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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렌지주를 증류하는 사람들 ㅣ 대산세계문학총서 169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임도울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1년 9월
평점 :

오래전 잠시 동안 라틴 아메리카 친구들과 영어를 공부한 적이 있다. 아 그리고 보니 나의 룸메이트도 아르헨티나 출신 페데리코였구나. 내 루미는 나에게 스페인 말을 좀 알려 주겠다고 했었지. 하루는 칠레 아가씨들이 사는 아파트에 파티 초대를 받아서 반 친구들과 함께 우루루 몰려간 적이 있다. 이미 플로어에는 음악이 흐르고 있었고, 선수들은 아파트에 들어가자마자 파티 호스티스들에게 선물(아마 맥주였을 것이다)을 안겨 주고 바로 춤판에 돌입했다. 그들에게 밤 11시는 초저녁이라는 말을 들었다. 체력도 좋고, 춤에는 일가견이 있는 이들에게 썬업은 기본이란다. 내가 보기에 춤을 가장 잘 추는 사람들은 브라질리언들이었다. 그들은 정말 쉬지 않고, 소파며 일체 가구들을 치운 플로어를 누볐다. 우루과이 출신 작가로 아르헨티나의 미시오네스에 반해 그곳에 살게 된 오라시오 키로가의 단편들을 읽으면서 왜 그렇게 그들이 밤을 사랑하는지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깨닫게 됐다. 그들의 낮은 너무 덥기 때문에, 모든 활동은 밤에 주로 이루어졌던 것이다.
키로가 작가가 작중에서 자주 표현하는 미시오네스와 파라나강이 너무 궁금해서 결국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니 이구아수 폭포를 기점으로 한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 삼각지점에 위치한 동네였다. 그곳에는 스페인 정복시절 유적도 있고 해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모양이다. 아마 키로가 작가도 비슷한 코스로 그곳에 들렀다가 정주한 모양이다. 아마존 밀림은 그렇게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는가 보다 싶었다.
키로가 작가의 책은 작년 여름쯤 다른 출판사 책으로 처음 만났다. 내가 또 새로운 작가나 작품에 대해 도전의식이 넘치지 않는가. 이번에 문지에서 새로운 판형으로 대산세계문학 총서 시리즈가 나온다고 해서 단박에 사들였다. 모라비아 작가의 <순응주의자>가 먼저였는데 후발주자인 키로가 작가의 책부터 다 읽었다.
역자는 그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세 가지 테마로 작가의 작품세계를 설명한다. 죽음, 유배 그리고 자연(밀림)이다. 죽음은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우리 필멸의 존재인 인간은 언젠가 마지막 날숨을 쉬게 될 것이다. 그 순간이 언제인지는 아마도 각각에게 평생의 질문일 것이다. 그러니 그 순간을 너무 일찍부터 기대하거나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때가 되면 다 맞이하게 될 터이니 말이다.
하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죽음들은 비장하기 짝이 없다. 건장한 달품팔이 주앙 페드로는 한달 월급 2페소를 주지 않으려는 주인과 총싸움을 벌인다. 언제나 그렇듯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집으로 돌아가기 마련이다. 2페소를 아끼겠다고, 자신이 실컷 일을 부려먹은 달품팔이에게 돈을 주지 않고 총질을 해대는 농장주나, 복수에 나서 결국 상대방을 꺼꾸러뜨리는 주앙 페드로나 대단들하시다. 물론 나는 비슷한 처지의 후자의 편을 들련다.
딸과 아들을 한 명씩 거느린 어느 홀아비는 하녀가 일을 그만두는 바람에 여자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다 결국 죽음에 이른다. 지금 같으면 바로 밥도 얻어 먹지 못하고 내쫓길 그런 남자가 아닐까 싶다. 다만, 이 책이 다루고 있는 시기가 지금부터 한 백년 정도 전이라는 점을 고려하자. 마당에 비질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모래벼룩에게 물려 감염되고 집안일을 해줄 여자를 구하지 못해 결국 비참한 죽음에 이르는 홀아비의 이야기라. 그런데 오지에 덜렁 남은 딸과 아들은 어떻게 되는 걸까라는 질문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리고 보니 그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밀림에 유배된 자가 아니었을까.
