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지나간 이후

혹은 고통을 겪고 시간이 많이 흐른 이후

그 고통이 끝나고 그 흔적은 남았더라도 이후 새로운 행복이 찾아오고 참 괜찮았다 싶은 삶을 살았다면 그 고통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을까

그땐 그랬지 하고 편안하게 돌아보게 될까?

한 30년의 시간이 흐른 후라면 말이다.

 

또 한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무의식 아래 넣고 꼭꼭 덮어둔 무언가는 아직도 꺼내어 마주하고 싶지 않을까? 이제 삶을 정리하는 순간이 왔지만 끝까지 마주 하지 않고 그대로 덮고 넘어가게 되는 것도 남는 걸까

 

 

어릴적 내게 위안을 준 책들 중에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물들이 있었다.

소녀소녀하고 달콤한 이야기인 빨강머리 앤이나 키다리 아저시 소공녀  그리고 작은 아씨들과 제인에어도 좋았고 낭만저인 모험인 80일간의 세계일주도 좋았지만 마지막까지 오래오래 읽은 건 셜록홈즈와 그녀의 추리물들 이었다, 셜록홈즈 시리즈는 재미있으면서도 어딘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면 그녀의 작품들은 왠지 슬펐다, 누군가가 죽고 죽이는 살인사건이 주를  이루고 피가 나오고 광기가 나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펐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그 때의 감정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홈즈 시리즈도 그랬겠지만 그녀의 추리물들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살인에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때로는 탐욕이나 질투가 있었지만 그 외에도 복수 절망 모욕감등이 주는 슬픔이 있었다, 그가 나를 모욕하고 내 가족을 모욕하고 절망을 안겨주어서 죽었다는 것 그래서 적어도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나름의 스토리가 있는 죽음이고 사건이라는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생명을 아무렇게나 여긴다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

그의 추리물을 읽으면 그때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인과 응보 권선징악이 드러나면서 어린 내가 느끼기엔 묘한 슬픔  왠지 그냥 푹 빠지고 나른해지는 슬픔을 느꼈던 거 같다, 포와로나 미스 마플역시 홈즈처럼 냉정하고 초이성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적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에거사 크리스티의 자서전을 읽으면 그는 꽤  운도 좋고 평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흔한 말로 초복도 좋았고 한번의 이혼의 경험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때의 방황과 실종사건도 있었지만 그래도 곧 (나로서는) 새로운 사랑을 찾았고 써내는 책들도 다 반응이 좋아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없었고 자녀도 속 썩이지 않고 성장했고 하고 싶은 일(유물 발굴) 가고 싶은 곳 (오리엔트 특급 여행 등등)을 모두 하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

딱 그 느낌이었다.

좋았겠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고 위로받았던 경험이 없었덛라면 나와 상관없이 스쳐지나간 팔자졶았던 노인네였을것이 분명하다,

물론 자서전의 스쳐가는 한줄 한줄에 무언가 암시하는 듯한 문장도 보였지만 그 오랜 삶속에 그런거 하나 없는게 더 이상하지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필명  메리 웨스트웨콧이란 이름으로 쓴 책들을 읽으며 또 다른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이 책들은 노년 전에 쓰여졌던 책이라면

<두번째 봄>에는 그녀의 그때의 고통이 절절히 드러난다, 소설을 읽으며 그 내용속에서 저자를 찾는 건 조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긴 하지만 왠지 이건 저자 자기 이야기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올 때가 있다 이 시리즈의 책들이 그랬다, 특히 <두번째 봄>은 더욱...

자서전에 없던 혹은 그냥 몇장으로 지나갔던 그녀의 이혼과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나름 상세하게 나온다, 어린 시절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쫒겼던 손없는 남자 혹은 총을 든 남자 이야기부터 어쩌면 자서전보다 좀 더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속된 호기심을 가졌다,)

누군가가 들려주는 셀리아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하고 전개된다,

주인공 셀리아는 영락없는 아가사 자신이다,

아닌 척 하면서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 어쩌면 좀 더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내 얘긴 아니구 내 친구의 사촌 이야기인데 말이야... 하면서 시작되는 은밀흔 고백같은 것

 

이혼이라는 걸 생각하는 여자는 아가사가 살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 한국이든 거기 영국이든 이혼을 생각하는 여자는 늘 자기보다 주위의 시선을 생각하고 아이를 생각하고 나기의 감정과 분노와 모멸감은 늘 뒷전이 된다

셀리아도 딸 주디가 상처받고 알게 되는데 가장 전전긍긍했고 자서전의 아가사도 딸 로잘린느의 충격이 우선이었다,

샐리아도 아가사도 둘 다 남편을 몹시 사랑했다고 이혼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기적으로 슬픔이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아주 떨어지는 남편에 대해 그럴 수 있다고 보고 내가 잘못 판단했기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혼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자서전에는 흘러지나갔고 소설은 좀 더 세밀할 뿐이다,

셀리아는 나이가 들어 자신과 엄마사이의 애착이 너무나 강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심하게 고착된 애착관계에서 성장이 멈춘 부분도 있다고 느꼇던 거 같다, 사랑도 결혼도 소꼽장난같고 친구들 사이의 놀이처럼 느껴졌다는 것  어쩌면 무엇하나 어려움 없이 지내다가 맞닥뜨린 엄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를 가진 셀리아에게 태풍은 연달아 들이닥친 셈이다,

누구보다 강하게 연결된 엄마의 부재에 이젠 엄마를 대신해 기대고 싶은 남편의 배신은 그녀를 죽게 싶게 만들었고 현실에서 도망가게 만든다, 그때야 셀리아는 안다. 나는 아직도 어린 소녀였구나 그 소녀가 꿈에서 무서워 했던 총을 든 남자는 언제나 그녀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 총을 가진 남자가 두려운 까닭은 그가 낯선 타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언제나 우리곁에 있고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이 순간 총을 든 남자 혹은 손목만을 가진 남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러나 어떤 고통 뒤에 셀리아는 자신을 돌아보고 그 통을 든 남자를 마주하면서 어린 소녀와 마주하고 그리고 자신을 얻는다,

자서전에서 조차 언급하지 않은 아가사 그녀의 이야기를 여기서 봤다고 느껴지는 건 과장은 아닐 것이다,.

