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이 지나간 이후

혹은 고통을 겪고 시간이 많이 흐른 이후

그 고통이 끝나고 그 흔적은 남았더라도 이후 새로운 행복이 찾아오고 참 괜찮았다 싶은 삶을 살았다면 그 고통도 편안하게 돌아볼 수 있을까

그땐 그랬지 하고 편안하게 돌아보게 될까?

한 30년의 시간이 흐른 후라면 말이다.

 

또 한가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무의식 아래 넣고 꼭꼭 덮어둔 무언가는 아직도 꺼내어 마주하고 싶지 않을까? 이제 삶을 정리하는 순간이 왔지만 끝까지 마주 하지 않고 그대로 덮고 넘어가게 되는 것도 남는 걸까

 

 

어릴적 내게 위안을 준 책들 중에는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물들이 있었다.

소녀소녀하고 달콤한 이야기인 빨강머리 앤이나 키다리 아저시 소공녀  그리고 작은 아씨들과 제인에어도 좋았고 낭만저인 모험인 80일간의 세계일주도 좋았지만 마지막까지 오래오래 읽은 건 셜록홈즈와 그녀의 추리물들 이었다, 셜록홈즈 시리즈는 재미있으면서도 어딘가 오싹한 느낌이 들었다면 그녀의 작품들은 왠지 슬펐다, 누군가가 죽고 죽이는 살인사건이 주를  이루고 피가 나오고 광기가 나오지만 이유를 알 수 없이 슬펐던 기억이 있다.

나중에 그 때의 감정을 돌이켜 생각해보니 홈즈 시리즈도 그랬겠지만 그녀의 추리물들에는 이유가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죽음에 살인에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가 때로는 탐욕이나 질투가 있었지만 그 외에도 복수 절망 모욕감등이 주는 슬픔이 있었다, 그가 나를 모욕하고 내 가족을 모욕하고 절망을 안겨주어서 죽었다는 것 그래서 적어도 묻지마 살인이 아니라 나름의 스토리가 있는 죽음이고 사건이라는게 느껴졌다,

(그렇다고 생명을 아무렇게나 여긴다는 것이 좋다는 건 아니지만 )

그의 추리물을 읽으면 그때 작품들이 그러했듯이 인과 응보 권선징악이 드러나면서 어린 내가 느끼기엔 묘한 슬픔  왠지 그냥 푹 빠지고 나른해지는 슬픔을 느꼈던 거 같다, 포와로나 미스 마플역시 홈즈처럼 냉정하고 초이성적인 인물이 아니라 인간적이어서 더 그랬는지 모르겠다,

 

에거사 크리스티의 자서전을 읽으면 그는 꽤  운도 좋고 평탄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흔한 말로 초복도 좋았고 한번의 이혼의 경험과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그때의 방황과 실종사건도 있었지만 그래도 곧 (나로서는) 새로운 사랑을 찾았고 써내는 책들도 다 반응이 좋아 경제적으로 어려움도 없었고 자녀도 속 썩이지 않고 성장했고 하고 싶은 일(유물 발굴) 가고 싶은 곳 (오리엔트 특급 여행 등등)을 모두 하고 오래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돌아가신 분

딱 그 느낌이었다.

좋았겠네,,

내가 그녀의 작품을 좋아하고 위로받았던 경험이 없었덛라면 나와 상관없이 스쳐지나간 팔자졶았던 노인네였을것이 분명하다,

물론 자서전의 스쳐가는 한줄 한줄에 무언가 암시하는 듯한 문장도 보였지만 그 오랜 삶속에 그런거 하나 없는게 더 이상하지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가 필명  메리 웨스트웨콧이란 이름으로 쓴 책들을 읽으며 또 다른 생각을 한다,

적어도 이 책들은 노년 전에 쓰여졌던 책이라면

<두번째 봄>에는 그녀의 그때의 고통이 절절히 드러난다, 소설을 읽으며 그 내용속에서 저자를 찾는 건 조금 예의에 어긋나는 행동이긴 하지만 왠지 이건 저자 자기 이야기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올 때가 있다 이 시리즈의 책들이 그랬다, 특히 <두번째 봄>은 더욱...

