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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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류, 언어로 규정된 자기기만의 연금술

-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성을 주장했을 때 소수의 현자들은 지구가 광막한 우주 한 가운데 있는 하나의 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윈이 생명체의 진화론을 정리하여 발표했을 때, 인간은 그저 지구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 두 사건은 인류에게 깊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 행성에서 정상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오랜 서양의 믿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성경이 인간중심적이고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우월한 존재라는 인식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역사는 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학전문기자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저자는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 중 꼭대기에 위치한다는 견해의 근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성한 사다리개념에서 찾는다. 지금의 관점에서 2,500년 전의 사상가가 받아들였던 관점이 인류에게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 따지는 것은 공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찰스 다윈의 고종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이 종의 기원을 읽고, 우생학을 떠올리게 한 단초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일이다. 생물학의 학명은 자연의 생물체에 인간이 붙인 분류체계를 말한다. 자연을 파악하고 이해하고자 한 인간의 욕망이 담겨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따라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어류를 수집하고 분류했던 생물학자로, 현대 어류학의 선조 반열에 있는 인물이다. 저자는 조던의 행적을 이해하고 성찰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이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특히 조던이 우생학에 심취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우생학의 강력한 신봉자였다는 사실은 서양 백인사회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준다. 우리는 나치 독일이 아리안족의 신화를 굳건히 마련하기 위해 티베트인들의 신체를 면밀히 조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반면 게르만 족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유대인들의 열등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코의 크기를 비롯한 신체 치수를 재는 등 주도 면밀하게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나치 독일이 이러한 우생학적인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생학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조던이 초대 총장을 지낸 스탠퍼드 대학을 비롯하여,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루이 아가시가 재직했던 하버드 대학, 그 밖에 예일, 버클리, 프린스턴 등 미국의 명망 있는 대학에서 우생학을 가르친 역사는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건네준다.


 

우생학적인 신념이 미국사회에서 충격적으로 구체화되고 실현된 사례는 캐리 벅 소송 판결로 나타난 불임화 합법화 과정이다. 이 사례는 공공복지라는 명분으로 개개인의 불임화 과정에 국가가 개입한 사건이었다. 이 판결은 그 자체로 이미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과연 누가 불임화의 대상을 결정하는가라는 문제다. 과연 어떤 근거로? 바로 여기에 우생학적인 편견이 개입하고 작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수만 건에 달하는 불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중 과도하게 많은 유색인 여성들이 표적이 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 다수가 개인의 의사에 반하거나 인지되지 못한 채 시술을 받아야 했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2006-2010년 사이 캘리포니아주 교도소에서도 15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불임화 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이 과정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을 준다. 저자는 여전히 우생학의 잔재가 살아 있다고 강조한다. 우생학을 떠올렸던 프랜시스 골턴과 사망할 때까지 우생학을 신봉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같이 근거 없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집요한 신념이 현실에서 구체화되었을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이 사례들은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어류라는 범주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한 이유를 생각해본다. 분류학자들은 이미(아니면 이제야) 1980년대에 어류가 타당한 생물의 범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붙인 이름과 분류체계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이며, 자기기만의 산물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 미국 전역의 물고기를 잡아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려 했던 조던의 생애 자체를 저자는 자기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이라고 했다. 저자는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다”(244), “(자연에 관한)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262)라고 언급했다. 인간은 자의적으로 어류를 발명해냈다는 것이다. ‘어류라는 개념이 진화적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아무것도 없는데다, 나아가 인간을 자연의 사다리맨 위에 올려놓는데 기여하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이제 저자가 책에서 전해주는 이야기의 흐름은 작가 자신이 용기 있게 드러내는 성정체성에 이른다. 이 문제는 자연 세계에 대해 정상성을 규정한 인간의 모순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 의미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용어를 떠올린다면 민들레 원칙을 꼽을 수 있겠다. 저자에 따르면 민들레는 주변에 너무나 흔해서 화단에 피어나는 잡초로 여겨지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약재로도 쓰이는 식물이라는 점을 말한다. 나아가 민들레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우리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가르친 아버지의 견해에 오랫동안 혼란을 느꼈지만, 결국 우리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저자가 이 말을 했을 때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부분은 민들레 역시 중요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민들레 사이에 위계를 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의 용기 있는 행보는 성정체성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일 테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강조하듯,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고 인간에게도 다양한 변이가 존재한다는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이 다양성 자체가 자연의 본 모습이며, 인간의 해석은 자연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다양성을 감추는 데 큰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관행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보다 비판적이고 회의하는 마음가짐으로 인간이 만든 모든 범주와 규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1]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141)

[2] "우생학은 미국식 신여성과 포드 모델 T 못지 않게 미국 문화의 두드러진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185)

[3] "어떤 외부적 타격에도 종이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변이‘다."
"동질성은 사형선고와 같다."(187)

[4]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게도 한다."(189)

[5] "이 나라에서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우생학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나라다."(196)
"미국은 우생학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다."(213)

[6] "우리는 중요하다!"(228)
-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라고 가르친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

[7] "어류는 견고한 진화적 범주가 아니다. 곧 어류는 진화적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범주다."(240)
"‘어류‘라는 범주가 수많은 차이를 가린다. 많은 미묘한 차이를 덮어버리고 지능을 깎아내린다."(241)

[8]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다."(244)

[9]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릴 것이다."(250)

[10] "어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251)
"이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여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자, 우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단어들을 발명하는 방식이다."(252)

[11]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263)

[12]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일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 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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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4-12 15: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삽화도 기억에 많이 남더라고요. 썩어빠진 사다리를 확 걷어차야 되는데 말이지요 초란공님 ㅎㅎ리뷰 넘 잘 쓰셔서 우와!! 하며 읽었습니다 *^^*

초란공 2022-04-12 19:41   좋아요 2 | URL
ㅋㅋ 간단한 방법이 있었네요 ^^;; 지금 생각하니 삽화도 인상적이었는데 코로나때문에 세세한 부분이 눈에 안들어왔나봅니다. 그림에 나오는 수염난 남자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모습과 비슷하단 생각도 했었거든요.

고양이라디오 2022-04-12 18: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 잘 읽었습니다^^ 리뷰로 다시보니 좋네요ㅎ

초란공 2022-04-13 09:46   좋아요 2 | URL
고양이라디오님이 ‘올해의 책! ‘하신 글 보고 읽었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4-12 2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제 이해했습니다. 책을 아직 못본터라 왜 물고기가 없다고 하는지 궁금했거든요^^

초란공 2022-04-12 21:55   좋아요 3 | URL
스포일러였나요? ㅋㅋ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 이 세상을 이해하는 가장 정확한 관점
짐 알칼릴리 지음, 김성훈 옮김 / 윌북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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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해하는데 물리학이 필요한 이유

-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2022)



 

과학 대중화의 시대다. 인류는 지금까지의 역사에서 어느 때보다 과학의 힘을 등에 업고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고 있다. 어느 국가나 과학 기술은 중요하게 여겨지는 가치다. 특히 과학 교육은 국가의 중대사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영국의 과학자이자 과학저술가로 과학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는 짐 알칼릴리가 지적하듯이 과학은 인간의 일이기도 하다. 과학 활동은 결국 인간이 개입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기대하는 바와 다른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도 있다. 역사의 숱한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나아가 인간이 그릇된 의도로 과학을 활용하면 과학은 다시 인간을 공격할 수도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정황은 과학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렇다면 과학이, 좀 더 구체적으로 물리학이 인간의 그릇된 의도를 견제하고 걸러낼 수 있는 물리학만의 특징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져볼 수 있다.


