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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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가의 네 번째 책 <배반>을 읽었다. 이전에 이미 세 권의 책으로 구르나 작가에 대한 워밍업을 마친 나는 충분히 그의 작품 세계에 몰입할 준비를 마쳤던 모양이다. <배반>은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었다.

 

2005년에 발표된 <배반>은 구르나 작가의 7번째 장편소설이다. 이때까지 만난 작품들 중에 가장 자전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는 생각이다.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늘날의 탄자니아/케냐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이 중심을 이룬다.

 

인도계 출신 장사꾼 하사날리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음중구(유럽인) 한 명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종교적 이유로 이방인을 환대하는 무슬림 문화에 대한 단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방인은 신이 보낸 천사라고 했던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천사를 매몰차게 내치지 말라는 말일까.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폭력적인 이미지로 덧칠되었지만, 적어도 이방인들을 환대하는 문화만큼은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몸바사 근처의 작은 마을에 마틴 피어스라는 이름의 음중구 한 명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는 가열차게 돌아간다. 십대에 부모님을 잃은 하사날리와 그의 누나 레하나 남매. 부모가 없을 적에는 가장 가까운 남자 형제나 친척이 여자 형제를 보살피는 게 그 동네 문화라고 한다. 인도 출신 아버지가 현지인 여성과 결혼해서 낳은 자카리야 집안 역시 태생적으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세 번의 청혼을 거절한 레하나는 동생 하사날리가 가문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한 아자드와 결혼했지만, 그 결혼은 재앙으로 끝났다. 계절풍을 타고온 아자드는 다시 그 계절풍을 타고 그녀의 곁을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의 빈자리를 갑자기 등장한 음중구 마틴 피어스가 채워 버린 것이다. 양심적인 학자 행세를 하던 피어스는 자신을 구한 레하나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고향 영국으로 떠나 버린다. 좀 진부한 설정이 아닌가.

 

그리고 한 명의 중요한 캐릭터가 남아 있다. 영국에서 식민지 혹은 보호령 탄자니아를 지배하기 위해 파견한 군수 프레더릭 터너다. 그는 빈사의 지경에서 발견된 음중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하사날리로부터 인계받는다. 물론 현지인에 대한 반감으로 그가 혹시라도 피어스의 물건들을 강탈하지나 않았나 하는 의심은 디폴트다.

 

하긴 백인농장주 버턴에 비하면 프레더릭 터너는 양반이다. 버턴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들처럼 아프리카 식민지에 사는 현지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백인들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일삼는다. 제국주의자들은 동아프리카를 제2의 아메리카로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학살과 추방으로 점철된 미국의 역사를 아프리카에서도 되풀이하고 싶다는 걸까. 백인 식민주의자들에게 흑인들의 노동력은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그들과의 공존은 자신의 미래계획에 빠져 있다. 아마 19세기말에 전 세계를 호령하던 백인들이 자신들의 지배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런 그들의 착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두 세대 정도인 6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독립을 앞둔 탄자니아로 시계는 돌아간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아민과 라시드 그리고 파리다. 그들의 부모님들은 모두 교사로 탄자니아의 엘리트 계급이다. 파리다는 삼남매로 맏이로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시험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지금은 집에서 수다와 지인들의 옷을 만들어 주며 소일 중이다. 아민은 믿음직한 장남으로 그리고 꼬마 이탈리아인이라는 별명의 라시드는 몽상가다. 당연히 부모님들은 장남 아민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문제는 이 믿음직한 장남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이혼녀 자밀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촉발됐다. 끓어오르는 청춘 아민이 자밀라와 비밀연애에 빠지게 되자, 진짜 물불 가리지 않는 저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사랑이기에 아민과 자밀라는 서로에게 그토록 몰입했던 게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초타라(튀기, 혼혈인)에 대한 반감은 전통적 무슬림 사회에서 여전했던 모양이다. 결국 아민과 자밀라의 비밀연애는 발각되고, 아민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에 비극적 사랑으로 마무리되었다.

 

자 이제 진짜 화자인 라시드가 등장할 차례다. 몽상가였던 소년 라시드는 식민 모국 영국으로 건너갈 기회를 잡게 된다. 형 아민과 어쩌면 미래의 형수가 될 수도 있었던 자밀라와의 연애가 파국으로 치닫던 시점 그리고 탄자니아 독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결부된 그 시점에서 라시드는 조국을 떠나 영국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자발적이었을 지는 몰라도 독립 과정에서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 폭력 그리고 이어진 학살과 추방 때문에 라시드의 영국 유학은 그대로 영구적인 무엇인가가 되어 버렸다.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낯선 곳에 적응해야 했던 이방인 라시드의 감정이 아주 절절하게 와 닿았다. 확실히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가는 라시드라는 캐릭터에 작가 자신을 명징하게 투영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감정들은 누군가에게 들은 것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이었다.

