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희진이 작년인가 영어교육에 대해 칼럼을 썼나 보다. 정희진 좋아하는 누군가가 얘기해서 칼럼을 읽어 봤는데, 뭐 뻔한 내용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영어 잘해서 대통령까지 한 사람으로 최규하 전 대통령을 언급했었는데, 최규하가 영어 하나 잘해서 대통이 됐을까. 당시 상황상(권력 구조 승계 구조상)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중론인데, 영어 하나로 대통령이 된 사람으로 언급하다니, 침소봉대가 아닐까.

 

진짜 영어 하나 기깔나게 잘해서 고위 인사가 된 사람이 있다. 이승만. 이승만은 배재고보 다닐때부터 영어를 기가막히게 잘했다. 20살 무렵부터 독립운동을 했었는데, 그게 우리말을 외국어로 번역하여 해외에 알리는 뭐 그런 거였다. 그래서 임정 연통부에서 활동한 거. 이승만 정도 되면 그래도 영어 하나 잘해서 대통 됐다고 할 수 있겠다. , 장면도 추가.

 

영어 잘하면 출세길이 열렸던 지난 시절. 영어 잘해서 대통령과 수상이 될 수 있다는 건 그만큼 후진국이었다는 방증이 아닐까(?). 뭐 요즘은 이상하게도 법조인들이 다 해먹는 세상이 돼서 미국 따라가는 국가가 되는 건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변호사 출신 대통령만 3명 이상이고, 법조인으로 확대하면 훨씬 더 많다.

 

어쨌거나 내가 하려는 얘기는 영어다. 유치원에서부터 대학까지 영어와 수학 과목은 정말 절대적이다. 이 두 과목을 잘하면 일류대는 따 놓은 당상이다. 그중에서 영어는 졸업 후 취업 너머까지 영향을 미치는 강력한 과목이다. 진짜 무소불휘하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수학이야 혼자 잘하면 장땡이지만 영어는 문화의 한 부분이기에(혼자 하기 쉽지 않다) 사회 계층을 나누는 하나의 문화자본이 된 지 오래다.

 

우리나라에서 20세 후반 청년들이 토익, 토플, 텝스에서 좋은 점수를 갖지 못하면 아예 취업 기회가 없다. 원래 좁은 취업길도 원천 봉쇄된다. 그만큼 외국어 중에서 영어란 놈은 하나의 언어 이상이다. 일본어를 못해도, 스페인어를 못해도 사는 데 아무 지장이 없다. 왜냐하면 외국어는 필요에 의해서 배우는 기능적인 면이 강하기 때문이다. 내가 필요해서 자격증을 따는 것처럼.

 

일본어나 독일어 못한다고 해서 자살하지는 않을 거다. 하지만 영어를 못하면 전체 수능 성적이 낮아져 자살 충동을 느끼는 학생들이 많은 줄로 안다. 기준 점수의 공인 영어 성적이 없으면 공무원도 되지 못하는 세상이다. 이건 정말 아니다. 왜 영어만 공인 영어 점수를 요구하나? 일본어나 스페인어는 왜 안되나? 그러니 영어는 하나의 과목이 아닌 거고, 일반적인 외국어도 아닌 계층을 나누는 기준이 된 거다.

 

공인 외국어 성적 얘기를 해 보자. 우리나라에서 실시하는 공인 영어 시험은 토익, 토플, 텝스, 지텔프 등이 가장 대중적이다. 이 시험은 각종 공무원 시험에서 영어 과목을 대체하는 공인 시험들이다. 나는 학부 4학년 때 토플 시험을 친 이후 오랫동안 공인 영어 시험 성적이 없었다. 딱히 필요하지 않아 응시할 필요가 없었는데, 나를 아는 지인들은 영어 점수 하나 없는 루저라고 놀리기 일수였다.

 

개나 소나 토익 900점 시대. 진짜 물어 보면 죄다 토익 900은 기본이라기에 2010년 쯔음 한 번 응시해 보았는데, 600점을 간신히 넘긴 정도. 200문항에 맞춰 연습을 하지 않으면 절대 기준 점수를 획득할 수 없을 정도로 쉽지 않았다. 900점은 시험을 계속 봐서 가장 좋은 점수를 내는 것이 자기 점수라고.

 

공인 영어 점수가 필요하지 않아 내 토익 점수는 620점으로 박제됐다. 어디 가서 명함도 못 내미는 쪽팔린 점수였는데, 이를 안 것도 시험을 치고 상당한 시간이 흐른 후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험 삼아 응시해 본 토익이라 신경도 안 쓰고 있었는데, 집에서 툭하면 이 점수를 들먹거리는 거다. ‘영어도 못하는 넘이라고. 평생 공인 영어 시험 성적이 없을 이상한 사람 취급해서 할 수 없이 공인영어 시험공부란 걸 대학 졸업 이후 처음 했다.

 

이게 2019년 무렵이다. 코로나 터지기 직전. 토익시험 공부가 너무 짜증이 나서 단기간에 공부하여 기준 점수 이상(토익 800점 정도) 넘을 수 있는 시험을 탐색하던 중 지텔프라는 셤을 알게 됐다. 교재를 사서 2개월 간 정말 빡세게 공부했다. 영어만 공부한 건 대학 졸업 후 이때가 처음이었다. 1개월 빡세게 공부하니 61점이 나왔다. 근데 토익 700점과 같은 점수는 65점이라네?! 그래서 또 1개월을 빡세게 공부했다. 그리고 나온 최종 점수 76(토익 800점 이상).

 

그리고 더 이상 영어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됐다. 지텔프 76점 확보 이후 집에서 영어 못한다는 소리를 한 번도 안 하는 거다. 공인 영어 점수 없는 이상한 사람 취급도 안 했다. 어쨌든 난 뭘 해도 영어 기준 점수 이상을 확보한 사람이라는 거. 각종 시험 응시 자격을 충족(지텔프 65)하고도 남았다. 뭐 나하고 하등 관계가 없는 듯한 시험의 자격 요건 이지만 그래도 기분은 꽤 좋았다.