 

현재 영국의 대표적 과학저술가이자 과학자인 3인방을 꼽으라면, 존 그리빈(John Gribbin), 필립 볼(Philip Ball), 그리고 짐 알칼릴리(Jim Al-Khalili)를 떠올릴 수 있겠다. 그동안 알칼릴리가 참여한 물리학 영상 몇 편 본 적은 있었지만, 국내에 소개된 그의 저서 몇 권을 포함하여 읽은 적이 없었다. 이번에는 어떻게 물리학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를 읽으면서 다큐멘터리 영상에서 담담하게 설명하던 저자의 모습을 함께 떠올려 보았다. 이 책에서는 물리학 덕후가 보여주는 물리학에 대한 애정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물리학은 이 세상, 온 우주를 이해하는 도구라는 믿음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인물이다. 하긴 이런 신념 없이 그 어려운 공부를 해내고 40년 넘게 연구를 지속하며 사람들에게 그 애정을 전파할 수 있을까.

 


본격적인 물리학 지식을 열거하기 전에 저자는 자신의 원대한 포부를 명분삼아 선언한다. “세상을 이해하는데 물리학이 결정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싶습니다.”(12) 이것이 저자가 책을 쓴 목적이기도 하다. 저자의 결론을 먼저 말하자면, “물리학이야말로 실재의 진정한 이해로 가는 길”(287)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독자들에게 이 야기를 하고 싶었던 거다. 물리학 대중서로는 부담스럽지 않은 두께에 현재 이루어지는 물리학의 다양한 연구 주제를 포함시키느라 주제별로 깊이 들어가지는 않는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이 세계를 이해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가 물리학이라는 신념을 설득력 있게 독자에게 전달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목적을 위해 제시하는 근거 중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내용은 과학의 검증가능성을 이야기하는 대목이다. 물론 이 특징은 과학을 공부한 대부분의 독자들에게 결코 새로운 주장이 아니다. 하지만 이 검증가능성이야말로 과학을 다른 학문 분야와 구별 짓는 과학만의 가치를 대변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는 알칼릴리가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확실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개방성으로부터 나옵니다”(273)라고 한 말에 새삼 공감한다. 일반 독자로서 과학에 대해 갖는 막연한 믿음, ‘과학은 확실함에 있다라는 주장에는 주의가 필요하다는 의미로도 다가온다. 내게는 과학이란 미지의 세계에 대한 불확실성을 인정하고 이를 이해하기 위해 검증하는 과정이라는 의미로 파악된다. 저자에 따르면 과학은 관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제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 이를 입증 가능해야 한다. 나아가 합리적인 설명에 입각하여 새로운 현상에 대한 예측도 가능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이를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론에 따라 당장 검증이 불가능한 이론도 있을 수 있지만, 저자의 경우는 이 점에서 매우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는 듯하다. 현재 인간의 힘으로 검증이 불가능하다고 하더라도, 간접적인 방법으로나마 검증을 추구하여 보다 깊은 이해에 다가가야 한다는 입장이기 때문이다.


 

이번 독서에서 또 다른 저자의 인상적인 견해는 수학적 이론을 찾는 것만큼이나 올바른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144)는 언급이다. 그는 이론물리학자이면서도 수학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것을 인정하지만, 무엇보다 도출된 결론으로부터 물리적인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긴다. 왜냐하면 이 책 전체에서 저자는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실재를 가장 심오하고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192)에 있기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는 아인슈타인과 같은 실재론의 전통을 잇고 있다. 그리고 이 실재론의 입장에서 양자역학의 의미를 탐구하고자 한다. 이때 저자가 언급하는 실재론이란, ‘인식의 대상이 주관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믿는 견해’(137)를 말한다. 우리가 어떤 대상이나 현상을 인식하지 않고 있다고 하더라도 이 대상이나 현상을 실재한다고 인정하는 관점이다.


 

이 맥락에서는 양자역학적 실재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아인슈타인과 물리학사상 격렬한 논쟁을 벌였던 닐스 보어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의 코펜하겐 해석과 대척점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입장과 마찬가지로 저자는 현상학적인 입장에 서있는 코펜하겐 해석과 거리를 두며, 우리가 대상을 측정하지 않아도 대상은 존재한다고 본다. 반면 코펜하겐 해석에서는 여러 상태가 중첩되어 있던 대상을 측정한 후에는 측정 전의 상태가 붕괴되어 버리고 사라진 다음, 하나의 결과로 도출된다는 입장이다. 내가 이해하는 바로 코펜하겐 해석은 측정 전과 후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해 주목하지는 않는 듯하다. 반면 저자를 포함한 실재론자의 입장에서는 측정 전후에도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명확히 알 수 있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정리된다. 이 부분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중요한 것은 이 두 가지 견해가 모두 대상, 그리고 세계를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한 다른 해석, 다른 입장이라는 말이다. 전통적으로 교과서에는 코펜하겐 해석이 우선적으로 소개가 되어있다. 반면 저자는 이 견해와 거리를 두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셈이다. 중요한 것은 교과서에 나온 지식이라도 우리가 과연 현상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의 문제의식이다.


 

