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과 책 - 전쟁의 신 왕양명의 기이한 생애
둥핑 지음, 이준식 옮김 / 글항아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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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책 슬럼프는 책으로 푸는 게 최고다. 지난달이래 주식공부와 너튜브 솔로 캠핑 시청에 미쳐서 책을 멀리했다. 아니 이러저러한 책들을 시작하기는 했는데 한 권도 다 마무리를 짓지 못했다. 졸라의 <패주>, 모라비아의 <순응주의자> 그리고 키로가의 <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까지.

 

바로 그 순간, 역시 너튜버 별별역사라는 분이 제작한 왕양명 선생에 대한 콘텐츠를 시청했다. 원전은 중국의 둥핑 교수라는 분이 저술했다는 왕양명 평전인 <칼과 책>이었다. 부제는 무려 전쟁의 신이었다. 아니 왕양명 선생이 내가 아는 그 지행합일과 양명학을 개창한 중국의 사상가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그가 전쟁의 신이라고? 이런 궁금증은 책을 살 시간도 없이 나를 도서관으로 인도했다. 마침 우리 집 근처 도서관에 <칼과 책>이 비치되어 있어 다행이었다.

 

왕양명 선생의 아명은 왕운 그리고 그의 조부는 그의 이름을 훗날 수인으로 개명해주었다. 양명은 선생의 호였다. 전설에 가까운 그의 출생 이야기는 차치하자. 참 평전은 과거에 급제해서 관료로 활동하던 그가 태형을 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명나라 연간에 태형 즉 곤장은 참혹한 형벌이었다. 잘못 맞으면 사망할 수도 있는 그런 위험한 형벌이기도 했다. 그는 명나라 4대 암군 중의 하나로 꼽히는 황제 정덕제의 주변에서 농간을 일삼는 환관 무리들을 배격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환관들의 모함을 받아 그런 끔찍한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그렇게 극적인 장면으로 시작된 평전을 소년 왕양명이 12세 때 글공부를 하는 이유를 직격한다. 중국 관료제가 절정에 달했던 명나라 시절 입신양명의 첩경은 바로 과거에 응시해서 급제하는 것이었다. 누구나 비용이 많이 드는 과거 공부를 할 수는 없었다. 어느 정도 재산이 있어야 했고, 노동에서 해방된 이들만이 과거 공부에 전념할 수가 있었다. 그런 점에서 소년 왕수인은 럭키 가이였던 셈이다. 어쨌든 다른 이들이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 공부한다는 이유를 들었을 때, 전형적인 삐딱선이었던 소년 왕수인은 다른 답변을 내놓는다. 그가 공부하는 이유는 바로 성인(聖人)이 되기 위해서였다. 놀랍지 않은가? 12세 소년이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는 게 말이다. 어쨌든 이런 선언을 하는 순간, 훗날 왕수인의 운명을 결정지어 버렸다.

 

문에 집중하는 다른 소년들과 달리 15세 소년 왕수인은 그들과는 다른 결을 보여주었다. 변경 지방으로 가출해서, 한 달여를 지내면서 명나라의 국경을 위협하던 유목민족에 대한 실상을 깨닫게 된다. 아무리 무언가를 알아도 이것은 현실을 보지 않고 실천에 나서지 않는다면 소용없다는 그의 지론인 지행합일을 위한 첫 걸음이 아니었을까? 이런 실용적인 접근방식은 미래에 전쟁의 신이 되는 그의 캐릭터 형성에 큰 도움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17세에는 아버지의 지인이었던 제씨 집안의 처자와 결혼하게 된다. 하나의 에피소드로는 결혼식 날, 식장에서 사라져 도인과 대담을 나누면서 도교 철학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향시에 합격하고 세 번의 회사에 도전한 끝에 왕수인은 결국 관료의 길을 걷게 된다. 그리고 의기에 넘치는 삼십대 청년이자 말단 관리였던 왕수인은 황제의 주변에서 주군의 시야를 흐리는 환관들의 문제점을 호소하는 상소문을 날린다.

 

환관들의 역습으로 40대의 곤장을 맞고 벽지 용장으로 귀양성 좌천을 맞이하게 된 왕수인. 그의 적인 환관들은 자객을 파견해서 귀양길의 왕수인을 처치하려고 한다. 나중에 명나라 멸망의 단초를 제공한 환관들의 횡포가 얼마나 심각한 문제였는지 여실하게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 용장에서 보낸 만 2년간의 유배생활에 가까운 시절은 젊은 날의 왕수인에게 큰 깨달음을 주었다. 둥핑 교수가 추적하는 양명 선생의 삶은 어쩌면 성인이 되기 위한 그의 삶이라는 여정에 대한 찬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십대에 이미 지인과 대나무 관찰을 통해 나와 나를 둘러싼 사물들의 관계에 대한 심오한 탐구를 시도했던 양명 선생은 용장오도라는 표현대로 벽지 용장에서 깊은 성찰을 하게 된다.