 

이 빡세게 공부한 시간에 독해력 향상을 위해 다시 본 책이 김영로의 <영어순해>였다. 엔날 학부 1학년 때 입학과 동시에 사 두었던 빨간색 고려원판 <영어순해>. 강의 테잎도 있었는데, 이사 다니면서 없어졌다. 김영로가 편저한 이 전설의 영어 독해책이 여전히 알라딘에서 판매하는 거다! 표지만 산뜻하게 바뀌어서 말이다. 이 책은 김정기의 <거로 보카>와 더불어 대학가의 필독서 중 필독서였다

(바로 아래 책이 고려원에서 나온 전설의 빨간 영어순해 책!)

당시 이 <영어순해> 책을 다시 보면서 새삼 느꼈지만, 영어에서 어려운 문장들은 죄다 모아 놓은 독해책이었다. 그 옛날 <성문종합영어>에 나오는 독해보다 훨씬 어려운 내용이 즐비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타임지나 뉴스위크지에서 어려운 부분만 발췌하여 실어 놨으니 당연히 어렵겠지. 이런 책을 십수 번 보느니, 챕터북을 보는 게 훨씬 이롭다는 걸 나는 이전에 이미 알았지만 공인 시험 성적을 위해 어쩔 수 없이 보게 된 거.

 

알라딘에서 우연히 <영어순해책을 본 순간 안 좋은 기억들이 순식간에 스쳐 지나가면서 옛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이 책이 아직까지 판매되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고영어에 얽힌 여러 기억들이 교차해서 페이퍼로 남겨 두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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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크냄새 2025-08-04 20: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성문종합영어> <맨투맨> <영어의 맥>, 기라성 같은 책들이 스쳐 지나갑니다. ㅎㅎ
그래봤자 토익은 예전 과장 진급 마지노선이던 650이 최종 박제 점수입니다.

yamoo 2025-08-05 18:21   좋아요 0 | URL
오~~~ 맞다, <영어의 맥>도 있었지요...고3때 이걸로 공부한 적도 있었는데..맥시리즈...이광용 저..ㅎㅎ 기본서는 엄청 두꺼웠다는...
잉크 님두 650점 박제였군요...ㅎㅎ 토익은 공부하기 정말 싫더라구요~ 공부하기는 텝스가 재밌긴한데, 점수가 무쟈게 안나오고..ㅎㅎ 토플이 제 성향상 가장 잘 맞더라구요. 근데 넘 비싸서 안보게 된다는..^^;;

바람돌이 2025-08-04 21:3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영어 너무 싫어서 대학 갈 때 영어 안해도 되는 과 찾아서 간 사람 저요. ㅎㅎ 그래서 지금은 남들이 막하는 원서 읽기도 쳐다도 안 보는데 그래도 야무님은 이런 도전을 해보다니 대단하셔요.

yamoo 2025-08-05 18:27   좋아요 2 | URL
아니, 바람돌이 님이 영어를 너무 싫어한다니...의외이고 새로운 사실을 알았네요!! 뭐, 영어 좋아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좋아하는 사람들보다 싫어하는 사람들이 배 이상 많을 거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영어 싫어서 영어 안해도 되는 과를 찾아가셨다라...그게 더 대단한데요..ㅎㅎ

저는 수학이 그렇게도 싫었는데...아주 친했던 중학교 동창넘도 수학이 싫어서 대학갈 때 수학 안하는 과가 뭐지...하면서 찾다가 응용통계를 썼는데, 이게 4년 내내 수학하는 거라 얘가 미쳐버려서 전공 때려치구 소프트웨어 쪽으로 나갔다는...ㅎㅎ
저두 대학갈 때 수학 영어 법 등이 싫어서 피하다 보니 갈 수 있는 과가 거의 없더라구요...어문계열도 싫어서 찾아보니 철학과 행정으로 좁혀져 할 수 없이 행정을 택했는데, 드럽게 재미가 읎어서 철학과로 갈아탔죠..ㅋㅋ

바람돌이 2025-08-05 19:17   좋아요 2 | URL
수학 영어 법 다 싫어서 마지막 종착지가 철학이라니... 야무님이 진짜 윈입니다. ㅎㅎ

yamoo 2025-08-06 10:28   좋아요 1 | URL
어린 마음에 학과 선택 시 타협점이 없었는데, 들어가서 배우고 보니 재밌더라구요..ㅎㅎ 대학원이 아닌 학부로 철학은 다른 과 보다는 훨씬 제 적성에 부합하는 면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졸업하고서도 계속 철학책을 읽었던 거겠지요..ㅎㅎ 철학과 졸업해서 한 가지 좋았더 점은 철학원서에 대한 문턱이 매우 낮아 읽고 싶었던 걸 읽을 수 있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해하는 건 별개의 문제였지만요..ㅎㅎ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 1장을 읽고 어느 정도 이해하기까지 10년 조금 넘게 걸렸네요..ㅎㅎ

꼬마요정 2025-08-04 23: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우와 대단하십니다. 저도 예전에 시험 치려면 토익 점수가 필요해서 토익에 매달렸는데 생각보다 쉽지 않더라구요. 그냥 필요 점수 턱턱 넘기는 사람들 부러웠죠. 저는 영어 싫어합니다ㅠㅠ 어릴 때 엄마가 수학만 시켰어요. 그래서 영어는 잘 못했고, 또 유인도 없었고, 어쨌거나 계속 수학만 시키고...ㅠㅠ 전 문과인데 말이죠ㅠㅠㅠㅠ

yamoo 2025-08-05 18:32   좋아요 1 | URL
보니까 토익은 강의듣고 주구장창 문제연습하면 되는데, 그 연습 기간이 좀 길어보입니다. 제가 보긴 그래요. 필요점수 획득하기 가장 좋은 인증 셤은 지텔프같습니다. 근데 지텔프는 듣기가 너무 어려워서 80점 획득하기가 하늘에 별따기 많큼 힘들어요. 그래서 고득점 맞기 위해선 토익으로 선회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걍 계속 1년간 주야장천 셤보고 학원 가서 강의들으면 얼추 900점은 근처는 가더라구요~ 600점 부터 시작해서 1년간 영어만 공부한 친구들 대부분 900점 넘어서....토익은 영어실력이 아니라 문체푸는 기교연습뿐이 안됩니다. 900넘는 친구들 중 대화 잘하는 사람 하나 없다는..ㅎㅎ

