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오래 나를 붙잡던 상념들

한때는 이끌리는 정당에 가입하기도 하고 자주는 아니더라도 가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던 나였다. 얼굴이 자주 붉어질만큼 부끄럼이 많은 편이지만 사람 만나기를 즐겼었고, 혁명가의 자질을 갖추진 못 했지만 나름으로 구축한 사고들로 세상을 요목조목 따져묻기를 즐기기도 했다. 그리곤 꽃이 피기를 바라며 똥이든 된장이든 가리지 않고 양분을 빨아들이려 하던 날들을 이어가는 와중에 벼락처럼 맞닥뜨렸던 여러 정치적 사건들. 그중에서도, 한때 마음 속 어느 한 켠 정도는 내어줄 수 있을만큼 좋아했던 누군가의 죽음들. 그들의 죽음 뒤 먼발치에 서서 나는 그렇담 그들이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 만큼의 양심 앞에 떳떳한가에 대해 오래토록 생각하며 살았다.

무엇이, 누가 그들을 죽음으로 몰았는지에 대해선 여전히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얄밉게도 시간은 그들의 죽음과는 별개로 사람 가리지 않고 동등하게, 가차없이 흘렀고 고백컨대 그 안의 나 역시나 약삭빠르게도 가끔 찾아오는 다행을 만나 아직도 나는 어찌할 바 모르며 근근이 목숨 붙여 살아간다. 그렇다고 내가 늘 비관에만 잠겨 살았냐고 스스로 따져 묻자면 그런 것도 아니다. 일상에서 접하는 사소한 꺼리들과 사람들로부터 행복을 느끼며 살았다. 운이 좋게도 오래전부터 마음과 생각을 나눌 반려자를 만나 혼자였더라면 헤어나오지 못 했을 늪으로부터 간간이 벗어날 수 있었다. 복잡다단한 세상으로부터 물든 내가 뱉어대는 투정은 요즘 방구석에서나 째잘대는 게 다이지만 그런 나를 받아주는 이 사람이 참 고맙다. 내가 느끼기엔 누구보다 평범하고 누구보다 평범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충분한 이 사람에게 언제까지든, 언제까지나, 좋은 애인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2023.12.19 또 한번 크리스마스를 앞두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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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쓴 짤막한 일기들 중 몇 꼭지를 끄집어내 옮겨본다. 노파심일 수 있지만 여기 쓴 말들은 나 자신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사실과는 동떨어진 과장된 얘기일 수도 있음을 먼저 밝혀야 할 것 같다. 일기는 본래 남에게 보여주는 글이 아니라 스스로 하루를 정리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보는데 여기 올리는 글은 보여지기를 목적으로 이미 쓰인 글들을 읽히기 쉽도록 재구성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불가피하게도 미지의 독자를 염두에 두고서 그가 내 글로 하여금 덜 상처받게끔, 혹은 가식적이게도 나의 못나고 못된 마음을 감추고자 글을 어느 정도 손봤다.

1
자유민주주의에 대해. 어느 정치인이 말하는 자유민주주의의 개념은 사회민주주의에 대비되는 반대개념으로써 사용하는 측면이 강하리라 여겨진다. 달리 말하면 그가 즐겨쓰는 이 단어에서의 ‘자유‘는 정치경제적 측면에 국한된, 아주 제한된 의미에서의 자유일 것이다. 물론 그가 자유라는 것에 대해 심도있게 생각해보았는지는 의문이다.

2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정체 모를 사람들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에 생긴 대인기피증을 극복하기 위해선 어찌해야 할까. 차라리 이렇게 마음먹어본다면 어떨까. 그들이 선량할뿐더러 내가 생각하는 이런저런 가치관과 맞닿은 구석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굳이 피할 필요가 없을 것이고 혹여 악한 인간들이라면 차라리 그들로부터 거리 위에서 죽임 당해 역사에 남겨질 수도 있지 않을까. 뜻하지 않게 사고사로 죽는다 한들, 그간 지은 죄에 의한 업보이자 인류문명 안의 일원으로서 저지른 갖가지 죄악으로부터 연결된 자연의 순리로 여기면 마음이 편할 듯하다. 어떻게든 피하고 싶은 건, 은밀한 죽임당하기이다. 어쨌건 나 역시 그들로부터, 나로부터, 세상 안에서 떳떳해야 한다. 그렇게 살아야만 한다.

