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Vol.2 - 문명의 기둥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2
다니엘 카사나브 그림, 김명주 옮김, 유발 하라리 원작, 다비드 반데르묄렝 각색 / 김영사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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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적으로 역사라는 학문은 해석을 근간으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어느 지점에서 해석하느냐에 따라, 팩트는 다르게 보여지지 않을까. 이번에 유발 하라리 작가의 <사피엔스>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더 강화된 느낌이다.

 

현생 인류 호모 사피엔스의 먹고사니즈므이 디폴트값은 수렵채집이었다. 그들은 광활한 대지의 어머니의 땅에서 나고 자란 것들을 먹고 살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혁명이 발생했다. 물론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폭력을 수반한 기득권 세력을 타파하는 그런 혁명이 아닌 굉장히 순조로운, 하지만 훗날 인류의 역사를 바꾸게 될 그런 혁명이었다. 그것은 바로 농업혁명이었다.

 

만화가는 파우스트밀을 등장시켜, 인류를 속박의 굴레로 몰아가는 파우스트밀의 속삭임을 듣게 해준다. 우리 인간은 수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떨고 있다. 그 시절에는 당장 먹고 사는 일에 집중했다면, 지금은 좀 더 복잡한 상상의 허구가 만들어낸 불안감에 떨고 있다. 내가 애써 마련한 아파트값이 폭락하지나 않는지, 몇푼 더 받겠다고 저축은행에 넣은 예금이 날아가지나 않을지, 노년에 돈이 없어 폐휴지를 모으는 일을 하게 되지나 않을지 기타 등등.

 

이런 모든 두려움의 근원이 되는 출발점이 바로 농업혁명이었다. 인류는 수확량이 많은 밀을 재배하기 시작하면서 곧바로 근심 걱정에 휩싸이게 되었다. 비가 너무 많이 와도, 비가 너무 적게 와도 걱정이었다. 게다가 병충해는 또 어떤가. 비록 생산성으로 미래의 불확실성을 조금 덜기는 했지만 그 댓가는 혹독했다. 평생 노동에 시달리게 된 것이다.

 

유발 하라리 작가는 여전히 수렵채집을 고집하는 원시인들과 최신 유행인 농업혁명에 가담한 이들의 비교를 통해 우리네 삶의 가치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한 고민을 들려준다.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게 올바른 삶인지 여전히 가늠이 되지 않는다. 원시시대 이래 인간이 풀 수 없는 그런 고민이 아닐까 싶다.

 

농업혁명에 수반된 것이 야생동물들의 가축화다. 인류의 벗인 댕댕이가 가장 먼저 가축화가 되었다지. 지금은 댕댕이들이 상전이 되었지만, 인류가 던져주는 먹거리에 길들여진 댕댕이들과의 협업은 아주 성공적이었던 모양이다. 그 다음에는 내가 아주 좋아하는 닭, 치킨에 대한 이야기다.

 

이 부분까지 읽어 보고 나서 마침 뜬 치킨 로드에 대한 기사도 검색해 봤다. 현생 닭의 기원은 동남아에서 살던 적색야계(red jungle fowl)라는 녀석이었다. 가축화의 아주 성공적인 케이스로 지금도 굉장히 효율적으로 인류에게 단백질원으로 공급되고 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 70%의 이상이 가정이 일주일에 한 번은 닭을 먹는다고 한다. 전 세계적으로는 220억 마리 정도가 사육되고 있다고 한다. 물론 야생에서 살 수 있는 평균 수명의 1/50 정도 밖에 살지 못하는 점은 비극이긴 하다. 돼지나 소도 마찬가지 운명이라는 점을 저자는 콕 찝어서 지적한다.

 

농업혁명에는 긍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농업혁명으로 잉여생산이 이루어지고 정주생활이 기본이 되면서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폭력이 발생하게 되었다. 이 부분을 읽으면서는 기술발전과 세계화에 따른 부작용으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강타했던 몇 년 동안의 기억이 떠올랐다. 코로나가 어느 정도 수그러들긴 했지만, 전문가들은 수년 내에 더 쎈 놈들이 올 거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농업혁명으로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지도자와 사제 같이 무위도식하는 계급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높은 생산성을 바탕으로 도시국가와 제국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게 됐다. 이런 스케일이 큰 국가들을 효율적으로 통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수와 양을 기록하는 문제였다. 그 해결책이 바로 문자의 발명이었다. 그렇게 발명한 문자로 시나 신화 그리고 이야기들도 다루게 된 것은 부차적인 필요에 의한 것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관료제 역시 이런 시스템을 부양하기 위한 아주 효율적인 제도였다고 언급한다.

 

국가나 집단의 통치를 담당한 계급들은 저자가 주장하는 이른바 상상의 질서를 만들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자신들의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신의 이름을 빌리기도 했다. 자신들이 만들어낸 시스템을 영원히 지속시키기 위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계급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고 시간을 녹여 정교하게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케이스에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언급되는 것이 바로 인도의 카스트 제도다.