아니 근데 꼬마요정님 어머님은 정말 특이하시네요. 문과인데 왜 수학만 공부시키는지...근데 수학 잘하면 등급이 뽝~ 뜨지 않나욤??ㅎㅎ

꼬마요정 2025-08-05 22:35   좋아요 1 | URL
이게 말입니다. 영어가 죽 쒀서 국어랑 수학이 등급 잘 나와도 진짜 좋은 데는 안 되더라구요. 게다가 전 수학 역배점에 당해서 말입니다ㅜㅜ

엄마의 언니인 이모네 아들 딸이 수학 못해서 서울대를 못 갔거든요. 엄마의 오빠인 삼촌네 아들이 수학 땜에 재수했거든요. 막내인 엄마는 이 상황을 보더니 주구장창 수학만 시켰어요 ㅋㅋㅋ 결과는 서울대는 무슨 ㅋㅋㅋㅋ

yamoo 2025-08-06 10:31   좋아요 1 | URL
어머니의 욕심이 대단하셨던 듯합니다. 그러기 쉽지 않은데...ㅎㅎ
그래도 시도는 아주 신박했다고 생각합니다. 진정한 승자는 어머니시네요. 진짜 수학에 올인시킨 학부모가 있다는 걸 듣긴했는데, 꼬마요정님 어머니이시네!!!ㄷㄷ

hnine 2025-08-05 15: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저도 대학생때 빨간 색 영어순해 책 가지고 공부했고 지금도 가지고 있어요. 그런데 분철해서 가지고 다녀서 몇 조각이 나있답니다. 책 속 예문에서 가끔씩 만나는 명문장들 만나는 재미에 붙들고 있을 수 있었지요. 거의 25년전 이야기 …^^

yamoo 2025-08-05 18:35   좋아요 0 | URL
와우! 엣지나인님두 갖고 계시군요!! 여기 명문장이 얼마나 있는지는 저는 전혀 모릅니다. 예~ 전혀 몰라요...ㅎㅎ
야~~ 명문장을 만나는 재미에 이 책을 못버린다니, 엣지나인 님은 영어를 잘하셨군요!
저는 1학년 가을 토플 아침 수업 때 have가 동사냐구 물었습니다...ㅎㅎ 강사가 할 말을 잃더라구요..ㅋㅋ

transient-guest 2025-08-08 01: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라의 근간인 국어와 국사, 더해서 수학을 기본으로 잡고 과학, 세계사, 정치, 경제 등에 주안점을 두고 언어는 아무리 영어가 국제공용어라고 해도 다른 외국어와 동일하게 취급해서 교과과정과 점수에 반영하도록 해야 하는데 광복 이후 지금까지도 미국의 영향력이 크다 보니 이런 기형적인 교육이 되어 버린 것 같아요. 영어 말고도 사실 스페인어나 중국어를 잘해도 그 쓰임이 엄청난데 말이죠. 전 지금도 문법은 꽝이랍니다.ㅎㅎ 다행이 문법보다는 컨텐츠가 중요한 것이 제가 하는 분야의 일이라서 그리고 요즘은 tool도 좋아져서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ㅎ

yamoo 2025-08-11 10:44   좋아요 1 | URL
트랜스 님의 의견에 격하게 동의합니다. 영어는 하나의 언어일 뿐인데, 일본어 중국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펭인어 등 타 외국어에 비해 엄청나게 특화된 과목이라 생각합니다. 단위수를 줄이고 한국사와 세계사를 역사과목으로 통합하여 과학과목과 함께 이수 단위를 늘리고 중점과목화 시켜야 앞으로의 시대에 부합하는 인재 양성 기본 교육이 될 듯합니다. 현재 외국어로서 영어 과목은 너무 기형적이라 생각됩니다.

트랜스 님두 문법은 꽝이시군요!ㅎㅎ 미국서 생활하며 영어를 비즈니스로 사용해도 문법은 어렵긴 마찬가진가 봅니다..^^

transient-guest 2025-08-11 14:37   좋아요 1 | URL
제가 공부가 젤 어려웠던 사람이라서 ㅎㅎ 궁금하긴 한데 문법을 다시 공부해야만 하는 이유를 못 찾고 있습니다 ㅋㅋ

yamoo 2025-08-11 17:36   좋아요 1 | URL
수험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문법을 공부하기는 정말 쉽지 않죠. 한국어 문법은 영어 문법과 비교해 체계가 없고 예외가 너무 많아 규정집이 무색할 정도입니다. 한국어 문법은 몰라도 살아가는데 하등 문제될 게 없는데, 자기가 번역을 한다거나 작가가 되기 위해 글을 쓴다면 문법 공부는 필수입니다. 근데 인문 사회 번역가 중에서 한국어 문법 공부한 사람 거의 못봤네요. 공부하면 그런 번역 문장이 나올 수 없거든요. 헌데 한국어 문법을 공부한다는 건 보통의 결심 갖고는 안됩니다. 공부하기 제일 짜증나는 분야거든요. 거의 다 아는 것 같은 내용을 다시 공부한다는 게 영 내키지 않아서 입니다...ㅋㅋ 막상 공부하면 죄다 몰랐거나 자기가 틀리게 쓰고 있다는 거..ㅎㅎ
 

우연찮게 예스24 중고서점에서 건진 책 가운데 걸출한 책이 있어 간략하게나마 소개해 본다.




