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시고백
김려령 지음 / 비룡소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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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닷 웃고 시작해야겠다. <완득이>를 읽으며 혼자 키득대던 게 생각난다. 이 책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아이들의 대화가 참 재미있다. 내가 항상 우리의 어린이 청소년 책과 외국의 책에서 느끼는 결정적인 차이가 바로 그런 부분이었다. 어떤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지 않지만 몇 다리 건너면 전체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는 것, 그러면서 실실 웃음이 나오는 것, 그게 우리 책에는 부족했다. 그런데 이 작가의 책은 다르다. 물론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것과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것은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기에 이 작가의 책 중에서도 어린이를 대상으로 하는 책은 <완득이>나 <가시 고백>과 같은 맛은 느낄 수 없다. 그러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는 많은 책들이 아직도 구구절절 설명하는 상황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이 작가의 책은, 다르다.

 

  완득이가 외국인 엄마와 장애 아버지를 둔, 일종의 불우한 환경의 아이였다면 이번에 나오는 해일이는 아주 정상적인 가정에서 자라는 평범한 아이다. 과연 '정상'이란 무엇인가의 기준이 모호하니 평범한 가정이라고 해두자. 여하튼 해일이는 아버지가 조그만 아파트 관리소장을 하시고 어머니는 집에서 살림하시며 재미있는 형이 있는, 그야말로 겉보기에 아주 평범한 가정에서 사랑을 받으며 자라는 고등학생이다. 부모님이 종종 싸우긴 하지만 그것은 어느 집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싸움이지 이혼을 암시하는 싸움은 아니다. 다른 무엇보다 해일이네 가정에는 서로에 대한 신뢰와 사랑이 있다. 그런데 왜 해일이는 물건을 자꾸 훔치는 걸까. 그것도 아주 완벽한 방법으로.

 

  해일이는 친구를 원하지만 구태여 나서서 친구를 만들지 않는다. 자신의 손이 머리의 통제를 벗어나서 혼자 움직이는 통에 친구의 전자수첩을 훔치고, 그것을 머리의 통제를 받고 팔아버린다. 가끔 슈퍼에 가서 건전지를 훔쳐다가 세트를 만들어서 파는 걸 보면 이건 도벽이다. 그야말로 필요해서 훔치는 것 생계형도 아니고 누군가가 시켜서 어쩔 수 없이 하는 것도 아닌, 자신의 손이 녹슬었나 아닌가를 시험해 보는 것이라나. 그러면서 은근히 들키기를 바란다. 그래야 다음부터 훔치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솜씨가 어찌나 좋은지 매번 무사통과다. 나 참, 이런 재주를 타고 나기도 하다니. 근데 한편으론 멋져 보이니 원, 문제다. 

 

  언제나 외톨이로 지내던 해일이에게 처음으로 마음을 나누고 싶은 친구가 생기는데 하필이면 그 중 한 명이 전자사전의 주인이다. 그리고 결국 예정대로 도둑질을 하다 들키고 만다. 슈퍼마켓에서 들킨다면 창피를 당하고 말면 그만이지만 친구에게 들키면 모처럼 연결된 친구관계가 끊어질지도 모른다. 해일이도 그걸 잘 알기 때문에 진오에게 들켰을 때 그런 이야기를 한다. '너희들이 만약 나와 친구가 되기 전에 알았다면 어땠을까'하고. 물론 진오도 해일이가 친구이기 때문에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며 괴로워하는 것이고. 그들의 고민대로 친구가 되기 전에 알았다면 해일이는 기피해야 하는 단순한 도둑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것이다. 원래 친밀한 사이에서는 객관적인 판단이 어려운 법이다. 그것이 정당하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잘못된 길을 가다가도 제자리를 찾을 수 있는 것일 게다. 예전에는 모든 것에 동일하게 원리 원칙을 적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꼭 그렇지 않을 수도 있음을 시인한다. 나도 나이가 드나 보다.

