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220
압둘라자크 구르나 지음, 황가한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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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가의 네 번째 책 <배반>을 읽었다. 이전에 이미 세 권의 책으로 구르나 작가에 대한 워밍업을 마친 나는 충분히 그의 작품 세계에 몰입할 준비를 마쳤던 모양이다. <배반>은 참으로 아름다운 책이었다.

 

2005년에 발표된 <배반>은 구르나 작가의 7번째 장편소설이다. 이때까지 만난 작품들 중에 가장 자전적인 요소들로 가득하다는 생각이다. 1899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늘날의 탄자니아/케냐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 벌어진 사건이 중심을 이룬다.

 

인도계 출신 장사꾼 하사날리가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른 음중구(유럽인) 한 명을 발견하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종교적 이유로 이방인을 환대하는 무슬림 문화에 대한 단면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이방인은 신이 보낸 천사라고 했던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천사를 매몰차게 내치지 말라는 말일까.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폭력적인 이미지로 덧칠되었지만, 적어도 이방인들을 환대하는 문화만큼은 존중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다.

 

몸바사 근처의 작은 마을에 마틴 피어스라는 이름의 음중구 한 명이 등장하면서 이야기의 수레바퀴는 가열차게 돌아간다. 십대에 부모님을 잃은 하사날리와 그의 누나 레하나 남매. 부모가 없을 적에는 가장 가까운 남자 형제나 친척이 여자 형제를 보살피는 게 그 동네 문화라고 한다. 인도 출신 아버지가 현지인 여성과 결혼해서 낳은 자카리야 집안 역시 태생적으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세 번의 청혼을 거절한 레하나는 동생 하사날리가 가문의 명예를 수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추진한 아자드와 결혼했지만, 그 결혼은 재앙으로 끝났다. 계절풍을 타고온 아자드는 다시 그 계절풍을 타고 그녀의 곁을 떠나가 버렸다. 그리고 그의 빈자리를 갑자기 등장한 음중구 마틴 피어스가 채워 버린 것이다. 양심적인 학자 행세를 하던 피어스는 자신을 구한 레하나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져 버렸다. 그리고 정신을 차리자 고향 영국으로 떠나 버린다. 좀 진부한 설정이 아닌가.

 

그리고 한 명의 중요한 캐릭터가 남아 있다. 영국에서 식민지 혹은 보호령 탄자니아를 지배하기 위해 파견한 군수 프레더릭 터너다. 그는 빈사의 지경에서 발견된 음중구가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하사날리로부터 인계받는다. 물론 현지인에 대한 반감으로 그가 혹시라도 피어스의 물건들을 강탈하지나 않았나 하는 의심은 디폴트다.

 

하긴 백인농장주 버턴에 비하면 프레더릭 터너는 양반이다. 버턴은 남아프리카의 보어인들처럼 아프리카 식민지에 사는 현지인들을 모두 쫓아내고, 백인들의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일삼는다. 제국주의자들은 동아프리카를 제2의 아메리카로 만들고 싶다는 의견을 피력한다. 학살과 추방으로 점철된 미국의 역사를 아프리카에서도 되풀이하고 싶다는 걸까. 백인 식민주의자들에게 흑인들의 노동력은 절실하게 필요하지만, 그들과의 공존은 자신의 미래계획에 빠져 있다. 아마 19세기말에 전 세계를 호령하던 백인들이 자신들의 지배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했겠지만 그런 그들의 착각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아니 처음부터 무리수였다.

 

두 세대 정도인 60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독립을 앞둔 탄자니아로 시계는 돌아간다. 그리고 새로운 주인공들이 등장한다. 아민과 라시드 그리고 파리다. 그들의 부모님들은 모두 교사로 탄자니아의 엘리트 계급이다. 파리다는 삼남매로 맏이로 상급 학교 진학을 위해 시험에 도전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지금은 집에서 수다와 지인들의 옷을 만들어 주며 소일 중이다. 아민은 믿음직한 장남으로 그리고 꼬마 이탈리아인이라는 별명의 라시드는 몽상가다. 당연히 부모님들은 장남 아민에게 큰 기대를 걸고 있다.

 

문제는 이 믿음직한 장남이 자신보다 나이 많은 이혼녀 자밀라와 사랑에 빠지게 되면서 촉발됐다. 끓어오르는 청춘 아민이 자밀라와 비밀연애에 빠지게 되자, 진짜 물불 가리지 않는 저돌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이루어질 수 없는 그런 사랑이기에 아민과 자밀라는 서로에게 그토록 몰입했던 게 아니었을까.

 

지금도 그렇지만 초타라(튀기, 혼혈인)에 대한 반감은 전통적 무슬림 사회에서 여전했던 모양이다. 결국 아민과 자밀라의 비밀연애는 발각되고, 아민 부모님의 격렬한 반대에 비극적 사랑으로 마무리되었다.

