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어떤 책은 읽지 않아도 갖고 있는 것만으로도 뿌듯함을 느끼게 한다. 이 책이 그런 책 중 하나다. 무려 1492쪽이다. 33장의 서양 철학과 33장의 동양 철학으로 나누어 총 6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서양 철학과 동양 철학으로 나눠 두 권의 책으로 출간했더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너무 두껍고 무거워서다. 책을 읽으려면 책을 들어야 하는데 무거운 게 단점이다. 그러나 동서양을 모두 공부할 수 있는 이 책의 내용은 그 단점을 상쇄하고도 남음이 있다. 전반부만 읽어 봐도 이 책의 진가를 알 수 있다. 














강신주, <철학 VS 철학>

  

저자의 철학 강의를 유튜브를 통해 많이 시청했는데 참 재미있다. 그래서 구매하게 된 책이다. 


편의상 한자를 빼고 옮긴다.


중국 송나라의 도원이 편찬한 《경덕전등록》에는 이와 관련된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 수록되어 있다. 단하(739~824) 스님이 목불을 불태운 이야기로 흔히 ‘단하소불’이라고 알려진 유명한 에피소드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혜림사라는 사찰에 들른 단하는 날씨가 너무 추워서 나무로 만든 불상을 태우기 시작했다. 당연히 혜림사의 주지는 어떻게 부처를 나타내는 불상을 태울 수 있느냐고 힐난한다. 그러자 단하는 사리를 찾으려고 이 불상을 태우고 있다고 대답한다. 이에 혜림사 주지는 나무에 무슨 사리가 있느냐고 반문하다가 마침내 자신도 모르게 깨달음에 이르게 된다. 도대체 혜림사 주지는 무엇을 깨달았던 것일까? 그는 목불에도 부처처럼 숭배받아야 하는 본질이 있다고 맹신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자기 입으로 목불이 나무에 불과하다고 말해버린 것이다. 바로 이 순간 그에게는 집착으로부터의 해방, 즉 깨달음이 찾아온 것이다.(40쪽) 


바로 이 대목이 중요하다. 목불은 부처가 아니라 나무라는 자명한 사실을 그는 자각한 것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제부터 목불을 포함한 모든 조형물을 땔감으로 써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 또한 본질에 대한 새로운 집착일 테니 말이다. 중요한 것은 상황과 문맥에 따라 행동할 수 있는 자유다. 사찰에 하루 잠자리를 빌려야 한다면 목불에 기꺼이 절을 하고, 얼어 죽을 지경이 되면 목불을 땔나무로 기꺼이 사용할 수 있는 자유 말이다. 본질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창조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어쨌든 ‘단하소불’ 에피소드에서 혜림사 주지의 깨달음은, 그가 목불의 본질이라고 가정한 해묵은 집착에서 벗어났다는 데 있다.(40쪽)


⇨ 무릎을 치게 만드는 글이다. 쉽게 말해 고정 관념에 사로잡히지 말고 고정 관념으로부터 자유로운 사고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요즘 유모차에 의지해 걷기 위하여 유모차를 끌고 다니는 노인들을 볼 수 있는데, 유모차에 꼭 어린아이를 태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벗어남으로써 유모차의 새 기능을 발견한 셈이다. 만약 유모차에는 반드시 어린아이를 태워야 한다는 생각에 갇혀 버리면 새로운 아이디어를 발상하기 어렵다. "본질에 구속되는 것이 아니라, 본질을 창조할 수 있을 때에만 자유는 가치가 있는 법이다." 





2.

며칠 전이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흰 눈이 나무에 소복소복 쌓여 있었다. 마치 나뭇잎마다 고봉밥을 들고 있는 것 같았다. 눈을 고봉밥으로 표현한 다음 시가 떠올랐다.



조찬 

                        나희덕


깃인가 꽃인가 밥인가

저 희디흰 눈은

누구의 허기를 채우려고

내리고 또 내리나


뱃속에 들기도 전에 스러져버릴

양식을, 그러나 손을 펴서

오늘은 받으라 한다


흰 밥을 받고 있는 언 손들


목튤립 마른 열매들도

꽃봉오리 같은 제 속을 다 비워서

송이송이 고봉밥을 받고 있다


박새들이 사흘은 쪼아먹고 가겠다(18쪽) 

 
















나희덕, <사라진 손바닥>










어두워진다는 것

                        나희덕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멀리서 은수원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5시 45분에서 기억은 멈추어 있고

어둠은 더 깊어지지 않고

아무도 쓰러진 나무를 거두어가지 않는 것


그토록 오래 서 있었던 뼈와 살

비로소 아프기 시작하고

가만, 가만, 가만히

금이 간 갈비뼈를 혼자 쓰다듬는 저녁(10~11쪽)















시요일 엮음, <사랑해도 혼나지 않는 꿈이었다>



소설은 제목을 모르고 읽어도 무방하나 시는 다르다. 시의 제목을 알고 읽어야 한다. 시의 제목과 연관시켜야 이해할 수 있는 시가 많기 때문이다. 


