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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 법칙 ㅣ 민음사 모던 클래식 35
러셀 뱅크스 지음, 안명희 옮김 / 민음사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작년 말에 뒤늦게 러셀 뱅크스 작가의 존재를 알고 이미 절판된 책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아마 이 책을 먼저 읽기 시작한 것 같은데 <달콤한 내세>를 먼저 읽고, <거리의 법칙>은 끝내지 못했다. 어제 아, 읽다만 책이 있었지 싶어 다시 도전했다. 거진 10달 전에 읽다 말아서, 영문 서머리의 도움을 받았다. 순식간에 기억이 되살아나더라.
소설의 주인공 채피는 업스테이트 뉴욕의 오세이블이라는 마을에 사는 불한당 같은 녀석이다. 나이는 14세, 벌써 마리화나 맛을 들여서 양아버지 켄의 옛날 동전들을 훔쳐다가 전당포에 맡겨서 80달러를 벌었다. 그 돈으로 마리화나를 사서 피울 생각을 하니 짜릿해진단다. 이 녀석을 어쩌면 좋을까 그래. 오래 되지 않아 그 사실이 밝혀지고, 채피는 집에서 쫓겨난다. 아니 자발적으로 집을 뛰쳐나갔던가.
사실 엄마는 모르고 있었지만 켄은 성적으로 채피를 학대하고 있었다. 무언가 고장난 가정에서 벌어지는 일상이라고나 할까. 채피에게는 비슷한 처지의 베프 러스(16세)가 있었다. 학교를 중퇴한 러스는 비디오 덴이라는 가게에서 일하며 오토바이 갱단과 어울려 산다. 두 꼬마들에게 좋지 않은 환경이 구비되었다. 앤스랙스, 메탈리카 그리고 메가데스를 숭배하는 러스에게 얹혀살게 된 채피. 그는 거리에서 마리화나를 팔기도 한다. 채피가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괜찮은 친구를 만났다면 무언가 그의 삶이 달라졌을까? 사실 모르겠다. 좋지 않은 배경을 지닌 친구와 어울린다는 설정이 좀 클리셰이이긴 하지만 말이지.
플래츠버그 쇼핑몰에서 버스터 브라운의 포로(?)처럼 보이는 프로기(로즈)를 만나 그녀를 악당에게서 구해내려고 하지만, 채피의 실력으로는 역부족이었다. 한편, 채피와 러스는 브루스를 보스로 하는 애디론댁 아이언이라는 오토바이 갱단과 어울리게 된다. 브루스, 라운드하우스 그리고 조커가 훔쳐 놓은 장물들을 몰래 빼돌리는 채피와 러스. 그러다 사달이 나서, 러스의 거처에 불이 나고 집에 채피가 있다고 생각한 브루스가 그를 구하러 나섰다가 화재로 죽는다. 꼬마 악동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한다.
겁 없이 세상에 나선 채피는 왼쪽 팔뚝 안쪽에 문신을 새기고, 자신의 이름을 "본"으로 바꾼다. 뭐랄까 하나의 통과 의례적인 모습이라고 해야 할까. 가슴에 깊은 상처를 안은 소년은 그렇게 아이에서 어른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다.
러스와 함께 어느 교수 가족의 여름별장에 무단으로 침입해서 벌이는 소동도 눈여겨 볼만하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유재산을 신성하게 여기는 미국에서 이런 짓을 벌이다니. 하지만 오갈 데 없는 두 불한당은 그런 것에 개의치 않고, 잠깐의 자유를 만끽한다. 왠지 그들의 모습에서 통나무집 열병(cabin fever)아 발명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결국 잠깐이었지만 자신들의 보금자리였던 곳을 난장판으로 만들고 러스와 채피는 그곳을 떠난다. 그 때 아마 박제 새와 클래식 CD들을 들고튀었지.
소설에서 이어지는 채피/본의 삶은 험난하다. 배움도 없고, 뒷배도 없는 소년에게 세상은 절대 호락호락하지 않다. 그래도 채피는 꾸역꾸역 사람들을 만나 무언가를 배우고 자기만의 삶을 개척해 나간다. 그런 점에서 <거리의 법칙>은 기존의 제시된 성장소설의 궤도를 충실하게 따른다. 다만, 채피의 주변인물들이 보여주는 영향력이 과연 옳은 방향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긴 하지만.
소설의 전반에서는 독고다이 같은 채피의 좌충우돌이었지만, 후반부에는 채피의 조력자로 라스파타리안 아이맨이 등장한다. 물론 아이맨도 정상적인 모습은 아니다. 그래도 아이맨은 소설에서 그려지는 아이맨의 이미지는 4살 때 자신과 어머니를 떠난 친부 폴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채피에게 멘터 같은 존재로 부상한다. 채피와 아이맨은 악당 버스터 브라운에게 팔린 어린 소녀 프로기의 어머니를 찾아 그녀를 밀워키로 보내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자고로 어려운 사람들이 비슷한 처지의 어려운 이들을 나서서 돕기 마련인가 보다.
그 다음부터는 내가 상식적으로 좀 받아들이기 어려운 설정들이 이어진다. 여권도 없는 소년 채피가 아이맨과 함께 자메이카로 간다고? 아무리 30년 전 일이라고 하더라도 그게 가능한가 싶다. 자메이카 현지의 개미농장에서 그야말로 개미처럼 일하던 채피는 놀랍게도 그곳에서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과 만나게 되는데...
반영웅 스타일의 주인공 채피에게 마리화나는 하나의 도피처를 제공해 준다. 약물이 엄격하게 금지된 우리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지만 가족과 세상으로부터 외면당한 채피가 의지할 곳은 마리화나뿐이라는 설정이 참담하게 다가온다. 어쩌면 미국 사회에 마리화나가 그렇게 깊숙하게 자리 잡았고, 심지어 이제는 합법화가 되었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을 것 같다.
채피가 처한 기구한 운명이 결국 그를 더디게 성장하게 만드는 이 험난한 여정에 초대한 걸까? 보통 사람이라면 감당할 수 없을 그런 일들이 주변에서 잇달아 발생해도, 채피는 전혀 긴장하거나 놀라지 않고 마치 게임에서 미션 깨기를 하듯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세상풍파를 일찍 겪은 채피의 힘이라고 해야 할까. 엔딩 부분에 가서, 이브닝스타에게 자신이 원하는 걸 뻔뻔할 정도로 당당하게 말하는 장면에서는 할 말을 잃을 정도였다. 왠지 모르게 미래의 채피에게서 빌런의 향기가 느껴졌다고 해야 할까.
오랜 시간이 걸려서 다 읽고 났는데, 왜 이렇게 무상하다는 느낌이 드는지 모르겠다. 러셀 뱅크스는 오랜 작가 생활 동안 많은 책들을 발표했는데, 국내에 소개된 책들은 너무 적은 것 같다. 좀 더 많은 그의 책들이 소개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