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글자책] 샤베르 대령 [큰글씨책]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인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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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떤 행위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읽다가 알게 된 <샤베르 대령><외제니 그랑데>를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 <샤베르 대령>은 큰글씨 버전 밖에 없어서 그걸로 빌렸는데 중편 분량이어서 금방 읽을 수가 있었다. 숱하게 달린 주석 읽다가 더 시간이 간 것 같다. 발자크 최대 걸작이라는 <외제니 그랑데>는 지만지 천줄 축약본이라 일단 빌리기는 했는데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 또 정본 번역이 나올지 모르니.

 

<샤베르 대령>은 소설 공장장 시절에 발자크가 쓴 소설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일라우 전투(180727~8)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제정 시절의 용사 샤베르 대령/백작이 시체더미에서 살아나 귀환한 것이다. <오딧세이>의 페넬로페와 달리 샤베르 대령의 와이프 로진(로즈 샤포텔)은 이미 페로 백작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중이다. 딱 봐도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될지 보이지 않는가.

 

, 그전에 어제 책을 보고 나서 오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너튜브로 검색해 보니 예전에 프랑스의 국민배우로 불리던 제라르 드파르듀 주연의 영화로 1994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있었다. 그리고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에게 돌진하는 프랑스 중기병대의 영상은 압권이었다. 이런 전투에서 샤베르 대령은 무시무시한 러시아군에게 칼을 맞아 두개골이 쪼개지는 부상을 입고 죽은 것으로 보고됐다.

 

예나 지금이나 죽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 살아 나려면 법적 복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주석에 따르면 당시까지만 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증인의 증언이 필수적이었다. 샤베르 대령을 죽음에서 구원해 줄 유일한 사람이 딱 한 명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의 전처, 페로 백작부인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샤베르의 연금과 모든 재산을 쥔 당사자라는 점이다. 게다가 그녀는 미남 귀족 페로와 재혼해서 두 명의 아이까지 가지고 있었다. 12년 만에 초라한 몰골로 돌아온 전 남편에 대한 애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신원을 되살려 달라는 부탁은 들어줄 가망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샤베르 대령을 사기꾼으로 몰아야만 했다. 바로 이 지점을 발자크는 예리하게 공략한다. 인간사가 그런 것이다라는 걸. 게다가 다른 시절도 아니고, 제정 시대의 영웅들이 상갓집 개 취급을 당하던 왕정복고 시절이 아니었던가.

 

페로 부인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거절당한 샤베르 대령은 결국 법률사무소에 찾아가 자신의 신분과 재산을 복귀하려는 시도에 나선다. 물론 자신의 철지난 입성 때문에 법률사무소 서기들에게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니 발자크는 옷차림에 대해서도 상당히 신경을 쓴 모양이다. <사촌 퐁스>에서도 철지난 옷차림을 한 퐁스 아재의 풍채에 대해 한참 설교하지 않았던가.

 

우여곡절 끝에 샤베르 대령은 데르빌에게 자신의 사건을 의뢰하게 되고, 사람 좋은 데르빌은 자신의 소송의뢰인에게 돈도 빌려 주고 기꺼이 사건을 수임하기로 결정한다. 우선 그전에 샤베르 대령이 어떻게 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 아일라우 전투에서 생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들은 데르빌이 과연 합리적 판단을 내렸는지 의문이다. 물론 법정에서 쉽지 않은 심리가 전개될 것이고, 이미 두 명의 아이를 가지고 있는 페로 부인이 좀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상황도 유능한 변호사 데르빌은 간과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에서 페로 부인을 곤경을 몰아넣을 수 있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수집에 열을 올린다. 자신이 독일 농부들에게 도움을 얻은 하일스베르크에서 온 서신과 2년간 구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들이 샤베르 대령의 신무기로 등장한다. 데르빌이 복잡한 재판 준비를 하는 동안, 샤베르 대령은 이집트 시절부터 전우였던 베르니오의 집에서 그 집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소일한다.

 

모든 준비를 마친 데르빌은 페로 부인과 담판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페로 부인은 샤베르 대령이 오래 전에 픽업한 매춘부 출신이라는 점이 들어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어지러웠던 시절, 고아 샤베르 대령은 자수성가해서 나폴레옹의 휘하가 되어 아일라우에서 기 원수, 다부 원수와 싸운 역전의 용사였지만 1819년 봄, 그의 모습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보잘 것 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파렴치하게 빼앗은 전처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길 원한다. 이 파란만장한 이야기의 결말이 순탄치 않을 것을 발자크는 예고한다.