<마음과 철학>(서양편 하). 이게 철학사 책인줄 읽어 보고 알았다. 다만 한 사람의 저자가 쓴 책이 아니라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가 엮어낸 일종의 철학자별 논문집인데 그게 플라톤부터 시작해서 데이비드 차머스까지다. 주제는 마음의 본성에 대한 탐구. 즉 색다른 세계 심리철학사라고 봐도 무방하겠다.


나는 고중세 철학 보다는 근대나 현대 철학에 관심이 많기에 하편부터 읽었다. 하편은 니체부터 시작한다. 여기에는 철학사에서 누누히 보아온 현대철학자들이 줄줄이 나열된다. 근데 다른 현대철학자들을 다룬 철학사와는 좀 결이 다르다.


프로이트, 라캉, 데이비슨, 설, 데넷, 차머스 등은 다른 철학사 책에는 거의 볼 수 없는 철학자들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은 정식분석학자들인데 여기 포함된 이유가 이 책이 마음(심신)에 대한 철학사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당당히 재미철학자 김재권이 한 챕터를 장식하고 있다. 물론 서울대 철학사상연구소 소장학자들이 엮어낸 책이기에, 그리고 심리철학 분야이기에 김재권이 중요 철학자로 선택된 듯도하다. 하지만 데이비슨이 한 장을 차지하고 있기에 김재권이 들어가는 건 당연한 순으로 보인다.


그 이유는 부수현상론 시비에 대한 김재권과 데이비슨 간의 논쟁때문이다. 수반이론을 여기서는 부수현상론이라고 하는 듯한데, 어쨌든 김재권이 데이비슨의 무법칙적 일원론이라는 주장(정신 속성을 인과적으로 무력하게 하는 부수현상론)을 반박하고, 이를 데이비슨이 재반박한 논문으로 학계에서 유명해진 논쟁이다.


그러니 심신문제에서 데이비슨을 선택한다면 김재권은 반드시 검토해 보아야할 철학자인 것. 김재권은 미국 현대철학사 그것도 심리철학 분야에서 매우 탁월한 업적을 쌓은 미국철학자이다. 그래서 어찌보면 여기 포함되는 게 당연한 듯하다. 문제는 그가 한국철학자가 아니라 미국철학자라는 사실이기에 그 부분에서는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름 자체가 쟁쟁한 서구권 학자들과 동일선상에서 다루어진다는 것이 신선하다 할 것이다.


여러 소장학자들이 참여해서 쓴 철학사여서 체계가 없을 듯하지만 마음의 문제로 한정해서 집필된 책이기에 심리철학 역사에 훌륭한 가이드라인 역할을 하고 있다. 어떤 논제로 마음의 문제가 철학사의 주요 화두가 됐는지 읽어보면 체계적으로 알 수 있을 정도. 특히나 각장 말미에 붙어 있는 '더 읽을 거리'의 서지 정보는 정말 좋다. 관련 분야의 핵심 추천 리스트 역할을 하기에.


개인적으로 한국철학사상연구소에서 펴낸 책들을 신뢰하는 편이다. 책을 읽어보면 각 분야에서 열심히 연구하는 학자들이라는 인상이 짙다. 밀도가 높으면서도 어렵지 않고 풍부한 서지 정보를 알려주는 책은 많지 않은데 서울대 철학연구소가 펴낸 책들은 대부분 이를 충족하고도 남는다.








본 책 <마음과 철학>(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8)은 그 중에서도 아주 잘 엮어낸 철학자들의 편집판. 관심있는 분들이 일독하셨으면 좋겠다. 고전적인 심신문제의 논의가 어떻게 현대철학으로 연결되어 심화되는지 그 발달 과정을 따라가 보는 것은 색다른 경험이 될 것이라 사료된다. 마음을 바라보는 개념틀을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아닐까?



우리는 과연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마음의 본성에 대한 수수께끼가 풀릴 것이라는 기대감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지만 심리 현상에 대한 자연과학적 탐구의 성과는 아직 빈약하기만 하다. 그렇다면 어쩌면 지금 필요한 것은 더 정교한 수학적 모형이나 과학적 실험이 아니라 마음을 바라보는 ‘근본적으로 새로운 철학적 개념틀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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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5-08-02 20: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웬만해서 책 좋다고 말씀하시지 않는 야무님께서 이리 말씀하시니 마음이 가네요.
읽을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찜해놓겠습니다. ㅋ

yamoo 2025-08-04 10:16   좋아요 2 | URL
이 책 별로 어렵지도 않고 논점 파학하기도 좋아요. 철학사 책 치고는 평이합니다. 물론 핵심 개념들은 어렵긴한데, 철학자 소개와 그들이 중요하게 펼친 이론들을 주마간산하기는 아주 좋습니다.

카스피 2025-08-03 01: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여러 종류의 책들 중에서 철학사 책들이 가장 읽기 어려운 것 같아요^^;;;

yamoo 2025-08-04 10:43   좋아요 0 | URL
철학사 책들이 무척 두껍기 때문일거에요. 그리고 철학자별로 또는 시대별로 이론들을 주제에 맞게 시대순으로 정리한 책이라 어렵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몽골이 온다
이승재 지음 / 디자인21 / 2025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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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하지는 않지만 어떻게 알게 된 청년 지인이 하나 있다. 대학 졸업하고 3년째 집에서 놀고 있다. 취업 하려고 하지도 않고 알바로 하루하루 생활하고 있다. 왜 취업하려 하지 않냐고 조심스럽게 묻자, 기업에서 뽑지도 않고 알바로 충분히 벌어 별로 취업 생각이 없다는 거다. 그리고 덧붙이는 말이 해외 취업은 생각해 보고 있는데 정보가 부족하단다.

 

2천 명 3천 명 뽑던 대기업 공채의 시절도 다 옛날이 됐다. 요즘은 기업에서 필요한 인력을 수시로 모집한다고 한다. 그러니 생초보 신입은 기회가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더군다나 인문계 출신이면 취업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 싶다.