 

21세기 대명천지에 여전히 태어나면서부터 얼토당토않은 야만적인 카스트 제도에 고통 받는 수억의 호모 사피엔스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떤 점에서 부에 따른 차별과 인종주의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지 않나 싶다.

 

인종주의의 대표적 국가인 미국의 경우를 보자. 그들이 그렇게 자랑하는 1776년 독립선언에서 인간은 모두가 평등하다고 선언했지만, 흑인과 여성은 그들이 말하는 인간에서 배제되었다. 독립선언 백년 뒤, 60만 명이 죽은 내전까지 치르면서 노예해방을 선포했지만 흑인들의 삶은 여전히 고단했다. 비슷한 형편의 백인 가정에 비해 흑인가정의 진학률을 형편없이 낮았다. 그리고 사이비 생물학까지 동원한 백인들의 프로파간다는 집요하게 진행됐다. 학업을 통한 성공의 사다리 오르기는 흑인들에게 쉽지 않은 태스크였다. 그러는 백인우월주의자들이 퍼뜨린 혐오의 메시지는 계속해서 전파되면서 흑인차별의 철옹성은 굳어져 갔다. 젠더 이슈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자는 바로 이런 허구 위에 지어진 상상의 질서와 고루한 가부장 시스템을 철저하게 타파해야 한다고 주문한다. 농업혁명 같이 획기적인 역사의 발전은 상당 부분 우연에 근거해서 오랜 시간을 두고 진행되었다고 말한다. 누가 어떤 의도로 만들었는지 모를 상상의 질서 해체는 보다 더 복잡한 미션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자각한 민중에 의해 지난 백 년 동안, 말도 안 되는 상상의 질서는 조금씩 해체의 수순을 밟고 있다. 물론 미국에서 49년 동안 존속되어온 낙태법 폐기 같은 반동적 움직임도 있었지만, 이후 선거에서 깨어 있는 시민들은 이런 반동에 대해 브레이크를 걸었다. 언제나 그렇듯 역사는 퇴행과 진보의 조합이 아니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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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2-12 13: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사피엔스를 얼마 전 다시 읽었는데 그래픽노블이라. 흥미롭습니다^^ 그림은 어떤가요? 덕분에 더 궁금해졌습니다. 그래픽노블이 점점 더 많이 나오는 듯 싶네요. 사피엔스는 고전까지는 아니지만 스테디셀러인데 이런 책들이 그래픽노블로 나오는 것을 보면 새로운 독자층을 유입시키려는 목적도 있는 것 같습니다.

레삭매냐 2022-12-13 08:56   좋아요 0 | URL
전 아직 사피엔스는 책으로
만나 보지 못해서 이렇게
그래픽 노블로 보고 있답니다.

그림은 제가 유럽쪽 작가들의
그림체를 좋아해서 그런진 몰
라도 만족했습니다.

원소스멀티유즈의 전형이라고
나 할까요. 공감하는 바입니다.
 
곰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한 유명한 사건
디노 부차티 지음, 이현경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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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나올까 고대하던 디노 부차티의 <곰들이 시칠리아>가 드디어 출간됐다. 2022년 마지막 달에 최대 기대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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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노
제럴딘 매코크런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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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 인천에 갔다가 방구석에서 쌓여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낡아가는 책들 정리를 좀 했다. 정리라고 부르고 걸레로 먼지를 닦고, 다시 스택하는 수준이었다. 그러다 발견한 책이 제럴딘 머코크런이란 작가의 <시라노>였다. 내가 시라노는 좀 알지, 그런데 이 책을 읽은 기억은 도통 나지 않는다. 12년 전, 한창 책 읽을 시절에 어디선가 수배한 책이라는 것 정도. 그날 차에 실어서 집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어제 13권으로 끝날 11월 독서의 말미에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 대한 소설을 읽었다. 단숨에. 초반에는 정말 유쾌하게 시작했다. , 그전에 절망적 사랑에 빠진 이들에게라는 저자의 머리말이 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말이지.

 

연극의 주인공으로만 알았던 가스코뉴 출신 시인검객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실존 인물이었다. 게다가 국왕 근위대 출신으로 검술에 있어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그런 용감무쌍한 가스코뉴 전사였다. 자존감도 뛰어나서 누구에게 신세 지고 사는 걸, 차라리 그 자리에 칼을 맞고 죽는 게 낫다고 생각한 그런 검사가 아니었을까. 여기서 검사는 요즘 공화국에서 머슴이 아닌 주인 행세를 하는 그 검사가 아니라 칼잡이 검사다. 그리고 보니 둘 다 비슷하긴 하네.

 

시라노는 게다가 글도 잘 쓴다. 아니 본업이 검객이 아니라 시인 혹은 작가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다.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그의 단점은 바로 무지막지하게 큰 코였다. 큰 코 때문에 도저히 미남자라고 부를 수 없는 행색이었지. 그런 콤플렉스 때문에 모든 조건을 다 갖춘 시라노는 선뜻 연애전선에 나서지 못한다. 대신 연애 조작에 나선다.

