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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의미 - The Meaning of Art
허버트 리드 지음, 임산 옮김 / 에코리브르 / 2006년 11월
평점 :
절판
허버트 리드의 《예술의 의미》(에코리브르, 2006)를 다시 읽었다. 10여 년 전 책읽기 모임에서 처음 접한 후 까맣게 잊고 있다가 꺼내 들었는데, 마치 처음 읽는 책처럼 새로웠다. 전에는 문예출판사 번역본으로 읽었으나 가독성이 더 좋다는 소문에 에코리브르판으로 재독을 시도했다. 결국 정독과 원문 비교를 거치며 도합 네 번을 읽은 셈이다.
처음 얼마간은 문예본보다 확실히 술술 읽히는 듯했다. 하지만 재독, 삼독을 거듭할수록 1부와 3부의 번역이 엉망이라는 사실이 눈에 걸렸다. 요즘은 마음만 먹으면 인터넷 검색으로 영문 원문(The Meaning of Art)을 쉽게 다운받아 볼 수 있는 시대 아닌가. 원문과 대조해 본 1부와 3부의 번역 상태는 가히 처참했다. 기본적인 영어 문장 구조조차 잘못 짚은 오역이 심각한 수준으로 산재해 있었다.
처음 가볍게 읽을 때는 오역인 줄도 모르고 지나치기 십상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1부에서 리드가 논하는 예술과 미(美)의 관계가 앞뒤가 맞지 않고 자꾸 꼬이는 듯한 느낌을 준다. 구절구절 원문과 비교해 보고 챗GPT 등 번역 AI까지 동원해 검증해 보니, 번역자가 저자의 의도를 완전히 오독하여 발생한 오류들이 너무나 도드라졌다.
개개의 세부적인 오역 사례를 일일이 열거하진 않겠다. 직접 읽어보시라. 1부를 읽다 보면 이해가 안 되는 매끄럽지 않은 구절이 수두룩한데, 이는 단순히 한국어 문맥의 어색함을 넘어 순전히 오역 때문에 논리가 깨진 탓이다. 그나마 2부는 사정이 좀 낫다. 어쨌든 잘못 옮겨진 영어 문장들 속에서 행간을 읽어내고 진짜 의미를 추라하려면 독자 입장에서 꽤나 고역스러운 수고를 들여야만 한다.
만약 번역이 제대로만 정교하게 다듬어졌다면 참으로 쉽고 매력적인 한국어판이 되었을 것이다. 미학의 고전으로서 두고두고 길게 회자되는 명저가 되지 않았을까. 뭐, 원래 원작 자체가 서양 미학사의 명저이긴 하지만 말이다. 미학 개론이라는 거대한 담론을 이처럼 엄격한 체계에 얽매이지 않고도 간결하게 스케치하여, 입문자에게 미학이 다루는 주제와 범위를 직관적이고 쉽게 일깨워주는 책도 드물다.
이 책이 지닌 진짜 가치는 완독 후에 증명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눈앞의 그림을 어떤 눈으로 바라봐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이전에 미술을 감상하면서 무엇을 놓치고 지나쳤는지를 명확히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숱한 오역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매우 유익한 책이다. 사실 오역이 적고 읽을 만한 2부의 미술사 스케치만 제대로 섭취해도 이미 이 책의 값어치는 충분히 하고도 남는다.
책은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부는 예술과 미의 관계를 정립하고 그림을 읽어내는 기본 개념적 도구들을 소개하며, 2부에서는 동서양 미술사를 개괄적으로 스케치한다. 그리고 마지막 3부에 이르러 예술이 지닌 진정한 기능이 무엇인지를 개진한다. 비록 구성상 완전히 엄밀하고 체계적인 논문 형식은 아닐지라도, 리드가 이 책 전체를 통해 도달하고자 하는 지향점이 무엇인지는 어렴풋이, 그러나 분명하게 감잡을 수 있다.
이 책을 핵심만 간략히 요약하자면 '예술은 단순히 아름다움(美)과 동의어가 아니며, 진정한 예술이 되기 위해서는 형식(감정의 조형)과 내용(정신의 표현)이 정교하게 일치해야 한다'는 점을 1부에서 논한다. 그리고 이 틀을 바탕으로 미술사의 흐름을 짚어낸다. 리드가 스케치하는 미술사는 결국 조형적 형식과 인간 정신의 내용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변주되고 이어져 왔는지를 밝히는 과정이다.
헌데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핵심은 내용보다 ‘형식’에 있다. 이 '형식'이라는 키워드는 책 전체를 관통하며 계속 등장한다. 리드가 정의하는 예술의 본질이란 바로 '지각하는 이에게 감정을 유발하기 위해 창조된 유쾌한 형식의 형태'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예술가는 단순한 재현에 머물지 않고, 자신의 내면 깊은 곳의 감정과 직관을 가시적인 시각적 형태로 조직화(조형)하는 존재다.
요컨대 1부와 2부를 통틀어 리드가 피력하는 '예술의 의미'는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감정을 전달하는 유기적 형식의 창조이고, 둘째, 인간 정신의 직관적 인식이며, 셋째, 인간적 유대 및 자아의 확장이다. 결국 리드가 동서양의 방대한 예술사를 통틀어 밝히고자 했던 핵심은 '예술의 의미'가 지닌 시대적·지역적 상대성이었다. 시각적 형식과 이를 받치는 인간의 정신은 언제나 자신이 속한 시대와 공간이라는 양식의 산물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3부는 1부와 2부에서 다룬 예술과 미의 관계, 그리고 수많은 미술 작품과 작가들에 대한 압축적인 비평을 바탕으로 리드가 제시하는 일종의 최종 결론이다. 그 결론이 바로 '예술의 기능'이다. 리드에 따르면 예술의 진정한 기능이란 개인적 차원의 심리적 기능과 사회적 차원의 사회적 기능을 긴밀하게 매개하고 연결하는 시도에 있다.
전자가 무의식의 억압을 정화하고 파편화된 자아를 통합하는 일이라면, 후자는 타자와의 깊은 공감을 형성하고 공동체의 영적 유대를 회복하는 일이다. 리드는 이를 통해 예술이야말로 한 문명이 얼마나 건전한가를 가늠하는 척도이자,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유일한 열쇠임을 드러내고자 한다. 다소 추상적이고 이상주의적인 논의라 선뜻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려울지라도, 예술의 역할을 개인의 내면과 사회적 확장성을 잇는 매개체로 바라본 그의 시각만큼은 매우 탁월하고 훌륭하다.
전반적으로 실망스러운 번역 탓에 평가가 좀 박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번역만 제대로 매끄럽게 다듬어졌다면 한국 독자들에게 훨씬 더 많이, 더 널리 읽혔을 것이라 확신한다. 번역의 아쉬움을 뚫고 들어갈 가치가 있을 만큼, 텍스트 자체가 품은 묵직한 진가와 울림은 여전히 눈부신 좋은 책임에 틀림없으니까!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