 

그 청년 친구에게 당시 해 줄 적당한 조업은 없었는데, 최근 우연히 한 권의 책을 읽고 그 친구 생각이 나서 리뷰로 남겨 놓는다. 우리나라 청년 실업이 매우 높다고 하는데, 해외로 눈을 돌리면 그나마 조금 기회를 잡을 수 있지 않나 해서.

 

내가 거의 읽지 않는 분야가 자게서와 취업 분야인데, 어찌 어찌 해서 읽게 된 책이 <몽골이 온다>(2025, 디자인21)이다. 몇 년 전 몽골 여행을 갔다 온 적이 있기에 최근에 몽골에 대한 안내서가 나왔다길래 구입했다. 첨엔 여행 안내서인 줄 알았는데, 취업 안내서였다. 어쨌거나 몽골에 대한 책은 시중에 거의 없는 와중에 얄팍한 책이라 읽어보기로 했다.

 

나름 따끈한 신간이다. 분량이 많지 않아 하루면 다 읽을 수 있고, 중복된 내용이 많아 필요한 목적(취업)이 있는 분이라면 금방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산업인력공단 해외 취업 분야에서 나름 이력을 쌓아온 전문가다. 일종의 공적 헤드헌터 비슷한 부류라는 느낌.

 

저자는 두바이에서 성공적인 해외 취업 경력을 바탕으로 몽골에서도 많은 몽골 기업인들을 만나 몽골인들의 우리나라 취업과 우리나라 사람들의 몽골 취업을 도왔나 보다. 그래서 몽골 파견 시기에 관련 분야의 석사 논문을 썼고, 본 책의 출간으로 이어졌단다.

 

이 책의 목적은 우리나라 청년들이 몽골에 더 많이 취업하기 위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이다. 혹자는 그럴 것이다. 선진국에 취업해야지 몽골같은 중진국에 누가 취업을 하려고 할까. 연봉도 우리나라보다 훨씬 적고 생활 환경도 열악한 곳에서 무슨 취업 안내냐고 의문이 들 법도 하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그랬다. 하지만 몽골 여행을 갔다가 온 후로,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우리나라 서울 양천구와 비교해서 절대 낙후된 지역이 아니었다. 우리나라 지방 소도시보다 훨씬 발달해 있다. 몽골이 중진국이지만 생활 수준은 그렇게 낙후되어 있지 않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의외로 한국 청년들이 몽골에 취업할 수 있는 곳이 꽤 있다. 하지만 정보의 부재로 몽골이라는 나라는 우리 청년들의 해외 취업 대상에서 완전히 제외되어 있다. “몽골 취업 시 장애 요인으로 A씨는 몽골 채용에 대한 정보 부재가 제일 어려운 점(p125)”이라고 꼽았다.

 

그래서 저자는 몽골 채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면 몽골에 대한 취업이 지금 보다는 훨씬 용이하겠다는 판단하에 이 책을 집필했다. 지금까지 몽골에 대한 취업 정보 안내서는 전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나라에서 몽골은 중진국 또는 후진국이라는 인식이 강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몽골 경제가 회복하고, 한국 기업이 진출이 활성화되는 지금, 몽골로의 한국 청년 진출 전략을 모색할 필요성이 요구된다. (p110)” 저자의 말이다. 몽골은 현재 코로나 이후 매년 6% 정도 경제성장률을 보이고 있기에 몽골에 대한 취업정보가 제공된다면 몽골 취업 기회는 넓어질 수 있다는 목표하에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한 것으로 보인다.

 

한 예로 몽골의 타왕복도라는 그룹이 있다. 몽골 최대 기업 중 하나라고 한다. “대표와 면담 이후 월드잡 플러스에 마케팅 책임자, MD, 건설 기술자 등 다양한 직종의 일자리를 올렸다. 급여는 마케팅 책임자의 경우 연봉 1억원 이상, MD 6천만 원 이상 이었고 직종에 따라 비즈니스 왕복 항공권 및 숙소도 제공되었다.” (p139)

 

이 정도 취업자리면 꽤나 괜찮은 조건인 듯하다. 어쨌거나 본 책은 우리나라 청년들이 몽골이라는 나라에도 양질의 일자리가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최초의 취업 안내 책자이다. 분량도 적고(175쪽 밖에 안된다!) 중복되는 내용이 많아 하루면 다 읽을 수 있다. 문송해서 죄송하다는 인문계 출신이면 한 번쯤 들여다볼 만한 책이다. ()

 

 

하나 건너 알게 된 그 청년에게 도움이 되는 정보였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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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은빛 2025-07-28 12:4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25년 전에 몽골에 다녀온 후로, 언젠가 또 다녀올 기회가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젠 거의 포기 상태예요.
여행이 아닌 취업이라면? 이란 생각이 아주 잠시 들었지만,
이 나이 많은 아저씨를 누가 채용할까 하는 마음에 그저 웃고 갑니다. ㅎㅎㅎㅎ

yamoo 2025-07-28 22:39   좋아요 0 | URL
음....몽골 여행 기회는 있을지도 몰라요. 아직은 포기하시기 아릅니다요..ㅎㅎ
앞으로 어떻게될 지 인생은 모르은 거니까요.^^

취업에서 나이가 제일 걸림돌이긴합니다. 근데 기술이 있으면 나아는 어느 정도 상쇄되는듯해요.
어쨌든 해외취업도 나이는 좀 거시기 합니다만 체념하지는 말자구요..우리!ㅎㅎ

