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나운 애착 비비언 고닉 선집 1
비비언 고닉 지음, 노지양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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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혀 알지 못했던 작가를, 자전적 에세이로 먼저 만난다는 것은 위험할 수도 있는 선택이다. 대책 없이 사랑고백을 먼저 하는 것과 같은 건지도 모른다. 다행히 고백에 성공하여 관계가 좋게 지속될 수도 있지만 인간적 결함에 실망해 뒤돌아보지도 않고 도망칠 수도 있다.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은 고백자를 받아들이되 천천히, 냉정하게 접근하게 만든다. 현대 도시의 상징인 뉴욕 곳곳을 엄마와 딸이 산책하며 보여주는 대립, 사랑, 감정에는 국적과 인종에 관계없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성이 있다. 책표지의 사진에서 누구나 그들이 모녀관계라는 사실을 알 수 있듯이 그들에게 뿜어지는 맹렬한 애증은 세상 모든 딸과 엄마에게 있는 것이고, 보는 사람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는 다양성도 존재한다.

 

그들은 산책과 동시에 외국에서 건너온 이민자들의 거주지로 이루어진 조각보 같은 곳(p.6)인 뉴욕의 브롱크스에서 오래 산, 과거의 삶도 보여준다. 연대기적 순서가 아닌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연결이 부드럽게 느껴지지만, 사실 그것은 작가의 치밀한 설계에 의해 구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엄마와 딸이 중심이 되는 그들의 얘기에 여자와 결혼이라는 관점이 연결된다. 그것이 나를 끌어당기고, 나 역시 그들의 걷기에 동참할 수밖에 없다.

 

러시아에서 뉴욕으로 이민 온 유대인이라는 정체성, 엄마, 브롱크스에 살던 이웃 여자들은 화자의 성장과정에서 뼈대를 이루어주는 것들이다. 남들보다 금욕적이며 당당하게 살았던 엄마이지만, 결혼으로 대표되는 사회적 관습의 굴레에는 벗어나지 못한다. 딸이 공부하기를 원하지만 거기서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남편의 죽음으로 엄마는 나머지 삶을 슬픔과 우울로 도배해버린다. 그 우울의 증상들은 화자의 모든 것에 영향을 주며, 끝까지 끈끈하게 붙어있다.

 

[우린 둘 다 어떤 면에서 자질 미달이라는 것을, 늘 하던 대로 살다가 우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만다. 우린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게 자기만의 세상에서 고립된 채 살아 온 사람들, 평생 서로의 생활 반경에서 벗어나지 못해 닮아버린 두 여자다.......

가족의 삶이라는 것 모두 해석이 불가능한 세계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p.72]

 

엄마가 집안에 드리운 무거움은 딸의 삶에 부정적이면서도 진취적인 방식으로 나타난다. 결혼은 그녀에게 관습적 관계라는 어쩔 수 없는 식상함과 무기력을, 그 후의 남자들은 육체적 쾌락만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자기연민과 공허감은 언제나 화자와 같이 한다. 그렇지만 여섯 살 이후부터 입을 꾹 다물고 책에만 파묻혀 살아온 문학소녀이고 시티칼리지를 해방구(p.163)'라고 생각한 그녀에겐 똑같이 남편을 잃은 이웃 여자 네티가 그려준 프레임에 갇힐 생각은 없다. 자신 안에 직사각형의 공간을 만들고 그것을 넓혀간다. 그것은 불행과 행복 사이에서 쪼그라들고 확장되는 현상이 수없이 반복되지만, 그 누구도 침범할 수 없는 자신만의 것이 된다.

 

남편을 잃은 여자의 모든 것은 당사자가 되지 않고서는 절대 알지 못한다. 거기에는 슬픔과 불안의 한계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상실로 인한 우울과 무기력은 자신을 가두고 주변을 둘러보지 못하게 한다. 엄마가 느끼는 그 어둠은 자식에게 전달되고 그것은 고스란히 그들의 나머지 삶을 지배하게 된다. 세상에서 가장 가까운 것이 엄마와 딸이지만 그들도 언제나 상호관계속에서 서로를 알 뿐이다. 엄마는 딸이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살기를 원하고 딸은 엄마로 인한 피해의식을 가지고 있다. 그들의 평행선은 징글징글한 애착을 낳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모녀는 평생 뉴욕의 거리를 언제나 같이 산책한다. 그들의 산책은 위태롭다. 날이 선 상태에서 서로를 공격하며, 계속 상처를 받는다. 나는 그들을 마음 졸이며 바라본다. 언제쯤 그들에게 평화와 진정한 위로가 있을지를 기다린다. 시간이 지나간다. 세월이 흐른다. 두 사람은 늙어간다. 그리고 그들은 가장 오래된 친구가 된다. 여전히 엄마는 언제나 그렇듯이 날 위해 해 줄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내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초조해 하면서도(p.48)' 딸의 직사각형 공간을 침범할 수 없다는 지혜를 얻는다. 끝까지 되받아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엄마라는 입장에서 벗어나 수긍하고 이해해주려는 한 인간으로 남는다.

