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수의 연필 일루저니스트 illusionist 세계의 작가 26
마누엘 리바스 지음, 정창 옮김 / 들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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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인류 역사에 남긴 두 번의 생채기 중의 하나라는 에스파냐 내전을 다룬 소설이다. 예전에 아주 새로운 작가들을 소개하는 들녘의 일루저니스트의 팬이었는데 왜 이 소설의 존재는 몰랐을까. 이 책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같은 시리즈에 속한 에펠리 하우오파의 <엉덩이에 입맞춤을>도 빌려서 먼저 읽었다. 묵직한 내용 때문인지 읽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아니 한눈을 팔았다는 게 더 솔직한 말이겠지.

 

에스파냐에서도 오지 중의 오지라는 갈리시아 지방 출신의 마누엘 리바스는 전후 세대로 아마도 구전되는 전설에 가까운 이야기들로부터 이 소설의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다. 때로는 현실이 소설보다 더 소설 같더라는 이야기는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그만큼 현실 세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사건사고들은 버라이어티하고 예상을 뛰어넘는다.

 

1936717일 국가주의자들이 스페인령 모로코에서 반란을 일으켰다. 같은해 216, 인민전선이 총선에서 승리했고, 공화파 정부가 들어섰다. 독재자 프랑코와 군부를 중심으로 한 국가주의자들은 같은 파시스트들인 이탈리아의 무솔리니와 독일의 히틀러의 전폭적인 군사지원 아래 공화파들을 거점을 차례로 공략했다. 바르셀로나와 마드리드가 차례로 함락당하고 193941일 공화파의 마지막 저항거점이었던 톨레도가 항복하면서 내전은 프랑코파의 승리로 귀결되었다.

 

내전의 최전선에서 국가주의자들과 공화파가 매섭게 맞붙었다면, 후방에서도 전방 못지않은 전투가 벌어졌다. 국가주의자들과 팔랑헤 당원으로 구성된 민병대원들은 공화파 인사, 사회주의자와 불온세력을 대거 체포해서 포로로 잡았다. 불법구금과 처형이 만연했다. 중세 종교재판 이래, 다시 한 번 에스파냐에 무법천지가 도래한 것이다.

 

<목수의 연필>에는 모두 세 명의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첫 두 인물들은 바로 다니엘 다 바르카 의사와 그의 연인 마리사 마요다. 그리고 이 둘보다 더 중요한 캐릭터라고 내가 생각하는 전직 군인 출신 간수 에르발이다. 다 바르카와 마리사가 지식인 계급과 부르주아 계급을 대변한다면, 에르발은 프롤레타리아 계급이자 국가주의자 진영의 대표선수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농촌 출신 에르발의 계급을 본다면 당연히 반대편에 서야 하겠지만, 그는 다른 선택을 했다. 그리고 그는 포로들을 산책시키는 일을 서슴지 않았다. 여기서 산책은 포로들의 신속한 불법 처형을 의미했다. 문명 사회의 기준인 기소나 재판 따위는 절차는 필요 없었다. 프랑코에 반대하는 인사들은 모두 현실 세계에서 제거되어야만 했다.

 

그런 의미에서 이데올로기를 그리는 화가가 가장 먼저 처형되었다. 역시 국가주의자들은 선전선동의 중요성을 충분히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무지한 에르발은 화가가 독재 시스템에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지만, 그의 상관들의 그것은 그의 생각과 달랐다. 에르발에 화가의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자, 화가의 영혼이 에르발에 달라붙었다. 그리고 그의 의식과 교류하기 시작한다. 라틴 아메리카에서 한창 유행한 주술적 리얼리즘의 영향이 보인다.

 

체포조에 반항하던 다 바르카에게 개머리판으로 한 방 먹인 사람도 바로 에르발이었다. 그는 앞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할 독재 권력에 충실한 개 역할을 할 인사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해서 자신의 상관인 란데사 중사의 마음에 꼭 들었다.

 

투옥되어 있는 동안, 가장 먼저 제거되어야 할 인사였던 다 바르카는 두 번이나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는데 성공한다. 에르발은 다 바르카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그의 애인인 마리사 마요보다도 그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있다. , 여기서 또 로맨스가 빠지면 안되지. 절세미녀인 마리사는 자신의 애인을 죽음으로부터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한편, 자기 계급의 적인 다 바르카를 반대하는 그녀의 조부 베니토 마요는 그를 세상에서 소멸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노라고 사랑하는 손녀딸에게 말한다. 마리사는 자해까지 감행하면서 다 바르카에 대한 절절한 사랑을 표현했다. 다 바르카가 긴 투옥 생활을 이겨내는데 사랑의 힘이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니었을까라고 추정해 본다.

