 꺼려하는 이유.

저도 이 분 시집은 원서로 살까 생각했던...^^
그러다 잊었어요 ㅎ

레삭매냐 2021-10-11 11:28   좋아요 3 | URL
참으로 동감해 마지
않는 바입니다 -

시는 SNS에 딱 맞아
떨어지는 그런 콘텐츠
가 아닐까 싶습니다.

뭐든지 짤로 소비하는
시대에 장황한 리뷰는
인기가 없죠.

짤막한 시 정도라면
후닥닥 베껴서리 ~!

미스터 구르나의 원서를
저도 살까 하다가... 패스
하고 번역을 기다리는 것으로.

새파랑 2021-10-11 0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세상은 넓고 위대한 작가는 많은거 같아요 ㅎㅎ 어서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한글로^^

레삭매냐 2021-10-11 11:29   좋아요 2 | URL
제가 콜슨 화이트헤드의 <니클
보이스> 원서를 가지고 있어서
역서와 번역을 비교해 보았는데
(아주 초큼!) 확실히 원서랑은
차이가 있더라구요. 미세한?

어쨌든 미스터 구르나의 번역서
를 기대해 봅니다. 어여 빨랑 속히.

바람돌이 2021-10-11 2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스콧님 올리신 글 보니 부커상 쪽도 난민 출신이 많던데 아무래도 문화적 혼란이 문학의 형상화에 있어서는 다양한 이야기와 깊이를 끌어낼 수 있을거 같기도 해요. 탄자니아라니 너무 모르는 멀고 먼 나라라 막막 궁금해집니다.

레삭매냐 2021-10-11 23:04   좋아요 1 | URL
이번에 부커 인터내셔널 후보에 오른
작품 중에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프랑스
식민지 세네갈 병사들을 다룬 소설이
하나 있는데, 미스터 구르카는 자신의
모국이었던 탄자니아에서 있었던 일을
소설로 다룬 것 같습니다.

그 작가의 책도 함께 번역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칼과 책 - 전쟁의 신 왕양명의 기이한 생애
둥핑 지음, 이준식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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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책 슬럼프는 책으로 푸는 게 최고다. 지난달이래 주식공부와 너튜브 솔로 캠핑 시청에 미쳐서 책을 멀리했다. 아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시작하기는 했는데 한 권도 다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졸라의 <패주>, 모라비아의 <순응주의자> 그리고 키로가의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까지.

 

바로 그 순간, 역시 너튜버 별별역사라는 분이 제작한 왕양명 선생에 대한 콘텐츠를 시청했다. 원전은 중국의 둥핑 교수라는 분이 저술했다는 왕양명 평전인 <칼과 책>이었다. 부제는 무려 전쟁의 신이었다. 아니 왕양명 선생이 내가 아는 그 지행합일과 양명학을 개창한 중국의 사상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가 전쟁의 신이라고? 이런 궁금증은 책을 살 시간도 없이 나를 도서관으로 인도했다. 마침 우리 집 근처 도서관에 <칼과 책>이 비치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왕양명 선생의 아명은 왕운 그리고 그의 조부는 그의 이름을 훗날 수인으로 개명해주었다. 양명은 선생의 호였다. 전설에 가까운 그의 출생 이야기는 차치하자. 참 평전은 과거에 급제해서 관료로 활동하던 그가 태형을 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명나라 연간에 태형 즉 곤장은 참혹한 형벌이었다. 잘못 맞으면 사망할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형벌이기도 했다. 그는 명나라 4대 암군 중의 하나로 꼽히는 황제 정덕제의 주변에서 농간을 일삼는 환관 무리들을 배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환관들의 모함을 받아 그런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극적인 장면으로 시작된 평전을 소년 왕양명이 12세 때 글공부를 하는 이유를 직격한다. 중국 관료제가 절정에 달했던 명나라 시절 입신양명의 첩경은 바로 과거에 응시해서 급제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비용이 많이 드는 과거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했고, 노동에서 해방된 이들만이 과거 공부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소년 왕수인은 럭키 가이였던 셈이다. 어쨌든 다른 이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이유를 들었을 때, 전형적인 삐딱선이었던 소년 왕수인은 다른 답변을 내놓는다. 그가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였다. 놀랍지 않은가? 12세 소년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말이다. 어쨌든 이런 선언을 하는 순간, 훗날 왕수인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다.