 

임시적이긴 했지만, 대혁명과 제 1제정시대의 계속된 전쟁이 마무리되고 평화를 찾아 가기 시작한 왕정복고 시대에 대한 발자크식 스케치가 <샤베르 대령>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발표된 1832년에는 이미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가의 반동정치에 조종이 울린 뒤였다. 대혁명의 맛을 본 프랑스 민중들은 더 이상 특권계급의 통치를 용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페로 부인으로 대표되는 왕정복고 시대에 앙시앵 레짐의 부활을 꿈꾸던 이들에 대한 발자크식 조롱이 <샤베르 대령>에 담겨 있지 않나 싶다. 그래봐야 너희들의 꿈은 모두 일장춘몽에 불과했다고.

 

지금도 그렇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법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그 법의 도움에는 많은 재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재력과 시간으로 잘못된 것들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결국 현재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샤베르 대령의 모습에 너무나 공감이 갔다. 19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시절과 다를 게 없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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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11-14 16: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야기 자체가 흥미롭네요. 12년만에 집에 왔는데 죽어 있는걸로 처리된데다 부인은 재혼을 했다니 ㅋ 웃프네요 ~!!

레삭매냐 2022-11-14 17:02   좋아요 2 | URL
비슷한 이야기로 마르탱 게르
의 귀향이 있는데 -

어쩌면 발자크도 이 이야기에서
모티프를 얻었는 지도 모르겠네
요.


바람돌이 2022-11-14 17: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부인의 입장에서는 전남편이 죽어서 모든 것을 처리하고 새로운 삶을 살고 있는데 그걸 뿌리채 뒤집어 엎어버리는 귀향이네요. 전부인의 황당함과 당황스러움도 그리고 어떻든 지금의 삶을 지키고자 하는 안간힘도 다 이해가 가네요. 이렇게 모두가 이해가 가는 상황을 발자크가 어떻게 풀어냈을지 궁금증이 막 솟는 리뷰입니다. ^^

레삭매냐 2022-11-14 17:36   좋아요 1 | URL
소설 공장장 발자크가 마구 써
제끼던 시절의 나온 책이라고
하더라구요.

판본도 세 개나 되구요 -
아마 계속해서 증감을 했던 모양
입니다. 날림으로 유명했던 이가
완벽주의자로 변신?

감사합니다.
 
미친 장난감 휴머니스트 세계문학 13
로베르토 아를트 지음, 엄지영 옮김 / 휴머니스트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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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니스트에서 나오는 세계문학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영미권 혹은 프랑스에 집중된 세계문학 대신 우리가 접할 수 없는 제3세계 작가들의 출간되면 주목을 하게 된다. 오래 전에 펭귄에서 나온 로베르토 아를트의 책을 수배해 둔 기억이 나는데,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가 없더라. 하긴 나한테 어디 그런 책들이 한두권이던가. 발자크의 <미지의 걸작>도 도무지 찾을 수가 없어서 어제 도서관에 들렀다가 빌릴 생각도 잠시 했었다. 대여권수가 7권이 넘어서 빌리진 못했다. 집에서 찾는 게 더 빠를까.

 

소설의 무대는 지난 세기 초,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정도가 될 것 같다. 사실 소설의 공간적 배경은 어디가 되더라도 상관이 없지 않을까. 프롤레타리아 청년(아니 소년이던가) 실비오 아스티에르는 어려서 도적문학에 심취되었던 모양이다. 어릴 적부터 싹수가 노랬던 엔리케 이르수베타, 루시오와 도둑 클럽을 결성해서 주변을 터는 데 열중한다. 아니 그런데 문학에 등장하는 도둑들은 보통 의적이 아니던가? 이들은 철저하게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도적질에 나선다. 내 것이 아닌 것으로 돈을 벌겠다는 발칙한 생각이 참.

 

, 한 가지 이들이 리볼버로 무장했다는 점을 볼 때 당시 아르헨티나에서 무기 소지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는 점을 알 수가 있다. 그렇다면 권총 강도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의적 흉내에 열중하던 차에, 오늘도 한탕 털러 집에서 책을 보고 환호하는 실비오와 친구들. 책을 쓸어담는 그들의 모습이 어찌나 애처로웠는지 모르겠다. 다른 것도 아니고 책을 훔쳐서 돈을 벌 생각을 하다니. 문득 어느 나라에선가 폭동이 일어나서 거의 모든 상점들이 약탈을 당했는데 유일하게 폭도들이 손을 안댄 상점이 바로 책방이었다는 말이 떠올랐다. 절판된 토마스 만의 <마의 산>에 대한 언급이 등장할 때는 나도 등반에 도전했지만 결국 오르지 못한 마의 산에 대한 부채의식으로 좀 괴롭기도 했다.

