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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
유디트 바니스텐달 지음, 김주경 옮김 / 바람북스 / 2022년 3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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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일요일, 주중행사가 된 도서관 방문을 해서 발자크의 책들을 빌렸다. 기대하지 않았던 발자크의 <사촌 베트>를 만날 수가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리고 프랑스 책들이 꽂혀 있는 서가에서 보니 그래픽노블이 한 권 보였다.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책가방에 넣어서 대출했다. 제목은 집에 와서야 비로소 읽었다. 유디트 바니스텐달이라는 작가의 <당신의 목소리가 사라지는 동안>라는 책이었다.
그래픽노블의 주인공들은 단출하다. 미리암과 타마르라는 두 딸을 둔 노년의 다비드가 후두안에 걸렸다. 타마르는 이제 고작 9살이다. 전처 줄리아가 서쪽(돌아가셨나?)으로 간 다음에 만난 폴라와 만나 낳은 딸이다. 그리고 사진작가로 다 큰 딸 미리암이 산티아고 콤포스텔라 순례길에 만난 남자와 낳은 아이가 루이즈다. 소설의 배경이 독일 베를린이라고 했던가.
다비드와 미리암이라는 이름을 보니 아마 이 가족들은 유대계가 아닐까 싶다. 주인공 다비드의 암투병 과정이 리얼하게 그려진다. 아직 어린 타마르는 아버지의 죽음이라는 실체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버지의 21g짜리 영혼을 담기 위해 작은 병을 준비하고, 이웃친구 막스와 함께 아버지를 영원히 기억하기 위해 그를 미이라로 만들 계획을 짜기도 한다. 당돌하지 않은가. 아이다운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다비드는 마지막으로 타마르를 데리고 항상 가곤 하던 호수를 방문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타마르를 풍선에 편지를 매달아 막스에게 보내는 아버지를 지켜보기도 한다. 참,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는 신선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그 와중에도 다비드의 병환은 깊어가고, 아니 매순간 그가 죽어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 싶다. 호수에서 타마르는 인어아가씨를 만나기도 한다. 죽음의 공포가 언제라도 방문할 수 있는 순간에 불쑥 등장한 판타지에 어안이 벙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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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작가 미리암이 사는 공간들은 후두암, 종양이 전이되어 죽어가는 아버지의 이미지로 가득하다. 아니 가끔은 멀쩡하게 살아 있는 아버지가 이미 죽어 해골처럼 보이기도 한다. 유디트 바니스텐달 작가는 상실을 이렇게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이 그래픽노블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미리암이 다비드의 전신에 퍼진 종양 사진으로 구성된 아버지의 시신과 같이 누워 있는 장면이었다. 자신의 창조자가 맞이할 죽음, 그리고 또 우리 모두는 언젠가는 죽는다는 불멸의 사실을 담담하게 알려주는 작가의 의도가 참...
11월의 월요일밤에 휘리릭 넘겨 본 이 그래픽노블의 가격이 무려 32,000원이었다. 물론 원작자의 채색을 구현하고, 큰 판형의 책을 제작하려면 비용이 많이 들 것이다. 아마 어지간한 그래픽노블 마니아가 아니라면 선뜻 지갑을 열기 쉽지 않은 그런 비용이 아닐까. 나는 그나마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수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같은 작가의 책으로 작년에 나온 <페넬로페>가 있는데, 이 책도 빌려서 봐야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