 

대상은? 팔촌누이 록산 로비노였다. 게다가 그녀는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이건 완전 <미녀와 야수> 17세기 버전이 아닌가. 게다가 우리의 록산은 다른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으니, 근위대 신참내기 크리스티앙 드 뇌비예트라는 작자였다. 모르긴 몰라도, 추남자 시라노의 대척점에 서 있는 캐릭터가 되기 위해 그는 조각 같은 미모를 가진 상남자가 아니었을까 싶다. 시라노의 속도 모르고 외간남자와 사랑에 빠진 록산은 팔촌오빠에게 자신이 사랑하는 크리스티앙을 가스코뉴 심술쟁이들의 갈굼으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다.

 

바로 이런 게 바로 사랑의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일대기를 희곡으로 만든 에드몽 로스탕은 일찍이 이런 사랑의 엇갈리는 쌍곡선이 주는 비탄과 쾌락의 즐거움을 익히 알고 있지 않았을까. 이런 원래 스토리의 고갱이를 유지하면서 변주를 가미한 작가의 실력에 다시 한 번 경의를 표한다.

 

모두가 알다시피 무식한 남자 크리스티앙을 대신해서 문학천재 시라노가 자신의 뜨거운 연애 감정을 담은 편지로 록산의 마음을 사로잡아 버렸다. 나중에 드러나게 되지만, 록산이 사랑한 건 크리스티앙의 껍데기가 아닌 바로 그 심장이자 정수였던 말과 글들이었던 것이다. 심각한 자기혐오와 콤플렉스에 빠진 시라노가 그걸 알 리가 있나 그래.

 

자 이쯤에서 빌런 한 명 쯤 등장하는 것도 극의 전개를 위해 아주 즐거운 일이 될 것이다. 작가는 여기에 권력과 지위 그리고 재산 무엇 하나 빠지지 않게 완비한 빌런 드 기슈 백작을 배치한다. 다른 두 남자와 마찬가지로 드 기슈 백작 역시 록산을 사랑해 마지않는다. 다만 다른 두 남자가 순수한 마음으로 들이댔다면, 드 기슈는 오로지 아름다운 여성 록산을 트로피처럼 생각했다는 점이지.

 

그런데 나는 또 이 지점에서 드 기슈 백작 역시 엇갈리는 사랑의 희생물이 아니었나 싶다. 주인공 시라노에게 몰입한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 그를 위한 신원은 굳이 필요 없을 것 같다. 드 기슈 백작 역시 자신만의 방식으로 마드무아젤 로비노를 열렬하게 사랑했다. 문제는 그 사랑이 일방통행이었다는 거지만. 따지고 보면 시라노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록산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연애 조작까지 마다하지 않으면서 사랑하지 않았던가. 내가 보았을 적에 시라노와 드 기슈의 사랑은 다를 게 없지 않나 싶다.

 

<시라노>는 과연 영화나 연극으로 만들 정도로 흥미진진한 다수의 요소들을 품고 있다. 우선 못생긴 야수 같은 시인검객이 사랑하는 록산을 위해 모든 걸 다 바친 사랑을 한다는 로맨스물로부터 시작해서, 시라노-록산-크리스티앙-드 기슈로 이어지는 사각관계 그리고 30년 전쟁의 복판에서 벌어진 아라스 포위전(1640)과 서글픈 결말에 이르기까지 거의 완벽한 서사가 아닐 수 없다.

 

대략 소설의 시대적 배경이 1640년경이라고 가정했을 때, 진짜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나이는 21세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36세에 죽었다고 한다. 아라스 공방전에서 전사한 남편 크리스티앙을 추모하며 15년의 세월을 보낸 록산 앞에서 죽어가는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의 사랑을 고백한 시라노.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희비극의 서사에 그만 눈물샘이 주책없이 터지고 말았다. 예나 지금이나 그저 이런 신파 스타일의 이야기들이야말로 약발이 주효하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작년에 영화로도 다시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구해서 한 번 봐야지 싶다. 그리고 여주의 이름 록산을 볼 때마다, 폴리스 시절 스팅이 텁텁한 목소리로 샤우팅하던 <록산>의 가사가 떠올랐다. 그리고 우리 미쿡 친구 브랜던이가 초등학교 선생님들과 함께 한 노래방에서 이 노래를 불러서 동행한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는 에피소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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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2-12-01 18: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윽, 오별! 이 장편소설이 에드몽 로스탕의 원전보다 더 좋을 수도 있다, 이것이죠? 오.....
작곡가 프랑코 알파노 - 푸치니 유작 <투란도트> 종결부를 작곡한 사람 - 의 오페라 <베르쥐라의 시라노>도 무쟈게 좋습니다만, 그것 조차도 제가 읽기엔 로스탕 원작 보다는 못했던 거 같은데 아이고, 그동안 세월이 많이 흘러서 잘 기억이 나지 않는군요. 오페라에선 사다리 아래에서 크리스탕을 대신해 록산느를 위해 노래한 코 큰 시라노의 세레나데가 죽여줬는데요. 흑흑.. 록산느가 바보예요. 코가 크면 좋다는데, 흑흑흑..... 삼종오빠의 순정도, 큰 코도 몰라주고....흑흑.....