(지난 밤 남편이 별 일 아닌것으로 버럭 화를 내고 아주 유치하게 침묵속으로 들어갔다. 예전같으면 혼자 자책하거나 미워서 길길이 뛰거나 할텐데 이젠 평온하다. 화는 그의 옧이고 내 탓은 아니다. 나는 내가 오해하게 만든 부분을 사과하면 그만인 것이라고 생각할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순가 나도 역시 아직 자라지 않은 소녀가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남편의 욱하는 성질과 유치한 초딩같은 태도에 질려하면서 어쩌지 못하고 당황하게 군건 나 역시 자라지 않은 어린 소녀였다는 걸 알았다. 부모 그늘아래서 살다가 나는 남편이 그 대신의 역활을 해주길 바랬던 것이다, 그런데 나와 남편은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소녀와 소년이 아니 조금더 말하지만 사춘기에 막 들어선  소녀와 아직은 초등학교때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이 만난것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상대에게서 부모를 바란다, 그러나 서로의 부모가 되어 줄 수는 없다, 나의 기대를 상대에게 얻지 못한 우리는 늘 부딪치고 화를 냈다. 나는 그가 화를 내는 상황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는 내가 무심해지고 냉정해지는 지점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셀리아는 타인이 아니라 나였다, 사랑도 결혼도 호기심어린 놀이였고 경험이었고 그리고 여전히 어린 아이였던 내가 셀리아를 통해 보였다,   어쩌면 어떤 결정 이전에 내가 먼저 어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두번째책 (내가 읽은) "딸은 딸이다"

 

 

앤과 세라는 모녀지간이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앤은 활발하고 명랑한 딸 세라가 있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모녀는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세라가 스키여행을 떠난 3주 동안 앤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낯설고 서투르고 무뚝뚝하고 고집이 세지만 여리고 착한 남자 콜드필드  앤의 여리고 섬세한 성격은 콜드필드의 여린 부분을 알아보고 그도 앤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문제는 세라였다, 세라는 도무지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사건건 나와 반대 의견을 가지고 부딪치고 잔소리하는 남자다.

내성적이고 고집이 센 콜드필드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줄 몰라 늘 설교로 이어지고 지적질로 이어진다.  젊은 세라에게 호감을 줄 수 없는게 당연하다. 세라 역시 젊은이답게 반항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앤은 둘 사이의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두통뒤로 숨어버린다,

결국 콜드필드는 떠나고 모녀는 남는다, 그리고

앤이 변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사색적인 앤은 없고 화려하고 바쁘고 술과 파티의 나날을 보내는 앤이 나타난다, 세라역시 바쁘다, 세라는 개리라는 늘 실패만 하는 불운한 청년을 아프리카로 보낸 후 위험하고 나쁜 남자에게 끌리고 결혼한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난 후 앤은 모든 것이 신경질 적이다, 두통은 심해지고 파티는 시들하고 혼자는 불안하다., 그때 멀리 떠난  불운의 청년 개리가 돌아온다, 그리고 앤을 탓한다. 세라가 타락한 것은 엄마인 앤의 탓이라고 ... 세라는 나쁜 남자와 결혼 한 후 중독과 향략에 빠져있다,

개리는 세라를 설득하고 함께 캐나다로 가자고 한다, 자기는 비운의 아이콘이긴 하지만 세라가 옆에서 충고하고 북돋우어 준다면 할 수 있다고 세라 역시 누군가를 겪려하고 독하게 다그치며 함께 가 줄는 것이 그녀의 가치라고 한다. 세라는 흔들린다,

그리고 모녀의 설전이 나온다,

모든 통속적인 모녀처럼

앤은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도 너를 위해 포기했다,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너만을 위해 살았다고 소리친다,

세라 역시 그렇다. 엄마가 나에게 해준게 뭐가 있느냐?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교묘하게 빠진다. 엄마는 내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걸 그냥 내버려두었다 엄마라면 응당 해야할 엄마로서의 역활을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불행한건 모두 엄마탓이다. 엄마에게 애정을 받지 못했고 엄마에게 질투를 받았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거라고 한다,

앤은 말한다, 니가 그때 내 결혼을 막지만 않았어도 나는 지금 이렇게 되지 않았다,

세라가 말한다, 그래서 나에게 복수를 한거냐 내가 불행하길 바란거냐

둘은 돌이킬 수 없는 말을 쏟아내고 돌아선다, 그리고 서로 가슴을 쥐어뜯을 것이다,

입이 웬수다,,

정숙하고 조용한 앤은 어느 순간 찾아온 사랑을 포기한다, 전혀 그녀의 의사가 아니다, 딸을 위한 일이라 누구에게 하소연 할 곳이 없다, 딸은 내 유일한 혈육이고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존재다, 사랑은 어쩔 수 없다, 헤어지면 타인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후회가 많은 슬픔이 가슴 깊이 자리한다, 스스로 망각하고 잊었지만 어느 순간 우연히 만난, 이제는 짝을 만난 콜드필드를 보면서 그때의 아픔이 올라온다, 나는 그렇게 가슴아프게 너를 위해 희생을 했는데 세라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내 사랑은 내 추억은 어디서도 가치를 찾을 수 없다. 화가 난 앤 어쩔 줄 몰라하는 앤.. 그러나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사려깊다는 이름표를 가진 앤은 미치지도 못하고 화를 내지 못한다, 그냥 자기도 모르게 은밀하게 딸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실패하길 바란다, 그 은밀한 마음은 세라도 모르지만 앤도 역시 모른다,

세라는 철없고 무서울 것이 없는 아가씨다. 좋은 감정을 가진 청년은 늘 실패만 하고 그녀는 그 앞에서 늘 우쭐하게 조언한다, 누구나 호감을 갖는 외모와 조건을 가졌다, 엄마의 연애를 권장하지만 어디까지나  모든 것에는 내가 우선이다. 내가 없을 때 심심풀이로 엄마가 연애를 하면 그만이고 내 생활을 침범하지 않은 범위내에서 해야한다, 물론 말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여긴다는 걸 세라자신도 모르지만 은연중 그렇게 이기적이었다. 엄마의 사랑? 어디서 놀던 뼈다귀인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괜찮아 내 일 아니니까 엄마의 사랑이니까 하면서도 어느틈에 손톱을 세우고 공격한다, 정말 싫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싫어하니까 나는 정당하다,

그리고 잊었다, 남의 아픔이 절대 나를 뚫고 들어오진 않는다, 공감은 나를 뚫고 들어와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인데 세라는 아직 그럴 능력이 없었다, 엄마는 행복할 것이고 나는 어떤 불운한 사내로부터 엄마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미친 사랑이 찾아오지만 어디선가 경고음이 들린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가까이 하지마라

가장 믿고 의지하는 엄마에게 물어본다, 어쩌죠 엄마?