 

  이들의 우정은 병아리를 매개로 싹트지만 독자들은 언제 해일이의 본모습이 들킬까 조마조마하기만 하다(그런데 나중에 들키는 장면도 심각하지 않고 오히려 유쾌하다. 이 점이 이 작가의 매력이기도 하다). 그 와중에도 해일이 식구들의 행동은 배꼽잡게 만든다. 특히 해일이 형의 재치있는 말투는 배우고 싶을 정도다. 아무리 행복해 보여도 누구나 작은 고민은 가지고 있듯이 지란도 평탄치 못한 가정사 때문에 혼자 힘들어하지만 친구들 덕분에 잘 극복해 나간다. 당연히 해일도 아까운 손재주를 사용하지 않기로 하고. 만약 현실에서 도벽이 이처럼 마음 먹는다고 바로 손을 씻을 수 있을까 그것이 의문이긴 하지만 소설에서, 그것도 청소년 소설에서 계속 도둑질을 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결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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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머리 앤 올 에이지 클래식
루시 M. 몽고메리 지음, 최지현 옮김 / 보물창고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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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도서관(방학이지만 학교에 나오는 아이들이 안쓰러워 조용히 하라는 말도 못하는 이곳 도서관은 아이들에게 일종의 휴식공간이다.)에서도 꿋꿋하게 읽고 집에 가자마자 할 일도 미룬 채 새벽까지 다 읽고 잠들었다. 어린 시절 만화를 보았기에 이미 결론이 어떤지, 중간에 어떤 이야기들이 있는지 알고 있는데 무엇이 이 책에 빠져들도록 했을까. 만약 읽자마자 글을 썼다면 상당히 감상적인 이야기가 많았을 텐데 밤이 지나고 낮이 되니 이성을 되찾았다. 덕분에 나중에 쓴 글을 보며 부끄러워할 일은 줄어들었지만 온전한 마음을 전하기에는 뭔가 부족한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빨간 머리 앤> 만화를 보았듯이 나도 그랬다. 저절로 노래가 흥얼거릴 정도로 친숙한 이야기다. 그렇다고 꼬박꼬박 챙겨보는 만화는 아니었다. 그런데 희안한 것은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남동생도 이 만화를 엄청 좋아한다는 사실이다. 내가 이 만화를 보며 좋았던 것은 무엇보다 아름다운 배경이 아니었나 싶다. 봄이면 자연이 싹트는 과정이 보이고 벚꽃과 사과꽃이 만발한 곳에서 앤이 빨간 머리를 휘날리며 뛰어다니는 모습이 아직도 선하다. 그러니까 나는, 그리고 동생은 그런 자연을 동경했던 것이다.

 

  책을 읽으며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나오는 묘사가 나를 다시 설레게 했다. 길 옆으로 나무가 우거져 아치 모양을 이루고(생각만 해도 낭만적이다!), 집 뒤로 난 오솔길을 따라가면 작은 숲이 나오다가 어느 순간에는 배가 다닐 정도로 충분하지만 그다지 크지 않은 호수가 있는 곳, 바로 내가 꿈꾸는 곳이다. 물론 그곳에서 살기에 편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마릴라와 매튜가 과수원을 하는데 사실 과수원(목장도 마찬가지다.)이라는 곳이 보기에는 낭만적이어도 일이 오죽 많은가 말이다. 바느질도 해야 하고 겨우내 필요한 땔감도 준비해야 하고 저장식품까지 직접 만들어야 하니 쉴 틈이 없겠다. 시대적 배경이 1900년대 초라는 사실을 이럴 때 느낀다. 옷도 직접 만들어 입고 여자는 배울 필요가 없다고 느끼며 마차를 타고 이동하는 모습조차 낭만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게다가 캐나다를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내가 상상하는 모습이 더 낭만적으로 각색되는지도 모르겠다.

 

  한번 말을 시작하면 온갖 상상을 덧붙여 이야기를 하는 앤의 모습이 떠오른다. 책에서도 입을 열었다 하면 한 페이지는 후딱이니 말이다. 마릴라처럼 냉철하고 상상의 여지가 없는, 무뚝뚝한 사람이 앤의 말을 듣기가 참으로 괴로웠을 것이다. 가끔 딸도 학교에서 돌아오면 그날 있었던 일을 쫓아다니며 이야기해서 귀찮아했던 기억이 난다. 물론 대화법을 적용해서 처음에는 잘 들어주고 공감도 해주지만 차츰차츰 시간이 지날수록 웃음만 짓다가 급기야 먼저 일어나거나 '아직도 할 말이 남았어?'라는 말을 하곤 했다. 마릴라가 이야기할 틈을 주지않고 자신의 이야기만 하던 앤이 나이가 들수록 말수가 적어지는 걸 보며 내가 더 아쉬웠다. 그리고 마릴라가 앤이 자라는 것이 한편으론 대견하면서도 섭섭해 하는 마음이 충분히 이해된다. 나도 그랬으니까. 아니, 아이를 키우는 부모라면 대부분 그런 이중적인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나는 기분을 솔직히 표현는데 서툴다. 특히 단점이나 과거의 안 좋은 기억을 쉽게 드러내지 못한다. 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상처가 되어 안에서 조금씩 자라기도 한다. 그런데 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고아원에 있을 때 얼마나 힘들었는지 말하거나 다른 사람이 자신의 기분을 나쁘게 했을 때는 거기에 즉각 반응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솔직히 이야기한다. 물론 기저에 그런 어린이의 말을 들어주는 어른들이 존재하는 문화가 형성되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다. 아마도 앤의 그러한 성격 때문에 바르게 자랄 수 있었을 것이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지만 끊임없이 새로운 실수를 하는 앤, 그래서 실수조차 배움이 되고 주변 사람들에게 웃음을 준다.