 

그렇게 도둑클럽의 활동은 무기한 연기되고, 언제까지 도둑질로 생활을 할 수 없었던 실비오(15)는 취업전선으로 내몰린다. 사랑하는 동생의 학업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라도 실비오는 돈벌이에 나서야했다. 물론 아무런 기술도, 사회 경험도 없는 실비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사환이나 심부름꾼 정도가 전부라는 냉혹한 현실이 그 앞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결국 가에타노 씨의 책방에 취업하게 된 실비오. 악질 고용주 가에타노 씨의 집에서 중고책방의 점원인지 집안의 하인인지 모르게 그렇게 일을 시작하게 된 주인공 소년. 그래도 책을 사랑한 나머지 다른 곳이 아닌 책방에서 새출발을 하게 된 걸 고맙게 생각했을 지도 모르겠다.

 

실비오와 같이 장보기에 나선 가에타노의 모습에 대한 묘사는 아를트식 블랙유머의 압권이었다. 주인공의 고용주는 전형적 쁘띠부르주아로서 수치심이라고는 1도 없이 물건 값을 후려치고, 사지도 않을 물건을 주물럭거리질 않나 진상손님이 되어 시장 상인들과 악다구니도 마다하지 않는 리얼한 모습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이미 가에타노 집안의 노예 같은 존재가 된 미겔 씨와 함께 기숙하는 장면은 암담한 그 자체였다. 피고용인에 대한 최소한의 인간적 도리는 하지 않고 오로지 어떻게 하면 최대한 뽑아 먹을 궁리만 하는 모습을 작가는 있는 그대로 묘사한다. 이건 설마 자신의 경험에 기반해서 쓴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책배달을 나갔다가 사랑스러운 여인을 만나 황홀경에 빠지기도 하고, 그녀가 제공하는 팁을 거부하는 패기를 보여 주기도 하는 실비오. 한 푼이라도 아쉬운 마당에 그녀가 주는 돈을 받아야 하지 않았을까? 결국 가에타노의 횡포를 견디지 못하고 새로운 일자리 면접을 보러 갔다가 수치스러운 냉대를 당하기도 한다. 그렇지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고 어린 친구! 주인공은 심지어 소 방울을 달고 책 판매에 나서는 역할을 부여받기도 했다. 노동자의 존엄성 따위는 일절 고려하지 않는 고용주의 모욕적 행태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첫 번째 직업의 엔딩은 서점 방화라는 비극적 방식으로 결말이 지어진다. 결국 모든 건, 소멸에서 다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일까.

 

실비오의 다음 도전은 바로 항공 정비사 실습생이었다. 책을 통해 배운 기술들을 밑천으로 삼아 전문직 일자리를 얻기 위한 첫 번째 스텝에 나선다. 이게 해피엔딩으로 끝날 거라고? 천만의 말씀이다. 도전하는 것마다 족족 실패한다. 지난 세기 초, 아르헨티나에서 성공하기 위해서는 돈이 많거나 아니면 든든한 빽이 있어야 했다. 아니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가 아니던가. 돈이 없다면 전문직 기술을 익힐 수 있는 방법도 없었다.

 

백 년 전이나 지금이나 몸뚱아리 하나 밖에 없는 무산계급에 속한 이들에게 생존을 위한 투쟁은 고단한 미션이었다. 일용한 양식 혹은 통장을 스쳐가는 알량한 금전으로 치환되는 노동을 위해 우리는 오늘도 영혼을 갈아 넣는다. 때로는 실비오/가룟 유다가 그랬던 것 같은 파렴치한 행위도 마다하지 않을 지도 모르겠다. 사회적 적응이라는 틀에 우리 자신을 구겨 넣고, 대신 하루의 평안을 구가한다. 그래도 인생은 여전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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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괭 2022-11-12 11: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와 책표지가 강렬하네요~ 재밌어보이는 내용인데 별은 3개 주셨군요!

레삭매냐 2022-11-14 09:00   좋아요 1 | URL
아마 제가 읽기 전에 기대를
많이 했나 봅니다.

매운맛을 기대했는데...