레삭매냐 2022-12-01 19:24   좋아요 2 | URL
제가 원작을 읽지 않아서 리메이크
에 더 정신이 팔린 게 아닐까 싶습
니다. 리메이크를 읽고 나니 다시
원전이 읽고 싶어졌습니다.

로옥새앤~ 바보 맞습니다. 좋아하는
남자들이 셋이나 되는데...

라로 2022-12-01 18: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멋진 책을 소개해 주셨군요!! 전자책 알림 신청했어요!!^^;;
늘 전자책 알림 신청만 하는 라로씨.ㅎㅎㅎㅎ

레삭매냐 2022-12-01 19:25   좋아요 1 | URL
되게 옛날 책인데, 전자책
으로 나와 있는지 모르겠네요.

171쪽이라 금방 쉭쉭 읽으실
수 있을겁니다. 알림 신청 완완쉐!

페넬로페 2022-12-01 19: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시라노를 뮤지컬로 봤어요.
내용이 넘 재미있고 뮤지컬 넘버도 좋아서 완전 빠져버렸거든요.
뮤지컬에서는 시라노를 생긴 것 빼고 다른 모든 걸 완벽하게 해 놨어요.
그래서 이런 생각도 했었어요.
시라노같은 사람으로
끝까지 이 인생을 꿋꿋하게 살아 내리라! ㅋㅋㅋ

레삭매냐 2022-12-02 09:06   좋아요 1 | URL
작품의 무한한 변용이자
원소스멀티유즈의 전범이
<시라노>가 아닐까 싶습
니다.

시라노 뮤지컬도 재미질
것 같네요.

자존감 넘치는 시라노의
좌충우돌! 단 사랑 앞에선
고저... 파이팅~입니다.

mini74 2022-12-01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옛날에 제라드 드 빠리디유? 의 시라노 봤던 기억나요. 큰 코에 딱 맞지요 ㅎㅎ

레삭매냐 2022-12-02 09:11   좋아요 0 | URL
제라르 드빠르디유가 예전
에는 프랑스 국민배우라
불렸는데, 부유세 때문에
러시아 국적 취득한 다음
에는 바로 그 타이틀이 사
라지고 글로벌 배신자로
등극했더라는.

돈 앞에는 장사가 없는
모양입니다.

큰 코 시라노로는 제격이
지요.
 
어둠 속의 사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12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이동렬 옮김 / 민음사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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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달은 나에게 발자크의 달로 기억될 것이다. 이달에만 모두 6권의 발자크 책들을 읽었다. ,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도 계속해서 읽고 있으며 어제 <어둠 속의 사건>을 다 읽고 나서 바로 <골짜기의 백합>을 읽기 시작했다. 그동안 쟁여둔 발자크의 책이 있어 다행이다. 그렇지 역시 책은 사서 읽는 게 아니라 가지고 있는 책들을 찾아서 읽는 거지. 우리 책쟁이들의 즐거움이 아닌가.

 

나는 개인적으로 발자크가 시대의 관찰자였다고 생각한다. 대혁명기와 공포정치, 나폴레옹의 제정, 왕정복고와 다시 혁명이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격동의 시절과 프랑스 사회에 대해 그 누구보다 예리한 필치로 그려낸 이가 바로 발자크다. 물론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리얼리즘을 빙자한 장황함에 다수 독자들을 나가떨어지기 일쑤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그런 고비(?)를 넘기면 바로 발자크가 전수하는 무궁무진한 소설적 즐거움의 정수를 만날 수 있다. 그리고 장황함의 스택이 쌓여, 재미까지 더해지니 극락이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소설은 누군가를 노리는 공드르빌 영지의 관리인 미쉬가 소총으로 무장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그리고 시대는 제국의 여명기였다고 발자크는 기술한다. 그러니까 나폴레옹이 이제 막 공화정 정부를 무너뜨리고 독재정치를 시작할 판이었다. 소설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은 미쉬가 누구인가? 공포정치 시절 사나운 자코뱅당원이자 이른바 유다로 불린 사람이 아니었던가. 미쉬는 공화정 시절, 처형된 자신들의 주인들의 영지를 사들이려고 한다. 그의 대척점에는 대리인 마리옹과 공증인 그레뱅을 조종하는 상원 의원 말랭이 있다.

 

사실 미쉬는 레알자코뱅당원이 아니라 자신의 주인이었던 드 시뫼즈 가문을 다시 일으키기 위해 위장한 왕정주의자였다. 모든 이들이 귀족들이 망명한 뒤, 무주공산이 된 국유 재산을 집어 삼키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던 시절에 남은 강호의 의인 같은 존재였다. 물론 혁명가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보수반동의 전형일 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발자크가 뼛속까지 왕정주의자였다는 점과 자신의 성 앞에 귀족을 상징하는 “de”를 달기 위해 평생 노력했다는 사실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한편, 드 시뫼즈 집안의 쌍둥이 형제 마리폴과 폴마리 그리고 드 도트세르 집안의 로베르와 아드리앵 4총사는 자신들의 철천지원수라고 규정한 당시 최고 권력자 나폴레옹 암살에 나섰다. 물론 시도도 해보지 못하고 음모는 실패했고, 이 사실을 안 악명 높은 경찰총수 조제프 푸셰가 파견한 전직 올빼미당원 코랑탱과 페라드였다.