자서전에 없던 혹은 그냥 몇장으로 지나갔던 그녀의 이혼과 그 이후의 이야기들이 나름 상세하게 나온다, 어린 시절 이유를 알지 못한 채 쫒겼던 손없는 남자 혹은 총을 든 남자 이야기부터 어쩌면 자서전보다 좀 더 내밀하고 솔직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는 속된 호기심을 가졌다,)

누군가가 들려주는 셀리아의 이야기로 소설은 시작하고 전개된다,

주인공 셀리아는 영락없는 아가사 자신이다,

아닌 척 하면서 누군가의 시선을 통해 보여지는 것이 어쩌면 좀 더 노골적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좋은 수단이 되기도 한다, 내 얘긴 아니구 내 친구의 사촌 이야기인데 말이야... 하면서 시작되는 은밀흔 고백같은 것

 

이혼이라는 걸 생각하는 여자는 아가사가 살았던 그 시절부터 지금까지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한다, 여기 한국이든 거기 영국이든 이혼을 생각하는 여자는 늘 자기보다 주위의 시선을 생각하고 아이를 생각하고 나기의 감정과 분노와 모멸감은 늘 뒷전이 된다

셀리아도 딸 주디가 상처받고 알게 되는데 가장 전전긍긍했고 자서전의 아가사도 딸 로잘린느의 충격이 우선이었다,

샐리아도 아가사도 둘 다 남편을 몹시 사랑했다고 이혼이야기를 듣는 그 순간도 사랑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이기적으로 슬픔이나 아픔에 대한 공감능력이 아주 떨어지는 남편에 대해 그럴 수 있다고 보고 내가 잘못 판단했기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혼을 아프게 받아들인다,

자서전에는 흘러지나갔고 소설은 좀 더 세밀할 뿐이다,

셀리아는 나이가 들어 자신과 엄마사이의 애착이 너무나 강하다는 것을 알았고 그 심하게 고착된 애착관계에서 성장이 멈춘 부분도 있다고 느꼇던 거 같다, 사랑도 결혼도 소꼽장난같고 친구들 사이의 놀이처럼 느껴졌다는 것  어쩌면 무엇하나 어려움 없이 지내다가 맞닥뜨린 엄마의 죽음과 남편의 외도는 그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이다.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아이를 가진 셀리아에게 태풍은 연달아 들이닥친 셈이다,

누구보다 강하게 연결된 엄마의 부재에 이젠 엄마를 대신해 기대고 싶은 남편의 배신은 그녀를 죽게 싶게 만들었고 현실에서 도망가게 만든다, 그때야 셀리아는 안다. 나는 아직도 어린 소녀였구나 그 소녀가 꿈에서 무서워 했던 총을 든 남자는 언제나 그녀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 총을 가진 남자가 두려운 까닭은 그가 낯선 타인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언제나 우리곁에 있고 내가 가장 잘 안다고 여기는 사람이 순간 총을 든 남자 혹은 손목만을 가진 남자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 그녀를 두렵게 했다,

그러나 어떤 고통 뒤에 셀리아는 자신을 돌아보고 그 통을 든 남자를 마주하면서 어린 소녀와 마주하고 그리고 자신을 얻는다,

자서전에서 조차 언급하지 않은 아가사 그녀의 이야기를 여기서 봤다고 느껴지는 건 과장은 아닐 것이다,.

(지난 밤 남편이 별 일 아닌것으로 버럭 화를 내고 아주 유치하게 침묵속으로 들어갔다. 예전같으면 혼자 자책하거나 미워서 길길이 뛰거나 할텐데 이젠 평온하다. 화는 그의 옧이고 내 탓은 아니다. 나는 내가 오해하게 만든 부분을 사과하면 그만인 것이라고 생각할 단계가 되었다,