 

나와 딸아이도 비비언 고닉의 모녀와 별반 다르지 않다. 싸우면서도 항상 모든 것을 같이 한다. 언젠가 우리 가족이 어딘가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남편이 운전하는 차에서 딸아이와 나는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나와 딸아이의 그런 모습을 남편은 불편해한다. 작은 것으로 큰 갈등을 일으킬까봐 언제나 노심초사하며 중간에서 막아보려고 애쓴다. 그날 딸아이와 나는 그런 남편의 노력에도 차 안에서 끝까지 말다툼을 멈추지 않았다. 남편의 일 때문에 우리는 중간에서 차에서 내려야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딸아이와 나는 무의식적으로 손을 잡고 도로를 걷기 시작했다. 신호등에 멈춰서 우리를 위태롭게 바라보던 남편은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는 우리를 보며 엄청 기함했었다. 그렇게 싸우던 사람들이 금방 손을 잡고 걸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하고 배반감까지 느꼈다고 했다. 딸과 엄마사이에는 이렇게 같이 사는 사람조차 알지 못하는 깊은 것이 존재한다. ‘사나운 애착은 호들갑스럽고, 고개를 내젓게 하지만 그 안에 사랑과 여성만의 연대가 촘촘하게 들어있다.

 

좋은 책이란 그들의 얘기에서 나의 기억과 추억을 소환하고 그것을 객관화시켜 줄 수 있는 책이다. 그런 의미에서 비비언 고닉의 사나운 애착은 그 역할을 충실히 해준다. 이 책은 시간이 지나도 한 번씩 펼쳐 보게 될 것 같다. 저자의 다른 책에도 관심이 간다. 나의 대책 없는 사랑고백이 성공했다는 확신이 든다.

 

[엄마를 놓아주지 않는 저 끈질긴 삶이라는 혼란.

 

우리는 말없이 앉아 있다. 우리는 끈끈하게 얽힌 혈육이 아니다.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을 그저 바라보는 두 여자다. 엄마는 젊어 보이지도 늙어 보이지도 않고 그저 당신이 목도하고 있는 바, 그 혹독한 진실에 깊이 침윤되어 있다. 엄마한테 내가 어떻게 보일지는 나도 모른다.

-p.300~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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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23-03-18 0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책속 엄마와 딸을 보면서 페넬로페 님은 따님하고 자신을 생각하셨군요 엄마와 딸 사이는 하나만 있지 않겠지요 사이가 좋은 사람도 있고 그저 그런 사람도 있고 사이가 안 좋은 사람도 있는...


희선

페넬로페 2023-03-18 10:29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저에게 딸이 있으니 이 글을 읽으며 연관이 되더라고요. 부모 자식 사이가 좋았다가 나쁘다를 반복하니 그 과정에서 공감되는 부분도 많았어요^^

서곡 2023-03-18 08: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살면서 놓친 그 모든 것과 연기 같은 인생 ... 늘 하던 대로 살다가 우리가 되어버렸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만다 / 인용하신 부분으로부터 되짚어봤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3-03-18 10:25   좋아요 2 | URL
이런 문장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이해되는 것 같습니다. 비비언 고닉 작가는 그런 통찰을 문장으로 잘 표현하더라고요. 역시 작가들은 남다르다는걸 다시 깨달았어요 ㅎㅎ
감사합니다^^

책읽는나무 2023-03-18 17:0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엄마와 딸 사이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로 표현한다 한들 이해되어지지 않는 그 무언가의 관계가 있죠!
상당히 공감이 갑니다.
리뷰 재미나게 읽었습니다^^

페넬로페 2023-03-18 19:57   좋아요 3 | URL
재밌게 읽어주셔서 감사해요.
엄마와 딸의 스토리는 무궁무진하고 그 어떤 것이든 공감할 수 있어 좋게 읽었어요
그 관계들도 참 이해가 가고요 ㅎㅎ
 
파리 셀프 트래블 - 2023-2024 최신판 셀프 트래블 가이드북 Self Travel Guidebook 4
박정은 지음 / 상상출판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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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에게 여행은 일상이지만, 어떤이에게는 언젠가는 가야 할 버킷리스트일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가장 중심에 있는 곳이 ‘파리‘일 것이다. 이 책은 파리에 대한 모든 것이 일목요연하고 번잡하지 않게 잘 정리되어 있다. 이 정도만으로도 충분하다. 사실 다 둘러 볼 시간이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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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3-17 23: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행을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코시국 지나면서 답답함이 쌓였는지 여행가고 싶어지네요 휴우 주말 잘 보내시길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03-18 00:58   좋아요 1 | URL
세상은 넓고 갈 데도 많은데 막상 가려고 하면 많은 제약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도 가면은 좋구요.
서곡님!
주말 즐겁게 보내시길요^^
 
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졌다 - 복잡한 세상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심리법칙 75
장원청 지음, 김혜림 옮김 / 미디어숲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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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을 만나 행복해지기보다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인다. 개별적인 인간의 심리보다 실험집단에 의한 결과에 너무 얽매여 있는 건 아닌지... 이 책은 어떤 면에서 자기 계발서로 읽힌다. 정신 차리고 자신을 통제하지 않으면 성공의 대열에 끼이지 못하고 참담한 실패만이 남는다는 경고를 계속해서 주고 있다.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심리법칙이 이렇게나 많은 것이 놀랍지만, 결국 인간이 사는 세상이 좋아지려면 게임 법칙에서 증명된 모두에게 좋은 최고의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이 당연하다. 그런 면에서 요즘 한국의 심각한 상황과 연결된다. 굳이 심리학으로 들어가지 않아도 우선 나 자신을 내가 먼저 챙기고 내가 인생의 중심에 서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언제나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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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23-03-15 12: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심리학을 만나면 … 스트레스가 쌓인다. 이리도 저힌테는 와닿는지 모르겠어요. 수십 가지 법칙을 내세운 심리학 책을 완독하지 못했던 기억만 남았어요. ㅎㅎㅎ

