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코페미니즘
마리아 미스, 반다나 시바 외 지음 / 창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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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코페미니즘, 모든 존재의 생존을 위한 언어이자 행동 강령

- 마리아 미스·반다나 시바에코페미니즘(2014) 읽고


 

나는 해방 후 시공간에서 화가 이쾌대가 그린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을 들여다본다. 옥색에 가까운 두루마리를 입고 다소 굳은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의 반영이다. 왼쪽 배경에 작게 그려진 인물들은 우리의 한복을 입은 여인들이다. 반면 그는 중절모를 쓰고 서양식 채색도구(붓과 팔레트)를 손에 쥔 모습이다. 재일조선인 서경식 교수는 나의 조선미술 순례에서 분열이라는 키워드로 이 그림을 읽어냈다. 내가 주목한 지점은 이 분열이라는 맥락을 만들어낸 요인이었다. 인간은 그가 살아간 특정 시간과 공간 속에서 타인을 포함한 공동체 및 환경과 복잡하게 상호작용하며 형성된 하나의 문화적 기호이기도 하다. 그를 단 몇 개의 키워드로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이쾌대의 자화상이 품고 있는 맥락에서 발견할 수 있는 단서 하나는 식민주의라고 할 수 있다.

 

지난 세기 말에 출간되어 페미니즘 분야의 새로운 고전이 된 에코페미니즘을 읽으면서 간간이 이쾌대의 자화상을 떠올렸다. 그는 출생부터 32년간 일제 강점기 식민지인의 입장에서 미술을 배우고 그림을 그리다가 어느 날 강제 해방된 공간으로 던져진 지식인이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가 뒤엉키며 격하게 대결하던 1940년대 말, 이제 30대 중반이 된 화가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할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듯 했다. 그렇게 화가의 굳은 얼굴이 계속 생각났다. 이 때 그가 바라본 현실은 어땠을까. 해방과 함께 물러났던 친일세력은 새로운 이데올로기의 대립과 갈등을 틈타 되돌아왔고, 나라의 앞날은 한치 앞을 볼 수 없는 정국이었을 것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새로운 이데올로기로 통제 권한을 넘겨받은 또 다른 제국주의 세력으로 대체되어가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식민주의적 착취와 억압은 이제 또 다른 얼굴의 식민주의적 구도로 이어졌다.

 

이 책의 저자인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는 페미니즘 이론가이면서, “우리는 행동파 학자다”(30), “경험과 투쟁이 이론적 연구보다 우선한다”(32)라는 구호를 모토로 삼았던 활동가다. 페미니즘 및 환경과 관련한 사안에 두 사람은 모두 현장에서 직접 행동해온 인물이다. 동어반복일지 모르지만, ‘에코페미니즘은 인권운동으로서의 페미니즘과 지구상의 모든 존재를 포함하는 환경을 지켜야 한다는 자각과 실천이 접목된 사상으로 이해된다. ‘에코페미니즘이 내게 호소하는 지점이 있다면, 무엇보다 개별적으로 보이는 현상의 이면에 깃든 본질 혹은 근본적인 문제점들을 민중의 입장에서 이해하고 이를 현실에서 실천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특히 참여자들은 생존투쟁을 통해 생물학적·문화적 다양성과 상호연관성이란 가치를 지켜나가고자 한다. 에코페미니즘은 환경의 구원자로서 여성의 역할이 중심을 이루지만, 환경과 관계를 맺는 모든 존재를 포용한다.

 

반다나 시바와 마리아 미스가 우선적으로 비판하는 대상은 성장 중심의 가부장적 경제 모델이다. 저자는 여성에 대한 남성의 폭력이 유전적으로 프로그래밍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패러다임의 결과물이라고 강조한다. 특히 인류사에서 농업혁명으로 호명되는 8천년 전후의 시기에 재구조화된 공동체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근대에 들어와 자본주의와 결합되면서 가부장적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이쾌대의 자화상을 통해 이야기한 식민주의는 이런 배경이 가져온 부정적인 영향이다. 성장 중심의 경제는 잉여 생산물을 낳았고, 이를 소비할 구매자를 필요로 하기 마련이다. 몇몇 국가들은 세계로 눈을 돌려, 자원을 착취하고 생산물을 내다 팔 시장을 확보하고자 했다. 식민주의는 이런 맥락에서 태어났다. 이쾌대가 경험했던 한반도의 식민주의는 근대 서구의 환원주의적 관점이 가부장제와 결부되고 보강되어 한반도에서 구체화된 것이다.

 

반다나 시바는 이렇게 식민주의적이고 가부장적인 경제 모델이 식민지의 억압과 착취에 의존하면서 특히 여성에 대한 폭력 문화를 낳았다고 보았다. 나아가 이런 관점이 여성을 포함한 모든 것을 상품화하는 데까지 용인하게 되었다고 여겼다. 이 과정에서 지역적인 특색은 사라지고 획일화된다. 가까운 예로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종군 위안부강제 동원, 한반도 자원과 식량 수탈, 창씨개명을 강요하고 언어를 말살하기 위해 펼친 정책 등에서 여성에 대한 착취와 억압, 문화적 다양성이 파괴되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식민지 현실에서 가부장적 자본주의는 태생적으로 생산과 소비의 불일치, 교환가치와 사용가치의 모순을 안고 있었다. 이것이 이쾌대의 자화상에서 읽을 수 있는 배경적 맥락으로서 분열증적 징후가 아닐까 싶다.

