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가을 성수동에 있는 서울숲에 갔을 때,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진을 찍고 있는 곳이 있었다. 멀리서 볼 때 대나무 숲 같았다. 가까이 가서 보니 그곳은 은행나무 숲이었다. 나무를 촘촘히 심어(왜 그랬는지 모르지만) 대나무처럼 기둥이 가늘고 하늘로 곧게 뻗어 있었다. 새삼스레 생명을 가진 것들이 얼마나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지 실감했다.
하루하루 평범하고 되풀이되는 일상을 지내는 나에게 책은 가장 재미있고 스펙터클함을 준다. 책은 아무리 많이 읽어도 지겹거나 힘들지 않다. 좋아하기에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열심히, 꾸준하게 읽는다. 책을 읽을 때마다 이 세상에 어찌 이리 다양한 이야기가 있는지 감탄한다. 그 많은 이야기가 무궁무진하게 쌓여있다는 생각을 하면 행복하다.
이제 책은 나를 둘러싼 단단한 환경이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내 나이가 노년이라고 분류되는 곳에 다다르지만 책은 여전히 나를 성장하게 한다. 은행나무가 대나무처럼 자라듯 나 역시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변화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무엇이든 기대된다. 책은 나를 완고하지 않고 세상에 등 돌리지 않게 해 줄 것이다. 프랑스 화가 라울 뒤피의 말처럼 ‘삶이 나에게 미소 짓지 않아도 내가 언제나 삶에 미소 짓는 사람이 되도록’ 책이라는 환경이 나를 성장시켜 줄 것이라 믿는다.
올해 읽었던 책 중 가장 좋았던 소설이다.
한강 작가는 우리가 지나온 세상을 외면하지 않는다. 고통에 대해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아무리 이해해도 내가 겪어보지 못한 고통은 나에게 온전하게 다가 올 수 없다. 작가는 섣부르지 않게 우회적으로 그들의 얘기를 들려주었지만, 내 몸이 찔리는 느낌을 받았다. 프랑스 메디치 문학상 수상을 축하한다.
윌리엄 트레버 작가의 단편들을 읽으며 계속 먹먹한 감정이 들었다. 나는 슬픈 것보다 먹먹한 것이 더 아프게 느껴진다. 삶, 지나온 인생, 상처와 고통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고 외롭게 계속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모습들이 서글펐다. 그렇지만 내면의 단단함과 삶을 관조할 수 있는 힘이 좋았다. 이래저래 인생은 공평하다.
올해 처음 안톤 체홉 작가의 단편 소설과 희곡 작품을 읽었다. 트레버의 단편이 성실하고 정중한 느낌이 난다면 체홉의 단편은 역동적이었다. 악동의 이미지도 있었고, 유머러스했으며 정치적이기도 했다. 이쪽과 저쪽, 경계를 넘나들며 인간 심리를 절묘하게 묘사했다. 한 작가의 작품을 읽으며 이렇게나 다양한 감정이 들 수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새로운 작가와의 만남은 언제나 멋있다.
2023년의 마지막 날에 가족들과 영화 ‘노량’(마침 무대인사도 있었다.)을 보았다.
무엇을 위해 인간은 저렇게 전쟁을 일으키고 서로를 죽여야 하는지....
이 세상에 평화만 있으면 좋겠다.
2024년에는 알라딘 서재의 친구들처럼 나도 하루 36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집중하겠다.
여전히 똑같은 결심도 한다. 집에서 잠자고 있는 책을 읽고, 죽을 때까지 책을 읽을 수 있도록 건강에 신경 쓰며, 책을 읽는 만큼 좋은 사람이 되는 것.
알라딘 서재 친구 분들께 감사드리고, 2024년에도 열심히 배우고 따라가겠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