카스피 2025-07-28 23: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전에 일본에서 취업하신 분이 만일 당신의 경쟁력이 한국에서 7이상 이라면 한국에서 취업하고 출세하는 것이 좋겠지만 3~4정도라면 일본에서 취업하면서 생활하는 것도 무방하다고 하더군요.월급이 한국 대기업보다 못하지만 일본인의 은근한 인종차별을 견딜수 있는 멘탈이라면 소비수준이 생각보다 낮아서 그냥저냥 먹고 살만하다고 합니다.단 이 경우 한국에 다시 돌아오는 것보다 일본에 그냥 쭈욱 사는 것을 추천한다고 하네요.
실제 몽골에서 취업을 했을 경우 나중에 사업 아이템을 미리 알아 볼수 있으니 한국에서의 취업에 연연하며서 시간을 낭비하기 보다는 과감히 해외 취업으로 눈을 돌리는 것도 좋은 방법인것 같습니다.

yamoo 2025-07-29 13:51   좋아요 0 | URL
요즘들어선 일본의 월급이 한국보다 적어 일본에 취업하는 한국사람들이 꽤 있는 듯합니다. 근데 실수령액을 보면 170만원 정도 되더군요. 물론 대기업은 아니지만 꽤 유명한 중소강 기업인데도 월급이 생각보다 많이 적더군요. 그럴 바에야 몽골이 낫지 않나 생각합니다. 몽골에서는 차별같은게 없다는데 말이죠.
저도 과감성이 있으면 몽골 취업도 괜찮다고 봅니다. 일본보다 좋은 조건의 일자리가 있는데 정보 부족으로 가지 못하는게 좀 안타깝다랄까요..^^;;
 
자유론 고전의 세계 리커버
존 스튜어트 밀 지음, 김만권 옮김 / 책세상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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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의 <자유론>은 아주 오래전에 읽었던 책이다. 홍신문화사 판본으로. 너무 오래돼서 무슨 내용인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윤석열 정권 내내 유시민이 토론이나 유튜브에서 한 발언들로부터 얼추 기억을 되살리기도 했다.

 

그래서 그런지 <자유론>을 꼭 한 번 더 정독해 보고 싶었다. 집에서 계속 굴러다니던 책세상 문고본(2006년판) 때문이기도 했다. 헌책방에서 1천 원에 팔기에 오래전에 구입한 건데, 스프링 제본을 했기에 책 취급을 안 했더랬다. (근데 갖고 다니면서 읽기는 편하다!)

 

눈에 밟히는 책이라 들고 읽기 시작했다. 유시민이 자기 인생에서 지대하게 영향을 끼쳤던 책 중 한 권이라고 해서 확인도 해볼 겸. 그런데 잘 읽히지 않는 거다. 출퇴근 이동 중에만 읽어서 그런 거 같아, 도서관 가서도 읽어 봤지만 매한가지. 결론은 번역 때문이었다.

 

<자유론>(책세상, 2006) 번역은 진짜 가독성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역자는 서병훈. 이 사람은 번역기 돌린 문장을 양산하지는 않지만 알아먹기 힘들게 문장을 구성하는 습관이 있는 듯하다. 예컨대 다음과 같은 문장.사람의 행동에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의 평판을 떨어뜨리고 좌절시키는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보다 더 나쁜 것을 동원하는 것이다.” (p155)

 

전형적인 비문(非文)인데 이걸 처음 발견하기는 쉽지 않다. 3~4번 같은 챕터를 반복해서 읽으면 왜 가독성이 떨어지는지 파악되는 문장. 한길사의 <의미의 논리>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래도 평균적인 독자가 읽기에는 매우 어려운 판본이 됐다. 더 이상 서병훈 역자의 책이 나오지 않아 다행이다.

 

어쨌건 처음 읽을 때는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매우 힘들었는데, 4번 정독하니 책이 말하는 바가 명확했다. 밀의 주장은 매우 단순하다. 하지만 처음 주장이 계속 표현을 달리하며 외연을 확장한다. 주장에 대한 다양한 예시와 논거를 읽는 것도 <자유론>을 재미있게 읽는 한 방편일 듯.

 

머리말에 밀이 이 책을 쓴 이유가 적시되어 있다.

이 책은 시민의 자유 또는 사회적 자유를 중심 주제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 나는 이 책에서 사회가 개인을 상대로 정당하게 행사할 수 있는 권력의 성질과 그 한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p17)

 

밀이 살던 19세기까지 이 문제는 그다지 논의되지 않았나 보다. 이를 둘러싼 토론도 거의 없었다는 밀의 전언대로, 이 논의는 당시 영국에서 최초로 제기된 이었다. 물론 17세기에 존 밀턴이 사상의 자유에 대해서 언급을 했지만(밀은 밀턴의 사상을 수용한다.) 이를 사회적 차원에서 다루면서 그 한계를 고찰한 학자는 밀이 처음이었다. (물론 영국에서)

 

밀이 <자유론>에서 설파하는 핵심은(책을 쓴 이유) 책의 4장에 소개되어 있다. 4장의 타이틀이 사회가 개인에 대해 행사할 수 있는 권한의 한계. 밀은 개인의 자유만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가 주장하는 개별성은 항상 사회가 전제되어 있다. 이를 놓치면 이 책을 잘못 이해하게 된다.

 

밀은 기본적으로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대전제를 깔고 논의를 시작한다. 책에서 밀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는 존재라고 반복적으로 말한다. 더욱이 무너져 내릴 다리(다리 후반부부터)를 건너려고 하는 어떤 사람에게 그 사람의 통행의 자유(개별성)보다는 생명이 훨씬 중요하기에 개별성은 충분히 제한되어야 한다고. 이 주장은 맹자의 성선설에 닿아 있다.

 

그만큼 밀도 사람의 본성을 선하게 봤다. 그래서 개인의 생명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가치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개별성은 사회 안에서 최대한 보장되어야 하지만, 사회성의 가치가 커지면 개별성은 위축될 수밖에 없다. 밀이 3장에서 개별성이 왜 중요한지 역설하게 된 지점이다.

 

4장의 핵심 주장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초반부에 제시되어 있다.