이러한 활동은 역시 과학에 대한 저자의 강한 신념에서 나왔을 것이다. 합리적으로 제기된 개념을 검증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말이다. 아랍의 후예이기도 한 저자는 17세기 초 아랍 학자 이븐 알하이삼이 전개한 운동을 소개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는 알하이삼이 제창한 알슈쿡(al-Shukuk)을 제시한다. 이것은 의심이라는 의미를 갖는데, 알하이삼이 과거의 지식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증거 없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73)고 주장하며 전개했던 철학운동이었다. 이 견해는 물리학을 비롯한 현대의 모든 과학 분야가 성립할 수 있는 전제 조건이 들어있다. 바로 지식에 대한 검증가능성을 중요한 가치로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이 태도는 과학뿐만 아니라 현대의 모든 학문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자 토양이 아닐까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저자는 물리학이야말로 실재에 대한 이해로 안내할 수 있는 길이라는 결론을 내린다. 물리학을 비롯한 과학으로부터 일반 독자가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무엇보다 이븐 알하이삼의 태도와 같은 것이 아닐까 싶다. 바로 합리적인 의심을 갖는 태도 말이다. 이는 당연하게 여겨지던 과거의 지식을 시험대에 올려놓아보려는 자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전체가 부분의 합이라고 보는 환원주의자의 면모를 강하게 보이는 저자가 비판한 필립 앤더슨의 견해도 궁금해진다. 저자에 따르면 노벨상 수장자인 이론 물리학자 필립 앤더슨은 극단적인 환원주의에 반대하는 논문을 썼다. 짐 알칼릴리는 필립 앤더슨의 논리가 약하다고 비판하는데, 환원주의적인 면모에 가반을 두고 있는 물리학자가 극단적인 환원주의를 경계하는 시도 자체가 신선했기 때문이다. 물질세계를 이해하려는 두 물리학자가 환원주의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가지고 각자의 주장을 주고받는 일 자체가 내게는 인상적이고 유의미하다고 본다. 이런 전통이 우리 사회에서는 얼마나 뿌리내리고 있는지 점검해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짐 알칼릴리는 물리학의 가능성에 대해 강한 신뢰를 갖고 있지만, 한편으로 이 도구의 한계 역시 분명히 인식한다. 그는 물리학 지식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거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섬과 같다”(288)라고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가 평생 몸담아온 물리학은 세계를 이해하며 얻는 경외감으로 보답하는 지적 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이 책에서 그는 흔한 비교나 비유의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대체로 단도직입적인 스타일로 설명한다. 하지만 그가 물리 현상에 대해 의인화된 비유를 사용한 대목이 재미있다. 일반상대성이론을 소개하는 장에서 그는 중력이 강한 곳의 시간이 느리게 흐른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소개하고자 다음과 같은 비유를 들었다.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시간의 흐름이 가장 느린 곳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천천히 늙으려고 하는 것이죠.”(89) 그러면서 그는 정말 아름다운 설명 아닌가요?’라며 스스로 만족해한다. 이 문장을 쓰고는 좋아라하는 물리학자라니. 정말 재미있지 않은가. 독자는 이 책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여러 첨단 연구 분야에 대한 이해를 다 하지 못하더라도, 저자의 물리학에 대한 신념과 사랑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무엇보다 과학이 오랜 역사를 통해 검증을 거쳐 만들어져왔고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분야라는 점 하나를 배워간다면 충분하지 않을까.




[1] "세상을 이해하는데 물리학이 결정적으로 필요한 이유를 설명하고 싶습니다."(12)

[2] "아랍학자 이븐 알하이삼은 17세기 초에 ‘의심‘을 뜻하는 ‘알슈쿡 al-Shukuk‘이라는 철학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특히 고대 그리스인들의 천체역학을 지적하면서 과거의 지식에 의문을 제기해야 하며, 증거 없이 하는 말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적었습니다."(73)

[3] "물체가 땅으로 떨어지는 이유는 항상 시간의 흐름이 가장 느린 곳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 천천히 늙으려고 하는 것이죠."(89)

[4] "수학적 이론을 찾는 것만큼이나 올바른 이야기를 찾아내는 것이 중요하다."(144)

[5] "물리학의 가장 중요한 목적은 실재를 가장 심오하고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192)

[6] "과학의 진정한 가치는 확실성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불확실성에 대한 개방에서 나옵니다."(273)

[7] "우리가 사는 이 세상과 우주에 대한 모든 ‘왜‘와 ‘어떻게‘를 알고자 한다면, 물리학자들이야말로 실재의 진정한 이해로 가는 길입니다."(287)

[8] "물리학 지식은 아직 설명되지 않은 거대한 바다에 둘러싸인 섬과 같다."(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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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2-05-07 07: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당선 축하합니다~!! 즐거운 휴일 보내시길 바랍니다 ^^

mini74 2022-05-07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저도 축하드려요 ~~

이하라 2022-05-07 08: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 축하드려요. 기쁜 주말되세요.^^

thkang1001 2022-05-07 1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초란공님! 이달의 당선작 선정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행복한 주말과 휴일 되시길 기원합니다!
 
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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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페미니즘, 모든 존재의 생존을 위한 언어이자 행동 강령

- 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에코페미니즘(2014) 읽고


 

나는 해방 후 시공간에서 화가 이쾌대가 그린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들여다본다. 옥색에 가까운 두루마리를 입고 다소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의 반영이다. 왼쪽 배경에 작게 그려진 인물들은 우리의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다. 반면 그는 중절모를 쓰고 서양식 채색도구(붓과 팔레트)를 손에 쥔 모습이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서 분열이라는 키워드로 이 그림을 읽어냈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이 분열이라는 맥락을 만들어낸 요인이었다. 인간은 그가 살아간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타인을 포함한 공동체 및 환경과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며 형성된 하나의 문화적 기호이기도 하다. 그를 단 몇 개의 키워드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쾌대의 자화상이 품고 있는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서 하나는 식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세기 말에 출간되어 페미니즘 분야의 새로운 고전이 된 에코페미니즘을 읽으면서 간간이 이쾌대의 자화상을 떠올렸다. 그는 출생부터 32년간 일제 강점기 식민지인의 입장에서 미술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다가 어느 날 강제 해방된 공간으로 던져진 지식인이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뒤엉키며 격하게 대결하던 1940년대 말, 이제 30대 중반이 된 화가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듯 했다. 그렇게 화가의 굳은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이 때 그가 바라본 현실은 어땠을까. 해방과 함께 물러났던 친일세력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을 틈타 되돌아왔고, 나라의 앞날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정국이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통제 권한을 넘겨받은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식민주의적 착취와 억압은 이제 또 다른 얼굴의 식민주의적 구도로 이어졌다.

 

이 책의 저자인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페미니즘 이론가이면서, “우리는 행동파 학자다”(30), “경험과 투쟁이 이론적 연구보다 우선한다”(32)라는 구호를 모토로 삼았던 활동가다. 페미니즘 및 환경과 관련한 사안에 두 사람은 모두 현장에서 직접 행동해온 인물이다. 동어반복일지 모르지만, ‘에코페미니즘은 인권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과 지구상의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자각과 실천이 접목된 사상으로 이해된다. ‘에코페미니즘이 내게 호소하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개별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 깃든 본질 혹은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민중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특히 참여자들은 생존투쟁을 통해 생물학적·문화적 다양성과 상호연관성이란 가치를 지켜나가고자 한다. 에코페미니즘은 환경의 구원자로서 여성의 역할이 중심을 이루지만, 환경과 관계를 맺는 모든 존재를 포용한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가 우선적으로 비판하는 대상은 성장 중심의 가부장적 경제 모델이다. 저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패러다임의 결과물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인류사에서 농업혁명으로 호명되는 8천년 전후의 시기에 재구조화된 공동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에 들어와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쾌대의 자화상을 통해 이야기한 식민주의는 이런 배경이 가져온 부정적인 영향이다. 성장 중심의 경제는 잉여 생산물을 낳았고, 이를 소비할 구매자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몇몇 국가들은 세계로 눈을 돌려, 자원을 착취하고 생산물을 내다 팔 시장을 확보하고자 했다. 식민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태어났다. 이쾌대가 경험했던 한반도의 식민주의는 근대 서구의 환원주의적 관점이 가부장제와 결부되고 보강되어 한반도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반다나 시바는 이렇게 식민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경제 모델이 식민지의 억압과 착취에 의존하면서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 문화를 낳았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런 관점이 여성을 포함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데까지 용인하게 되었다고 여겼다. 이 과정에서 지역적인 특색은 사라지고 획일화된다. 가까운 예로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종군 위안부강제 동원, 한반도 자원과 식량 수탈,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언어를 말살하기 위해 펼친 정책 등에서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 문화적 다양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식민지 현실에서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이것이 이쾌대의 자화상에서 읽을 수 있는 배경적 맥락으로서 분열증적 징후가 아닐까 싶다.