페넬로페 2023-03-15 13:10   좋아요 1 | URL
정말 그렇죠!
심리학이 중요하고 임상에서나 사회에서 많이 필요한 건 사실이지만 어찌보면 그것에 조종당하고 있다는 생각도 했어요^^

서니데이 2023-03-16 22:4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교양심리학 책이 여러가지라서 잘 고르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좋은 책도 있지만 읽고 나서 기분이 무거워지거나 불편한 책도 있긴 해요.
나를 잘 챙기고 내가 인생의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건 필요한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님, 따뜻한 밤 되세요.^^

페넬로페 2023-03-17 08:55   좋아요 2 | URL
네, 심리학에 대한 책도 엄청많아요. 근데 그것을 읽다보면 도움도 되지만 금방 또 망각하게 되더라고요.
언제라도 내가 세상의 중심에 있도록 살아야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고요 ㅎㅎ
서니데이님!
오늘 하루도 행복하게 잘 보내세요^^

희선 2023-03-18 03: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심리학에 관심 갖고 책을 볼까 했지만, 사례가 나온 게 더 많더군요 심리학을 공부하려면 이론책을 봐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걸 잘 모르는군요 그냥 소설 보면서 사람 마음을 알아야지 하는데, 그것도 잘 모르겠어요 저랑 다른 사람만 있어서... 그런 사람도 있구나 하는 정도로 보는군요


희선

페넬로페 2023-03-18 10:39   좋아요 2 | URL
심리학책보다 저도 소설보며 사람 마음을 알게 되는게 훨씬 좋아요.
이런 책은 그래도 여러 집단에 대해 연구한 것이라 참고는 되더라고요^^

그레이스 2023-03-18 21: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심리학은 자신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타인을 용납하기 위함이란 생각, 그게 행복이란 생각입니다. ^^ 제 댓글 넘 재미없나요?

페넬로페 2023-03-18 23:40   좋아요 2 | URL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타인을 이해하고 용납하면 좋은데 요즘은 그냥 용납하는 경향도 많아요~~ㅠㅠ

우리가 재미는 좀 없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ㅎㅎ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 에세이&
백수린 지음 / 창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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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에 다니고 있지만 나에게 성경은 언제나 어렵다. 성경에 있는 어떤 내용은 믿음과 연결되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종교와 더 멀어 보여 이해가 쉽지 않다. 내가 좋아하는 시편에서 다윗은 절규하듯 신에게 매달리고 기도하지만, 자신의 원수들을 죽여 달라고 애원하기도 한다. 이스라엘인의 선민의식이 불편해 구약보다는 신약을 더 선호한다.

 

7년 동안, 연속해서 성경공부를 했다. 1년에 한편씩 성경을 집중해서 읽고 멤버들과 묵상을 나누는 방식이었다. 성경 자체가 어려웠기에, 성경 구절에 대한 질문에 대답하고 거기에 따른 묵상을 하기가 매번 고역이었다. 잘 되지 않았지만 내가 하고자 한 묵상은 과거, 현재, 미래의 나의 삶과 연관된 것이었다. ,,전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총으로 귀결되거나, 공동체에서 그만큼 봉사했으니 은혜를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 아니었다. 성경이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성경만이 아닌 다른 것도 충분히 가져다 표현할 수 있는 묵상을 하고 싶었다.

 

백수린 작가의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읽으며 뜬금없이 성경 공부했던 시절이 떠오른 것은 이 책의 문장들이 내가 원했던 묵상의 내용과 비슷했기 때문이었다. 대단하지 않은 내 삶과 내 주변을 이런 글로 돌아보고 싶었다. 기준을 너무 높이 책정해 나의 모자람을 부각시키기보다 조금의 반성과 그보다는 훨씬 더 많이 나를 다독거리며 세상을 바라보기를 원했다.

 

일상과 세계 그 사이에서 빛나는 이야기들시리즈중 하나인 이 책은 저자가 서울의 성곽길 주변에 있는 낡고 오래된 언덕 위의 집에 살면서 느낀 것들을 담고 있다. 반려견 봉봉에 대한 사랑과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낸 과정과 슬픔에 대한 단상들, 산책, 책에 대한 얘기도 소소하게 들어있다.

 

기억의 모티프로써 장소는 언제나 각자의 추억과 공감을 가져다준다. 장소는 사람의 성질, 정체성에도 영향을 주며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결정하기도 한다. 어린 시절부터 아파트에만 살다가 오래 된 단독주택에 살게 된 작가가 직접 부딪히고 해결해야 하는 불편함도 많지만, 그 장소에 있어야만 가능한 느낌들과 묵상이 가득하다.

 

[이 동네에서 집은 삶의 공간이다. 동네에서의 하루하루는 집이든 인간이든 간에 만물이 시간과 함께 서서히 마모되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며, 육체적인 노동과 시간 그리고 정성을 쏟는 돌봄을 통해서만 우리가 모든 종류의 소멸을 가까스로 지연할 수 있을 뿐이라는 진실을 내게 알려준다. 그리고 어떤 공간이 누군가에게 특별한 장소가 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니라 오감으로 각인되는 기억들의 중첩 때문이라는 사실도.

