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아니라 당신이 착각한 거야
어느 블로그(서재)에 들어갔더니 악성 댓글이 몇 개나 있었다. 다른 블로그에서도 악성 댓글을 본 적이 있다. 이런 댓글을 쓰는 사람이,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모양이다.
TV로 개그 프로를 보다가 어느 개그맨의 말에 크게 웃고 말았다. 내 기억을 더듬어 써 보면 이렇다.
“개그맨은 왜, 꼭 웃길 거라고 생각하니? 왜 개그맨은 웃겨야 한다고 생각하니? 나, 안 웃길 거야. 앞으로도 안 웃길 거야.”
나, 이 말 듣고 웃겨서 죽는 줄 알았다.
또 다른 개그맨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뚱뚱했다.)
“사람들은 왜, 뚱뚱하면 맛있는 음식집을 잘 알 거라고 생각하니? 맛집으로 어디 아냐고, 왜 다 나한테 물어보니? 뚱뚱하면 맛집을 알아야 하니? 나, 맛집 몰라. 나, 귀찮아서 우리 집에서 가까운 음식점에 가서 대충 먹는다.”
정말 재밌지 않은가. 얼마나 신선한 발상의 유머인가.
이런 발상으로 나도 다음과 같이 써 본다.
“왜 블로거는 글을 잘 써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건 당신의 착각이야. 나, 그냥 글을 쓰기 좋아해서 블로거가 된 거야. 나, 글 잘 쓰지 않을 거야. 앞으로도 글 잘 쓰려고 노력하지 않을 거야."
블로거에겐 이런 배짱이 있어야 할 것 같다. 블로거 자신이 글을 잘 쓰는 줄로 착각하고 우쭐대는 모습이 싫어서 악성 댓글을 쓰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을 향해 착각은 바로 당신이 한 것이라고, 블로거가 글을 잘 써야 한다고 당신이 착각한 것이라고 말하는 배짱 말이다. 그래야 악성 댓글에도 기죽지 않고 잘 버틸 수 있을 것 같다. 개그맨들에게 한 수 배웠다.
“기죽지 마세요, 악성 댓글을 받은 사람들 파이팅!”
나는 웃기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이 매력적으로 보이면서 좋아진다.
“나 당신들 팬 할래, 개그맨들 파이팅!”
쇼펜하우어는 이런 말을 남겼다.
인간은 바보라도 괜찮고 성질이 못돼먹어도 괜찮다. 어리석은 언행은 만인의 권리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의 우둔함 ‧ 열등감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하는 것은 죄악이다. 그것은 선량한 풍속과 예절을 거역하는 행동이기 때문이다.
- A. 쇼펜하우어 저, <쇼펜하우어 인생론>, 36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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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부부들의 착각
사랑에 대한 명언 중 이런 게 있다.
“무수한 사람이 너무 희미한 불빛 아래 여자를 보고 사랑에 빠졌다. 좀 더 밝은 곳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슈발리에)
대부분의 사랑은 착각이 만든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겠다. 그런데 사랑한다고 여기는 착각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기는 착각도 있는 것 같다. 평소 부부 사이가 그다지 좋지 않은 부부도 한쪽의 배우자가 죽고 나면 깊은 슬픔에 빠진 경우를 많이 봤는데, 그중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었다.
“늘 가까이 있어서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몰랐어요.”
이것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은 한쪽의 배우자가 심각한 병으로 다 죽어가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될 듯하다.
3. 바보짓에 대한 해석
내가 어느 블로그(서재)에 들어가서 이런 댓글을 쓴 적이 있다.
“전 왜 바보 같을 때가 많은 건지 모르겠어요. 책에서 얻은 지혜는 다 어디 가고, 점점 바보가 되는 느낌이에요. 바보짓해서 미치겠어요.ㅋ”
그랬더니 그곳의 서재인님이 이런 좋은 답글을 달으셨다.
“pek님께서는 분명히 책을 통해 더 지혜로워진 게 틀림없으리라 믿습니다. 다만 '점점 바보가 되는 느낌'은 '기준'이 바뀌었기 때문일 거예요. 책을 점점 더 많이 읽을수록 종전보다 훨씬 더 '높은 기준'이 생겨날 테고, 그런 새로운 기준에 비춰 봐서 자기 자신이 바보가 되는 것처럼 착각할 뿐이겠지요.”
이 분의 말씀처럼 정말 내가 바보라고 생각한 게 착각이면 좋겠다. (이 통찰력 있는 답글에 감탄했다. 꼭 쇼펜하우어의 말씀 같다.)
4. 허태균 저, <가끔은 제정신>
이 책에 착각의 즐거움에 대한 글이 있다.