 

이렇게 노련하고 무시무시한 스파이들을 상대하는 것이 바로 23세의 여걸 로랑스 드 생시뉴와 미쉬 그리고 그들에 비해 모자라는 판단력을 지닌 귀족 청년 4총사였다. 노련한 미쉬와 로랑스의 활약으로 음모가들이 공드르빌 영지의 은신처에 숨는데 성공한다. <어둠 속의 사건>은 추리소설과 정치소설 두 마리 토끼라는 주제를 매섭게 사냥한다.

 

트루아 부근의 공드르빌 영지에서 펼쳐지는 숨 막히는 추격전이 1부에서 다루어졌다면, 2부에서는 1부에서 로랑스에게 치욕을 당한 코랑탱의 역습이 이루어진다. 트루아의 귀족 청년들은 애써 파리에서 그들을 찾아온 친척인 노신사 드 샤르주뵈프 후작의 충고를 무시한다. 나폴레옹의 사면과 망명자 귀국 허용은 그저 일시적이라는 점을 샤르주뵈프 후작은 청년 귀족들에게 주지시킨다. 노신사는 그들의 정치적 적들이 호시탐탐 그들에 대한 복수의 타이밍을 노리고 있기 때문에 재산을 정리하고 다른 나라로 망명할 것을 주문했다. 한 순간이라도 방심하는 순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고 엄중하게 경고한다. 하지만, 젊음과 자신감 혹은 오만함으로 무장한 그들은 세상사에 정통한 노신사의 신중한 충고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 장면이 후에 이루어질 비극의 전조가 아니었을까.

 

그들과 심리적으로 정치적 동지였던 발자크는 로랑스-마리폴-폴마리-로베르 그리고 아드리앵들이 지닌 정신 승리에 대해서도 통렬한 비판을 마다하지 않는다. 이미 대혁명을 통해 재산과 지위를 한 번 모두 잃었던 청년 귀족들의 비타협적인 태도가 문제였다고 발자크는 말한다. 그들이 원하는 부르봉 왕가의 복귀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실력이 있어야 했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전 유럽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는 마당에 국내에서 그런 무력 지원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그들의 세상이 오기 위해서는 나폴레옹이 외국과의 전쟁에서 패해야만 했다. 역설적인 상황이 아닌가.

 

그들의 바람과는 달리 나폴레옹은 그랑 아르메(프랑스 대육군)를 이끌고, 비록 트라팔가 해전에서 프랑스-스페인 연합함대가 영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하긴 했지만, 아우스터리츠와 예나 등지에서 연전연승하면서 그야말로 제국의 수장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하고 있는 중이었다. 귀족 청년들 가운데 특히 로랑스는 나폴레옹을 같은 하늘을 지고 살 수 없는 그런 철천지원수로 생각했다. 소설의 전개와 더불어 이런 정치적 상황에 대한 변주가 개인적으로 상당히 마음에 들었다.

 

다음은 마술사 발자크가 구사하는 추리소설 분위기를 품은 서사가 등장할 차례다. 귀족 청년들이 혁명기에 숨겨둔 백만 프랑의 자금을 공드르빌 영지 부근에서 찾는 동안, 상원 의원 말랭이 복면을 뒤집어 쓴 5인조에게 납치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연히 당국에서는 공드르빌 귀족청년 사총사가 범인일 거라고 단정 짓고, 그들을 체포해서 기소한다.

 

그전에 잠시 평화가 온 사이에는 발자크식 로맨스물이 상연되기도 한다. 막대한 재산과 백작 지위까지 지닌 로랑스 드 생시뉴의 갈팡질팡 배우자 선택의 여로가 전개된다. 시뫼즈 집안 쌍둥이들은 저들끼리 서로 로랑스의 남편이 되어야 한다고 갈등한다. 로베르는 중세남자의 전형으로 일단 경쟁에서 배제됐다. 그리고 곁다리에서 그저 자신도 그 경쟁에 끼고 싶어 하는 남자 아드리앵의 서글픈 시선까지. 그렇다면 발자크는 정치, 추리 그리고 로맨스 물까지 <어둠 속의 사건>에 모두 때려 넣고 싶었단 말인가.

 

말랭 납치사건으로 피의자들이 재판을 받게 되는 장면에서는 법정드라마가 소설의 분위기가 바뀐다. 아 정녕 발자크는 천재란 말인가. 젊은 친척들이 무고하게 납치와 감금죄로 사형을 당하거나 수십 년에 달하는 징역형을 받을 위기에 처하자, 샤르주뵈프 후작이 다시 등장한다. 이번에는 유능한 보르댕과 드 그랑빌(데르빌?)이라는 변호사로 법정에서 냉정한 사건 담당 검사를 상대로 치열한 논리 싸움을 전개한다.