-p.14]

 

서울 동남쪽의 끝자락에 살고 있는 나는 그동안 한적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러나 주변에 신도시가 계속 생겨 고층 아파트로 둘러싸이기 시작하고, 덩달아 우리 동네도 리모델링이나 상가 증축의 바람이 불고 있다. 어느 쪽으로 산책을 가든 답답함이 느껴진다. 집이 재테크의 수단이 되고 깨끗함과 편리함이 최고가 된 서울이 싫지만 도시 생활에 맞춰진 삶의 패턴을 쉽게 바꾸지도 못한다. 저자가 사는 성곽 주변의 언덕 위의 집이 낭만적으로 보여 질지 몰라도 그곳에 사는 사람은 변화를 원할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그곳을 떠나지 못할 사람은 재개발이 늦추어지기를 바랄 것이다.

 

장소는 분명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영역에 속하는데도 그것은 우연과 인연과도 연결되어 있다. 생각지도 않게 어떤 장소에 오래 살 수도 있고, 원하지 않아도 떠나야만 하는 경우도 생긴다. 작가는 자신이 선택한 그곳에서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면서도 그 공간에서 느낄 수 있는 다른 많은 것들을 음미하며 산다. 사람과 세상을 향해 흐르는 따뜻한 마음의 길이 참 좋다. 작가의 그럼 마음을 내 마음에도 심어보고 싶다. 계속 변화되어 싫어지는 내가 사는 동네에서, 그렇다고 훌쩍 떠날 수도 없기에 콘크리트 높은 벽 사이를 누비며 거기서 발견할 수 있는 나만의 아름다움을 찾아봐야겠다.

 

강아지와 고양이를 좋아하지만 반려견과 반려묘를 키우지 않아 사실 그 사랑에 깊숙이 들어가지는 못한다. 누군가의 반려견이 저 세상에 갔어도 난 주인의 슬픔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나의 애도는 서툴 것이다. 백수린 작가는 자신의 반려견인 봉봉을 무지개다리 너머로 보낸 후 사람들이 보내 준 빈껍데기 같은 말이 자신에게 더 상실감을 준다고도 했다. 난 이런 저자의 마음을 이해하면서도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무척 난감하기도 하다.

 

완벽히 공감할 수 없는 감정에 대한 애도의 표현은 당사자에게 미흡하고 텅 빈 마음을 채워주기에 부족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하지 않는 것보다는 조금이라도 위로를 건네는 애도가 더 좋은 게 아닌가? 말의 내용보다, 자신이 듣고 싶은 말보다 상대방의 마음을 받는 것이 더 우선일 것이다. 작가의 말마따나 슬픔은 개별적이고 섬세한 감정(p.131)’이기 때문에 완벽한 공감이 어려울지 모르지만 번번이 공감에 실패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죽음은 슬픈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그 감정을 느끼며 살고 있다.

 

내 인생에서 날 도와준 사람이 하나도 없었을 거라고 생각하진 마요. 많았어요, 도와준 사람들.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네 번까지 하고 나면 다 도망가요. 나아질 기미가 없는 인생, 경멸하면서... 지들이 착한 인간들인지 알았나 부지.”

 

착한 거야. 네 번이 어디야? 한 번도 안 한 인간들이 쌔고 쌨는데.”

 

드라마 나의 아저씨’ 7화에 나오는 지안과 동훈의 대화이다. 난 이 대사가 참 좋다. 아무것도 안하는 것보다 한 번이라도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 그것이 다는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다가간다는 건 용기를 내는 것이다. 애도도 그런 것이 아닐까.

 

소설도 그렇지만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더 많이 느낄 수 있는 건 비슷한 경험에 대한 표현의 찬란함일 것이다. 집과 사람, 산책길에서 사색한 생각들에 대해 내 능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문장을 이 책에서 발견하고 감탄한다. 더 들여다보아야 하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이만하면 됐다며 포기하는 나의 삶의 태도에 대해서도 돌아볼 수 있었다.

 

[람이 불어와 나무들을 잡아 흔들고 낙엽이 떨어져내렸다. 그 많은 낙엽은 곧장 바닥으로 떨어질 듯하다가 솟구쳐올랐고 다시 원을 그리면서 춤을 추듯 허공을 맴돌았다. 마치 죽음의 군무를 추는 새떼처럼. 쓸쓸하고 찬란한 피날레를 장식하는 꽃가루처럼. 나는 살면서 낙엽이 떨어지는 것을 수없이 보았지만 그날처럼 가슴이 벅차오를 만큼 아름다운 풍경을 본 적은 한번도 없었다.

-.48]

 

몇 년 전 11월의 어느 날, 누군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소식을 듣고 씁쓸한 마음으로 산책길에 나섰다가 내가 만났던 경험을 작가는 완벽하게 표현해주었다. 힘든 마음과 내가 바라보는 풍경에서 아름답고 기이한 것을 발견할 때의 전율은 동시에 느낄 수 있다. 인생은 항상 뭔가의 사이에 있고 그것들이 이율배반적 일 때도 있지만 작가의 말대로 살아 있는 것들 쪽(p.227)' 으로 돌리는 어쩔 수 없는 내 시선을 부끄러워하지는 말아야겠다. 그 어떤 상황이라도 우리는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자주 가질 자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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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삭매냐 2023-03-06 17: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꼬맹이가 얼마 전에
신약을 완독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놀랬던지요.