엄마는 말한다, 니 삶이니 니가 결정하는거야 너의 자유의지에 달린 거야 엄마는 너의 결정을 지지한다, 어딘가 아쉽고 서운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더 재수없기도 하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한다, 잘못되면 엄마탓이니까 아직도 자라지 않은 세라는 그렇게 믿는다,

 

(누구탓을 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내가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땐 그게 가장 좋은 해결치고 도피처다, 내가 어릴적 받은 상처들 아픔들 억울하고 소외받은 기억을 엄마는 모른다, 엄마는 말한다, 나는 그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너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들은 때때로 한없이 약해지기도 한다,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너의 결정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왜 내가 말리는 걸 듣지 않았니?  내가 말리지 않은게 아니지 않니? 그러게 엄마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지 않든? 이미 나이를 먹어서 엄마탓을 할 수 없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 있다. 인생에 떨 지랄이 정해져 있다고 그렇다면 엄마가 젊고 좀 더 나보다 쎄다고 느낄 때 떨어야 한다, 그래서 엄마도 강하게 받아치고 나도 죄책감이 덜하다, 나이먹어 내가 떠는 지랄은 주책이고 그걸 감당하기엔 우리엄마는 너무 늙어버렸다, 그래서 아직 남은 나의 지랄들을 나는 그저 꽁꽁 묶어두고 있다, 이러다 바스라지면 좋겠다, 죽기전에 튀어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풀에 지쳐 떨어지기를.. 바란다, 어느 순간 엄마는 늙어버렸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퍼붓고 싶은 잔소리가 많지만 얼굴을 마주하거나 전화기를 통해서 할 수 없다, 이미 퍼부을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그냥 꾹꾹 담았다, 내가 참으면 그만이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한 평생 그것이 옳다고 믿은 엄마를 내가 지금 어떻게 바꾸겠는가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그런데 내가 아프다, 울컥해서 퍼붓고 나도 아프고 꾹꾹 눌러 참아도 아프다,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 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

 

책속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 이디스의 말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큰 상처를 준다, 그게 상처인걸 안 순간 동시에 그게 사랑인것도 안다, 그가 준 사랑이 내게는 독이다, 내가 준 사랑도 그에겐 독이다, 그와 나는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 서로 독을 독인 줄 모르고 주고 받는다, 그게 아닌데,,,, 이 말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끼리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엄마 엄마, 그 이름이 내게도 몹시 아프다, 몹시 싫을 때가 있었고 귀찮을 때가 있었고 위로가 될 때도 있고 그리울 때가 있지만 이제는 가장 아픈 이름이다, 어쩌면 그에게 나도 가장 아픈 이름이 되어버렸을지 모르겠다, 물어볼까, 절대 물어보면 안된다,

그냥 둘이 함께 할 시간을 좀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 )

 

 

 

 

가장 먼저 읽은  그녀의 소설이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이기도 하고...

읽으며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로 딱 인 소재라는 생각을 햇다,

타인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삶을 결정해주고 지지해주고 막아주고 쓸어주는 여자 조앤 그녀가 모르는 단 한가지는 모든 주위 사람이 그녀를 힘겨워한다는 사실이다.

" 난 알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  진실? 그게 진실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

 

기억은 내가 결정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한것만 기억하고 지우고 싶은 것은 그냥 지워버린다,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기억하는 그 형태가 그 언어가 바로 진실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내 선택이, 결정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녀의 삶은 정말 열성적이었고 희생적이었으나.... 그 이면에 있는 그녀의 독선과 기만은 보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 편의에 의한 것이라는 걸 그녀는 사막 한 가운데서 절절하게 깨닫지만 다시 기차가 움직이고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다시 익숙한 기억으로 익숙한 행동으로 돌아갈 뿐이다,

 봄에 그녀도 없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타인을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

아니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읽고난 후 몹시 혼란스러운 생각이 든다,

여태 메리 웨스트메콧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 정통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스펙트럼이 넓다,

이건 누구의 이야기인가

휴 노리스의 이야기일까 존 게이브리얼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사벨라의 이야기일까

서로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사랑하고 오래 속마음을 터놓았어도 서로를 몰랐다

그리고 자기도 몰랐다 싶다,

타인을 안다고 말하는 것. 난 촉이 좋아서 모든 게 보인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하고 오만한 말인지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세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내 기억으로도 세익스피어가 만든 인물 중 가장 입체적인 인물인 이아고가 다시 그리워졌다,

장미의 시간과 주목의 시간은 같다,,,

알쏭달쏭하면서도 알것같은 말....

타인의 삶을 바라볼 때 늘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타인은 나와 다른 사람일뿐 그는 틀린 사람이 아니다,

나도 그에게 다만 다른 사람일 뿐이다.

 

 

 

눈앞에 있는 건 뒤에 있는 것만큼 무섭지 않아,

뒤돌아 마주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거야, 

책장을 덮고 역자후기를 읽어본다.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저자와 주인공의 의도가 여러가지로 읽힐 수 있다는 구절이 보인다. 네 사람의 몇년에 걸친 우정 사랑 혹은 절망등이 읽히기도 하고 읽는 입장에서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이야기이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많은 주인공이 제각각 얽히며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듯 얽혀들면서 이어진다,

버넌이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넬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고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레빈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도 한다, 불쑥 튀어나온 제인이 모든 사람을 끌고 가기도 하고  큰 비중을 보인 조는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한다.

정해진 인물을 따라 가며 씌여지니 다른 작품과 달리 여러사람을 따라가다보니 사실 집중은 떨어지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결국 이 작가의 인간에 대한 통잘에 다시 존경심이 느껴진다,

회피형 인간..

버넌은 한번도 눈 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두려움이기도 하고 거절 불안이기도하다,

불안정한 엄마 어정쩡하게 무심하고 역할에 갈팡질팡하는 아빠 사이에서 버넌은 자기보호막을 치며 안으로  집중하며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한다. 그의 그런 행동이 늘 드러나진 않는다,

아빠의 피를 닮아 현실적인 외가와는 다른  그는 모든 것을 주춤하고 피한다

그리고 나중에 기억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의 회피는 최고조에 달한다,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내 마음을 고요하게 들여다 보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자신마저 버린다.

버넌뿐 아니라 어린 시절을 함께한 네명은 가족관계와 성장배경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그 가족력 그대로 성장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 제인이 네명을 한순간 흔들어보지만 자기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만 남을 뿐 모두 흔들리고 도망치고 운명처럼 거부하지 않는다.

 

 

 

 

 

 

 

 

 

 

 

 

 

 

 

 

 

사람은 의외로 배워야 아는 것들이 많은 모양이다

저절로 알았다고 꺠쳤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의외로 배움이 필요하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알아가는 것은 내가 느끼는 내 감정들 그리고 내가 무심코 하는 내 반응들도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냥 막연히 알거야.. 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정교하고 오랜 반복의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 역시 감정의 하나 이지만 배워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정을 배운다는 것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그 감정을 많이 느끼고 사랑을 받아야  배울 수 있다,

오롯히 담겨본 사람만이 누군가를 담을 수 있고 공감받은 사람이 타인을 공감하고 사랑받았던 아이들이 아무런 계산없이 사람을 사랑한다,

로라는 어쩌면 글로 사랑을 배운 사람같다,

물론 책을 통해 배운 건 아니지만 이제 부터 나는 셜리를 사랑할거야 라는 다짐으로 사랑이 시작된다,

어린 노라가 가진 셜리에 대한 미움은 당연하다,

둘째로 늘 비교대상이 되었고 더구나 자기보다 월등하게 사랑스럽고 사랃받던 오빠와 비교되며 자기 자존감을 죽이던 노라에게 오빠의 죽음은 슬픔과 함께 자기가 사랑받을 차례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설레임이 함께 한다,. 그 나이의 로라라면 당연하다고 말한다면 너무 심한 걸까?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은가?