가령 ‘어두워진다는 것’이란 시를 시의 제목과 연관시켜 읽으면 다음과 같이 된다. 


....................

어두워진다는 것은 

5시 44분의 방이

5시 45분의 방에게

누워 있는 나를 넘겨주는 것


어두워진다는 것은 

슬픈 집 한채를 들여다보듯

몸을 비추던 햇살이

불현듯 그 온기를 거두어가는 것


어두워진다는 것은 

멀리서 은수원사시나무 한그루가 쓰러지고

나무껍질이 시들기 시작하는 것


어두워진다는 것은 

시든 손등이 더는 보이지 않게 되는 것

....................

 

이 시는 시의 제목을 모르고 읽는다면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시인의 발상이 기발하고 참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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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텔게우스 2024-02-25 14: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철학 vs 철학> 저도 재미있게 읽은 책이라 반갑네요.. ㅎㅎ

페크pek0501 2024-02-25 15:01   좋아요 2 | URL
깪!!! 벌써 다 읽으셨다니 깜놀, 입니다. 하긴 출간된 지 십 년도 넘은 책이니 읽으신 분들이 많을 듯합니다.
이처럼 좋은 책을 만나니 저자에게 감사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어떤 철학 강좌보다 유익한 책이라 여겨집니다.
저는 이 책의 오디오북도 갖고 있어요. 윌라 회원인데 이 책도 있더군요. 오디오북으로 먼저 접하고 반해 버렸어요.
좋은 글 발견하면 가끔씩 올리겠습니다.^^

물감 2024-02-25 17: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은 잘 모르지만 고르라면 서양철학 쪽입니다. 동양은 어딘가 빙빙 돌려서 말하는 듯해서요 ㅋㅋㅋ

페크pek0501 2024-02-25 19:45   좋아요 1 | URL
ㅋㅋ 이 책의 구성 중 가장 맘에 드는 것은 서로 반대로 주장한 철학자들의 견해를 대립시켜 설명해 놓은 부분이에요. 저자가 얼마나 애썼는지 짐작이 가더라고요.^^

독서괭 2024-02-25 17: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우왓 목침으로도 못 쓸 두께네요! 제본만 좋다면 소장용으로 좋을 것 같습니다~
나희덕님 시가 참 좋습니다.

페크pek0501 2024-02-25 19:47   좋아요 1 | URL
맞아요, 베개로는 사용 못해요. 소장용으론 멋지지요.
요즘 밴드에 시 한 편 골라 필사해 올리고 있다 보니 시집을 들출 기회가 많네요.^^

댄스는 맨홀 2024-02-25 17: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 두께가 사전입니다. 우와 저 수준의 벽돌책은 감당하기 어려운데 잘 읽으시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세요. 요즘 오디오북이 좋긴 하더라구요.

페크pek0501 2024-02-25 19:51   좋아요 1 | URL
책 뒤에 인명사전, 개념어 사전, 참고문헌 등 많이 수록돼 있어요. 이런 것 빼고 나면 본문은 1300쪽이 넘는 정도예요. 13쪽씩 석 달을 읽으면 될 거예요. 드디어 저도 벽돌책을 샀네요. 벽돌책이 막 팔릴 때마다 저는 그 유혹에 안 넘어갔거든요. 읽을 자신이 없어서요. 그런데 이 책은 철학 강좌를 철학자마다 다 수강하려면 수 억이 드는데 이 책 하나로 해결되니 저렴하구나, 이러면서 구매하게 되더라고요. 저도 오디오북 애용자예요.ㅋㅋ

반유행열반인 2024-02-25 18: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모음 시집 제목은 제가 좋아하는 황인찬 시 무화과 숲 구절이네요 ㅎㅎㅎ

페크pek0501 2024-02-25 19:53   좋아요 0 | URL
예, 이 시집의 17쪽에 황인찬 시인의 시가 나와 있어요.
이 시집에 웬만한 시인들은 다 들어가 있는 것 같습니다.^^

모나리자 2024-02-25 19: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보고만 있어도 든든하고 뿌듯할 것 같은 책이네요! 저도 작년에 사둔 <신곡>이 한 권짜리 1086쪽인데 사고 나서 보니 세 권짜리 <신곡>을 발견하고는 아차 싶었지요. 읽고 난 다음에는 아무리 두꺼운 양장본도 모양이 흐트러지니까요. 읽기 마치고 나면 책거리라도 하셔야겠네요.ㅎ 인용한 글도 좋고 시도 좋군요.
며칠 전 눈 오는 날 멀리 외출했는데 눈 풍경 구경하며 신났었지요.ㅎ
따뜻한 저녁 시간 되세요. 페크님.^^

페크pek0501 2024-02-25 19:55   좋아요 2 | URL
그랬군요. 저도 이걸 두 권으로 판매하는 게 있다면 그걸 사고 싶더라고요.
책을 사고 뿌듯한 것이 이 책이 최고인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예요. 의외로 책이 술술 읽히고 재밌어요.
모나리자 님도 따뜻한 겨울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랜만의 방문이시라 더 반갑군요.^^