 

라시드는 학업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인도하는 사회주의 정권 아래 아무런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라시드의 가족들은 막내아들이 영국에 머물 것을 권유한다. 그렇게 라시드는 어쩔 수 없이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박사 학위를 받고 대도시 런던을 떠나, 작은 도시의 대학에 일자리를 얻은 라시드는 그렇게 과거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사건들의 진상과 마주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소설의 엔딩이 사뭇 급작스럽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여전히 <배반>은 내가 꼽은 구르나 작가의 최고의 작품이다. 모든 게 완벽할 수 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힘차게 필력을 휘두르며 전진하던 구르나 작가의 너무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한 나머지, 더 이상 쓸 힘을 상실하고 급하게 마무리지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소설 <배반>의 기본 베이스는 사랑타령이다. 레하나와 피어스의 사랑, 자밀라와 아민의 사랑(둘 다 파국적이었다) 그리고 아민-라시드 브러더스에 대한 가족들의 다소 폭력적인 사랑. 그들의 조상이 디아스포라 이방인이었던 것처럼, 그들의 후손 역시 타지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는 그런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해서 현재 우리의 삶이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더 쓰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책에 몰입하다 보니 무척 강렬하게 다가왔던 느낌들이 어느 순간 우수수 바스러져 버렸다. 그 자잘한 느낌들을 되살리기에는 내 기억의 한계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만큼 구르나 작가가 구사하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그리고 다양한 군상들이 시전하는 감정들의 광휘에 취했다고나 할까. 원제 desertion에는 배반, 도주, 유기 따위의 뜻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중의적 해석 역시 소설에 등장하는 각각의 사건에 다양한 층위로 적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제목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달에 <배반>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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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25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르나의 자전적 이야기가 가장 많이 담긴 소설이라 저는 이 소설부터 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제가 해당 시기 베크 세계사를 읽고 있어서인지 인물들의 설정과 관계도에 이입이 많이 됩니다. 내년으로 미뤄뒀는데, 이거 읽어야 하나요?ㅎㅎㅎ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22-10-25 20:23   좋아요 1 | URL
구르나 선생의 전작들이 <배반>
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
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프레이야 2022-10-25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반, 땡스투유~ 메냐 님.

레삭매냐 2022-10-25 20: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프레이야님~! 쌩유 -

새파랑 2022-10-25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게 구르나의 최고의 작품이군요 ^^ 구성이 약간 <바닷가에서>랑 비슷해보이기도 합니다~!!

레삭매냐 2022-10-25 20:25   좋아요 1 | URL
그동안 출간된 전작들의 총합
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이라는 말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스 2022-10-26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배반으로 구르나 4부작 마무리하려고 들여놨습니다.^^

레삭매냐 2022-10-26 13:4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의 <배반> 완주를 응원합니다 !

구르나 작가의 다른 책들도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니데이 2022-11-09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2-11-09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이달의상 축하드려요^^
덕분에 저도 이 작품 찜했습니다!ㅎㅎㅎ

독서괭 2022-11-09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압둘라자크 구르나 네권이나 쭉쭉 독파하셨군요!

강나루 2022-11-10 0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축하드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thkang1001 2022-11-1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
 
타이탄의 세이렌
커트 보니것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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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나에게 좋아하는 작가를 물으면 항상 대답하곤 하는 이름이 둘 있었다. 칠레 출신의 작가 루이스 세풀베다와 미국 출신의 커트 보네거트였다. 두 작가 모두 우리 지구별을 떠나 영원한 별이 되었다. 나름 보네거트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생각해 왔는데, 독서모임에서 한 동지가 <타이탄의 세이렌>이라는 작품을 읽었다는 말을 듣고는 , 그 책은 못 읽었는데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검색을 해보니 이제는 절판돼서 구할 수가 없는 책이란다. 복간되어 나오기까지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작고하기 전까지 활발한 작품활동을 해온 보네거트의 <타이탄의 미녀>1959년에 발표된 그의 초기 작품에 해당한다. 작가는 자신의 작품이 SF 과학소설 장르의 모든 요소를 두루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의 장르로 분류되는 것을 한사코 반대했다고 한다. 하지만, 인류가 지구별을 떠나 우주에 첫 발을 내딛기 십년 전에 이미 이런 상상을 했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뿐이다.

 

독자를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이름조차 생소한 크로노-신클래스틱 인펀디뷸럼이라는 공간을 통해 지구별과 화성을 넘나드는 윈스턴 나일스 럼푸드와 그의 개 카작이 소설의 초반부를 장식한다. 인펀디뷸럼에 들어가게 되면 과거와 미래를 아는 능력이 생기는데, 자신이 가진 부를 우주선 제작에 투자해서 럼푸드 씨는 예의 능력을 100% 활용하기에 이른다. 그는 또다른 갑부 맬러카이 콘스턴트(소설의 진짜 주인공)을 자신이 지구별과 화성을 오가며 체화하는 의식에 초대해서 그의 미래에 대해 진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럼푸드는 콘스탄트에게 화성과 수성, 지구 그리고 타이탄으로 가게될 거라고 예언한다.