저도 어제 라즈 채스트의
부모님과의 이별 에세이
읽고 참 많이 생각하게
되었답니다.

내 삶의 태도에 생각해
보게 하는 글, 공감합니다.

페넬로페 2023-03-06 19:36   좋아요 1 | URL
몇년 전부터 레삭매냐님께서 꼬맹이라 표현하셔서 ㅎㅎ 나이를 가늠할수는 없지만 그래도 신약성서를 완독했다니 정말 대단한데요~~

삶의 묵상과 통하는 책을 만나는 건 언제나 기쁨입니다^^
라즈 채스트의 책도 수소문 해봐야겠어요^^

바람돌이 2023-03-06 22: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을 읽다보면 내 마음을 어떻게 이렇게 잘 표현했지 할 때가 있어요. 특히 에세이에서 그런걸 발견할 때가.... 그래서 작가는 다르구나 생각하기도 하고, 또 작가의 그런 표현에 위로를 받기도 하는거 같아요. 그래서 책은 사랑입니다. ^^

페넬로페 2023-03-06 23:42   좋아요 2 | URL
정말요!
그래서 작가인가봐요.
어쩜 그렇게 깊이 아름답게 표현하는지 매번 감탄해요~~
그래서 책은 사랑, 싸랑입니다^^

희선 2023-03-07 01: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사람 슬픔은 다 알기 어렵겠죠 그게 자기 슬픔이 됐을 때 그때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여길지도 모르겠습니다 같은 일을 겪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건 다르기도 해요 그래도 아주 모르는 척하는 것보다는 뭔가 말하는 게 좀 낫겠습니다 말이 아니면 가까이 있기...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습니다 둘레가 바뀌기를 바라는 사람과 바뀌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도 있는... 없는 사람 마음을 조금 생각하면 좋겠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3-03-07 09:49   좋아요 1 | URL
뭐든지 겪어보지 않으면 완벽히 알기는 어려워요. 대충 짐작으로 알뿐이죠. 기쁨과 슬픔 다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서툴게나마 조금은 마음을 표현해주고 싶은데 요즘은 그것도 상대방을 생각하기에 잘 안될때가 있더라고요.
희선님 말씀처럼 없는 사람도 생각해야하는데 경제원리가 그렇지 않아 불편하고 아쉬워요^^

자목련 2023-03-07 08: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백수린의 에세이 참 좋았어요. 페널로페 님의 리뷰로 다시 만나니한 번 더 읽는 기분이에요^^

페넬로페 2023-03-07 09:51   좋아요 1 | URL
저는 두 번 다 백수린작가를 에세이로 만났는데 이제 소설을 읽어봐야겠어요.
소설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더라고요^^

그레이스 2023-03-09 21:29   좋아요 1 | URL
소설도 좋아요~♡
단편집 <여름의 빌라> 좋았어요^^

페넬로페 2023-03-10 12:40   좋아요 1 | URL
네, ‘여름의 빌라‘, 오래 전부터 읽어보려고 하는데 계속 밀려요 ㅠㅠ

2023-03-07 10: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7 1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stella.K 2023-03-10 18: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경공부 정말 어려운 것 같아요.
저도 교회에서 성경 1년 코스도 들어보고
그룹 성경공부를 8년 가까이하고,
특히 종편 기독교 채널에서도 방송해 주는데
역시 들으면 들을수록 어렵다는 생각을 해요.
페페님 이 책에서 성경공부 할 때가 생각나셨다니
궁금해지네요. 저도 읽어 봐야겠습니다.
‘나의 아저씨‘의 그 대사 저도 기억나요.^^

페넬로페 2023-03-10 20:34   좋아요 1 | URL
성경공부 정말 어려워요.
워낙 비유가 많아 그걸 해석해야하고 그 당시의 시대적 배경도 무시할 수 없고요.

페페!
좋은데요.
최근에 서재에서 저와 똑같은 닉네임을 가진 분이 활동하시는거 알고 닉네임 바꿀까도 생각중이예요 ㅎㅎ

stella.K 2023-03-10 20:47   좋아요 1 | URL
아, 모르고 계셨나봐요. 저도 똑같아서 처음엔 놀랐는데 서로 잘 쓰고 계신 것 같아서 그런가 보다했어요. 저도 스텔라님이 계시더라구요. 다행히도 그분은 한글로 쓰셔서 저랑은 다르니까 신경 안 쓰기로 했죠. 페페 마음에 드시나요? 벌써 그리 불러드리고 싶었는데 어떻게 생각하실지 몰라 자제하고 있었죠. ㅋ 저도 텔라로 불러주시는 분계신데 그렇게 약칭으로 불러주는 것도 좋더라구요. 애칭같고. 앞으로 페페도 사랑해 주세요.^^

희선 2023-04-08 01: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 님 축하합니다 비에 벚꽃이 많이 떨어졌더군요 그래도 다 떨어지지 않고 남은 것도 많아요


희선
 















딸아이를 낳고 4일 동안 병원에 있다 친정으로 산후조리를 하러 갔었다. 내가 늦은 나이에 결혼 해 그 당시 엄마의 나이도 많았지만, 엄마는 꼭 당신 손으로 나를 거두어야 한다며 산후조리원으로 간다는 나를 억지로 친정으로 데려갔다.