3
클래식? 고전에는 모순이 깃들어 있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 차 있고 그런 세상과 닮아있는 것들 중에선 결국 오래도록 살아남는 경우를 종종 본다. 특히나 모순이 깃들어 있지 않은 이야기는, 독자로 하여금 자기가 원하는 바대로 이끌고 싶어 하는 정치적 욕망이 담긴 글이라 볼 수도 있을 것이다.

4
우울감으로부터 벗어나는 법? ‘우울‘을 어떻게 정의내리냐에 따라 방법은 달라지겠지만 내가 저지른 과오와 실수들에 대한 죄의식이 현재의 내 우울감을 지배하는 주된 원인이 된 듯하다. 하여 과오로부터 우울감, 죄책감이 느껴진다면? 그것을 글로 써 보고, 그것과 반대되는 행위들을 문장으로 남겨 빠른 시일 내에 행하자. 삶의 동력을 잃었다면? 살아있음을 느끼게 하던 것. 좋아하던 것. 당장 실천할 수 있으면서 주기적이고 단기적인 성과가 드러내는 무언가를 찾아보자.

5
과거의 내게 말을 건넬 수 있다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아버지로부터, 가난으로부터, 물신주의에 젖은 세상으로부터 비롯된 수치와 분노를 원동력 삼아 살아가는 당신. 스스로는 가면 쓰길 즐기지만 온갖 거짓을 들춰내고 후벼파내서는 대상 가리지 않고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으로 분별력 없이 떠들어대길 좋아하는 당신. 언젠가는 그게 당신 인생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될 수도 있음을 명심하고 조심하시길..

6
예수그리스도는 사라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이 바로잡아야 할 대상이다. 마찬가지로 신에 대한 믿음은 개인의 영역이지만 신은 없어져야 할 대상이 아니라 끊임없는 재해석이 필요한 대상이다. 의문이 잇따른다. 예수는 인간을 위한 존재였으나, 신은 과연 인간을 위한 존재일까? 예수든 신이든 끊임없이 바로잡고 재탐구해야 될 대상으로 본다면 이런 행위들의 궁극적인 목표점은 무엇일까? 그 지점이 단순히 ‘인간‘만을 위한 것이라면, 변화하는 시대에 맞는 정신이라 볼 수 있을까?

7
신을 믿는 것에 대한 단상. 죽음을 몇 해 앞둔 톨스토이는 혁명의식에 고무된 청년 고리키에게 하느님을 믿을 것을 권했다. 종교계로부터 파문당했던 말년의 그가 그 후에도 교회를 찾아나섰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남겨진 대화록을 참고해보건대 신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은 채 여생을 보낸 건 사실인듯하다. 선선한 바람이 이는 초가을, 동네 언덕에 위치한 마음씨 좋은 빵집 노상탁자에 앉아 문득 하느님에 대해 생각한다. 하늘님을 믿어본다면 어떨까. 나의 하늘님은 고정불변하는 구체적인 형상이 없다. 나는 하늘님의 일부이자 나의 하늘님은 때로 내가 되시고 때로 누군가의 얼굴로 나타나신다. 어쩌면 늘 곁에, 그게 아니라면 불시에 찾아와서는 일상 속의 어느 한 부분이 되신다. 내게 ‘하느님을 믿는다‘는 건, 낯설거나 익숙한 어떤 한 존재를 선량한 마음으로 끌어안을 것임을 뜻하며 나 아닌 다른 존재로부터 신의 얼굴을 읽어내려는 마음이 담긴 의지로 다가온다. 내 정의대로라면 그래서 이 믿음은 지키기 어렵나보다. 그럼에도 이리 마음먹자니 하느님을 믿는다는 건, 나를 존중하는 길이고 다른 누군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연결된다. 그도 비슷한 마음이었을까?

8
모든 창조물들은 창조자의 특성을 반영한다. 요리사에겐 요리가, 작가에겐 글이, 음악가에겐 음악이, 제빵사에겐 빵이, 언어를 다루는 사람들에겐 언어가, 노동자에겐 노동이, 디자이너에겐 옷이, 화가에겐 그림이... 신(자연)이 우리를 창조했다면 우리에게도 신(자연)의 모습이 존재하리. 그렇담, 창조자는 누가 창조하는가? 독립적 탄생이 아닌 복합산물일 것이다. 여전한 물음. 신(자연,우주)는 무엇들이 창조했는가?

9
보들레르, 말라르메, 위스망스와 같은 소위 데카당 작가들은 왜 어렵게 썼을까에 대한 단상. 식자층이자 상류쯤 어딘가에 속했던 그들의 우회적 자살 혹은 타살 방법이었을까. 예견된 독자층으로부터의 성찰과 자멸을 이끌기 위한 방법이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단순히 시대 흐름에 따라 세상과의 문을 닫은 자들의 자연발생적인 병의 징후였을까.