 

이제 현대로 들어오면, 이러한 식민주의적 자본주의는 새로운 모습, 새로운 페르소나를 갖게 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리아 미스와 반다나 시바는 이 경제 모델이 내세우는 키워드가 전지구주의, 세계화, 민영화, 핵 발전, 개발주의,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라고 지적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분리가 이뤄지고 경계선이 확정되고 있고, 반면 초국적기업의 투자와 시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세계질서전 지구적 통합이라는 거창한 계획을 촉진하도록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사실이다.”(61)

 

여성과 자연, 이민족을 착취하며 성장했던 식민주의적 국가가 이제는 다국적 기업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계보학이다. 저자들은 이런 맥락 속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인 여성 및 토착 민중과 손을 잡고 생명과 공유자산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국적 기업과 통제에 순응하는 삶이 아니라 자급하는 삶이 된다. 이를 위한 전제가 바로 생명의 다양성과 사회 문화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다양성을 갖춘 공동체 및 환경은 구성원의 지혜를 모아야 지속가능한 생존이 보장된다. 이는 환경 내의 모든 존재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총체를 이루고 있음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쾌대의 자화상이 분열증적 징후를 담고 있다는 것은 착취와 억압에 기반한 식민주의적 현실을 겪은 지식인의 몸에 각인된 기억일 것이다. 분열증적인 징후로서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극심한 양극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양극화 경향은 공공자원을 점유하고 강탈하는 기업이 많아지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환경에서 공동체 내의 다양성과 상호연관성이 파괴되면 생존이 어려워지고 회복이 더디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우리 사회의 검찰을 비롯한 정치권력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 비윤리적인 기업을 비호하는 세력이 되어버렸는데, 이러한 권력이 신봉하는 것은 분열하여 통치하라는 만트라다. 근대적 식민주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우리가 이쾌대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분열증적 징후, 혹은 지독한 현기증을 여전히 느끼는 이유는 새로운 신자유주의 모델이 근대의 식민주의 모델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극심해진 양극화로 취약해진 이들은 벌어진 격차를 넘어 반대편 극으로 가고자한다. 이들은 기업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스스로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착취를 쉽게 용인하게 된다. 이제 분열증적 징후는 더욱 탄력을 받아 심화되어간다.

 

반다나 시바가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도 수십 년 전에 통에 받아 마시던 지하수가 이제는 상당부분 기업의 소유가 되어 버린 현실을 마주했다. 수원(水原) 주변으로 담장이 쳐지고 경호 인력이 고용된다. 이것이 민영화라는 이름의 기업 지배 양상이 정부의 민영화와 더불어 경찰국가로 변해가는 모습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원주민에게서 뺐었을 때 토머스 모어가 적용했다는 논리, ‘쓸모없이 비어 있는 땅을 취할 때 몰수가 정당화된다’(95)는 논리는 이제 전 지구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국내에서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민영화되었던 생수산업이 그 사례다. 이처럼 기업의 영리, 기업의 성장만을 추구한 결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더욱 열악해졌다. 인간에 대한 존중이 희박해진 논리는 생태계파괴와 환경오염에 대한 불감증도 낳기 쉽다. 이러한 관점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모든 대상, 이를테면 종자, 식량, 토지, 생명 등으로 확장된다. 자연과 더불어 공동체 내에서 공유되었던 자산들이 이제는 기업의 상품이 되어 버렸다.

 

댐건설은 또 어떤가. 반다나 시바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진행되는 전형적인 댐건설 과정은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의 차관을 받은 국가의 정부가 강물을 막아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지역적으로 관리하던 분권화된 물 관리 주체가 정부주도의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전환되기도 한다. 여기에 차관을 제공한 경제 기구는 외국 기업이 들어와 사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협정 조항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차관을 받아 국책사업으로 댐건설을 한 개발도상국에서 물과 같은 공공자원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권한이 민영화된다. 그럼 이 관리 권한은 누가 갖게 되는 걸까. 바로 외국의 기업으로 넘어가게 된다. 저자는 이런 개발과정을 통해 차관과 엄청난 세금, 국민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 댐과 수자원이 외국 기업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는 메커니즘을 알려준다.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노동력만 투입되는 것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댐건설로 수많은 수몰민이 발생하고 이들은 강제이주를 강요받게 된다. 반다나 시바가 인용한 2000년 이전 자료에 따르면, ‘지난 40년의 개발과정에서 인도의 1500만 명 인구가 고향에서 뿌리 뽑힌 채 쫓겨났다’(190). 물론 이 수치는 댐건설을 포함한 광산, 발전소, 군 기지 개발을 포함한 자료다. 이후 20년 간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도 초대형 삼협댐을 비롯하여 수많은 댐이 건설되었다. 수몰민과 해당 지역의 터전이 사라지면서 피해자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공동체가 삶의 터전과 맺어온 문화적 다양성 역시 소멸되어 버렸다. 또 주변 지역의 생태계가 품었던 생명의 다양성 역시 감소하게 되었다. 이는 금액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가치를 잃는 일이다. 지역 주민은 점점 영세해지는 반면, 소수의 기업은 막대한 개발 이익을 얻었다. 이들 기업의 이익은 무엇보다 자연과 지역 주민의 착취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모델을 거부하고 그 폐해를 탈피하려는 시도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은 이제 기업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코페미니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자급적 관점이다. 마리아 미스에 따르면, 가부장적 자본주의사회의 생산자는 더 많은 상품, 더 많은 영리를 추구하지만 소비자들은 오염되지 않은 환경과 음식, 안전한 생활을 원한다.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분열증적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제한된 자연과 자원을 외면한 채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코페미니즘은 비착취적, 비식민지적, 비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비전을 추구한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도구적 비전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급적 생산과 기술이 필요하다. 삶의 새로운 균형감각을 회복하고자 하며, 이는 삶의 방식을 새롭게 재조직해야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에코페미니즘은 상호연결성, 총체성의 가치를 중요시하며 기존의 가부장적 경제 질서가 광범위하게 만들어낸 문제를 그 원인부터 치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출발은 서문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오직 연계하라’(10)는 구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모든 존재자와 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주목한다. 이들이 환경과 맺는 안전하고 건강한 관계성 속에서 각자의 존재 가치를 포용한다. 이분법적이고 분열증적인 개발 논리를 벗어나기 위해 비착취적인 관점을 추구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자급적 관점을 중시하므로, 이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중심을 이루면서도 세계의 다른 구성원인 남성에게도 책임을 요구한다. 저자는 자급적 관점은 남성들이 지구생명체를 창조하고 보존할 책임을 실제로 분담하는 것을 의미 한다”(513)고 언급한다. 이는 기존의 가부장적 경제 모델에서 배제된 영역에 속하는, ‘생산자가 곧 소비자인 노동, 혹은 그림자 노동을 주로 담당했던 여성과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는 주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생명보존을 위한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성들이 가사, 어린이와 노약자 돌보기, 지구를 치유하는 환경 작업, 새로운 형태의 자급생산 등 무임금 자급노동을 분담해야 한다’(513)는 의미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코페미니즘은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제 질서에 대항하며, 여성과 남성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상호 연관성에 기반을 두는 새로운 언어이자 실천적인 행동강령이기도 하다.