법으로 부여받은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않는다 하더라도, 타인에게 해를 주거나 그들의 이익과 상관있는 문제에 대해 사려 깊은 고려를 하지 않는 경우, 사회가 직접 법을 동원하지는 않더라도 여론의 힘을 빌려 그런 행동에 대해 정당하게 처벌할 수 있을 것이다.” (p142)

 

한 마디로 다른 사람의 권리를 직접 침해하지 않으면 개인의 자유(개별성)는 절대적으로 보장되어야 한다는 거. 그런데 이는 머리말에서 이미 밀이 제시한 주장이고, 2장에서도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도 비슷한 주장을 하고 있다. 장을 나누고 여러 논거를 제시하고 있지만 핵심 주장은 매우 일관된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개인이든 집단이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될 수 없다.”(p30)

 

이 주장은 4장의 핵심 주장으로 인용한 문장과 대동소이하다. 그리고 이는 2장에서 주장하고 있는 핵심 내용과도 상통한다. 42쪽에 언급 되어있는 내용은 이 책에서 가장 중요하고 밀이 여느 공리주의자하고도 다른 차별적 지점을 담보한 주장이다.

 

전체 인류 가운데 단 한 사람이 다른 생각을 갖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은 옳지 못하다. 이것은 어떤 한 사람이 자기와 생각이 다르다고 나머지 사람 전부에게 침묵을 강요하는 일만큼이나 용납될 수 없는 것이다.” (p42)

 

2장의 모든 내용은 이 주장의 논거이자 예시이다. 존 밀턴의 사상의 자유를 발전시켜 밀의 자유론을 정립한 기념비적인 주장이다. 그 이유는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주장을 곡해할 여지가 많은지 밀은 이를 방어할 논거와 예시를 풍부하게 들고 있는데 그게 2장의 내용이다.

 

물론 2장은 4장의 전제이다. 생각과 토론의 자유가 없으면 개별성은 담보하지 못한다. 2장 역시 3장 개별성을 위한 전제다. 전제로부터 결론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을 관통하는 주장은 2장의 저 위대한 주장이고, 이는 장을 달리하면서 변주된다.

 

나는 어느 사회든지 다른 사회를 강제로 문명화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악법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스스로 도움을 청하지 않는 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살면서 그들과 직접적인 관계도 없는 사람들이 자기들 눈에 불미스러운 일이라는 이유로, 당사자들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는 제도를 폐기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p170)

 

밀은 계속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개별성과 그 한계를 강조하고 있다. 이 한계 중 특히 인간의 자유와 발전에 심대한 타격을 주는 해악들이 발생하면 정부가 개입해야 한단다. 그런데 정부의 이런 개입 활동은 집단적이고 권력 집중을 발생하게 하여 폐해가 발생하게 된다.

 

밀은 이 폐해를 최대한 적게 하면서 인간의 자유를 저해하는 해악들을 어떤 방법으로 없애야 효율적인지 검토한다. 이게 5장의 내용이자 이 책의 목적이다. 밀은 그가 참여했던 정치적 경험을 토대로 정부의 역할을 제시한다. 이 또한 정치인들이 다루기 가장 어렵고 복잡한 문제라고 진단한다.

 

나는 안전한 실천 원리 실현 가능한 이상, 난관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된 모든 제도를 검증하는 기준이 다음과 같은 명제 속에 정리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효율성을 지키면서 최대한 권력을 분산하라, 그러나 정보는 가능한 중앙으로 집중시킨 뒤 그곳에서 분산시켜라.” (p207)

 

요컨대 밀은 개인의 개별성을 강조하면서도 사회성도 아울러 강조하고 있다. 사회성이 강화되는 것을 경계하면서 밀은 정부가 개별성과 사회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원리를 제시하고 있다. 그 요체란 제도는 분산시키고(지방자치) 정보는 중앙집중화하는 것. 당시 시대상을 고려할 때 이는 아주 혁신적인 정책인 듯하다.

 

물론 장점만 있는 책은 아니다. 밀 자체가 초엘리트 교육을 받은 학자 집에서 자란 사람이라 엘리트주의적 인식이 지배적이다. ‘미성년자나 미개사회는 자유를 누릴 권리가 없다.’ 라거나 사회적 약자는 결혼을 하면 안된다.’는 주장을 서슴없이 하는 걸 보면 그렇다는 결론. 아울러 공리주의자(효율을 중시한다)라서 공리주의의 근본적 한계점을 벗어날 수 없다는 점도 덧붙일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론>은 지금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레거시 미디어와 가자짜 뉴스가 판치는 작금의 시대에 충분히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특히 언론 개혁이 심대하게 요청되는 시기에 밀의 언론과 표현의 자유에 대한 생각은 경청할 만하다 하겠다. ()

 


내가 읽은 판본은 2006년에 발간한 책세상 문고 고전의 세계 시리즈다. 이 시리즈가 절판되고 새로운 시리즈로 옷을 갈아입었고, 일부 역자가 바뀌어서 새롭게 나오고 있다. 책세상본으로 지금 구매할 수 있는 책은 김만권 역이다. 어쩔 수 없이 이 책으로 리뷰를 올리지만 읽은 책은 구판이기에 여기 덧붙여 놓는다. 김만권 번역도 가독성이 떨어지기는 매한가지라 개인적으로는 현대지성판을 추천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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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ient-guest 2025-07-25 10: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읽어보려고 합니다만 이런 류의 책은 읽으면 머리는 이해하고 눈은 책을 따라가지만 마음에서 깊은 분석에 따른 심도있는 공부는 어렵더라구요. 민음사판 ‘문학이란 무엇인가‘가 세계문학전집 아홉번째라서 붙잡고 있는데 좀처럼 진도가 나가지 않고 있는 이유입니다

yamoo 2025-07-25 14:40   좋아요 1 | URL
음...민음사 문학이란 무엇인가..는 사르트르 저작이기에 읽기 쉽지 않았을 겁니다. 하지만 이 <자유론>은 현대지성사에서 나온 걸로 읽으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일반적으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 살아온 사람이라면 공감하면서 읽어나갈 수 있는 내용이 아주 많습니다. 예시도 풍부합니다. 철학서라기 보다는 사회사상쪽이라 그리 어렵지 않아요. 유시민 작가가 최고라고 치는 책이니 읽독해보셔도 될 듯합니다!^^

카스피 2025-07-25 11: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자유론 고전이란 솔직히 읽어볼 염두를 못냈는데 야무님 글을 읽어보니 한번 쯤 읽어봐야 될 명작이란 생각이 듭니다^^

yamoo 2025-07-25 14:41   좋아요 0 | URL
자유론이 고전이긴 하지요. 사상사 쪽 고전 치고는 읽기 수월합니다. 군주론보단 약간 정치한 면이 없지 않지만 현대지성사 본으로 읽으면 읽는데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사료됩니다!
 