 

아니 아직 인류가 달나라에도 가지 못한 마당에 이런 방대한 스케일의 허구는 뭐지? 물론 지금이야 무인우주선이 부지런히 우주를 돌아다니고 있으니 그 정도야 상상할 수 있지만 지금으로부터 63년 전에도 그런 상상이 가능했을까? 하지만 지구별에서 무엇 하나 아쉬울 게 없는 콘스탄트에겐 씨도 먹히지 않는 수작일 뿐이다. 그래서 슬쩍 미끼를 던지는데 그게 바로 제목인 <타이탄의 세이렌>들이다. 물론 모든 소설의 주인공의 운명이 그렇듯,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움직이기 마련이다.

 

SF소설답게 전개와 공간이동 역시 신속하다. 다음 무대는 화성의 연병장이고, 주인공 역시 엉크라는 이름의 사나이가 등장한다. 화성에 사는 지구별의 이주민들은 모두 지구별과의 전쟁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런데 왜 지구를 침공하려고 하는 걸까? 구체적인 이유는 설명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머릿속에 안테나를 하나씩 박아두고 리모콘으로 조정하는 방식은 또다른 디스토피아의 재현으로 다가온다. 기억을 지우고, 사회에 순응하는 그런 기계적인 인간 군상이 대거 등장한다. 그 가운데, 과거를 필사적으로 기억해 내려고 애쓰는 남자가 하나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바로 엉크. 그리고 필연적으로 독자는 그가 지구별에서 화성으로 납치된 맬러카이 콘스턴트일 거라는 추측에 도달한다.

 

윈스턴 나일스 럼푸드의 사주를 받아 지구별 침공에 나선 화성인들은 공격다운 공격조차 제대로 해보지 못하고 떼죽음을 당한다. 럼푸드는 자신의 예언 성취를 위해 자신의 정체를 알게된 엉크와 보즈를 수성(머큐리)으로 보낸다. 음악을 사랑하는 하모니움이 사는 수성을 탈출해서 엉크/콘스탄트는 다시 지구별로 귀환해서 우주의 방랑자가 된다. 그리고 그보다 앞서 지구별에 와 있던 그의 아내 베아트리체와 아들 크로노와 함께 마지막 여행지인 타이탄으로 마지막 여행에 나서게 된다. 소설 <타이탄의 세이렌>의 줄거리는 대강 이렇다.

 

우주여행, 공간이동, 반전 메시지 그리고 신흥 사이비 종교에 대한 신랄한 비판에 이르기까지 커트 보네거트 주니어가 이 소설에서 다루는 소재는 그야말로 차고 넘칠 지경이다. 소련이 미국에 앞서 발사한 유인 인공위성 스푸트니크의 충격(1957104) 때문에 세계 일류 미국이 악의 축 소련과의 우주 경쟁에서 질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 소설 곳곳에 덕지덕지 묻어난다. 어이없는 화성인들의 집단자살 작전은 온전하게 럼푸드 씨가 지구별을 좀 더 바람직하게 변화시키고, 대규모 유혈사태 이후 발생하게 될 사고의 진공상태와 양심을 가책을 덜 수 있는 신흥 종교의 발흥을 위한 것이었다는 고백하는 장면은 가히 압권이었다. 미래에 대한 불안 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종교에서 흔히 사용되는 예언을 차용하고 메시아를 기대하는 심리를 우주의 방랑자의 도래로 치환시키는 방법 역시 탁월해 보인다.

 

그 층위에 더해 인류가 체험한 이 모든 간난신고는 타이탄에 사는 럼푸드 씨의 친구이자 트랄파마도어인 우편배달부 살로의 도움이 없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지적과 그에 따른 결말 역시 성에 차지 않는다. 도대체 커트 보네거트가 이 소설 <타이탄의 세이렌>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일까. 그저 어느 도피주의자의 우주적 농담으로 치부하기엔 너무 큰 담론인지, 그도 아니라면 얼치기 블랙유머에 지나지 않는 것인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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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4 21: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커트 보니것 소설이 다시 나왔군요. 앗싸하고 찾아보니까 타임퀘이크도 다시 재출간돼서 한번 더 앗싸하네요. 세풀베다는 한권밖에 안 읽어서 좋아하는 작가라고 하기는 좀 뭐하지만, 커트 보니것은 저도 제일 좋아하는 작가예요. 레삭매냐님 덕분에 새 책 소식 빨리 알았다고 좋아하는데 언제 읽으셨대요? 알라딘에 신간소식 오늘 떴던데 말이죠.