 




이쾌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유화, 1948-49년 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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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01 01: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쾌대 자화상을 맨 아래 보물처럼 숨겨두셨군요. 읽으면서 내내 상상했거든요. 반다나 시바의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초란공님

초란공 2022-04-01 01:51   좋아요 1 | URL
좀 전에 얄라알라님이 생각났었는데요 ㅋㅋ 요새 제가 글쓰기든 책읽기든 의욕을 좀 잃었는지 활동성이 떨어진 바이러스마냥(?) 움츠리고 있네요. 누스바움 여사 읽기도 미뤄두고요 ㅜㅜ 봄타나봅니다 ㅋ
 
제국의 시대 - 로마제국부터 미중패권경쟁까지 흥망성쇠의 비밀
백승종 지음 / 김영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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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의 흐름을 파악하고 새로운 지향점을 찾는 일

- 백승종의제국의 시대(2022)


 


역사가들은 왜 끊임없이 역사책을 쓸까? 우선 과거의 행적을 기억하고 후대에 전하며 이를 평가하기 위함일 것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역사는 현재를 성찰할 때 유용한 기준이 될 수 있기도 하다. 이게 역사학의 효용이다. 역사에 동일한 사건은 없지만, 과거의 사건은 현재 당면한 과제에 판단의 근거가 되고, 가까운 미래를 전망하거나 계획할 때 영감을 불어 넣는다.


 

미시사를 전공한 백승종 교수는 제국의 시대를 쓰면서 다양한 제국의 역사를 가로지른다. 1차 사료를 비롯한 다양한 자료로부터 관심을 갖는 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구체적인 생활상을 재구성하던 관점을 넘어, 세계사적인 흐름 속에서 제국의 운명을 들여다보았다. 로마 제국을 시작으로 현재에 이르는 2000여 년의 통시적 관점과 현재 전 세계를 아우르는 공시적 관점이 접목되고 있다. 급격히 변하는 국제사회의 질서를 고려하면, 이 책은 역사가가 역사를 다양한 관점에서 고찰해보고 다시 써야 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일반적으로 제국이란 황제가 지배하는 국가를 말한다. 하지만 저자는 보다 넓은 의미로 제국의 개념을 사용한다. 어느 국가의 영향력이 자국 영토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의 운명을 좌우하는 경우, 제국으로 간주한다. 따라서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의 국가가 제국의 범주에 포함된다. 특히 현대 러시아나 중국에서 국가 원수의 권력은 과거 전통적인 어떤 제국의 황제보다 막강하다. 이 책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 원고가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이 전쟁에 대한 언급은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저자는 여러 면에서 이를 예견하고 있어서 마지막으로 가면서 특히 실감나게 읽어나갈 수 있었다.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과 관련하여 생각해보면, 이 전쟁의 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제2차 세계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미국은 세계 대전 이후 가장 강력한 제국으로 세계에 부상하여, 공산주의 국가를 확대하고자 했던 구 소련과 대립하게 되었다. 특히 미국은 북대서양조약기구, NATO를 구성하여 소련의 확장 야욕을 견제했는데, 이 때 형성된 기본 구도가 현재에 이르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저자는 NATO의 존재가 팍스 아메리카나를 가장 뚜렷하게 상징한다고 말한다. 20세기에 미국은 세계 경찰의 역할을 자임하며 단연코 세계를 손에 쥐고 있었다. 미국무부의 정책 자문을 맡기도 했던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저서 거대한 체스판이란 제목이 상징하듯, 미국을 비롯한 강대국들은 세계를 하나의 게임장처럼 보고 있었다. 따라서 현재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의 씨앗을 심은 것은 서방 세계의 NATO 설립과 연결되고 있으며, 여기에 가장 책임이 있는 국가는 미국과 러시아인 셈이다.


 

1992년에 당시 미국의 국무차관보 폴 울포위츠가 작성한 미국의 전략 보고서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들어 있다고 한다.


 

유라시아 지역에서 미국의 적대 세력이 지배권을 쥐지 못하게 막는 것이 미국의 목표다.” (396)

 


울포위츠의 보고서는 1991년에 구 소련이 붕괴 후, 미국 중심의 세계 지배 전략을 개편하면서 마련된 것이다. 현재 미국의 대통령인 조 바이든은 1992년 당시 상원의원이었는데, 이 전략이 실효성이 없다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지만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사례처럼, 미국 혹은 미국 중심의 세계 연합 체제는 한 강대국이 주변국을 위협에 몰아넣어도 이를 제재할 실질적인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여기에 당시 미국은 중국이 훗날 세계 2위의 강대국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을 것이다.


 

미국은 세계의 경찰로 자임하며 외교·정치·경제 영역의 패권을 유지해왔다. 반면 로마 제국의 사례와 같이 세계 주요 지점에 군대를 주둔시킨 것은 오늘날 재정 적자에 허덕이게 한 주요 원인이었다. 천문학적으로 증가하는 미국의 국가 채무는 코로나19로 인해 연간 총생산량보다 많아진 상태라고 한다. 저자가 오늘날 미국은 고대 로마공화정이 붕괴하던 때와 많이 닮았다.”(413)고 지적하는 이유도 국가의 재정난과 극심해지는 양극화 때문이다. 우려스러운 일이지만 역사학자의 시각에서 과거의 제국들이 국가 내부와 외부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돌파구로 전쟁을 일으켜왔다는 사실도 잊지 않는다. 일부 역사가들이 앞으로 20년 내에 제3차 대전의 가능성을 점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근거 없는 예언이 아니라는 말이다.


 

미국뿐 아니라 현재의 러시아나 중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몰락한 제국 러시아는 여전히 막대한 군사력과 자원을 등에 업고 마지막 발악을 하는 모양새다. 여기에 미국과 중국의 대립이 점차 노골화되는 상황도 심상치 않다. 미국은 인도 편을 들어 국경의 긴장을 조성하고, 중국의 일대일로프로젝트를 견제하는 행보를 보인다. 히말라야 국경에서 인도군과 중국군이 대립하고 무기가 배치된 상황 뒤에는 중국과 미국의 갈등과 대립이 있었다. 이는 전 세계가 단합하지 못하고 유럽이나 아시아에서 분열이 더욱 심화되는 양상으로 나타난다. ‘신 냉전이란 용어를 굳이 붙일 필요도 없다. 이 대립 양상은 편나누기를 기본적인 존재양식으로 삼는다. 이런 상황이 지속되면, 전염병 및 기후 변화 문제와 같이 국경을 넘어서는 전 지구적인 문제에 효과적으로 대응해나가는 길은 더욱 멀어질 것이다.