 

마누엘 리바스 작가는 에스파냐 내전 당시, 아무런 죄 없이 투옥된 포로/죄수들을 도운 에스파냐 여성들의 지지에 대해서도 소설의 곳곳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적어도 반동적인 역사의 흐름에 있어 방관자가 아니었다. 다 바르카나 다른 공화파 인사들이 체포조에 의해 끌려갈 때, 그들을 막기 위해 격렬하게 저항했다. 빨래를 이용해서 감옥에 갇힌 이들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자신의 형제 부모 남편이나 애인들에게 해산물을 공급하기도 했다. 국가주의자들과 프랑코 독재에 맞서 그들만의 방식으로 싸운 이들에 대한 리바스식 경의 표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에르발에게 들러붙은 화가의 그것은 양심의 목소리다. 이러한 설정은 아무리 에르발이 독재자 프랑코에게 부역한 빌런이라고 하더라도 일말의 양심은 남아 있었을 거라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마누엘 리바스는 다 바르카나 마리사 마요의 입장 그러니까 피해자의 목소리보다 가해자의 목소리에 보다 비중을 두었다. 반성과 화해 그리고 역사 청산이라는 에스파냐가 짊어진 궁극적 과제에 대한 문제 제기의 발로다. 언제나 그렇지만, 역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끝없는 투쟁이다. 소설 <목수의 연필>은 역사에 대해 영원한 무관심에 빠진 이들에게 각성을 촉구한다. 깨어나 행동에 나서라고.

 

[뱀다리]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두 권이 말미에 실려 있어 기록해 본다.

1. <살라미나의 병사들> 하비에르 세르카스 (열린책들)

2. <열세 송이 붉은 장미> 카를로스 폰세카/헤수스 페레로 (국내미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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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목련 2022-12-28 0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분명 이 소설을 읽고 리뷰까지 썼는데 내용이 하나도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ㅠ
그래서 제가 쓴 리뷰를 찾아 읽고 매냐 님의 글을 다시 읽었어요.

레삭매냐 2022-12-28 09:47   좋아요 0 | URL
저도 그러한 책들이 부지기수
랍니다.
분명 읽은 것도 리뷰로 기록을
남긴 것도 기억이 나지만, 정
작 내용은 모두...

저도 자목련님의 리뷰 찾아 보
겠습니다 :>

그레이스 2022-12-29 08: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스페인 내전과 관계있을거라고는 생각 못했네요. 저장하고 갑니다.

레삭매냐 2022-12-29 10:52   좋아요 1 | URL
아마 올해 읽은 마지막 책이 될
것 같은데, 한 해를 마무리하기
에 좋은 책이었습니다.

coolcat329 2022-12-31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보는 책, 작가인데 스페인 내전 배경에 세 명의 인물이 주인공이라니 뭔가 흥미진진할 거 같네요.

레삭매냐 2023-01-04 10:58   좋아요 0 | URL
저도 최근에 알게 되었네요.
뛰어난 작품이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그리고 오늘부터
읽기 시작한 이사벨 아옌데의
<바다의 긴 꽃잎>...

책을 읽을수록 가슴이 먹먹해 지네요.

서니데이 2023-01-06 23: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주말 보내세요.^^

thkang1001 2023-01-07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항상 건강하시길 기원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감사합니다!
 
제5도살장 (그래픽 노블)
커트 보니것 원작, 라이언 노스 각색, 앨버트 먼티스 그림, 공보경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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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그리고 2017년에 커트 보네거트의 <5도살장>을 읽었다. 그리고 거의 대부분의 내용들을 잊어 버렸다. 다시 5년이 지나, 그래픽 노블로 새롭게 <5도살장>을 읽었다. 새로웠고, 또 원전이 읽고 싶어졌다. 보네거트와 세풀베다, 예나 지금이나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작가들이다.

