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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글자책] 샤베르 대령 ㅣ [큰글씨책] 지만지(지식을만드는지식) 소설선집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김인경 옮김 / 지식을만드는지식 / 2017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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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는 결국 꼬리에 꼬리를 무는 어떤 행위다. 츠바이크의 <발자크 평전>을 읽다가 알게 된 <샤베르 대령>과 <외제니 그랑데>를 어제 도서관에서 빌려 왔다. <샤베르 대령>은 큰글씨 버전 밖에 없어서 그걸로 빌렸는데 중편 분량이어서 금방 읽을 수가 있었다. 숱하게 달린 주석 읽다가 더 시간이 간 것 같다. 발자크 최대 걸작이라는 <외제니 그랑데>는 지만지 천줄 축약본이라 일단 빌리기는 했는데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다. 그렇다고 해서 언제 또 정본 번역이 나올지 모르니.
<샤베르 대령>은 소설 공장장 시절에 발자크가 쓴 소설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아일라우 전투(1807년 2월 7~8일)에서 죽은 것으로 알려진 제정 시절의 용사 샤베르 대령/백작이 시체더미에서 살아나 귀환한 것이다. <오딧세이>의 페넬로페와 달리 샤베르 대령의 와이프 로진(로즈 샤포텔)은 이미 페로 백작과 결혼해서 잘 먹고 잘 살고 있는 중이다. 딱 봐도 앞으로 전개가 어떻게 될지 보이지 않는가.
참, 그전에 어제 책을 보고 나서 오늘 혹시나 하는 마음에 너튜브로 검색해 보니 예전에 프랑스의 국민배우로 불리던 제라르 드파르듀 주연의 영화로 1994년에 만들어진 영화가 있었다. 그리고 아일라우 전투에서 프로이센-러시아 연합군에게 돌진하는 프랑스 중기병대의 영상은 압권이었다. 이런 전투에서 샤베르 대령은 무시무시한 러시아군에게 칼을 맞아 두개골이 쪼개지는 부상을 입고 죽은 것으로 보고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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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나 지금이나 죽은 것으로 알려진 사람이 살아 나려면 법적 복원이 필요했다. 그리고 주석에 따르면 당시까지만 해도 그것을 가능하게 하려면 증인의 증언이 필수적이었다. 샤베르 대령을 죽음에서 구원해 줄 유일한 사람이 딱 한 명이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자신의 전처, 페로 백작부인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샤베르의 연금과 모든 재산을 쥔 당사자라는 점이다. 게다가 그녀는 미남 귀족 페로와 재혼해서 두 명의 아이까지 가지고 있었다. 12년 만에 초라한 몰골로 돌아온 전 남편에 대한 애정이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신원을 되살려 달라는 부탁은 들어줄 가망성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기 위해 적극적으로 샤베르 대령을 사기꾼으로 몰아야만 했다. 바로 이 지점을 발자크는 예리하게 공략한다. 인간사가 그런 것이다라는 걸. 게다가 다른 시절도 아니고, 제정 시대의 영웅들이 상갓집 개 취급을 당하던 왕정복고 시절이 아니었던가.
페로 부인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는 서신을 보냈지만, 거절당한 샤베르 대령은 결국 법률사무소에 찾아가 자신의 신분과 재산을 복귀하려는 시도에 나선다. 물론 자신의 철지난 입성 때문에 법률사무소 서기들에게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그리고 보니 발자크는 옷차림에 대해서도 상당히 신경을 쓴 모양이다. <사촌 퐁스>에서도 철지난 옷차림을 한 퐁스 아재의 풍채에 대해 한참 설교하지 않았던가.
우여곡절 끝에 샤베르 대령은 데르빌에게 자신의 사건을 의뢰하게 되고, 사람 좋은 데르빌은 자신의 소송의뢰인에게 돈도 빌려 주고 기꺼이 사건을 수임하기로 결정한다. 우선 그전에 샤베르 대령이 어떻게 해서 엄청난 사상자가 발생한 아일라우 전투에서 생존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들은 데르빌이 과연 합리적 판단을 내렸는지 의문이다. 물론 법정에서 쉽지 않은 심리가 전개될 것이고, 이미 두 명의 아이를 가지고 있는 페로 부인이 좀 더 유리할 수 있다는 상황도 유능한 변호사 데르빌은 간과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법정에서 페로 부인을 곤경을 몰아넣을 수 있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증거 수집에 열을 올린다. 자신이 독일 농부들에게 도움을 얻은 하일스베르크에서 온 서신과 2년간 구금되어 있었다는 사실에 대한 증명들이 샤베르 대령의 신무기로 등장한다. 데르빌이 복잡한 재판 준비를 하는 동안, 샤베르 대령은 이집트 시절부터 전우였던 베르니오의 집에서 그 집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소일한다.
모든 준비를 마친 데르빌은 페로 부인과 담판에 나선다. 그 과정에서 페로 부인은 샤베르 대령이 오래 전에 픽업한 매춘부 출신이라는 점이 들어나기도 한다. 모든 것이 어지러웠던 시절, 고아 샤베르 대령은 자수성가해서 나폴레옹의 휘하가 되어 아일라우에서 기 원수, 다부 원수와 싸운 역전의 용사였지만 1819년 봄, 그의 모습은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보잘 것 없는 노인에 불과했다. 자신의 모든 것을 파렴치하게 빼앗은 전처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지워 버리길 원한다. 이 파란만장한 이야기의 결말이 순탄치 않을 것을 발자크는 예고한다.
임시적이긴 했지만, 대혁명과 제 1제정시대의 계속된 전쟁이 마무리되고 평화를 찾아 가기 시작한 왕정복고 시대에 대한 발자크식 스케치가 <샤베르 대령>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이 발표된 1832년에는 이미 7월 혁명으로 부르봉 왕가의 반동정치에 조종이 울린 뒤였다. 대혁명의 맛을 본 프랑스 민중들은 더 이상 특권계급의 통치를 용인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페로 부인으로 대표되는 왕정복고 시대에 앙시앵 레짐의 부활을 꿈꾸던 이들에 대한 발자크식 조롱이 <샤베르 대령>에 담겨 있지 않나 싶다. 그래봐야 너희들의 꿈은 모두 일장춘몽에 불과했다고.
지금도 그렇지만, 잘못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는 법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데 그 법의 도움에는 많은 재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재력과 시간으로 잘못된 것들을 그대로 유지할 수도 있다는 말이 아닌가. 결국 현재 자신의 억울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샤베르 대령의 모습에 너무나 공감이 갔다. 190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그 시절과 다를 게 없는 현실이 암담하기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