아이답게 천진하고 순수한(?) 영악함이 푸른 가운을 입은 성모에게 기도하게 하고 그 날밤 그 기도가 이루어질때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대로 불이 나고 방에 갖힌 아이와 유모가 못나오고 사망한다면 .....

잠깐의 감사와 함께 긴 죄책감이 남았을 것이다

그 순간 노라에게 간건 책임감이 아니라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이건 아니다, 이건 내 탓일지도 몰라 하는 죄책감이  무의식의 용기를 내게하고 아기 셜리를 구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 노라는 영원히 아기 셜리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고 그런 삶을 산다,

 

이웃집 존은 노라의 얼굴에서 아이다운 천진함이나 대책없는 명랑함 을 찾지 못했다,

아이가 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 만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존이 계속 노라의 친구가 되고 그의 멘토가 되는 건 그래서일것이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보는 불안감

지나치게 셜리를 사랑하는 노라를 보며 존은 늘 말한다,

셜리는 셜리의 인생이 있다. 그 아이가 볼행하건 행복하건 그건 그 아이의 몫이고 그 아이의 책임이야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누군가의 탓도 아니야

그러나 노라는 셜리의 모든 상황을 자기의 탓으로 하면서도 늘 셜리에게 끌려간다,

그의 결정에 뭐라고 할 수 없이 끌려가고 그러면서 전전긍긍하고

나의 사랑이 상대에게는 독일 수도 있다는 것

그걸 노라는 몰랐다,

내가 주는 사랑은 나의 사랑일 뿐 상대가 원하는 사랑이 아닐 수 있다,

나는 주었지만 상대는 받지 못했다,

그 사랑은.. 서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고 셜리는 죽었다,

노라는  아프지만 그 현실을 봐야 한다, 그래서 나중에 맥락없어 보이는 등장인물  루엘린을 통해 노라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드디어 노라는 사랑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랑은  불행하게도 늘 일방적이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게 느껴지기도 하고 받아도 받아도 부족하기만하다,

주는 쪽은 열을 주어도 받는 쪽에서는 둘밖에 못받기도 한다,

사랑에는 수학공식이 맞아떨어지지도 않는다,

정확함이란게 없다,

넘치는 사랑이 왜곡되고 일방적일 때 그만한 폭력이 없다,

그러나 주는 쪽은 내가 폭력을 행사하는 걸 알지 못한다,

받는 입장에서도 상대에게 뭐라고 하기가 애매하다, 사랑을 준다는 건 알겠지만 그게 나에게 부담이고 원치않는 거라는 걸 말하기 힘들때가 많다, 가까운 사이  가족사이가 더욱 그렇다,

사랑도 결국은 배워야한다는 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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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일기에 가까운 개인적인 글이다..

 

책읽기 모임을 하고 있다,

하나는 엄마들끼리 하는 책읽고 토론하는 모임으로 모임은 오래되었고 내가 시작한지 4년째다,

처음에 들어갔을 땐 뭘 모르는 상태였으니 같이 읽자고 하는 책을 읽고 쭈삣거리며 참가했다,

내가 워낙에 자발적 은둔형 외톨이라 조금은 그 벽을 깨어보고자 모르는 사람들의 틈에 끼어들었던 이유도 있었다,

나도 나름 책 꽤나 읽는다고 생각하고 있어서 별 문제 없을거라 믿었고 한편으로는 나 정도면 꽤 수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자만도 있었다,

책을 오래 혼자 읽은 사람답게 나는 확실한 내 취향이 있었고 편협된 틀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타인과 함께 하는 책읽기는 나만 내세울 수는 없다,

내 성격이 목소리를 크게 내며 내 주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아주 소극적으로로 읽지 않았던 책이거나 내가 별로 내켜하지 않은 책이면 살짝살짝 빠져가면서 책을 읽었고 이야기를 들었고 가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런 모임을 통해서 내가 혼자라면 결코 읽지 않았을 책들을 읽게 되는 장점이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내 틀을 넓히는 것 또다른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여기며 꾸역꾸역 읽었다,

엄마들 모임이라 아주 수준높은  전문적인 책을 다루는 것도 아니고 이야기가 늘 진지하지는 않다. 하다가 아이 이야기 시집 이야기로 나가기도 하고 책이 너무 어렵다고 하소연하다가 끝나기도 해도 그래도 나름 의미 있는 모임이었다,

같은 책을 읽어도 보는 관점이 다르고 생각이 각각 다르고 말하고 싶어하는 부분이 다르다는 것을 배우면서 그래서 조금 산만하고 분위기가 뚝뚝 끊어진다는 느낌이 있어도 그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했다,

모임 자체가 학교소속이라 매년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온다,

처음엔 서로 탐색한다,

어떤 모임일까.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을까? 과연 내가 잘 끼어들 수 있을까

기존  회원도 탐색한다. 어떤 사람이지? 우리랑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좀 힘든 사람은 아닐까?

그러다 중간에 사정으로 나가기도 하고 다시 들어오기도 하면서 모임은 이어졌다,

모임이라는 것이 유기체적인 성격이 있어서 그 구성원들이 이렇게 이끌어가고자 하는 노력을 하더라도 제 멋대로 굴러가기도 하고 저 혼자 활성화 되었다가 어느 순간 사그라들기도 하면서 이어진다,

그리고 올해 새롭게 사람들이 들어왔다,

나는 올해가 마지막이라 (학교에서 하는 모임이라 아이가 졸업하면 자연스럽게 그만두게 된다)

나도 끝까지 열심히 하자고 생각하고 있었고 마친 올해 구성원들은 무지하게 열성적이고 이지적이고 학구적이었다.

나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발언을 많이 했고 집에 돌아와서는 괜히 얼굴이 붉어지면서 쓸데없이 많이 말한게 아닌가 생각하기도 했고 내 수준에 버겁다는 생각도 했다,

그래도 함께 읽고 생각을 듣고 아 저 사람의 발언은 싫다고 느끼면서도 그러려니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제  기존 모임회원이  많이 부담스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분위기가 예전같지 않다,

누군가가 자꾸 발언을 독점한다,

이야기를 어렵게 하고 길게 하고 자기 주장이 강하다,

나도 편협한 인간이라 누군가의 발언이 거슬리고 싫기도 하고 그래서 그 말을 듣지 않고 잠시 딴 생각을 하기도 하고 때로는 악의적으로 반박을 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그래서 모임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은 안했다,

은둔형 외톨이답게 하나 있는 모임이라 애책도 갔고 오래 하지도 못하고 일년이라는 제한이 있으니 마무리는 잘하자는 마음도 있었는데

기존 사람들이 잘 안나오고 하는 것이 그런 갈등이 있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복잡하다,

저 사람이 걸려서 나가고 싶다. 새롭게 모임을 만들고 싶다,

뭐 그런 말들이 오갈 줄은...