 

지식인들의 문제가 무엇인가? 분명 그들은 보통 사람들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다. 문제는 그 앎, 지식이 실천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아니 어쩌면 인간의 본성의 문제일 지도 모르겠다. 자신이 아는 것을 바탕으로 선행 대신 그 반대되는 악행과 치부 혹은 자신만을 위한 일에 사용한다면 그게 양명 선생이 추구했던 성인의 도와 부합하지는 않을 것이다. 양명 선생은 자신의 생애를 통해 아는 것보다 그 앎을 바탕으로 해서 실천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자신의 행동을 보여주었다.

 

놀이를 좋아하던 황제 정덕제 주후조는 환관 유근의 꼬임에 빠져 표방이라는 기묘한 놀이공간을 만들고, 정사는 제쳐두고 오로지 자신의 환락만을 추구했다. 이런 상태에서 나라가 제대로 굴러가는 게 이상할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 각처에서는 반란이 횡행하고 도적 떼가 창궐했다. 이제 전쟁의 신이 나설 차례가 됐다. 양명 선생은 자신의 관리로서의 첫 임무인 묘지 조성에서부터 군사훈련을 하지 않았던가.

 

엉망진창이던 조정에서는 그래도 사람 보는 눈이 있었는지 강학에 열중하던 양명 선생을 첨도어사로 삼아 당시 강서지역을 휩쓸던 도적 떼 토벌의 명을 내린다. 도적 떼들이 얼마나 창궐하고 있었는지 관군이 당해낼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양명 선생은 도적 떼 토벌을 하면서 보다 근원적인 문제 해결에 집중했다.

 

우선 파견된 병사들의 기강부터 세우는 일을 개시했다. 기존의 토병이나 낭병의 폐해는 도적 떼와 다를 게 없었기 때문에 관군 위주의 토벌작전을 구사했다. 그리고 주변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도적 떼에 무리에 합류하게 된 민간인들에 대해서는 사면을 약속했다. 국리민복이야말로 지방 안정에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을 지행합일의 대가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 후에 전쟁의 신이라는 별명답게 신속하고 정확한 군사행동으로 각지에서 횡행하는 도적들을 일소했다. 토벌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실 사후처리였다. 다시 도적들이 횡행하지 못하도록 중앙의 행정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는 새로운 주현을 설치하도록 조정에 건의해서 관철시켰다. 백성들의 안정을 도모하고, 경제활동을 보장하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삶에서 성인이 되고자 했던 양명 선생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나마 명나라에 이런 이들이 있어서 나라가 곧바로 망하지 않고 한 세기는 버틴 게 아니었을까.

 

강서지역에서 성과에 흡족한 조정은 양명 선생을 양광총독으로 임명해서 그 지역을 평정하는 임무를 잇달아 맡겼다. 전쟁의 신이나 치리의 달인답게 양명 선생은 자신의 임무를 조금도 소홀히 하지 않고 완수해냈다. 저간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행동들에 대한 둥핑 교수의 이바구는 가히 삼국지연의나 수호전에 등장하는 영웅신화의 재현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양명 선생 인생에서 전쟁의 신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의 최대 업적은 바로 영왕 주신호의 반란 진압이 아니었을까? 항렬로 치면 천자 주후조의 조부 뻘인 영왕 주신호는 지역에 할거하면서 사병을 모집하고, 역모의 꿈을 꾸고 있었다. 멍청이 황제 주후조를 대신해서 자신이 황제가 되지 말란 법이 있나? 게다가 자신도 역시 황족이니 자격은 충분하다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명나라 조정도 아주 썩은 것은 아니어서 영왕의 이런 불순함을 파악한 일단의 신료들이 경고를 남발했지만, 영왕은 선수를 쳐서 병부상서 육완 같은 이들을 금품으로 매수해서 반란을 위한 시간을 버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드디어 반란의 깃발을 들었다. 문제는 우리의 양명 선생이었다. 영왕 측에서도 전쟁의 신 양명 선생의 존재감에 위기를 느껴 바로 그를 잡으려고 추격대를 파견하기도 했다. 양명 선생은 기지로 위기에서 벗어나 순리에 어긋나는 반기를 든 영왕 타도에 나선다. 사실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반군 진압의 명을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사태가 더 악화되기 전에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소수의 민병대로 영왕의 십만 대병에 도전장을 낸 것이다.

 

사실 영왕 주신호는 반란 초기 상책인 북경이나 남경 점령에 나서지 않고 장간 인근의 안경 공략에 나섰다가 중앙 정부의 지원병을 기다리지 않고, 정예병만으로 자신의 근거지였던 남창 공략에 나선 양명 선생의 기습공격에 자멸해 버리고 말았다. 양명 선생은 전장에서 가장 중요한 기동력과 적의 허를 찌르는 본거지 공격으로 영왕 주신호의 반란을 단 40여일 만에 진압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놀라운 전과가 아닐 수 없다.