10
훗날 아이가 생기고 단 한 명의 작가만 읽힐 수 있다면, 주저없이 톨스토이를 고를 것 같다.

11
원하는 이상대로 남을 바꾸려 들지 말고 그냥 내 삶을 살아갈 것. 나부터 먼저 실천하고 묵묵히 그 길을 걸어갈 것.

12
거창한 것만이 이야기거리가 되는 게 아니다. 체호프가 말했고 보여주었듯. 하다못해 내가 지은 죄들은 우회적 표현을 통해 글감이 될 수 있다. 이 원칙에 근거하자면 쓸거리가 없다는 말은 곧 내 삶을 객관적으로 성찰하지 않거나 죄의식 따위는 느끼지 못 하는 인간이란 말일 것이다.

13
아버지가 싫어서 내뱉던 말들은 훗날 내가 지키고자 했던 사람들에게도 고통이 될만한 말들이었음을 뒤늦게 깨달았던 지난 날.

14
누가 내게 세상을 이루는 주된 두 가지가 뭐일 것 같냐고 묻는다면, 거짓과 모순을 꼽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중심엔 언제나 역시나 사랑이 있을 것이다.

15
어떤 추상적인 개념에 대해 정의를 내린다는 건 곧 나는 누구인가를 드러내는 일이고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달리 표현하는 방법이다.

16
일상에 숨어있는 프랙탈. 내뱉는 말에도, 쓰는 글에도, 평소 행위에도. 중요한 건 판단준거가 되는 그 범주를 찾아내어 이름붙여 인식하는 것. 이름 붙여보기와 이름 떼어보기.

17
‘궁금(宮禁)‘의 사전 정의가 흥미롭다. 첫번째론 임금이 거처하는 집, 두번째론 왕궁의 금령(어떤 행위를 금하는 명령)이라 한다. 아이러니한 의미!

18
누가 말하기를 땅에서 넘어졌으면 땅을 탓하지 말고 땅을 딛고 일어서라 한다. 지은 죄로부터의 죄책감이 불안감의 원천이라면, 그에 응당한 죗값을 치르던지 회개하고 참회하고 속죄하며 살아가야만 하는 것이 마땅하다. 내맘같진 않지만, 두려움에 피하는 건 비겁한 짓이다.

19
톨스토이의 예술론을 읽고서 든 단상들. 모든 예술은 고백을 포함하거나 그것의 변형이지 않을까. 고백이란 자기를 성찰하고 그로부터 깨달은 것을 타인에게 드러내 보이는 행위이므로 자기희생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자기희생, 자아성찰이 없는 예술은 울림을 주기 어렵다.

밝은 것들로만 채워진 예술은 자기기만이거나, 혹은 누군가를 속이고 싶거나, 세상의 어두운 이면을 아직 접하지 못했거나, 그런 현실을 직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창작물이 아닐까. 그만큼이나 지독하고도 온통 거짓으로 둘러싸이고 가려져있음으로 인해 두려움을 자아내는 게 인생이기도 하겠지만. 한편, 어두운 것들로만 채워진 이야기는 쉬운 마음으로 평할 게 못 되지만 이 또한 자기희생과 자아성찰이 담겨있지 않은 창작물이라면 자기기만이거나 누군가를 속이기 위한 것임에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서른을 넘긴 지금의 내게 인생을 대할 때 드는 감정 중 큰 부분은 고통이고, 이 고통을 잠재울 수 있는 건 역시나 사랑뿐이며, 사랑하는 이가 무엇이 됐든 곁에 존재할뿐더러 내가 죽고서도 삶을 영위해 나갈 수밖에 없는 운명에 놓여있다면, 세상이 붕괴되길 바라는 이는 없을 것이다.

어둠쪽으로만 기우는듯 싶을 땐 밝은 걸로 채우고 싶고 밝은 것으로만 채우고 싶다가도 어둠이 불쑥 찾아오는 게 인생이겠지. 늘 그랬듯 세상은 서로 다른 힘들로 얽혀 있고 이런 대립 구도 속에서 세상이 얼마 동안이나 균형을 이루며 지속할지는 미지의 영역이다. 공멸보다는 상생을, 파멸 보다는 생명을 지향하는 선한 힘이 지속되기를..