바람돌이 2022-11-12 21: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가난한 실비오의 생존도전기인가요? 백년전이나 지금이나 육체든 영혼이든 다 갈아넣고 하루하루의 삶을 사는게 우리 삶이죠 뭐.... 좀 슬프네요. ㅠ.ㅠ

레삭매냐 2022-11-14 09:01   좋아요 0 | URL
한 줄 요약으로 아주 제격입니다.

프롤레타리아의 삶은 예나 지금이
나 달라진 게 없어 보입니다.

coolcat329 2022-11-14 09: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이 작가 책 <7인의 미치광이> 갖고 있어요. 당시 모르는 작가였는데 그냥 제목이 좋아 샀네요. 근데 이렇게 또 나오니 반가워요.
이 작가는 제목이 다 강렬하네요.

레삭매냐 2022-11-14 10:39   좋아요 0 | URL
오래 전, 펭귄 독서 모임에서
아마 이 책으로 시작을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중에 사서 쟁여 두었는데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못찾
겠더라구요 ㅠㅠ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푸른숲 / 199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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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파트 원


세계문학 고전 <나귀 가죽>으로 처음 발자크를 만났다. 그리고 발자크의 찐팬으로 거듭나는데에는 많은 시간과 발자크의 작품에 대한 밀도 높은 이해가 필요했다. 발자크를 읽으면서 나는 19세기 프랑스/파리 사회에 대한 기본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쩌면 발자크에 버금갈 만한 또다른 천재 슈테판 츠바이크의 미완성 유작 <발자크 평전>은 위대한 소설공장장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길라잡이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학계의 나폴레옹 같은 존재였던 발자크는 왕정과 혁명, 제정 그리고 다시 왕정복고라는 격변의 시기를 그 누구보다 사실적으로 기록한 작가이기도 했다. 그를 위대하게 만든 건, 발자크의 천재성이 아니라 어쩌면 그가 살았던 시대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시대를 살았다고 해서 누구나 발자크와 같이 위대한 작가가 되는 건 아니었으리라. 오노레 드 발자크는 “19세기 풍속화가였고,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은 시대와 영합한 문학 천재에 대한 일대기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지 못했던 오노레 발자크는 평생을 어머니의 그늘에서 살아야 했다. 그가 빚쟁이에게 시달리다가 자살을 하는 순간에 구원의 손길을 내민 건 역시 혈육인 어머니였다. 그러니 그가 아무리 어머니에게 냉대를 받았다고 하더라도, 마냥 어머니를 욕할 순 없지 않았을까. 이 시절 그가 학교에서 당한 체벌과 어머니의 잔소리타령은 그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꼽히는 <루이 랑베르>에 잘 나타나 있다. 사실 지금 이 평전과 <루이 랑베르>를 병행해서 읽고 있는데, 다시 한 번 츠바이크가 얼마나 대단한 전기 작가인지 여실하게 알 수가 있었다.

 

법학 공부를 하던 발자크는 자신이 미래에 서기나 공증인 같은 평범한 삶을 살기를 온몸으로 거부했다. 그리고 대학을 마치고 나서, 농부의 아들 출신으로 나폴레옹 제정 시절에 한몫 잡은 아버지와 거래에 나선다. 이십세의 나이에 2년 동안, 작가의 길을 걷는 동안 지원을 요청한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약관의 나이에 세상살이를 알면 얼마나 안단 말인가. 가족 앞에서 처음으로 쓴 희곡 <크롬웰>을 발표했지만 그의 첫 창작 시도는 재앙으로 귀결됐다. 그렇다고 선천적 낙관주의와 성공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닌 남자가 포기할 리가 만무했다.

 

어떤 장애도 없이 계속해서 글을 생산하기 위해 발자크는 돈 많은 과부과의 결혼을 갈구했다. 평소 계산에는 서툴렀지만, 이런 방면에서는 빠삭한 남자가 바로 발자크였다. 그의 소설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를 실천에 이루기 위해 발자크는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아니 어쩌면 자신이 직접 체험하지 않은 것은 글로 쓰지 않는다는 어떤 작가처럼, 자신의 체험을 소재로 삼았던 건 아닐지 의심이 들기도 한다.

 

결국 그의 첫사랑은 드 베르니 부인이라는 자신의 어머니 뻘의 여성이었다. 위대한 시인이 되길 원하는 이 남자는 성공의 사다리를 타기 위해 뻔뻔함으로 무장한 그야말로 속물 그 자체였다. 발자크는 평생 동안, 자신을 보살필 수 있는 재력과 넉넉한 여유를 지닌 귀부인들과의 결혼을 꿈꾸었다. 미래의 배우자가 지닌 재력이 자신의 멈추지 않는 창작의 바탕이 될 거라고 굳게 믿었던 게 아니었을까.