 

개인적으로 이 부분(법정드라마)이 소설의 압권이 아니었나 싶다. 비록 독재자이긴 했지만 나폴레옹은 근대법의 효시가 되는 법을 제정해서 법치의 근간을 마련했다. 나폴레옹 제정 하의 프랑스 신민들은 모두 이 법에 따라 법정에서 유무죄를 다투었다. 특히 미쉬 변호에 전력한 드 그랑빌 변호사가 모든 증거를 바탕으로 해서 무고한 사냥터지기를 위해 방어논리를 구사하는 장면은, 마치 당시 법정에서 보고 들은 발자크가 바로 현장 중계를 해주고 있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귀족청년들과 미쉬에 대해 적대적인 배심원단의 마음을 돌려놓고, 드디어 유리한 판결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한 순간에 소설의 거장은 다시 한 번 상황을 역전시킨다. 공드르빌 은신처에 갇혀 있던 말랭 상원 의원이 풀려난 것이다. 그리고 음모가들에 의해 조작된 가짜 편지에 속은 미쉬의 아내 마르트가 말랭에게 생존에 필요한 음식을 공급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귀족 청년들과 미쉬에게 상대적으로 유리하게 전개되던 재판을 급반전하게 된다.

 

되돌릴 수 없는 판결이 나자, 마지막 남은 방법인 황제에게 사면 요청을 하러 샤르주뵈프 후작과 로랑스는 전쟁이 한창이던 프로이센의 예나까지 원정에 나선다. 과연 이런 스케일 큰 소설의 전개를 구상할 수 있다는 점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작은 시골 마을 트루아에서 시작된 이야기가, 파리에서의 법정드라마를 거쳐 프로이센에서 제국의 운명을 끝장낼 수도 있었던 전역에까지 도달하게 이끌어간 발자크 서사의 힘에 대해 다시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전에 나폴레옹은 이미 한 번 사면 받은 자들이 다시 한 번, 정부를 상대로 이런 범죄를 저질렀다는 점에 자신의 선의가 우롱당했다고 생각하고 신속한 재판을 주문했다.

 

왕정이 복원된 결말에서, 그동안 진행되었던 방대한 이야기들이 조용하게 마무리된다.

 

지금까지 만난 9권의 발자크 작품 중에서 <어둠 속의 사건>이 가장 스케일이 크고 방대한 서사였다. 그만큼 생각할 거리도 많았다. 모든 것이 불투명했던 격동의 시절, 살아남기 위해 팔색조 같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해야 했던 인간 군상들에 대한 스케치는 과연 발자크를 필적한 만한 작가가 없지 않을까 싶다. 왕정주의자들의 망명과 복귀 그리고 재산 싸움, 젊은 청춘 사이에 벌어지는 연애, 치밀한 논리 싸움이 펼쳐지는 법정드라마 그리고 국가의 존망을 건 전쟁까지 과연 하나의 소설이 이 모든 걸 다 품을 수 있을까 싶은 걸 발자크는 해냈다. 이러니 발자크를 읽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다. 다시 한 번, 페르 라셰즈에서 만난 미국 아줌마의 발자크 예찬이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다음 타자로, 발자크 최고의 연애소설이라는 <골짜기의 백합>을 바로 읽는다. 발자크와 함께 해서 너무 즐거웠던 11월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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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nca 2022-11-30 12: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거 안 읽어봤는데 꼭 읽어봐야겠네요. 아직 <골짜기의 백합>을 안 읽으셨다니 부럽습니다. 발자크 정말 천재죠. 시간이 갈수록 발자크 소설들 장면들이 정말 리얼리티가 대단하구나 싶어요.

레삭매냐 2022-11-30 13:10   좋아요 1 | URL
지금 열심히 골짜기 읽고
있는데, 발자크 자신의 유년
시절에 대한 자전적 이야기
라는 생각이 팍팍 들었습니다.

언급해 주신 대로 과연 리얼
리티의 대가라고 생각합니다.

coolcat329 2022-11-30 12: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일 년에 여섯 권도 힘든데 한 달 동안 여섯 권!
저도 이 책 있는데 올 해 읽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저 별다섯이라니 설레입니다.

레삭매냐 2022-11-30 13:13   좋아요 1 | URL
저도 지난 여름에 사서
한 겨울에 읽었네요 ^^

6권 중에 <곱세트> <미지의
걸작> <샤베르 대령>은 얇
아서 금방 읽었답니다.

쿨캇트님의 발자크 연내 읽기
를 응원하는 바입니다.

새파랑 2022-11-30 12: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역시 발자크하면 레삭매냐님~!! 요 책 표지가 마음에 안들었는데 리뷰 보니 완전 극찬이군요 ~!!

역시 책은 있는 책 중에서 골라 읽는거라 생각합니다 ^^

레삭매냐 2022-11-30 13:16   좋아요 2 | URL
표지에 대해서는 저도
공감하는 바입니다.

너무 다양한 이야기가
등장하는 바람에 집중
하기가 쉽지 않았지만
다 읽고 나니 역시 발
자쿠 생각이 절로 드네요.