 

자 이제 진짜 화자인 라시드가 등장할 차례다. 몽상가였던 소년 라시드는 식민 모국 영국으로 건너갈 기회를 잡게 된다. 형 아민과 어쩌면 미래의 형수가 될 수도 있었던 자밀라와의 연애가 파국으로 치닫던 시점 그리고 탄자니아 독립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결부된 그 시점에서 라시드는 조국을 떠나 영국으로 향한다.

 

처음에는 자발적이었을 지는 몰라도 독립 과정에서 극도의 혼란과 무질서, 폭력 그리고 이어진 학살과 추방 때문에 라시드의 영국 유학은 그대로 영구적인 무엇인가가 되어 버렸다.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진 몰라도 낯선 곳에 적응해야 했던 이방인 라시드의 감정이 아주 절절하게 와 닿았다. 확실히 압둘라자크 구르나 작가는 라시드라는 캐릭터에 작가 자신을 명징하게 투영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감정들은 누군가에게 들은 것만으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그런 감정들이었다.

 

라시드는 학업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줄리어스 니에레레가 인도하는 사회주의 정권 아래 아무런 비전이 없다고 생각한 라시드의 가족들은 막내아들이 영국에 머물 것을 권유한다. 그렇게 라시드는 어쩔 수 없이 영원한 이방인이 되어 버렸다. 박사 학위를 받고 대도시 런던을 떠나, 작은 도시의 대학에 일자리를 얻은 라시드는 그렇게 과거로부터 분리되었다. 그리고 자신이 태어나기도 전에 벌어졌던 사건들의 진상과 마주하고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다.

 

소설의 엔딩이 사뭇 급작스럽고 작위적이라는 느낌이 들긴 하지만 여전히 <배반>은 내가 꼽은 구르나 작가의 최고의 작품이다. 모든 게 완벽할 수 없으니까. 아니 어쩌면 힘차게 필력을 휘두르며 전진하던 구르나 작가의 너무 자신의 이야기에 몰입한 나머지, 더 이상 쓸 힘을 상실하고 급하게 마무리지은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소설 <배반>의 기본 베이스는 사랑타령이다. 레하나와 피어스의 사랑, 자밀라와 아민의 사랑(둘 다 파국적이었다) 그리고 아민-라시드 브러더스에 대한 가족들의 다소 폭력적인 사랑. 그들의 조상이 디아스포라 이방인이었던 것처럼, 그들의 후손 역시 타지에서 뿌리를 내려야 하는 그런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렇게 해서 현재 우리의 삶이 만들어지는 게 아닌가.

 

책을 읽으면서 무언가 더 쓰고 싶은 말들이 많았지만, 책에 몰입하다 보니 무척 강렬하게 다가왔던 느낌들이 어느 순간 우수수 바스러져 버렸다. 그 자잘한 느낌들을 되살리기에는 내 기억의 한계가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만큼 구르나 작가가 구사하는 역사의 도도한 흐름에 그리고 다양한 군상들이 시전하는 감정들의 광휘에 취했다고나 할까. 원제 desertion에는 배반, 도주, 유기 따위의 뜻이 있다고 하는데, 그런 중의적 해석 역시 소설에 등장하는 각각의 사건에 다양한 층위로 적응할 수 있다는 점에서 탁월한 제목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달에 <배반>을 만날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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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리의화가 2022-10-25 11:1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르나의 자전적 이야기가 가장 많이 담긴 소설이라 저는 이 소설부터 시작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지금 제가 해당 시기 베크 세계사를 읽고 있어서인지 인물들의 설정과 관계도에 이입이 많이 됩니다. 내년으로 미뤄뒀는데, 이거 읽어야 하나요?ㅎㅎㅎ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22-10-25 20:23   좋아요 1 | URL
구르나 선생의 전작들이 <배반>
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
다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아주 아름다운 이야기였습니다.

프레이야 2022-10-25 16: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배반, 땡스투유~ 메냐 님.

레삭매냐 2022-10-25 20:2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프레이야님~! 쌩유 -

새파랑 2022-10-25 19:2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게 구르나의 최고의 작품이군요 ^^ 구성이 약간 <바닷가에서>랑 비슷해보이기도 합니다~!!

레삭매냐 2022-10-25 20:25   좋아요 1 | URL
그동안 출간된 전작들의 총합
이라고나 할까요.

결국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하는 법이라는 말에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레이스 2022-10-26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배반으로 구르나 4부작 마무리하려고 들여놨습니다.^^

레삭매냐 2022-10-26 13:41   좋아요 1 | URL
그레이스님의 <배반> 완주를 응원합니다 !

구르나 작가의 다른 책들도 출간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니데이 2022-11-09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달의 당선작 축하합니다.
따뜻한 하루 보내세요.^^

거리의화가 2022-11-09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매냐님 이달의상 축하드려요^^
덕분에 저도 이 작품 찜했습니다!ㅎㅎㅎ

독서괭 2022-11-09 17: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축하드립니다^^
압둘라자크 구르나 네권이나 쭉쭉 독파하셨군요!

강나루 2022-11-10 04: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축하드려요.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

thkang1001 2022-11-10 09: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한 주 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