 

엄마는 자연산 미역을 사서 삼시세끼 나에게 미역국을 끓여 먹이고 아이를 목욕시키고 아이의 옷을 삶고 세 시간마다 나오는 우윳병을 소독하느라 정작 아이는 꼬박 내가 돌보아야만 했다. 병원에서는 잠깐 동안 신생아실 창문을 통해서만 아이를 볼 수 있었다. 집에 와서야 자세히 볼 수 있었던 아이는 생각보다 너무 작았다. 조그만 배냇저고리가 헐렁할 정도였다.

 

친정으로 온 그 다음날은 하루 종일 봄비가 내렸다. 아이는 계속 잠만 자고 푸른똥을 쌌으며 간간이 재채기를 했다. 아이가 기침을 할 때마다 저러다 혹시 잘못되는 건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다. 그날 빗소리를 들으며, 아이를 바라보며 계속 울었다. 내가 저 조그만 핏덩이를 온전한 존재로 잘 키워낼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무거웠고 암울했다. 아이에 대한 사랑보다 부모에게 주어진 책임이 더 우선되는 순간이기도 했다.

 

그때부터 아이가 4학년이 되던 해 내가 다시 일을 시작할 때까지, 나는 모든 것을 아이와 함께했다. 도서관을 다니며 같은 그림책을 읽고 미술관과 박물관을 다니고 놀이공원에 가고 여행을 다녔다. 닥치는 대로 육아서를 읽고 자주 반성모드에 돌입했으나 그것은 또 쉽게 망각되었다. 아이를 키우는 건 힘든 일이었고 내가 그런 재주가 없다는 것도 실감했다. 사랑을 듬뿍 주지도 않는, 그렇다고 완벽한 기계적 엄마도 되지 못한, 늘 어정쩡한 모습으로 이 무거운 책임감으로부터 벗어날 날만을 기다린 것 같다.

 

 

아마도 딸아이가 자라면서 내게 가장 듣고 싶었던 말은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일 것이다. 나는 아직까지도 이 말을 시원하게 해주지 못하고 있다. 내가 바라는 자식의 삶도 있기에 그것이 지나친 욕심이 아닌 한 나도 포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오래 전 네가 어떤 삶을 살든 나는 너를 응원할 것이다를 읽으며 그 내용보다는 공지영 작가는 어쩌자고 자식을 세 명이나, 그것도 아버지가 다 다른 아이를 낳을 생각을 했을까?’를 생각했다. 아이 한 명 키우기도 이렇게 힘든데 말이다. 같은 엄마로서 그녀가 걱정되고 안쓰러웠다. 그렇지만 이 책 속의 엄마, 공지영은 씩씩하고 당당했다. ‘, 오늘도 좋은 하루!’라는 말로 한 걸음 내딛는 그 말 속에 자식에 대한 집착과 애증에 대한 하루치의 포기가 들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의 네가 엄마가 처녀 시절에 꿈을 꾸던 그런 딸은 분명 아니야. 엄마가 꿈꾸던 딸은 물론 늘 전교에서 1등을 해야 하고, 선생님들에게 칭찬은 도맡아 받고, 키는 크고 얼굴은 예쁘고(네 아빠와 엄마가 네게 물려준 유전자와는 아무 상관이 없이) 몸매는 미인대회에 나갈 정도이지만 그런 대회에는 결코 나갈 생각이 없이 늘 세계 명작을 읽고 있는 데다가, 영어는 기본으로 잘하고 거기에다가 약간의 프랑스어와 일본어를 하며(중국어도 괜찮아), 집에서는 동생들을 잘 돌보는 누나이고 엄마에게는 늘 대견하며 아빠에게는 애굣덩어리인.....(솔직히 숨이 차긴 하다.) 그런 딸이어야 했지. 웃지 말라구. 이런 생각을 할 무렵에는 엄마는 너보다도 철이 없었을 때였으니까 말이야.

 

위녕. 너는 아직 젊고 많은 날들이 남아 있단다. 그것을 믿어라. 거기에 스며 있는 천사들의 속삭임과 세상 모든 엄마 아빠의 응원 소리와 절대자의 따뜻한 시선을 잊지 말아라.

-작가 후기 중에서]

 

이것이 세상 모든 부모의 마음 아닌가!

 

 

20221231, 딸아이가 교환학생으로 프랑스에 갔다. 캐리어 두 개를 밀며 무거운 배낭을 지고 떠나는 딸이 걱정되었지만 파리 드골공항에서 학교가 있는 도시에 도착했다는 톡을 받고 난 후부터 난 자유와 휴가를 얻었다. 하루 한 두 시간 정도 페이스톡으로 딸의 얼굴이 아닌 내 얼굴에 신경 쓰며 하는 대화가 약간 피곤하지만, 휴가를 얻은 댓가라 여기며 난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공항 출발장안으로 들어가며 딸아이는 많이 울었지만 나와 남편은 울지 않았다.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여행지에서 딸아이는 항상 엄마와 같이 왔으면 좋았겠다고 말하고, 보고 싶다고 하지만 솔직히 난 딸아이가 많이 그립지는 않다. 그냥 22년 만에 혼자 누리는 이 시간이 너무 좋다.