 

  마지막에 장학금을 받아서 대학에 갈 기회를 얻지만 포기하고 에이번리에 남기로 하는 걸 보며, 만약 예전 같았으면 그 아까운 기회를 버린 것에 안타까워 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탁월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기 때문일까. 그건 아닐 것이다. 지금까지의 시각이 하루 아침에, 그것도 특별한 이유없이 달라질 리는 없을 테니까. 그건 아마도 때로는 야망보다 사랑이 더 소중하고 지킬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앤의 어린 시절 뿐만 아니라 내 어린 시절의 추억까지 간직하고 있는 초록지붕 집을 나 또한 떠나고 싶지 않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기숙사에 들어가서 지내는 앤의 모습을 보니 곧 기숙사에 들어갈 딸이 생각난다. 그러면서 딸도 앤처럼 열정과 낭만을 가지고 생활했으면 좋겠다. 물론 100여 년이 넘는 차이와 문화적 차이 때문에 앤처럼 밖에 나가 실컷 뛰어놀 수는 없겠지만. 여하튼 내 어린시절을 추억하며 그 때 느꼈던 설렘을 만나는 시간인 동시에 엄마가 되어 앤을 바라보는 시간-그래서 약간 혼란스럽기도 했다-이었다. 그러니까 앤에게 나를 대입하기도 했다가 마릴라에게 대입하기도 했다가 나중에는 앤에게 딸을 대입하며(신기한 건, 이때는 마릴라에게 나를 대입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읽었다고나 할까. 그러면서 이런 책을 읽으며 감동하고 꿈꾸는 감성이 아직 내게 남아있다는 사실이 새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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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덟, 너의 존재감 르네상스 청소년 소설
박수현 지음 / 르네상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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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가 전반적으로 무한경쟁을 추구하는 상황에서 어디 청소년만 힘들겠냐만은 아무래도 정신적으로나 여러 상황으로 보건대 청소년기가 무한경쟁에 가장 많이 노출되어 있지 않나 싶다. 특히 근래 들어 일어난 사건들은 그 또래 청소년을 키우는 부모로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이것이 최근에 부각되어 나타난 것일 뿐 그런 일이 계속 있어왔다는 사실이 더 가슴 아프다.

 

  아이들이 상급 학교에 진학하거나 학년이 올라갈 때 가장 걱정하는 부분이 친구 문제다. 둘째도 이번에 중학교에 가는데 벌써부터 걱정이다. 워낙 순해 보여서 다른 아이들의 타겟이 되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다. 물론 큰아이 때도 똑같은 걱정을 했다. 그런데 그럭저럭 잘 지나갔다. 항상 지나고 나면 별 것 아니라는 생각이 들지만 통과하기 직전이나 통과하고 있을 때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똑같은 일이 일어나라는 법은 없기에 마음을 놓을 수가 없다.

 

  이 책은 세 명이 자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들려준다. 처음 순정이의 이야기를 읽으며 참으로 존재감이 없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왜? 순정이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니까. 그런데 뒤에 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읽어 보니 전혀 아니다. 사람은 이처럼 자기 위주로 생각하는 버릇이 있다. 친구들과 전혀 교류를 하지 않고 학교도 야자도 마음 내키는대로 하기에 다른 친구들이 아예 없는 사람 취급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본인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하지만 다른 친구들은 아무 말 안해도 모두 두려워하는 순정이를 언제나 지켜보고 있다. 때로는 경외감을 느끼면서. 순정이 자신은 존재감이 없다고 느끼고 그러기를 바라지만 오히려 다른 친구들은 강한 존재감을 느끼다니. 대신 여기저기 끼어들어 아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강아지가 사실은 남에게 잊혀질까 두려워 과한 행동을 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겉으로 드러난 모습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해서는 절대 안 된다.