레삭매냐 2022-10-25 10:01   좋아요 0 | URL
오래 전, 한창 책 읽기 시작했을 적에
커트 보네거트/루이스 세풀베다 책들
을 사냥하러 다닌 기억이 풀풀 납니다.

근데 책들이 거의 절판돼서리...

<타이탄의 세이렌>은 8년 전에 읽은
책 감상문의 울궈먹기입니다 ㅋㅋㅋ
 
순교자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1
김은국 지음, 도정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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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동네에서 세계문학전집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듣고 과연 어떤 책이 전집에 들어갈지 참 궁금했다. 여러 권의 책 중에서도 특히 발자크의 그동안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나귀 가죽>, <루이 랑베르>와 함께 가장 관심이 갔던 책이 바로 지금은 작고하신 김은국 교수의 <순교자>였다. 한국전쟁을 시대적 배경으로 해서, 종교와 이데올로기의 대립 그리고 진실을 추적하는 추리소설 양식까지 두루 갖춘 김은국 교수 최고의 걸작 <순교자>가 한국전쟁 발발 60주기를 즈음해서 재출간됐다.

 

1932년 함흥 출신으로, 한국전쟁을 직접 체험한 김은국 교수는 전쟁이 끝난 후 제대하고서 미국으로 건너가 본격적인 학자의 길을 걸었다. 대학에서 정치외교와 역사를 전공하고, 존스 홉킨스와 하버드 같은 유수의 대학에서 문학을 추가로 더 연구했다. 미국 국적을 취득한 김은국 교수는 Richard E. Kim이라는 미국 이름으로 자신의 첫 소설인 <순교자>1964년에 발표한다. 그의 대표작으로 손꼽히는 <순교자> 외에도 한국 삼부작이라고 할 수 있는 <심판자>(The Innocent, 1968)<잃어버린 이름>(Lost Names, 1970)이 있다. 그는 풀브라이트 교수로 서울대에서 1982년에서 이듬해인 1983년까지 영문학 강의를 맡기도 했다.

 

<순교자>는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10월의 평양을 시간과 공간적 배경으로 한다. 전쟁 초반의 열세를 딛고, 국군과 UN군은 평양을 점령한다. 소설의 화자 이 대위는 육군 특무대 소속으로 정보국장인 장 대령으로부터 은밀한 지령을 받는다. 전쟁 발발 당시, 인민군에게 집단 처형당한 일단의 목사들을 조사하라는 명령이다. 종교탄압이라는 측면에서 훌륭한 선전전의 도구로 사용될 수 있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이 대위는 집단 처형에서 살아남았다는 신 목사와 한 목사의 행적을 좇기 시작한다. 신 목사의 증언을 통해, 화자인 나 이 대위는 전쟁발발 당일 모두 14명의 목사 중 12명이 처형을 당하고 신 목사와 한 목사만이 기적적으로 살아남게 되었다는 말을 전해 듣는다. 그것은 신의 개입이었노라는 신 목사의 말에, 이 대위는 그에게 묻는다. 그들의 창조주가 자신의 피조물인 인간이 세상에서 겪는 이 참담한 고통을 알고 있느냐고.

 

장 대령은 공산군 비밀경찰에게 처형당한 12명의 목사에게 합동 추모 예배를 통해 순교자의 지위를 부여하고, 상호의 대적과 싸워나갈 것을 주문한다. 죽음마저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그의 모습에서 연민이 느껴졌다. 이 대위가 전쟁 중에 알게 된 해병대 출신의 박인도 대위가 알고 보니, 순교한 12명 중의 한 명인 박 목사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박 대위는 자신의 아버지를 광신도로 규정하면서, 그가 과연 죽음의 순간을 평소 자신의 언행대로 의연하게 맞았는지를 캐묻는다.

 

하지만, 이 대위가 조금씩 밝혀내는 처형에 대한 진실은, 그것을 원하지 않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대위의 상관인 장 대령은 서슴지 않고 양심마저도 가공해낼 것을 주문한다. 젊은 혈기에 불타는 이 대위는 중립적인 입장에서 자신이라면 진리를 밝혀내야 한다고 강변하지만, 노회한 장 대령은 어떤 이들은 그 불편한 진실을 달가워하지 않을 거라는 묵시록 같이 들리는 예언을 날린다. 순교로 포장된 목사들의 죽음에 대한 추악한 진실이 한 꺼풀씩 벗겨지면서, 이야기는 중공군의 개입이라는 역사적 사실 앞에 부서진 수레바퀴 마냥 나뒹군다.