책은 가지고 있는 책 중에
서 찾고, 골라서 읽는거다!
공감합니다.

거리의화가 2022-11-30 15: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번 한달은 발자크로 꽉 채우셨군요! 덕분에 저도 발자크에 관심이 생겼답니다. 저 같은 분들이 많을 듯~ㅎㅎㅎ 저는 무엇보다 발자크 평전은 언제고 읽어볼 생각이에요^^

레삭매냐 2022-11-30 15:38   좋아요 1 | URL
저도 발자크 평전 읽으면서
동시에 책에 나온 다른 책
들을 읽었거든요.

정말 발자쿠 작가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평전 자체도 대단한 작품이
지 싶습니다.

발자쿠 완쉐이 완완쉐이!!!

mini74 2022-11-30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발자크와 함께 하는 11월이셨군요. 매냐님 글만 읽어도 대하소설 느낌 납니다. 츠바이크 발자크평전도 이 책도 읽고 싶어집니다. *^^*

레삭매냐 2022-11-30 15:39   좋아요 1 | URL
12년 전에 꼴랑 <나귀 가죽>
이라 <고리오 영감> 읽고 나서
한참 있다가 몰아치기로 읽고
있네요.

못 다 읽은 책들 읽고 나면
다시 옛날에 읽어본 책들을
만나 보고자 합니다. 그게 고
전을 대하는 책쟁이의 태도
라고 생각합니다.

라로 2022-11-30 17: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발자크 책을 읽으시는 매냐님!!!@@
발자크의 책은 매냐님의 리뷰들을 읽고 선택할 수 있으니
좋다는 얍삽한 생각을 하고 있는.. ^^;;

레삭매냐 2022-11-30 17:41   좋아요 1 | URL
라로님은 발자쿠 체리 피커 ~~~

한국에 나온 모든 발자쿠
책들을 읽어 보겠다는 야심
을 불태워 볼랍니다.
 
원청 - 잃어버린 도시
위화 지음, 문현선 옮김 / 푸른숲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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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만에 위화 작가의 소설을 만났다. 제목은 <원청>이다. 장소는 남녘의 어딘가로 소설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린샹푸의 도망간 아내 샤오메이가 사는 곳으로 추정된다.

 

출발은 시진이라는 곳에 새롭게 둥지를 튼 목수 린샹푸의 파란만장한 과거를 들추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어려서 조실부모한 린샹푸는 어려서부터 목수일을 좋아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차례로 세상을 떠나신 뒤에, 실력 있는 목수 스승들에게 기술을 배웠다. 대대로 수조기와 참조기 금괴를 모아온 지주 집안 출신의 린샹푸가 결혼할 시기가 되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아 어느새 24살이 되었다. 그리고 그 때 아창과 샤오메이 남매(?)가 나타났다.

 

아창은 대처로 떠나고 남은 샤오메이와 린샹푸는 부부의 연을 맺게 된다. 그들이 과연 잘 살았을까? 아니다. 샤오메이는 린샹푸 집안 대대로 모아온 수조기, 참조기 금괴를 들고튀었다. 어디로? 아무도 모른다. 그리고 왜 린샹푸를 떠났는지에 대해서도. 그러다 어느 날 아이를 배고 린샹푸에게로 돌아온다. 자신의 혈육을 품은 샤오메이를 내칠 수 없었던 린샹푸는 그녀를 다시 받아들인다. 그리고 딸 린바이자가 태어나고, 그들의 행복은 얼마 가지 않았다. 샤오메이는 다시 집을 나갔다. 이번에는 수조기, 참조기를 가지고 가지 않았다.

 

그저 그녀가 남쪽 원청출신이라는 말만 듣고, 젖먹이 린바이자를 데리고 재산을 정리하고 나머지는 집안의 오랜 집사 톈다에게 부탁하고 린샹푸는 정처 없이 도망간 와이프를 찾아 나선다. 그리고 원청 부근이라고 생각한 시진에 새롭게 정착하는 린샹푸. 시진에서 사람 좋은 천융량을 만나, 거의 한 가족같이 살게 된다. 특유의 목공 기술을 발휘해서 천융량을 조수로 삼아 동업을 시작한다. 그렇게 12년이 지나가 버렸다.

 

그동안 청나라는 망하고 민국이 들어섰다. 세상은 어수선했다. 북양군벌과 국민혁명군이 전투가 벌어지고, 패잔병들이 백성들을 보호하기는커녕 약탈하기 일쑤였다. 시대가 어수선하니 비적과 토비들이 출몰하기 시작했다. 분열의 시기, 중국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혼란상에 대한 위화의 남다른 스케치가 빛을 발하는 장면이었다. 시진의 상인회장 구이민네 아들과 린바이자의 약혼식날 시진에 잠입한 비적들이 바이자를 인질로 잡아갔다. 이에 천융량의 부인인 리메이롄은 자신의 장남 천야오우에게 토비들에게 가서 자신이 바이자를 대신하겠다고 말하라고 시킨다. 오직 돈에 눈이 먼 토비들은 바이자를 풀어주고, 천야오우를 인질로 잡아갔다.

