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40
파트릭 모디아노 지음, 김화영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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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은 헌책방이나 서점에서 발견하는 족족 한 권씩 그러모으게 되는 묘한 마력이 있다. 그 결과 그의 작품들을 상당수 소장하게 되었다. 영화나 여타 매체에서 느낄 수 없는 고유의 쓸쓸하고 안개 낀 듯한 분위기에 매료되어 그 매력의 뿌리를 찾아보고 싶었다. 이번에 독서모임을 계기로 대표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문학동네)를 다시 읽게 되었는데, 이번엔 아주 색다른 경험을 했다. 예전에 읽었을 때의 감상과는 전혀 다른 깊이가 느껴진 것이다. 역시 서평을 남겨 놓지 않으면 그 당시의 미세한 감흥은 금방 잊혀지고 만다.

 

주인공 '기 로랑'이 잃어버린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헤매는 기본 줄거리는 알고 있었지만, 베르그손의 철학적 프레임으로 다시 읽어본 소설의 구조는 정말 처음 보는 것처럼 놀라웠다. 앙리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 2장과 제3장을 곁들여 읽으니, 이 소설이 단순한 기억상실증 환자의 추적극을 넘어 '시간과 존재'에 대한 엄청난 철학적 탐구라는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운동적 기억과 순수 기억, 그리고 시간의 흔적들

 

 

베르그손은 <물질과 기억> 2장에서 기억을 두 가지 유형으로 구분한다. 뇌에 습관이나 행동으로 각인된 '운동적 기억(mémoire-habitude)', 과거 그 자체를 온전히 담고 있으며 이미지 형태로 떠오르는 '순수 기억(mémoire pure)'이다. 주인공 기 로랑은 과거를 잃어버렸지만 일상적인 행동이나 언어, 타인을 대하는 방식 같은 운동적 기억은 여전히 유지한다.

 

하지만 그가 진정으로 찾고자 하는 것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담긴 '순수 기억'이다. 그는 탐정 사무소의 흗어진 단서들, 낡은 사진, 낯선 이들의 증언 등 외부의 '물질'을 매개로 과거의 이미지들을 하나씩 되살려낸다. 자신이 '페드로 맥케부아'였는지, 아니면 지미 페드로와 함께 살던 인물이었는지 추적하는 과정은, 베르그손이 말한 '물질을 통해 잠재된 순수 기억을 현실화(actualisation)하는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낡은 흑백 사진 속 인물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기 로랑의 뇌리에서 꿈틀거리는 아련한 환영들은 잊혀진 시간의 실타래가 풀어지는 순간을 완벽하게 보여준다.

 

 

지각과 기억의 원뿔구조, 시간에 내던져진 존재

 

 

베르그손은 제3장에서 '뒤집힌 원뿔형(Cone) 모델'을 통해 과거 전체가 현재의 지각 표면과 어떻게 만나는지 설명한다. 거꾸로 선 원뿔의 뾰족한 끝은 현재의 행동 지점이고, 넓은 밑면은 과거의 전체 기억 저장소다. 기 로랑은 현재라는 뾰족한 칼날 위에 서서, 과거라는 거대한 깔때기 속을 끊임없이 들여다본다.

 

그는 파리의 어두운 거리와 잊혀진 상점들, 그리고 데니즈와의 추억이 서린 보라빛 밤을 헤맨다. 이 여정은 단순히 팩트를 확인하는 작업이 아니다. 현재의 지각과 과거의 순수 기억이 만나는 접점을 찾아 자신이라는 존재의 깊이를 복원하려는 서글픈 시도다. 소설 속 파리의 안개 낀 거리는 바로 베르그손이 말한, 현재와 과거가 모호하게 얽혀드는 시간의 지층 그 자체다. 그는 타인의 입을 통해 전해 듣는 자신의 파편화된 과거 속에서, 시간을 견디고 살아남은 기억의 실체를 감각한다.

 

 

실종된 정체성, 그리움이 남긴 미학적 카타르시스

 

 

이 소설의 비극적이면서도 아련한 결말은 기존 탐정/추리 소설의 전형적 구도를 전복시킨다. 보통의 추리물은 모든 단서가 조합되어 단 하나의 완벽한 진실로 귀결되지만, 모디아노의 세계는 다르다. 기 로랑이 자신의 이름이 '페드로'였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도달하고, 그가 살았던 옛 집과 흔적들을 찾아내지만, 그것이 완전한 과거의 복원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는 기억을 찾으면 찾을수록 자신이 영원히 잃어버린 시간이 얼마나 거대한지를 깨닫는다. 책의 마지막 구절에서 그가 어린 시절의 우는 아이를 떠올리며 던지는 독백은 이 소설의 문학적 메시지를 강렬하게 전달한다.

 

"우리들의 삶은 이 아이의 울음소리만큼이나 쉽게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은 아닐까?"

 

그는 깨달았다. 삶이란 베르그손의 말처럼 연속적인 흐름(지속, Durée)이며, 우리가 고정된 정체성이라고 믿었던 것들은 끊임없이 흘러가는 안개와 같다는 사실을.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대한 이 헛헛한 그리움과 아쉬움이야말로 모디아노 문학의 정수다.

 

앙리 베르그손의 치밀한 기억 이론과 파트릭 모디아노의 시적이고 몽환적인 문체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이 멜랑콜리는 독자에게 긴 여운을 남긴다. 안개 속을 헤매듯 신중하게 서사가 전개되다가 마지막에 이르러 삶의 허무함과 아름다움을 동시에 일깨우는 구조는 참으로 독보적이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나는 이 헛되고도 고귀한 방황이야말로 좋은 소설이 가져야 할 최고 수준의 미덕이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확신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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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6-09-18 16: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괴테가 한 말,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라는 말이 떠오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