 

문에 집중하는 다른 소년들과 달리 15세 소년 왕수인은 그들과는 다른 결을 보여주었다. 변경 지방으로 가출해서, 한 달여를 지내면서 명나라의 국경을 위협하던 유목민족에 대한 실상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무언가를 알아도 이것은 현실을 보지 않고 실천에 나서지 않는다면 소용없다는 그의 지론인 지행합일을 위한 첫 걸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실용적인 접근방식은 미래에 전쟁의 신이 되는 그의 캐릭터 형성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7세에는 아버지의 지인이었던 제씨 집안의 처자와 결혼하게 된다. 하나의 에피소드로는 결혼식 날, 식장에서 사라져 도인과 대담을 나누면서 도교 철학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향시에 합격하고 세 번의 회사에 도전한 끝에 왕수인은 결국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의기에 넘치는 삼십대 청년이자 말단 관리였던 왕수인은 황제의 주변에서 주군의 시야를 흐리는 환관들의 문제점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날린다.

 

환관들의 역습으로 40대의 곤장을 맞고 벽지 용장으로 귀양성 좌천을 맞이하게 된 왕수인. 그의 적인 환관들은 자객을 파견해서 귀양길의 왕수인을 처치하려고 한다. 나중에 명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환관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용장에서 보낸 만 2년간의 유배생활에 가까운 시절은 젊은 날의 왕수인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둥핑 교수가 추적하는 양명 선생의 삶은 어쩌면 성인이 되기 위한 그의 삶이라는 여정에 대한 찬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십대에 이미 지인과 대나무 관찰을 통해 나와 나를 둘러싼 사물들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시도했던 양명 선생은 용장오도라는 표현대로 벽지 용장에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지식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분명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앎, 지식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본성의 문제일 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아는 것을 바탕으로 선행 대신 그 반대되는 악행과 치부 혹은 자신만을 위한 일에 사용한다면 그게 양명 선생이 추구했던 성인의 도와 부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양명 선생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아는 것보다 그 앎을 바탕으로 해서 실천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자신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놀이를 좋아하던 황제 정덕제 주후조는 환관 유근의 꼬임에 빠져 표방이라는 기묘한 놀이공간을 만들고, 정사는 제쳐두고 오로지 자신의 환락만을 추구했다. 이런 상태에서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 각처에서는 반란이 횡행하고 도적 떼가 창궐했다. 이제 전쟁의 신이 나설 차례가 됐다. 양명 선생은 자신의 관리로서의 첫 임무인 묘지 조성에서부터 군사훈련을 하지 않았던가.

 

엉망진창이던 조정에서는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있었는지 강학에 열중하던 양명 선생을 첨도어사로 삼아 당시 강서지역을 휩쓸던 도적 떼 토벌의 명을 내린다. 도적 떼들이 얼마나 창궐하고 있었는지 관군이 당해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양명 선생은 도적 떼 토벌을 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우선 파견된 병사들의 기강부터 세우는 일을 개시했다. 기존의 토병이나 낭병의 폐해는 도적 떼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에 관군 위주의 토벌작전을 구사했다. 그리고 주변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적 떼에 무리에 합류하게 된 민간인들에 대해서는 사면을 약속했다. 국리민복이야말로 지방 안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지행합일의 대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전쟁의 신이라는 별명답게 신속하고 정확한 군사행동으로 각지에서 횡행하는 도적들을 일소했다. 토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사후처리였다. 다시 도적들이 횡행하지 못하도록 중앙의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는 새로운 주현을 설치하도록 조정에 건의해서 관철시켰다.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하고, 경제활동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삶에서 성인이 되고자 했던 양명 선생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명나라에 이런 이들이 있어서 나라가 곧바로 망하지 않고 한 세기는 버틴 게 아니었을까.

 