20
사랑 없는 연인 관계 = 신 없는 종교
작은 존재를 포용하려는 정신은 한 평생 품고 싶은 가치관이지만 이런 정신을 가장해 이를 악용하는 무리들이야말로 사이비가 아닐런지. 권정생 선생님의 말씀대로 사이비스런 종교에는 사랑이 부재하다. 신을 따르라 하고 그런 신의 대리자인 것 마냥 설교를 해대며 자신을 따르라 쏘아대는 자의 마음 속에는 정작 신이 없듯.

21
화합이 불가능할 정도로 과거가 얼룩진 극단의 관계라면, 헤어지고 각자의 길을 가는 것도 최선의 선택일 것이다. 다만 이후에도 겹점이 없어야 평화 안착이 가능하겠지만.. 각자의 길을 가다가도 훗날 어떠한 매개체로 인해 화합이 이루어질 수도 있는 게 삶이자 그것이 진정 아름다움 아닐까..

22
참보수에 대해 생각한다. 자멸과 공멸이 아닌 생명과 사랑을 기반으로 한 사상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무질서가 아닌, 질서안정화를 지향해야 한다. 시대가 변한 만큼 과학과 이성에 기초한 현실자연주의를 기반으로 해야한다. 가진 자들만이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없는 자들에게도, 새로운 생명에게도, 생명력을 불어넣는 정책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약자를 품에 안으려는 사람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한다. 기꺼이 따르리.

23
미스테리. 자는 동안 잊혀지고, 눈을 뜨면 다시 시작되는 나로써의 삶. 죽는 날까지 반복될 운명.
이미지와 환상의 덕을 보는 그들보다, 아무것도 전적으로 믿지 못하는 자들에게 죽음은 더 신비롭다.

24
영혼을 좀먹는 요인들. 폭력. 작고 큰 범주의 반복되는 갈등. 가능성이라곤 보이지 않는 현실. 스스로 죄라 여겨지는 과오. 자유를 맛본 뒤에 겪는 구속. 무언가를 향한 광신적인 복종에 대한 강요. 옳다고만 해주는 사람들. 지나친 주관화와 객관화. 기타등등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살게끔 하는 요인들. 사랑. 사랑하는 존재들. 사랑받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는 존재들. 가능하고, 가능할 것 같은 꿈들. 소박하고 다정한 사람들. 귀여운 자연물들. 맛있고 건강한 적당량의 음식들. 충분한 잠. 기분 좋을 만큼의 땀을 내는 운동. 과거나 현재를 공감하는 예술. 푸릇푸릇한 식물들과 따뜻한 햇볕. 신선한 공기. 불편하게 만들지라도 건전한 비판. 기타등등

25
남들의 어리석음과 세상이 더 나은 쪽으로 변하지 않고있음이 느껴져 답답할 때면, 과거를 돌아보고 나 또한 그들과 다를 바 없었음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따지고 보면 과거의 나를 향해있거나 현재의 못난 내 모습을 향하는 공격에 누군가가 의도치 않은 상처를 입곤 하니까.

26
평온하고 호화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들 중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좋아한다는 사람들은 가식적이고 왠지 모를 불쾌감을 준다. 한편 특히나 가난한 자들이 도스토옙스키를 향하는 존경심엔 연민의 정과 왠지 모를 이해심이 개입된다.

회개하고 참회하는 사람이자 부자의 대명사 격인 톨스토이의 작품들은 그 깊이와 넓이, 높이로 인해 모든 이들에게 삶의 지혜를 부여하지만 내 못난 감정이 시키길 부자들, 권세가들에게 더욱이 읽혀졌으면 좋겠다.

27
출신, 현지위를 떠나 눈높이와 시선이 아래를 향해있거나 아래에서 함께 머무르려는 자들만이 나의 스승이다.

28
발저를, 특히 후기의 발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픈 사람이다. 아픈 사람만이 그에게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 나는 어쩌면 내가 특별한 사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며 살았던 것 같다. 하지만 발저를 알고부터는 그가 앞서 그랬듯 나도 보통의 사람이었음을 깨달았다. 세계의 민낯, 고차원적 지식을 알게 되고부터 자의식이 깨어난 아래 계층이 지닐 법한 사유들. 어쩌면 그래서 더 현대적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대에서나 나올 수 있으리라 여겨질 만한 사람.

29
시대정신이라 단정 지을 순 없지만 나름으로 시대정신이라 믿고 여기는 몇 가지가 있다. 강단 있는 여성상, 소녀 같은 남성상, 걸출한 영웅은 아니지만 아주 보통의 사람에게도 각자의 형태로 지니고 있는 개성과 같은 것들이다. 요즘 일과를 마치고서 여자친구와 저녁을 함께 먹으며 싱어게인을 보는 게 삶의 낙 중 하나이다. 벌써 씨즌 쓰리째라는데 나는 이제서야 이런 프로가 있음을 알았다. 쨌든, 보면서 든 단상을 적어둔다. 내가 좋아하는 가수는 순수하거나, 스스로 무너지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을 보고 있자면 나도 모르게 빠져든다. 와중에서도 규범에 얽매이지 않고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자아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좋다.

