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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시의 프란체스코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이창실 옮김 / 마음산책 / 2008년 11월
평점 :
품절

일단 어느 한 작가에 빠지게 되면, 덮어 놓고 그 작가의 책부터 사고 본다. 지난달에 아름다운 문장으로 유명한 크리스티앙 보뱅에게 반해 버렸다. 알라딘 동지들이 계속해서 좋다 하길래, 도대체 얼마나 좋길래 하는 마음에 <환희의 인간>을 보기 시작했는데 뻑이 가 버렸다. 그 다음에는 <작은 파티 드레스>를 읽었다. 미치게 좋았다. 여전히 보뱅이 구사하는 문장이 가심을 후벼 파들어오진 않았지만. 어쨌든 좋았다.
비슷한 시기에 <아시시의 프란체스코>도 구해서 병행해서 읽기 시작했다. 한 작가가 쓴 세 권의 책들을 돌려 읽다 보니 집중력히 현저하게 떨어지더라. 세 번째로 다 읽은 이 책은 가톨릭 성인으로 추앙받는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에 대한 이야기다.
지금도 그렇지만 13세기에는 접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의 부재로 신에 대해 잘 알 수가 없었다고 한다. 아니 지금은 세상의 모든 정보들을 원하기만 한다면 바로 접할 수 있지만 여러 제약으로 신에 도달하기가 더 힘들어지지 않았던가. 부유한 직물 상인의 아들로 태어난 프란체스코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프란체스코가 살던 시절은 사제와 군인 그리고 상인의 시대였다. 그는 자신이 원한다면 무엇이라도 될 수가 있었다. 심지어 산산조각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전쟁에 직접 뛰어 들기도 했다.
프란체스코는 전쟁 포로가 되어 투옥되기도 했다. 다마섹으로 가던 길에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던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개심한 것처럼, 우리의 주인공 프란체스코 역시 극적인 변신을 하게 된다. 어느 순간, 이 세상의 속박을 모두 던져 버리고 천상의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걸까.
육신의 아버지 베르나르도레로부터 소송을 당한 아들 프란체스코는 청빈의 성자로 거듭난다. 무언가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것들을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가르침일까. 내가 가진 것을 내려놓지 않고서는 변할 수 없다는 우리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계시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왜 그렇게 우리는 사소한 물질에 연연해하게 되는 걸까. 남들보다 좋은 집에, 좋은 자동차에, 보다 맛있는 것들을 먹는다고 해서 궁극의 진리에 도달하는 건 아니지 않은가. 번잡한 세상을 살면서도 늘 고독하다고 여기게 되는 것도 결국 채울 수 없는 그런 진리의 공허함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어디선가 본 바에 따르면 백년에 한 번씩 프란체스코 같은 이가 세상에 온다면 인류는 구원받을 것이란다. 자본이 모든 것을 삼켜 버리고, 어떤 가치보다도 우선시되는 21세기에 프란체스코가 와서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본다면 어떤 말을 할지 궁금해진다. 그리고 사랑은 결핍이라고 했던가. 사랑이 모든 것을 채워주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것도 잘 안다. 가끔 보뱅 작가가 참 냉소적이라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미치광이와 성인 모두 진리를 말한다. 전자는 자신이 진리를 말하기 때문에 미치지 않았다는 궤변에 도달한다. 미친 사람이 진리를 말한다고? 하긴 어느 사회에서는 진리를 말하는 사람들이 미치광이 취급을 받기도 하지. 성인은 청빈의 사도였던 프란체스코처럼 높고 위대하신 분의 진리를 전하는 대리인일 뿐이다.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 진리 타령을 하면서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이들은 의심해봐야 한다.
동물들의 수호성인이기도 했던 프란체스코를 당나귀에 비유했던가. 내가 보기에 이 당나귀는 우리가 일상에서 수행하는 노동을 상징한다. 우리가 언제 노동 없이 먹고 살 수가 있었던가.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형태의 일터에서 묵묵하게 자신이 가진 노동과 시간을 팔고 그 대가로 금전을 취득한다. 우리가 버는 돈 역시 결핍으로 귀결된다. 아니 부족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그러니 채울 수 없는 결핍과 적당히 타협하고 그렇게 시간을 흘려보낸다. 그 엔딩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 모두가 이미 알고 있다.
철저하게 보뱅 스타일로 구사되는 서사 속에 기대한 특별한 무언가는 보이지 않는다. 과연 내가 이 글을 꼭꼭 씹어 먹고 있는지 아닌지 모른 채, 글의 흐름에 몸을 맡긴 채 그렇게 부유하는 느낌으로 책을 읽었을 뿐. 150쪽이 안 되는 책을 읽는데 보름이나 걸리다니. 내가 세 권의 보뱅 책들을 읽으면서 발굴해낸 나만의 보뱅 독서 키워드는 바로 되새김질이다. 보뱅의 내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한 번만 읽어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는 점. 이런 불편한 독서가 나의 성장을 도와주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