복권구입이 금전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이 아니라는 것은 복권을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안다. 그럼에도 복권이 그렇게 많이 팔리는 것은 다른 근본적인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것은 바로 ‘희망’이라는 심리적 기능이다. (…) 일요일 아침에 사면 그 상상의 즐거움을 다음 주 토요일까지, 일주일 동안 누릴 수 있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에 그날의 추첨복권을 산다면 고작 반나절밖에 즐길 수 없다. 같은 돈을 투자해서 누구는 일주일 내내 상상을 즐기며 삶의 고통을 잊게 해 주는 효과를 누리는데, 누구는 같은 돈을 투자해 2시간만 즐긴다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인가. 그러므로 복권은 일요일 아침에 사야 한다.
- 허태균 저, <가끔은 제정신>, 83쪽~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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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을 조심하라는 글도 있다.
그래서 내 친구는 현명하다. 엊그제 회를 먹고 비브리오 패혈증으로 누군가 사망했다면, 회는 오늘쯤이 가장 안전하다. 보건당국은 횟집들을 상대로 일제점검에 들어갔을 테고, 횟집 주인들은 수조와 생선의 위생에 각별히 신경 쓸 것이다. 아마 오래된 생선도 버리고 수조도 새로 청소하고 최대한 깨끗하게 유지할 것이다. 그런데 손님은 한 명도 없다. 그래서 그때 횟집에 가면 서비스는 물론 최고의 대접을 받을 수 있다. 가장 안전한 생선을 가장 싸게 먹는 것이다. 나와 내 친구가 그렇게 안전한 생선을 실컷 즐기고 나면, 얼마 뒤 사람들은 다시 횟집에 나타나기 시작한다. 이제는 안전할 거라 안심하며, 그때가 언제냐 하면 그 깨끗하던 수조에 다시 이끼가 끼기 시작하고 싱싱하던 생선이 흐물흐물해질 때쯤이다. 역시 똑똑한 친구 따라 강남 갈 만하다.
- 허태균 저, <가끔은 제정신>, 131쪽~13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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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나에 대해 착각하는 게 있고, 나는 당신에 대해 착각하는 게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알고 있는 ‘나’는 내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내가 알고 있는 ‘당신’은 당신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구입한 책이 <가끔은 제정신>이다. 책 제목이, 우리는 늘 착각 속에 살고 가끔만 제정신이라는 뜻인 것 같다.
이 책을 통해 사람들의 착각이 얼마나 심한지 살펴보면 놀라울 정도다. 물론 나 역시도 착각을 하고 산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다.
5. 때론 착각이 필요하다
나 역시 착각을 하고 산다. 지금은 좋은 글을 쓰지 못하고 있지만, 언젠가는 좋은 글을 쓰게 될 것이라고 착각한다. 언젠가는 내게 책을 내자는 출판사가 있을 것이라고 착각한다. 내 글의 애독자가 생길 것이라고 착각한다. 착각인 줄 알면서도 착각은 즐겁다. 착각임을 아는 것은 그 가능성이 희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며, 그래도 즐거운 것은 그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마치 로또 복권을 사서 당첨이 되지 않을 걸 뻔히 알면서도 혹시 당첨될지 모른다고 착각하고 즐거워하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착각하는 사람에게 찬물을 끼얹고 싶지 않다. 물론 그 착각이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게 아닐 경우에 한해서다. 경우에 따라선 착각을 깨게 하는 진실이 마음에 상처를 주는 독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착각해서 행복한 사람이 있다면, 그 착각을 이왕이면 긴 시간 누리도록 해 주고 싶다. 그가 먼 훗날 임종의 시간에 그동안 살아온 삶을 행복한 시간과 불행한 시간을 나눠 계산해 보았을 때, 불행한 시간보다 행복한 시간이 많기를 바란다. 그렇다면 착각도 좋은 것이다. 누군가에겐 살기 어려운 세상이고, 누군가에겐 우울한 세상이며, 누군가에겐 싱겁기 그지없는 권태로운 세상이다. 이런 세상을 살아가려면 때론 ‘착각’이 필요한 것이다.
이번에 책을 7권 구입하면서, 이 책들을 읽고 나면 내가 더 똑똑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내게 쇼펜하우어는 이런 말을 해 주고 싶을 것이다.
일생을 독서를 하며 지혜를 얻은 사람은 어떤 나라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많은 여행기에서 얻은 사람과 비슷하다. 이런 사람은 많은 것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줄 수 있지만, 결국 그 나라의 상태에 대해 정리된 지식, 즉 명확한 기초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반대로 일생을 사색하며 보낸 사람은 실제로 그 고장에 발을 들여놓은 사람과 같다. 이런 사람만이 화제에 오른 이야기들의 진상을 알고 여러 가지 관련을 이해하며, 그 나라 사정에 정통하고 있다.
- A. 쇼펜하우어 저, <쇼펜하우어 인생론>, 3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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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나는 책을 읽으면 똑똑해질 것이라고 착각하련다. 이 착각이 있어야 열심히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때론 착각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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