 

이제 현대로 들어오면, 이러한 식민주의적 자본주의는 새로운 모습, 새로운 페르소나를 갖게 된다. 이것이 신자유주의 경제 모델이라고 할 수 있겠다. 마리아 미스와 반다나 시바는 이 경제 모델이 내세우는 키워드가 전지구주의, 세계화, 민영화, 핵 발전, 개발주의, 포스트모던적 상대주의라고 지적한다.

 

이 모든 것이 의미하는 바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새로운 분리가 이뤄지고 경계선이 확정되고 있고, 반면 초국적기업의 투자와 시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세계질서전 지구적 통합이라는 거창한 계획을 촉진하도록 모든 경계가 허물어진다는 사실이다.”(61)

 

여성과 자연, 이민족을 착취하며 성장했던 식민주의적 국가가 이제는 다국적 기업으로 대체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신자유주의의 계보학이다. 저자들은 이런 맥락 속에서 가장 취약한 계층인 여성 및 토착 민중과 손을 잡고 생명과 공유자산의 가치를 지키고자 했다. 따라서 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다국적 기업과 통제에 순응하는 삶이 아니라 자급하는 삶이 된다. 이를 위한 전제가 바로 생명의 다양성과 사회 문화의 다양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다양성을 갖춘 공동체 및 환경은 구성원의 지혜를 모아야 지속가능한 생존이 보장된다. 이는 환경 내의 모든 존재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총체를 이루고 있음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쾌대의 자화상이 분열증적 징후를 담고 있다는 것은 착취와 억압에 기반한 식민주의적 현실을 겪은 지식인의 몸에 각인된 기억일 것이다. 분열증적인 징후로서 전 세계에서 나타나는 극심한 양극화를 생각해볼 수 있다. 이런 양극화 경향은 공공자원을 점유하고 강탈하는 기업이 많아지면서 더욱 두드러진다. 이런 환경에서 공동체 내의 다양성과 상호연관성이 파괴되면 생존이 어려워지고 회복이 더디게 될 것이다. 또 다른 예로, 우리 사회의 검찰을 비롯한 정치권력은 자본의 노예가 되어 비윤리적인 기업을 비호하는 세력이 되어버렸는데, 이러한 권력이 신봉하는 것은 분열하여 통치하라는 만트라다. 근대적 식민주의 시대가 끝난 뒤에도 우리가 이쾌대의 자화상에서 느껴지는 분열증적 징후, 혹은 지독한 현기증을 여전히 느끼는 이유는 새로운 신자유주의 모델이 근대의 식민주의 모델의 성격을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극심해진 양극화로 취약해진 이들은 벌어진 격차를 넘어 반대편 극으로 가고자한다. 이들은 기업의 논리를 내면화하여 스스로뿐만 아니라 타인에 대한 착취를 쉽게 용인하게 된다. 이제 분열증적 징후는 더욱 탄력을 받아 심화되어간다.

 

반다나 시바가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우리도 수십 년 전에 통에 받아 마시던 지하수가 이제는 상당부분 기업의 소유가 되어 버린 현실을 마주했다. 수원(水原) 주변으로 담장이 쳐지고 경호 인력이 고용된다. 이것이 민영화라는 이름의 기업 지배 양상이 정부의 민영화와 더불어 경찰국가로 변해가는 모습이다. 아메리카 대륙을 원주민에게서 뺐었을 때 토머스 모어가 적용했다는 논리, ‘쓸모없이 비어 있는 땅을 취할 때 몰수가 정당화된다’(95)는 논리는 이제 전 지구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국내에서 1995년부터 본격적으로 민영화되었던 생수산업이 그 사례다. 이처럼 기업의 영리, 기업의 성장만을 추구한 결과, 열악한 환경에서 일하는 값싼 노동력으로 나타난다. 그 중에서도 특히 여성 노동자에 대한 처우는 더욱 열악해졌다. 인간에 대한 존중이 희박해진 논리는 생태계파괴와 환경오염에 대한 불감증도 낳기 쉽다. 이러한 관점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모든 대상, 이를테면 종자, 식량, 토지, 생명 등으로 확장된다. 자연과 더불어 공동체 내에서 공유되었던 자산들이 이제는 기업의 상품이 되어 버렸다.

 

댐건설은 또 어떤가. 반다나 시바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에서 진행되는 전형적인 댐건설 과정은 세계은행, 국제통화기금(IMF), 세계무역기구(WTO)의 차관을 받은 국가의 정부가 강물을 막아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지역적으로 관리하던 분권화된 물 관리 주체가 정부주도의 중앙집권적인 구조로 전환되기도 한다. 여기에 차관을 제공한 경제 기구는 외국 기업이 들어와 사업을 할 수 있는 권한을 협정 조항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차관을 받아 국책사업으로 댐건설을 한 개발도상국에서 물과 같은 공공자원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권한이 민영화된다. 그럼 이 관리 권한은 누가 갖게 되는 걸까. 바로 외국의 기업으로 넘어가게 된다. 저자는 이런 개발과정을 통해 차관과 엄청난 세금, 국민의 피와 땀으로 지어진 댐과 수자원이 외국 기업의 통제 하에 놓이게 되는 메커니즘을 알려준다.