그런데 순가 나도 역시 아직 자라지 않은 소녀가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동안 남편의 욱하는 성질과 유치한 초딩같은 태도에 질려하면서 어쩌지 못하고 당황하게 군건 나 역시 자라지 않은 어린 소녀였다는 걸 알았다. 부모 그늘아래서 살다가 나는 남편이 그 대신의 역활을 해주길 바랬던 것이다, 그런데 나와 남편은 아직 채 자라지 않은 소녀와 소년이 아니 조금더 말하지만 사춘기에 막 들어선  소녀와 아직은 초등학교때를 벗어나지 못한 소년이 만난것이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은 상대에게서 부모를 바란다, 그러나 서로의 부모가 되어 줄 수는 없다, 나의 기대를 상대에게 얻지 못한 우리는 늘 부딪치고 화를 냈다. 나는 그가 화를 내는 상황이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그는 내가 무심해지고 냉정해지는 지점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셀리아는 타인이 아니라 나였다, 사랑도 결혼도 호기심어린 놀이였고 경험이었고 그리고 여전히 어린 아이였던 내가 셀리아를 통해 보였다,   어쩌면 어떤 결정 이전에 내가 먼저 어른이 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걸 알았다,)

 

그녀의 두번째책 (내가 읽은) "딸은 딸이다"

 

 

앤과 세라는 모녀지간이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앤은 활발하고 명랑한 딸 세라가 있다, 남편은 일찍 세상을 떠났고 모녀는 서로를 의지하고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이다,

세라가 스키여행을 떠난 3주 동안 앤에게 사랑이 찾아온다, 낯설고 서투르고 무뚝뚝하고 고집이 세지만 여리고 착한 남자 콜드필드  앤의 여리고 섬세한 성격은 콜드필드의 여린 부분을 알아보고 그도 앤의 가치를 알아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문제는 세라였다, 세라는 도무지 이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사사건건 나와 반대 의견을 가지고 부딪치고 잔소리하는 남자다.

내성적이고 고집이 센 콜드필드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줄 몰라 늘 설교로 이어지고 지적질로 이어진다.  젊은 세라에게 호감을 줄 수 없는게 당연하다. 세라 역시 젊은이답게 반항하고 사사건건 시비를 건다. 앤은 둘 사이의 갈등을 현명하게 해결하지 못하고 두통뒤로 숨어버린다,

결국 콜드필드는 떠나고 모녀는 남는다, 그리고

앤이 변했다, 조용하고 내성적이며 사색적인 앤은 없고 화려하고 바쁘고 술과 파티의 나날을 보내는 앤이 나타난다, 세라역시 바쁘다, 세라는 개리라는 늘 실패만 하는 불운한 청년을 아프리카로 보낸 후 위험하고 나쁜 남자에게 끌리고 결혼한다,

 

그리고 또 시간이 지난 후 앤은 모든 것이 신경질 적이다, 두통은 심해지고 파티는 시들하고 혼자는 불안하다., 그때 멀리 떠난  불운의 청년 개리가 돌아온다, 그리고 앤을 탓한다. 세라가 타락한 것은 엄마인 앤의 탓이라고 ... 세라는 나쁜 남자와 결혼 한 후 중독과 향략에 빠져있다,

개리는 세라를 설득하고 함께 캐나다로 가자고 한다, 자기는 비운의 아이콘이긴 하지만 세라가 옆에서 충고하고 북돋우어 준다면 할 수 있다고 세라 역시 누군가를 겪려하고 독하게 다그치며 함께 가 줄는 것이 그녀의 가치라고 한다. 세라는 흔들린다,

그리고 모녀의 설전이 나온다,

모든 통속적인 모녀처럼

앤은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걸 희생했다, 사랑하는 남자와의 결혼도 너를 위해 포기했다, 나는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오로지 너만을 위해 살았다고 소리친다,

세라 역시 그렇다. 엄마가 나에게 해준게 뭐가 있느냐? 결정적인 순간에는 늘 교묘하게 빠진다. 엄마는 내가 나쁜 남자에게 끌리는 걸 그냥 내버려두었다 엄마라면 응당 해야할 엄마로서의 역활을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불행한건 모두 엄마탓이다. 엄마에게 애정을 받지 못했고 엄마에게 질투를 받았고 엄마에게 버림받은 거라고 한다,