 

  똑똑한 학생들은 모두 피하는 고등학교에서 스스로를 별 볼 일 없는 학생이라고 자책하며 살아가는 아이들의 이야기. 그러나 대부분의 고등학생들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럼 잘난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 암튼 그래도 이 아이들은 좋은 선생님을 만나서 마음을 치유할 기회를 가졌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래도 쿨샘은 상담에 대해 알고 또한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사람이 틀림없다. 누가 따스한 말이 필요한지, 누가 고민을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지 알고 있는 이런 선생님들이 많다면 아마 우리네 청소년들도 많이 달라질 텐데.

 

  아무리 강한 척하고 혼자 다 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해도 청소년은 아직 도움이 필요하고 따스한 관심과 격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원래 당연한 것을 이렇게 깨달아야 하다니. 사람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변하는 모습은 보기가 참 좋다. 그것이 자신에게도 적용돼야 한다는 걸 자꾸 깜빡해서 그렇지. 쿨샘 덕분에 세 아이와 반 아이들이 차츰 변하는 모습을 보니 책을 덮는데 마음이 한결 가볍다. 비록 그들의 상황이 달라진 것은 없지만 적어도 마음은 달라졌으니까. 어찌보면 그들의 힘으로 자신들이 처한 상황을 바꿀 수 없는 것이야 당연하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 마음을 바꾸는 것이다. 단, 자존감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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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주스 가게 - 제9회 푸른문학상 수상작 푸른도서관 49
유하순.강미.신지영 지음 / 푸른책들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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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편과 아들은 말귀가 어둡다. 똑같이 딸의 이야기를 듣고 있어도 꼭 다시 물어봐서 중계방송을 하게 만든다. 처음 몇 번은 이야기해 주지만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아예 대꾸를 안 하곤 한다. <올빼미, 채널링을 하다>의 유성이처럼. 남편은 이어폰 때문에 가는 귀가 먹어서 그렇다지만 내가 보기엔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일 확률이 크다. 유성이가 나중에 말귀가 어둡다는 말을 듣지 않게 된 것도 모두 상대방의 말에 집중했기 때문이지 채널링을 해서가 아니었던 것처럼 말이다. 다른 사람의 마음 속 이야기가 들리는 이상한 경험을 했던 것도 결국 다른 사람의 마음을 이해하려고 애썼기 때문일 것이다. 뭐, 모두 그런 경험을 하는 건 아니니 유성이가 특별한 경험을 한 것은 맞지만.

 

  청소년 소설이나 동화에서 보면 공부 잘 하는 아이들은 성격이 못 됐다거나 아예 다른 아이들이랑 어울리지 않고 성적에만 연연하는 인물로 그려지곤 한다. 그래서 공부를 좀 못해도 성격이 좋다거나 발전 가능성이 많은 중간 정도의 인물이 주인공으로 많이 그려진다. 공부 잘 하는 아이가 주인공이라면 무조건 성적 때문에 고민하는 인물로만 그려진다. 왜 그들의 마음에는 신경쓰지 않는지, 솔직히 불만이었다. 그런데 <프레임>에서는 지금까지와는 약간 다른 입장에서 그들을 바라봐서 신선했다.

 

  민준과 성택은 학교에서 기대를 걸 만한 학생들이다. 지금까지 소설에서 그려졌던, 공부만 잘 하고 성격이나 태도는 엉망인 그런 인물이 아니라 모든 것이 무난한 학생들이다. 게다가 성적이 떨어져서 고민하거나 이성친구 때문에 방황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 속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일을 소재로 인물의 내면심리를 잘 그린 이야기다. 그래서 민준이 마음을 충분히 이해했다가 성택의 상황에 안타까워하기도 했다가 민준 엄마의 행동이 나쁘다고만 말할 수 없다는 생각도 드는 등 온갖 인물에 나를 대입해 보았다. 그만큼 심리묘사가 곳곳에 잘 들어있다는 얘기일 것이다. 옳은 게 어느 것인지는 알지만 현실적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우리는 얼마나 용감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그렇기에 민준의 행동에 대해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없을 뿐더러, 그걸 알기에 성택도 민준에게 오히려 고마웠다고 하는 것일 게다. 그런 경험과 생각 덕분에 전에는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고 그들의 상황이 보이는 것, 이것이 바로 성장 아닐런지. 우리는 모두 프레임에 갇혀 산다고 한다. 문제는 내가 만든 프레임에 갇힐 수도 있지만 다른 사람이 만들어 놓은 프레임에 갇히기도 한다는 거지. 그리고 후자의 경우 문제가 심각해질 수 있다. 다른 사람이 판단하고 규정지은 것을 마치 내가 그렇게 한 것처럼 착각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청소년들도 이 이야기를 읽으며 그런 생각을 하려나.

