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의 작업은 내가 살아온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에서 시작되었다. 지난해 개인전의 제목을 「세계는 나의 아비투스다」라고 정한 것은 내가 세계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축적해온 세계의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그 세계를 다시 구성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작업의 출발점으로 삼고 싶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용하는 오래된 문서와 인쇄물, 책의 일부, 화폐, 문자와 광고 이미지들은 특정한 사건이나 기억을 재현하기 위한 소재가 아니다. 그것들은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서 접하고 지나온 것들의 흔적이며, 나에게 내면화된 세계의 파편이다. 나는 이 파편들을 화면 위에 다시 배열하고 겹쳐 놓으면서 하나의 풍경을 만든다. 그것은 실제 풍경이 아니라 내가 경험한 세계가 기억과 습관을 통해 변형된 내면의 풍경에 가깝다.
특히 아비투스 콜라주에서 중요한 것은 무엇을 붙였는가보다 서로 다른 것들이 어떤 관계를 이루는가였다. 오래된 종이 위에 이미지가 겹쳐지고, 문자가 일부 가려지며, 서로 다른 시간의 흔적들이 한 화면 안에 공존한다. 처음에는 각각의 이미지가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지만 화면 안에서 그것들은 더 이상 독립적인 대상으로 남지 않는다. 잘려지고, 중첩되고, 가려지고, 다시 드러나면서 새로운 관계망을 형성한다.
이 과정에서 나는 내가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또한 하나의 구조라는 것을 발견하기 시작했다. 기억은 모든 것을 그대로 보존하지 않는다. 어떤 것은 남고 어떤 것은 사라지며, 어떤 것은 다른 기억 위에 포개진다. 현재의 경험은 과거의 기억을 다시 해석하고, 이미 지나간 시간은 현재의 시선 속에서 새로운 형태를 갖는다. 내가 화면 위에 파편을 쌓아 올리는 행위는 결국 이러한 기억의 작동 방식과 닮아 있었다.
따라서 아비투스는 나에게 단순히 사회적 환경이 남긴 습관이나 성향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내가 세계를 보고 선택하고 배열하는 하나의 감각적 구조이기도 하다. 내가 무엇을 발견하고 무엇을 화면에 남기는가, 어떤 이미지를 선택하고 어떤 것을 지우는가, 무엇을 겹치게 하고 무엇을 비워두는가 역시 내가 축적해온 시간과 경험의 결과다.
지난해의 「세계는 나의 아비투스다」는 그런 의미에서 나의 작업에 대한 하나의 출사표였다. 나는 세계를 재현하려 한 것이 아니라, 세계가 내 안에 축적된 방식 자체를 화면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그리고 그때 시작된 질문은 이후 작업에서 점차 이미지의 문제를 넘어 구조의 문제로 이동하게 된다.
지금의 작업에서 내가 말하는 ‘구조’ 역시 결국 그 아비투스의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내가 살아온 시간이 남긴 흔적들이 서로 관계를 맺고, 충돌하고, 겹쳐지면서 하나의 화면을 이루듯이, 나의 작업 역시 그렇게 축적되어 왔다.
그러므로 지난해의 아비투스 콜라주는 끝난 작업이 아니라 지금의 작업이 시작된 자리다. 내가 남기는 모든 작품은 결국 내가 살아온 세계가 나에게 남긴 흔적이며, 동시에 그 흔적을 다시 바라보고 재구성한 나 자신의 기록이다. 세계가 나의 아비투스라면, 내가 만드는 화면 역시 나의 아비투스가 된다.
[덧] 개인전 포스터가 나왔습니다. 5월부터 8월까지 쉬지 않고 달렸네요. 올해는 8월 개인전 이후 9월 이후 초대전이 한 번 더 잡혀 있습니다. 올해는 제 조형언어를 발견한 기념비적인 해입니다. 그래서 올 개인전과 도록은 제게 무척 중요한 사안이 됐네요. 모처럼 근황을 전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최근 읽고 있는 유익한 현대미술사 책이 있어 부가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