 

야만의 시대에 대한 위화 작가의 묘사는 서글프기 짝이 없었다. 국민혁명군에게 패배해서 시진으로 다가오는 북양군벌 일당을 걱정한 2만 명에 달하는 시진 사람들은 피난길에 나선다. 대나무 뗏목을 만들어서 도망가려다 숱한 사람들이 엄동설한의 차가운 물속에 수장된다. 결국 구이민은 정든 고향과 재산 그리고 집을 버리고 도망갈 게 아니라 패주 중인 북양군벌의 여단장과 거래에 나서서 시진 사람들의 생명과 재산을 지키기로 결정한다. 그 대가는 천벌에 달하는 패잔병들의 겨울 동복과 은화 6만 냥의 군자금이었다.

 

한편, 비적 떼에게 인질로 잡혀간 천야오우에게 벌어진 일들은 야만의 시대에 대한 위화식 증언이 아닐까 싶다. 사로잡은 인질에게서 한 푼이라도 더 돈을 뜯어내기 위해 비적들은 악랄한 고문과 매질도 서슴지 않았다. 비인간적 대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돈이 없는 인질들은 가치가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서 총으로 쏴 죽여 버렸다. 이런 천신만고 끝에 천야오우는 풀려나 집으로 돌아온다.

 

천야오우와 다른 인질들은 1차 인질 석방 작전이 실패하는 바람에 모두 토비들에게 귀를 잘렸다. 귀가 없자 그들은 삶에서 균형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건 마치 청나라가 망한 뒤, 국가의 나갈 방향을 잡지 못하고 좌충우돌하던 민국 초기 시절에 대한 위화 작가 스타일의 비유가 아닐까 싶다.

 

그 뒤에도 천야오우와 린바이자의 스캔들 그리고 장도끼가 이끄는 토비들이 시진을 공략하는 그야말로 파란만장 스토리들이 파도처럼 밀려든다. 피 끓는 청춘남녀들의 로맨스야 그렇다 치고, 이미 토비들에게 한 번 호되게 당한 시진에서는 기존의 인질 22명 가운데 19명의 외귀군을 주축으로 한 민병단이 조직되어 100여명에 달하는 토비군을 상대하게 된다. 단장 주보충을 비롯한 민병단원들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악랄한 토비군들에게 민병단원들이 거의 전멸할 위기에 각성한 시진 사람들의 가세로 간신히 낙성의 위기를 모면하게 된다. 가까운 미래에 다가올 민중혁명에 대한 예고편인지도 모르겠다.

 

야만의 시대를 대변하는 토비들의 만행에 대한 묘사와 무자비한 토비들의 총탄에 민병단원들이 차례로 죽어 가는 비장한 장면이 대비되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인질극이라는 만행을 경험한 시진 사람들이 앞 다투어 총기를 사들여 무장에 나서는 장면에서는 폭력의 악순환이 도래할 것이라는 점을 주지시키기도 했다.

 

<원청>에서 다루는 청조말기 그리고 민국 초기에 이르는 난세에 대한 서사의 근본은 비극이다. 농민으로 평범하게 살 수가 없어 토비가 되었다는 빌런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 그렇다고 그들의 무자비한 폭력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피로 피를 씻는 복수의 끝에 기다리는 운명은 무엇이었을까. 결국 최고 악당 장도끼가 심판을 받지만, 통쾌한 기분이 들진 않았다. 엔딩에서 위화 작가는 다루는 서사의 저글링에 감정의 진동이 걷잡을 수 없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

 

그 다음에 따라붙는 이야기는 처음부터 궁금했던 샤오메이의 과거에 대한 그리고 그후의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애프터서비스다. 다 읽고 나서 생각해 보니 워낙 린샹푸의 일대기에 집중하다 보니, 이 부분에 대해서는 잊고 있었다. 사실 작가의 부언이 없다고 해도 아쉽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냥 미스터리로 남겨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을까. 중요한 인물인 린바이자 역시 상하이로 떠나보내고 전체 플롯에서 삭제해 버린 작가의 스타일도 확실히 과감했다.

 

사회주의도 그렇다고 자본주의도 아닌 그런 어정쩡한 현재의 모습보다 강호의 의리와 기개가 살아 있던 백여 년 전 그네들의 삶이 더 살갑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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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이스 2022-11-29 13: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위화작가는 <허삼관 매혈기>와 <인생>을 읽고 좋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책도 읽고 싶네요.
<형제>,<제 7일>도 읽구요^^;;

레삭매냐 2022-11-29 13:58   좋아요 2 | URL
저도 위화 작가의 팬인가 봅니다.

언급해 주신 책들 모두 읽었네요 ^^

그렇게혜윰 2022-11-28 22:5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에세이밖에 못 읽었는데 에세이가 좋아서 소설은 늘 위시입니다...ㅋㅋㅋ

레삭매냐 2022-11-29 13:59   좋아요 2 | URL
오오 위화 선생의 에세이
들도 있었군요. 전 주로
소설로 위화 선생을 만나
서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