 

이 과정에서 지역 주민의 노동력만 투입되는 것으로 끝나면 그나마 다행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댐건설로 수많은 수몰민이 발생하고 이들은 강제이주를 강요받게 된다. 반다나 시바가 인용한 2000년 이전 자료에 따르면, ‘지난 40년의 개발과정에서 인도의 1500만 명 인구가 고향에서 뿌리 뽑힌 채 쫓겨났다’(190). 물론 이 수치는 댐건설을 포함한 광산, 발전소, 군 기지 개발을 포함한 자료다. 이후 20년 간 인도뿐만 아니라 중국도 초대형 삼협댐을 비롯하여 수많은 댐이 건설되었다. 수몰민과 해당 지역의 터전이 사라지면서 피해자들은 시간과 공간에 대한 기억도 잃어버리게 되었다. 공동체가 삶의 터전과 맺어온 문화적 다양성 역시 소멸되어 버렸다. 또 주변 지역의 생태계가 품었던 생명의 다양성 역시 감소하게 되었다. 이는 금액으로 환산이 불가능한 가치를 잃는 일이다. 지역 주민은 점점 영세해지는 반면, 소수의 기업은 막대한 개발 이익을 얻었다. 이들 기업의 이익은 무엇보다 자연과 지역 주민의 착취를 통해 얻어진 것이다.

 

에코페미니즘은 이러한 신자유주의적 경제 모델을 거부하고 그 폐해를 탈피하려는 시도다. 어떤 면에서 우리의 삶은 이제 기업에 상당부분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에코페미니즘이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가 자급적 관점이다. 마리아 미스에 따르면, 가부장적 자본주의사회의 생산자는 더 많은 상품, 더 많은 영리를 추구하지만 소비자들은 오염되지 않은 환경과 음식, 안전한 생활을 원한다. 저자는 이것이야말로 분열증적 모순이라고 지적한다. 제한된 자연과 자원을 외면한 채 성장만을 추구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에코페미니즘은 비착취적, 비식민지적, 비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비전을 추구한다. 가장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러한 도구적 비전에 대한 의존으로부터 자유로운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 자급적 생산과 기술이 필요하다. 삶의 새로운 균형감각을 회복하고자 하며, 이는 삶의 방식을 새롭게 재조직해야 가능하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에코페미니즘은 상호연결성, 총체성의 가치를 중요시하며 기존의 가부장적 경제 질서가 광범위하게 만들어낸 문제를 그 원인부터 치유하고자 한다. 이를 위한 출발은 서문에서도 언급된 것처럼 오직 연계하라’(10)는 구호에서 시작할 수 있다.

 

에코페미니즘은 모든 존재자와 이들이 살아가는 환경에 주목한다. 이들이 환경과 맺는 안전하고 건강한 관계성 속에서 각자의 존재 가치를 포용한다. 이분법적이고 분열증적인 개발 논리를 벗어나기 위해 비착취적인 관점을 추구한다. 에코페미니즘은 자급적 관점을 중시하므로, 이 과정에서 여성의 역할이 중심을 이루면서도 세계의 다른 구성원인 남성에게도 책임을 요구한다. 저자는 자급적 관점은 남성들이 지구생명체를 창조하고 보존할 책임을 실제로 분담하는 것을 의미 한다”(513)고 언급한다. 이는 기존의 가부장적 경제 모델에서 배제된 영역에 속하는, ‘생산자가 곧 소비자인 노동, 혹은 그림자 노동을 주로 담당했던 여성과 역할을 분담해야 한다는 주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무엇보다 생명보존을 위한 일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남성들이 가사, 어린이와 노약자 돌보기, 지구를 치유하는 환경 작업, 새로운 형태의 자급생산 등 무임금 자급노동을 분담해야 한다’(513)는 의미다. 이러한 맥락에서 에코페미니즘은 성장만을 추구하는 경제 질서에 대항하며, 여성과 남성을 비롯한 모든 존재의 상호 연관성에 기반을 두는 새로운 언어이자 실천적인 행동강령이기도 하다.

 




이쾌대, <푸른 두루마기를 입은 자화상>, 유화, 1948-49년 무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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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2-04-01 01:4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이쾌대 자화상을 맨 아래 보물처럼 숨겨두셨군요. 읽으면서 내내 상상했거든요. 반다나 시바의 책 소개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초란공님

초란공 2022-04-01 01:51   좋아요 1 | URL
좀 전에 얄라알라님이 생각났었는데요 ㅋㅋ 요새 제가 글쓰기든 책읽기든 의욕을 좀 잃었는지 활동성이 떨어진 바이러스마냥(?) 움츠리고 있네요. 누스바움 여사 읽기도 미뤄두고요 ㅜㅜ 봄타나봅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