 

  나머지 두 이야기는 '이야기'로는 재미있지만 내 아이가 경험하지는 말았으면 하는 그런 이야기다. 이 무슨 이율배반적인 심보인지. 학교에서 정학을 맞고도 별로 잘못했다거나 반성하는 기색이 없던 건호가 엄마 가게를 맡으면서 서서히 변해가는 모습이, 다행이다 싶다. 나쁜 일에서 손을 떼려면 상후와 민기에게 호된 신고식을 치러야 할 일이 남아있지만 이야기에는 나오지 않아서 나는 신경쓰지 않아도 되니 그것도 다행이다. 진이가 콩가루 집안에서도 건강하게 잘 살고 있어서 또 다행이다. 엄마가 일찍 돌아가시고 나이가 열 살 밖에 차이나지 않는 새엄마인 누나와 지내다 아빠마저 돌아가셔서 이젠 둘 만이 남겨진 상황에서도 어쩜 이리 마음이 예쁜지. 환경이 암울하면 대개 그 속에 있는 인물도 판에 박은 듯이 암울하게 그려지는 다른 이야기와 달라서 좋았다. 그러면서도 모든 것을 낙천적으로만 보지 않아서, 또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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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밀꽃 필 무렵 (문고판) 네버엔딩스토리 32
이효석 지음 / 네버엔딩스토리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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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을 읽을 무렵은 가을이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은 옷깃을 잔뜩 여미게 만드는 겨울의 초입에 들어서고 있으니 읽을 때의 감흥이 꽤 사라진 뒤다. 한창 햇볕은 쨍쨍하고 공기는 건조한 전형적인 가을날에 문득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이 생각났다. 왜, 가을이면 메밀꽃이 하얗게 피지 않던가 말이다. 게다가 당시 1930년대 작가들의 동화를 읽다가, 별다른 반전이나 강한 효과없이 잔잔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메밀꽃 필 무렵>이 그리워졌었다. 마침 그때 이효석의 작품이 실린 이 책을 읽었으니 우연치고는 참 신기하다. 

  항상 그렇듯이 어렴풋이 기억나는, 학창 시절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으면 이런 내용이 있었던가 싶을 정도로 생소하고 때론 낯설기까지 하다. 그러니까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아주 단편적인 부분이었던 셈이다. 어째 모든 책이 하나같이 그런지, 원. 이효석의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는 <메밀꽃 필 무렵>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위안을 삼을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이나마 여러 부분이라는 점이다. 봉평을 지나거나 그곳으로 여행 갈 때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이야기, 다른 작품은 읽어볼 생각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지나치게 이효석을 대표하는 작품이 이 책의 표제작이다. 

  그런데 이 책 덕분에 그의 다른 작품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이효석이라는 인물에 대해 잘 알지 못해서인지 어떤 이야기는 이것이 소설이 아니라 수필이나 일기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작가와 주인공을 동일시하고 있었다. 특히 <들>에서 주인공은 왜, 무슨 일로 학교를 못 다니며 문수는 또 무슨 이유일까 궁금해서 작가의 그 시절을 찾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분위기로 보아 개인적인 일은 아닌 듯하고, 그렇다고 80년대처럼 그런 이유는 아닐 테고,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궁금했으나 작가는 끝내 자연만 이야기할 뿐 별다른 인간사를 들먹이지 않는다. 모르긴해도 작가가 시대에 좌절했던 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이 책은 청소년이 주인공인 단편들을 모아 놓았다고 한다. 전혀 몰랐던 이야기가 대부분이어서 새로웠다. 물론 그래서 좋았다. 간혹 이야기가 어렵다고 느껴지기도 했지만 그것은 아마 내가 이효석이라는 작가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강미 작가가 써놓은 작품해설을 살짝 빌리자면 <들>의 경우는 초창기의 작품색과는 많이 다르다고 한다. 어쩐지. 말로는 들을 예찬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좌절과 고통이 배어나고 다시 돌아가고 싶다는 열망을 느꼈던 터다. 대신 <도시와 유령>은 작가의 사회비판의식이 짙게 느껴졌다. 주인공이 청소년이라고 해서 그것을 청소년소설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청소년들은 굳이 청소년소설만 읽어야한다고 선을 그을 필요 또한 없다. 즉 어떤 작품이든 읽어도 무방하므로 이 책이 청소년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모아놓았다는 것에 신경쓸 필요는 없다. 이효석의 좋은 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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