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상실, 사랑 그리고 숨어 있는 삶의 질서에 관한 이야기
룰루 밀러 지음, 정지인 옮김 / 곰출판 / 2021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류, 언어로 규정된 자기기만의 연금술

- 룰루 밀러의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코페르니쿠스가 지동성을 주장했을 때 소수의 현자들은 지구가 광막한 우주 한 가운데 있는 하나의 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다윈이 생명체의 진화론을 정리하여 발표했을 때, 인간은 그저 지구에서 살아가는 하나의 구성원에 불과하다는 것을 가르쳐주었다. 이 두 사건은 인류에게 깊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그 이유는 인간이 이 행성에서 정상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다는 오랜 서양의 믿음에 정면으로 도전장을 던지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성경이 인간중심적이고 다른 생명체들에 비해 우월한 존재라는 인식을 담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이 역사는 보다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학전문기자 룰루 밀러의 책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에서 저자는 인간이 지구상의 모든 존재 중 꼭대기에 위치한다는 견해의 근원을 아리스토텔레스의 신성한 사다리개념에서 찾는다. 지금의 관점에서 2,500년 전의 사상가가 받아들였던 관점이 인류에게 얼마나 파괴적인 결과를 초래했는지 따지는 것은 공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찰스 다윈의 고종 사촌인 프랜시스 골턴이 종의 기원을 읽고, 우생학을 떠올리게 한 단초가 되었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일이다. 생물학의 학명은 자연의 생물체에 인간이 붙인 분류체계를 말한다. 자연을 파악하고 이해하고자 한 인간의 욕망이 담겨있다.


 

이런 맥락에서 저자가 따라간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삶은 의미심장하다. 그는 어류를 수집하고 분류했던 생물학자로, 현대 어류학의 선조 반열에 있는 인물이다. 저자는 조던의 행적을 이해하고 성찰하면서 이것이 자신의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련이 있음을 간파하게 된다. 특히 조던이 우생학에 심취했으며 사망할 때까지 우생학의 강력한 신봉자였다는 사실은 서양 백인사회의 한 단면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실마리를 준다. 우리는 나치 독일이 아리안족의 신화를 굳건히 마련하기 위해 티베트인들의 신체를 면밀히 조사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반면 게르만 족의 우월성을 주장하고, 유대인들의 열등함을 부각시키기 위해 코의 크기를 비롯한 신체 치수를 재는 등 주도 면밀하게 근거를 마련하고자 했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나치 독일이 이러한 우생학적인 개념을 처음 도입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우생학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는 미국이었다. 조던이 초대 총장을 지낸 스탠퍼드 대학을 비롯하여, 그에게 영향을 주었던 루이 아가시가 재직했던 하버드 대학, 그 밖에 예일, 버클리, 프린스턴 등 미국의 명망 있는 대학에서 우생학을 가르친 역사는 여러 가지 생각할 거리를 건네준다.


 

우생학적인 신념이 미국사회에서 충격적으로 구체화되고 실현된 사례는 캐리 벅 소송 판결로 나타난 불임화 합법화 과정이다. 이 사례는 공공복지라는 명분으로 개개인의 불임화 과정에 국가가 개입한 사건이었다. 이 판결은 그 자체로 이미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과연 누가 불임화의 대상을 결정하는가라는 문제다. 과연 어떤 근거로? 바로 여기에 우생학적인 편견이 개입하고 작용했던 것이다. 그 결과는 수만 건에 달하는 불임화가 이루어지게 되었고, 그 중 과도하게 많은 유색인 여성들이 표적이 되었다. 아메리카 원주민, 흑인을 비롯한 유색인들 다수가 개인의 의사에 반하거나 인지되지 못한 채 시술을 받아야 했다. 그것도 합법적으로 말이다. 그런데 저자는 2006-2010년 사이 캘리포니아주 교도소에서도 150명에 가까운 여성에게 불임화 수술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언급하는데, 이 과정이 불법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더욱 충격을 준다. 저자는 여전히 우생학의 잔재가 살아 있다고 강조한다. 우생학을 떠올렸던 프랜시스 골턴과 사망할 때까지 우생학을 신봉했던 데이비드 스타 조던과 같이 근거 없지만 스스로를 기만하는 집요한 신념이 현실에서 구체화되었을 때 우리의 삶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를 이 사례들은 보여주었다.


 

이 책에서 저자가 어류라는 범주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언급한 이유를 생각해본다. 분류학자들은 이미(아니면 이제야) 1980년대에 어류가 타당한 생물의 범주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한다. 저자는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 인간이 붙인 이름과 분류체계는 지극히 인간중심적인 견해에서 나온 것이며, 자기기만의 산물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평생 미국 전역의 물고기를 잡아 이름을 붙이고 분류하려 했던 조던의 생애 자체를 저자는 자기기만의 기이한 연금술이라고 했다. 저자는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다”(244), “(자연에 관한) 모든 범주는 상상의 산물이다”(262)라고 언급했다. 인간은 자의적으로 어류를 발명해냈다는 것이다. ‘어류라는 개념이 진화적 관계에 대해 우리에게 알려주는 바는 아무것도 없는데다, 나아가 인간을 자연의 사다리맨 위에 올려놓는데 기여하는 개념이라는 말이다.