나도 내년엔 모임을 나가야 하니까 새롭게 모임이 생기면 할 의향은 있지만 여기가 싫어서 나가는 건 아니었는데,,,,

마음이 복잡했다,

 

왜 책을 읽을까?

나는 여러번 썼지만 은둔형이고 사회성이 떨어지는 사람이라 책읽기가 가장 편했던 게 첫번째 이유다,. 책이 가장 편한 상대고 가장 좋은 위로였고 도피였다,

그리고 책은 세상으로 나가는 문이었다,

너무 상투적인 말이지만 그랬다,

책을 통해 세상의 구체적인 속살을 알게 된다,

뉴스나 신문에서 혹은 사람들의 말에서 무명인으로 그저 피해자나 가해자  농성자  소외받는 사람들이라는 일반명사들이 책으로는 고유명사가 되어 살아 움직이며 삶을 보여준다,.

그 삶은 어떤 이론서보다 강하고 깊게 박힌다,

이해가 아니라 공감을 하게 되고 마음이 아프고 내가 무얼 해야하나 생각하기도 한다,

그리고 최근에 알게 된 것이 내가 가진 틀을 꺨수는 없지만 넓히는 과정이라고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다,

책은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책만 읽는다고 세상이 바뀌지도 않고 작게는 내가 바뀌는 것도 아니더라

물론 생각이 달라지고 커지고  알게 된 것도 많지만 결국은 행동이고 움직임이었다

책을 통해 아는 걸 알고만 있으면 아무 소용없다는 생각을 많이 한다,

그래서 책만 보는 바보라는 말이 있고  책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책을 읽고 움직이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지 책이 세상을 바꾸지 못한다,

책은 책일 뿐이니까,,,

 

책읽는 모임에서 농담처럼 이야기하곤 했다,

여기는 참 편한 모임이라고 무슨 이야기든 할 수 있고 책 이야기도 할 수 있다고

다른 아줌마 모임에서는 책 이야기를 하면 이상한 취급을 받고  잘난 척한다는 말도 듣지만 우리는 안그렇지 않냐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고 우리 모임을 좋아했다,

굳이 남의 이야기하지 않고 내 이야기를 시시콜콜하지 않아도 책 이야기하고 영화보는 이야기하고 꽤나 문화적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어제 곰곰히 생각하게 되었다,

책을 읽고 셍각을 넓혀가면서도 우리는 우리와 다른 타인을 불편해하고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게 아닐까  그냥 우리끼리 책을 읽고 이야기를 하고 싶지 우리속에 누군가 타인이 들어오는 것 그리고 그 타인이 걸리게 되면 불편하고 힘들다는 것

새로운 사람은 우리와 다를 수 있다, 아니 달라야 하지 않을까

우리도 처음엔 달랐고 함께 하다보니 닮은 점이 생겼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를 것이다,

다르다는 것은 불편하다,

그래도 자꾸 부딪치지 않으면  영영 알지 못한다,

걸리곡 불편하고 미워질 수 있다.

그가 내게 타인이듯이 나도 역시 그에게 타인이다, 그도 내가 불편하고 밉고 나대는 사람으로 볼 수 있다,

나도 미운 사람이 많다, 다시 안보고 싶지만 그 사람때문에 내가 좋아하는 모임을 포기하기 싫고  내가 움츠려 들고 싶지 않아서 그냥 자꾸 만난다, 소극적으로 만나고 무시하면서 만나고 어 하는 면을 마주하기도 하면서 그렇게 타인과 타인이 우리게 된다,

 

적어도 책을 읽는다는 사람들이 문화적이라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타인을 거부하는 건 아니다,

우리에게 들어와서 아직 둥글어지지 않았고 또 굳이 둥글어질 이유도 없는데 자꾸 걸리고 불편하다고 밀어내는 건 아니지 않을까

타인의 어색함이 내 틀을 깨는 도구일 수 있고 내 세상이 넓어지는 창일 수도 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은데 그들에게 나도 역시 타인일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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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밖의 아이들 - 제5회 문학동네 청소년 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28
이선주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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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료급식에 대한 이야기가 떠들썩했을 때

무료급식이 아니라 선별급식이어야 한다고 목청을 높이던 이웃에게 무어라라고 할게 아니라 이 책을 권해야 했다,

적어도 밥 먹는 일은 누구와 누구가 달라서는 안되는 거 아니냐고

가난하니까 돈을 내지 않고 부자니까 돈을 내고 하는 게 아니라

그냥 아이들이니까 함께 먹어야 하는게 아니냐고 버버벅대며 말하는게 아니라 책을 내밀어야 했다,

그때 이 책을 알았더라면...

밥이라는 게 누가 돈을 내고 못내는 문제는 아니라고 말해줄 걸 그랬다,

김치에 김에 계란 후라이 하나씩 그리고 늘 먹던 된장찌게에 하루는 물을 더 붓고 하루는 된장을 좀더 넣으면서 하루는 멀겋다가 하루는 짰다가 하는 걸 떠먹더라도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고 작은 밥상에 엉덩이를 밀어넣을 수만 있다면 '함께 먹는"다는 것이 중요하지 "돈을 누가 내느냐"가 무슨 의미가 있겠냐고 한다면..

그건 더 설득력이 없을까?

다른 무엇보다 란이네 가족의 밥상이야기가 좋았다,

민성이가 오고 클레어가 오고 옆집 아줌마가 수시로 드나들어도 그냥 의자하나 더 두고 수저 하나 더 올리면 그만이다, 누군가가 몹시 아프고 추울 때 주전자를 올리고 설탕 한스푼 가득 넣어서 마시는 것 고작 그것뿐인데 누구나 그 집에서는 입맛이 돌고 몸살이 풀린다,

밥이라는 게 그런 것이다,

그냥 함께 어깨를 맞대고 함께 밥을 먹고 등을 대고 누워 잠드는 것

란이에게 가장 부끄러운 부분들이 누군가에게는 힘이 되기도 한다는 것 그게 좋았다,

 

 

엄마가 되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소녀

가족의 생계를 짊어진 꼬부라진 할머니

아무일도 하지 않고 상처받고 텔레비젼만 보는 남자

엄마를 보내고 악착같이 돈을 모으며 기다려야하는 조선족 소년

누구나 부러워하는 부유한 부모는 가졌지만 사랑대신 폭력과 방치를 받은 소녀

아프고 힘든 청춘들 이웃들 이야기에서 가장 와 닿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는 밥상 이야기다,

돈이 많건 적건 세끼 이상 먹는 거 아니고

화려한 요리를 먹건 멀건 죽이나 물말을 밥을 후루룩 넘기건 그건 결국 똥으로 나온다는 것도 같다.

가아끔 맛있는 밥상을 혼자 먹는게 맛없고 우울한 밥상을 함께 먹는 것보다 나을 때도 있지만

그래도 음식은 혼자보다 함께가 더 맛있다.