30
문장은 크게 두 가지 분류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사실로써 받아들여지는 문장과 감정으로써 받아들여지는 문장들.

31
베일에 싸인 정치적 사건들. 그로부터 파생된 온갖 추측과 분노들. 진실은 은폐되어 있는데 그걸 놓고 왈가왈부할 수밖에 없는 상황. 붙잡고 늘어지다보면 누군가가 다치거나 죽어버릴지도 모르리란 불길한 예감. 그럼에도 이해되는 서로의 배경과 환경. 내가 했던 어리석은 말들과 행위들로부터의 죄책감과 부끄러움. 내가 들었고 당했던 행위들로부터의 혐오감. 몰입도가 강한 사람일수록 어디까지 개입했었는지에 대한 여부를 모르기에 그에 따라 조심스러워지는 가치판단의 전달.

오랜 친구이자 애증 섞인 사랑을 했으나 현재는 소원해진 친구가 하나 있다. 한때 우리는 인생과 관련된 거라면 무엇이든 서로 생각을 나누었었다. 나보다 정치에 대한 몰입도가 강하긴 했지만 다행스럽게도 정치적 견해마저 비슷했던 우리. 그리곤 불행히도 여리고 흔들림이 심했던 시절에 맞이한 여러 굵직한 사건들 이래 입장이 갈라져 묘한 균열이 일어버린 것을 계기로 끝내 지금 거리까지의 멀어짐에 도달해버렸다. 언젠가 우연히 내 글을 볼지는 모르겠으나 친구를 떠올리며 내 마음을 여기에 남긴다. 나는 지금도 자주 너에 대해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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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의 집합체라는 것. 요즘의 내가 세상을 마주하고서 내린 총평이자 수시로 맞닥뜨리는 어떤 사안을 놓고 성급한 평가를 내리고서는 그것을 한동안 곱씹을 때면 불쑥 머릿속을 휘감곤 하는 명제이다. 확신은 오해를 낳기 마련이고, 오해는 또다른 확신을 낳곤 한다. 이 사실을 미련하게도 참 오래토록 모르고 살았다.

자전과 공전, 위도와 경도의 차이, 그외 어렴풋이 알거나 여전히 알 수 없는 이유들은 어김없이 계절을 만들어내고 계절 안의 나는 쉽게 바람에 몸을 떤다.

어느새 돌고돌아 찬 바람이 또다시 인다. 바싹 마른 낙엽들이 바람에 나부끼고 도로 귀퉁이 찬 구석에 옹기종기 들어박혀있는데도, 그들을 못 본체하고서 다가올 추위에 어떻게든 살아낼 궁리를 한다. 염치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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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면의 신념에 따르면 그의 삶은 특별히 즐겁지도 아주 슬프지도 않고,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고, 단조롭지도 변화무쌍하지도 않고, 지속적인 여흥도 아니고, 그렇다고 여흥이 중단된 것도 아니고, 고통스러운 비명도 계속되는 환한 미소도 아니다.

-언제나 빛이 나고 원활하게 돌아가는 사회에서, 그는 소심한 나머지 뻣뻣하게, 온순한 나머지 조야하게, 우아함의 부족으로 서투르게 행동한다.

-하지만 천부적인 작가는 결코 용기를 잃지 않는다. 그는 세상에 대해서, 새로운 아침이 매일 그에게 제공하는 수천 가지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해서, 거의 끝없는 신뢰를 가지고 있다. 그는 갖가지 절망을 알고 있지만, 또한 갖가지 행복감도 알고 있다.

<작가> 중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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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정생 선생님과 로베르트 발저 선생님은 궁상맞은 신세의 나를 위로한다. 최근에야 마침내 알게 된 이 위대한 두 정신의 차이는, 시골로 떠난 자와 도시에 남은 자의 차이일 뿐이라 느껴지기도 한다.

보통과는 달리 자신을 포함한 세계의 민낯을 고백하고 고발하려 했던 두 사람. 그럼에도 눈높이와 시선은 줄곧 아래와 보통에 머물러 있는, 스스로는 외로웠지만 이름 모를 누군가에겐 그 처절한 외로움을 덜어주고자 했던 두 거대한 난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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