 

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인 저자가 반전 운동가이자 소설가가 된 계기가 되었던 1945213일 드레스덴 폭격이 그래픽 노블 <5도살장>을 중심을 차지한다. 미영 연합군 수뇌부들은 독일 전쟁기계의 전쟁 의지를 박살내기 위해, 전무후무한 공습을 구상했다. 영국의 중폭격기 772대와 미군기 527대를 동원해서 비무장도시로 알려진 엘베 강변의 드레스덴에 그야말로 3,900톤에 달하는 고성능 폭탄의 비를 퍼부었다. 그 결과, 1939년 기준으로 독일에서 7번째로 큰 도시였던 드레스덴 시의 중심은 잿더미가 되었다. 도심의 90%가 형체를 알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22,700명에서 25,000명에 달하는 인명이 살상되었다. 그중에는 다수의 연합군 포로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현실 세계에서 보면 또라이처럼 보이는 빌리 필그림이 등장한다. 그는 뉴욕 주에 있다는 가상의 도시 일리엄 출신이란다. 커트 보네거트처럼 독일군의 마지막으로 서부전선에서 매서운 반격을 보여준 벌지전투에서 빌리 필그림은 포로가 되었다. 어떤 면에서 보아도, 그는 진짜 군인이 아니었다. 양키 군인을 만난 독일 사람들은 진짜 군인들은 오랜 전쟁으로 모두 죽었다며 그를 무시한다. 그의 동료들조차 그를 무시한다.

 

다른 낙오병들은 전투모에 소총, 그리고 제대로 된 행색을 갖추었지만 빌리 필그림은 무엇 하나 갖추지 못한 오합지졸의 전형이자 이른바 소년십자군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소설을 처음에 읽을 적에 원제에 아무렇지도 않게 붙어 있던 “The Children’s crusade” 문구가 바로 이해가 되었다. 제대로 된 군사 훈련도 없이 전장으로 내몰린 빌리 필그림 같은 이야말로 소년십자군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이런 역사적 사건만 다루었다면, 커트 보네거트의 <5도살장>은 다른 전쟁문학과 다를 게 없는 그저 그런 작품이 되었으리라. 하지만 작가는 시공간의 분할과 개입, 시간여행 그리고 트랄팔마도어 행성이라는 판타지스러운 요소들을 주입하면서 새로운 창조적 도전을 시전한다.

 

우선 시간의 구성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오가며 직조된다. 다른 낙오병들이나 동료 포로들과 달리 전쟁에서 빌리 필그림은 살아남았다. 강해서 살아남는 게 아니라, 살아남은 자가 강자라는 명제가 그에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가 아닐까. 그리고 그 서사는 저자인 커트 보네거트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말이지 싶다.

 

전후에 빌리 필그림은 검안사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게 된다. 바람을 피우기도 하고, 항공사고를 당해 죽을 위기에서 벗어나기도 한다. 다만 전쟁 때 얻은 PTSD로 정신병원을 전전하기도 한다. 하긴 누구라도, 드레스덴 폭격 같은 인류사적 비극을 직접 목격한 사람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러지 않을 이가 얼마나 될 것인가.

 

트랄팔마도어 인들에게 납치되어 동물원에 갇히기도 했다. 그리고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을 관찰하기를 즐긴다. 비슷하게 트랄팔마도어 인들에게 납치된 지구인 여성과 짝짓기도 하고 아이도 낳고... 이게 모두 같은 시간대에 벌어지는 일들이란 말인가? 그러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빌리 필그림에게 죽음은 죽음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그가 아내의 사망 소식에도 덤덤하게 반응할 수 있는 이유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빌리는 이 순간을 살면서도 동시에 또 다른 공간과 시간에 분열하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말이다. 내가 서술하면서도 과연 그게 맞는 건지 아닌지에 대해 확신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다른 동료 포로들에게 폐급 병사취급을 당하고, 제리(독일군)들에게 갖은 학대를 당하면서도 우리의 빌리 필그림은 꿋꿋하게 생존하는데 성공했다. 독일군 간수들은 미군 병사들이 영국군들처럼 서로 협력하지 않고 각자도생하는 사실을 비웃는다. 그리고 일단의 소년십자군들은 짐승처럼 가축 화차에 실려 곧 비극의 무대가 되는 드레스덴에 도착한다. 빌리 필그림/커트 보네거트는 운이 좋았다. 시대에 있던 드레스덴 시민들과 미군 포로들은 도심을 휩쓴 불의 폭풍에 휩쓸려 한 줌의 재가 되었다. 도심에서 멀리 떨어져 있던 슐라흐토프-퓐프(5도살장)에 머물던 빌리들은 살아남았다. 뭐 그렇게 가는 거다.