어떤 고통이든  란이 할머니는 주섬주섬 상을 차리고 된장찌게를 끓이고 계란 후라이를 부치거나 물을 끓이고 설탕물을 타준다.

마음이 허한 사람에게 함께 먹는 밥은 무엇보다 좋은 치료제이다,

배우지 못하고 돈이 없는 할머니도  몸으로 그걸 알고 있다,

일단 밥을 먹고 배를 채우고 몸을 따뜻하게 채워주는 행위자체가 위안이 된다는 것

 

어쩌면 위로는 아주 사소한 몸짓에서 시작된다,

어떤 이론을 알고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것 보다 아무것도 모른다고 믿으면서

등을 쓸어주고 함께 밥을 먹고 손을 잡아주고 안아주는 것

생각보다 먼저 몸이 나가고  마음이  먼저 닿아 있는 것 그게 위로일 때가 있다,

가족이 아니라 식구라는 말

함께 밥을 먹는 밥상공동체라는 것이 나는 참 좋다.

어깨를 부딪치고 하나 남은 달걀 말이에 내적 고뇌가 담겨 젓가락이 허공을 헤매고 있을 그런 사람들의 멈칫거림과 과감한 몸짓이  섞인 한상의 밥상

그것이 화려한 언변이나 구조적인 제도들보다 더 필요한 것이다,

내 밥상에 기꺼이 수저를 하나 더 놓고 공깃밥을 하나 더 올려놓는 배려와

남이 가져간 마지막 계란에 그 마음을 먼저 헤아려 주는 공감과

초라하다고 멈칫거리지 않고 당당하게 내놓고 받을 줄 아는 용기가 더 좋다,

 

삶은 동사의 연속이다,

먹고 자고 이야기하고 일하고 공부하고 걷고  뛰고 부딪친다,

종일 앉아 엉덩이로 이겨내며 머리로 집을 짓는 일보다 몸으로 부딪치고

음식으로 위로하는 일

그런 동사의 삶이 지금 내게도 필요하다,

내가 하는 행동은 위로가 될 수도 있지만

내가 하는 생각은 그저 생각일 뿐이므로...

 

그래서 나는 먼저 움직이고 모듬어주는 란이네 가족과 이웃이 정말 사랑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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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니라 표절과 변명

이참에 이름을 바꾸는게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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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치유 수업을 듣는다. 누군가를 상담할때 책을 매개로 하는 독서 심리 상담이다.

내담자가 상담자와의 대화가 불편할  수 있다. 그때 책을 매개로 해서 상담을 진행하는 것이다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고 등장인물에 대해 감정이입을 하며 자기와 동일시하고 등장인물의 갈등해결방법을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스스로를 돌아보는 방법이다,

이때 상담자는 내담자에게 제대로 된 발문을 하며 스스로를 생각하고 알게 하는 것이다,

마음이 많이 아파서 병리적인 치료가 목적이 아닌 보통의 일반사람들에게 상담이라는 것은 결국 자기를 알아가는 과정이다,

내가 왜 그런 순간을 못견디는지, 왜 듣기 싫고 하기 힘든 말이 있는지 왜 혼자가 편하거나 혼자가 불안한지를 알기위해 결국 나에게로 집중되어야 한다. 그냥 내 속으로 여행을 하는건 세계여행을 걸어 가겠다는 무모함이 보여지기도 하다, 그때 책이 필요하다.

동화책도 그림책도 상관없다. 조금 쉽게 씌여진 심리학 책들도 요즘 많다.

책은 나에게로 떠나는 여행에서 교통수단이 되어준다. 조금 쉽고 빠르게 도달하는 힘이 된다,

책과 함께 하는 심리치유는 함께 하는 것이 더 좋을 수 있다

책을 읽고 함께 이야기를 나눈 경험이 있는 사람은 안다,

나는 책에서 이것을 보았는데 타인은 저것을 보고  그것을 본다.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보고 내가 보기 힘들 었던 부분에 감동하기도 하고 내가 밑줄 친 부분을 불편해하기도 한다,

아.. 사람은 다양하구나. 다양한 얼굴만큼 다양한 생각을 하는구나.. 그걸 알게 되는 것도 큰 소득이다.

그리고 내 말에 공감하고 나만 힘들고 아픈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기도 한다. 내가 비정상인게 아닐까 싶은 강박과 불안을 누군가 타인도 가지고 있음을 알면 내 불안과 걱정이 별거 아니게 되기도 하는 것이다.

함께 공감하고 다른 것을  경험하게 되는 가장 쉬운 방법이 텍스트의 이용이다,

영화나 드라나 공연 그림 무엇이든 가능하지만 그중에 책이 가장 좋다,

글을 알고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사람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상담을 하며 동시에 책도 읽어 교양을 늘여갈 수 있는 기회도 된다,

책은 그렇게 내담자에게 많은 길을 쉽게 보여준다,

그러나,,

책은 주인공이 아니다,

책은 그저 매개일 뿐이다,

독서치유를 공부한 건 책 때문이었다,

책 읽는 걸 좋아했고 책 속에 숨는 게 편했다. 그래서 책으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이 흥미로웠다. 책을 읽으면서 내 마음을 알고 누군가의 마음을 치유한다는 것은 무척 매력있었다.

그러나 첫 날 강사가 말했다.

독서 치유는 독서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아니라 치유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다,

책이 주가 아니라 치유가 목적이다,

심리를 알고 상담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해야하고 그리고 책을 거기에 접목해야한다,

당연한 말이다,

그래도 수업은 재미있었다. 나이 먹어 듣는 강의라 간혹 머리가 돌지 않아 멍해질 때도 있었지만 낯설고 새로운 이론들은 흥미를 끌었고 의외로 이론 수업을 통해서도 내면에서 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실제 상담도 했다. 나는 둔감하고 초이성적인 사람이라 내 속을 잘 드러내지 않았지만 그래도 내면에서 무언가가 불쑥 오르는 경험은 했다.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을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였고 심리학이라는 것이 누군가의 마음을 엿보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알아가는 것이라는 것도 배웠다.

이론을 배우고 독서치유 지도안을 짜며 책을 고민했다.

나는 욕심을 부렸다.

기왕 할거 좀 폼나는 책을 읽으며 치유도 함께 하면 좋겠다라는.....

내가 책을 읽으며 느꼈던 감상들 책을 통해 발견한 나와 닮은 모습들 내가 아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공감하면서  책읽기가 더 좋아졌다.

책도 읽고 내 마음도 알아가고 치유도 된다면 일석이조. 아니 일석삼조가 될까?

그러나,,

책은 역시 매개물이었다. 지도안을 짜고 실제 상담을 받으며 책을 굳이 읽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았다. 책은 그냥 맥거핀이었다,

중요하게 보이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고 그게 중심이 아니다,.