 

김은국 교수가 말했다시피 순국, 순직 같은 용어는 모두 살아남은 이들이 죽은 이들을 기리기 위한 말이다. <순교자>에서는 더 나아가, 전쟁이라는 제로섬 게임에서 생존한 이들이 어느 특정한 목적을 종교인들의 죽음을 이용하려는 의도에 일침을 가한다. 이 대위라는 지식인은 종교나 정치에 상관없이 양심에 따른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군과 종교계를 대변하는 장 대령과 일단의 목사들은 인민군에게 죽은 12명의 목사에게 애써 순교자라는 명칭을 부여한다. 이런 프로파간다는 시간을 초월해서 재생산된다는 아주 간단한 역사의 진실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그들의 순교의 이면에는 죽음 앞에서 벌어진 수치스러운 배교 행위의 비밀이 오롯하게 숨어 있다. 그래서 공산 치하에서 목숨을 구걸하고 살아남은 종교인들은, 도저히 자신의 양심에 반하는 위선의 탈을 쓰고 있을 수가 없어서 양심선언을 한 신 목사를 유다라고 부르면서, 서슴지 않고 돌을 던진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결백한 이들보다 그 끝을 알 수 없는 죄를 지은 이들이 항상 심판의 순간에 앞장서지 않았던가.

 

하지만, 양심선언을 했던 신 목사는 돌아온 탕자 아들처럼 기성 교계와 화해를 하고 다시 그들에게 돌아가 목자로서의 삶에 투신한다. 광신자였던 아버지 박 목사에게 반발했던 박인도 대위 역시 온갖 고난을 온몸으로 체험했던 <욥기>의 주인공 욥이 당하는 불의를 하나님이 보지 않았다는 구절을 읊조린다. 이렇게 그들은 희망을 잃은 세대와 화해를 시도한다. 평생 신의 은총을 기대하며 구원을 간구했던 신 목사는 자신이 종국에 찾아낸 사실은 괴로움과 죽음에 무력한 인간 존재였노라고 고백한다.

 

김은국 교수는 <순교자>에서 교()에 대한 부분보다 순()의 의미에 더 치중할 것을 주문한다. 그는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죽음 앞에서, 인간이 욕망하는 오욕칠정의 무상성을 냉정하게 꼬집는다. 또 어떻게 보면, 살기 위해 평생의 신앙과 종교마저도 헌신짝처럼 내버린 배교자에 대한 질책으로도 들린다. 이제는 빛과 소금의 기능을 잃어버린 채, 약자와 마음이 가난한 자를 배척하는 작금의 세태에 대한 일갈에 악다구니하는 세상살이에 혼탁해진 자신을 추스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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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11 1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리뷰 감사합니다. 관심이 가서 일단 담아놓았어요~^^
그러고 보니 침묵도 읽어야 하는데 아직 못 읽고 있네요ㅠㅠ 교보다는 순에 치중했다고 하셔서 뭔가 안심(!)이 됩니다^^;

레삭매냐 2022-10-11 14:52   좋아요 2 | URL
최근 리뷰는 아니고, 요즘 책덜어내기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예전에 분명히
읽고 리뷰를 쓴 것 같은데 보이지 않아
서 재업하게 되었답니다 :>

처음이 작가분이 직접 번역하신 버전
이랑 느낌이 좀 다르다랄까요.

mini74 2022-10-11 13:5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새파랑님 리뷰 읽고 담아 놓고 잊고 있었어요 ~ 순교와 배교 정치와 사상 … 순에 대한 의미 부분 참 좋아요 매냐님 ~

레삭매냐 2022-10-11 14:57   좋아요 4 | URL
예전 리뷰 기록이 없어져서리...

기록을 위해 남기게 되었답니다 :>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10-12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침묵> 만큼 <순교자>도 좋았었습니다 ㅋ 일단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다는~!!

레삭매냐님은 리뷰도 별도로 남기시나 보네요. 역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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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어느 한 작가에 빠지게 되면, 덮어 놓고 그 작가의 책부터 사고 본다. 지난달에 아름다운 문장으로 유명한 크리스티앙 보뱅에게 반해 버렸다. 알라딘 동지들이 계속해서 좋다 하길래, 도대체 얼마나 좋길래 하는 마음에 <환희의 인간>을 보기 시작했는데 뻑이 가 버렸다. 그 다음에는 <작은 파티 드레스>를 읽었다. 미치게 좋았다. 여전히 보뱅이 구사하는 문장이 가심을 후벼 파들어오진 않았지만. 어쨌든 좋았다.

 

비슷한 시기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도 구해서 병행해서 읽기 시작했다. 한 작가가 쓴 세 권의 책들을 돌려 읽다 보니 집중력히 현저하게 떨어지더라. 세 번째로 다 읽은 이 책은 가톨릭 성인으로 추앙받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13세기에는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의 부재로 신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니 지금은 세상의 모든 정보들을 원하기만 한다면 바로 접할 수 있지만 여러 제약으로 신에 도달하기가 더 힘들어지지 않았던가. 부유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체스코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프란체스코가 살던 시절은 사제와 군인 그리고 상인의 시대였다. 그는 자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될 수가 있었다. 심지어 산산조각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전쟁에 직접 뛰어 들기도 했다.