 

저자는 지난 2000여 년 간 역사에 등장했다가 사라진 제국들과 현대의 제국들 9개국을 선별하여 이들의 운명을 검토했다. 여기에 역사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 6가지를 키워드(전쟁, 지정학적 위치, 종교 및 정치사상, 지도자 및 시민의 역할, 전염병 및 기후변화)로 정리하고 있다. 저자는 제국의 운명에 지정학적 위치의 영향력이 예전보다 줄어드는 경향을 보인다고 지적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과거의 영향력이 고스란히 남아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 강대국의 세력 싸움에 한국 전쟁이라는 세계사적 사건 역시 상징적이다. 한반도가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로 대표되는 이념의 대리 전장(戰場)이 되었고, 전후 일본의 부흥이 여기에 직접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정도면 한반도에서 지정학적 위치의 중요성을 여전히 실감할 수 있지 않은가.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 옛날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들었다. 나와는 전혀 무관한 과거의 사건처럼 여겨졌다. 하지만 몽골 제국을 거쳐 ‘100년 전의 동아시아 3에 이르자 답답한 마음이 서서히 들기 시작했다. 일본이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끌어 부상했던 반면, 청나라와 조선은 외세의 침입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쇠락해가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서양세력과 중국의 대립으로 시작된 아편전쟁이 청나라의 몰락을 자초하고, 일본에게 대륙 진출을 길을 열어주었다는 점은 뼈아픈 교훈이다. 이 역사의 한 장면에서 조선은 패망하고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며, 한반도가 유린되었다. 이렇게 저자가 제시하는 세계사적인 흐름에서 보면 아편 전쟁과 한반도의 역사, 나아가 대한민국과 일본과의 역사 갈등은 모두 연결 되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 역시 세계사와의 관련 속에서 그 의미가 새롭게 이해되었다. 저자의 지적에 따르면, 일본은 200여 년에 걸쳐 성공적으로 근대화를 이루어냈다. 이와 달리 조선 사회는 너무나 폐쇄적이고 침체되어 있었다. 동학농민혁명은 이러한 사회의 모순을 낱낱이 드러내는 현상으로 이해된다. 이 과정에서 무능한 조선 조정은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하고 일본이 한반도에 군대를 파견할 구실을 주었다. 청나라와 일본의 군대가 한반도에서 긴장의 수위를 높였고, 결국 청일 전쟁과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이 전쟁에서 모두 이긴 일본이 한반도를 삼켰던 것은 이들에게 당연히 따르는 절차였을 뿐이다.


 

지정학적인 위치를 고려할 때 일본과 우리나라는 유라시아와 태평양이 만나는 길목에 있다. 여러 강대국이 대립하는 경계에 있는 것이다. 세계사에 유례없는 원자폭탄이 일본에 떨어졌다. 일본인은 패전국으로서 희생당했지만, 함께 희생당했던 외국인들(조선인 포함)은 전쟁과 무관한 상태에서 희생당해야 했다. 천만 명의 이산가족과 수백만 명의 목숨이 사라진 한국전쟁이 한반도에서 일어난 것 역시 간과해서는 안 될 일이다. 저자는 우리가 하기에 따라 앞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얼마든지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다’(319)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만약에 동북아시아에서 다시 전쟁의 불길이 타오른다면 그 무대는 한반도가 될 가능성이 크다.”(318)라고 말하는 것도 사실은 같은 이유에 근거한다.


 

앞에서 역사가가 역사책을 쓰는 이유가 무엇일까 생각해보았다. 이들이 끊임없이 역사를 연구하고 우리가 역사책을 읽는 이유가 뭘까. 과거에 살았던 인간들의 삶에 대한 앎이 그 목적일 것이다. 삶의 판단 근거로서 말이다. 이는 현재의 자신을 되돌아보고 나아갈 길을 선택하는데 영감을 줄 수 있기 때문일 테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내린 결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질문을 던지기도 한다. 또 세계사의 흐름 속에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고 새로운 지향점을 찾는 일이기도 하다. 앎이 지혜로 바뀌는 순간이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 싶다.


 

이번 독서에서는 여러 제국들이 겪은 흥망성쇠의 모습을 살펴보고 현재 우리가 놓인 상황을 비교해볼 수 있었다. 현재 진행 중인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뿐만 아니라 중국과 미국의 갈등 뒤에는 ‘21세기의 로마 제국이라는 미국이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코로나19로 드러난 것처럼, 전염병과 기후 변화 문제는 전 세계 국가의 결속과 유대가 필요한 상황이다. 하지만 세계의 불확실하고 해체된 연대의 모습만을 확인하고 있다. 이제 이 문제의 해결은 지구에 사는 모든 이가 어떻게 힘을 모을지에 달려 있다. 우리는 망망대해에 띄운 한 척의 배에 함께 타고 있는 공동 운명체다. 우리가 안고 있는 공동의 문제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지구인의 운명이 달려 있다. 역사가는 당대의 절실한 문제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저술로 남긴다. 독자는 이로부터 가장 절실한 교훈을 얻어낸다. 이 모든 행위가 지구의 운명을 결정하기 위한 첫 걸음일 것이다.







'출판사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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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똥이 2022-03-13 17: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뜻을 같이합니다. 🙏
 
배움의 기쁨 - 길바닥을 떠나 철학의 숲에 도착하기까지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 지음, 김고명 옮김 / 다산북스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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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발현하기 위해 물어야 할 것들


-배움의 기쁨(2022)을 읽고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 지음 | 김고명 옮김 | 다산책방

 




라디오에서 재즈 가수 빌리 할리데이(Billie Holiday)가 부른 <Strange Fruit>이 흘러나와 깜짝 놀랬다. 이 노래는 이제 막 읽은 배움의 기쁨이란 책에서 알게 된 곡이었기 때문이다. 이 곡의 제목인 이상한 열매는 백인들에게 무차별 폭행을 당하고 나무에 매달렸던 흑인들의 시신을 가리킨다. 차별과 수모를 당했던 흑인들의 아픈 역사를 말하는 노래다. 이 책의 저자는 미국의 문화비평가이자 작가 토머스 채터턴 윌리엄스다. 남부 흑인 노예의 후손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미국인들의 통상적인 표현으로 부모 중 한 명만 흑인이어도 자손 역시 흑인으로 취급되곤 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처럼 말이다. 저자 역시 학창시절 자신의 정체성을 속된 말로 깜둥이로 여기고 지냈다. 이 책을 읽은 후 이들이 이런 표현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일에 얼마나 큰 문제가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 이 표현은 혼혈인들을 깜둥이취급하는 자들에게는 타인을 혐오하는 관습에 젖게 한다. 반대로 이렇게 불리는 자들 곧, 당사자들은 자기혐오정서에 얼마나 빈번히 노출되며 심지어 이를 내면화시키는지 깨닫게 된다. 일부이긴 하지만 이 책에 소개된 현대 미국 흑인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이 말이 얼마나 파괴적인 역할을 해왔는지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평론가 자신이 읽고 글을 쓰는 직업을 갖게 되기까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일종의 자서전이기도 하다. 특히 미국이라는 특정한 공간에서 태어난 흑인의 정체성을 매개로 자신과 어버지의 삶을 연결시키며 이해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미국 동부 뉴저지주에서 태어난 저자는 고등교육을 받고 교양을 쌓은 부모의 노력으로 중산층의 환경에서 성장했다. 집에는 1만 여권의 책으로 둘러싸인 서재가 있었고, 자녀가 교양을 쌓고 책을 읽는데 큰 관심과 열정을 지닌 부모가 있었다. 하지만 학교를 포함한 집밖의 세계는 정글이나 다름없었다. 학교와 농구장에서는 폭력이 일상이었고, 흑인 학생들은 자기 및 타인에 대한 혐오적인 힙합 가사를 능숙하게 따라할 줄 알아야 집단에서 무리 없이 지낼 수 있었다. 집에 돌아오면 매일 아버지와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대화를 해야 했지만, 집 밖에서는 외모와 자존심을 내세우고, 거친 욕설을 내뱉을 줄 알아야 했으며, 나아가 책과 배움 자체를 경멸하는 연기를 해야 했다. 저자는 이것이 사회 계층을 막론하고 흑인 사회에 팽배해 있던 문화라고 지적한다.