내 마음을 알고 나를 표현할 줄아는 것 그래서 나를 인정하는 것이 주인공이었다,

책을 읽고 오지 않아도 책을 많이 읽지 않아도 솔직해지는 것이 우선이었다.

책은 그냥 책이었다.

책이 없어선 안되는 거였지만 책이 모든 것이 되지는 않았다,

나는 틀렸다.

그리고 다시 시작했다,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면서 우리가 많이 닮았다는 걸 알았다,

어릴 적 아빠 닮았다는 말이 진저리치게 싫었다,

나는 아빠가 이상하게 싫었다,

개천 용이었던 아빠가 본가에 더  노골적으로 신경쓰는 것도 싫었고 무뚝뚝하고 촌스러운 것도 싫었고  어눌하면서도 대꾸할 수 없게 만드는 말솜씨도 싫었다.

아빠는 말이 많을 때는 많지만 없을 때가 더 많았다. 자기가 아는 이야기나 주제가 나오면 늘 분위기를 주도했지만 그 분위기가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다물었다.

자식에게 곰살맞게 말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잔소리가 심하거나 꾸짖음이 많은 것도 아니었다. 늘 말이 없어서 싫어하나? 관심이 없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책임감이 강했던 아빠는 당신 본가에 한 만큼 자식에게도 할만큼 하셨다,

교육은 엄마에게 맡기고 직접 야단을 치거나 간섬하지는 않아도 은연중에 간접적으로 엄마를 들들볶으면서 욕심을 부리신 것으로 안다.

자식들과 직접적인 대화는 어눌했고 적었지만 아버지로서의 책임은 다 했다,

그 아버지의 모습이 뉴스나 프로야구를 티비로 보는 모습 식사하는 모습이외에 늘 책상에 앉은 뒷모습으로 기억된다. 집에서는..

일이 많아 집에서도 해야할 경우가 많아서 그랬는지 일찍 와서도 식사하고 뉴스보고 나면 주로 아빠방이라고 부르는 서재에서 등을 돌리고 일을 했다.

어쩌면 그 시간이 아빠에게는 가장 편안하고 안정감을 느끼는 시간이 아니었을까 나중에 생각이 든다,

일을 하고 책을 읽고 때로는 책상엪에서 라디오를 들으며 졸기도 하면서 그렇게 자기만의 공간에서 자기만의 책상에 앉아 궁싯거리는 일이 가장 편하다는 걸 나도 이젠 너무 잘 안다,

아빠는 책을 많이 읽는 편이었다,

간혹 내가 산 책들도 언제인지 모르게 읽고는 늘 한마디씩 했다,

책을 권하기도 했고 사준 기억도 있지만 책에 대해 긴 이야기를 나눈 적은 없다.

그냥 그 책 별로다. 읽기에 좀 야한거 아니냐? 유치하다 등등 좋은 소리를 들은 기억은 없다.

나는 늘 아빠가 뭘 알아서... 하는 마음으로 귓등으로 흘렸지만 그때 아빠가 무슨 생각으로 사주셨는지 모르지만 한국단편소설들(감자나 봄봄등)을 읽으며 성인물을 시작했고 나중에 고등학교 국어시간에 별 공부없이도 점수를 잘 받았던 거 같다,그땐 아동문학이나 청소년 문학이 발달하지 않아서였는지 나는 주로 학원물을 읽었는데 그건 아빠가 늘 유치하고 웃기지도 않는다고 해서 약이 올랐고 그래서 반대로 얼지로라도 한국 단편들과 이광수니 하는 걸  꾸역꾸역 읽었다,

그때 읽은 풍월로 아직도 버티는 중이다,

그리고 그때 심취했던건 셜록 홈즈와 포와로였는데 나는 후자에 더 빠졌다.

추리물이면서 로맨스이기도하고 사람에 대한 이야기들을 읽으며 나는 사람을 죽이는 것도 이유가 있고 사연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크리스티의 추리물은 무섭다기보다는 슬펐다는 기억도 있다,

아빠는 한 번도 책을 읽으라고 한 적이 없고 이걸 꼭 읽으라고 권했던 기억은 없지만 당신이 읽는 모습 혹은 책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너무 자연스러워서 나는 공부는 하지 않아도 책은 읽었다.

그래서 엄마가 지긋지긋해하는 책만 많이 읽고 잘난척해서 말하지 않은 어른이 되었다.

잘난 척 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책을 많이 읽어서 세상이 유치하고 책만 읽어서 사람과의 대화가 서툴러서 말 하지 않은 편을 택한 걸 보면 엄마는 정확하게 자식을 알긴 하셨다.

아빠의 삶속에서 위안은 사람이 아니라 책이었고 책을 읽는 시간이었고 책을 읽으며 보낸 혼자만의 공간이었다는 생각이 종종 든다.

나는 꽤 친구도 많고 사교적이라고 보여졌지만 결국 나이 먹어 돌아온 내 모습은 혼자가 편한 회피형 인간이 되었다. 그래도 결혼을 하고 아이도 있는 걸 보면 세상에 적응을 잘 한 편이라고 믿어진다,

책을 많이 보는 사람 책읽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건 타인의 시선일 뿐이다.

늘 책을 보는 모습을 보였지만 책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서툴렀고 그게 들키고 싶지 않았고 나를 지켜줄  방어벽이 필요햇고 그게 마침 책이었을 뿐이다,

책은 그냥 보여지는 것이지 그게 전부가 아니다,

사람보다 말없는 존재가 좋아서 나에게 상처 주지 않을 존재가 좋아서 그리고 나를 표현하는 방법 사람 속에 어울리는 방법을 몰라서 선택당했던 책이 무슨 죄가 있으랴

책은 그냥 책일 뿐이다.

 

 

 

어른들은 책읽는 아이들을 좋아한다.

책을 읽는 아이들은 일단 조용하고 아무른 해도 끼치지 않으며 어른을 귀찮게 하지도 않는다,

책을 읽는 동안은 떠들거나 뛰어다니며 소란을 피우지도 않고 귀찮게 하거나 염려하는 사고가 일어나지도 않는다. 주의를 주고 견제하고 통제해야 할 필요도 잠시 접어둘 수 있다,

책을 읽는 아이는 왠지 똑똑하게 느껴지고 모범생일거 같고 손대지 않아도 알아서 제 할일을 잘 해낼 것이라는 믿음을 주 ㄴ다.

또 책을 읽는 아이는 어디에 내어 놓아도 누가 보아도 자랑스럽고 뿌듯하다.

누군가의 생일이나 모임에서 장난치고 게임기를 찾고 거칠게 놀거나 빈둥거리는 아이보다는 책을 손에 지고 읽고 있는 아이가 쉽게 눈이 가고 부럽다,

- 어머나 책을 읽고 있네 기특해라

-그렇게 놀라고 해도 책만 봐요 걱정이예요  저러다 친구가 싫어할까 걱정도 되구요

-뭐가 걱정이예요 알아서 잘할까 놀고 싶은 나이인데 저렇게 책을 보다니 어떻게 키우면 저렇게 되나요?