서니데이 2024-02-25 20: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강신주 작가 책은 두꺼운 책이기도 하지만, 페이지가 적은 시집 옆에 있어서인지 상대적으로 더 커보이네요.
강신주 저작은 좋은 책도 많이 있지만, 저 책은 너무 두꺼워 보여서 포기해야겠어요.
페크님, 주말 잘 보내고 계신가요. 따뜻하고 좋은 주말 보내세요.^^

페크pek0501 2024-02-28 20:45   좋아요 2 | URL
저도 읽고 싶은 책 중에서 두꺼워서 포기한 적이 있어요. 그래도 천 쪽이 넘는 소설을 읽은 적이 있으니 으쌰, 하고 힘을 내야겠어요. 강신주 저자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더군요. 아무나 할 수 없는 작업을 한 것 같아요.
어제와 오늘, 외출로 바빴네요. 일을 많이 벌려 놓으니 바쁘게 살게 되네요. 서니데이 님도 즐거운 나날 보내시길 바랍니다.^^

:Dora 2024-02-25 21: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철학대철학 ~ 목침 ㅋㅋㅋ두껍긴 해도 소장가치가 있고 내용도 알차서 한 챕터씩 나눠 혼자 스터디 했던 기억이 있네요~ 포기하지 마시고 소장과 정독의 기쁨을 꼭 맛보시길 강력 추천드립니다^^

페크pek0501 2024-02-28 20:47   좋아요 1 | URL
저도 꼭 완독하고 싶습니다. 두껍긴 해도 흥미로운 내용이라 말이죠. 그런데 생각을 하면서 읽어야 해서 한꺼번에 많이 읽진 못하겠더라고요. 혼자 스터디 하셨군요. 저도 그래야 할 것 같아요. 책이 두꺼워 같이 스터디를 할 사람을 구하지 못할 듯해요. 완독하게 되면 완독했다는 내용으로 페이퍼 올리겠습니다. 올해 상반기 안에 끝내야 할 텐데 말이죠. 추천, 감사히 접수합니다.^^

stella.K 2024-02-25 21:4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 벽돌책! 참 이상하지요? 이젠 벽돌책 못 볼 것 같아도 여전히 관심가는 걸 보면.
전 저 책 볼 것 같지가 않아요. 하지만 이렇게 말해 놓고 어느 날 살지도 모르죠. ㅎㅎ
요즘 <안나 카레니나>를 보고 있는데 진도가 참 안 나가더군요.
작년에 부활을 읽은 것으로 봐서 어느 지점만 가면 냅다 읽게 되지 않을까 싶은데도
아직 그 지점을 못 만나고 있어요. 안니와 브론스끼가 뜨거운 사랑을 하게되면 가독성이 붙을까요?
이 책 넘 두꺼워요.ㅠ

아무리 겨울 같지 않은 겨울이어도 겨울은 겨울인가 봐요.
봄 다 되서 눈이라니 했는데 생각해 보면 상대적으로 적은 눈이 오는 서울이지만
겨울이 안쓰럽게도 느껴지더군요. 암튼 겨울은 언제부턴가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들더군요.
오늘도 의외로 쌀쌀하던데 3월이 코 앞이어도 2월은 엄연한 겨울이다 싶네요.

페크pek0501 2024-02-28 20:51   좋아요 2 | URL
벽돌책을 분할해 생각하면 좀 쉬어집니다. 5백쪽짜리 세 권이다, 뭐 이렇게요.ㅋㅋ
안나~ 가 세권이죠? 이름이 길어서 그럴 거예요. 러시아 문학은 이름이 길어서 불편해요.
안나와 브론스키의 사랑, 참 안타까운 결말로 끝나죠.

아직 봄 옷을 입기엔 이른 듯합니다. 저녁이 되면 추워요. 곧 꽃샘 추위도 올 것이니 봄이 따뜻하다는 건 어쩌면 우리의 환상일지도... 4월은 되어야 따뜻할 것 같습니다. 잘 지내십시오.^^

페넬로페 2024-02-26 10:2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얼마 전에 내린 눈은 습기가 많아서 너무 예뻤어요. 올해 내린 눈 중에 제일 예뻤던 것 같아요.
철학이 어려워 접근하기는 힘들어도 관심은 늘 있는데 이 책이 일고 싶어 지네요.
근데 책이 넘 두꺼워 불편하면 조금 화가 나기도 하더라고요^^

페크pek0501 2024-02-28 20:54   좋아요 2 | URL
저도 이번에 눈을 실컷 봤네요. 눈이 오면 거의 녹곤 했는데 이번에 쌓여 있었죠.
철학은 꼭 공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책을 사 보곤 했는데 이 책은 체계적으로 정리가 잘 되어 있어
이것부터 읽고서 흥미롭게 느껴지는 철학자의 저작을 찾아 읽으면 될 듯합니다.
책 두꺼우면 무거워요.ㅋ 저도 팔 힘이 약해서 불편해요. 그래도 완독하고 나면 기쁨이 두 배, 될 것 같아요.
좋은 날들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