 

보통 시간은 서사 구조에 있어 결정적 역할을 한다. 하지만 <5도살장>에서 플래시백으로 치환되는 시간들은 종잡을 수가 없는 그런 요소다. 그렇기 때문에 커트 보네거트를 처음으로 접하는 독자들은 짜증을 낼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여러 작품들을 통해 구축한 세계관에 발을 딛고 익숙해진다면 그 또한 극복할 수 있는 그런 문제일 것이다.

 

카메오로 등장하는 나치 프로파간다를 전파하는 미국인 하워드 W. 캠벨 주니어와 SF 소설가 킬고어 트라우트도 반가웠다. 혹시 보네거트 작가가 발자크의 등장인물 우려먹기 기법에서 영감을 얻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긴 나라도 시간여행이라는 특별한 장치와 트랄팔마도어 행성에서 수시로 인간계에 개입하는 외계인들 이야기를 한 번만 써먹기에는 아깝지 않나 싶으니 말이다.

 

소설로 두 번 그리고 그래픽 노블로 다시 만나도 <슐라흐토프-퓐프>는 여전히 매력적이었다. 다시 소설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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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2-12-27 08: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요즘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의 단편집을 읽고 있는데.. 레삭매냐님 글을 읽으니 막막함이 다시 고개를 드는군요-_ㅠ;;; 자신감 하락ㅠㅠ 저도 용기를 내어 커트 보네거트를 읽을 수 있기를(언젠가;;)

레삭매냐 2022-12-27 09:21   좋아요 1 | URL
오오 제임스 팁트리 주니어!
저도 낭중에 중고로 나오면
광년이 사서 읽어 보려고
대기 중이랍니다.

커트 보네거트, 짱입니다.
참말로. 그의 시커먼 유머
의 매력에 빠지시면 답 없
으시리라고 믿슙니다.

mini74 2022-12-30 18: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그래픽노블로 나왔군요. 저도 이 책 좋아하는데 ~~~ 연애소설 읽는 노인도 참 좋아하는 소설이에요 *^^*

레삭매냐 2022-12-30 19:20   좋아요 1 | URL
그래픽 노블로 나왔다는 말
듣고, 도서관에 가서 냅다
빌려다 읽었답니다. 다시 원
전이 만나고 싶어지더라구요.

저도 <연애소설 읽는 노인>
애정합니다.
 
랑랑 형제 떡집 난 책읽기가 좋아
김리리 지음, 김이랑 그림 / 비룡소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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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소설만 주야장천 읽느냐? 아니다. 가끔 사회 과학 서적과 역사책들도 만난다. 다만 드물게 읽을 뿐. 나의 주력 분야는 아니라는 거지. 아주 가끔 동화도 읽는다. 코로나로 작고하신 루이스 세풀베다 작가도 동화를 쓰지 않으셨던가. 물론 굉장히 사회적 이슈들을 담은 고차원의 동화이긴 했지만. 지난 주말에는 요즘 꼬맹이가 빠져 있는 떡집 시리즈 신간인 <랑랑 형제 떡집>을 읽었다.

 

서점에서 사서 건네주니 바로 읽고 휙 던져 버렸다. 엄마는 항상 계속해서 볼 채기 아니면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라고 하던데, 왠지 나보고 들으라고 하는 소리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랑랑 형제 떡집>의 주인장은 꼬랑지라는 친구다. 아마 매 시리즈다 미션이 주어지는 모양이다. 그전 시리즈를 만나 보지 못해서 전작이 어떤지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른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한 번 읽어봐야지 싶다. 꼬맹이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또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내가 그 책을 읽어봐야 내용을 알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마음에서 책을 읽었다. 그리고 또 내가 느낀 점과 녀석이 읽으면서 느낀 점을 비교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삼신할머니가 혼자서 떡집 운영을 하며 고군분투하는 꼬랑지 친구를 위해 조력자를 하나 파견한다. 사람은 아니구 말끝마다 굴개를 붙이는 왕구리 녀석이다. 잠깐 또 삼천포로 빠졌는데 이번 시리즈의 미션은 서로 다른 성향을 지닌 쌍둥이 형제 우랑이와 아랑이를 화해시키는 미션이다.

 

꼬랑지는 비법을 이용해서 만든 떡으로 성격이 너무나 다른 두 형제를 화해시키려고 한다. 형인 우랑이는 활달하고 요즘 말로 하면 핵인싸 정도 되는 캐릭터다. 항상 말썽을 달고 산다. 반면 동생인 아랑이는 정 반대다. 항상 행동에 조심하고,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는 모습니다. 둘이서 반반 섞어서 나누면 좋으련만. 그리고 보니 어려서 부모님에게 많이 듣던 소리가 아닌가 말이다.