앤은 말한다, 니가 그때 내 결혼을 막지만 않았어도 나는 지금 이렇게 되지 않았다,

세라가 말한다, 그래서 나에게 복수를 한거냐 내가 불행하길 바란거냐

둘은 돌이킬 수 없는 말을 쏟아내고 돌아선다, 그리고 서로 가슴을 쥐어뜯을 것이다,

입이 웬수다,,

정숙하고 조용한 앤은 어느 순간 찾아온 사랑을 포기한다, 전혀 그녀의 의사가 아니다, 딸을 위한 일이라 누구에게 하소연 할 곳이 없다, 딸은 내 유일한 혈육이고 내가 포기할 수 없는 존재다, 사랑은 어쩔 수 없다, 헤어지면 타인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후회가 많은 슬픔이 가슴 깊이 자리한다, 스스로 망각하고 잊었지만 어느 순간 우연히 만난, 이제는 짝을 만난 콜드필드를 보면서 그때의 아픔이 올라온다, 나는 그렇게 가슴아프게 너를 위해 희생을 했는데 세라는 그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한다, 내 사랑은 내 추억은 어디서도 가치를 찾을 수 없다. 화가 난 앤 어쩔 줄 몰라하는 앤.. 그러나 내성적이고 조용하고 사려깊다는 이름표를 가진 앤은 미치지도 못하고 화를 내지 못한다, 그냥 자기도 모르게 은밀하게 딸을 질투하고 미워하고 실패하길 바란다, 그 은밀한 마음은 세라도 모르지만 앤도 역시 모른다,

세라는 철없고 무서울 것이 없는 아가씨다. 좋은 감정을 가진 청년은 늘 실패만 하고 그녀는 그 앞에서 늘 우쭐하게 조언한다, 누구나 호감을 갖는 외모와 조건을 가졌다, 엄마의 연애를 권장하지만 어디까지나  모든 것에는 내가 우선이다. 내가 없을 때 심심풀이로 엄마가 연애를 하면 그만이고 내 생활을 침범하지 않은 범위내에서 해야한다, 물론 말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여긴다는 걸 세라자신도 모르지만 은연중 그렇게 이기적이었다. 엄마의 사랑? 어디서 놀던 뼈다귀인지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괜찮아 내 일 아니니까 엄마의 사랑이니까 하면서도 어느틈에 손톱을 세우고 공격한다, 정말 싫다. 왜냐하면 그가 나를 싫어하니까 나는 정당하다,

그리고 잊었다, 남의 아픔이 절대 나를 뚫고 들어오진 않는다, 공감은 나를 뚫고 들어와 내 마음을 건드리는 것인데 세라는 아직 그럴 능력이 없었다, 엄마는 행복할 것이고 나는 어떤 불운한 사내로부터 엄마를 지켜냈다는 자부심이 자리 잡는다. 그리고 미친 사랑이 찾아오지만 어디선가 경고음이 들린다. 이 남자는 위험하다, 가까이 하지마라

가장 믿고 의지하는 엄마에게 물어본다, 어쩌죠 엄마?

엄마는 말한다, 니 삶이니 니가 결정하는거야 너의 자유의지에 달린 거야 엄마는 너의 결정을 지지한다, 어딘가 아쉽고 서운하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더 재수없기도 하다

그리고 잘못된 선택을 한다, 잘못되면 엄마탓이니까 아직도 자라지 않은 세라는 그렇게 믿는다,

 

(누구탓을 하는 건 정말 쉬운 일이다, 내가 불안하고 혼란스러울 땐 그게 가장 좋은 해결치고 도피처다, 내가 어릴적 받은 상처들 아픔들 억울하고 소외받은 기억을 엄마는 모른다, 엄마는 말한다, 나는 그때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너를 위한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엄마들은 때때로 한없이 약해지기도 한다, 그게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너의 결정이니까 어쩔 수 없었다. 그때 왜 내가 말리는 걸 듣지 않았니?  내가 말리지 않은게 아니지 않니? 그러게 엄마말을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지 않든? 이미 나이를 먹어서 엄마탓을 할 수 없다,