-내가 뭐 한게 있나요 그저 어릴 때 부터 책을 그렇게 좋아하네요

책을 읽는 아이는 어른들의 관심을 순간 끌지만 그 잠깐이 지나면 쉽게 관심에서 사라진다. 누구의 간섭이나 관심에서 숨고 싶을 때 책은 좋은 피난처가 된다,

책을 읽는 아이는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다

조금 재수없다는 소리르 들을 수는 있지만 그냥 그러려니 하고 내버려둔다,

책을 읽는 아이는 외로움을 감출 줄 안다,

아니 어쩌면 제 감정들이 제 속에서 차오르는 복잡하고 뭐라고 부를 수 없는 것들을 표현할 수 없어서, 혹은 표현하기 주저되어서 책으로 들어간다,

책 속은 고요하다,

이야기를 따라 피흘리는 전투를 겪어내고 산골짜기를  구르는 모험이나 배꼽아래가 간질거리는 연애나 목구멍을 아프게 조이는 슬픔으로 정신없기도 하겠지만 그 모든 혼돈이나 정신없음은 음소거 상태로 나를 감싼다,  책을 읽는 동안 그 이야기 가운데 들어가 있으며 동시에 고요속에 있는 묘한 체험을 한다. 책은 그런 은신처다,

책을 읽는 아이가 공부를 잘하거나 성적이 뛰어나거나 글을 잘 쓰거나 말을 논리적으로 잘하는 것은 아니다. 전혀 책을 읽지 않아도 잘하는 아이가 있고 책을 읽어도 좀처럼 잘하지 않는 아이도 있다. 

책을 읽는 아이는 그저 책을 읽는 아이일 뿐이다. 책을 읽는 것이 또다른 능력으로 이어지는 징검다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되는 경우도 있긴하다. 세상에는 사람수만큼이나 많은 경우의 수들이 존재하는 법이니까.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읽는다는 행위자체가 전부이고 그것이 목적이다,.

어쩌면 책따위를 읽어 무얼 할거냐는 지난 시절  어려웠던 아버지의 역성섞인 목소리가 더 옳을 수 있다.

책 따위를 읽어 무얼할꺼냐...... 답을 할 수 없다.

그저 읽어 낼 뿐이다.

소금 반찬으로 거친 밥을 꾸역꾸역 입안으로 밀어넣는 것과 같이 그저 책에서 글자를 한자한자 내 몸으로 밀어넣을 뿐이다.

책을 읽는 동안 아이는 책을 읽고 무얼 하겠다거나 무엇이 되겠다거나 어떤 능력을 키우겠다는 생각은 없다. 그저 책에 집중하는 지금 이 순간의 시간이  있을 뿐이다,

어쩌면 아이는 친구들과 말싸움에서 이길 요령도 없고 자기 주장을 내세울 용기도 없다.

몸이 둔해서 공차기나 캐치볼에 능숙하지도 않고 몸으로 하는 놀이나 게임에도 익숙하지 않다. 손이 굼떠서 공기놀이도 서출고 종이접기도 그때 뿐이다. 무얼 하든 자신있는 것이 없고  잘 하는 것도 없다. 아이는 그저 눈에 띄지 않는 그러나 존재하기는 하는 배경이다,

피곤하게 끼어서 누군가와 겨루고  놀이하는 것은 자신이 없다.

편을 나눌 때도 끝까지 남았다가 하는 수 없이 선택되어지고 그래도 자꾸 밀려나고 잊혀진다.

차라리 혼자가 편하고 혼자서 뭐하냐는 질문을 피하려면 가장 좋은 방법이 책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 밖에 방법이 없다.

-자식 책을 많이 읽기는 하는데 글쓰기는 영 아니네

-다 알고 읽는거냐?

-책 재미있냐? 무슨 얘기야? 누가 나와?

가끔 책속으로 숨어도 책 때문에 고요할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책 읽는 사람은 그렇다,

나를 내버려두라고 혼자 있고 싶다는 고요한 외침이다,

나는 부끄럽고 수줍은 사람입니다,

그냥 내버려 두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이가 예전에는 책을 좋아해서 곧 잘 읽더니 이젠 책을 읽지 않는다,

책 읽을 시간이 없는 바쁜 아이를 이해하지만 손에서 놓지 않은 핸드폰을 보면 그건 또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자고 떠들고 카톡하고 빈둥거릴 시간은 있어도 책읽을 시간이 없는 아이를 보면 화가 나기도 하다.

책을 읽고 지식을 얻고 사고를 확장시키고 공부에 도움도 되고 좋은 점수를 얻어서 좋은 대학가고 괜찮은 직업을 가지면 얼마나 좋을까?

책일기로 생각은 계속 확장된다,

계란두개로 소를 사오겠다고 다짐하는  터무니없이 야무진 농부와 같다,

책을 보는 아이를 바라보는 어른의 백일몽이 농부와 다를 게 없다,

아이는 이제 책을 읽지 않는다,

세상에는 어울려 놀지 않아도 책보다 재미있는 것들이 더 많이 있고 더 유혹적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아이는 이제 숨지 않고 세상에 마주하고 작지만 분명한 자신의 목소리를 내려고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유혹도 느끼고 빠져도 보고 재미도 찾아보고 부딪치면서세상과 마주 하고 있다고 믿고 싶다,

그리고 지치고 힘들면 언제든 기다려주는 책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책에 빠지는 아이는 위험핟,

세상이 두려운 아이는 거기서 자라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책의 힘을 믿는 아이들 언제든 돌아갈 이야기를 가진 아이들 은신처를 가진 아이들은 다시 세상을 향해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다,

책 읽는 아이를 자랑스러워 할 필요는 없다,

책 읽는 행위를 자랑스러워하고 그것이 다른 무엇보다 우위라는 생각을 갖게 되면 아이는 책에서 나올 수 없다.

책읽기는 공차기 공기놀이 게임이나 수다와 다르지 않다,

아이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의 하나이고 살아가는 데 필요한 휴식이다,

책읽기를 숭배해버리면 아이는 책에서 나올 수 없고 그 속에서 길을 잃어버리거나 아예 책으로 숨어드는 방법만 익히고 세상을 두려워할 수 있다,

책읽기는 그저 책일기 뿐이다,

책은 그냥 책이다,

책을 좋아하는 아이는 자라서 그냥 책읽기를 좋아했던 어른이 되는 것 뿐이다,

조금 느리고  뒤쳐져도 몸으로 익히는 것이 좋을 때도 있다.

아이든 어른이든 살아가는데 책이 필요하다. 중요하기도 하다,

그러나 책이 모든 것은 아니다,

책은 책일 뿐이다,

삶은 책이 아니다. 삶이 중심이다,

책은 그저 무시할 수 없고 자꾸 걸려서 기억하게 되는 맥거핀일 뿐이다.

책이 내 삶을 살아주지는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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