 

삶이 단출하다는 것은 비어지는 것과 같은 의미이다. 냉장고의 공간이 남아돌고 택배 상자가 도착하지 않는다. 잔소리를 하는 나의 나쁜 말이 줄어들고 그것으로 내가 나에게 집중할 시간을 얻는다. 몇 달 후에 돌아오고 결혼하기 전까진 절대 독립하지 않을 거라는 딸아이가 잠시 비운 이 집의 적막이 평화롭다. 시간이 빨리 흐르는 게 아쉬울 정도로 나의 휴가는 나에게 행복을 주고 있다. 딸에게는 나의 감정을 절대 내색하지 않는다. 친정 엄마와 전화할 때마다 엄마는 내가 보고 싶고 다녀가라고 하는데 난 엄마의 자격이 없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31일에 남편과 여행을 다녀왔다. 둘만의 여행을 떠난 건 아이가 태어난 후 아마 처음인 것 같다. 내가 운전을 하지 못해 여행을 가면 온종일 남편이 운전을 해야만 한다. 하루 종일 운전하는 사람도 힘들지만 혹시나 운전을 하며 졸까봐 나 역시도 편안하지는 않다. 그래서 이번엔 기차 여행을 선택했다. 바다가 보고 싶어 묵호와 정동진에 갔다. 볼 것이 많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볼 것이 한 곳에 몰려있는 묵호와 정동진이 더 좋았다. 묵호는 오래 전 소설의 제목에서 알게 된 도시다. ‘묵호를 아시나요?’라고 기억했지만 실제로는 묵호를 아는가라는 심상대의 소설이다. 묵호항을 중심으로 묵호등대, 논골담길, 도째비골 그래피티가 붙어있어 구경하기 좋았다. 논골담길을 내려올 때 계속 보이는 바다도 운치 있었다.


정동진은 언제 가도 좋다. 7번 국도변에 있는 바다와 도시를 좋아해 거의 해마다 가지만 동해바다는 절대 질리지 않는다.


정동진 바다 모래사장에서 물이 최대한 신발 가까이에 올 때 핸드폰 사진의 셔터를 누르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핸드폰 화면에 머물러있어 물이 들어오는 것을 직접 체크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핸드폰 화면 속으로 몇 번 들어온 물이 신발 가까이에 오지 않아 계속 기다렸다. 그러다 갑자기 들이친 파도에 신발과 바지 밑단까지 완전 젖고 말았다. 놀라고 당황스러워 둘이서 한참을 웃었다. 파도가 우리 마음대로 오지 않으며 그러한 것을 기대한 어리석음이 웃겼다. 제대로 당했다. 그래도 계획한 사진을 건져야겠다는 열정을 불태워 젖은 채로 다시 물을 기다려 사진을 찍었다. 그때가 해질 무렵이라 바람이 많이 불기 시작했다. 정동진 바닷가 벤치에 앉아 추위에 떨면서 신발을 벗고 모래를 털어냈다. 휴지로 신발을 대충 닦고 남편이 편의점에 가서 사온 양말을 신었지만 금방 축축해졌다. 그래도 재미있었고 실컷 웃었다.


리스본을 여행 중인 딸아이가 엄빠의 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보내 온 사진이다.


뭔 미래씩이나?

너의 엄빠는 현재도 가능하단다.

미션 클리어 그리고 투비 컨티뉴드.

 

기차 여행이어서 그런지 새벽에 집을 출발해 밤늦게 돌아올 때까지 찍힌 독보적 걸음수가 3만보가 넘었다. 지금까지도 다리가 뻐근하다.


이번에 내가 가져간 책은 백수린의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이었다. 소설보다는 에세이가 가볍게 읽기 좋을 것 같아 선택했는데 이 책은 생각보다 가볍지 않았다. 책을 읽으며 생각할 것이 많아 계속 읽기를 멈추어야만 했다. 내가 여행가서 보고 온 것을 난 이렇게 궁상맞고 초라한 단어로만 쓰는데 백수린 작가는 일상을 얼마나 깊이 있게 들여다보며 다정하고 조곤조곤 써 내는지. 세상의 모든 작가를 존경한다.


<나의 프루스트 효과>

이제는 프루스트라는 글자만 봐도 반갑고 그를 만나러 가야 할 의무를 느낀다.

그곳이 비록 한국의 바닷가에 있는 카페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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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곡 2023-03-03 15: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프루스트가 페넬로페 님을 따라다니나요 하필 저기 짜잔 ㅋㅋㅋ 잘 읽었습니다! 3월 잘 보내시기 바랍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5:15   좋아요 2 | URL
하필 저기 정동진역 앞에 떡하니 있더라고요^^
3월도 열심히 책 읽겠습니다^^

모나리자 2023-03-03 15: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랜만에 두 분 만의 여행 행복한 시간 보내셨네요.^^ 여행길에 보는 풍경과 사물은 평소에 보는 것과 달리 더 아름답게 느껴지더라구요. 3월에도 화이팅입니다. 페넬로페님.^^

페넬로페 2023-03-03 16:03   좋아요 3 | URL
동해바다를 좋아해 힐링하고 왔어요. 언제나 여행은 좋고 모나리자님 말씀처럼 모든 것이 아름다워 보였어요.
모나리자님께서도 행복한 3월 보내시기 바래요^^

구단씨 2023-03-03 15: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멋지네요...
두분 나란히 앉은 모습도 아름답고요.
오랜 세월을 다정하게 함께한 사람이 보여줄 수 있는 분위기가 풍겨요. ^^

페넬로페 2023-03-03 16:06   좋아요 1 | URL
살다보니 친구가 되더라고요.
서로 편해 눈치 보지 않고 원하는 것도 맘껏 할 수 있어 좋았습니다.
구단씨님!
아름답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3-03-03 15:4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몇년 전에 삼척에 갔다가
꼬맹이가 바닷물 피티병에 담
아 오라고 해서 근처에 갔다가
물벼락 맞은 기억이 나네요...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게 추억
이 되지 싶습니다.