지랄 총량의 법칙이라고 있다. 인생에 떨 지랄이 정해져 있다고 그렇다면 엄마가 젊고 좀 더 나보다 쎄다고 느낄 때 떨어야 한다, 그래서 엄마도 강하게 받아치고 나도 죄책감이 덜하다, 나이먹어 내가 떠는 지랄은 주책이고 그걸 감당하기엔 우리엄마는 너무 늙어버렸다, 그래서 아직 남은 나의 지랄들을 나는 그저 꽁꽁 묶어두고 있다, 이러다 바스라지면 좋겠다, 죽기전에 튀어나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제풀에 지쳐 떨어지기를.. 바란다, 어느 순간 엄마는 늙어버렸다, 엄마에게 하고 싶은 말  퍼붓고 싶은 잔소리가 많지만 얼굴을 마주하거나 전화기를 통해서 할 수 없다, 이미 퍼부을 유통기한이 지나버렸다, 그냥 꾹꾹 담았다, 내가 참으면 그만이다, 이제 와서 무슨 말을 하겠는가, 한 평생 그것이 옳다고 믿은 엄마를 내가 지금 어떻게 바꾸겠는가 그러려니 하고 살아야지 그런데 내가 아프다, 울컥해서 퍼붓고 나도 아프고 꾹꾹 눌러 참아도 아프다,

 

 아들은 아내를 얻을 때 까지만 아들이지만 딸은 영원히 딸이다

 

책속에서 가장 지혜로운 인물 이디스의 말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 가장 큰 상처를 준다, 그게 상처인걸 안 순간 동시에 그게 사랑인것도 안다, 그가 준 사랑이 내게는 독이다, 내가 준 사랑도 그에겐 독이다, 그와 나는 가장 가까운 사이인데 서로 독을 독인 줄 모르고 주고 받는다, 그게 아닌데,,,, 이 말은 가장 가까운 사람들 끼리의 유행어가 되어버렸다, 엄마 엄마, 그 이름이 내게도 몹시 아프다, 몹시 싫을 때가 있었고 귀찮을 때가 있었고 위로가 될 때도 있고 그리울 때가 있지만 이제는 가장 아픈 이름이다, 어쩌면 그에게 나도 가장 아픈 이름이 되어버렸을지 모르겠다, 물어볼까, 절대 물어보면 안된다,

그냥 둘이 함께 할 시간을 좀 더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밖에,,, )

 

 

 

 

가장 먼저 읽은  그녀의 소설이다, 가장 먼저 나온 것이기도 하고...

읽으며  우리나라 아침 드라마로 딱 인 소재라는 생각을 햇다,

타인을 위해 타인의 행복을 위해 타인의 삶을 결정해주고 지지해주고 막아주고 쓸어주는 여자 조앤 그녀가 모르는 단 한가지는 모든 주위 사람이 그녀를 힘겨워한다는 사실이다.

" 난 알고 싶지 않아. 아무것도 알고 싶지 않아!  진실? 그게 진실이라는 걸 어떻게 알지?"

 

기억은 내가 결정한다, 내가 기억하기로 한것만 기억하고 지우고 싶은 것은 그냥 지워버린다,

그리고 사실이라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내가 기억하는 그 형태가 그 언어가 바로 진실이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리고 내 선택이, 결정이 옳다고 믿어야 한다,

아내로서 엄마로서 그녀의 삶은 정말 열성적이었고 희생적이었으나.... 그 이면에 있는 그녀의 독선과 기만은 보지 못한다,

내가 기억하는 것은 내 편의에 의한 것이라는 걸 그녀는 사막 한 가운데서 절절하게 깨닫지만 다시 기차가 움직이고 익숙한 공간으로 돌아오면서 그녀는 다시 익숙한 기억으로 익숙한 행동으로 돌아갈 뿐이다,

 봄에 그녀도 없었다. 그녀는 어디에 있었을까?

 

 

 

 

우리는 타인을 어디까지 알 수 있을까?