 

문제는 중앙의 멍청이 황제 정덕제였다. 그는 전쟁놀이 매니아였다. 영왕 주신호 토벌은 평소에도 진국공 대장군 주수라는 가칭으로 전쟁놀이에 매진하던 정덕제에게 자신의 위엄을 사해에 떨칠 수 있는 그런 절호의 기회였다. 문제는 우리의 양명 선생이 전광석화 같은 속도로 반군을 진압해 버리면서 대장군 주수가 활약한 기회를 빼앗아가 버렸다는 점이었다. 아무 의미가 없지만, 1만 명의 정예병을 추려서 이미 상황이 끝난 강남으로 정덕제는 친정에 나선다. 정말 어이가 없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북방의 군사들은 반란군보다 더 악랄하게 백성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왜 명나라 말기로 갈수록 백성들의 반란이 치열해지고, 결국 환관의 발호와 내우외환의 위기 가운데 이자성의 반군에게 숭정제의 명나라가 멸망해 버렸는지 알 수 있는 예고편이라고 해야 할까.

 

양명 선생의 눈부신 활약 덕분에 당시 강남 지방에서 벌어진 반란과 소요들은 평정되었다. 하지만, 선생을 눈엣가시처럼 여긴 조정에서는 선생에게 정당한 포상이나 작위 따위는 주지 않고 생색만 냈다. 그리고 젊어서부터 기침과 각혈로 병약한 선생이 여러 차례 사임을 요청했지만 정덕제와 그의 뒤를 이은 가경제는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선생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전장에서 치열하게 싸우다가 선상에서 임종을 맞이했다.

 

어려서 교과서에서 많이 만났던 양명학과 지행합일의 선구자가 바로 왕수인 양명 선생이었다는 사실을 평전 <칼과 책>을 통해 알게 됐다. 책의 제목이 지칭하는 책이 지식이라면, 칼은 행동과 실천이 아니었나 싶다. 양명 선생의 지행합일 사상은 훗날 우리나라의 실학자들과 일본 개화기의 인사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자신이 배우고 깨달은 도덕을 그저 탁상공론이 아닌 실천으로 옮겼고, 죽는 순간까지 성인이 되고자 했던 양명 선생의 평전에 경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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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0-09 14: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솔캠 너투브!!! 그거 중독성있지요. 책슬럼프를 책으로 해장하시고 다시 책술 마시시는 모습이 레삭매냐님이십니다.

레삭매냐 2021-10-09 16:17   좋아요 3 | URL
솔캠은 진정 신세계였습니다 -
진실로.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No talking !

지금은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
편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얄라알라 2021-10-09 16:38   좋아요 3 | URL
^^ 불멍^^
멍 때리기는 과연 현대인의 필수 해독제일까요?^^ 레샥매냐님 단편집 즐독하시며 주말 보내세요^^

stella.K 2021-10-09 16: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시던 그 책이로군요. 본 것 같긴한데.제목이 근사해요!

레삭매냐 2021-10-09 19:21   좋아요 2 | URL
제가 개인적으로 역사적 인물을
다룬 평전을 또 좋아하는데...

아주 적절한 평전이 아니었나 싶
습니다.

인스타 평을 보니, 원제보다 부제
가 더 낫다는 말이 있더라구요.

페넬로페 2021-10-09 17: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왕양명선생은 역사시간에 들어본 적이 있는것 같은데 전쟁에 대해서도 뛰어나신 분이군요. 한때 저의 삶의 모토가 지행합일인데 지금 좀 느슨해진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1-10-09 19:23   좋아요 2 | URL
나이가 들어 책을 읽으면서 예전
에 무턱대고 외운 것들에 깨닫고
있는 중입니다.

지행합일에 대해서도 수업시간
에 들어는 보았지만, 또 그 개창
자의 삶을 통해 들여다 보니
아주 머리에 쏙쏙 들어오더라
구요...

암기식 교육의 문제 -

대단하십니다. 저는 고저 성인의
흔적에 만족하는 것으로.

mini74 2021-10-09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글 읽으니 이 책 넘 재미있겠어요 ㅎㅎ 솔캠이 뭔지 모르는. 그래서 검색해 봤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1-10-10 07:53   좋아요 1 | URL
너튜브에서 한 번 솔캠을 찾아
보세요. 아주 신세계가 펼쳐진
답니다 ㅋㅋ

바람돌이 2021-10-10 03: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책에서 이름만 아는 사람인데 그 삶은 진짜 흥미진진하네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이미지가 왕창 깨집니다.

레삭매냐 2021-10-10 07:54   좋아요 0 | URL
저도 양명 선생에 대해 교과서에
들은 정보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이 평전을 읽고 나니 철학자나
사상가로만 알았던 인물이 다시
보이게 되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