강서지역에서 성과에 흡족한 조정은 양명 선생을 양광총독으로 임명해서 그 지역을 평정하는 임무를 잇달아 맡겼다. 전쟁의 신이나 치리의 달인답게 양명 선생은 자신의 임무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완수해냈다. 저간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행동들에 대한 둥핑 교수의 이바구는 가히 삼국지연의나 수호전에 등장하는 영웅신화의 재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양명 선생 인생에서 전쟁의 신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최대 업적은 바로 영왕 주신호의 반란 진압이 아니었을까? 항렬로 치면 천자 주후조의 조부 뻘인 영왕 주신호는 지역에 할거하면서 사병을 모집하고, 역모의 꿈을 꾸고 있었다. 멍청이 황제 주후조를 대신해서 자신이 황제가 되지 말란 법이 있나? 게다가 자신도 역시 황족이니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도 아주 썩은 것은 아니어서 영왕의 이런 불순함을 파악한 일단의 신료들이 경고를 남발했지만, 영왕은 선수를 쳐서 병부상서 육완 같은 이들을 금품으로 매수해서 반란을 위한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드디어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문제는 우리의 양명 선생이었다. 영왕 측에서도 전쟁의 신 양명 선생의 존재감에 위기를 느껴 바로 그를 잡으려고 추격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양명 선생은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나 순리에 어긋나는 반기를 든 영왕 타도에 나선다. 사실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반군 진압의 명을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소수의 민병대로 영왕의 십만 대병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사실 영왕 주신호는 반란 초기 상책인 북경이나 남경 점령에 나서지 않고 장간 인근의 안경 공략에 나섰다가 중앙 정부의 지원병을 기다리지 않고, 정예병만으로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창 공략에 나선 양명 선생의 기습공격에 자멸해 버리고 말았다. 양명 선생은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기동력과 적의 허를 찌르는 본거지 공격으로 영왕 주신호의 반란을 단 40여일 만에 진압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놀라운 전과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중앙의 멍청이 황제 정덕제였다. 그는 전쟁놀이 매니아였다. 영왕 주신호 토벌은 평소에도 진국공 대장군 주수라는 가칭으로 전쟁놀이에 매진하던 정덕제에게 자신의 위엄을 사해에 떨칠 수 있는 그런 절호의 기회였다. 문제는 우리의 양명 선생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반군을 진압해 버리면서 대장군 주수가 활약한 기회를 빼앗아가 버렸다는 점이었다. 아무 의미가 없지만, 1만 명의 정예병을 추려서 이미 상황이 끝난 강남으로 정덕제는 친정에 나선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북방의 군사들은 반란군보다 더 악랄하게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왜 명나라 말기로 갈수록 백성들의 반란이 치열해지고, 결국 환관의 발호와 내우외환의 위기 가운데 이자성의 반군에게 숭정제의 명나라가 멸망해 버렸는지 알 수 있는 예고편이라고 해야 할까.

 

양명 선생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당시 강남 지방에서 벌어진 반란과 소요들은 평정되었다. 하지만, 선생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조정에서는 선생에게 정당한 포상이나 작위 따위는 주지 않고 생색만 냈다. 그리고 젊어서부터 기침과 각혈로 병약한 선생이 여러 차례 사임을 요청했지만 정덕제와 그의 뒤를 이은 가경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선상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어려서 교과서에서 많이 만났던 양명학과 지행합일의 선구자가 바로 왕수인 양명 선생이었다는 사실을 평전 <칼과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책의 제목이 지칭하는 책이 지식이라면, 칼은 행동과 실천이 아니었나 싶다. 양명 선생의 지행합일 사상은 훗날 우리나라의 실학자들과 일본 개화기의 인사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도덕을 그저 탁상공론이 아닌 실천으로 옮겼고, 죽는 순간까지 성인이 되고자 했던 양명 선생의 평전에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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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9 14: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솔캠 너투브!!! 그거 중독성있지요. 책슬럼프를 책으로 해장하시고 다시 책술 마시시는 모습이 레삭매냐님이십니다.

레삭매냐 2021-10-09 16:17   좋아요 3 | URL
솔캠은 진정 신세계였습니다 -
진실로.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No talking !

지금은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
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얄라알라 2021-10-09 16:38   좋아요 3 | URL
^^ 불멍^^
멍 때리기는 과연 현대인의 필수 해독제일까요?^^ 레샥매냐님 단편집 즐독하시며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21-10-09 16: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시던 그 책이로군요. 본 것 같긴한데.제목이 근사해요!

레삭매냐 2021-10-09 19:21   좋아요 2 | URL
제가 개인적으로 역사적 인물을
다룬 평전을 또 좋아하는데...

아주 적절한 평전이 아니었나 싶
습니다.

인스타 평을 보니, 원제보다 부제
가 더 낫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페넬로페 2021-10-09 17: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왕양명선생은 역사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는것 같은데 전쟁에 대해서도 뛰어나신 분이군요. 한때 저의 삶의 모토가 지행합일인데 지금 좀 느슨해진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1-10-09 19:23   좋아요 2 | URL
나이가 들어 책을 읽으면서 예전
에 무턱대고 외운 것들에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지행합일에 대해서도 수업시간
에 들어는 보았지만, 또 그 개창
자의 삶을 통해 들여다 보니
아주 머리에 쏙쏙 들어오더라
구요...

암기식 교육의 문제 -

대단하십니다. 저는 고저 성인의
흔적에 만족하는 것으로.

mini74 2021-10-09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글 읽으니 이 책 넘 재미있겠어요 ㅎㅎ 솔캠이 뭔지 모르는. 그래서 검색해 봤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1-10-10 07:53   좋아요 1 | URL
너튜브에서 한 번 솔캠을 찾아
보세요. 아주 신세계가 펼쳐진
답니다 ㅋㅋ

바람돌이 2021-10-10 0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에서 이름만 아는 사람인데 그 삶은 진짜 흥미진진하네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왕창 깨집니다.

레삭매냐 2021-10-10 07:54   좋아요 0 | URL
저도 양명 선생에 대해 교과서에
들은 정보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 평전을 읽고 나니 철학자나
사상가로만 알았던 인물이 다시
보이게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