겨울바다, 멋졌습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6:08   좋아요 2 | URL
네,
그런게 나중에 다 추억이 되고 기억에 남는 것 같아요.
바다는 겨울바다가 멋져요!

겨울호랑이 2023-03-03 16:1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께서도 동해안에 다녀오셨군요! 시원하게 몸을 담그면서 놀 수 있는 여름바다도 좋지만, 멀리서 떨어져 바라보는 겨울바다는 또 다른 면에서 좋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

페넬로페 2023-03-03 16:38   좋아요 2 | URL
네, 저도 반가웠어요.
이번에 경포바다는 못가봤지만 그래도 정동진도 강릉이니까요~~
저는 언제나 멀리서 바라보는 바다가 좋더라고요^^

거리의화가 2023-03-03 17:3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페넬로페님 넘 좋네요. 두분의 여행 참 좋으셨을 것 같습니다. 보기 흐뭇하고 제 마음까지 따뜻해지네요. 아이의 마음과 부모의 마음이 같기란 불가능할테죠. 이런 시간들을 앞으로는 자주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프루스트 간판에 빵 터졌네요. 역시 프루스트 효과?ㅋㅋ 정동진 가본지 10년은 훌쩍 지난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3-03-03 19:06   좋아요 3 | URL
둘이서 하는 여행도 좋더라고요. 자식이 커가면 왠지 모르게 눈치를 보게 되는데 남편과는 그러지 않아도 되어 편하고 좋았어요.
거리의화가님께서도 요즘 잃.시.찾 읽고 계셔서 프루스트란 단어가 더 의미 있으실 것 같아요 ㅎㅎ

2023-03-03 20: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3-03-03 20: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레이스 2023-03-03 23:5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
넘 부러워요.
이번주 아이들 제주도 여행 가버리고, 혼자 집에 있는데, 그날 하루 기분이 좀 이상했어요.

페넬로페 2023-03-04 08:29   좋아요 2 | URL
어떨 땐 일하기전까지 말을 한마디도 안할때도 있더라고요 ㅎㅎ
근데 시간이 조금 여유있어도 책 읽는 양은 비슷하니 왜이런지 모르겠어요^^

희선 2023-03-04 02:4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따님이 프랑스에 갔군요 잠시 없어서 편하게 여기는 거 괜찮아요 엄마라고 해서 늘 아이만 생각하지 않아도... 페넬로페 님하고 남편분 둘만 바다에 갔다 오셨군요 좋은 시간이었겠네요 아주 작았던 아이가 어느새 커서 프랑스에 갔다고 생각하면 잘 자랐다는 생각이 들겠습니다


희선

페넬로페 2023-03-04 08:31   좋아요 1 | URL
네, 잠시동안만 조금 여유있어요.
그래도 좋더라고요.
제가 바다를 좋아해 여행은 산보다는 바다쪽으로 가는데 언제나 힐링하고 와요^^

자목련 2023-03-04 09: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사진만으로도 좋고 글과 함께 읽으니 더 좋고요.
페널로페 님의 충만한 시간의 기록 기대할게요^^

페넬로페 2023-03-04 10:33   좋아요 2 | URL
여행지에서의 사진은 언제나 좋은 것 같아요.
네, 충만한 시간 많이 갖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바람돌이 2023-03-04 17: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바다와 함께 하는 두분의 발도 뒷모습도 다 좋네요. 이 글 읽다가 우리집 딸래미들을 어떻게 내보내지 막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는 둘이라서 한꺼번에 좀 나가라 해야하는데 그게 어렵네요. ㅎㅎ

페넬로페 2023-03-04 19:23   좋아요 1 | URL
자매끼리는 여행도 자주 다니잖아요. 둘이서 여행을 다녀오라고 하면 어떨지요 ㅎㅎ
딸아이는 혼자라 늘 자매있는 친구들을 부러워해요^^

오거서 2023-03-07 20:0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미션 클리어 앤 투비컨티뉴드. 너무너무 멋집니다!
백수린의 에세이 <아주 오랜만에 행복하다는 느낌>을 아직 읽지 못했지만, 페넬로페님만큼이나 행복한 느낌을 제대로 글로 사진으로 옮기지 못했을 것 같아요.

페넬로페 2023-03-07 20:58   좋아요 1 | URL
오거서님께서 이렇게 말씀해주셔서 기분이 너무 좋습니다.
소박하나마 계속 행복을 느끼며 살아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오거서님!
요즘 바쁘신 것 같은데
항상 건강 유의하시고
좋은 저녁 보내시길 바래요^^

오거서 2023-03-07 21:1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