 

꼬랑지가 떡을 만들면, 그 떡을 배달하는 미션을 왕구리가 맡는다. 모든 게 계획한 대로 흘러가면 좋으련만 어디 우리네 삶이 그러하던가. 그리고 모든 터부와 계획들은 깨지게 마련이라는 신화를 좇아 <랑랑 형제 떡집>의 서사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고, 몇 번의 시행착오로를 겪게 된다. 하긴 그런 시행착오와 실수 혹은 오류가 없다면 또 우리네 삶이 너무 클리셰이로 범벅이 된 그 무엇이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뭐 그렇다.

 

왕구리의 대활약(?)으로 우랑/아랑 형제 화해시키기 프로젝트가 위기에 처해지기도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미션은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 또한 클리셰이...

 

그리고 시리즈는 자연스럽게 다음 작품인 <하하 자매 떡집>으로 이어진다. 이 또한 마치 연재를 기다리는 소년소녀들을 위한 떡밥이 아닌가 싶다. 아니 이러저러한 이야기들을 하다 보니 이 시리즈 역주행이 하고 싶어졌다. 그리고 앞으로 나올 시리즈에 대해서도 기대가 되고. 과연 아이들에게 인기라고 하더니, 탄탄한 서사와 시리즈 연재에 대한 기대감 그리고 캐릭터 빌드업 등 다양한 매력 포인트들이 있었다. 얼마 전에 중고책방에서 사다준 <장군이네 떡집>도 한 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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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2-12-26 16: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크리스마스 즐겁게 보내셨나요??^^
이 책 말고 2018년에 읽으시고 리뷰 남기신 <뉴로맨서>에 대한 질문인데요, 그 책 번역 기억하세요? 읽을 만 하시니까 별 4을 주셨겠지요??

레삭매냐 2022-12-26 17:02   좋아요 0 | URL
네이 메리 크리스마스였습니다.

아우 무려 4년 전 ~!
그 때 아마 독서 모임 때문에 한동
안 죽어라고 SF물을 읽었던 것으로
기억하네요. 지금은 이상한 정체성
을 지닌 정치인으로 변신한 닝겡이
한창 읊어대던 문구가 기억나네요.

그 당시의 갬성과 또 지금의 것이
달라질 수 있으니 감안해 주셔요.
 
곰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한 유명한 사건
디노 부차티 지음, 이현경 옮김 / 현대문학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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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초에 고대해 마지 않던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이 나왔을 때, 주저하지 않고 책을 주문해서 그야말로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이 책을 읽었다. 후속작인 <60개의 이야기>(진짜 60개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는 사두기만 하고 읽지는 않았다. 아마 그 무렵에 디노 부차티에 대해 이런저런 정보를 취합하다가 <곰들이 시칠리아를 습격한 유명한 사건> (이하 습격’)이란 동화를 빙자한 소설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습격>은 애니메이션으로도 제작되었는데 아쉽게도 이탈리아어로 되어 있어서 무슨 말인지 한 개두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세밑에 드디어 <습격>이 출간되었다.

 

기다릴 수가 없어서 바로 주문장을 날렸고, 지난주에 받아서 주말에 다 읽을 수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77년 전에 나온 <습격>은 가히 클래식이라 부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습격>의 출발은 디노 부차티 아재가 조카들에게 그려주던 그림에서 출발했다고 했던가. 스타일은 아이들을 위한 동화 스타일이지만, 소설이 품고 있는 서사는 아이들의 사고 영역을 단박에 뛰어넘는다.

 

호랑이가 담배 피던 시절 즈음에, 시칠리아 산속에 곰들이 평화롭게 사는 왕국이 있었다. 나는 여기서 평화에 방점을 찍는다, 평화. 그러던 어느 날, 베어 킹덤의 왕자 토니오가 사냥꾼들에게 납치되어 갔다. 평화가 깨지기 시작했다. 토니오의 아빠 레온치오 왕은 왜 동료 곰들에게 왜 솔직하게 아들의 납치 사실을 말하지 않고 토니오가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다고 말했을까. 그 다음 위기는 혹독한 겨울과 굶주림이었다. 곰들은 결의를 다지기 시작한다, 이대로 죽을 바에야 평야에 사는 인간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자고. 갈등의 시작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내몰린 곰들의 싸움이 시작된다.