8.10. ~ 16. 

이 기간이 올 해 내 개인전 전시 일정이다.

새롭게 구상하여 세상에 선 보이는 내 조형 언어 발표장.

진짜 우리나라에는 한 해에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전시회가 쏟아진다. 


아트페어나 미술관 전시회도 상당하지만 개인전 회수까지 합치면 진짜 어마어마하다. 미술품 시장 수요는 선진국 대비 진짜 미미한데, 전시 회수는 상상을 초월한다.


나도 거기 일조하는 거 같아 좀 거시기한 느낌이 강하다. 정말 전시 공해라고 불러도 될 듯하다. 어느 누군가에게는 내 전시도 별반 다를 게 없을 지도 모르겠다. 아니 맞다. 


그치만 작가라면 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준비할 것도 많고 돈도 소소하게 많이 드는데, 이걸 매해 몇 번씩 하는 작가들은 도대체 뭔가, 하는 생각이 들곤한다. 이런 짓을 해야하는 게 작가의 숙명이라면 정말 끔찍하다.


작품 발표는 해야하고 시간과 돈이 투여되고 노가다가 동반되지만 남는 게 도록 하나뿐이라는 사실이 정말 아이러니 하다. 당분간은 개인전을 하고 싶지 않다. 정말 힘들고 돈이 정말 많이 든다. 초대전임에도 불구하고 이러니, 대관이라면 상상도 하기 싫다.


어쨌거나 위 날짜에 내 전시회는 개최된다. 전시 전체로 놓고 본다면 소모성 전시에 불과하다. 하지만 내 개인적 차원에서는 의미 있는 행사라서 여기 올려 놓는다. 관심 있는 분들은(누가 관심이 있을까마는) 와 보셔도 좋을 듯하다. 주위에 갤러리들과 전시는 넘치니 헛걸음은 아닐 수 있겠다.



최근에 개인전 때문에 책 읽을 시간이 별로 없었는데, 유일하게 읽었던 책이 <자유론>이다. 번역 때문에 읽으면서 매우 빡쳤는데, 그래도 의미 있는 독서였고, 읽을 가치가 충분한 책이다. 나는 예전 책세상 문고본(서병훈 역)으로 읽었는데 새롭게 나온 책세상본도 가독성이 떨어지긴 매한가지. 가독성이 가장 좋은 건 현대지성에서 나온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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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5-07-21 10: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야무님 진심으로 전시 축하드려요^^

yamoo 2025-07-21 13:00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카스피님^^

그레이스 2025-07-21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포스터 이미지 야무님 작품인가요?
넘 멋있어요~
축하드려요~♡

yamoo 2025-07-21 13:02   좋아요 2 | URL
네...제 대표작으로 해서 플래카드에 넣었어요. 개인적으로 대표작 따로 마련해 둔 게 있는데, 갤러리 대표가 저 두 작품으로 가자고 해서뤼...^^
멋있다고 해 주시니 힘이 납니다!
감사합니다, 파이팅 해야 겠으요~~

hnine 2025-07-21 13: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멋지십니다! 부럽습니다!

yamoo 2025-07-22 09:48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엣지나인님!
저도 타인에게 부러움의 대상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합니다!^^

페넬로페 2025-07-21 14: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전, 축하드립니다.

yamoo 2025-07-21 19:52   좋아요 2 | URL
고맙습니다, 페널로페님!!

잉크냄새 2025-07-21 2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축하드려요.

yamoo 2025-07-22 09:46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 2025-07-22 09: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인전, 축하드려요^^
멋지고 대단해요!

yamoo 2025-07-22 09:47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자목련님!

페크pek0501 2025-07-22 12:2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진심을 담아 개인전 축하합니다!!! 화가다운 행보를 계속하시는 것, 좋아 보입니다.
자유론은 유시민 작가가 꽤 예찬했던 것 같아요. 저는 읽다 말았는데 완독할 책 리스트에 들어 있죠.
저도 책세상문고로 가지고 있는데 -이 책도 254쪽이죠.- 현대지성으로 사야 하나 고민 중입니다.^^
다시 한 번 개인전을 축하축하!!!

yamoo 2025-07-22 14:18   좋아요 0 | URL
페크님, 감사합니다!

유시민 작가가 근래 말하는 모든 게 다 자유론에 들어있더라구요. 그 자신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확인차 읽었던 건데, 정말 유시민은 이 책에 근거해서 사이비 뉴스와 레거시 뉴스를 비판했던 거..
저도 오래전에 읽어서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아 다시 정독했더랬습니다. 책세상 문고본보다는 현대지성본이 훨씬 가독성이 좋아보입니다!

cyrus 2025-07-25 06:5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축하합니다. 광복절에 서울에 가게 되면 그림 보러 가겠습니다. ^^

yamoo 2025-07-25 09:17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 사이러스님^^

근데 사이러스님은 매해 광복절마다 서울 오시는 듯...착각이면 착각일 수 있지만서두..^^;;

transient-guest 2025-07-25 10:2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전까지!! 점점 더 전업작가의 길로 가시는군요.ㅎㅎ

yamoo 2025-07-25 14:41   좋아요 1 | URL
하다보니 그렇게 되는 듯합니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