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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적이지 않은 독자
앨런 베넷 지음, 조동섭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7월
평점 :
지난 9월, 재미있는 책만 골라 읽는다는 지인으로부터 한 권의 책을 추천받았다. 앨런 베넷의 <일반적인지 않은 독자>(문학동네, 2010). 저자도 몰랐고, 책은 143쪽밖에 되지 않는 얇은 책이었다. 표지 그림도 마음에 들지 않고, 중간중간 삽화도 있는데, 문고판(인디북)인 <톨스토이 단편집>에 나오는 삽화와 비슷했다.
책에 대한 첫인상은 ‘드럽게 재미없게 생겼다’, ‘청소년 소설’ 등과 같은 느낌이었다. 책 표지가 한몫 단단히 했다. 읽을까 말까 주저한 게 사실. 하지만 추천인이 문학을 전공했고, 나름 재밌는 소설만 찾아 읽는 이라 부정적인 인상을 걷어 내고 읽어 보기로 했다. 정말 모험에 가까웠다.
그래서 그럴까 첫 10여 페이지를 읽는데 책을 덮고 싶은 충동이 마구 드는 거다. 재미가 없을 거 같고 흡입력도 별로고, 많이 밋밋했다. 그래도 5페이지에 첫 등장하는 삽화가 있어 계속 읽기로 했다. 페이지를 넘길수록 번역이 거슬리긴 했지만, 이야기 속에 슬며시 스며들었다. 책에 관한 책을 소설로 읽으니 색다른 재미가 있었다.
이 책은 한 마디로 ‘책 읽기에 대한 우화’다. 처음 책을 읽는 사람이 책에 빠져 독서왕이 되는 과정을 플롯에 오롯이 담고 있기 때문. 처음 책을 읽기 시작할 때 들었던 의문들과 책 속에 소개되는 책을 찾아 읽는 과정은 독서 이력이 어느 정도 있는 독자들에게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좋아하는 작가 리스트를 작성하고 모으고 읽는 과정은 공감할 수밖에 없다.
본 소설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책덕후 노먼이 추천해 주는 책을 읽어나가며 보여주는 일련의 행위들은 우리가 책에 빠져 지내온 지난날의 행태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시절 한창 읽어나가던 우리의 한때를 발견하고, 공감의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다. 여왕이 읽어가는 책 리스트를 보면서 내가 읽었던 책을 발견하는 일은 그래서 재밌다.
책을 덮고 보니, 본 소설은 독서 덕후들을 위한 책이다. 지금 막 독서에 재미를 붙인 사람들에게는 여왕에 감정이입이 제대로 될 수 있고, 어느 정도 독서 이력이 붙는 이들에게는 과거의 지점들이 생각나 고개를 주억거리고 은근한 미소를 띨 수 있게 한다. 책에 관한 책을 재미있는 우화로도 읽을 수 있다니, 근사한 경험이 아닐 수 없다.
여기에 더해 작가는 책을 읽지 않는 다수의 사람들을 여왕과 대비시켜 여왕의 독서를 방해하는 인물들로 설정했다. 총리는 말할 것도 없고 각국 정치가들과 각료 그리고 비서실장 및 여왕 주변의 시중드는 메이드까지 여왕이 책을 읽는 것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총리는 여왕을 책의 세계로 인도한 노먼을 왕실에서 내쫓기까지 한다. (대학 학위를 핑계로)
이 상황이 매우 재밌는 게,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은 책 읽는 사람들을 싫어한다는 경향이 있어서다. 우리 가족만 봐도 어머니는 젊었을 때부터 책을 좋아했다. 헌데 아버지는 책하고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래서 어머니가 책을 보면 책을 빼앗곤 했다. 책을 읽으면 못 읽게 방해하기까지 했다. 이런 기억이 있으니 소설 속 여왕의 독서를 방해하는 사람들로부터 아버지가 생각나 웃음이 났다.
여기서 한 가지, 이 책이 갖고 있는 미덕 하나를 부가할까 한다. 책 타이틀이 본 작품을 일반적이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이 책의 원제는 <The Uncommon reader>이다. ‘common’에는 영국에서 왕족이 아닌 평민이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으므로 ‘uncommon’은 그와 반대되는 의미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론 ‘common reader’의 의미 중 하나가 즐거움을 위해 책을 읽는 사람을 가리키기도 하니, ‘Uncommon’은 그 반대의 뜻으로도 볼 수 있겠다. 책에서 여왕은 처음에 책 읽는 즐거움에 빠져 책을 찾았다. 그러다가 책을 점점 많이 읽게 되면서 여왕은 자신의 독서 철학을 나타내게 된다. 즐거움이 아닌 궁금증을 해소하고 자신의 신념을 확인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고.
“책은 행동을 촉발하지 않습니다. 책은 대개 자신이 이미 하기로 마음먹은 바를, 어쩌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하기로 마음먹는 바를 확신시키기만 하죠. 우리는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려고 책을 찾습니다. 말하자면 책은 책으로 끝나는 겁니다.“ (p131)
어쨌거나 책의 타이틀은 매우 중의적이다. ‘일반적이지 않은 독자’는 본 소설에서 여왕을 말하는 것으로, 영국에서 엘리자베스 2세는 특별한 존재다. 그래서 인간이되 비인간적 특권을 가진 인물로 본문에 표현된다.
“앤서니 파월은 작가라고 해서 인간답게 행동하지 않을 특권이 부여된 것은 아니라고 언급했다. 그러나 여왕에게는 그러한 특권이 주어진다. 나는 항상 인간처럼 보여야 하지만, 인간이 되어야 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pp85-86)
이런 비인간적 특권을 행사하는, 인간이되 인간이 아닌 존재가 독서 덕후인 노먼을 만나 일반적인 책 읽기의 세계로 들어가 일반적인 독서 행태를 보이는 과정이 이 책의 줄거리다. 책을 읽으면서 특권화된 여왕이 점점 그런 의식이 엷어지며 자신이 이전에는 미처 볼 수 없었던 인간적인 부분을 인식하며 시나브로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뭔가 주장하지 않아도 독자에게 독서의 진정한 힘을 발견하게 하는 게 소설에서 말하는 Showing의 힘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아울러 나는 여왕의 독서에 대한 입장(p131 인용문)에 동의하지 않는다. 책은 행동을 촉발한다. 책으로부터 영감을 받고 인생이 달라졌다고 말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물론 자신의 신념을 뒷받침하기 위해 책을 찾아 읽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책은 책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책을 읽는 궁극적인 목적은 나의 삶이 변하기 위해서다. 책이 책으로 끝나는 것이라면 허망한 것이다. 삶과 유리된 독서는 가치가 없는 게 아닐까. (끝)