 

청춘 시절의 발자크는 돈이 필요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모든 종류의 글쓰기 의뢰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글을 썼다. 초반에는 자신의 이름을 걸지 않고, 표절과 짜깁기 등 그야말로 글쓰기에 있어 가능한 모든 글들을 그야말로 초인적 정력으로 완수해냈다. 그렇게 자신의 영혼을 담지 않은 글들의 퀄리티가 보장될 수가 있었을까. 아마 나중에 대가가 된 다음에 자신의 글을 보게 되면 너무 쪽팔리지 않았을까. 물론 자신의 이름을 걸고 발표한 글은 지울 수가 없다는 치명적 단점이 있다는 걸 미래의 위대한 작가가 모르진 않았겠지.

 

제법 글쓰기로 돈을 만지기 시작한 발자크는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출판사와 인쇄업에 손을 댔다가 크게 한 탕 해먹는 대신, 상상을 초월하는 빚을 지게 된다. 아니 젊은 친구, 너무 세상을 만만하게 본 건 아니구? 발자크는 손절이라는 걸 모르는 남자가 아니었나 싶다. 망한 사업을 뒤집기 위해 또다른 사업에 손을 댔다가 시원하게 들어먹기를 반복한다.

 

낙관주의와 무지막지한 성공에 대한 의지로 똘똘 뭉친 결점투성이 작가에게 투기는 도락 중의 하나였다. 돈을 벌기 위해 그는 글쓰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자신이 원하는 불멸의 글쓰기를 글을 써서 돈을 벌어야 하는 시시포스의 숙명 같은 ㅇ숙명에 처했다. 인쇄소 사업의 실패로 그는 자그마치 10만 프랑에 달하는 거금의 빚을 지게 됐다. 빚쟁이를 피해야 했던 발자크는 파리 외곽의 조용한 은신처를 마련했다.

 

그의 작품들이 세간의 인정을 받기 시작하자, 천박한 발자크의 품성은 폭주하기 시작한다. 지독한 왕당파였던 그는 귀족 칭호를 받기 위해서라면 양심을 파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지독한 속물근성의 소유자가 바로 발자크였다. 이십대에 구축된 저질문학을 남발하면서 몸에 밴 습관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그런 똥구덩이에서 탈출할 수 있었을까.

 

이 정도면 정신을 좀 차리고 겸손하고 자신의 분수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그것도 발자크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그런 삶이었던 모양이다. 빚쟁이 주제에 남에게 꿀리는 삶은 살고 싶지 않았는지 버는 족족 사치스러운 물건을 사들이고, 사륜마차를 타고 다니면서(요즘으로 치면 고급 승용차에 해당하지 않을까 싶다) 하인들을 부렸다. 이 정도면 구제불능의 인사가 아닐까 싶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 정도에서 나락으로 떨어졌을 텐데, 우리의 위대한 작가 발자크는 확실히 남다른 멘탈의 소유자였다. 연애에서도, 창작에서도 발자크는 계속되는 실패에도 도무지 포기할 줄 몰랐다. 까마귀 깃털 펜과 소탈한 잉크 병 그리고 두툼한 종이 뭉치를 무장한 발자크는 오밤중에 깨어나 동이 틀 때까지 글쓰기를 전념했다. 일단 발자크가 글을 쓰기 시작하면 아무 것도 그의 글쓰기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그가 체험한 숱한 연애의 실패(그는 추한 얼굴의 뚱보였다고 한다), 가족들의 냉대 그리고 채무자들에게 시달리는 간난신고는 발자크 글쓰기의 원천이었다. 쇠는 두들겨 맞을수록 단단해진다고 했던가. 보통의 유리 멘탈이었다면 벌써 가루가 되었겠지만 발자크는 이런 고통의 시간 동안, 자신의 대표작들을 다수 창조해냈다. 놀랍지 않은가.

 

혁명과 전쟁, 왕정복고 그리고 산업화 과정에서 펼쳐지는 인간 드라마는 발자크의 위대한 업적인 <인간희극>의 좋은 소재가 되었다. 아니 인간 그 자체가 발자크에게는 마르지 않는 무궁무진한 그런 소재였다. 청년 시절, 숱한 저질문학 글쓰기로 강철처럼 단련된 발자크는 이제 드디어 진정한 시대정신을 담은 걸작들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날림으로 공장처럼 글을 찍어내던 이가, 극적 탈바꿈을 통해 그 누구보다 완벽한 작품에 대한 강렬한 집착을 보여주었다.