 

프란체스코는 전쟁 포로가 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다마섹으로 가던 길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개심한 것처럼, 우리의 주인공 프란체스코 역시 극적인 변신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 이 세상의 속박을 모두 던져 버리고 천상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걸까.

 

육신의 아버지 베르나르도레로부터 소송을 당한 아들 프란체스코는 청빈의 성자로 거듭난다. 무언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가르침일까.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변할 수 없다는 우리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계시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왜 그렇게 우리는 사소한 물질에 연연해하게 되는 걸까. 남들보다 좋은 집에, 좋은 자동차에, 보다 맛있는 것들을 먹는다고 해서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번잡한 세상을 살면서도 늘 고독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도 결국 채울 수 없는 그런 진리의 공허함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어디선가 본 바에 따르면 백년에 한 번씩 프란체스코 같은 이가 세상에 온다면 인류는 구원받을 것이란다. 자본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시되는 21세기에 프란체스코가 와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사랑은 결핍이라고 했던가. 사랑이 모든 것을 채워주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가끔 보뱅 작가가 참 냉소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치광이와 성인 모두 진리를 말한다. 전자는 자신이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미치지 않았다는 궤변에 도달한다. 미친 사람이 진리를 말한다고? 하긴 어느 사회에서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미치광이 취급을 받기도 하지. 성인은 청빈의 사도였던 프란체스코처럼 높고 위대하신 분의 진리를 전하는 대리인일 뿐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진리 타령을 하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이들은 의심해봐야 한다.

 

동물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했던 프란체스코를 당나귀에 비유했던가. 내가 보기에 이 당나귀는 우리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노동을 상징한다. 우리가 언제 노동 없이 먹고 살 수가 있었던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형태의 일터에서 묵묵하게 자신이 가진 노동과 시간을 팔고 그 대가로 금전을 취득한다. 우리가 버는 돈 역시 결핍으로 귀결된다. 아니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채울 수 없는 결핍과 적당히 타협하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 엔딩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철저하게 보뱅 스타일로 구사되는 서사 속에 기대한 특별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는다. 과연 내가 이 글을 꼭꼭 씹어 먹고 있는지 아닌지 모른 채, 글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렇게 부유하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을 뿐. 150쪽이 안 되는 책을 읽는데 보름이나 걸리다니. 내가 세 권의 보뱅 책들을 읽으면서 발굴해낸 나만의 보뱅 독서 키워드는 바로 되새김질이다. 보뱅의 내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한 번만 읽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점. 이런 불편한 독서가 나의 성장을 도와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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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10-07 16: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께는 얇아도 만만치 않은 책인가봅니다.
<환희의 인간>과 <가벼운 마음> 조금씩 읽고 있는데
확실히 감동을 주는 포인트가 있더라구요.

레삭매냐님 믿고
일단 <작은 파티 드레스>부터 사두어야겠습니다.^^*

레삭매냐 2022-10-07 17:58   좋아요 2 | URL
보뱅의 책들은 하나 같이
소화가 쉽지 않네요...

감동 포인트와 더불어
염통에 스며 들지 않는
묘한 이질감이 참 거시
키했습니다.

<작은 파티 드레스>는
책쟁이들에게 감히 추
천하고픈 그런 책이었습니다.

stella.K 2022-10-07 20: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보뱅이 요즘 주목을 받고 있는데 이 책은
오래 전에 절판되었어요. 좀 아쉽긴 하지만
매냐님 이리 말씀하시니 전 그냥 패쓰해도 좋을 것 같네요.ㅋ

레삭매냐 2022-10-08 10:49   좋아요 2 | URL
다른 서점에서는
모두 절판되었지만,
이웃 교#문고에서는 지금도
판재 중이랍니다, 소근소근.

1년 정도 지난 다음에 다시
읽어 볼라구요.

바람돌이 2022-10-07 22: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보뱅은 작은 파티드레스부터.... 일단 기억해두고요. ^^
저는 아시시 진짜 좋아하는데.... 언제 다시 가서 한달쯤 편안하게 책읽고 동네 산책하면서 지내고 싶은 도시예요. 언젠가 다시 아시시를 가게 되면 이 책을 꼭 구해서 가져가는걸로..... ^^

레삭매냐 2022-10-08 10:54   좋아요 2 | URL
저도 이태리 갔을 적에 아시시
같은 소도시에 가보고 싶었는데
꼴랑 로마랑 밀라노 같은 대도시
간 게 전부네요.

다시 갈 수 있을라나 모르겠습니다.