 

하지만 흑인 아이들이 내뱉던 가시 돋친 말들이나 거친 욕설들은 이 아이들이 그만큼의 심각한 내상을 입고 있음을 암시하는 징후였다. 저자는 이런 흑인 문화에서 학생들이 일종의 가면을 쓰게 되었고, 누구나 하는 연기를 해야 했다고 진단한다. 고등학교 시절 저자의 여자 친구 스테이시는 재능 있고, 아름다우며, 똑똑한 학생이었다. 그녀 역시 중산층 집안의 자녀였다. 하지만 그녀는 또래 흑인들이 공유했던 역할극에 참여하여, 스스로를 좁은 물에 고립시켰다.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상상력을 스스로 닫아버렸고, 결국에는 다른 흑인 학생의 아이를 임신하기에 이르렀다. 또래의 많은 흑인 학생들처럼 그녀의 미래도 이렇게 닫혀버렸던 것이다.


 

저자도 이렇게 또래들과 같은 역할을 연기했지만, 아버지의 관심과 격려로 책읽기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결국 좋은 성적을 거두었고 좋은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저자는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며 우물 안 개구리와 같았던 자신의 모습을 깨닫는다. 결국 새로운 환경에서 경험하며 세상을 다르게 바라보는 눈을 갖추기 시작했다. 힙합 문화를 비롯하여 학창시절을 지배했던 흑인 문화와 정서를 되돌아보고 성찰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저자는 항상 책을 들고 다니며 연필로 밑줄을 긋던 아버지의 삶에 대해서도 점차 이해할 수 있었다.


 

저자가 대학교 2학년을 마치면서 철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고 집에 와서 아버지와 예술에 대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던 장면이 기억난다. 아버지는 책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서, 순수한 즐거움을 위해 읽어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에 반해 저자는 책읽기가 순수한 즐거움이기도 해야 한다는 입장을 펼쳤던 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아버지가 책을 이렇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되고 부끄러움과 아버지에 대한 부채감을 느끼게 된다.


 

나는 소설을 읽을 때도 무조건 펜을 쥐고 밑줄을 그어 가면서 읽었다, 아들아. 밑줄 긋는 걸 좋아해서 그런 게 아냐. 뭐라도 지식을 건져서, 뭐라도 실용적인 지식을 건져서 내 인생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강박 같은 거였지. 모르는 게 너무 많은데 나한테 뭐라도 가르쳐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거든.”(226)

 


저자는 아버지의 삶을 생각했다. 1930년대에 인종차별이 횡행하던 남부의 텍사스에서 아버지 없이 미혼모의 아들로 태어났다. 홀로 용돈을 벌고 학교를 다녀야 했다. 1950년대에는 땅콩버터 한 숟가락으로 아침과 점심을 때우며 사회학 석사 과정에 입학하여 공부를 했다. 식비를 아낀 돈으로 책을 사 모았던 것이다. 아버지에게 책읽기는 그만큼 절실한 행위였다. 저자는 아버지의 책읽기를 이렇게 전한다. “파피(아버지)는 인생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듯이 텍스트와 사투를 벌였다.”(188) 또 아버지의 책을 펼치면 책장에서 문제 제기, 행간의 해석, 동그라미로 표시한 난해한 표현의 정의, 주장의 해부와 파훼, 반박과 반론 제시와 전개를 여백에다 빼곡하게 적어놓은 글씨”(190)를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이 책은 자기 경멸적인 문화에 젖어 있던 흑인 학생이 책을 통해 교양을 쌓고,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기르는 과정을 담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서재를 매개로 책과 체스, 부자 간 진솔한 대화를 통해 아버지를 이해하고 존경하게 되는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이 책의 제목이 배움의 기쁨이지만 이 제목은 이 책의 진가를 다 담고 있지 못한 것 같다. 다소 협소하고 수동적인 느낌의 배움에만 그친 것 같아 아쉽다. 이 책은 배움의 효용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라보는 기준점이 완전히 뒤바뀌어 버린 저자의 경험담을 소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철학을 전공한 비평가답게 헤겔이나 니체, 하이데거와 사르트르의 실존 철학, 그리고 여기에 큰 영향을 준 작가 도스토옙스키를 넘나든다. 그는 학창시절 자신이 흠뻑 젖어 지냈던 흑인문화, 이를테면 소유물, 겉멋, 외모, 돈 등에 경도되어 있는 문화를 비판한다. 자신이 속했던 흑인 또래 집단은 피상적인 가치들만을 따르며 연기하고 있다고 진단한다. 이 현상을 간파하는 기준점의 하나로 실존주의 철학을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실존주의란 우리의 행동이 우리를 규정하고, 따라서 우리가 우리 행동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철학’(240)이라고 소개한다. 흑인 집단에 속한 구성원들이 깡패처럼 되고자 각자 선택했다는 의미다. 각 개인이 자신을 속여서 깡패 역할을 연기한 것이라는 말이다. 하지만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자기 앞에 놓인 선택지를 고를 수 있는 주체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저자에게 철학은 자신에게 솔직하기’, 혹은 자기 자신으로 존재하기를 알려주는 길잡이였던 셈이다.


 

우리는 모두 다양한 선택 앞에 서 있는 존재다. 깡패 연기를 하며 자신을 속이고 연기하는 삶을 계속 살아가길 선택할 수 있다. 또는 보다 넓은 세계에 호기심을 갖고 탐험하며 자신에게 진실한 삶을 살아가도록 선택할 수도 있는 셈이다. 누구나 원하는 답과 선택이 다를 수 있다. 다만 선택에는 그만큼의 책임이 따를 뿐이다. 때로는 우리가 내린 선택으로 다른 선택보다 훨씬 혹독한 환경에 처할 수도 있겠다. 삶에서 이런 선택의 고민을 해본 적이 있다면, 최근에 읽은 사르트르의 구토(1938)와 함께 읽으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을 해본다. 이 소설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철학이 반영된 소설이다. 처음에 읽기가 쉽지는 않다. 하지만 배움의 기쁨을 읽으면서 저자가 이야기해주는 경험과 사례들을 함께 떠올려보면, 실존철학의 구체적인 적용으로서 두 책 모두를 더욱 풍성하게 읽을 수 있겠다.