 

발자크는 자전적 소설 <루이 랑베르>로 드디어 작가로서 인정받기 시작했다. 괴테가 <파우스트>는 쓰는데 60년이 걸렸다면, 발자크는 이 걸작을 단 6주 만에 쓰는 괴력을 과시했다. 물론 <루이 랑베르> 역시 출판업자들의 등쌀에 못이겨 후반이 만족스럽지 못하다는 평이다. 드디어 작가로서 완숙기에 접어든 발자크는 <샤베르 대령><외제니 그랑데>에서 절정의 기량을 펼친다.

 

바로 이 때, 발자크에게 모르는 여인이 등장한다. 지금으로 말하자면 팬레터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사는 공작부인이 등장한 것이다. 훗날 에벨리나 폰 한스카 부인으로 알려진 이 인물은 속물덩어리 인간 발자크의 욕망, 그러니까 백만장자 귀족 부인이라는 타이틀을 모두 충족시킬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얼굴도 보지 못한 채, 고작 서너번의 서신으로 망상가이자 금사빠인 발자크는 한스카 부인에게 사랑을 느끼기 시작했다.

 

낭만주의 사조와 역사소설이 판을 치던 19세기, 독자들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생산해내는 작가가 소설의 주인공 같은 이야기의 주인공이길 바랐던 모양이다. 이런 마당에 발자크는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스캔들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어떤 면에서 발자크는 독자들의 기대에 부응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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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 절반을 읽었다.


워낙 방대한 분량이라, 일단 절반의 리뷰를 작성해봤다.

순전히 나의 망각에 대비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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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ummii 2022-11-11 09: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고 싶었는데 아직 엄두를 못내던 책이었는데 이렇게 요약해주시니 너무 좋습니다 ^^잘 읽었어요~ 나머지 절반의 리뷰도 기대할게요 ~~^^

레삭매냐 2022-11-11 11:47   좋아요 1 | URL
발자크 입문하시는 분들에게
꼭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금 <루이 랑
베르>를 읽고 있는데 아주 술술~
이랍니다.

열심으로 읽고 나서 절반도 써보
겠습니다.

stella.K 2022-11-11 09:4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디어 메삭님 서재에서 제가 읽은 책을 발견하는군요. ㅎ 하도 오래전에 읽어 기억은 안 나지만 그가 커피중독자라는건 유명하죠.

레삭매냐 2022-11-11 11:49   좋아요 1 | URL
맞습니다, 발자쿠 선생은 지독한
커피마니아였다고 하네요.

그의 수명을 빼앗아 간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수면부족과 커피
라고 츠바이크는 쓰고 있습니다.

저도 끝까지 읽고 나서 리뷰쓰기
에 들어가면 다 이자 뿌릴 것 같
아서 일단 반절 리뷰만 작성해
보았습니다.

coolcat329 2022-11-11 20: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 정말 멘탈 갑이죠.
그 수많은 결점에도 불구하고도 미워할 수 없는 사람!

레삭매냐 2022-11-11 20:26   좋아요 0 | URL
읽을 수록 뭐 이런 닝겡이
다 있나 싶을 정도로 멘탈갑
이더라구요.

아니 어쩌면 그런 결점 때문
에 더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문제적 작가가 아닐까 싶습
니다.

서니데이 2022-11-11 20: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1998년에 출간된 책이네요. 요즘에는 몇 년 되지 않아도 절판되거나 품절되는 책이 많은데, 오래 지속되는 책을 보니 좋네요.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푸른숲 출판사에서는 인문서 많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오늘 날씨가 따뜻해서 좋은데, 공기가 나쁜 편이예요.
레삭매냐님, 즐거운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2-11-12 08:58   좋아요 1 | URL
그렇죠, 20년도 전에 출간된
책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걸
보면 츠바이크 <발자크 평전>
의 위력을 알 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은 날이 좋았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프레이야 2022-11-11 20: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하루 50잔의 커피를 마셔가며 돈을 벌기 위해 죽으라고 원고를 썼다고 알고 있는데요. 이 책이랑 루이 랑베르 끌리네요. 위장이 괜찮았을까요. 통장에 돈 꽂히면 무슨 연기라도 열심히 하게 돼있다던 어느 여배우 말이 생각납니다. 절반의 리뷰이지만 구미가 당깁니다. ^^

레삭매냐 2022-11-12 09:00   좋아요 1 | URL
하루에 12시간에서 14시간
가량 글을 썼다고 하더라구요.