 

이제 저자가 책에서 전해주는 이야기의 흐름은 작가 자신이 용기 있게 드러내는 성정체성에 이른다. 이 문제는 자연 세계에 대해 정상성을 규정한 인간의 모순을 되돌아보게 한다. 그런 의미로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용어를 떠올린다면 민들레 원칙을 꼽을 수 있겠다. 저자에 따르면 민들레는 주변에 너무나 흔해서 화단에 피어나는 잡초로 여겨지지만, 용도에 따라서는 약재로도 쓰이는 식물이라는 점을 말한다. 나아가 민들레 그 자체만으로도 이 자연을 구성하는 존재임을 강조한다. 저자는 어린 시절 우리는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가르친 아버지의 견해에 오랫동안 혼란을 느꼈지만, 결국 우리는 중요하다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저자가 이 말을 했을 때 함께 고려되어야 하는 부분은 민들레 역시 중요하다는 점일 것이다. 이것은 인간과 민들레 사이에 위계를 정하지 않는 태도에서 나온 것이다. 저자의 용기 있는 행보는 성정체성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깨달음에서 나온 것일 테다. 다윈이 종의 기원에서 강조하듯, 인간은 자연의 일부일 뿐이고 인간에게도 다양한 변이가 존재한다는 의미를 곱씹어보게 된다. 이 다양성 자체가 자연의 본 모습이며, 인간의 해석은 자연이 본질적으로 지니는 다양성을 감추는 데 큰 역할을 해온 것이다. 이 책은 이러한 관행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음을 일깨워준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보다 비판적이고 회의하는 마음가짐으로 인간이 만든 모든 범주와 규정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1] "어쩌면 진화가 우리에게 준 가장 위대한 선물은 ‘우리는 실제보다 더 큰 힘을 지니고 있다‘는 믿음을 품을 수 있는 능력인지도 모른다."(141)

[2] "우생학은 미국식 신여성과 포드 모델 T 못지 않게 미국 문화의 두드러진 한 부분이었던 것 같다."(185)

[3] "어떤 외부적 타격에도 종이 버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바로 ‘변이‘다."
"동질성은 사형선고와 같다."(187)

[4] "민들레는 어떤 상황에서는 추려내야 할 잡초로 여겨지지만 다른 상황에서는 경작해야 하는 가치 있는 약초로 여겨지게도 한다."(189)

[5] "이 나라에서 우생학 이데올로기는 결코 죽지 않았다. 우리는 우생학에 끈덕지게 달라붙어 있는 나라다."(196)
"미국은 우생학을 세계 최초로 국가 정책으로 삼은 나라다."(213)

[6] "우리는 중요하다!"(228)
- ‘우리가 중요하지 않다‘라고 가르친 아버지에게 할 반박의 말

[7] "어류는 견고한 진화적 범주가 아니다. 곧 어류는 진화적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말해주지 못하는 범주다."(240)
"‘어류‘라는 범주가 수많은 차이를 가린다. 많은 미묘한 차이를 덮어버리고 지능을 깎아내린다."(241)

[8] "실제 자연 세계가 우리가 설정한 범주대로 분류되는 건 아니다."(244)

[9]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릴 것이다."(250)

[10] "어류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보면 경멸적인 단어다. 우리가 그 복잡성을 감추기 위해, 계속 속 편히 살기 위해, 우리가 실제보다 그들과 훨씬 더 멀다고 느끼기 위해 사용하는 단어다."(251)
"이는 인간이 언어를 사용하여 동물들의 중요성을 박탈하는 방식이자, 우리 인간이 정상의 자리에 머물기 위해 단어들을 발명하는 방식이다."(252)

[11] "내가 물고기를 포기했을 때 나는, 마침내, 내가 줄곧 찾고 있었던 것을 얻었다. 하나의 주문과 하나의 속임수, 바로 희망에 대한 처방이다. 나는 좋은 것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약속을 얻었다."(263)

[12] "나는 이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 계속 그것을 잡아당겨 그 질서의 짜임을 풀어내고, 그 밑에 갇혀 있는 생물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우리가 인생을 걸고 해야할 일이라고 믿게 되었다. 우리가 쓰는 척도들을 불신하는 것이 우리가 일생을 걸고 해야 할 일이라고. 특히 도덕적, 정신적 상태에 관한 척도들을 의심해봐야 한다."(267)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mini74 2022-04-12 15:2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삽화도 기억에 많이 남더라고요. 썩어빠진 사다리를 확 걷어차야 되는데 말이지요 초란공님 ㅎㅎ리뷰 넘 잘 쓰셔서 우와!! 하며 읽었습니다 *^^*

초란공 2022-04-12 19:41   좋아요 2 | URL
ㅋㅋ 간단한 방법이 있었네요 ^^;; 지금 생각하니 삽화도 인상적이었는데 코로나때문에 세세한 부분이 눈에 안들어왔나봅니다. 그림에 나오는 수염난 남자가 데이비드 스타 조던의 모습과 비슷하단 생각도 했었거든요.

고양이라디오 2022-04-12 18: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리뷰 잘 읽었습니다^^ 리뷰로 다시보니 좋네요ㅎ

초란공 2022-04-13 09:46   좋아요 2 | URL
고양이라디오님이 ‘올해의 책! ‘하신 글 보고 읽었습니다. 좋은 책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레이스 2022-04-12 21:5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제 이해했습니다. 책을 아직 못본터라 왜 물고기가 없다고 하는지 궁금했거든요^^

초란공 2022-04-12 21:55   좋아요 3 | URL
스포일러였나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