 

당시 시칠리아의 인간 세상은 독재자 대공이 다스리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당연히 산골에 사는 곰들보다 훨씬 더 좋은 무기로 무장한 상태였다. 그리고 궁정의 천문학자 데암브로시스 교수는 산속에서 적들이 쳐들어 올 거라고 예언한다. 대공은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는 불안요소를 제거하기 위해 산에 군대를 파견해서 살아 있는 건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다. 깊은 동굴 속에 숨어 있던 곰들과 산의 노인 말고는 모두가 죽어 버렸다. 살아 남은 곰들과 인간의 대결 구도가 완벽하게 구성됐다.

 

곰들이 가만 있었을까? 아니다. 베어 킹덤의 군대도 인간군과 싸우기 위해 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뱀 같이 기다란 행렬을 만들면서. 초반에는 곰군단은 소총과 대포로 무장한 인간들에게 밀리지만, 용감한 곰 바보네의 분전에 힘입어 인간군을 전멸시킨다. 인간의 역사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신화나 판타지에서도 영웅의 탄생은 불가결한 요소가 아닌가 싶다.

 

독재자 대공은 곰군단의 진격을 막기 위해 멧돼지 부대와 유령들이 사는 성 그리고 피에 굶주린 고양이 맘모네를 동원해서 공격에 나선다. 적대적인 세력을 분쇄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모습이다. 물론 현실에서도 종종 볼 수가 있다.

 

어쨌든 그때마다 곰돌이들은 영웅적인 분전과 운빨로 위기를 모면하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곰군단은 마침내 인간들의 수도 앞에 놓인 요새 코르모라노 성에 도달한다. 하지만 마지막 관문을 뚫기에는 곰군단에게도 역부족이었던 모양이다. 난공불락처럼 보이는 성을 공격할 때마다, 막심한 피해가 발생했다. 이대로 공격을 마치고 다시 추운 산으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하지만 결국 곰대포라는 신무기(?)를 동원해서 프란지파네가 조직한 50마리의 곰특공대가 마지막 공격에 성공하면서 드디어 곰들의 세상이 열렸다. 혁명적 순간이 달성되지만, 그때부터 타락 역시 신속하게 진행된다.

 

그때 마침 대공 일당은 엑셀시오르 극장에서 공연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무대 위에서 줄타기 공연을 하던 곡예사는 바로 레온치오 왕의 잃어버린 아들 토니오였다. 세상에나! 그리고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갔다는 사실을 깨달은 악랄한 대공은 레온치오에게 총을 겨누는 대신 토니오를 저격한다. , 과연 우리의 토니오는 살아날 수 있을 것인가?

 

엉터리 파시스트 지도자 일 두체 무솔리니 때문에 이탈리아는 추축국의 일원으로 2차 세계대전의 화염 속으로 뛰어 들었다. 피자와 파스타 그리고 와인을 사랑하던 이탈리아 병사들은 히틀러의 세계 정복이라는 터무니없는 욕망에 동원되어 스탈린그라드의 치열한 전투에서 소중한 생명을 잃어갔다. 북아프리카를 제패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이 이탈리아 시칠리아에 상륙하면서 결국 파시스트 정부는 붕괴되었다. 파시즘 통치 아래 숨죽이고 있던 이탈리아 민중들은 빨치산을 조직해서 무솔리니에 대항하기 시작했다. 마치 레온치오 왕과 곰군단처럼 말이다. 그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던 파시스트 무리들과 나치 독일군은 자연스레 독재자 대공으로 등치된다.

 

인간 세계를 정복한 다음, 곰들은 인간처럼 타락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레온치오 왕은 선량한 군주였지만, 다른 곰들은 그렇지 않았다. 시종장 살니트로 같이 타락한 곰들이 주도해서 왕의 동상을 만들기도 했다. 무언가 이상한 조짐을 느낀 충성스러운 젤소미노 같은 곰의 조언에도 레온치오 왕은 도무지 믿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다 불법도박장에서 아들 토니오를 발견한 왕은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바다뱀이 출몰해서 왕국을 위협했다. 비록 측근들의 부패를 막진 못했지만, 곰국가 존망의 위기에 처한 레온치오 왕은 바다뱀을 처단하기 위해 자신이 직접 현장에 출동한다. 국난의 위기에 처했을 때, 자신의 책임을 방기하지 않고 나서는 이게 바로 진정한 지도자의 모습이 아니던가. 참 씁쓸한 장면이 아닐 수 없었다.