다음은 밀림 이야기. 어느 순간, 밀림에 인간들이 등장한다. 파라나강이 도도하게 흐르는 바로 그 밀림의 주인인 독사들이 인간의 등장에 위협을 느끼고 바로 회의를 연다. 어디서나 낯설고 새로운 존재들은 위협으로 간주된다. 수백 년 전에 황금을 찾아 유카탄 반도에 도착한 코르테스 일행이 아즈텍 사람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인 독을 지닌 야라라쿠사 독사들이 주축이 된 회의는 결국 자신의 영지에서 인간들을 내쫓겠다는 결의로 이어진다. 독사 회의에서 밀림을 파괴하는 인간들에게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크루사다(아마 십자군전쟁의 스페인식 표현이 아닐까 싶다)를 비롯한 아시아에서 건너온 킹코브라까지 가세해서 인간들과 전투를 벌이지만, 인간들이 휘두르는 밀림용 마체테에 스네이크 군단은 속절없이 무너져 내린다. 어쩌면 야라라쿠사 독사들과 밀림에게 앞으로 전개될 처연한 운명의 전주곡이라고나 할까.

밀림이라는 공간에는 참 기이한 사람들도 많이 산다. 도수가 쎈 알코올을 만들기 위해 사탕수수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오렌지를 증류해서 50% 주정의 술을 만들겠다고 나선 이들도 있었다. 선술집에서는 비축해둔 사탕수수주가 다 떨어지자 공업용 알코올을 1리터씩 먹었다가 죽는 사람이 다 생기질 않나. 공무원 오르가스는 사법부 감사관에게 자신의 태업이 걸리자, 해도 그만 안해도 그만인 일을 보조 서기와 몇날며칠을 걸려 완수하고 증수로 물이 불어난 파라나강을 거쳐 산이그나시오를 출발해서 행정 중심지인 포사다스까지 가는 목숨을 건 여정에 나서기도 한다. 덕분에 해당 지역의 지명들을 지도에서 찾으며 오르가스의 행적을 추적하는 재미도 있었다.
멋쟁이 달품팔이 올리베라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급여에 대해 정확하고, 옷을 버릴까봐 주인이 명령한 우물파는 일은 못하겠다고 당당하게 지껄이는 그의 모습은 당당했다. 주체적 인간으로서 당당한 올리베라에게 농장주인 화자는 오히려 쩔쩔매는 것 같다. 또 하지만 올리베라는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는 주인의 상식을 벗어난 선까지 극대화하는 모습도 보여준다. 나중에 기묘하게 사라져 버린 일화까지, 범상치 않은 미시오네스 사람들의 단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아마 역자도 미시오네스 지방을 가본 것 같은데, 해당 지역을 가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울창한 밀림이라는 이름의 대자연이 주는 매력에 대해 알 수가 없다. 그저 저자가 기술하는 방향을 따라가 보는 수밖에. 아마 현지를 보고 나면 키로가 작가가 서술한 글들이 더 와 닿을까나. 미시오네스에 대한 헌사로 추정되는 키로가의 글을 읽다 보니, 작년에 코로나로 작고하신 루이스 세풀베다 아저씨가 생각났다. 키로가의 이상향이 미시오네스라면, 세풀베다의 그것은 아마도 파타고니아가 아니었을까. 세대와 공간이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두 명의 선각자들은 아름답고 치명적인 대자연이 인간에 의해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파괴되는 현실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왜 우리는 그런 자연과 공존하지 못하는 걸까? 자본에 대한 부질없는 탐욕이 우리와 우리의 자손들이 누릴 미래를 부수고 있다는 사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오라시오 키로가는 평생 단편을 주로 쓴 모양이다. 그의 다른 소설이 읽어 보고 싶은데, 그 소망은 아무래도 난망할 것 같다는 느낌이다. 작년에 만난 책을 다시 한 번 읽어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