아니 우리 자신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이야기를 읽고난 후 몹시 혼란스러운 생각이 든다,

여태 메리 웨스트메콧이 여성에 대한 이야기에 정통하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 스펙트럼이 넓다,

이건 누구의 이야기인가

휴 노리스의 이야기일까 존 게이브리얼의 이야기일까 아니면 이사벨라의 이야기일까

서로는 서로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결국 사랑하고 오래 속마음을 터놓았어도 서로를 몰랐다

그리고 자기도 몰랐다 싶다,

타인을 안다고 말하는 것. 난 촉이 좋아서 모든 게 보인다는 말이 얼마나 위험하고 오만한 말인지 생각하게 한다,

나아가  세익스피어의 오셀로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내 기억으로도 세익스피어가 만든 인물 중 가장 입체적인 인물인 이아고가 다시 그리워졌다,

장미의 시간과 주목의 시간은 같다,,,

알쏭달쏭하면서도 알것같은 말....

타인의 삶을 바라볼 때 늘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한다는 것을 다시 배운다.,

타인은 나와 다른 사람일뿐 그는 틀린 사람이 아니다,

나도 그에게 다만 다른 사람일 뿐이다.

 

 

 

눈앞에 있는 건 뒤에 있는 것만큼 무섭지 않아,

뒤돌아 마주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거야, 

책장을 덮고 역자후기를 읽어본다.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저자와 주인공의 의도가 여러가지로 읽힐 수 있다는 구절이 보인다. 네 사람의 몇년에 걸친 우정 사랑 혹은 절망등이 읽히기도 하고 읽는 입장에서 누구에게 감정을 이입하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읽힐 수 있는 이야기이다,

크리스티의 다른 소설들과는 달리 많은 주인공이 제각각 얽히며 자기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 이야기들이 서로 다른 듯 얽혀들면서 이어진다,

버넌이 주인공인 줄 알았는데 갑자기 넬이 이야기의 중심에 서고 모든 것을 바라보고 있던 레빈이 모든 상황을 정리하기도 한다, 불쑥 튀어나온 제인이 모든 사람을 끌고 가기도 하고  큰 비중을 보인 조는 어느 순간 사라지기도 한다.

정해진 인물을 따라 가며 씌여지니 다른 작품과 달리 여러사람을 따라가다보니 사실 집중은 떨어지지만 책장을 덮고 나니 결국 이 작가의 인간에 대한 통잘에 다시 존경심이 느껴진다,

회피형 인간..

버넌은 한번도 눈 앞에 있는 것을 제대로 보지 못한다. 두려움이기도 하고 거절 불안이기도하다,

불안정한 엄마 어정쩡하게 무심하고 역할에 갈팡질팡하는 아빠 사이에서 버넌은 자기보호막을 치며 안으로  집중하며 불안과 두려움을 회피한다. 그의 그런 행동이 늘 드러나진 않는다,

아빠의 피를 닮아 현실적인 외가와는 다른  그는 모든 것을 주춤하고 피한다

그리고 나중에 기억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의 회피는 최고조에 달한다,

누구를 사랑하는지 알 수 없는 상황. 내 마음을 고요하게 들여다 보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자기자신마저 버린다.

버넌뿐 아니라 어린 시절을 함께한 네명은 가족관계와 성장배경에서 한치도 어긋나지 않고 그 가족력 그대로 성장한다. 그리고 어른이 되어도 변함이 없다. 제인이 네명을 한순간 흔들어보지만 자기를 들여다 볼 줄 아는 사람만 남을 뿐 모두 흔들리고 도망치고 운명처럼 거부하지 않는다.