 

레온치오는 유언으로 모든 곰들은 산으로 돌아갈 것을 주문했다. 서로 다른 세계의 통합은 그만큼 어렵다는 깨달음의 소산이었을까. 산에서 살던 시절에는 비록 춥고 배고팠지만, 자신들만의 행복을 추구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엄청난 손실 끝에 인간 세상에 정착했지만 그 자리는 곰들에게 어울리는 자리가 아니었다. 레온치오의 유언에 따라, 곰들은 위대한 왕의 시신을 메고 산으로 돌아간다.

 

작년에 만난 <타타르인의 사막>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작품 역시 고전의 반열에 올릴 만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과 반파시스트 투쟁이라는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디노 부차티는 인간과 싸우는 곰돌이들이 등장하는 판타지에 가까운 동화를 창조해냈다. 개인적으로 액션 판타지라고 생각하는 <습격>에는 정말 다양한 층위의 메시지들이 가득했다. 인간의 무분별한 자연 파괴로 그 어느 때보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해가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을 습격하고 있다. 곰돌이들은 추위와 굶주림에 대항해서 보다 적극적인 모습으로 스스로를 구원하기 위해 행동에 나섰다. 우리는 거듭되는 자연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애써 외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작가가 의도한 바보네와 프란지파네 그리고 레온치오 왕으로 대변되는 영웅 서사 신화에서는 통쾌함을 느끼기도 했다. 결국 역사를 이끌어 가는 힘의 원천은 도도한 민중이 주도하는 흐름이 아닌 소수 선각자들의 행동이라는 걸까. 인간 세상을 정복한 곰들이 점차 타락해 가는 과정은 어쩔 수 없는 인간 본성의 발로라는 지적도 새겨들을 만하지 않은가. 세상이 다 그러하니, 나 하나쯤은 괜찮지 않겠냐는 식의 비겁한 변명에 대해서 일갈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 하나부터 그러지 말아야 하지 않겠냐고.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은 내가 정말 좋아하는 소설이다. 시간 날 때마다 계속해서 읽는다. 디노 부차티의 <습격>도 비슷한 궤적을 그리게 될 것 같다. , <습격>의 애니메이션도 볼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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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라디오 2022-12-15 13: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첫 서재의 달인이시군요! 축하드립니다^^ㅎ

레삭매냐 2022-12-16 10:42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예전 엠블럼은 부끄러버서
다 감추어 놓았는데 헷 -

물감 2022-12-15 14: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서달 축하드립니다 :)

레삭매냐 2022-12-16 10:4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물감님.

alummii 2022-12-15 21: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 타타르인의 사막 >인상깊게 읽었었는데 이 동화는 무엇인가 했더니 이런 내용이었군요^^ 잘 읽었습니다 서달 축하드려요

레삭매냐 2022-12-16 10:42   좋아요 1 | URL
디노 부차티 작가의 다른 책들
도 많이 나왔으면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2-12-15 2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동화도 썼군요~
레삭매냐님 서재의달인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2-12-16 10:43   좋아요 1 | URL
동화를 빙자한 정치 소설
이 아닐까 싶습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달팽이 식당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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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리를 하지 못한다. 대신 설거지는 누구보다 잘한다고 자부한다. 이젠 거의 머신 수준이다.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가사 분담이라고 해야 하나. 고무장갑 따위는 사용하지 않는다. 고무장갑을 끼고 설거지하면 뽀드득 감촉을 느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첫 부분을 읽고 나서 한 일주일 정도 묵혔다가 다시 집어 들었는데 발동이 금방 걸렸다. 주인공은 25세의 요리사 링고(린코). 산촌에 사는 엄마 루리코 여사의 곁을 떠나 십년 만에 연인 알리바바에게 배신당하고 할머니가 물려주신 메이지 시대의 겨된장을 들고 고향으로 돌아간다. 아마 고향은 그런 곳인가 보다. 언제라도 돌아가도 누군가 반겨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엄마 루리코 여사와는 사이가 좋지 못한 편이다.

 

지난 십년 동안 여러 가지 요리를 배우고, 또 할머니가 차려 주시는 음식에 대한 사랑의 추억을 품은 링고 양은 고향 산촌에서 나는 재료로 식당을 차릴 계획을 세운다. 서먹한 루리코 여사가 부탁한 옛 친구 구마 씨는 링고의 좋은 친구이자 조력자로 활동한다. 이동수단을 제공해 주기도 하고, ‘달팽이 식당을 개업하는데 일등공신 역할을 마다하지 않는다.