한달살기 프로젝트 넘나 좋을 것
같습니다.

그레이스 2022-10-12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보뱅 읽고 있다 멈췄는데 예사 글들이 아니었습니다. 너무 좋았어요
 
그후의 삶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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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에 고대하던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가의 책들이 나온다는 소식에 마음이 들떴다. 원래 이런 책들은 바로 나와줘야 하는데, 아마 판권 계약과 번역 때문에 노벨문학상 수상 후 6개월이나 지나서야 비로소 번역서가 나왔나 보다. 그리고 아쉽게도 노벨문학상 수상 약발은 떨어졌다. 우리 같은 책쟁이들이나 신나하겠지.

 

<낙원><바닷가에서>까지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해서 읽고 바로 구르나 작가의 최신작 <그후의 삶>에 도전했지만, 다시 읽기 시작하는데 넉 달이 걸렸고 읽는데는 고작 3일이 걸렸다. 역시 워밍업이 주효하지 않았나 싶다.

 

구르나 작가의 <그후의 삶>은 내가 개인적으로 궁금해하던 19세기 말, 독일령 아프리카 제국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유럽의 문명인을 자처하던 식민 지배자들은 야만의 세계를 문명화시킨다며 아프리카 대륙을 식민지로 만들어 버렸다. 그리고 자신과 피부색이 다른 원주민들을 거의 노예 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그들의 지배에 저항하는 알 부시리 같은 인사들의 반란에 대해서는 폭력을 동원해서 분쇄해 버렸다. 자신들의 지배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던 걸까? 고작 1세기도 가지 못할 독일의 식민지배는 폭력과 학살 그리고 기아, 굶주림이라는 상처를 그 땅에 남겼다. 식민 후발주자인 독일은 아프리카 대륙의 반대편인 나미비아에도 역시 식민지를 건설한 이야기도 궁금한데, 그 동네에서는 구르나 작가 같은 인물이 없는지 여전히 미지의 세계로 남아 있다.

 

상인 아무르 비아샤라 밑에서 경리 혹은 창고지기로 평범하게 살게 된 칼리파의 기구한 운명으로 소설 <그후의 삶>은 시작된다. 칼리파의 조상들은 인도 구자라트에서 건너온 무슬림이었다. 아프리카 여성과 만나 결혼한 칼리파의 아버지는 그곳에 정주했다. 구르나 작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들은 태생부터 난민이었던 걸까. 어쩌면 우리 모두의 뿌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 다르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후의 삶>에는 칼리파를 필두로 해서 중심이 되는 인물들이 계속해서 투입된다. 독일 제국의 아프리카 군단인 슈츠트루페(Schutztruppe)에 자원입대한 일라이스를 필두로 해서, 일라이스 누이동생 아피야, 칼리파의 아내가 되는 비 아샤 그리고 역시 슈츠트루페 아스카리 출신의 함자 등등 평범한 삶과는 거리가 먼 인물들이다.

 

이들 모두는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 통치에 순응한 캐릭터들이다. 소설의 중심이 되는 캐릭터인 함자는 독일군 장교의 눈에 들어 지배자의 언어인 독일어를 배우게 된다. 먹고사니즘에 있어, 언어 구사능력은 예나 지금이나 중요한 모양이다. 다만, 독일 장교가 함자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는 방식이 놀이였고, 흑인 아스카리를 원숭이 취급하는 타인의 시선들이 불편하게 다가왔다. 나중에 함자를 못마땅하게 여긴 독일 장교의 칼부림으로 엉덩이 부상을 입은 그를 치료해준 독일 선교사와 그의 부인(프라우)이 흑인 아스카리에게 가진 편견 역시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문득 왜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가는 독일 식민주의자들에게 가열친한 항쟁에 나선 알 부시리 같은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지 않았나 싶다. 오히려 그 편이 보다 흥미진진하지 않았을까? 다수의 흑인들처럼 작가 역시 지배자들과 타협하는 길을 선택한 게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했다.

 

함자가 소속된 슈츠트루페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게릴라 전술로 영국군을 효과적으로 괴롭히는데 성공했다. 아무런 미래와 희망도 보이지 않는 고향을 떠나, 지배자들의 군대에 자원입대한 아스카리 용병들의 활약은 대단했다. 자신들을 제대로 대우도 해주지 않았는데 그들은 도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열심히 싸웠던 걸까. 설상가상으로 독일이 전쟁에서 패하면서 아스카리 용병 전력은 새로운 지배자가 된 영국에게 의심이 사기에 충분했다.