평균 하루에 16페이지 정도를
쓰곤 했다고 하는데, 가히 소설
공장이라는 별명이 정말 어울
릴 정도의 초인적인 생산력이
아닐 수 없습니다.

결국 이른 나이에 별이 되었지요.
 
페넬로페 - 전쟁터에서 돌아온 여자
주디스 바니스탕델 지음, 김주경 옮김 / 바람북스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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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픽노블은 주로 도서관에서 보곤 한다. 지난 주말에 빌려온 유디트 바니스텐달의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을 읽고, 다른 책도 보고 싶어졌다. 우리동네 도서관에서 멀리 있는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다. 거까지 가기가 버겁다. 이럴 때 이용하는 게 바로 상호대차다. 어제 바로 연락이 왔다, 책이 도착했으니 가져가라고.

 

닭갈비로 저녁을 먹고 바로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발자크의 빌려서 못 읽고 결국 산 책 하나랑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은 반납하고 희망도서 두 권과 <페넬로페> 그리고 발자크의 <루이 랑베르>를 빌렸다. 분명 집 어딘가에 있을 텐데... 도무지 못 찾겠어서.

 

아직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를 읽지 않아서 오디세우스의 귀환에 대해 잘 모른다. 그리고 보니 페넬로페는 오디세우스의 마누라 이름이었던가. 태양의 신의 소를 잡아먹어, 오디세우스의 동료들은 모두 죽고 혼자만 살아서 이타카로 귀환했다지. 그래픽노블의 주인공 브뤼셀에 가족들이 서식하는 페넬로페 역시 시리아 내전의 아비규환 속에서 집으로 귀환한다. 자신이 수술을 집도하다가 죽은 소녀의 유령을 매달고.

 

섬뜩하다고? 뭐 그럴 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의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주변에 죽음의 그림자는 어디에나 있다. 최근에 벌어진 참사만 보더라도 그렇지 않은가. 페넬로페는 시리아에서 4년 만에 돌아왔다. 그동안 십대 소녀 딸 엘렌은 생리를 시작했고, 페넬로페보다 5분 먼저 태어난 언니 마야(미아?)는 자신의 울타리를 지키기 위해 남편의 외도를 외면한다. 그리고 시를 짓는 남편 오토와의 관계도 서먹서먹하기만 하다.

 

가족들의 걱정과 염려에도 불구하는 페넬로페는 자신의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황소고집 같은 뚝심으로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일을 고향에서 이역만리 먼 땅에서 실천하다. 내전으로 산산조각이 난 땅에서 죽어가는 이들을 살리는 일에 전념한다. 인류를 위해 이바지하는 위대한 외과의사는 삶의 모든 영역에서 그렇다고 면제 받는 건 아니라는 말을 작가는 하고 싶었던 걸까.

 


3개월의 휴가 끝물에 크리스마스 시즌이다. 본인은 원하지도 않는 명절을 가족들과 보내는 시늉을 하고, 모두 해산하자 드디어 언니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꺼낸다. 딸 엘렌은 그전에 머라이어 캐리의 유명한 캐롤송에 자신이 하고 싶은 메시지를 담아 엄마에게 송신한다. 남편 오토는... 잘 모르겠다. 지난 십년 동안 떠남과 돌아옴을 반복하는 삶에 대해 그는 과연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뭐 우리네 삶은 그렇게 흘러가는 거겠지. 누군가는 인류를 위해 그런 이바지를 하고, 또 누군가는 도서관에서 저녁 시간을 그래픽노블을 보면서 보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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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1-10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2-11-11 09: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페넬로페 2022-11-11 00: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저 인가요? ㅎㅎ
오뒷세우스가 아닌 페넬로페가 집을 떠나는 내용이군요~~
자신의 대의를 위해 가족은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누구나 자신만의 선택으로 살아가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22-11-11 09:21   좋아요 2 | URL
앗 그렇네요 !!!

오뒷세우스 대신 그래픽노블의
주체가 페넬로페라는 점에서
가치 전복적이지 싶습니다.