 

당연히 1호 손님은 바로 구마 씨였다. 무언가 거창한 요리를 대접할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딸과 도망간 아르헨티나에서 온 시뇨리타가 만들어 주던 카레 요리를 만들어 달라고 구마 시는 부탁한다. 사랑을 이루어준다는 링고 씨의 요리가게가 빛을 발하게 되는 석류 카레가 그렇게 탄생한다.

 

2호 손님으로 어린 시절 무섭기만 했던 검은 상복의 미망인 할머니 그리고 3호 손님으로는 고등학교 커플이 차례로 등장한다. 곤조와 프로 정신으로 무장한 자영업자답게 링고 씨는 하루에 한 손님만 받는 원칙을 세운다. 그리고 사전 면담을 통해 그들이 원하는 요리를 선택한다. , 초기 손님 중에 후계자와 선생님 커플도 있었던가. 생각 같아서는 모든 케이스를 다 소개하고 싶으나 나의 기억력이 그에 미치지 못함을 고백한다.

 

달팽이 식당에서 밥을 먹으면 사랑과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달팽이 식당이 순탄대로를 걸을 것 같았지만, 소문이 나는 만큼 시기 질투하는 인간들도 따라오기 마련이다. 머리카락(?) 테러를 당하기도 하지만, 링고 씨는 꿋꿋하게 위기를 돌파해 간다. 말이 필요없다, 면담을 통해 상대방이 지금 원하는 것이 무엇인 줄 알게 된 다음부터 상상력을 가미한 요리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다. 게다가 약간의 신파 한 숟갈까지 곁들이니 어찌 책이 재밌지 아니한가 말이다.

 

어린 시절부터 원수 같았던 네오콘 아재에게 재료가 없는 긴급 상황에서 오차즈케를 만들어 대접하는 장면도 마음에 들었다. 무언가 그동안 얼어붙었던 관계의 해빙이 시작되는 순간이라고나 할까. 약간은 동화풍인 것 같기도 하고. 동네 꼬마 고즈에가 데려온 거식증 토끼의 입맛 살리기 대작전도 좀 작위적인 면이 없진 않았지만 나름 괜찮았다.

 

링고 씨가 품은 출생의 비밀 그리고 루리코 여사의 첫사랑과 불치병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급격하게 내리막길을 달리기 시작하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이렇게 애써 빌드업을 해놓고 무너뜨린단 말인가. 신파가 지닌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모든 게 다 완벽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지.

 

결국 오가와 이토 작가는 삶의 모든 순간을 담담하게 맞이할 필요가 있다는 말을 요리에 실어 날린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실연도, 또 나를 창조해준 부모와의 숙명적인 이별도. 다만 그 모든 순간에 솔루션으로 등장하는 매개가 바로 요리라는 점에 쿵하고 방점을 찍는다. 루리코 여사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엘메스 역시 해체되어, 자신의 늦깎이 사랑의 결실인 피로연에 참석한 이들의 입을 즐겁게 해준다. 우리가 먹는 것들은 모두 대지의 어머니 그러니까 땅에서 나고 자란 것이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는다. 사실 루리코 여사를 잃은 링고가 그랬던 것처럼, 실의에 빠졌을 때는 모든 게 귀찮기 마련이다. 평소에도 해먹지 않을 요리를 먹을 자신이 없을 것 같다. 그럴 적에는 인스턴트식품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삶의 모든 순간에 요리가, 음식이 등장하는 것처럼 링고 씨가 어머니를 잃은 상실감에서 탈출하게 되는 것도 역시나 요리였다. 조금은 냉정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유리창에 부딪혀 죽은 산비둘기 요리를 하는 장면은 좀 그렇더라.

 

말미에 수록된 <초코문>은 스핀오프 스타일의 이야기로 좀 간지러운 느낌이긴 했지만 나쁘진 않았던 것 같다. 서사의 전개는 좀 진부하게 다가왔지만, 다른 건 몰라도 작가의 요리에 대한 열정 하나만큼은 평가해주고 싶다. 링고 씨가 꼴랑 십년 만에 그렇게 전 세계 요리를 마스터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긴 하지만. 책 읽는 동안, 즐거웠다. 그거면 됐지 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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