 

 

 

 

 

 

 

 

 

 

 

 

 

 

 

 

 

사람은 의외로 배워야 아는 것들이 많은 모양이다

저절로 알았다고 꺠쳤다고 생각되는 것들이 의외로 배움이 필요하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내가 알아가는 것은 내가 느끼는 내 감정들 그리고 내가 무심코 하는 내 반응들도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냥 막연히 알거야.. 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정교하고 오랜 반복의 학습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랑... 역시 감정의 하나 이지만 배워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감정을 배운다는 것 사랑을 배운다는 것은 그 감정을 많이 느끼고 사랑을 받아야  배울 수 있다,

오롯히 담겨본 사람만이 누군가를 담을 수 있고 공감받은 사람이 타인을 공감하고 사랑받았던 아이들이 아무런 계산없이 사람을 사랑한다,

로라는 어쩌면 글로 사랑을 배운 사람같다,

물론 책을 통해 배운 건 아니지만 이제 부터 나는 셜리를 사랑할거야 라는 다짐으로 사랑이 시작된다,

어린 노라가 가진 셜리에 대한 미움은 당연하다,

둘째로 늘 비교대상이 되었고 더구나 자기보다 월등하게 사랑스럽고 사랃받던 오빠와 비교되며 자기 자존감을 죽이던 노라에게 오빠의 죽음은 슬픔과 함께 자기가 사랑받을 차례가 되지 않았을까하는 설레임이 함께 한다,. 그 나이의 로라라면 당연하다고 말한다면 너무 심한 걸까?

아이든 어른이든 누구나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은 건 당연하지 않은가?

아이답게 천진하고 순수한(?) 영악함이 푸른 가운을 입은 성모에게 기도하게 하고 그 날밤 그 기도가 이루어질때 아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대로 불이 나고 방에 갖힌 아이와 유모가 못나오고 사망한다면 .....

잠깐의 감사와 함께 긴 죄책감이 남았을 것이다

그 순간 노라에게 간건 책임감이 아니라 죄책감이었을 것이다,

이건 아니다, 이건 내 탓일지도 몰라 하는 죄책감이  무의식의 용기를 내게하고 아기 셜리를 구한다 그리고 그 댓가로 노라는 영원히 아기 셜리를 사랑할 것을 맹세하고 그런 삶을 산다,

 

이웃집 존은 노라의 얼굴에서 아이다운 천진함이나 대책없는 명랑함 을 찾지 못했다,

아이가 아이의 얼굴이 아니라 어른의 얼굴을 하고 있는 것 만큼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 있을까?

존이 계속 노라의 친구가 되고 그의 멘토가 되는 건 그래서일것이다,

아이답지 않은 아이를  보는 불안감

지나치게 셜리를 사랑하는 노라를 보며 존은 늘 말한다,

셜리는 셜리의 인생이 있다. 그 아이가 볼행하건 행복하건 그건 그 아이의 몫이고 그 아이의 책임이야 누군가가 대신 해줄 수도 없고 누군가의 탓도 아니야

그러나 노라는 셜리의 모든 상황을 자기의 탓으로 하면서도 늘 셜리에게 끌려간다,

그의 결정에 뭐라고 할 수 없이 끌려가고 그러면서 전전긍긍하고

나의 사랑이 상대에게는 독일 수도 있다는 것

그걸 노라는 몰랐다,

내가 주는 사랑은 나의 사랑일 뿐 상대가 원하는 사랑이 아닐 수 있다,

나는 주었지만 상대는 받지 못했다,

그 사랑은.. 서로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그리고 셜리는 죽었다,

노라는  아프지만 그 현실을 봐야 한다, 그래서 나중에 맥락없어 보이는 등장인물  루엘린을 통해 노라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드디어 노라는 사랑이라는 것을 배우기 시작한다,

 

사랑은  불행하게도 늘 일방적이다, 주어도 주어도 모자라게 느껴지기도 하고 받아도 받아도 부족하기만하다,

주는 쪽은 열을 주어도 받는 쪽에서는 둘밖에 못받기도 한다,

사랑에는 수학공식이 맞아떨어지지도 않는다,

정확함이란게 없다,

넘치는 사랑이 왜곡되고 일방적일 때 그만한 폭력이 없다,

그러나 주는 쪽은 내가 폭력을 행사하는 걸 알지 못한다,

받는 입장에서도 상대에게 뭐라고 하기가 애매하다, 사랑을 준다는 건 알겠지만 그게 나에게 부담이고 원치않는 거라는 걸 말하기 힘들때가 많다, 가까운 사이  가족사이가 더욱 그렇다,

사랑도 결국은 배워야한다는 입장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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