 


저자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아버지와 나눈 교감, 장서들을 통해 배운 깨달음의 힘은 강력했다. 아버지의 삶을 이해하면서 흑인으로서의 자긍심과 자존감을 어렵게 되찾았다. 아울러 힙합 문화로 대변되는 자기 경멸적인 흑인 문화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신적 빈곤과 기계적인 순응 속에 미래가 닫혀버린 많은 또래들도 떠올린다. 저자는 우리가 자신에게 미치는 악영향으로부터 벗어나게 행동하는 방아쇠는 각자의 손에 놓여 있음을 환기한다. 그런 의미에서 인간은 본질적인 삶의 문제 해결에 있어서 고독한 존재라는 점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배움의 기쁨구토를 함께 읽으며 실감하게 된 실존주의 철학의 한 조각이다.


 

이 책은 단지 책읽기나 배움의 기쁨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버지가 정성을 들여 모은 책들과 서재, 부모와 자녀 간의 친밀한 대화의 시간이 갖는 강력한 힘도 보여준다. 성인이 된 저자가 아버지의 서재에서 체스를 두다가 아버지가 자랑스럽다고 말하는 장면은 뭉클한 감동을 준다. 아버지의 생을 이해하고 비로소 공감하게 된 저자의 성숙함이 내게도 전해졌다. 또 인상적인 장면을 꼽는다면, 대학생이던 저자가 방학을 맞아 집에 와서 어머니와 산책하던 장면이었다. 어머니는 햄릿에 나오는 대사를 인용하며 아들에게 자신에게 진실해라고 당부한다. 이 대사는 햄릿의 등장인물인 폴로니어스가 멀리 떠나는 아들을 걱정하며 당부하는 대목에 나온다.


 

무엇보다 이점 - 네 자신에 진실되거라.

그러면 당연히, 밤이 낮을 따르듯,

네가 누구에게든 거짓될 수 없다는 결론이 따르지.

 

[햄릿, 김정환 옮김, 아침이슬, 2008, 33]

 


흑인 문화 속에서 스스로 장벽을 치고 연기하기를 그만두고 자신의 모습을 찾아가는 자기 발견의 기록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오로지 홀로 감당해야 하는 고독한 존재이지만, 개인으로서의 자신을 발현할 수 있는 자유를 지닌 존재라고 말해주었다. 그러므로 배움의 기쁨은 배움의 기쁨과 개인의 성공담 그 이상을 보여준다. 바로 독자에게 자기 자신에게 어떻게 진실할 것인가를 묻고 생각할 기회를 준다.




[1] "어휴, 빈민가 애들 입양해서 키우는 게 보통 일이 아니죠?" (20)
- 백인인 저자의 엄마가 마트에서 만난 백인들로부터 들은 말들.

[2] "파피(아버지)는 특별한 사람이 되겠다는 일념으로 살았다. 자신과 같이 생긴 사람에게 무조건 광적인 혐오를 보이는 세상에서 존경받는 사람이 되길 원했다." (109)

[3] "초등학교 때도 그랬듯이 이번에도 내게 상황을 좌우할 실질적인 힘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149)

[4] "두 번째 시나리오는 나에게 새로운 것을 시도해보는 것이었다. 자존심을 억누르고 호기심을 해방함으로써 타인을 통해 낯선 문물을 접하는 것." (149)
- 바게트 빵을 몰라 창피함을 느낀 저자가 했던 생각들.

[5] "신을 믿지 않는 파피에게는 독서가 유일한 구원이었다. 파피는 단순히 책을 모으고 정독하는 수준을 넘어 책과 분투했다. (...) 파피는 인생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듯이 텍스트와 사투를 벌였다." (188)

[6] "내가 살던 곳에서 흑인에게 책이란 슈퍼맨에게 크립토나이트와 같은 것이었다. 심한 발진과 두드러기를 일으키는 무시무시한 알레르기원." (192)

[7] "태어나서 처음으로 여자를 존중하는 법을, 여자를 철천지원수가 아닌 소중한 존재로 대하는 법을 배워갔다." (211)
- 대학에 가서 변화해가는 저자의 모습들.

[8] "후자(흑인문화)는 철저히 소유물, 겉멋, 외모, 맞대응 등 피상적인 면만을 따지는 반면, 전자(철학)는 그런 허울을 뚫고 들어갔다. 철학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나 자신이 플라톤이 말한 동굴에서 탈출한 죄수 같았다." (217)

[9] "그들(흑인들)이 존경할 수 있고 실제로 존경하는 것은 전능하신 돈이었다." (218)
- 현재 대한민국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10] "윌의 본질은 깡패가 아니었다. (...) 다만 깡패가 됐을 뿐, 깡패가 되기를 선택했을 뿐이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윌도 자신이 그런 사람이 아님을 알았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르트르가 말한 ‘자기기만‘이다. 자신을 속여서 어떤 역할을 연기하는 것." (242)

[11] "사르트르에 다르면 우리는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절대적으로 자유롭다. (...) 사르트르라면 우리 각자가 오로지 자유에 대해서만 노예일 뿐이라고 말했을 것이다." (244)

[12] "개인으로서 나를 발현하려면 반드시 내가 자라온 흑인문화를 장기간 이탈해서 나 자신이 속한 집단의 악영향으로부터 나 자신을 완전히 단절시켜야 한다는 결단이었다." (276)
- 대학 졸업 후 바로 대학원에 진학하지 않고 프랑스에서 일하기를 선택한 저자의 이유

[13] "논 노비스 솔룸 나티 수무스(우리는 누구도 홀로 태어나지 않는다.)" (282)
- 저자의 대학 졸업식에서 아버지가 ‘공익에 대한 의무‘를 잊지 말라며 해준 라틴어 축사(키케로가 한 말)


[14] "우리가 대개 혼자서는 자신을 똑바로 볼 수 없으며 타인을 통할 때에야 비로소 자신이나 자신의 상황을 어렴풋이나마 깨닫거나 이해할 수 있다는 이치를 알아가고 있었다." (291)

[15] 거리에서 비싼 옷을 입고 쇼핑백을 가득 들고서 랩가사를 읊조리는 흑인을 보고 저자가 한 생각.
"바로 그런 정신적 빈곤, 피상적 사고, 도덕적 미성숙, 기계적 순응이야말로 현재 흑인의 삶에 뿌리내린 근본적인 문제이자 이 책이 다루고자 하는 진짜 주제다." (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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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2-03-13 11:5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가 경험한 즐거움 중 가장 길게 누릴 수 있는 게 배움의 기쁨이에요.
배워도 배워도 새로 배울 게 있어 싫증이 나지 않거든요. 배움은 매력적인 세계에 빠지는 일이에요.

˝네 자신에게 진실되거라˝ ˝텍스트와 사투를 벌였다.˝
멋진 문구를 많이 보고 갑니다.^^

초란공 2022-03-13 16:59   좋아요 2 | URL
아무리 바빠도 배움도 항상 함께 해가야 하는 것 같아요. 나중에 하라고 하면 잘 안될 것 같습니다. ^^ 조금씩이라도 매일매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