가족과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
각하는 인류애/대의를 중시하
는 주인공의 비애가 인상적이
었습니다.

mini74 2022-11-14 17: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가 계속 옷감을 짜듯, 산산이 조각난 나라를 다시 잘 이어붙이는 듯 한 생각도 들어요 ㅎㅎ

레삭매냐 2022-11-14 17:37   좋아요 0 | URL
오오 외과 의사 페넬로페가
내전으로 조각난 나라를 이어
붙이는 주체로도 해석될 수
있겠네요. 대단하십니다.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
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김주경 옮김 / 바람북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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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주중행사가 된 도서관 방문을 해서 발자크의 책들을 빌렸다. 기대하지 않았던 발자크의 <사촌 베트>를 만날 수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프랑스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보니 그래픽노블이 한 권 보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가방에 넣어서 대출했다. 제목은 집에 와서야 비로소 읽었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이라는 작가의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라는 책이었다.

 

그래픽노블의 주인공들은 단출하다. 미리암과 타마르라는 두 딸을 둔 노년의 다비드가 후두안에 걸렸다. 타마르는 이제 고작 9살이다. 전처 줄리아가 서쪽(돌아가셨나?)으로 간 다음에 만난 폴라와 만나 낳은 딸이다. 그리고 사진작가로 다 큰 딸 미리암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길에 만난 남자와 낳은 아이가 루이즈다. 소설의 배경이 독일 베를린이라고 했던가.

 

다비드와 미리암이라는 이름을 보니 아마 이 가족들은 유대계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다비드의 암투병 과정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아직 어린 타마르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21g짜리 영혼을 담기 위해 작은 병을 준비하고, 이웃친구 막스와 함께 아버지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를 미이라로 만들 계획을 짜기도 한다. 당돌하지 않은가. 아이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비드는 마지막으로 타마르를 데리고 항상 가곤 하던 호수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타마르를 풍선에 편지를 매달아 막스에게 보내는 아버지를 지켜보기도 한다. ,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와중에도 다비드의 병환은 깊어가고, 아니 매순간 그가 죽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호수에서 타마르는 인어아가씨를 만나기도 한다. 죽음의 공포가 언제라도 방문할 수 있는 순간에 불쑥 등장한 판타지에 어안이 벙벙했다.

 


사진작가 미리암이 사는 공간들은 후두암, 종양이 전이되어 죽어가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아니 가끔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버지가 이미 죽어 해골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디트 바니스텐달 작가는 상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이 그래픽노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미리암이 다비드의 전신에 퍼진 종양 사진으로 구성된 아버지의 시신과 같이 누워 있는 장면이었다. 자신의 창조자가 맞이할 죽음, 그리고 또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불멸의 사실을 담담하게 알려주는 작가의 의도가 참...

 

11월의 월요일밤에 휘리릭 넘겨 본 이 그래픽노블의 가격이 무려 32,000원이었다. 물론 원작자의 채색을 구현하고, 큰 판형의 책을 제작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것이다. 아마 어지간한 그래픽노블 마니아가 아니라면 선뜻 지갑을 열기 쉽지 않은 그런 비용이 아닐까. 나는 그나마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같은 작가의 책으로 작년에 나온 <페넬로페>가 있는데, 이 책도 빌려서 봐야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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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1-08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32000원 후덜덜한 가격이긴 하네요. 아무래도 컬러에 종이질을 더 좋은 걸 써야 할테니 그런 것이겠지만.
이미지가 굉장히 강렬하네요. 아버지의 시신과 같이 누워있는 장면이라니~ 21g짜리 영혼을 담기 위해 병을 준비하는 아이의 모습이 상상 속에 그려집니다.

레삭매냐 2022-11-08 10:53   좋아요 1 | URL
다른 리뷰들 보니, 개정판으로
나오면서 책값이 무지 뛴
모양이네요 ㅠㅠ

국내 웹툰과는 다른 스타일
의 그래픽노블이라 흥미롭
게 만났습니다.

북프리쿠키 2022-11-08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은 무조건 빌려봅니다!! 후덜 ㅠ

레삭매냐 2022-11-08 10:58   좋아요 1 | URL
가격 때문에라도 그럴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가격이 아주 -

바람돌이 2022-11-08 22: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별 2개인데 레삭매냐님 리뷰를 보면 별 4개는 충분할듯한 느낌? 그래서 저는 볼까 말까 알쏭달쏭??? ^^

레삭매냐 2022-11-09 11:00   좋아요 1 | URL
그런가요 ㅋㅋ

리뷰는 잘 써놓고서 별점은 짜게?

도서관에서 한 번 빌려서 읽어보
셔도 좋으실 것 같습니다. 금방 읽
으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