 

함자는 자신의 과거를 감추고, 자신의 고향이자 칼리파가 사는 마을을 찾는다. 전쟁에서 당한 부상이 낫지 않은 채. 칼리파의 집에는 오빠 일리아스에게 구원을 받았지만, 슈츠트루페로 변신해서 자원입대하면서 자신이 더부살이하던 집으로 돌아가 글을 안다는 이유로 바깥주인에게 얻어맞아 왼손을 심하게 다친 아피야가 살고 있었다. 함자와 아피야의 사랑은 작가가 예비한 수순대로 흘러간다.

 

나는 계속해서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는 함자가 보여주는 삶의 행로에 집중했다. 함자는 아스카리 용병에서 창고지기로, 다시 목수로 변신한다. 어쩌면 이것은 독일령 동아프리카에서 탕카니카로 그리고 다시 새로운 국가 탄자니아로 나아가는 구르나가 나고 자란 땅에 대한 비유가 아닐까. 우리네 삶처럼 갖가지 굴곡이 있지만 결국 어떤 방식으로든 앞으로 나아간다는.

 

함자와 아피야의 아들 일라이스가 어두운 영에 사로잡혀 결국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세키야 의식을 치르게 되자, 스스로를 개화된 인물로 생각하던 칼리파가 대노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야만과 문명의 대결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몰아가고 싶지 않지만, <그후의 삶>을 읽는 내내 의식하지 않을 수도 없지 않았나 싶다.

 

탕가를 지배했던 독일이라는 연결고리를 기점으로 삼아, 일라이스가 자신의 외삼촌 일라이스의 행적을 추적하는 장면에서는 전작 <바닷가에서>가 떠오르기도 했다. 젊은 일라이스가 교육을 통해 새로운 지배 계급의 엘리트로 성장해가는 과정도 주목할 한만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언어의 장벽을 뛰어 넘어, 자신들을 지배했던 국가에 유학했다는 점 하나만으로도 고국에서 대단한 대우를 받게 되지 않을까. 독일에서 일리아스가 마주하게 된 나치 독일 치하에서 추진된 재식민화 프로젝트의 진실 그리고 독립한 식민국가의 엘리트들과의 관계 형성을 통한 유대감 조성이라는 포스트콜로니얼리즘 시대의 과제를 엿볼 수도 있었다.

 

초반의 느슨한 전개에 비해, 후반으로 갈수록 조금은 급작스럽게 진행되면서 서사가 압축되지 않았나 싶다. 후발 식민국가로 아프리카 대륙에서 카이저라이히(Kaiserreich)를 꿈꾸던 독일 제국의 이면과 이국적이고 생소한 탄자니아 국가의 속살을 드러낸 인간 군상들의 드라마가 마음에 쏙 들었다. 압둘라자크 구르나의 <배반>이 곧 출간될 거라고 들었는데, 해를 넘기지 않고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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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0-06 18: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는 아직도 생각으로 정리중이예요 ^^;;

레삭매냐 2022-10-06 19:36   좋아요 3 | URL
그레이스님의 정리를 기대해 봅니다 :>

빠이팅.

mini74 2022-10-06 18: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출판사들이 잔뜩 기대하고 있지 않을까요. 재판 리커버? 등으로 발빠르게 대응할거 같아요. 구르나 책들도 읽어야 하는데 ㅠㅠ 스노우맨이랑 회귀물 무협지?! 읽고 있습니다 ㅎㅎ 매냐님 글 넘 좋네요 *^^*

레삭매냐 2022-10-06 19:37   좋아요 3 | URL
어떤 작가가 수상을 하냐에
따라 여느 때처럼 희비가
갈리지 않을까 싶네요.

이제 30분 정도 남았는데
출판사들 비상 대기 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발란데르 아자씨 책도
닐거야 하고... 보뱅도 마저
닐거야 하는디 - 그렇네요.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2-10-06 18: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프리카 작가들이 유럽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많아 조금씩은 한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럼에도 생각할 거리를 많이 받았어요.
그후의 삶으로 읽기 마감하려고 했는데 배반이 줄간된다고요? 휴~~

레삭매냐 2022-10-06 19:39   좋아요 4 | URL
어떤 작가가 수상을 하냐에
따라 여느 때처럼 희비가
갈리지 않을까 싶네요.

이제 30분 정도 남았는데
출판사들 비상 대기 중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도 발란데르 아자씨 책도
닐거야 하고... 보뱅도 마저
닐거야 하는디 - 그렇네요.

부족한 글,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미미 2022-10-06 18: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물 들어올때 노 저어야하는데
말입니다. 올해는 출판사가 좀
서두르길 바랍니다.ㅎㅎ
<배반>도 기대되네요^^

레삭매냐 2022-10-06 19:40   좋아요 3 | URL
출판사에서 구르나 쌤들의
책 출간 선정을 잘한 것 같
습니다.

<낙원>과 <바닷가에서>
는 모두 부커상 리스트에
오른 책이고, <그후의 삶>
은 최신작이더라구요.

<배반> 어서 나오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